히바우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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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바우두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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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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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 FIFA 월드컵 실버슈
[1]

베스트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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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99 · 199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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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3px 3px; border-radius: 2px; background: #EDA702; font-size: 0.9em;"
2002 FIFA 월드컵



2000 FIFA 올해의 선수
수상
지네딘 지단
2위
루이스 피구
3위
히바우두

1999 코파 아메리카 MVP
히바우두

FIFA 월드컵 우승 멤버



FC 바르셀로나 앰버서더
Futbol Club Barcelona Ambassador

파일:Rivaldo_Barcelona.jpg

이름
히바우두
Rivaldo
본명
히바우두 비토르 보르바 페헤이라
Rivaldo Vítor Borba Ferreira
출생
1972년 4월 19일 (51세)
브라질 페르남부쿠 주 파울리스타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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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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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
| [[스페인|

스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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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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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
186cm / 체중 78kg
직업
축구 선수 (미드필더[1], 공격수[2] / 은퇴)
주발
왼발
소속
선수
산타크루스 FC (1991~1992)
모지미링 EC (1992~1994)
SC 코린치안스 (1993~1994 / 임대)
SE 파우메이라스 (1994~1996)
데포르티보 라 코루냐 (1996~1997)
FC 바르셀로나 (1997~2002)
AC 밀란 (2002~2004)
크루제이루 EC (2004)
올림피아코스 FC (2004~2007)
AEK 아테네 FC (2007~2008)
FC 부뇨드코르 (2008~2010)
상파울루 FC (2011 / 임대)
카부스코르프 SC (2012)
AD 상카에타누 (2013)
모지미링 EC (2014~2015)
기타
FC 바르셀로나 (2016~ / 앰버서더)
국가대표
74경기 35골[3] (브라질 / 1993~2003)
정보 더 보기 [ 펼치기 · 접기 ]
가족
아들 히바우지뉴

1. 개요
2. 유년기
3. 선수 경력
4. 플레이 스타일
5. 기록
5.1. 대회 기록
5.2. 개인 수상
6. 히바우두에 대한 말, 말, 말
7. 여담
8. 같이 보기




1. 개요[편집]


브라질의 前 축구 선수. 선수 시절 주 포지션은 공격형 미드필더였지만 특별한 역할에 구애받지 않는 프리롤 공격수이기도 했다. 별명은 '악마의 왼발'.

현역 시절 바르셀로나에서 라리가 2연패를 주도하며 발롱도르FIFA 올해의 선수를 수상하는 등 클럽 경력의 전성기를 보냈고, 브라질 대표팀에서도 조국의 1999 코파 아메리카2002 월드컵 우승을 이끌었다.


2. 유년기[편집]


히바우두는 브라질 파울리스타에서 태어난다. 그는 다른 브라질 스타들처럼 빈민가에서 축구스타의 꿈을 키워나갔고 지역팀인 파울리스타의 유소년팀에서 실력을 쌓기 시작한다. 그러나 1989년 그의 아버지는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하지만 히바우두는 좌절하지 않고 꿈을 계속 이어갔고 1991년 산타크루스 FC에서 프로 데뷔를 한다.


3. 선수 경력[편집]



3.1. 클럽 경력[편집]


데뷔하자마자 26경기 16골의 미친 퍼포먼스를 보여준 그는 바로 모지미링을 거쳐 코리티안스로 간다. 또 21경기 11골을 넣은 그는 파우메이라스로 이적한다. 총 3시즌동안 97경기에서 60골을 넣으며 브라질 주리그 우승 2회와 전국리그 우승 1회를 경험했고 브라질리그를 떠난다.


3.1.1. 데포르티보 라 코루냐[편집]


그가 이적한곳은 스페인의 데포르티보였다. 데포르티보는 당시 그래도 라리가에서 꽤 먹어주는 중상위권 팀이었고 히바우두는 그에 걸맞는 활약을 했다. 그 결과 데포르티보는 리그 3위로 번쩍 뛰고 만다. 유럽 특히 스페인 내에서는 난리가 났고 모든 빅클럽들이 그를 노렸다.

물론 당시 라리가를 제패하겠다는 야망을 품고 있던 데포르티보에서는 차기 시즌을 히바우두 중심으로 구상했기 때문에 히바우두를 팔지 않겠다는 입장을 고수하였으나, 호나우두인테르로 이적시키고 호나우두의 대체자를 찾던 FC 바르셀로나가 히바우두의 바이아웃을 질렀고, 그로 인해 히바우두는 데포르티보를 떠나 바르셀로나로 이적하였다.[4]


3.1.2. FC 바르셀로나[편집]


FC 바르셀로나로 이적한 히바우두는 탄탄한 성공가도를 달린다. 바로 전 시즌에 레알 마드리드 CF에게 승점 2점차로 리그 우승을 빼앗겼기에 바르셀로나는 독기를 잔뜩 품고 있었고, 히바우두 - 파트릭 클루이베르트 - 루이스 피구로 이어지는 스리톱[5]을 형성하고 뒤에서 과르디올라가 킬패스를 쭉쭉 질러주는 공포의 스쿼드를 갖추게 된 바르셀로나는 이듬시즌 4년만에 라리가 챔피언 자리를 탈환함과 동시에 코파 델 레이에서도 우승, 한 시즌 더블을 이룬다.

