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일본 거품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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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타 ]





1. 개요
2. 1980년대의 일본 경제
3. 배경
4. 당시 생활상
5. 각종 부정부패 사건
5.1. 오노우에 누이 사건
5.3. 허영중(이토만) 사건
6. 거품경제 이후의 일본
7. 세계에 끼친 영향
8. 서브컬처 관련
8.1. 버블 시대의 작화
8.2. 이 시대의 작품 및 시대상의 작품
9. 참고/관련 자료
10. 같이보기



1. 개요[편집]




1980년대 미국을 뒤쫓으며 폭등하는 일본의 GDP[1]

버블을 통해서 "공짜 점심은 없다",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는 없다"는 경제의 대원칙이 재확인됐다. 버블 안에 있을 때는 누구도 손해를 보지 않고 이익을 보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버블이 한 번 발생하면 경제적으로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 한다.

- 1993년 일본 경제백서 中[2]

일본 거품경제(バブル景気[3], Japanese asset price bubble)는 1980년대 후반 일본의 주식과 부동산 시장 전반에 나타났던 거품경제를 일컫는다. 이 당시 일본은 비정상적인 자산 가치 상승 현상과 과열된 경제 활동, 무분별한 통화 공급 그리고 신용 팽창을 겪었는데 이후 거품이 붕괴되며 1,500조 엔의 자산[4]이 공중분해됐다. 시기는 대개 1986년부터 1991년까지, 즉 플라자 합의부터 제1차 헤이세이 불황이 터질 때까지로 보며 이후 일본은 인구 고령화, 금융시장 부실화, 정부의 미약한 대응, 디플레이션 등 여러 요인과 결합해 잃어버린 10년으로 불리는[5] 장기 불황을 맞게 되었다.

그 여파를 요약하자면 일본의 1994년 GDP가 5조 달러였는데 2021년 일본 GDP도 5조 달러다.[6] 이는 1994년 기준으로 GDP 5조 달러 중 3조 달러 이상이 과다한 투자로 불어난 거품 돈이었고 순수한 돈은 2조 달러도 채 안 됐다는 의미로, 이 대량의 거품 돈이 순수한 돈으로 바뀌는 과정이 30년째 진행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게다가 화폐는 시간이 지날수록 불가피한 인플레이션이 발생해 단위가 올라간다는 것까지 감안하면 더욱 막막하다.

2. 1980년대의 일본 경제[편집]




거품경제 직후인 1992년 도쿄1080p[7] 촬영한 영상[8]
1960년대 이후 일본은 30여 년간 고도 경제성장을 이어갔다. 일본은 1960년대에는 10%, 1970년대에는 5%, 1980년대에는 4%에 달하는 경제 성장률 덕에 어느덧 세계 2위 경제대국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으며[9] 1990년까지 일본 1인당 명목 GDP는 스웨덴북유럽 국가들과 자웅을 겨루는 수준이었다.

세계 50대 기업 시가총액 순위[출처](단위=백만 달러)
순위
기업
국적
시가총액
87년도 매출액
88년
87년
1
1
NTT
[[일본|
파일:일본 국기.svg
일본
]][[틀:국기|
]][[틀:국기|
]]

276,840
46,639
2
2
IBM
[[미국|
파일:미국 국기.svg
미국
]][[틀:국기|
]][[틀:국기|
]]

76,049
54,220
3
4
스미토모은행
[[일본|
파일:일본 국기.svg
일본
]][[틀:국기|
]][[틀:국기|
]]

65,335
300,933
4
3
엑슨
[[미국|
파일:미국 국기.svg
미국
]][[틀:국기|
]][[틀:국기|
]]

62,572
82,100
5
8
다이이치칸교은행
[[일본|
파일:일본 국기.svg
일본
]][[틀:국기|
]][[틀:국기|
]]

61,971
325,206
6
9
후지은행
[[일본|
파일:일본 국기.svg
일본
]][[틀:국기|
]][[틀:국기|
]]

59,746
293,103
7
6
도쿄전력
[[일본|
파일:일본 국기.svg
일본
]][[틀:국기|
]][[틀:국기|
]]

57,318
32,455
8
10
미쓰비시은행
[[일본|
파일:일본 국기.svg
일본
]][[틀:국기|
]][[틀:국기|
]]

53,934
296,063
9
5
일본개발은행
[[일본|
파일:일본 국기.svg
일본
]][[틀:국기|
]][[틀:국기|
]]

52,170
225,909
10
7
노무라 증권
[[일본|
파일:일본 국기.svg
일본
]][[틀:국기|
]][[틀:국기|
]]

51,154
28,707
11
13
로열 더치 쉘
[[영국|
파일:영국 국기.svg
영국
]][[틀:국기|
]][[틀:국기|
]]

[[네덜란드|
파일:네덜란드 국기.svg
네덜란드
]][[틀:국기|
]][[틀:국기|
]]

49,312
78,312
12
14
토요타
[[일본|
파일:일본 국기.svg
일본
]][[틀:국기|
]][[틀:국기|
]]

46,334
54,984
13
12
산와은행
[[일본|
파일:일본 국기.svg
일본
]][[틀:국기|
]][[틀:국기|
]]

46,136
262,051
14
11
제너럴 일렉트릭
[[미국|
파일:미국 국기.svg
미국
]][[틀:국기|
]][[틀:국기|
]]

39,617
39,300
15
23
마쓰시타전기
[[일본|
파일:일본 국기.svg
일본
]][[틀:국기|
]][[틀:국기|
]]

34,852
39,696
16
77
신일본제철
[[일본|
파일:일본 국기.svg
일본
]][[틀:국기|
]][[틀:국기|
]]

32,252
19,276
17
32
히타치
[[일본|
파일:일본 국기.svg
일본
]][[틀:국기|
]][[틀:국기|
]]

31,721
40,980
18
27
도카이은행

31,288
194,270
19
16
일본장기신용은행

30,078
156,087
20
20
미쓰이은행

29,351
185,106
21
17
AT&T

28,855
33,600
22
24
포드

28,585
71,600
23
15
BP

27,441
51,589
24
22
브리티시텔레콤

26,612
19,073
25
19
미쓰비시신탁은행

25,621
99,750
26
25
제너럴 모터스

25,050
102,000
27
21
스미토모신탁은행

23,517
94,590
28
40
NEC

22,986
22,362
29
38
간사이전력

22,744
16,573
30
31
미쓰비시부동산

22,647
2,076
31
30
다이와증권

22,282
361,606
32
18
듀폰

22,182
30,500
33
26
머크

22,162
5,061
34
46
도쿄가스

21,431
6,013
35
98
미쓰비시중공업

21,297
14,788
36
82
도시바

21,151
29,425
37
41
도쿄은행

21,055
153,363
38
37
닛코증권

20,801
24,077
39
44
벨사우스

20,753
12,300
40
42
도쿄화재해상보험

20,155
6,244
41
35
필립 모리스

19,817
27,700
42
62
후지쓰

19,335
16,862
43
33
아모코

18,743
22,400
44
69
전일본공수

18,140
4,217
45
39
모빌

17,946
56,700
46
99
닛산자동차

17,919
34,957
47
64
주부전력

17,490
13,452
48
47
월마트

17,307
15,959
49
60
다우 케미칼

17,186
13,377
50
58
다케다화학

17,170
5,214
1988년 시가총액 기준 세계 50대 기업 순위. 세계 50위 기업 가운데 무려 33개가 일본 기업이고 더구나 20위 위로는 일본 기업이 자그마치 16개에 달하며 시가총액 1위 NTT의 시가총액은 2위 IBM3배가 넘었다.[10] 심지어 일본 기업을 제외하면 최상위 6개 기업의 총합이 2847억 달러로, 1위 NTT의 기록인 2768억 달러를 턱걸이로 겨우 넘어서는 정도이다. 참고로 1988년 한국국내총생산(GDP)은 2023억 달러로, NTT 시가총액의 70% 수준에 불과했다.[11] 1988년 당시 국가별 GDP 순위에 NTT의 시가총액을 대입하면 호주를 제치고 15위에 달하는 수준이다.[12][13] 이를 통해 당시 일본의 경제 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게다가 당시 일본 한 나라의 GDP가 나머지 아시아 국가 전체의 GDP를 합친 것보다 컸다.[14][15]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상당수가 은행증권회사 등의 금융 관련 기업들이라는 점이다. 더욱 유심히 봐야 할 것은 1987년 매출액이 1,000억 달러 이상이었던 기업은 일본의 은행들과 다이와증권을 제외하면 제너럴 모터스뿐이라는 것이다.[16] 또 흥미롭게도 도쿄전력, 도쿄가스, 간사이전력, 주부(中部)전력 등도 순위권에 이름을 올렸다. 국가 규모도 아닌 일개 지역의 전력/가스 공급업체가 글로벌 기업들의 순위권에 이름을 올린 것이다. 한국으로 치면 한국전력공사, 서울도시가스, 부산도시가스 등이 애플, 삼성전자 등과 비슷한 규모의 기업으로 평가받았다고 보면 된다.

사실 얼핏 봐선 그냥 '쩌네'라고 생각하고 말 수도 있겠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주식시장도 결국 수요와 공급에 의해 움직이는데 소비 시장이 일본 전체도 아닌 일부 지역으로 한정돼서 고성장을 기대하기 어려운 지방 에너지 공급업체까지 세계적인 시가총액을 자랑하는 것은 뭔가 정상적인 기업 성장과는 다른 상황임을 알 수 있다. 즉, 주식시장에 유입된 어마어마한 자본이 투자처를 찾지 못하고 거기까지 갔다는 얘기다.

