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위나라 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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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위나라 내전
一次魏國內戰
The First Civil War of Wei
[1]
시기
기원전 370년
장소
위나라령
원인
위의 공위를 찬탈하려는 공자 위완의 위무후 시해와 이를 기점으로 한 일대의 혼란.
교전
세력
위완군魏緩軍
조선朝鮮[2]
위魏
조선朝鮮
지휘관
공자 위완†
하남군 사령관 파녕

왕조†
상방 공숙좌
공자 위앙
상당군 사령관 흔양

대사마대장군 악자
위장군 기황
병력
위 하남군 규모 미상
위군 규모 미상

조선군 약 6만[3]
피해[4]
위완군 규모 미상
규모 미상
결과
공자 위앵의 위후 지위 계승, 업과 방릉을 조선에 할양
영향
공숙좌에게 위나라의 군권 집중, 조선의 위신 상승, 조국멸망전에 직접적 영향
1. 개요
2. 배경
2.1. 위완의 사정
2.2. 위앵의 사정
3. 전투의 전개
3.1. 왕조의 몰락
3.2. 위완의 외세 영입
3.3. 전투민족 조선군 왔다, 이걸로 이겼다다!!
4. 결과
5. 전후처리



1. 개요[편집]


기원전 4세기, 축록중원(逐鹿中原)은 시작되었다!에 나오는 가공의 전쟁. 위무후가 공위 찬탈을 목적으로 기습한 공자 위완에게 시해당하면서 촉발된 사태로, 천운과 여러 요인으로 원 역사보다는 깔끔하게 끝났다.
그러나 엄연히 대국 위나라의 내전이었기에 파급된 소요는 단순히 겉으로 드러난 이상이었으며, 이후 위나라는 대외전략의 상당부를 조선에게 일임하게 될 정도로 몰리게 되었다.


2. 배경[편집]


이 사건은 원 역사의 탁택 전투에 해당하는 사건이나, 여러 이유로 완전히 양상이 돌변하였다.


2.1. 위완의 사정[편집]


기원전 370년, 위 공자 위완은 어머니 위무후의 마음이 완전히 태자 위앵에게 있음을 직감하고 자신의 세력을 동원해 위무후를 기습, 살해하는 데 성공한다. [5]
일이 시작된 이상 어느 한 쪽이 쓰러질 때 까지는 멈출 수 없었던 위완은 즉시 하남을 장악한 채 하남의 장수 파녕을 사로잡아 회유에 성공하였다.[6] 그리고 원래 한나라에 보내질 지원물자를 접수하여 거병하니, 위나라는 혼란해졌다.


2.2. 위앵의 사정[편집]


위완의 직감은 위무후의 내심에 한해서는 매우 정확하였다. 상방 공숙좌는 생전 위무후로부터 위앵을 부탁받았으며, 이미 한참 전부터 그 명에 따라 위앵의 사람이 된 지 오래였다.
여기에 이전에 담당구역이 상당군으로 옮겨졌던 흔양은 건재했으나, 직후 왕조가 상당군을 장악한 채 거래를 시도해왔다.


3. 전투의 전개[편집]




3.1. 왕조의 몰락[편집]


왕조는 이 거래를 위앵과 공숙좌가 받을 거란 확신에 차 덤벼들었으나, 이미 이를 예측한 공숙좌가 왕조의 주변 인물들을 모조리 매수해 버린 지 오래였다.
상황이 급변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고 만 왕조는 당황해 허둥대다 위앙의 명을 받은 흔양에 의해 처형되었다.
이후 잔존 저항세력은 공자 위앙의 주도 하에 일소, 위앵파가 상당군을 장악하니, 대세는 위앵에게 한 발 기울었다.


3.2. 위완의 외세 영입[편집]


일이 이렇게 되자 상당군은 온전히 위앵 측의 손에 떨어졌고, 위완 측이 이미 장악했던 하남조차 흔들리기 시작했다.
위완은 곧바로 전세를 뒤집기 위해 적절한 외세를 물색하는데, 이에 콕 집어 정한 것이 최근 수년간 무패강군을 자랑하며 기세를 올리던 조선이었다.
위완은 상당군의 상당수 지역을 거사가 성공했을 때의 대가로 제시, 조선후 기식의 승낙을 받아내고 조선의 막강한 대군을 불러들이게 된다.


3.3. 전투민족 조선군 왔다, 이걸로 이겼다다!![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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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기 소제목 그대로 쾌재를 외친 위완은 자신의 승리를 확신하면서 조선군 약 6만을 맞이, 조선의 대장군 악자와 위장군 기황을 마주하게 된다. 대장군 악자가 스스로 무장을 해제한 체 군막에 들어서고 차후의 논의를 시작하려던 찰나...