그 다음시즌인 1998-99 시즌도 리그를 우승하며, 라리가 2연패와 함께 본인은 국대의 코파 아메리카에서 미친 활약과 겹치며, 트레블한 데이비드 베컴을 제치고 발롱도르FIFA 올해의 선수를 수상하게 된다.[6]


2000-01 시즌은 53경기 36골이라는 미친 기록을 찍어내지만 아쉽게 라울에게 밀려 득점 2위로 피치치는 얻지 못한다. 이 시즌에는 특히 팀의 상황이 개판(피구 레알감+팀노쇠화)이었고 메스타야에서의 발렌시아 CF와의 리그 최종전에 팀의 챔스 진출권이 걸려있었다.[7] 결과는 1:0→1:1→2:1→2:2→3:2로, 바르셀로나의 3:2 승리. 히바우두가 득점하고 루벤 바라하가 따라붙고, 또다시 히바우두가 달아나고 바라하가 추격하다 후반 89분, 히바우두가 프랑크 더부르의 롱패스를 페널티박스 밖에서 트래핑한 후 바로 바이시클 킥으로 때려넣는 경이적인 골로 극적인 해트트릭을 성공하며 홀몸으로 바르사에게 챔스 티켓을 안겨 주었다. 팀의 명운이 걸린 경기에서 너무나 압도적인 경기를 보여 주었기에 이 경기를 클럽 인생경기로 평가하는 이도 많다.

하지만 그 이후에는 루이 반 할 감독과의 불화로[8] 결국 주전스쿼드에서 점점 빠지게 되었지만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맹활약하며 브라질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당시 5골 득점+호나우두의 득점을 대부분 어시스트했는데 활약의 정도를 보면 호나우두, 올리버 칸과 함께 대회 세 손가락에 들정도였다.[9] 만 30살의 나이에 AC 밀란으로 이적한다.[10]


3.1.3. AC 밀란[편집]


히바우두는 주전자리를 차지하긴 했지만 카를로 안첼로티 감독의 전술상에 녹아들지 못했다. 당시 AC밀란은 셰브첸코인자기가 주전공격수로 뛰고 있었고, 미드필더에도 후이 코스타가 지키고 있었는데다, 피를로가 포텐이 제대로 터져,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이뤄냈다. 그의 인생의 첫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경험한것이다.


3.1.4. 이후[편집]


하지만, 03-04 시즌부터는 AC 밀란이 영입하자마자 뛴 연습경기에서부터 돋보였던 카카를 두고[11], 이미 30대가 넘어간 히바우두를 기용할 이유는 없었기에, 벤치신세가 되며 주전 선수로 뛰기 위해 떠돌다 크루제이루 EC를 거쳐 2004년 수페르리가 엘라다올림피아코스 FC로 이적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올림피아코스에서의 맹활약으로 팬들의 사랑을 받았고 특히 챔피언스리그에서는 혼자 미쳐 날뛰면서 레알 마드리드나 리버풀 등 온갖 강팀들을 때려부수는 활약을 보였다. 조별리그 마지막 경기에서 거의 리버풀을 때려잡고 2라운드에 진출할 뻔했으나 리버풀스티븐 제라드의 극적인 중거리포가 터지면서 고배를 삼키게 된다. 그리고 2007년에는 올림피아코스 생활을 마치고 수페르리가 엘라다AEK 아테네로 이적해 1시즌동안 활약했다.

파일:attachment/Rivaldo_Bunyodkor_1.jpg

그리고 2008년 또다시 이적을 감행했는데, 새로 입단하게 될 팀은 우즈베키스탄FC 분요드코르. 당시 분요드코르는 엄청난 자금력을 동원해 아시아 축구계의 신흥강호로 올라서기 위해 동분서주하던 중이었고, 히바우두 영입에 이어 감독으로 루이스 펠리페 스콜라리를 앉히며 일약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이 기세로 2009년 AFC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노렸으나 포항 스틸러스와의 8강전에서 2차전 연장 혈투까지 가는 끝에 결국 4-5로 패해 좌절되었고, 2010년도 알 힐랄에게 밀려 중도하차했다. 이후 팀에서 방출되었다가 2011년 상파울루와 1년 단기계약을 맺었다.

2011년, 커리어 내내 영혼의 파트너라 불렸던 호나우두가 은퇴함에 따라 이제 히바우두 역시 은퇴를 준비하는 듯했으나 페이크였고 2013년 기준으로 자신의 커리어 15번째 팀인 브라질 1부 리그 상 카에타누에서 뛰었다. 2014년 브라질 3부 리그 모지미링 FC로 이적하였다.

저니맨이라고 하지만, 이미 발롱도르 수상, 챔스 우승, 리그 우승, 월드컵 우승까지 이룰건 다 이룬 선수가 여자, 술, 담배에 관심을 가지지 않고, 축구선수 생활을 은퇴하고도 남았을 40대임에도 축구를 계속하는걸 보면 축구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선수인것 같다.

끝내, 브라질 리그에서 자신의 아들과 같이 경기도 뛰어본 히바우두는 2015년 43세의 나이로 은퇴하였다.