3. 배경[편집]




1982년, 일본산 자동차가 만든 말도 안 되는 두려움

요점만 정리하면 닉슨 쇼크(1971년) → 1차 석유 파동(1973년) → 미국의 급격한 스태그플레이션(1970년대) → 2차 석유 파동(1979년~1982년) - 이를 막기 위한 연준의 과감한 금리 인상(최대 21.5%)[17] → 달러 환율은 복귀, 그러나 박살나 버린 미국의 제조산업과 실업율(1980년대 초반) → 달러 환율이 오르자 반사이익을 본 일본이 제조업에서 두각, 미국 대외무역적자의 40%가 일본발.(1980년대 초반) - 이를 좌시하지 않은 미국의 주도로 이루어진 플라자 합의(1985년) → 일본의 마이너스 경제 성장율(1986년) → 일본 정부가 경제 성장을 위해 부동산 시장 활성화(1980년대 후반) → 부동산과 주식을 중심으로한 일본의 경제 부흥(1980년대 후반~1990년대 초반)으로 설명할 수 있다.[18]

[1] 데이터 출처: Our World in Data, 세계은행. 1995년 최고점에 달한 일본의 GDP는 미국 GDP의 70%까지 도달했다. 버블경제의 정점인 1988~1990년이 아닌 1995년인 이유는 당시 효고현 남부 지진으로 인해 환율이 1달러당 79엔까지 떨어져 엔화의 가치가 과대평가되었기 때문이다.[2] KBS스페셜 '욕망과 혼돈의 도쿄, 1991년'의 마지막 내레이션. 일본 거품경제를 잘 표현했다고 평가받는 다큐다.[3] '버블 경기'. 일본어 위키백과에도 이 제목으로 문서가 존재하며 일본의 거품경제와 관련한 다른 것들도 모두 버블 ○○라고 지칭하고 제각기 문서도 있다. 버블 붕괴(バブル崩壊), 버블 시대(バブル時代), 버블 세대(バブル世代) 등. 학술에서 간혹 사회상에 대한 비판적 표현으로 금전만능닛폰(金満ニッポン)이라고 칭하는 경우도 있는데 90년대 서적이나 방송을 보면 가끔 등장하는 표현이나 식자층의 표현으로 보편적인 명칭은 아닌 듯. 흥미롭게도 2010년대 중국 경제 호황기에도 산케이 등에서 "금만중국"이라면서 힐난조의 기사 제목으로 응용되기도 했다.[4] 한화로 무려 1경 6,500조원 가량[5] 말이 잃어버린 10년이지 현재진행형이다.[6] 2023년 2020 도쿄올림픽의 여파와 엔저로 약 4조2000억달러, 세계4위로 내려왔다.[7] 실 해상도는 1440x1050i[8] 1992년이면 세계적으로 1280x720 HD 영상은커녕 DVD(480p)급 SD영상을 보던 시절이다. 선진국들도 VHS에 만족해야 했고 수평 해상도 420픽셀인 레이저디스크는 부자나 매니아의 전유물이었으며 개발도상국에는 그조차도 없었다. 그런데 1989년에 일본은 MUSE 방식의 HDTV(하이비전) 본방송을 내보내기 시작했다. 미국에도 1993년에 찍은 HD 영상이 있긴 하지만 데모 영상인 데다 당시 미국에서는 일본처럼 고화질 방송이 상용화되지는 않았다.[9] 사실 소련 붕괴 이전에는 소련이 국가 경제자료 일부를 공개하지 않기도 했고 환율 정책을 복잡하게 운영했기에 정확하게 판단하기 힘들어서 반공(반소련)세력 국가들끼리 GDP 순위를 매겨서 일본은 1968년부터 이미 2위(당시 기존 2위 서독의 경제규모를 넘었다.)로 표기되고 있었으나 실제로는 소련이 2위였다. 1980년대에 진짜로 소련보다 커져서 진짜 2위가 된 것. 이 순위 자체는 2000년대까지 이어지다가 중국에 추월당했다. 일본의 거품이 붕괴할 때 소련은 나라 자체가 붕괴되면서 타격이 넘사벽이었기에 일본을 따라잡을 상대가 되지 못했다.[출처] 매일경제신문 1988년 9월 24일 제4면 / (이미지)[10] 당시 NTT의 시가총액은 서독 주식시장 전체 시가총액과 맞먹었다. 참고로 당시 서독은 세계 3위의 경제대국이었다.[11] 1987년 연말 한국 증시의 전체 시가총액이 26조 원으로 당시 환율로 4조엔 수준이었다. NTT의 시가총액 최고치는 87년 4월 22일의 49조 6천억엔.[12] # 해당 링크에는 소련의 자료가 누락되어 있다.[13] 2021년 기준으로 전세계 기업 시총 1위를 달린 애플을 마찬가지 방식으로 국가별 GDP와 단순비교했을 경우 이탈리아를 제치고 7위를 차지한다.2020년 8월 기사[14] 1인당 GDP도 경이로웠는데 IMF의 통계에 따르면 일본의 1인당 GDP는 1986년부터 2002년까지 빠짐없이 세계 10위권 안에 든 것은 물론이고 그 기간 동안 5위를 1번(2001), 4위를 4번(1989, 1991, 1992, 1997), 3위를 5번(1993~1996, 1999), 심지어는 2위를 2번(1988, 2000)이나 기록할 정도로 높았다. 게다가 당시 일본의 1인당 GDP는 미국보다 낮았던 적이 단 4년(1986, 1998, 2001~2002)밖에 없었을 정도였던 것은 물론이고(?) 북유럽 국가들도 능가하면서 스위스, 룩셈부르크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수준이었으니 한마디로 오늘날의 싱가포르 포지션이었다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 더구나 이는 잃어버린 10년 시기까지 포함한 수치다.[15] 당시 석유붐이 끝나면서 사우디아라비아이란, 이라크의 GDP가 대폭 하락한 것도 큰 영향을 끼쳤다. 가령 사우디아라비아는 1981년의 고점 18,800달러에서 1988년 6,400달러까지 꺼졌다. 또 당시 중국이나 인도는 인구 대비 경제력이 미약한 후진 개발도상국이었다는 점도 한몫 했다고 볼 수 있다. 당시 평범한 일본인이 여행여비로 한두달치 급여에 해당되는 금액을 가져가면 중국에서 황제급으로 대접받으며 관광할 수 있었다는 회고도 있을 정도. 그만큼 소득차가 심하다 보니 당시 일본인 관광객들에게 중국은 엄청나게 값싼 물가의 엘도라도(?)였다는 얘기다. 물론 이후 일본의 급여 수준이 버블 때로부터 크게 변하지 않고 중국의 급여와 물가가 엄청나게 오르면서 옛말이 되었다. [16] 단, 위의 자료에서 은행은 매출액이 아닌 자산을 기입한 것으로 보인다. 통상 은행업은 예대차익이 사업의 본질이기 때문에 회계에 매출 개념을 인식하지 않는다.[17] 2022년 기준으로 연준이 금리를 0.5% 인상하는 것도 엄청난 상승세라며 빅 스텝(big step)이라 불리는 걸 생각하면 실업률, 산업 성장 등등 다른 거 다 포기하고 스태그플레이션 하나만 잡겠다는 신념으로 밀어붙인 결과다. 당시 연준은 폴 볼커가 진두 지휘했으며 지미 카터, 로널드 레이건 정부는 자신의 재선과 직결되는 사안임에도 폴 볼커의 금리 인상 정책엔 손대지 않았다. 이런 노력 끝에 달러는 세계 최강의 패권을 쥐게 되었으며 소련이 붕괴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관련 내용은 폴 볼커 항목 참고.[18] 한 디시 유저가 작성한 글을 보면 쉽게 설명되어 있으니 참고.

1970년대 일본의 경제성장은 석유 파동으로 인해 침체기를 맞았지만 JVC, 소니, 파나소닉, 토요타, 혼다, 캐논과 같은 일본의 대기업들은 이를 극복하고 1950년대와 60년대에 걸쳐 차근차근 쌓아올린 기술력으로 그간의 싸구려 이미지를 완전히 벗어버리고 미국유럽의 경쟁사들을 고사시키며 세계시장을 장악하기 시작했다.[19][20] 또 일본 자동차 회사들은 석유 파동을 역이용해서 기존 미국 차보다 기름을 덜 먹는다는 점을 널리 홍보하고 잔고장도 미국 차보다 적었기 때문에 미국 시장을 휩쓸기 시작했다.[21] 미국의 자동차 메카였던 디트로이트가 본격적으로 쇠락하기 시작한 게 이 때부터였다. 이 시기의 분석가들이 언젠가 히타치소니인텔이나 IBM을 인수해버릴 것이라고 전망했을 정도.[22] 이 과정에서 일본은 세계 1위의 무역흑자를 기록하며 막대한 자본을 비축해 놓았지만 동시에 타국 간의 무역마찰도 심해졌다[23].

