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식 기관단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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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ype 100
一〇〇式機関短銃
100식 기관단총


파일:attachment/100식 기관단총/1.jpg

초기형 / 40년형

파일:attachment/100식 기관단총/10.jpg

후기형 / 44년형
종류
기관단총
원산지
파일:일본 제국 국기.svg 일본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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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력
역사
1942년~1954년
개발
남부 키지로
개발년도
1939년
생산
남부총기제작소
생산년도
1942년~1945년
생산수
24,000~27,000정
사용국
파일:일본 제국 국기.svg 일본 제국
파일:대만 국기.svg 중화민국
파일:태국 국기.svg 태국
파일:북한 국기.svg 북한
파일:베트남 국기.svg 베트남 민주 공화국
사용된 전쟁
중일전쟁
제2차 세계 대전
국공내전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6.25 전쟁
베트남 전쟁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기종
원형
개수 3형乙
파생형
100/40식
100/44식
제원
탄약
8×22mm 남부
급탄
30발들이 박스탄창
작동방식
블로우백
총열길이
228mm(40년형)
230mm(44년형)
전장
890mm(40년형)
900mm(44년형)
중량
3.8kg(40년형, 탄창 미포함)
3.4kg(44년형, 탄창 미포함)
4.4kg(44년형, 탄창 포함)
발사속도
450RPM(40년형)
800RPM(44년형)
탄속
335m/s
유효사거리
100~150m

1. 개요
2. 개발
3. 특성
4. 개발과 생산이 타국에 비해 왜 부족한가?
6. 둘러보기



1. 개요[편집]



一〇〇式機関短銃(ひゃくしききかんたんじゅう)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군이 사용하던 기관단총이다.


2. 개발[편집]


1930년대에 일본은 수입한 베르크만 기관단총의 단순 블로우백 기구를 바탕으로, 8mm 남부탄 50발 상자형 탄창을 사용하는 시제 1형시제 2형을 개발한다.[1] 1식은 특이하게도 50발짜리 탄창으로 사용했으며 그 이후에 나온 시제 2형은 30발짜리 탄창과 함께 나온 새로운 탄약인 6.5×30mm탄[2]과 작동구조의 부조합으로 심각한 작동불량을 가져왔기에 취소가 된다. 이후 1936년~1937년에 걸친 테스트에서 제1형은 비교적 순조롭게 통과를 하였고 1937년 4월에 육군 기병학교에서 개량형이 테스트되었다. 그러나 군 당국은 여러 부분에 대한 개량을 요구했고 그 뒤로 개발이 지지부진하다 1939년 4월이 돼서야 1형의 개량형인 3형이 남부총기공장에서 생산이 된다. 그러나 곧바로 채택되지 않았고 테스트를 본 육군에서 또 다른 요구를 하여 3형은 개수 3형甲과 이를 약간 개량한 개수 3형乙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이 乙형을 개량한 후 1940년에 황기를 기준으로 무기 넘버를 붙이는 관례에 따라 100식으로 불리게 된다.


3. 특성[편집]


100식은 보병용 기본형과 공수부대형으로 이루어진 1940년형과 1944형으로 나뉘어진다. 기본형은 고쿠라 조병창에서, 공수부대용은 나고야시 조병창에서 생산을 맡았는데, 이런저런 이유로 생산이 늦어져 1942년에야 각각 약 7,000정과 약 3,000정이 생산되어 해군 육전대와 공수부대에 주로 지급돼 오키나와인도네시아, 필리핀 등지에서 사용된다. 그리고 1944년에 일본군 내부의 기관단총 수요의 증가와 성능의 인정에 더불어 공업 생산 능력의 저하에 따라 개량된 1944년형이 나고야의 아츠사 조병창에서 개발 및 생산된다. 그러나 이 시기에는 일본 본토가 미군 폭격기에 쑥대밭이 되고 원자재도 부족해서 생산량이 7,000~8,000정 정도밖에 안 되었고 필리핀 전투에서 사용되었다. 연대당 100정씩 지급되었다.