파일:external/s2.glbimg.com/dsc_05501.jpg

"팀원들은 저를 보고 할아버지라 부릅니다. 저도 그게 그리 싫지는 않아요. 저는 현재 경기를 뛰기 보다는 애들에게 조언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마치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얘기를 들려주는 것처럼요... 그래도 귀를 잡아 땡겨가며 억지로 조언을 해주지는 않죠. 은퇴... 그건 정말 힘든 일이에요. 선수에게 있어 은퇴는 첫 번째 죽음이나 마찬가지거든요. 하지만 저는 절대 죽지 않을 겁니다. 선수는 자신이 언제 은퇴해야 하는 지에 대해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어요. 전 아직 아닙니다."

2013년 상 카에타누에 있을 당시의 인터뷰 中


하지만 결국 한국시간으로 3월 16일, 은퇴를 선언했지만, 2015년 7월, 모지미링 구단주 히바우두는 팀의 성적이 좋지않자 스쿼드에 들어가기 위해 훈련을 다시 시작했다. # 그리고 경기에 출전해 팀의 시즌 첫 승을 이끌었다. #

2015년 7월 8일 나우티쿠와의 11라운드 경기에서 공격포인트를 만들지는 못했지만 환상적 프리킥을 보여주는 등 2:1 승리를 이끌었다. 그리고 7월 15일, 페널티 킥으로 현역 복귀 후 첫 골을 넣었다고 한다. 원래 자신이 안 차려고 했으나 관중이 히바우두의 이름을 연호해서 찼다고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경기에서는 히바우두의 아들인 히바우지뉴가 멀티골을 넣었다. 결국 팀은 그 날 3:1로 승리했다.

2015년 8월 14일, 히바우두는 왼쪽 무릎 통증이 재발함에 따라 어쩔 수 없이 2번째 은퇴를 선언한다고 구단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 밝혔다.


3.2. 국가대표 경력[편집]


1994년 미국 월드컵에는 자국에서의 대활약에도 아쉽게 엔트리에는 포함되지 못한다. 호나우두가 후보로라도 포함된 것에 비하면 아쉬울 수 밖에 없다. 1996 애틀랜타 올림픽1997 컨페더레이션스컵에서는 국가대표에 승선했지만, 몇 경기 밖에 나오지 못하는 등 활약이 미미했다.

진짜 그의 활약은 1998년 프랑스 월드컵부터다. 전 대회인 미국 월드컵에서 맹활약했던 호마리우가 부상으로 대표팀에서 낙마하기는 했지만, 당시 브라질에는 호나우두의 파트너에는 호마리우와 호흡을 맞췄던 베베투, 2선 미드필더에는 레오나르두 아라우주와 히바우두 본인이 있었다. 또 든든한 주장이자 호마리우, 베베투와 함께 지난 대회 우승의 주역 둥가아우다이르, 카푸호베르투 카를루스가 양쪽 풀백으로 버티고 있던 어마무시한 팀이었다. 그는 10번 에이스 넘버를 받았고 주전으로 뛰기 시작한다. 브라질은 조별 리그 3경기를 2승 1패로 통과하고 히바우두는 조별 리그 3경기에서 1골 1어시스트를 기록했다. 16강에서 만난 칠레는 삼파이우와 호나우두가 2골씩 넣으며 4-1로 격파한다. 8강에서는 덴마크에게 1-0으로 지고 있는 상황, 히바우두가 역전골과 결승골을 넣으며 3-2로 역전승을 거뒀고 4강 상대 네덜란드호나우두의 선제골[12]파트릭 클루이베르트의 동점골로 1-1로 승부차기까지 가서 승리한다. 그렇게 오른 결승전 상대는 프랑스였다. 프랑스는 마에스트로 지네딘 지단철의 포백이 버티고 있었다고는 하나 그 전까지는 어렵사리 올라온 프랑스였기 때문에 압도적인 모습으로 올라온 브라질의 승리를 점치는 사람들이 다수였다.[13] 그러나 경기가 시작되고 히바우두와 호나우두는 경기 내내 이전 경기와는 다른 부진한 모습을 보여줬고 결국 팀은 지단에게 2골을 내주는 등 3:0으로 대패하고 만다. 그리고 히바우두는 올스타팀에 선정되었다.

1년 뒤 1999 코파 아메리카에서는 토너먼트에서만 4골 1어시스트로 맹활약하며 브라질의 우승을 이끈다. 히바우두는 대회 MVP로 선정되었고 호나우두와 함께 5골로 공동 득점왕에 올랐다. 브라질은 이렇게 다시 한 번 재기에 성공하며 다음 월드컵 역시도 기대되었다.




그러나 2002년 한일 월드컵 전까지만 해도 팀의 조직력 문제로 말이 많았다. 지역 예선도 힘겹게 올라온 상태였고 호나우두는 부상에서 복귀한지 얼마 안된 상태였다. 하지만 본선에서 그들은 각성한다. 당시 공격의 삼각편대 3R 호나우두, 호나우지뉴, 히바우두는 막강한 모습을 보여줬고 조별 리그에서는 C조에 걸려 터키[14], 중국, 코스타리카를 모두 꺾고 3전 전승으로 16강에 올라간다. 히바우두는 3경기에서 3골을 넣는다. 16강에서는 벨기에를 상대로 히바우두와 호나우두의 2골로 2-0 승리, 8강잉글랜드를 상대로 또 다시 호나우지뉴와 히바우두가 골을 넣으며 2-1 승리를 거둔다. 다음 4강 튀르키예전에서 호나우두의 결승골로 1-0으로 승리하고 결승에서 독일을 만난다. 당시 독일은 올리버 칸이 버티고 있었지만 호나우두가 이를 뚫어내며 2골을 기록했고[15] 월드컵 우승 트로피를 드는데 성공한다. 히바우두는 실버슈를 수상하고 올스타팀에 선정되었다.