1980년대석유 파동의 여파가 잦아들었고 석유 파동 이래 인위적인 엔저로 일본의 수출이 매년 급속하게 불어나면서 기업들의 매출이 크게 상승하자 1983년을 기점으로 자산시장이 급속하게 활성화되었다. 그러던 1985년플라자 합의로 엔화 가치가 올라 일본 제품의 가격경쟁력이 떨어져 수출이 감소하며 성장률이 떨어졌다. 그 결과 1986년-0.5%(달러 기준. 엔화 기준은 +2.8%). 석유 파동이후 최악의 성장률이었으며 달러 기준 마이너스 성장이 기록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런 갑작스러운 무역환경 악화로 인한 경기둔화에 일본 정부는 경기 부양을 위해 금리 인하와 부동산 대출 규제 완화라는 정책을 폈다. 부동산 가격과 주식 가격은 이 때를 기점으로 폭발적으로 상승하기 시작했고 특히 부동산 시장은 기존의 부동산 불패 신화도 있었기에 더욱 상승했고 이에 따라 기업과 개미들이 재테크로 거금을 벌었다는 소식이 잇따라 전해졌다. 투기 열풍이 불기 시작하면서 여기에 혹한 기업과 중장년층이 대박을 꿈꾸며 자산시장에 대거 진입했다. 여기에 정부가 나서서 부동산 거품을 조장하고 나서니 투자자들은 이에 호응하여 광적으로 부동산에 투자하기 시작했고 경제성장률은 다시 1987년 달러 기준 +1.6%(엔화 기준 4.1%), 1988년 엔화 기준 7.1%, 1989년 엔화 기준 5.4%, 1990년 엔화 기준 5.6%, 1991년 3.3%(엔화 기준)까지 성장하기는 했다.

문제는 내수경기 부양책이 부동산주식시장으로 쏠린 결과물이었다는 것. 저금리로 시장에 풀린 자금은 부동산과 주식 투기에 쏟아졌고 안 그래도 올랐던 주가와 부동산 가격이 더 오르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다시 수많은 기업과 개미들이 주식과 부동산 시장으로 점점 더 몰려들었다. 집값이 너무 비싸진 나머지 주요 대도시 실수요자들은 집을 구하지 못 하고 근교 지역으로 계속 밀려나갔다. 부동산 폭등으로 내 집 마련의 꿈이 좌절된 서민들은 자민당 정권을 향해 반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러자 경기부양책을 펼치던 일본 정부는 자산가격의 비정상적인 폭등을 진정시켜야 한다는 판단을 내리고 1989년 3%의 소비세(한국의 부가가치세)[24]를 신설하면서 동시에 전격적으로 금리를 인상했다. 물론 금리 인하가 자산 시장 버블의 요인이 되었던 만큼 이러한 상황을 개선하려 한 것이겠지만 문제는 천천히 올려야 할 금리를 너무 급격히 올려 버린 나머지 이전까지 크게 올랐던 주가와 부동산 가격이 폭락했고 이는 소비 심리를 위축시켜서 경제의 경착륙을 불러왔다.

일본은행1988년 9월에 2.50%이던 기준금리를 1990년 12월 6.00%까지 올렸다. 즉 2년 3개월만에 3.50%p나 금리가 폭등한 것. 이로 인해 주식시장이 먼저 고꾸라지고 부동산 시장에도 영향을 주기 시작했다. 1991년에는 부동산 대출 총량규제(즉, 신규대출 전면금지), 기존대출도 LTV(Loan-to-value, 부동산 감정가 대비 대출액) 200%→70%로 제한이라는 자폭을 하고 말았다. 부동산은 거래액수가 매우 큰 만큼 LTV의 변동은 구매자 성향에 큰 영향을 줄 수 있는데, 담보가치를 130%p나 변동시키는 조치를 너무 쉽게 꺼냈다.[25]

당연히 담보가치 폭락으로 부동산 시장에는 매수세가 뚝 끊겼고, 일본의 부동산 시장은 한 방에 가버리고 말았다.[26]

왜 이렇게 강경한 정책을 펼쳤냐면 당시 부동산 가격 폭등으로 집을 구하지 못하는 서민들의 아우성이 최고조에 달해 있었기 때문이다. NHK에서는 시민들의 참여로 부동산 관련 방송을 했는데 당시 패널로 참여한 한 샐러리맨은 "외국에서는 닭장같은 집이라고 일본의 집들을 비웃는데 정작 그런 집도 구할 수 없을 정도로 비싸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즉 부동산 가격 급등으로 인한 사회 문제가 만연했다. 이에 국민들은 정부에 강력한 정책을 요구했고 리크루트 사건으로 한 바탕 데인 정부와 여당은 그에 응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에도 일본 정부는 불량 채권 회수에 미흡하게 대처하면서 경기 침체를 악화시켰다. 사실 미야자와 기이치 당시 총리가 버블붕괴로 경기가 점차 악화되기 시작하자 공적자금을투입해 부실채권을 조기에 정리하자고 주장했지만 당시에는 세금으로 부실채권을 정리하자는 데 반대하는 여론이 강했고 재계와 금융계에서도 공적자금 투입에 그리 탐탁치 않게 여겨서 무산되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생산과 소비의 중심인 생산 가능 인구가 1992년 정점에 도달한 이후 감소하기 시작해 자산 거품 붕괴로 인한 단발적이며 일시적 경기 침체가 장기화되었다. 게다가 1997년 아시아 외환위기가 닥쳐오자 일본 기업들의 해외 자산이 대규모 손실을 기록하면서 견실한 기업들마저 줄도산하는 등 글로벌 경쟁력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사실 해당 기간 동안 성장률이 쭈욱 감소세는 아니었고 1994년부터는 조금씩 회복세를 나타냈기는 했으며 1996년에는 경제성장률 3.1%를 기록하며 1997년부터는 경기침체에서 빠져나올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하시모토 류타로 내각에서 이를 그간의 재정적자를 벌충할 기회라고 판단해 성급하게 소비세를 3%에서 5%로 올렸고 거기에 더해서 1997년 아시아 외환위기까지 겹치며 은행들이 줄줄히 파산하는 바람에 1998년부터 완전히 마이너스 성장과 0% 성장을 반복하는 고사 상태로 접어들었다. 1996년까지는 도산하는 기업이 부동산, 주식 리스크가 컸던 중소형 은행/증권사, 중소 건설업체, 부동산 회사 등에 집중됐으나 1998년부터는 대기업과 대형 금융사까지 쓰러지게 된다. 이른바 '눈물의 파산선언'으로 유명한 일본 3대 증권사 야마이치 증권(1998년 파산), 일본 최대의 지방은행 홋카이도 타쿠쇼쿠 은행(1998년 말 파산), 일본장기신용은행(1999년 파산)은 전부 1997년 외환 위기 이후 아시아 사업 손실 때문에 파산했다.

학자들은 자산 거품이 꺼지는 중에 시행된 금리 인상과 대출 총량 규제 등의 정책을 잃어버린 20년의 원인으로 보았고 이런 사례를 바탕으로 벤 버냉키가 이끌었던 미국의 연방준비제도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당시 미국은 금리 인하와 강력한 부양 정책을 펼치는 등 일본과 전혀 다른 선택을 하게 되었다.


3.1. 주식[편집]


1980년대 초반 일본 기업들은 재테크를 벌이고 있었는데 1984년에 일본 대장성은 "투금 계정"[27]이라는 불법 계정을 합법화함으로써 기업이 주식이나 채권 등에 투자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다. 이 때문에 기업은 자본이득세를 한 푼도 내지 않고 증권사 투금 계정에 돈을 넣어두고 재테크를 즐길 수 있게 되었다. 1980년대 들어 성장세가 둔화되자 정부에선 일본은행을 윽박질러 기준금리를 5.00%에서 2.50%까지 떨어뜨린다.

이는 은행의 대출 폭풍을 유발하여 엄청난 액수의 돈이 각종 자산에 쏟아졌다. 은행의 고위 간부와 기업가, 그리고 이를 감시해야 할 관료가 서로 인맥으로 묶여 있는 일본의 특성 덕분에 무분별하고 부주의한 대출이 많았다. 이는 일본 기업의 재테크 수익을 높였고 다시 주가가 오르면서 더 큰 재테크 수익을 벌어 들이는 악순환이었다. 1985년 투금 계정의 잔액은 9조엔이었지만, 1989년에는 40조 엔까지 팽창했다. 당시 일본인은 기업의 현금흐름은 신경쓰지 않고 재테크로 불어나는 자산만 보고 달려들었다. 이것도 일본 기업을 부실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었다. 언제든지 흑자도산이 일어날 수 있게 된 것이다. PER이 67을 찍었고 전통적인 기업들이 성장주로 과대평가받기 시작했다. 한 마디로 실제로 돈은 가지고 있지 않은데 수요가 곧 가치가 되는 증권시장이 거품처럼 불어터져나갔다는 뜻이다.

증시가 이렇게 폭등하자 일본 정부는 1985년 일본전신전화공사 민영화시작했는데 공모가와 공모 주식 수를 발표하지 않았는데도 사람들이 공모청약에 몰려들었으며 1987년 2월 9일 상장당시 1차 판매가가 주당 119만 7천엔이었다. 그럼에도 단 이틀만에 25%가 추가상승했고 2주만에 정확히 2배인 240만엔까지 올랐으며 1989년 연말에는 400만엔 부근까지 치솟았다.[28] 당시 언젠가는 뜰 것이라는 예상이나 수백만엔을 호가하는 NTT보다 주가가 싸다는 이유만으로 주가 폭등하는 등 막장 증시의 진수를 보여주었다.


3.2. 부동산[편집]


우주 한복판을 날고 있었던 주식 거품은 부동산 거품으로 합리화되었다. 일본은 196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토지 가격이 50배 정도 뛰는 동안 소비자 물가 지수는 고작 2배 오르는 기현상이 벌어졌다. 즉, 땅값의 실질 가치가 25배 급등한 것으로, 이 때문에 일본 사회 전반에 토지 불패 신화가 확고하게 자리잡게 되었다. "오르기는 해도 절대 떨어지지는 않는다"는 당시 일본 부동산 버블을 상징하는 말이었다.

