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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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1. 아시아
1.1.1. 대한민국
1.2. 미국
1.3. 유럽
1.4. 아프리카
2. 문화
2.1. 음악
2.2. 영화
2.3. 방송
3. 이 시대에 시작된 것들
4. 이 시대에 쇠퇴한 것들
5. 이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작품
6. 1950년대에 들어가는 해


1. 개요[편집]


서기 1950년 ~ 1959년까지를 이르는 연대시기.

세계에서는 1955년 들어서 유엔에 가입하게 되는 국가들이 늘어났으며 이들은 이 연대 들어서 국제사회의 일원임을 표방하고 있다. 그리고 동서의 냉전이 어느 때보다 격화되었던 시기라 자유진영과 공산진영간의 대립이 장기화되었으며 특히 미국소련 양대산맥 구도가 더욱 굳혀지기도 하였다.

컴퓨터가 등장하기 시작한 연대라는 큰 의미를 지닌 연대이다. 물론, 이는 정부 등의 공공기관 등에 한정된 얘기이고, 일반인들이 컴퓨터를 본격적으로 접하게 된 것은 1980년대까지 가야 한다. 컴퓨터가 현재와 비슷한 사이즈가 된게 짧게 잡아야 1960년대 말이다. 그리고 1970년대만 해도 컴퓨터는 미국 같은 나라들의 중산층 가정도 겨우 돈을 모아서 살 수 있는 물건이었다.

1957년 소련스푸트니크를 띄우면서 인류가 최초로 우주에 진출하기 시작한 시기이기도 하다.

이 시기 출생자들은 현재 만 64세~만 74세이다. 마지막으로 중학교 입학시험을 본 세대가 1957년생이다.

1.1. 아시아[편집]


중국은 1949년 국공내전에서 중국공산당이 승리하며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하였다. 중국국민당은 중국 본토에서 밀려나며 대만 섬, 하이난 섬 등으로 쫒겨나지만, 중화인민공화국은 1950년 하이난 섬도 점령하였다. 이로써 양안관계가 성립되었다. 1950년대 초 중국은 6.25 전쟁에 불법 개입했으며 티베트를 침공해 병합했다.

중국에서의 마오쩌둥은 은행과 기업을 국유화하였고, 농업과 상공업을 집단화하고, 토지개혁 등의 사회주의 정책을 펼쳤다. 그의 사회주의 정책 등으로 마오쩌둥의 인기는 크게 상승하였다. 1950년대 중에는 핵폭탄 연구도 시작했다. 다만 이상적인 사회주의의 꿈으로 58년부터 대약진운동을 실시했지만, 처참히 실패했다.

일본은 1950년 6.25 전쟁을 계기로 군수산업이 성장하면서 재기하여 GHQ의 생각과는 달리 전전시대 모습으로 회귀했다. 이에 따라 전범 내지 전쟁협력 기업인들과 정치인 등이 일선에 복귀했으며 경제도 '게이레츠'라는 기업집단 중심 독점 경제체제로 돌아갔고, 교육정책도 군국주의국가신토 색을 뺀 전체주의 교육으로 회귀했다. 1951년에는 샌프란시스코 조약으로 전후 처리가 이루어졌지만, 피해국인 한국중국/중화민국 과거사 문제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지 않았다. 1954년에 자위대의 뿌리인 유사 군사조직 '경찰예비대'를 발족하고, 1955년에는 민주당과 자유당이 통합하여 자유민주당(자민당)을 출범시켜, 당시 횡행했던 좌익 노동운동에 무자비한 탄압을 가하기 시작했다.

북한이 한국을 남침하여 6.25 전쟁이 일어나고 북한 또한 황폐화되었다. 그리고 김일성 세력이 1956년 8월에 8월 종파사건으로 반 김일성 세력을 모조리 숙청하고 김일성의 독재를 구축하는 한편, 1953년부터 전후복구 5개년 계획을 실시하며 1956년에 대중동원운동인 천리마 운동을 시작했고, 소련동구권 등의 원조를 받으며 망가진 경제 인프라 복구에 박차를 가했다.

  • 많은 신생 독립국
그 이외에도 인도가 1950년에 공화국이 되고, 파키스탄도 1956년에 자치령에서 벗어나 공화국이 된다. 말레이시아가 1957년에 독립하는 등 아시아식민지 지역들이 독립하기도 했다.

1.1.1. 대한민국[편집]



1950s KOREAN WAR HOME MOVIE SOUTH KOREA 34250

이 시기 대한민국은 1950~1953년까지 6.25 전쟁으로 인해 연대 초부터 전쟁의 격랑과 시련을 겪게되는 시기였다. 3년 간의 전쟁으로 인해 국토가 황폐화되었고, 경제상황도 초토화된 상황이었으며, 공권력 수준의 범죄조직들이 우후죽순 생겨나고, 실제로도 정치에 뛰어들던 시기였다.