그러나 셀레상에서의 히바우두는 2002 월드컵이 마지막 불꽃이었다. 2003년 11월 19일 우루과이와의 2006년 독일 월드컵 남미 예선 경기[16]를 마지막으로 더이상 국가대표팀에 소집되지 못했고 자연스럽게 국가대표와도 멀어지게 된다.

히바우두의 국가대표 경력을 정리하자면 메이저 대회에 겨우 3번 나갔을 뿐이지만 1998 월드컵 7경기 3골 2어시스트 + 베스트 11, 2002 월드컵 7경기 5골 1어시스트 + 실버슈 + 베스트 11, 1999 코파 아메리카 5경기 5골 1어시스트 + MVP + 득점왕 등 일단 나가기만 하면 매번 엄청난 활약을 펼치며 셀레상의 마지막 전성기를 이끈 진정한 애국자였다고 평가할수 있다.


4. 플레이 스타일[편집]



미드필더로 알려져 있기도 한데, 엄밀히 말하면 스트라이커부터 공격형 미드필더까지 유연하게 소화해낼 수 있는 공격수에 가까운 선수였다. 특히 투톱이나 쓰리톱에서의 한 자리를 차지한 상태에서 최고의 활약을 하는 선수였으며, 전성기 시절 클럽에서는 중앙 공격형 미드필더나 왼쪽 프리롤 공격수로 뛰기도 했다. 국가대표팀에서는 투톱에서 뛰는 경우가 많았으며, 전성기가 좀 지나 올림피아코스에서 뛸 때에도 투톱에서 주로 오른쪽 공격수를 맡았다.

히바우두의 가장 큰 장점은 무시무시한 왼발 킥. 호베르투 히벨리누, 호베르투 카를루스, 그리고 아드리아누와 함께 브라질의 악마의 왼발로 알려졌을 정도로 왼발슛과 크로스의 정확도와 파워 모두 역대 최고 수준이었으며, 프리킥은 물론 중거리 슛, 페널티 킥, 크로스 모두 능했다. 심지어 아크로바틱한 바이시클 킥 역시도 위력이 엄청난 수준. 또한 볼 터치가 굉장히 좋았는데, 신기한 점은 거의 모든 볼터치를 의식적인지 본능적인지는 알 수 없으나 왼발로만 했다. 차는 발도 왼발이니 사실상 오른발은 거의 안 쓰는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각적이고 멋진 플레이를 보여줬다. 그런 점에서는 매직 마자르 시절의 헝가리의 유명한 레전드 페렌츠 푸스카스와 흡사한 편.[17]

몸싸움과 주력도 뛰어났다. 주력의 경우는 사실 좀 애매한데, 최고속도는 굉장히 빠른 편이고 최고속도에서의 순간적인 감속능력 역시 뛰어나지만, 가속도와 민첩성은 떨어졌다. 국내로 치환하면 전 국대인 설기현을 생각하면 비슷하다. 하지만 가속도나 민첩성이 조금 부족해도 등지는 플레이 등의 피지컬을 활용한 플레이에 능해서, 수비수들 사이의 좁은 틈새에서 자신의 공간 확보 후 왼발 테크닉으로 폭풍 돌파나 패스로 수비라인을 박살냈다.[18] 즉, 무시무시한 킥력에 덤으로 몸빵과 주력이 겸비되었으니 수비 입장에서는 들러붙자니 이긴다는 자신이 없고, 좀 떨어져 있자니 발도 빠른데 킥력도 좋아서 강제로 이지선다에 걸렸다.

무지막지한 킥력에 묻혀서 비교적 덜 부각되는 편이지만, 아르연 로번이 자주 쓰는 드리블 스킬로 유명한 컷 인 드리블의 달인이기도 했다. 차이점이 있다면, 로번은 여러 번 같은 방향으로 치고 들어가서 수비진의 허점을 찾는 형태의 드리블이고, 히바우두는 꺾어들어가는 방향을 자유자재로 조절하며 언제든지 슈팅할 수 있는 각을 만들어버리는 형태이다. 또한 로번보다 컷 인 동작이 훨씬 역동적인데, 이는 히바우두가 상체각도를 매우 자주 바꿔가며 온 몸을 페이크 동작에 사용하기 때문이다.

유독 큰 경기에 강했던 빅 게임 플레이어였다. 딱히 멘탈甲이라 불릴 만한 강한 멘탈을 지닌 선수는 아니었고, 오히려 호나우지뉴처럼 경기를 즐기는 타입이었지만 그는 유독 큰 경기, 혹은 위기 상황에 강했다. 바르셀로나에 합류하자 마자 리그 트로피와 국왕컵 트로피를 안긴 것으로 시작해 1999년 루이 판할 감독의 대삽질[19]로 바르샤 스쿼드가 휘청댈 때도, 히바우두만은 변함없는 활약을 하며 해당 시즌 챔피언스리그 득점왕을 따냈다. 물론 직후 반 할은 경질되었다. 지난 2010년 11월 어느 꼬마가 기록을 경신하기 전까지 바르셀로나에서 챔피언스리그 역대 최다 득점자 자리는 그의 몫이었다.[20]