지가가 상승하던 와중에 일본은행기준금리를 6%에서 2.5%까지 떨어뜨리자 은행들은 대출 경쟁을 벌였다. A은행에서 8% 금리를 제시하면 옆 B은행에 가서 7.5% 대출을 제안받고 다시 그 옆 C은행에서 7% 대출을 받아 가며 토지 투기가 벌어졌다. 당시 LTV는 200%까지 치솟았다.[29][30] 이는 토지만 있으면 지가의 2배에 달하는 대출이 가능하다는 의미다. 그런데 과연 은행들이 그만큼의 돈을 실제로 가지고 있었을까?

이렇게 대량의 자금 수혈이 가능하다 보니 아직 저렴했던 땅에 돈이 풀리며 지가를 올리고, 이 토지를 담보로 또 지가보다 더 많은 자금을 끌어오고, 이 돈으로 다른 저렴한 땅을 사고, 사 놓은 땅의 지가도 계속 오르니 추가 대출이 가능하고... 이렇듯 터지기 전까지 화수분처럼 불어나는 게 자본 버블의 특성이다. 이렇게 점점 미나토구를 중심으로 시작된 부동산 광풍은 도내를 넘어 도쿄 광역권 전체에 휘몰아쳤다. 요코하마시, 가나가와현, 사이타마현, 치바현 등... 더 무서운 건 이 중 치바와 사이타마는 거품 붕괴 이후에도 지가가 요지부동이다. 이러다보니 도쿄도 이외도 무사할 수 없어 오사카시에서 케이한신권으로, 나고야시에서 인근 광역권으로 등등 일본 전역에서 비슷한 양상이 나타났다.[31]

거품이 붙는 속도도 어마무시해서 도쿄 지가는 1981년부터 버블 붕괴 직전인 1990년까지 5배 이상 폭등했는데 이 중 대부분은 1987년~1988년 1년의 3배 상승분이다. 당시 "도쿄를 팔면 미국을 살 수 있다"는 농담이 유행하기도 했고[32][33] 당시 도쿄 고쿄(황거) 지가가 캘리포니아 주, 캐나다 전체 지가와 맞먹었다.[34]

그리고 유독 무시무시한 폭등을 이어간 지역이 있는데 도쿄메트로 긴자선 연선 지역이 여기에 속한다. 특히 신바시, 아사쿠사 같은 동네는 무려 10배 이상, 아오야마는 15배나 폭등해서 신기록을 갈아치우기도 했다. 이 시기에 민영화된 국철은 부채 청산을 위해 시오도메 화물역 부지[35] 매각 사전작업을 진행하였으나 지나치게 높은 토지 가격으로 인해 과열 경쟁을 유발한다는 이유로 매각 보류되었다. 그런 이유로 화물역 기능이 철거된지 10여년이 지난 1997년에 들어서야 겨우 개발될 수 있었다. 땅값이 워낙 높아진 탓에 도쿄의 상업용지값은 거품이 터지기 이전인 80년대 말에 하락하기 시작했다.

물론 이건 역으로 따진다면 암만 월급이 올라도 집을 사기에는 택도 없다는 셈이므로 당시 내 집 마련을 꿈꾸던 당대 일본 월급쟁이들에게 상당한 재앙이었던지라 100년 만기 대출 같은 황당한 상품이 등장하기도 했고,[36] 이 때문에 치바현이나 사이타마현, 가나가와현, 도쿄 중서부 지역[37], 이바라키현 남서부 지역이나 신칸센 역세권 지역[38]의 인구가 급증하기도 했다.[39] 더군다나 공공 임대 아파트의 공급은 이에 훨씬 못 미쳤기에 청약 경쟁률이 턱없이 높았다.

당연히 난개발 지역도 땅값이 폭등하기는 마찬가지였는데 더 심각한 것은 버블이 꺼진 후에도 사이타마치바의 땅값은 그리 떨어지지 않았다는 데 있다. 이미 도쿄에서 한 번 유출된 인구가 복귀하지 않으면서 교외 지역 수요층으로 편입된 것이다. 1981년 대비 1991년(버블 붕괴 시작할 때)의 사이타마나 치바 땅값은 3~4배 정도 상승했는데 2020년대에도 그 수준에서 유지되고 있다. 대기업 종사자는 보너스가 왕창 나오던 시절이었고 중소기업도 인력 부족으로 봉급이 올랐기 때문에 집을 사는 것만 포기하면 풍족한 삶을 영위할 수 있었다. 부동산 시장에 거품이 잔뜩 껴 있었지만 그래도 다른 실물경제가 성장을 하고는 있었으니까. 그래서 당대 일본 문화 산업이 전례없는 호황이었던 것도 이런 영향이 크다는 의견도 있는데 암만 월급 모아 봤자 집을 살 수는 없으니 포기하고 문화 생활이라도 즐기려는 욜로족이 많아서 그런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대표적인 예시로 시티 팝과 같은 일본 대중음악의 발전이 있다.

오늘날 도쿄, 오사카 등 일본 대도시의 주요 거점 스카이라인은 대부분 이 시기에 결정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주쿠, 시부야, 이케부쿠로, 롯폰기, 우에노, 오다이바(이상 도쿄), 우메다, 난바, 텐노지, 쿄바시(이상 오사카), 나카교(교토), 미나토미라이(요코하마) 등. 1990년대 이후에 완성된 일본 주요 대도시 상업 지구는 신주쿠, 시부야, 우메다, 난바 정도를 빼면 1981년까지만 해도 빈민가나 놀고 있는 공지였다.

땅값 폭등으로 이 동네에 주거 지구를 남겨두는 것보다 상업 지구로 철저하게 재개발하는 것이 몇 배나 남는 장사가 되면서 부동산개발 회사가 난립했고,[40] 이 회사들이 자체 도시계획을 짜고 부지를 지방자치단체나 소유주로부터 사들인 뒤 1986년부터 전부 오피스 지구로 재개발하게 된 것.[41] 한국의 건설사가 자체적인 도시 개발 능력이 뒤처지는 데 비해[42] 버블 붕괴에서 살아남은 일본 건설사는 자체적인 도시 개발 및 건축 기술을 축적하여 1990년대 이후에도 전세계적으로 신도시 개발 수주를 따내고 있다. 파산한 부동산 업계와 건설사의 미분양 물량까지 살아남은 회사들이 인수하여 완공한 것이 2000년대 이후의 일본의 스카이라인이다.

용과 같이 제로의 발단이 바로 한 평의 공터라고 나오고 그를 둘러싼 야쿠자들이나 부동산 업자 등 땅을 가지고 수많은 인물들끼리 서로 주먹을 동원하며 전쟁을 하는 모습을 보면 그 당시에 부동산 투쟁이 얼마나 심했는지 알 수 있다.


3.3. 골프장, 호텔, 리조트, 스키장[편집]


1980년대에 갑자기 돈이 흘러넘치자 상류층끼리 친목을 다지기 위해 골프장과 골프회원권, 호텔 투기가 극성이었다. 특히 1986년 일본 경제성장률이 -0.5%를 찍어 금리를 낮춘 이후 유독 심해졌는데 이를 근거로 일본 버블경제의 시작을 이 골프 회원권과 호텔 투기 시점으로 보는 미국 경제 학계의 연구도 많다.

특히 이쪽은 야쿠자, 정치인, 관료이권개입까지 겹쳐서 상황이 매우 심각했다. 유력 부자들이 돈을 모아 골프장이나 호텔을 짓자고 하면 그 지역의 정치인, 관료와 접촉하여 골프 회원권과 호텔 분양권을 담보로 허가를 받았다. 당연히 이렇게 허가를 받고 나면 해당 지역에 있는 주민들의 의사를 무시하고 야쿠자들이 '어깨'를 동원해 강제 철거를 집행하였고 멀쩡한 집을 헐고 호텔이나 골프장, 리조트가 우후죽순 들어섰다. 이 과정에서 주민들이 반발하면 야쿠자들이 해당 주민들을 "뒷골목"으로 끌고 가서 폭행하거나 살인까지 하는 등 각종 범죄가 잇달았다. 일본 경찰에 신고해도 경찰까지 해당 리조트/골프장/호텔 분양권을 담보로 이미 매수가 끝난 상황이니 도움이 전혀 안 됐다.

이런 골프회원권, 호텔 투기는 1991년 대출 총량규제가 발동되고 투자자와 야쿠자, 지역 정치인까지 한 번에 대형 손실을 보면서 서로 죽이는 사건으로 번지는 등 후유증이 심각했다. 대출 총량규제가 발동되기 전에 이런 리조트 개발 부패 스캔들이 터진 것이 리크루트 사건허영중(이토만) 사건이다. 대표적으로 리크루트 사건이 꼽히는데 리크루트 사건은 리크루트[43]가 야쿠자와 짜고 부동산 개발회사인 리크루트 코스모스라는 회사를 세우고 이 회사의 주식과 개발 예정인 골프장 회원권을 정치인들한테 뇌물로 뿌린 사건이다.

일본 수도권 지역의 골프 회원권 시세는 1990년 정점을 찍고 1999년 97% 폭락한 뒤 2018년 기준으로도 고점 대비 30% 수준에 머물렀다. 오히려 공급 과잉과 일본 상류층들의 취미 변화(골프→승마)로 인해 골프장이나 호텔이 줄도산했다. 권리가 불분명하거나 땅주인이 증발한 경우도 있는데다가 철거비용도 만만찮아서 재개발로 철거되는 경우는 운이 좋은 편이고 을씨년스럽게 방치되는 경우가 대다수인데 지금도 일본의 시골 지역에는 버려진 골프장이나 호텔이 많은 편이다.