티모르 전투, 마나도 전투, 레이테 전투와 오키나와 전투에서 공정부대에 의해 사용되었다. 또한 국공내전, 6.25 전쟁, 1차 인도차이나 전쟁 등에도 사용되었다고 알려저 있으며, 심지어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당시 중국에게 지원받은 무자헤딘에게도 쓰였다고 한다.

하지만 현재까지 남아있는 것은 5정도 채 되지 않는데 그 이유는 상기했듯이 대부분의 물량이 일본에 비축된 채로 전쟁이 끝나 해당 물량이 모두 회수돼서 폐기처분되었고 일본의 식민지나 작전지역에 남겨진 것들도 여러 전쟁을 통해 소실되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100식이 사용하는 8mm 남부탄이 호환되는 총기가 많은 편도 아니었으므로 100식을 계속 사용할 이유는 더더욱 없었을 것이다. 현재까지 살아남아서 일반에 공개된 것은 전 세계에서 호놀룰루 해군박물관에 전시된 것 단 한 정 뿐이며 나머지는 개인이 소유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공수부대형은 기본형에서 목제 개머리판이 180도 옆으로 접히게 돼 있어서 2식 소총과 비슷한데 길이가 준 장점과 함께 내구력이 감소되는 약점도 가졌다.

착검이 되는 몇 안 되는 희귀한 기관단총. 초기형인 40년형에는 총검을 착검한 채로 사격할 때 안정된 사격을 위해 전용착검장치를 달아놨다. 심지어는 ZK-383처럼 전용 양각대(바이포드)까지 존재한다. 여기에 더해서 유효사정거리를 한참 뛰어넘는 1,500m까지 조준되는 장거리용 조준기를 달아놓았다. 이는 비단 일본군을 넘어서 세계 군 무기 역사에 유례 없는 그야말로 부착 가능한 고급 옵션을 되는 대로 다 넣은 특이한 기관단총이지만, 물론 사거리가 짧은 기관단총엔 쓸데없이 생산성만 깎아먹어 양산도를 낮추는 요소일 뿐이다.

사실 기관단총이라고 옵션 넣는 게 불필요한 것은 절대 아니다. 총검을 달기 위한 착검기능의 경우 유명한 이스라엘UZI 역시 착검이 가능하며 실전에서도 잘 써 먹었다. 영국 역시 MP28란체스터 기관단총으로 카피하면서 착검 기능을 넣었고 스텐 Mk.5과 스텐의 후신인 스털링 기관단총까지 착검 기능을 넣었으며 심지어는 독일H&K MP5까지 H&K G3 총검을 착검할 수 있는 모델을 생산한 적이 있다. 이탈리아에서도 MAB 38에 착검 기능을 추가했다.

그리고 양각대의 경우도 있으면 안정된 엎드려 사격에 도움을 준다. 문제는 애초에 편하게 들고 다니다가 근거리에서 난사로 상대방을 제압해야 하는 기관단총의 역할과는 거리가 상당히 멀다는 것이다. 애초에 양각대는 유효사거리 100m도 안 넘어가는 기관단총에 달 필요가 없는 물건이다.[3]

장거리용 조준기도 마찬가지인데, 유효사정거리 이상을 조준해 봤자 안 맞는 것은 기본인 데다가 맞아도 살상능력이 없다는 것은 둘째 치고라도, 근거리에서 연사를 통해 적을 제압해야 할 무기에 저격소총이나 쓸 정밀한 조준기를 달아봤자 조준 속도만 줄어들지 별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4]

즉, 이 세 가지 기능은 있으면 좋기야 하지만 보통은 써먹을 일이 없다고 판단되어서 생산 속도와 휴대성 등을 고려해 대부분 안 넣는 편인데, 이 물건은 이 기능들을 다 포함하고 있는 꽤 사치스러운 물건인 셈이다.[5]

게다가 앞서 언급했듯이 기관단총치고는 각종 최고급 옵션이 들어간 나머지 실제론 소량만 생산되었다. 총량 2만 5천 정 정도라고. 비싸기로 소문난 톰슨 기관단총이 130만 정을 찍었다는 데 비하자면.