그리고 지금도 회자되는 2000-01 시즌 리그 최종전. 팀 분위기가 개판이 되다 못해 막장가도를 달리던 중 난적 발렌시아를 홈으로 불러들여 마지막 38라운드를 치러야 했다. 그때까지 바르샤는 발렌시아에 승점 3점이 모자란 5위였고, 무조건 이겨야 챔피언스리그 진출권을 얻을 수 있는 절체절명의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 날, 히바우두는 영웅이 되었다. 결과는 히바우두의 해트트릭으로 3-2 승리. 승리를 확정짓는 마지막 일격이 된 그때 그 바이시클 킥은 기회가 된다면 꼭 찾아보라. 진짜 숨 넘어간다. # (6분 36초)

이러한 그의 위기 대처 능력은 월드컵 국대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되는데, 특히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그 진가를 볼 수 있었다. 터키와의 조별 리그 첫 경기에서 페널티 킥으로 역전골을 넣어 2:1로 승리를 거두었으며, 잉글랜드와의 8강전에서도 동점골을 넣어 역전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21] 그리고 월드컵 내내 기존의 히바우두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줘서 깊은 인상을 남겼다. 탐욕이라는 단어가 꼭 따라붙던 기존의 캐릭터와는 전혀 다르게 철저하게 호나우두의 득점력을 배가시키는데 주력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잉글랜드전에서 동점골을 성공시켰듯이 상황에 따라 직접 해결도 해주어서 어쩌면 호나우두보다 더 활약을 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터키와의 조별리그 첫 경기 때의 할리우드 액션만 빼면 거의 완벽에 가까운 모습으로 브라질의 다섯 번째 월드컵 우승을 이끌었다.

다만 히바우두의 가장 큰 약점으로는 탐욕을 꼽을 수 있다. 선수 생활의 최전성기인 바르셀로나나 브라질 국가대표 등에서 섀도우 스트라이커나 인사이드 포워드 등의 역할을 많이 했지만 원래는 골 사냥꾼에 가까운 선수이고 멘탈리티 역시 그러했다. 물론 본인의 능력이 출중해서 큰 문제는 없었지만 본인이 결정적인 순간을 차지하려는 욕심이 컸고 그렇게 날려먹은 찬스도 제법 되는 편이다. 탐욕이란 게 골로 성공시키면 아무도 터치 못하고 오히려 박수를 보내지만 보통 그렇지 않기 때문에 탐욕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당시 바르샤의 감독이었던 요한 크루이프는 히바우두를 두고 훌륭한 테크니션임에도 포지셔닝이 좋지 않아 항상 어렵게 플레이를 한다고 쓴 소리를 많이 했다. 물론 이런 말들도 이미 최정상에 오른 선수에게 '더 잘할 수 있을 텐데' 하는 뜻에서 하는 말이다.


5. 기록[편집]



5.1. 대회 기록[편집]









  • 브라질 U-23 축구 국가대표팀

5.2. 개인 수상[편집]




6. 히바우두에 대한 말, 말, 말[편집]


내가 유스 클럽에 있었을때 나는 호마리우의 플레이를 보면서 자랐고 1군에 콜업됐을 당시 호나우두의 플레이를 목격했으며 호나우지뉴와 함께 필드에서 뛰었었다. 하지만 나에게 있어서 최고는 히바우두다.

- 사비 에르난데스


상대 선수들에게 가장 위압감을 줄 수 있는 선수다. 그와 같은 팀에서 뛰게 된 것은 행운이나 마찬가지다.

루이스 엔리케


그의 슈팅, 킥, 드리블은 모두 완벽하다. 나는 그를 세계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이라고 생각한다.

펩 과르디올라


히바우두는 디에고 마라도나 이후 가장 파괴력 있는 왼발을 보유하고 있는 선수다.

마리우 자갈루


히바우두는 세계 최고의 선수다. 특히 그의 왼발 슈팅은 개인적으로 배우고 싶을 정도다.

호나우두


브라질에서 가장 위협적인 선수는 히바우두다.

에르난 크레스포


루이스 피구도 분명 최고의 선수지만, 나는 히바우두가 더욱 뛰어나다고 생각한다.

호베르투 카를루스



7. 여담[편집]


  • 히바우두는 사실 K리그에서 뛸 수도 있었다. AC 밀란에서 방출된 직후인 2004년 당시 안양에서 연고를 이전한 FC 서울이 오퍼를 넣었던 것. # 하지만 히바우두가 유럽 재도전 의지를 보이며 무산되었다고 한다. 히바우두는 이후 브라질을 찍고 그리스의 올림피아코스 FC로 이적했고, 2008년 FC 분요드코르로 이적해 아시아 축구 무대에 발을 담궜다.

  • 히바우두의 아들 히바우지뉴[23]도 프로 축구선수로 활동하고 있다. 다만 아버지와는 다르게 브라질 리그에서 얼마 안있고 일찍 해외로 진출했다. FC 디나모 부쿠레슈티로 이적하여 리그에서 30경기 5골을 넣으며 그렇게 나쁘지 않은 첫 시즌을 보냈고, 2018년에 불가리아의 레프스키 소피아 소속이 되었다. 2019년 겨울 이적시장에서 게오르게 하지가 구단주 겸 감독으로 있는 비토룰 콘스탄차로 임대를 오게 되었다. 하지의 지도 아래 꽃을 피운 선수들이 다수임을 봤을 때 히바우지뉴에게는 정말 좋은 기회가 아닌가 싶다. 아직 나이가 젊은것을 감안하여 더욱 발전하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더 좋은 선수로 성장할 가능성이 있다. 2020년에는 폴란드 엑스트라클라사의 크라코비아로 이적.