스키장 또한 골프장과 리조트와 함께 지어지는 경우가 많은데 일본의 경우 홋카이도뿐 아니라 본토에도 호설지대가 많아(ex.니가타현) 한때 일본 전역에 스키장이 1000여 개에 달했다는 통계가 있다. 물론 그냥 하나의 산에 여러 리프트를 세워 두고 운영주체가 다른 경우 서로 다른 스키장으로 분류되는 경우도 있지만 일단은 어마어마한 것이다. 지금도 산골 스키장과 지방 공항(도야마 공항 등)은 해외 스키 투어가 지역사회의 큰 관광동력인 경우가 많다.

이런 투기 세태가 당대의 작품에도 반영된 케이스가 있는데 바로 소년탐정 김전일 시리즈. 몰락한 리조트나 골프 회원권을 사이에 두고 이권 다툼으로 살인사건을 벌이는 에피소드의 소재가 이것이다. 같은 만화에서 허구헌날 스키장 고립사건이 나오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런 투기 사태에도 불구하고 오이타현의 유후인 같은 몇몇 지역은 개발을 자제했는데 버블 붕괴 이후에는 이 때문에 오히려 관리가 쉬워서 많은 사랑을 받는다고 한다.


3.4. 해외[편집]


Fuck all that, we've got to get on with these

그딴 건 좆이나 까, 우린 이걸 계속해야 해

Got to compete with the wily Japanese

교활한 일본인과 경쟁해야 해

-

핑크 플로이드, Not Now John[44]


일본의 부동산 광풍은 해외까지 뻗어나가 미국록펠러 센터(미쓰비시가 매입),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일본인, 미국인 투자자가 파트너십을 체결해 매입)이나 컬럼비아 픽처스(소니가 매입), 유니버설 픽처스(파나소닉이 매입) 등을 싹쓸이하기도 했다.[45] 당시 일본 자본의 해외 진출을 두고 치를 떨면서 록펠러 센터가 넘어갈 즈음 일본이 제2의 진주만 공습을 감행하고 있다는 표현까지 나왔을 정도였다. 특히 록펠러 센터가 미국에 있어 상징성이 큰 건물이었던 만큼 그 소식에 대해 착잡하게 여겼던 미국인들이 많았다고 한다. 이런 상황이 도래하자 되려 미국에서 일본이 세계 경제를 장악할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번지기 시작했다.

당시 할리우드 영화의 대부분이 미래에는 경제적으로 일본미국을 능가할 것라는 예측과 함께 적대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 시기 유행한 사이버펑크 장르에도 미래 기술과 일본 문화가 융합하여 등장하는 것 역시 버블경제와 절대 무관하지 않았다. 대표적으로 블레이드 러너(1982년)에서는 2019년의 LA길거리 음식으로 일본 음식이 자연스럽게 팔리고 있으며 가게 주인도 일본인이고 전광판 광고로 기모노 입은 일본인이 나온다.[46] 영화 백 투 더 퓨쳐에서는 미래(2015년)에 기업은 일본 기업 외에는 없는 것으로 묘사된다. 그리고 다이 하드에서는 사건이 일어나는 빌딩이 일본인 소유의 나카토미 타워였고[47][48] 로보캅 3편에서는 일본 기업이 악역으로 나왔다.[49] 그리고 소설에서는 톰 클랜시의 적과 동지가 일본의 북마리아나 제도 침공을 다뤘다. 게임 사이버펑크 2020에서는 아라사카라는 일본의 초거대기업항모를 소유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미국 땅에서 초법적인 권한을 휘두르는 등 사실상 미국을 점령하여 악명을 떨치는 모습을 보여준다.[50] 이는 후속작인 사이버펑크 2077에도 그대로 이어진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 제국전쟁했던 미국인들이 많이 살아 있었다.[51] 버블이 일어난 해인 1985년을 기준으로 제2차 세계 대전은 종전된 지 40년 되었다.[52] 당장 1988년 미국 대선에서 당선(임기 1989~1993)됐던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 대통령이 태평양 전쟁 참전용사였다.[53] 그러다 보니 태평양 전쟁 참전용사들을 위주로 1980년대에 미국의 자산들을 싹쓸이로 쇼핑하던 일본에 대한 적개심이 하늘을 찔렀다. 당시 일본에서는 자꾸 미국 언론들이 일본을 비난하는 기사가 늘어나니 "미국 언론사까지 인수하면 미국 애들이 좀 닥치지 않을까?" 라고 응수했다.(...) 미국 영화사들을 사들이기는 했다[54]

주가와 부동산 가격이 뛰어오르면서 이를 담보로 한 대출도 급속도로 많아지고 시중에 풀리는 돈이 급증하자 넘쳐나는 돈을 쓰기 위해 일본인은 세계 명화(名畵)를 싹쓸이하기 시작했다. 1987년 3월고흐해바라기를 3629만 달러에 낙찰받는 등[55][56] 피카소르누아르를 비롯하여 크리스티 경매장에서 나온 미술품을 모조리 사들였다. 예술품은 경매가가 정해지면 그 다음 경매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거래가가 치솟을 수 있으며[57] 부를 과시하는 수단[58]이었기 때문이다.

거품이 꺼진 후 은행이 담보로 압류한 미술품이 너무 많아서 일부는 제대로 보존되지 못하고 은행 창고에 잠들어 있는 경우가 있다. 미술품 특성상 제대로 보존 처리를 받지 못하면 아무래도 쉽게 손상되기 마련이고 이런 작품이 다시 세상의 빛을 보면 이전의 가치가 제대로 남아 있기 힘들다. 그래서 버블 이후에 몇몇 명화는 압류하고 있던 은행까지 도산해 버려서 영영 찾을 수 없게 된 것이 있다. 이런 작품이 대략 백여점 쯤 된다. 보통 이렇게 소실된 미술품은 모조품 제작 등으로 전시회에 나오긴 하는데 전시회 큐레이터가 '이는 모조품이며 진품은 소실되었다'고 말해준다.[59]

실제로 한국인이 유럽 유명 화가의 작품을 보고 싶으면 외국 미술관이나 박물관의 초대전으로 작품이 잠시 한국에 왔을 때 보는 경우가 아니면 결국 외국에 나가서 봐야 한다. 이때 유럽이나 북미의 미술관이 너무 멀면 일본이 훌륭한 대안이다. 유럽이나 미국을 제외하면 세계적인 명화가 매우 많이 있는 나라가 일본이기 때문이다. 물론 비전공자도 알 수 있을 만한 유명 화가의 대표작은 다 서양에 있지만 그런 최고 등급의 대표작을 제외한 바로 아래 등급의 작품은 일본에 매우 많다. 실제로 한국의 미술 전공자가 유명 화가의 원화를 보러 일본에 가는 사례가 꽤 있다. 국립서양미술관, 브리지스톤미술관, 모리미술관, 국립 신미술관, 요코하마미술관, 손보저팬 도고 세이지 미술관 등 수도권 미술관뿐 아니라 야마자키마작미술관, 나고야시 미술관, 히로시마 미술관 등 지방 미술관조차 그 컬렉션의 양과 질에서 한국과 비교되지 않는다. 다 거품경제 시절에 넘치는 돈으로 전 세계에서 미술 작품을 사 두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

결과적으로 이 해외 투자가 완전한 헛짓은 아니었다. 이 투자 덕분에 일본은 지속적으로 상당한 수익을 거둘 수 있었는데 오늘날에도 일본은 여전히 대외 순자산 및 외국 채권 보유 규모가 세계 1위로 2위인 독일의 2배에 육박하며, 매년 30~40조엔 가까이 되는 막대한 해외 수입(본원 소득수지)으로 수십 년 동안 경상수지 흑자를 기록하고 있다. 일본 경제에 있어 이것이 외환 위기 같은 본격적인 붕괴를 막아주는 최후의 보루임을 감안하면 차라리 처음부터 국내의 버블에 미쳐 돌아가는 어리석은 짓 대신 해외 투자에만 전념했다면 지금 같은 꼴은 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후에도 숱한 대내외적 이슈가 있었으나 버블 붕괴에 비하면 그 충격은 새발의 피에 불과하다. 반대로 말하면 버블 붕괴의 충격이 그만큼 거대했다는 것이다.

일본은 버블 붕괴 이후에도 해외 자산 투자를 지속적으로 유지하려고 무진 애를 썼다. 그 결과 오히려 지속적으로 일본 기업들의 해외 자산 보유 건수는 늘어나는 편이다. 비전펀드를 통해 전세계 IT 기업들을 실시간 쇼핑하는 소프트뱅크 그룹을 이끄는 손정의 회장, 2008년 세계금융위기 과정에서 리먼 브라더스를 인수한 노무라 증권, 모건스탠리를 인수한 미쓰비시 UFJ 은행, 2015년 영국 파이낸셜 타임즈전액 현금 일시불[60]로 인수한 니혼게이자이신문 등이 있다. 2019년 다케다제약은 아일랜드 제약사 샤이아를 니혼게이자이신문처럼 전액 현금 일시불로 인수했다. 물론 웨스팅하우스를 집어먹고 배탈이 난 도시바처럼 다 성공적으로 마무리된 건 아니지만...

3.5. 일제히 폭발한 돈거품[편집]



버블 당시에 일본 국민들은 버블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저 같은 공무원도 몰랐고, 언론인들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고 정치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일본 국민 전체가 버블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가장 큰 문제였습니다.

