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스버러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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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스버러 참사
Hillsborough disaster


파일:external/ichef-1.bbci.co.uk/_81354005_lepp_lane_sideview1.jpg

발생일
1989년 4월 15일
발생 위치
영국 잉글랜드 셰필드 힐스버러 스타디움
유형
붕괴 / 압사
원인
경기장의 허용 인원을 초과한 인원 입장
인명피해
사망
97명
부상
766명

1. 개요
2. 전개
3. 사고 이후
4. 추모
5. 여담
6. 둘러보기



1. 개요[편집]


1989년 4월 15일 영국 잉글랜드 셰필드에 있는 힐스버러 스타디움[1]에서 관람객 94명이 압사하고 이후 3명이 사고의 후유증으로 사망한 사건.[2]

과다인원을 입장시켜 압사 상황이 일어났고 구조물이 무너지면서 큰 희생이 발생했으며 관공서의 대처 미흡으로 사망자가 늘고 경찰과 정부와 언론이 책임회피 / 은폐축소를 꾀했던 것이 사건 이후 수십 년간 파헤쳐졌다.

2. 전개[편집]


당시 리버풀 FC노팅엄 포레스트FA컵 준결승전이 힐스버러 스타디움에서 열렸다. 리버풀의 들은 이 경기를 관람하기 위해 단체로 버스를 대여해 경기장으로 향했지만 교통사고로 도로가 정체되었다.

파일:힐스버러 참사 과정.jpg

결국 리버풀 팬들은 시합 시작 직전에 도착하여 서둘러 경기장 안으로 몰려 들어갔는데 리버풀 팬들이 들어가기로 되어 있던 곳의 출입문은 회전식이라 한번에 많은 사람이 들어가기 힘들었다. 경기장에선 다른 쪽의 출입문을 열어 사람을 더 들여보냈다. 문제는 해당 출입문은 좁은 복도와 연결되어 안의 상황을 파악하기 힘들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경기장 측의 실수로 정원이 1600명 남짓한 입식 관중석에 약 3천 명이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이 사실을 파악하지 못한 경기장 진행요원들은 계속해서 해당 입석으로 관중을 유도했고 사람들이 계속 몰려들면서 안에 이미 들어갔던 사람을 밀게 됐다.

파일:힐스버러 참사.jpg

사람에 눌려 압사 직전에 이른 사람들이 2층으로 기어올라가고 펜스 쪽 사람들은 펜스를 넘어 경기장으로 대피하는 지경이 되었다. 경기를 촬영하던 카메라맨들은 상황이 심상치 않은 걸 눈치채고 카메라를 관중석으로 돌렸다. 사람들은 당시 리버풀 골키퍼로 경기장에 있던 브루스 그로벨라에게 '사람들 때문에 죽어간다. 도와달라.' 고 요청했다. 브루스는 처음엔 무슨 상황인지 파악을 못 했다. 하지만 사람들에 눌려 펜스에 밀린 사람들을 보고 경악했다. 브루스 그로벨라는 사람들이 쉽게 대피하도록 인근 문을 열어 달라고 경기장 직원에게 부탁했으나 그 직원은 열쇠가 없었다.

결국 훌리건이 필드에 난입하는 것을 막기 위해 세워둔 보호철망으로 사람들이 밀려 경기 시작 5분 만에 철망이 무너져내리자 진행 측이 뒤늦게 상황을 파악하고 경기를 중단했고, 그 뒤 구급차들이 급히 출동했다. 하지만 사람들이 너무 많아 구급차조차 경기장 안에 들어오기 힘들었다. 구급차 42대가 출동했으나 경기장 안에는 겨우 3대만이 들어올 수 있었다. 사람들은 광고판을 떼어서 임시 들것으로 활용해 사람들을 구급차로 옮겼고 숨을 못 쉬는 사람들에게 심폐소생술을 했다.

경기장 전체가 아닌 한 쪽에서만 일어난 사고였기에, 경기 당시 다른 곳에선 갑자기 경기장에 사람들이 들어오다가 중단되는 모습을 보고 훌리건이 경기장 안에 들어와 사고를 친 탓에 중단됐다고 착각한 이들도 있었다. 사람들은 이후 집에서 뉴스를 보고 경악했다고 한다.