  • 국내의 한 기자가 듣보잡 취급을 한 적이 있다(...). #

  • 2015 코파 아메리카에서 브라질이 8강에서 탈락하자 쓴소리로 비난했다. "요즘은 브라질 국대에 아무나 들어온다. 나만 해도 2006년 월드컵 당시 그리스 리그나 뛴다고 하여 퇴물처럼 취급되어 국대팀 선수가 되질 못했다.[24] 이런 상황이 계속 된다면 적어도 30년은 브라질 국대팀이 발전이 없을 것이다." 이외에도 요즘 축구는 예전만 못하다, 퇴보했다는 식의 인터뷰를 간간이 하며 어그로눈길을 끌고 있다.

  • 캡틴 츠바사 road to 2002에서 주인공 츠바사의 포지션 라이벌이자 조언자 정도의 위치로 등장했으며, 작품 내에서 츠바사와의 공존에 성공한다.[25]

  • 폐인 양성게임으로 악명높은 풋볼 매니저에서 불혹의 나이지만 능력치가 매우 높은편이라 에디터로 나이를 의도적으로 낮춰 사용하는 유저들이 많다. 나이 때문에 신체 능력은 형편없는 상태에서 기술/정신 부분만 굉장한 상태인데,[26] 나이를 낮춰버리면 부실했던 피지컬이 미친듯이 상승하면서 전천후 괴물이 탄생한다.[27]

  • 네덜란드의 레전드 수비수이자 역시 왼발의 달인인 프랑크 더 부르가 자신이 같이 뛰어본 가장 뛰어난 선수로 축구 역사상 최고의 윙어 중 한 명인 피구도, 자국 네덜란드 대표팀의 레전드 베르캄프도 아닌 히바우두를 뽑았다. 바르샤에서 히바우두의 최전성기인 90년대 말~00년대 초반을 함께 했던 선수이닌 만큼 축구 골수 팬들은 당연하다는 반응이지만, 라이트한 축구 팬들은 말년에 노쇠화 이후 유럽 메이저 무대를 떠나는 바람이 메이저 무대에서 롱런했던 피구와 베르캄프에 비함 상대적으로 인지도에서 손해를 본 히바우두를 꼽은 것에 대해 의외라는 반응이었다.



파일:시대별 최고의 미드필더.jpg

  • 골닷컴에서 시대별 최고의 미드필더 5인을 선정했는데, 1990년대 미드필더들 중 3위에 이름을 올렸다.

  • 2022년 8월 방한하여 FIFA 월드컵 트로피 전시 행사를 가졌다. 트로피 전시 행사에는 히바우두의 참석이 꼭 필요했다. 월드컵 트로피 진품을 만질 수 있는 사람은 국가 수반과 월드컵 우승팀에 있던 선수로 제한되므로, 행사장에서 트로피를 손으로 만질 수 있었던 유일한 인물이 히바우두였기 때문이다.[28]



7.1. 콩라인[편집]


흔히들 발락콩락이라 부르며 축구계 2인자의 대명사로 칭하는데, 이 사람 역시 콩라인으로서는 남에게 뒤지지 않는다. 뭐 결국 둘 다 축구로 정점 찍은 사람들이니 우스개소리긴 하지만. 히바우두의 경우 브라질의 10번으로 1998년 월드컵 준우승을 시작으로 2002년 한일 월드컵에 우승에 기여했고 99년 한 해는 독보적인 에이스였다.[29] 그리고 발락은 히바우두가 팀 내 2인자 이미지가 컸던 것에 반해 독일의 에이스로서 여러 차례 독일 올해의 선수 수상을 했지만 아무래도 국대가 준우승에 머물렀던 점, 팀 우승도 첼시 시절 한 번을 제외하면 왠지 당연해 보이는 뮌헨 시절에 몰려 있다는 점에서 비교할 수 있다.

히바우두는 놀라운 공격 포인트에 비해 전성기가 짧은게 옥의 티라면 옥의 티였다. 1996년 올림픽 국가대표를 시작으로 1997년 컨페더레이션스컵 대회도 출전했지만 그 때는 아직까지 호마리우가 건재했던 시기였고 호마리우가 은퇴한 때인 1998년 프랑스 월드컵~2002년 한일 월드컵까지 약 5년 간 그의 진면목을 제대로 보여줬지만 아쉽게도 한일 월드컵 이후로는 국대에 선발되지 않은 점이 그를 콩라인 반열에 들게 한 큰 이유일지도. 이런 점에서 이탈리아의 스트라이커였던 크리스티안 비에리와 약간 비슷한 신세라고 볼 수 있다.