니시무라 요시마사, 와세다대학 경제학부 교수, 전직 대장성 은행국장

파일:버블경제.png
닛케이 2251970 ~ 2007년의 기록

1990년과 1991년 수치에 주목해 보자. 2010년대 아베노믹스를 기점으로 엄청난 회복세를 보이는 듯했지만 2만 초반에서 움직였으며 중앙은행이 엔화를 찍어내고 그걸로 주식을 사서 억지로 유지하는 실정이다.[61] 닛케이 지수는 1991년 버블 경제 붕괴 이후 29년만인 2020년 11월 11일에야 25,000을 넘었다. 그마저도 코로나바이러스-19 백신 개발 진전에 따른 경제 활성화의 기대감이라는 특수한 상황이었다.#

1990년 새해 첫날부터 주식에서 지나치게 높은 값으로 거래가 끊기자 가격이 하락하고 매물이 쏟아져나오기 시작하는 거품경제 붕괴의 전형적인 모습이 나타난다. 연말에는 연초 최고치의 절반 수준으로 급감했고 1990년대 후반에 닷컴 버블로 잠깐 동안 주가가 상승하나 싶었지만 2000년대에 들어서 IT거품이 꺼지면서 그 절반으로 급하락했다. 물가 역시 계속해서 디플레이션을 거듭하고 있다.



부동산 시장은 일본 정부와 일본은행의 구두개입과 토지구역 감시제도 마련 그리고 금리 인상[62]에도 불구하고 1991년까지 버텼지만 1990년 3월 27일에 하시모토 류타로 당시 대장대신이 발표한 대출 총량규제[63]로 고꾸라졌다. 대출 총량규제는 쉽게 말하면 총량규제 발표 시점부터 신규 부동산 대출을 전면 금지하는 조치였다. 발표 시점부터 6개월간 전면 금지하고 이후에도 3년간 이전에 200%까지 막나가던 LTV를 감정평가액의 70%로 제한했다.[64] 이러다보니 대출이 없으면 매매가 끊기는 부동산 시장의 특성상 매매는 없이 호가만 대폭락했다. 이때 정부의 대책에는 연착륙이라는 생각이 없었는데 "부동산 가지고 아무것도 안 하고 돈만 버는 놈들은 그냥 망해도 싸다"는 생각을 지녔으며 류타로도 일본 전체 경제에 다소 영향이 있을 순 있으나 비정상적 경제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선 감내할 수준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1989년 참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이 참패했고 1990년 중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이 예상보다 싱겁게 선거에서 승리했다고 하지만, 어쨌든 직장인들을 달래주어야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는 곧 엄청난 오판이었음이 드러났고 나중에 아시아의 연쇄 IMF 사태나 2008년 미국발 금융 위기 등의 경제위기에서 정부의 빠른 대책이 필요하다는 교훈으로 남게 되었다. 버블이 붕괴된 직후 투기업자들과 건설 업계들이 무너졌고 이들과 깊은 연관이 있었던 금융기관들이 부실채권을 떠맡게 되는 여파로 부실화된 금융기관들의 연쇄도산도 이어졌다. 부실채권이 막대해져서 일본 정부에서도 환수를 위한 관련 기구를 설치할 정도였다. 그리고 도미노의 붕괴처럼 자연스럽게 금융기관에 대출을 했던 일반인들까지 큰 경제적 타격을 입으며 불황을 맞게 된 기업들은 임금삭감과 대량의 해고를 동반한 대규모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이는 일본 서민 대다수의 지갑문을 닫게 만들었고 소비도 당연히 얼어붙어 경제에 악순환이 가중되었다.

버블이 완전히 사라진 1992년부터 엔화 기준으로 경제성장률이 0.8%(1992), 0.2%(1993), 0.9%(1994), 2.7%(1995), 3.1%(1996)으로 어느 정도 회복되나 싶더니... 태국을 위시로 한 아시아의 1997년 외환 위기로 일본 기업의 동남아 및 한국 투자자산이 대거 파산하며 일본 기업도 다시 줄도산했고 1998년부터는 엔화 기준으로도 마이너스 성장을 하게 되었다. -1.1%(1998), -0.3%(1999), +2.8%(2000), 0.4%(2001), 0.1%(2002) 등. 이러다보니 일본에서 엔화 기준으로 완전히 경제성장률 통계를 바꾼 건 1998년부터다. 1997년까지만 달러 기준 성장률을 발표하다가 1998년부터 폐지했다. 일본인의 소득이 늘어나기는커녕 꾸준히 제자리걸음인데도 달러화 기준 GDP는 끝없이 성장하는 일본의 생활상을 전혀 반영하지 못하는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버블 붕괴는 당시 일본의 경제에 치명타를 가했으며 이로 인하여 이후로도 수십년간 엔화 기준 마이너스 성장에서 헤어나오지 못했고 당시를 잃어버린 10년이라 부르는 이유가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마이너스 성장은 아베노믹스를 위시한 강력한 양적완화 드라이브를 통해서 다소 나아지긴 했으나 그럼에도 그 엄청난 후폭풍의 피해는 20년이 지나기까지 영향을 미쳐 2014년 기준으로 가처분 소득은 85년 수준 이하까지 떨어졌다. (자세한 것은 후술)

버블이 붕괴되면서 폐건물이 늘어났으며 시골이나 공터에 방치되는 자동차들도 늘어나게 되었고[65] 거리나 공원에는 홈리스가 속출했다.[66]

거품경제 당시에는 100만 엔 코트, 80만 엔 양복을 입고 다니고 예쁜 여자에게 모피코트를 입혀서 데리고 다니고 커다란 반지를 끼고 활보하던 분들이 지저분한 옷을 입고 술 취해 다니는 것을 보면 가여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모치즈키 아케미, 긴자 클럽 르 자르댕 사장


  • 울트라맨고질라의 미술감독이었던 스즈키 요시오는 총 12억 엔이라는 거금을 대출까지 해 부동산에 투자했다가 버블 붕괴로 문자 그대로 쪽박을 차게 되고 빚독촉을 받게 되었다.[67]

  • 자타공인 부동산 재벌 가수이자 3000억 엔의 부동산 자산가 센 마사오[68]1030억 엔의 빚을 지고[69] 파산한 것은 물론이고 무대에서 완전히 사라져야 했다. 전성기에는 일주일 동안 수억 엔 단위의 부동산 거래를 하던 그였지만 파산 이후 길거리에서 공연할 때는 밴드를 구성할 돈조차 없어서 녹음된 음반을 재생해야 했을 정도로 궁핍했다고 한다. 지금은 일본 연예계에서 완전히 잊혀진 상태. 그래도 센 마사오는 아래의 코지마 노부타카와 비슷하게 그럭저럭 해피엔딩으로 끝난 편이다. 일본어 위키백과에 따르면 2002년 민사재생법을 적용받아 6년간 1억 5,000만 엔만 상환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고 한다. 그래도 한화 15억원이다.

  • 도쿄 시내에 빌딩 70채 소유에 8000억 엔의 재산을 소유하고 있던 부동산 사업가 코지마 노부타카[70]는 버블 붕괴로 인해 전 재산이 붕괴되고 100억 엔의 빚만 지게 되었다. 다만 상술한 파산해서 궁핍하게 살아가는 이들과 다르게 빌딩 한두 채 정도는 여전히 보유하고 있는 듯.[71]


4. 당시 생활상[편집]




1980년대 일본의 코카콜라 광고[72][73][74]

  • 당시는 지금과 정반대로 일본인들이 닛산 시마 같은 중대형차에 열광하던 시기였다.[75]외제차 수입도 급증해 벤츠 주력 모델이었던 W201 190E[76]는 너무 많이 보급되어 '코벤츠'[77]로 불렸으며 BMW E30 3시리즈롯폰기 코롤라[78]란 별명이 붙었다. 이 두 차량은 당시 폭발적으로 성장하던 한국에서도 수요가 넘쳐서 이때 나왔던 물건을 이삿짐 명목으로 들여오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스포츠카들의 수요도 대폭 증가했는데 일본 국내에선 수프라NSX, 스카이라인 GT-R. RX-7, 미쓰비시 GTO 등이 수요들을 노리고 제작되었으며 외제쪽에선 페라리와 포르쉐의 인기가 하늘을 찔렀고 테스타로사911의 수요가 엄청 많았으며 특히 플래그 쉽에 한정생산이었던 F40959도 불티나게 팔렸다고 한다.[79][80]

  • 당시 출시된 이륜차 역시 초고성능 및 고가의 파츠로 도배되었다. 400cc나 250cc 의 저배기량에서 4기통엔진을 쓴다거나 온갖 호화로운 부품은 현재 나오는 것과 비교해도 넘사벽의 포스를 갖고 있었다.