94명이 압사, 부상자는 766명, 그 중 300여 명이 입원한 대형 참사로 이후 사고 후유증으로 3명이 사망함으로써 전체 사망자는 97명이 되었다. 사고는 기존의 1971 아이브록스 참사를 넘어 영국에서 축구 관련 사고 중 가장 많은 목숨을 앗아간 사고로 기록됐다.[3]

이후 리버풀은 모든 사태가 수습될 때까지 경기를 치르지 않겠다고 FA에 통보했다. 당시 수많은 축구 클럽의 애도가 이어졌고 리버풀의 지역 라이벌 에버튼은 사망자들을 추모하는 스카프를 내걸었으며[4] 윔블던 FC는 애도에 동참하는 의미로 FA의 승점삭감 경고에도 불구하고 상호간의 합의 하에 아스날과의 경기를 취소했고 FA 비난 여론이 일자 FA는 아스날 승점을 삭감하지 않았다.

4월 19일의 AC 밀란레알 마드리드 CF간의 유로피언 컵 준결승 경기에선 킥오프 전 묵념시간이 반쯤 지났을 무렵 AC 밀란의 팬들이 리버풀의 응원가인 You'll Never Walk Alone을 노래했다. 사건 이후 리버풀의 첫 경기는 성금 마련을 위한 셀틱과의 친선 경기[5]였다.

리버풀은 5월에 미룬 잔여 경기를 치렀으며 마지막 경기는 리그 챔피언을 결정짓는 아스날과의 마지막 경기였는데 이 경기에서 아스날 선수들은 꽃을 들고 입장해 리버풀 팬들에게 나눠주었다. 아스날의 우승을 위해선 2점차 승리가 필요했던 이 경기는 아스날의 2-0 승리로 끝나 아스날이 리그 1위, 리버풀이 리그 2위로 시즌을 마감했다. 그리고 리버풀 팬들은 우승한 아스날 선수들에게 기립박수를 쳐 주었다는 훈훈한 내용으로 닉 혼비의 저서 '피버 피치'에 잘 묘사되어 있다. 리버풀과 아스날이 형제의 구단이라고 불리게 됨은 이 사건이 결정적인 원인이었다.

3. 사고 이후[편집]


참사 20주년을 맞이해서 영국 정부에 의해 2009년에 재해 및 그 여파에 대한 문서 보고서 작성을 위해 독립적인 패널을 구성하였다. 그리고 23년만인 2012년 9월 12일에 진상조사 보고서가 나왔다. 힐스버러 인디펜던트 패널이 내놓은 이 보고서에 따르면 경기장에 예전부터 도사리던 위험을 감지하지 못했고 경찰이 팬들에게 조직적인 책임 전가 시도를 했으며 응급구조대의 초기 대응에도 문제가 있어서 구할 수 있었던 이들을 못 구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하원에서 연설하며 피해 유가족들에게 끼친 두번의 불의(Double Injustice)에 대해 사죄했고 FA 역시 사과문을 발표했다. # 당시 경찰은 진술 164건 중 116건을 바꾸거나 삭제하여 비난의 대상을 리버풀 팬들에게 돌리고 자신들의 잘못을 덮었다. 이들은 당시 위급한 상황에서 통제와 관리를 전혀 하지 못했지만 팬들을 술에 취한 폭도로 표현하며 티켓을 구입하지 않고 입장했다고 주장했다. 또 현장에서 제대로 된 응급처치를 받지 못해 피해자 59명이 추가로 사망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당시 영국 총리 마거릿 대처가 경찰들을 싸고돌았기 때문에 리버풀 팬들에게 대처는 철천지 원수가 되었다. 마거릿 대처가 죽으면 파티를 열 거야!라는 응원가[6]가 있을 지경이었다. 안 그래도 마가렛 대처가 리버풀 항만 노동자들의 파업을 탄압했기 때문에 리버풀에서는 마녀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하루하루가 지날 때마다 대처 목숨 하루씩 깎이니까(죽음에 하루씩 다가가니까) 좋다고 까는 상황이었다. 실제로 대처가 죽은 후 리버풀, 스코틀랜드 등지에선 "그 망할 마녀가 드디어 죽었다!" 라면서 샴페인을 터뜨리고 파티와 행사가 벌어졌다. 심지어, 응원가는 영국의 음악 차트의 순위에도 오르는 상황이 일어났다.