19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초반 데포르티보 라 코루냐FC 바르셀로나에서 라리가를 완전히 휘어잡았던 왼발신이었음에도 네임밸류가 잘 알려져있지 않은 편인데, 다른 건 둘째치고 소속팀에서 에이스로 군림했음에도 불구하고 팀 동료와 스포트라이트를 나눠갖는 상황이 커리어 내내 지속되었다. 히바우두가 더 많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으며, 네임밸류도 피구보다 앞섰다. 혹자는 피구가 3년 연속으로 최우수 외국인 선수상을 받은거를 근거로 드나 피구가 드리블과 플레이메이킹 등으로 평점은 더 높았기 때문에 당시 평점으로 주던 돈 발롱 MVP를 가져간 것이지 명실상부 에이스는 히바우두였다. 다만, 혼자 누렸어야할 스포트라이트를 분명히 피구 등 다른 선수들과 나누어 갖는 상황이 벌어졌던건 사실이고 일개인 득점랭킹 또한 1997-98, 2000-01 시즌 리그 득점랭킹 2위를 차지했다. 특히 00-01 시즌의 활약은 정말 눈부신 것이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골 차로 2위였다.

브라질 국가대표에서도 다를 건 없다. 기세등등하게 국가대표에 승선했을 때는 밤새 술마시며 클럽을 전전하면서도 미친 듯이 골 넣어대는 어떤 아저씨가 버티고 있었는데, 그 아저씨가 한물 가자 이번에는 페노메노라는 양반이 등장했고, 가뜩이나 늙어가는 처지도 억울해 죽겠는데 이번에는 갑자기 웬 외계인엄친아가 튀어나왔다. 그리고 괴물까지 나왔다.[30]

1998 월드컵에서는 3골 2어시스트, 2002 월드컵에서는 5골 1어시스트를 찍는 활약을 펼쳤음에도 그 어떤 스포트라이트도 그에게 오지 않았다.[31][32]

이 때문에 한때 브라질이 바그너 로베같이 선배들의 위엄에 비하면 한없이 초라한 수준의 선수를 주전 스트라이커로 쓰던 시절엔 '나 때는 내가 아무리 리그에서 잘해도 그리스 리그에서 뛰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국가대표에 발도 못 붙였다.' 며 한탄한 적도 있다.

그러나 브라질이 원래 그런 동네고 자기 자신 역시 다른 동네 같았으면 국대 붙박이였을 사람들 앞길 막은 건 마찬가지이다. 당장 베베투만 해도 노구를 이끌고 참가한 98년 거의 경기마다 교체당했으면서도 히바우두와 같은 수의 득점을 올렸다. 자르데우, 지오반니 에우베르, 마르시오 아모로소, 아이우통 같은 유럽 4대 리그 득점왕들조차 히바우두와 전성기가 겹쳐서 쓸쓸한 국대생활을 보냈다. 이들보다 한 끗발 떨어지는 선수들이 국가대표를 노리기는 거의 언감생심에 가까웠으니[33] 남에게 스포트라이트가 쏠렸다는 히바우두도 남의 앞길 많이 막은 셈이다.


8. 같이 보기[편집]