전쟁으로 얼룩졌던 1950년대 초 이후 한국은 국가를 처음부터 완전히 재건설해야 하는 과제에 직면했던 시기이기도 했다. 전쟁으로 피폐화된 전기, 전화, 교통, 행정체계등 기본 인프라 시설을 복구함은 물론이고 기존 지주/소작 체계를 해체하고 현대적인 경제구조를 구축했으며 일본군식 체계, 제식, 전술을 따르던 대한민국 국군의 시스템을 점차 미군식으로 바꿔갔다. 또한 일제강점기에 소실된 조선시대의 전통을 복구하는 한편 국악, 불교, 유교, 궁중문화, 조선왕조실록 등 문화유산들은 조선왕조나 조선총독부가 남긴 폐습들은 미국식으로 고쳐나갔다.[1]

정치상황에 있어서는 이승만 대통령이 이 시기 초에는 압도적인 지지를 받으며 선거에서 승리하고 미국식으로 국가시스템을 구축해 갔지만, 이 시기 말기가 되며 측근 관료들의 부패와 실책으로 몰락해갔다. 지지율이 떨어진 이승만 정권이 부정선거와 독재로 장기집권을 시도하며 국민들과 충돌하여 정치적으로 혼란스러웠던 시기이기도 하다. 정치적으로 1950년대는 이승만 정권 집권기 그 자체였으며, 이승만 정권의 전성기 정점인 동시에 몰락의 시대였다.

사회 경제적으로는 전후 베이비 붐의 시작과 북한에서 내려온 실향민의 유입으로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났으나,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산업 구도는 농업 수산업의 1차 산업과 미국의 원조물자를 가공하는 내수 경공업 위주였고, 이를 개편하기 위해 경제계획을 실시해 수출 주도 위주로 재편하고자 시도하던 시기였다.

출산율의 경우 6명대라는 높은 수치를 기록했으며 출생아 수는 1950년대 초반에는 가임기 여성의 수가 적었고 6.25전쟁의 혼란도 있었기에 60~70만 명대 정도를 기록했지만 6.25 전쟁의 혼란이 어느정도 수습된 1955년부터 출생아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해서 90만 명대를 기록했고, 1959년에는 100만 명대를 기록하게 되었다. 따라서 1955년생부터 1974년생까지 연간 출생아 수 90만명 이상의 세대를 베이비 붐 세대라고 부른다.

1.2. 미국[편집]


유럽 국가들이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많이 어려웠지만 미국만은 아니었다. 미국은 종전 이후 고도의 경제 성장과 전성기를 이룩하였다. 자본주의 진영의 수장인 미국과 그 동맹들이 공산주의 국가들과 정치적 대결구도를 형성하였고 이른바 냉전이 시작되었다. 한편으로는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모여 흑인 민권 운동을 조직했다.

미국은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폐허가 된 서유럽과 아시아 국가들을 지원하는 적극적 대외정책을 펼쳤다. 서유럽에 전후 복구를 지원한 마셜 플랜이 대표적이다. 이러한 미국의 주요 목적으로는 소련의 영향하에 있는 공산주의의 확장을 막기 위함이였다. 늘어가는 핵폭탄의 위력으로 군비 경쟁이 심화되었다. 소련은 미국 중심의 북대서양 조약 기구(NATO) 동맹에 대항하여 소련 위성국들과 바르샤바 조약을 맺었다. 미국은 경쟁 속에서 한국전쟁을 겪었다. 쿠바에서는 피델 카스트로가 집권해 미국과 대립각을 세웠다. 이후 62년 쿠바 미사일 위기를 겪으며 갈등이 고조된다.

일단 1940년대 말부터 경제, 사회, 문화 전성기가 시작되어 1960년대 초에 끝났다. 마치 1980년대 일본 버블경제가 흘러간 맥락과 같다.[2] 일단 1965년에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면서 미국의 1950년대 전성기는 끝나고 히피문화가 시작되고, 대도시(로스앤젤레스, 뉴욕 등)들의 우울하고 이런 분위기는 1975년 이후에 나타났다.[3] 아직도 1950년대에 청년기를 보낸 미국 노년층들은, 이 때로 가서 다시 젊은 시절을 보내고 싶다고 말하기도 한다.