이렇게 비싼 기관단총이 만들어진 이유는 다음과 같다. 원래 일본육군은 "고작 권총탄을 자동으로 쏴서 어쩔 건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일본 해군 육전대가 1차 상해사변 때 SIG M1920을 잘 써 먹는 걸 보고 생각을 고쳐 먹고 설계를 시작, 공수부대용 등으로 생산했다. 특이한 것은 일본 해군은 SIG M1920를 수입할 때 9mm 파라블럼이 아닌 7.63x25mm 마우저탄 사용형을 요구했다. 아마도 중국에서 생산된 MP18(역시 마우저탄 사용)을 상대하며 애를 먹은 경험 때문일 것이다.

사실, 사용탄인 8x22mm 남부가 .380 ACP와 거의 동급인 약한 권총탄이었기 때문에 일본 군부도 이 권총탄을 사용하는 기관단총은 탐탁지 않아하였을 것이라는 말이 있다. 또한 이를 사용하는 바나나형 탄창 역시 문제가 있는데 정글에서는 덩굴 등에 걸리기 쉽고 그에 따른 오발 사고가 생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4. 개발과 생산이 타국에 비해 왜 부족한가?[편집]


아무리 보아도 군대의 규모에 비해 일본군이 보유했던 기관단총의 수는 매우 부족하고 개발과 생산도 부족한 면이 많다.

사실, 일본 육군은 러일전쟁이나 중일전쟁과 같이 넓은 전장에서 주로 실전경험을 해봤기에 사거리가 짧은 기관단총의 가치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는 딱히 일본군에 국한된 것이 아니였다. 당시 영국군, 프랑스군, 미군, 소련군 등 여러 주요 군대들도 기관단총을 군용으로 부적합하다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영미군은 독일군, 소련군은 핀란드군의 기관단총에 호되게 당한 이후 본격적인 배치를 시작하였다.

하지만 일본이 상대하고 있었던 중국군은 기관단총을 운영하긴 했지만 그 수가 많지 않아 일본군의 이목을 끌지 못했다.

또한 국력의 한계로 탄약 수급에 어려움을 겪어서 탄약을 대량사용하는 기관단총을 대대적으로 사용하기엔 명백한 어려움이 있을 뿐만 아니라 육군 기병대만 기관단총에 관심을 보였기에 예산상의 제약도 있어 1937년에 잠시 개발이 중단되었다. 그나마 중일전쟁으로 전비예산이 풍부하게 편성되고 공수부대 등 여러 병과에서 관심을 보여 개발이 진행되었다. 물론 6.5mm → 7.7mm 주력 탄환의 전환과 같이 대규모의 산업력을 소모하는 사건들이 겹치면서 생산이 지지부진하다 1944년 즈음에야 기관단총의 양산을 겨우겨우 제대로 개시하게 된다. 그러나 이 때에는 고품질을 유지하면서 대량생산하기도, 전선으로 수송도 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일본의 탄약소모에 대한 걱정과 우려는 비단 100식 기관단총 뿐만 아니라 다른 보병화기 전반에서 자주 드러난다. 현대적인 스토크스 방식 박격포가 도입되고 개발되었음에도, 결국 소량만 생산되고 구식 보병포와 대대 지원화기를 양분했는데, 이 또한 박격포의 빠른 발사속도와 탄약 소모를 일본군의 보급체계로써는 감당할 수 없다는 우려에서 나온 판단 때문이었다.[6] 이렇듯 일본군은 탄약 소비에 대해 대단한 경계를 하고 있었는데 이는 러일전쟁을 기점으로 1차 세계대전의 전훈에 대한 자체적인 판단이 더해 서구식 화력중심교리를 일본의 국력으론 감당할 수 없다는 결론에서 나온것으로 무기체계 뿐만이 아니라 소부대 전술부터 교리에 까지 영향을 주고 있었다.