  • 프리터도 이때 유행하고 있었다. 언제든 취업할 수 있지만 하지 않는 새로운 낭만적인 라이프스타일 쯤으로 취급받았다. 면접만 받으러 가도 교통비로 쓰라며 3~5만엔을 꽂아주는 시대였으니 면접만 보러 다니는 사람까지 있었을 정도.[81]

  • 테마파크도 우후죽순으로 지어졌다. 1980년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일본은 노동 시간 최장 국가 중 하나였고[82] 당시는 주당 44시간 노동제였기 때문에 야근은 물론이고 토요일 오전에도 일하거나 학교에 다니는 건 당연했는데 국내외에서 여러모로 지적받는 일이 많아지자 1987년 주5일제 도입을 시작으로 차츰 노동 시간을 줄이기 시작했다. 때마침 시기가 버블이랑 겹치면서 여가 시간도 늘어나고 돈도 넘쳐서 테마파크붐이 일게 된 것. 후나바시시에는 일본 최대의 실내 스키장인 자우스[83][84]가 생기는가 하면 미야자키현에는 한때 세계 최대 워터파크였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오션 돔이 생겼다. 하우스텐보스도 비슷한 흐름을 타고 생겼으며 그 외에 여러 지방 도시에 테마파크나 박물관이 들어섰다. 물론 1980년대 초에 생긴 도쿄 디즈니랜드가 흥한 것도 이러한 배경에 일조한 듯했다. 하지만 대부분은 거품이 꺼진 뒤 하나둘씩 망했고 오션돔도 거품이 꺼지더니 세계 최대 워터파크라는 명성이 무색하게 파리만 날리다가 2007년 9월 30일을 끝으로 문을 닫았다. 이후 지자체에서 인수하여 다시 문을 열려고 했지만 실패했고 끝내 2017년에 철거되어 영원히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85] 또 탄광산업이 사양세로 접어들 때 생명줄로 버블을 타고 볼거리를 유치하려다사 그 볼거리마저 거품이 꺼지자 도시까지 끌고가서 망한 동네도 있다. 도쿄 디즈니랜드 정도만 제외하면 버블시대에 생긴 테마파크 중 살아남은 곳이 있다고 해도 불황때문에 여전히 힘들다.[86] 하우스텐보스조차 예전만 못하다고. 우후죽순으로 생겼던 대형시설이 2010년대 이후 어떤 길을 가고 있는지 궁금하다면 여기로. 굳이 장점을 꼽자면 도시권역을 개발하고도 돈이 남다 보니 지방도시까지 퍼져서 어지간한 시골에서도 대한민국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문화 인프라가 많이 확충되었다. 물론 그렇다고 쳐도 인구 감소는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어서 대가를 치르는 중. 앞서 말한 테마파크의 난립도 이와 맥락을 같이한다.

  • 도야마현의 소도시인 오야베시는 아예 도시 전체를 동화풍으로 꾸미기도 했다. 중학교 건물과 시민회관도 테마파크스럽게 지었을 정도였다. 공식적으로는 버블이 본격화되기 한참 전부터 계획되었다고 하지만 버블의 영향으로 재정이 풍족해지면서 본격화된 점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실제로도 동화풍 건축물들은 버블 붕괴 직후인 1992년에 지어진 것이 마지막이다. 또한 이곳도 인구는 줄고 건물은 노후화되는데 유지보수할 재정은 부족해져서 버블 시대에 지었던 동화풍 건물들이 애물단지로 전락했다.#, #

  • 일본 기업의 아이디어가 기발하거나 독창적인 제품을 생산한다는 이미지가 버블경제의 영향이라는 분석도 있다. 기업이 기술 부문에 투자하고도 남아도는 잉여의 돈으로 괴랄한 제품을 만든 것. 그 시절 일본의 자동차, 제품 등을 보면 그저 돈지랄로 보이는 게 많다. 물론 당시로서는 일본의 화려한 발전에 눈이 멀어 마냥 우러러보는 시선이었지만.[87]

  • 일본인의 베토벤 교향곡 9번에 대한 병적이라고 해도 될 만큼의 애정이 돈과 인력을 때려박아 매머드급으로 팽창한 것도 이 시기였다. 매년 2월 중순 혹은 하순에 도쿄의 실내체육관인 료고쿠 국기관에서 5,000명의 합창단을 모아놓고 공연하는 국기관 5천 명의 제9 콘서트(1985~), 간사이 지방에서 가장 큰 이벤트 홀인 오사카성 홀에서 10,000명의 합창단과 공연하는 산토리 1만 명의 제9(1983~), 히로시마 최대의 이벤트홀인 히로시마 선플라자에서 1,000~2,000명 규모의 합창단과 공연하는 제9 히로시마(1985~) 같은 이벤트성 공연이 시작된 것 역시 이 시기였다. 이때의 영향으로 수많은 가수들이 교향곡 9번의 An Die Freude를 일본어로 커버했으며 일본어 커버 버전뿐만 아니라 독일어 원곡 버전도 일본제 노래방 전기종에 수록되어 있을 정도로 인기가 좋다.[88]

  • 자위대는 버블경제를 바탕으로 군비증강을 단행했다. GDP 대비 국방비 1%라는 제한이 걸려 있었지만 그 1%만으로도 세계 3위의 국방비를 기록했기 때문에 막강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1980~90년대에 걸쳐 F-15J, E-2, 공고급 구축함, 패트리어트 미사일과 같은 첨단무기들을 도입했으며 해공군력의 질은 당시 중국 인민해방군을 크게 앞선다는 평가가 나왔을 정도였다. 해상자위대항공자위대에서 운용하는 무기체계들은 당시 남북한 해공군이나 중국 해공군보다 훨씬 우수했다.[90] 일본 해상자위대 장교들은 중국군 장교들 앞에서 자신있게 "단독으로 중국 해군을 전멸시킬 수 있다."고 자신감을 드러냈으며 90년대 이후 일본과 본격적인 갈등 국면에 들어서게 된 한국에서도 당시 처참한 해군력의 실태가 조명되면서 분쟁 시 일본에 해상봉쇄당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가 확산되었다. 공교롭게도 버블이 붕괴되면서 일본의 경제력이 정체되고 한국과 중국이 성장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국방비를 본격적으로 크게 늘리고 우수한 해공군 전투체계들을 도입하면서 동아시아에서 압도적 해상전, 공중전 우세에 있던 자위대의 지위는 상실된 상태다. 무기체계가 아니긴 하지만 일본 정부가 소유하고 항공자위대가 관리하는 일본정부전용기도 이때 도입 계획이 수립되었다. 1987년 당시 계획안은 무려 보잉 747 3대. 물론 버블이 붕괴된 이후 도입 수량은 2대로 줄어들었고 보잉 777로 대체된 후에도 2대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 물론 버블시대가 자위대에게 마냥 좋은 시절이냐면 그건 또 아니라서 인력난에 시달렸다. 중소기업도 취직하러 오는 사람이 없어서 발 동동 굴리던 시절인데 그 중소기업보다도 급여 수준이 떨어지는 자위대가 인력모집이 활발히 이루어질 리가 만무했다. 이원복의 현대문명진단 90년대 초반 연재본에 따르면 매년 신병 모집인력이 2만 6000명이지만 1만 9000명만 모집되어서 정원의 15%가 미달하는 데다 그나마도 육군장교의 39%, 공군장교의 48%가 계약기간 만료전에 제대하고 민간회사로 간다고 나와 있다. 또 병들도 한국 돈 70만 원을 받는다고 나왔는데[89] 당시에는 대기업은 물론이고 웬만한 중소기업에 가도 이보다 몇 배는 받을 수 있었고 알바를 해도 최저임금보다 훨씬 많이 주었던 시절인지라 메리트가 떨어지는 것은 당연했다. 사실 90년대 중반~2010년대 초의 취업 빙하기에도 자위대는 돈 없거나 학력 떨어지는 별 볼 일 없는 사람들이 별 수 없이 가는 곳, 막장 취급을 받았으니 이때의 구인난이 어떤 수준인지는 뻔할 뻔자였다.

  • 술집의 접대부들은 부자가 된 부동산 업자들을 상대로 서비스를 하다 보니 생일 선물로 아파트나 집 한 채를 선물받기도 했으며 자가용 자동차는 물론이고 온갖 명품으로 온 몸을 도배할 수 있었다. 부동산 업자들은 접대부에게 으로 액수를 세지도 않고 1만엔 지폐 다발을 주었다.


  • 전세계 억만장자 중 70%가 일본인이었으며 세계 1등 부자가 세이부철도 창업자 츠츠미 야스지로였다. 그러나 이 흥청망청은 모두 거품빨이었으므로 불과 몇 년도 가지 못한 건 물론이며 이후 일본을 시련으로 몰아넣었다. 물론 부자는 망해도 3대는 간다고 일본인이 다른 나라 사람들과 비교해 큰 고생을 했는가 하면 여기에도 의문이 있으나...[91] 저런 호화 생활을 하다가 못 하게 되면 시련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아예 없이 사는 것보다 있었는데 없어진 삶을 사는 게 더 힘들다고 느끼는 게 사람 심리...

  • 지방에서도 건설 붐이 일어 굳이 필요 없는 곳에 보여주기 식의 토목공사를 진행하는 데가 많았다고 한다. 예를 들면 100명 남짓 사는 섬마을에 다리를 2개, 3개씩 놓는다든가, 주민 60명 사는 마을 앞까지 고속도로를 뚫어 버린다든가... 당시 자민당과 건설업체 그리고 지역유지들 간의 정경유착에 따른 전시성 공사들이었는데 거품이 꺼지고 나서는 유지비가 부담이 되어 철거되거나 건설사들이 파산하는 곳이 많았고 무리하게 공사를 밀어붙인 지자체들이 재정에 타격을 입었다.

  • 소비문화도 대단했는데 버블이 붕괴한 후인 1991년에는 연간 1천만 명이 해외여행을 다녀왔다.[92] 페라리, 롤스로이스, 벤틀리 같은 고급수입차가 거리에 넘쳤고 롤렉스, 샤넬 같은 초고가 명품이 일본에서 불티나게 팔렸으며 심지어 여대생들도 그런 명품을 예사로 걸치고 다닐 정도였다. 특히 일본 디스코 댄스클럽인 마하라자[93]줄리아나 도쿄는 그런 일본 젊은층의 소비문화와 유행을 주도하던 중심으로 일본 거품경제의 상징적 존재였다[94]. 여성 고객들이 자발적으로 반라로 클럽 무대에 올라 춤을 추었다. 한국에도 같은 이름의 클럽이 이태원에 생기기도 했다. 토미오카 고교 댄스부가 2017년 패러디로 재현한 춤이 바로 그 시대의 스타일과 춤이다.