[1] 공격형 미드필더[2] 전천후 프리롤 공격수로 뛴다. 투톱으로 배치 될 때 전형적인 스트라이커 역할을 수행하지 않으며, 스트라이커 보다 오히려 세컨드 스트라이커와 비슷한 역할에 가까운 움직임을 보인다. 2선과 전방을 넘나들며 자유롭게 움직이며 플레이메이킹과 득점을 노리는 프리롤 포워드이다. 기본적으로 윙어, 공격형 미드필더, 제로톱 등등 거의 모든 공격수 역할이 가능하다.[3] 대표팀 역대 득점 7위.[4] 데포르티보 팬들은 이 사건을 두고 통칭 '히바우두 사건'이라 부르고 있으며, 히바우두를 바르셀로나로 이적시킨 것에 크게 분노한 렌도이로 회장은 이후 알베르트 루케의 바르셀로나 이적설이 나오자 바르셀로나 이적을 차단하기도 했다. 하지만 훗날 루케는 뉴캐슬 유나이티드로 이적하며 결국 팀을 떠난다.[5] 사실 이때의 히바우두는 자신의 최적의 포지션인 쉐도우 스트라이커가 아닌 바른발 윙어로써 왼쪽 윙포워드에서 뛰었다. 원톱 롤도 소화하는 전천후 스트라이커인 클라위버르트와 프리롤에 가까운 오른쪽 윙포워드였던 피구가 있었기 때문에 반 할식 쓰리톱을 세운다면 윙어로 뛰기엔 어정쩡한 위치였지만 측면에 있는 쉐도우 스트라이커로 10.5번에 가까운 롤. 그럼에도 득점력이나 파괴력 자체는 죽지 않아서 바르셀로나에서 맹활약 하긴 했다. 반 할이 사임하고 나서 투톱 체제로 전환했을때 AC 밀란으로 이적.[6] 참고로, 당시 트레블을 달성한 괴물 스쿼드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유일하게 못 이기고 결국 비긴 팀이 히바우두의 바르셀로나이다.[7] 발렌시아는 당시 4위였고 바르셀로나는 3점 뒤진 5등이었다. 비록 홈에서는 발렌시아를 잡아내 이 경기에서 이기면 무조건 자력 진출이 가능한 상황이었지만 2년 연속 챔피언스 리그 결승에 오른 강팀을 원정에서 꺾어야 하는 절체절명의 상황이었다.[8] 반할이 킥이 좋은 히바우두를 아예 크로스용으로 쓰려고 했지만, 히바우두는 중앙에서 공격을 도맡는 프리롤을 원했다.[9] 수상은 호나우두, 칸, 홍명보가 받았다.[10] 참고로, 당시 최고 에이스인 히바우두를 내친 바르샤는 그해에 아무것도 이뤄내지 못했고, FC 바르셀로나는 팀을 망친 반 할 감독을 데려온지 1년도 채 안되어 경질시켰다.[11] 웬 미션스쿨 학생처럼 생긴 녀석이 수비를 다 뚫고 골을 넣어서 가투소가 쌍욕을 했다고 한다.[12] 히바우두 어시스트.[13] 조별 리그에서의 압도적인 모습에 비해 16강에서 파라과이와 연장 혈투 끝에 블랑의 골든골로 겨우 승리했고 8강 이탈리아와는 승부차기까지 갔으며 4강 크로아티아 역시 대회 득점왕 슈케르에게 선제골을 내주는 등 고전하다가 튀랑의 2골로 간신히 역전승을 거뒀다.[14] 이 경기에서 히바우두는 역대급 메소드 연기를 펼치는데 코너킥 볼을 받으려 기다리던 히바우두가 터키 선수가 찬 공에 다리에 볼을 맞지만 히바우두는 안면을 감싸안고 넘어지며 할리우드 액션을 시도했다. 이를 본 주심은 터키 선수에게 퇴장을 주는 병크가 일어난다.[15] 첫번째 골은 히바우두의 슈팅을 칸이 제대로 캐치하지 못하고 놓친 볼을 호나우두가 차 넣은 것이고, 두번째 골 역시 클레베르송이 호나우두에게 어시스트하기 전 절묘한 흘려주기로 독일 수비진을 교란시켰다.[16] 당시 3:3 무승부를 기록했다. 히바우두는 79분까지 뛴 후에 루이스 파비아누와 교체되었다.[17] 정작 둘이 뛰었던 팀철천지 원수다.[18] AC 밀란에서 두각을 못 보인 것은 갑자기 닥친 수비 부담도 있지만, 결정적으로 나이로 인한 피지컬 능력의 하락이 눈에 띄었다. 2002 월드컵 이후 쭈욱 하락세였다.[19] 쉐도우 혹은 플레이메이커 위치에서 활약하던 히바우두를 좌측면 미드필더로 고정시키려 했다. 쉽게 예를 들자면, 메시를 좌측 미드필더로 고정시키는 것과 같은 상황이라 보면 된다.[20] 통산 27골.[21] 잉글랜드전 최고 수훈으로는 히바우두에게 천금같은 어시스트를 선사하고, 역전골까지 성공시킨 호나우지뉴를 꼽을 수 있겠다. 옥에 티라면 역전골을 넣은 뒤 얼마 안 있어 퇴장 당했다는 것.[22] 돈 발롱 어워드[23] 1995년[24] 이런 말이 나올 만 한 것이 히바우두가 뛰던 당시에는 빅리그 득점왕들도 히바우두, 호나우두, 베베투, 호마리우 등 괴물 공격수들의 아성에 밀려 나오지조차 못할 정도였으나 2015년 브라질 국대에 중국이나 사우디아라비아 리그에서 뛰는 선수들이 주전이었다. [25] 작내 이름은 리바울. 히바우두를 영어로 읽을 경우 리발도를 조금 바꾼것이다. 애초에 해당작품에는 실축에 나오는 선수들 죄다 이름이 살짝 바뀌어 나온다.[26] 간단히 말해서 피지컬을 제외한 능력치는 20~30대 현역 공격수 중 그 어떤 선수와 비교해도 꿇리지 않는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27] 훈련 방향에 따라 개인기, 골결정력, 드리블, 볼트래핑, 중거리슛, 코너킥, 크로스, 패스, 페널티킥, 프리킥 등 공격관련 기술 모두 20이 나올 수도 있다. 그걸 평균 이상으로 돌아온 피지컬이 받쳐준다.[28] 현재 대한민국에서 FIFA 월드컵 트로피를 합법적으로 만질 수 있는 사람은 윤석열 대통령이 유일한데 트로피 하나 운반하자고 국가 원수를 부를 수는 없으니...[29] 오죽하면 당시에는 이 사람의 어시 덕분에 '호나우두가 주워먹기를 했네, 황제소리 들었네'라는 풍문이 있었을 정도였다. 호나우두가 1인자였을 시기에도 그랬다![30] 그러나 공격형 미드필더였던 호나우지뉴와 카카는 스트라이커 내지는 공격수인 히바우두와 포지션이 약간 달라 히바우두에 명성에 누가 갔다는 것은 지나친 비약일 수도 있지만 어차피 사람들의 주목도를 얘기하는 것이니까. 사실은 같은 피지컬 괴물 계열인 탕아, 아드리아누에게 밀렸다고 봐야 한다.[31] 에이스가 스포트라이트를 죄다 가져가버렸고, 오히려 사람들은 터키전에서 그가 잠시 보여줬던 할리우드 액션만 기억해줄 뿐이었다.[32] 2002 월드컵 결승전에서 호나우두의 2골에 직간접적으로 도움을 줬던 장면만 보더라도 기록된 공격 포인트 이상의 기여도가 있었다는걸 알 수 있다.[33] 루이장 에디우송처럼 국대 승선하는 경우가 있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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