5. 미디어[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100식 기관단총/대중매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6. 둘러보기[편집]


제2차 세계 대전기의 일본군 보병장비
파일:일본 제국 국기.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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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일전쟁제2차 세계 대전
일본군보병장비

개인화기
소총
볼트액션 소총
13년식 소총, 30년식 소총, 35년식 해군총, 38식 소총, 44식 기병총, 97식 저격총, 99식 소총, 99식 저격총, 100식 공수소총, 1식 소총, 2식 소총, 모식 소총, 이식 소총
반자동소총
갑형 자동소총, 을형 자동소총, 병형 자동소총, 4식 자동소총
기관단총
M1927 기관단총, 1형 기관단총, 2형 기관단총, 100식 기관단총, 베식 기관단총, MAB 38
권총
26년식 권총, 남부 권총, 15년식 권총, 스기우라식 권총, 하마다식 권총, 90식 신호권총, 94식 권총, 해군 4식 더블배럴 산탄권총
지원화기
기관총
경기관총
11년식 경기관총, 96/99식 경기관총, 92식 7.7mm 기총, 시제 1식/3식 경기관총
중기관총
3년식 기관총, 92/1식 중기관총, 93식 중기관총, 89/97식 고정 기관총, 98식 중기관총, 97식 중기관총, 98/1식 선회 기관총, 99식 기총
대전차화기
97식 자동포, 4식 7cm 분진포, 5식 8cm 분진포, 99식 파갑폭뢰, 갈고리 폭탄, 자돌폭뢰
화염방사기
93식 소화염발사기, 100식 화염발사기
척탄통 및 박격포
10식 척탄통, 89식 척탄통, 97식 곡사보병포, 94식 90mm 박격포, 96/97식 150mm 박격포
유탄
91식 파쇄 수류탄, 10식 파쇄 수류탄, 수류탄/일본군, 100식 총류탄발사기, 2식 총류탄발사기
냉병기
군도
일본 군도(구군도/신군도), 30년식 총검, 35년식 총검
취소선 : 실전에 투입되지 않음














베트남전기의 베트남 인민군(월맹군) 보병장비
파일:베트남 국기.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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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심지어 1식 기관단총은 그 Vz.23보다도 무려 13년 앞선 세계최초로 '권총 손잡이에 탄창을 삽탄하는 설계방식'을 채택했다. 다만 1930년대에 개발한 데다 최초로 만들다보니 곡선형 탄창을 삽탄하기위해 권총 손잡이는 GSN-19나 일부 TKB 시리즈 소총들 처럼 인체공학적이지 않은 모양을 가진 데다가, 총몸의 길이가가 좀 더 길었다.[2] 이 탄은 38식 아리사카에서 사용하던 6.5mm탄의 탄피를 30mm로 단축시킨 돌격소총탄에 가까웠다.[3] 다르게 보면 극초기 시조 기관단총 개념에 충실하다 볼 수 있다. 이 개념이 생길 때의 기관단총의 시조라고 볼 수 있는 물건은 권총탄을 쓰는 기관총이라는 물건이였으니.[4] 물론 100식만 이런건 아니고 하이파워같은 권총이나 톰슨 기관단총, PPD같은 기관단총들도 좋은게 좋은거라며 소총용 조준기를 장착한 사례가 없지는 않다[5] 체코슬로바키아ZK-383도 비슷한 기능들을 포함하고 있지만 분대지원화기라는 컨셉으로 개발된 데다, 사용 탄이 달라 전체적인 성능이 다르다.[6] 러일전쟁 이후 화력 중심교리는 전면전시에는 일본군이 감당할 수 없다는 인식이 생겨났는데, 1차 세계대전의 지리한 참호전은 이런 생각에 쐐기를 박아 버렸고 이를 만회하기 위해서 채택한 것이 야간의 기습 돌격, 화학탄 등의 것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