헤이젤 참사와 함께 잉글랜드 전역, 특히 축구계에 엄청난 충격을 준 사건이었다. 잉글랜드는 이 사건 이후 축구장의 입석을 모두 없애고 좌석으로 교체했으며 직접적으로 사상자를 내게 된 보호철망을 철거하는 등 경기장 문화를 바꾸기 시작했다.[7] 즉, 잉글랜드 축구협회가 기존의 풋볼 리그에서 분리된 프리미어 리그를 새롭게 출범시키는 데 큰 영향을 끼친 사건이다.

당시 리버풀의 감독이었던 케니 달글리시는 참사에 대한 책임을 안고 매일같이 유족들을 찾아다니며 위로를 하고 함께 슬픔을 나누었다. 당시 주위 사람들 말에 의하면 달글리쉬 감독은 유족들과 함께 눈물 흘리고 진심으로 슬퍼하였다고 하며 원래 리버풀의 레전드였지만 더욱 리버풀의 레전드로 추앙받았다. 그러나 참사에 대한 책임과 죄책감, 쉬지 않고 불철주야 바쁘게 돌아다닌 탓인지 달글리시는 정신적, 육체적으로 피폐한 상태에 빠지면서 건강에 적신호가 켜지게 되었고 결국 1991년 초에 감독직을 내려놓았다.

마침내 현지 시각 2016년 4월 26일, 영국 법원 판결에 따르면 조사 내용 17개 전부 경찰의 과실로 인정되면서 리버풀 서포터들은 다소의 잘못밖에 없다는 판결이 나왔다. 이로써 희생자 97명에 대한 일부 결백함이 27년 만에 밝혀졌다. # 경찰이 경계태만으로 인한 징계를 피하기 위해 증거 날조로 피해자들에게 책임을 돌렸다고 어느 정도 판명되었다.

2016년 5월 8일 BBC에서 방영한 힐스버러 참사에 대한 다큐멘터리에 따르면 힐스버러 참사가 일어나기 며칠 전에 경찰서장이 바뀌었고 그 사람은 축구에 관하여 거의 모르는 상태였으며 처음으로 한 기자회견에서도 노팅엄 포레스트를 노팅엄셔로 말하는 등 문제가 있었다고 한다.

2023년 1월 31일, 영국 경찰이 34년 만에 힐스버러 축구장 참사 희생자와 가족들에게 사과하며 윤리규정 재검토 등을 약속했다.#

4. 추모[편집]


파일:Hillsborough memorial.jpg
안필드의 힐스버러 추모비
힐스버러 참사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리버풀의 홈구장 안필드에 힐스버러 추모비를 세워 구단 차원에서 매년 4월 15일 추모제를 연다. 추모비에는 희생자 96명의 성함과 나이가 모두 각인되어 있으며 중앙에는 힐스버러 참사 희생자들을 영원히 잊지 않겠다는 의미의 '꺼지지 않는 불꽃(eternal flame)'이 있다.

이 외에도 리버풀 대성당 내부의 꺼지지 않는 불꽃, 메모리얼 벤치, 힐스버러 추모 기념관과 추모 동상을 세워 희생자들을 기리고 있다. 또 리버풀 FC는 구단 엠블럼까지 변화를 주며 라이버 버드 양 옆에 꺼지지 않는 불꽃을 넣었고 그들을 추모하기 위해 유니폼 뒷쪽에 희생자 수인 96을 새겨 놓았다.[8]

5. 여담[편집]


  • 이 사고로 리버풀의 레전드 스티븐 제라드의 사촌 존-폴 길훌리가 사망했는데 당시 10살로 가장 어린 사망자였다고 한다. 당시 제라드는 사고를 당하지는 않았지만 비석에 사촌 형의 이름이 새겨진 것을 볼 때마다 매우 큰 고통을 받았다고 전했다.