다만 모두가 중산층 천국 시절의 혜택을 받은 건 아니다. 대부분의 영국계, 독일계 같은 서유럽계 백인들만 혜택을 봤지, 이탈리아계 같은 남유럽계 백인, 흑인, 히스패닉, 아시아계들은 여전히 극소수를 빼고는 사회의 하류층을 담당했다. 일부는 마피아, 조폭, 갱이 되어 잘사는 서유럽계 백인들을 향해 범죄를 저지르거나 같은 하류층 갱끼리 전쟁하거나 남북전쟁의 잔재로 1960년대 흑인 민권운동으로 폐지되기까지 뿌리깊게 남아있던 짐 크로법, 인종차별의 굴레 속에서 비참하게 살았다. 이 문제는 1980년대 초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이 등장하면서 거의 없어졌다.

미국 내부 정치로는 매카시즘, 멸공이 성횡했다.


1.3. 유럽[편집]


유럽제국주의 열강들은 완전히 몰락하여 마셜 계획의 원조를 받으며 간간히 전후 회복을 이루게 된다. 그리고 유럽 국가들끼리 뭉치려는 시도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동유럽은 완전히 공산화되었고 1955년에 오스트리아의 분할통치가 종료되어 영세 중립국이 되었다.


1.4. 아프리카[편집]


아프리카에서도 수많은 국가들이 독립하기 시작했지만, 유럽인들이 자로 그어놓은 국경 탓에 민족 분쟁이 일어났다. 유럽의 영향권으로부터 벗어나기 시작한다.

2. 문화[편집]



2.1. 음악[편집]


영미권에선 1950년대 초반과 중후반경으로 주류 장르가 바뀌었는데 초반경에는 이전 시대인 40년대를 담습하여 스탠더드 팝, 스윙재즈 계열의 중후한 기성장르들이 여전히 큰 인기를 끌고 있었다.

한 가지 특이점이 있다면, 일종의 혈연관계라 할 수 있는 정통 블루스과 스윙재즈가 다시금 크로스오버하여 초창기 알앤비가 등장한 것이 50년대 초반이다.

그 이후 50년대 중반경에 들어서 척 베리, 리틀 리처드와 같은 뮤지션들이 그루비한 알앤비와 백인들의 템포가 빠른 컨트리 뮤직을 섞어낸 '로커빌리' 장르를 개척해 활동했으며, 로커빌리라는 장르는 '로큰롤'이라는 이름으로 바뀐다.

로큰롤 시장을 주류로 끌어올린 장본인은 로큰롤의 황제라 불린 엘비스 프레슬리였고 엄청난 상업적 성공과 이를 통한 파급력으로 인해 1950년대 중후반, 미국을 넘어 전 세계 대중음악계의 주류를 바꿔버린다.

2.2. 영화[편집]


할리우드의 영화산업은 이 시기, 1930~40년대의 1차 전성기 이후 2차 클래식 전성기를 맞는다. 특히 신진 여배우들과 말런 브랜도, 그리고 그가 영화계로 불러일으킨 메소드 연기와 반항아 열풍이 이 시대를 상징하는 코드라고 볼 수 있겠다.

특히 브랜도를 시작으로 한 청바지가죽재킷, 티셔츠[4]를 걸치고 리젠트 머리를 즐겨하며 거칠게 오토바이머슬카로 질주하던 비트 세대의 반항아 기질과 기성문화에 대한 거부감은 1950년대 중후반, 엘비스 프레슬리로큰롤 열풍과도 맞물리며 영화와 음악, 양쪽에서 한 시대의 사회문화적 변화를 크게 맞이하게 된다.[5]

이 시기에는 특히 1920~30년대생 스타 여배우들[6]이 많이 나왔는데, 우리가 잘 아는 오드리 헵번, 마릴린 먼로부터 시작하여 엘리자베스 테일러, 그레이스 켈리, 소피아 로렌 등의 여배우들이 할리우드의 2차 황금기를 화려하게 빛냈다. 그리고 나탈리 우드같은 청춘스타도 유명했던 시기.

물론 1930년대부터 활동해오던 제임스 스튜어트, 헨리 폰다, 캐리 그랜트, 존 웨인, 게리 쿠퍼같은 1900년대생 레전드 남배우들도 이 시기에 중견으로서 활발히 활동했다. 그런데 이 시기에 등장한 남배우들 중 독보적인 인물이 바로 1924년말런 브랜도로, 브랜도는 메소드 연기를 할리우드에 도입시켜 클래식 시대 이후의 연기 방식을 완전히 뒤바꿔버린다.[7] 그는 동시대의 다른 모든 배우들뿐만 아니라 역사상으로 보아도 가장 위대한 배우들 중 하나로 반드시 꼽힌다.[8] 이 외에도 록 허드슨, 폴 뉴먼, 제임스 딘을 비롯한 신진 미남배우들도 큰 인기를 끌기 시작한 시대였다.