위완은 악자에게 사로잡혀 자칫 잘못하다간 그 주먹에 바로 시체가 될 신세가 되었고, 그 호위 또한 모조리 쓰러진다.

전말은 이러했다. 조선후 기식은 애초에 반역자를 도울 생각이 추호도 없었지만, 표면적으로는 수락한 채 조선상 기취를 상당에 급파하여 자신의 군사행동을 위앵에게 사전에 해명하였다.
위앵은 이 소식에 적잖이 기뻐하며 응하였으나 공숙좌는 조선이 주제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을 못마땅해 하였다.
이에 기취가 이럴 때를 위하여 내려 준 기식의 비단주머니를 열어보니, 그 곳에는 업과 방릉을 요구할 것을 종용하는 명이 들어있었다.[7]

조선은 이렇게 반역자 위완이 내민 큰 이익 대신 명분적으로 앞서는 위앵에게 적당한 이익을 받아내는 것을 선택하였고, 이를 위해 위완을 속일 겸 대장군과 위장군, 그리고 6만의 대군을 하남에 진주시킨 것이다.
조선이 보낸 대규모의 강병, 그리고 이들을 이끄는 조선의 대장군과 위장군이 군사회의에 무장까지 해제하고 들어오는 태도는 위완과 그의 군대를 방심시켰고, 그 결과 조선군이 돌변할 때 아무 것도 하지 못한 채 제압당하고 만다.
그렇게 위완은 그대로 사로잡혀 곧바로 위앵에게 보내지면서 반란은 막을 내린다. 여기까지 조선군이 입은 피해는 단 53명, 그야말로 무용과 책략이 결합된 대성과였다.


4. 결과[편집]


반군이 수세에 몰리고 있음을 확인한 제나라와 한나라 역시 움직였으나, 조선이 병귀신속이란 말에 걸맞게 상황을 빠르게 정리하여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제의 중앙군 원수 전기는 위나라의 난이 이렇게 빠르게 끝난 게 허무하였는지, 사석에서 급히 악자와의 자리를 마련해 짧게 대화를 나누며 아쉬움을 토로하고 다음의 싸움을 기약하였다.

파녕은 상황이 이렇게 되자 진나라로 도주한다. 위나라의 사정을 매우 잘 아는 인물이 몸을 의탁하니 진헌공은 별말 없이 환영하였다.

한편 위앵에게 보내진 위완은 몇 마디의 대화를 나눈 후 바로 처형되었다. 위앵은 여기서 칭왕의 포부를 보이나 그 내용을 아는 이는 그다지 없었다.


5. 전후처리[편집]


이것으로 위완의 난은 끝나고, 정통 후계자인 위앵이 위후에 오른다. 겉보기에 확실히 내정간섭으로 보일 여지가 있던 조선군의 개입은 위나라 차원에서 도움에 큰 사의를 표하며 사전에 맺어진 협정에 따라 업과 방릉을 할양하는 것으로 잘 매듭지어졌다.

위후 위앵은 어렸을 때 조선에서 보낸 기억에 더해 이 도움을 계기로 조선을 크게 기꺼워하며 보게 되었고, 후일 직후 벌어진 진나라의 서하 공략을 계기로 상방 공숙좌에게 자신의 성향과 공숙좌의 실력, 그리고 공숙좌를 신뢰함을 이유로 군권에 한해 전권을 대리하게 하였다.
이에 공숙좌는 눈물을 흘리며 위앵을 배반하지 않을 것을 맹세하니, 공숙은 죽어서는 위나라의 귀신이 될 각오를 굳힌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보고 사실상의 속국이었던 조나라는 기회라 여겨 진공을 획책하는데, 이후의 일은 조국멸망전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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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원 역사의 탁택 전투에 해당하는 사건이나 양상이 상당히 변하였다.[2] 본문 참조[3] 판정 당시 5만 9천이 나왔으나 전개 과정에서 정정되었다.[4] 도주, 와해된 병력등은 제외한 순수 전투손실만 계산.[5] 본래 이를 부추기고 외세를 끌어들여줄 기획,실무자로 원 역사에서 공손기가 있었으나, 여기서는 당시 조선상 문예의 식객으로 머무르면서 임관 전까지 조선을 파악하고 있었다.[6] 여기서의 파녕은 철저히 보수를 보고 따르는 속물이었고, 그 보수를 조건으로 매우 간단하게 위완 측에 붙었다.[7] 일전에 조나라를 함께 칠 때 이런 식으로 기식의 지모에 한 방 먹은 적 있는 공숙좌는 조선후가 신하에게 조언하는 것을 꽤나 즐긴다는 반응을 보이니, 자기가 보기에도 속이 꼬여있는 주군을 생각하는 기취는 이내 빨리 돌아가고 싶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