  • 참사 이후 《더 선》에서 '사건 당시 리버풀 훌리건들이 사망자들의 주머니를 뒤져서 물건을 훔치고, 경찰을 폭행했다며 당시 참사의 책임이 리버풀 훌리건들에게만 있었다'는 식으로 기사를 내서 상당한 논란이 됐는데 이 때문에 현지 리버풀 팬들은 더 선을 읽지 않는다고 공공연히 말할 정도로 증오하고 있다. 결국 진상규명이 완료된 뒤인 2017년부터 리버풀은 구단 차원에서 더 선의 취재와 안필드에서의 더 선 판매를 금지했다. 또 2017년 축구 서포터 연맹(FSF)에서 발의한 더 선 보이콧 운동이 만장일치로 결의되고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아스날, 첼시를 비롯한 약 70개 구단의 팬들이 동참했다. 이와 관련된 자세한 내용은 《더 선》 문서 참고.

  • 리버풀의 최대 라이벌 맨유의 감독이던 알렉스 퍼거슨은 참사 이후 가장 먼저 안필드를 방문하여 조용히 거액의 기부금을 내고 돌아갔다고 한다.

  • 노팅엄 포레스트는 2022년 2월 7일에 열린 FA컵 16강에서 허더스필드를 상대로 2:1 승리를 거두었는데 브라이언 클러프 감독 이후 33년만에 FA컵 8강전에 진출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3월 21일 FA컵 8강전의 상대팀은 바로 힐스버러 참사의 피해자였던 리버풀이었다. 그렇게 1988-89 시즌 FA컵 준결승전에서의 힐스버러 참사 이후 33년만에 FA컵 8강전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고, 디오구 조타에게 극적으로 골을 허용하며 0-1로 아깝게 패배했다. 하지만, 노팅엄 포레스트는 시즌 4위에 오른 뒤 승격 플레이오프를 승리하면서 23년만에 1부 리그 승격을 달성하는 쾌거를 이뤄냈다. 이렇게 노팅엄 포레스트는 23년만에 프리미어리그로 다시 복귀하게 되었고, 22-23 시즌부터 리버풀과 정면승부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첫번째 맞대결에서 타이워 아워니이의 결승골로 1:0으로 승리했다.

  • 이 참사 이후 잉글랜드에서는 1부 리그와 2부 리그의 경우 입석이 폐지되었으나 2021-22 시즌 중반부터 일부 클럽들에 한해 세이프 스탠딩 시험 도입으로 부활하였다. #

  • 힐스버러 사고 생존자이자 자신의 경험을 기반으로 재난 관리 전문 사회학자가 된 앤 에이어(당시 25세)는 영국의 재난참사 피해자 연대 '참사 행동(Disaster Action)'에서 활동하고 있다. 그는 이태원 압사 사고와 관련해 한국 언론과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내용

6. 둘러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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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현재 셰필드 웬즈데이 FC의 홈구장.[2] 본래 2명이었으나 사고 당시 만 22세였던 앤드류 데빈(Andrew Devine)이 이 사고로 식물인간이 된 후 32년간 투병생활을 하다가 2021년에 사고 후유증으로 인해 만 55세 나이로 사망하면서 3명으로 늘었다.[3] 축구 경기 도중 이보다 더 많은 사람이 압사로 숨진 사례는 아크라 스타디움 참사칸주루한 스타디움 참사, 리마 축구 폭동뿐이다. 그러나 다른 사고들은 전부 폭력사태와 연관되어 일어난 참사이고, 폭력사태 없이 일어난 사건 중에선 힐스버러 참사에서 가장 사람이 많이 숨졌다.[4] 두 팀 간의 더비 경기가 프렌들리 더비라고 불리는 만큼 리버풀 팬들 중에는 에버튼 팬의 친인척이 많다.[5] 두 팀은 You'll Never Walk Alone을 응원가로 사용하는 팀들이기도 하다.[6] 가사 전부가 "매기 대처가 죽으면 파티를 열 거야(When Maggie Thatcher dies, we're gonna have a party)"의 반복이다.[7] 이 영향으로 인해 현재의 축구장은 보호철망이 없어진 대신 관중석 앞에 난입방지용 해저드를 파는 형태로 설계가 바뀌었다.[8] 22/23 시즌부터는 앞서 언급된 앤드류 데빈까지 포함된 수인 97로 표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