이 시대부터 헤이즈 오피스의 규제가 약해지며 이후의 뉴 할리우드 시대가 개척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2.3. 방송[편집]




3. 이 시대에 시작된 것들[편집]


  • 대한민국징병제: 제도 자체는 1949년 병역법 시행 때부터 있었으나, 평시 징병제는 1951년부터 도입됐다.
  • 배추김치[9][10]
  • 부대찌개
  • TV방송[11]
  • 인류의 우주 진출: 스푸트니크 쇼크
  • 제3세계의 등장.
  • 한미상호방위조약
  • 휴전협정
  • 007 시리즈

4. 이 시대에 쇠퇴한 것들[편집]


  • 남로당파, 소련파, 연안파북한의 반 김일성 세력[12]
  • 대한민국백의민족 문화


5. 이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작품[편집]




6. 1950년대에 들어가는 해[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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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부다처제(일명 ), 소작제, 노비(노비는 명목상 금지였으나 부잣집들은 머슴이라는 이름하에 대놓고 노비처럼 부려먹는 경우가 허다했다) 등[2] 일본 버블 경제도 1980년에 시작되어 1992년까지 지속되었다. 다만부자는 망해도 3년을 간다고1995년까지 어느 정도 산 걸 보면, 이것도 꽤 오래 간거다.[3]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 천문학적으로 돈을 너무 퍼부어 경제가 1960년대 말을 기준으로 어려워졌고, 엎친 데 격으로 석유파동도 일어나 더 어려워진 거다.[4] 말런 브랜도와 제임스 딘이 등장하기 전까지 티셔츠는 지금의 팬티 같은 속옷의 개념이었으며, 청바지는 가난하고 후진 하류층 노동자들을 대표하던 패션이었다. 대부분이 일용직 노동자거나 어린 나이에 파트타임 작업만을 하던 젊은 비트 세대들이 이들에게 열광한 이유이기도 하다. 이들의 등장으로 인해 정장과 드레스만을 위시로 하던 패션계에서도 일대 혁명이 일어나게 된 것.[5] 이후 이들에게서 더 나아가 1960년대에는 다들 알다시피 대마초와 각종 환각제, 통기타, 장발, 집단 가출, 록 음악 등의 키워드로 대표되는 히피들이 등장하여 기존 질서에 대한 저항의 끝을 보여준다. 이들은 오히려 너무 경도되어 막장으로 나가면서 당대 신세대의 거대한 반항심리 조류를 종결시켜 버렸다. 이후에도 세대적 갈등이나 충돌이 없던 것은 아니었지만 1950년대의 비트세대, 1960년대의 히피세대만큼의 거대한 담론으로까지는 이어지지 않았다.[6] 잉그리드 버그만, 비비안 리로 대표되는 1910년대생 여배우들보다는 뒷 세대이다.[7] 당장 브랜도와 비슷한 세대의 위에 언급된 여배우들 또한 다들 연기력이 뛰어나기로 유명했지만, 브랜도와는 연기 스타일이 다르다.[8] 흔히 제임스 스튜어트, 로런스 올리비에, 그레고리 펙, 오드리 헵번 등과 함께 거론된다.[9] 배추김치가 널리 퍼진건 우장춘 박사의 공이다. 자세한 것은 우장춘 항목 참조.[10] 배추김치가 이때부터 퍼진 게 아니라, 지금 우리가 먹는 배추 품종이 이 시기에 나온 것이다. 배추김치 자체는 조선시대 후기에도 있었고 김치의 원형은 훨씬 오래 전부터 있었다.[11] 1956년에 대한민국 최초의 TV방송국인 HLKZ-TV가 개국했다. 다만 이 당시에 TV방송이 시작되었다고 해도, 라디오조차도 대중화 되지 않았던 시절이었던데다가 서울에서만 송출되었기 때문에 TV는 철저하게 서울 시내 부유층들의 전유물이었다. 1970년대 초반까지도 "TV 있으면 부유층"이라는 등식이 지배적이었다. [12] 6.25 전쟁 이후 8월 종파사건으로 반대세력을 모조리 날려버렸다. 그나마 김일성을 견제할만한 계파로 갑산파가 1960년대까지 남아있었지만 김일성 세력의 방계로서 김일성을 지지하다가 나중에 반발한 것에 가깝다.[13] 메인 스토리.[14] 배경 자체는 1960년이지만 50년대 문화의 연장선으로 봐도 무방하다.[15] 배경은 1편 기준으로 2161년의 먼 미래지만 1950년대 스타일의 미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