  • 다만 당시를 경험한 일본 중장년층에게서 매스미디어에서 나오는 버블시기 소비생활은 과장되었다는 평도 있다. 버블시기라고 하지만 그 시절에도 너나 할 거 없이 명품을 두르고 다니거나 최고급 외제차를 타고 다녔던 삶을 누린 것은 아니었고 도리어 너무 비싼 집값으로 상당수 가정에서 대출금 상환에 얽매였던 삶을 산 것은 마찬가지였는데 이 당시 상류층들의 생활을 일반인들이 보편적으로 누렸던 것처럼 과장된 생활상을 보여준다는 것이다.[95] 즉, 양극화 현상이 강하게 두드러지던 시대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버블경제로 부유층이나 대도시와 휴양지에 집을 가지거나 주식에 투자한 사람은 재산을 크게 불렸고 빈곤층도 취업이 쉬워지고 임금수준이 올라가는 혜택을 보기는 했지만 이도저도 아닌 중산층~중하류층들은 그저 보너스를 더 받는 수준에 머물거나 이도저도 아니면 비싼 부동산 값으로 인해 대출상환에 매달리거나 장거리 출퇴근에 시달려야 했던 것이었다. 버블경제의 혜택을 누구나 누렸던 것은 아니었다는 얘기다. 그러나 그 '평범한 일본인'들도 인접국과 비교했을 때 상대적으로 매우 풍요로운 삶을 누렸단 점은 분명한 사실이다. 1980년대에 아시아권에서 서민들의 생활 수준이 풍요로웠다고 할 만한 곳은 일본싱가포르, 영국령 홍콩 정도밖에 없었다.[96][97]

  • 당시의 일본 길거리 패션은 미국유럽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버블시기의 여유(?) 있는 생활상을 반영하듯[98] 옷감이 많이 들어가는 오버핏이 유행하였으며 당시 디자인 업계에서는 자켓의 경우 자연스러운 주름이 잡히는 것이 멋스러운 것이라고 여겨 남방셔츠의 경우 카라가 크고 품이 넓은 오버핏 셔츠와 굵은 넥타이, 블레이저의 경우 오버핏에 어깨가 커보이고 카라가 큰 것이 주류였다. 니트, 스웨터 등도 마찬가지로 오버핏이 유행이었다. 바지70년대 미국에서 유행했던 나팔바지디스코 바지처럼 아래로 갈수록 통이 커지기보다는 일자로 이어지는 느낌의 통이 넓은 와이드 핏이 유행하였다. 안경의 경우 알이 큰 금태, 뿔테안경과 반뿔테 안경이 유행하였다.
80년대 말에는 빈티지 스타일의 시부카지가 패션의 메카 시부야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당대 젊은 남성들 사이에서 유행하였는데 웨스턴 스타일 부츠, 부츠컷 데님 청바지, 금장단추가 달린 더블 브레스트 네이비 블레이저, 고로즈의 이글 악세사리 등이 시부카지 스타일의 패션 아이템이었다. 또 이 시기부터 갸루 패션이 등장하였으며 비주얼계가 등장하였다. 다시 말해 당시 미국과 마찬가지로 전체적으로 개성을 드러내는 것에 집중되던 시기였다.
학생들이 입는 교복도 당시 시대상에 따라 품이 크고 통이 넓게 나왔지만 여자 일진, 즉 스케반 계열은 짧은 상의와 긴 치마를, 남자 일진, 즉 츳파리 계열은 짧은 가쿠란과 통을 줄인 교복 바지를 착용하였다. 또 스케반 계열은 짙은 화장에 강조된 가르마를 탄 시스루 뱅이나 세이코짱 컷을 하였고 츳파리 계열은 파마를 하고 앞, 윗머리를 뿔처럼 만들었다.
헤어스타일의 경우 젊은 남성들은 파마를 하거나 윗머리를 올린 울프컷, 옆머리를 누르고 앞머리를 올린 스타일이 유행이었으며 젊은 여성들의 경우 시스루 뱅세이코짱 컷, 단발이 유행하였다. 중장년의 남성들은 파마를 하여 가르마를 타거나 그냥 가르마를 타곤 하였고 중년, 노년의 여성들은 일본의 시마다나 오이초와 같은 전통 헤어스타일을 하였다.

  • 버블이 한창 진행 중이던 1987년 여름 도쿄를 비롯한 일본 수도권 일대에서 대규모 정전 사태가 발생하였다. 전력 수효의 증가를 따라가지 못한 까닭으로 대략 2시간 가량 정전이 발생하여 당시 국회 회의가 진행되지 못하는 등의 피해가 발생하 였다.

5. 각종 부정부패 사건[편집]



5.1. 오노우에 누이 사건[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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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노우에 누이(尾上縫)[99]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레스토랑 웨이트리스를 시작으로 레스토랑 사장으로 성공한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이후 일본산업은행으로부터 10억 엔 어치의 채권을 구매한 것을 계기로 증권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자신이 경영하던 레스토랑 가치의 1,500배에 달하는 3조 엔에 가까운 돈을 빌려 주식을 사들였고 그 과정에서 금융계의 큰손이 되면서 레스토랑에는 수 많은 금융계 인사가 드나들기 시작했다.

저택 앞에는 오후마다 금융계 인사가 서류가방을 들고 집안으로 들어가 다음날 새벽 2시~3시가 되도록 나오지 않았다. 저택에 들어간 인물 중에는 일본산업은행 총재와 같은 거물도 있었으며 JP모건 일본 지사나 야마이치 증권 등과 같이 내로라하는 증권사에서도 직원을 파견했다.

사실 이 사람들이 저택에 찾아온 이유는 다름아닌 두꺼비에게 매주 지내는 의식에 참가하기 위해서였다. 사실 오노우에는 평범한 레스토랑 사장이나 자산가가 아니고 1970년에 고야산에서 준코(純耕)란 법명으로 승적을 취득한 여승이기도 했다.[100] 물론 실제로 승려였던 것은 아니었지만 이를 계기로 자신의 은사승이었던 히라오카 토호(平岡宕峯) 및 그 친척들과도 친분을 쌓으며 인도 여행을 한 적도 있었고 심지어 달라이 라마를 만나기도 했다. 아래의 해괴한 의식도 밀교 신앙이 이상한 방향으로 표출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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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꺼비 의식이 왜 중요한고 하니 이 두꺼비 의식을 통해서 어떤 주식을 사고팔지가 정해졌기 때문이다. 그것도 상당한 액수가 말이다. 사람들이 모이면 누이는 두꺼비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정원에 세워진 불상 앞에서 불경을 왼다. 누이 부인이 두꺼비 앞에 앉아서 신내림을 받게 되면 그 순간 어떤 주식을 사고 팔지 신탁을 알려주는 의식이 진행된다. 이런 방식으로 사고팔린 주식이 전성기인 1990년에는 무려 100억 달러에 달했다.

사실 냉정하게 접근해도 아예 근거가 없는 짓거리는 아니다. 경제는 자연과학과 다르게 결국 사람이 움직이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아무런 과학적 근거가 없는 헛소리라고 할지라도 다수의 사람들이 믿고 그에 따라서 행동하면 시장은 움직이기 마련이다. 지금도 당장 주식시장에 루머등이 퍼져도 향후 주가가 어찌되건 이에 혹해서 일시적으로 주가가 등락하는 경우는 흔하다. 간단히 생각해서 두꺼비가 A사의 주식을 매수하라고 신탁을 내렸다고 생각해 보자. 소규모의 신실한 집단이 그 말에 따라 A사 주식을 사기 시작한다. 다른 모든 변수가 동일하다면 자연스럽게 A사 주식의 가격은 오른다. 이를 목격한 다른 이들 역시 A사 주식을 매수하기 시작한다. 결국 이를 반복하게 되면 두꺼비가 A사의 주식이 오를거라고 한마디 던져주는 것만으로도 시장에 기대가 형성되어 그 자산의 가격은 실제로 폭등한다(!).[101]

그러나 거품 붕괴 이후 오노우에 누이는 파산했으며 가짜 예금증서로 첫 대출을 받은 것이 드러나면서 1991년 8월에 경찰에 체포됐고 은행의 후원자들과 더불어 몇년의 징역형을 선고받게 되었다. 파산으로 대출자는 2,700억 엔의 돈을 잃었고, 일본산업은행장은 사퇴했으며 은행 2곳이 도산했다.

일본어 위키백과에는 오노우에 누이가 정확히 언제 사망했는지 모르지만 2014년에 사망했다고 적혀 있다. 정확히는 2017년 3월 20일 한 방송에서 오노우에 누이의 행적을 추적했는데 이미 3년 전에 사망하였다는 것이 알려진 것이다. 물론 1930년생인 오노우에 누이는 2014년 기준으로 이미 팔순의 고령이었으므로 세상을 떠나도 무리는 아니다. 개인의 병크로 일어난 엄청난 사건으로 육체적, 심적으로 스트레스를 받았을 것에 비하면 오히려 오래 살았다고 볼 수도 있을 듯.


5.2. 리크루트 코스모스 사건[편집]


1988년 6월 가와사키의 하급 공무원 1명이 외부에 양심고백을 함으로서 세상에 내막이 드러났다. 내부정보를 활용해 리크루트 코스모스[102] 주식을 매입하여 이익을 챙겼다고 시인하고 사임한 것이다. 당시 리크루트 회장이었던 에조에 히로마사가 자사 관련 입법 과정에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기 위해 정치인, 공무원, 관료, 기업인 등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에게 자사의 주식을 대량으로 선물했던 것.[103] 이 사건으로 당시 법무대신은 임명된 지 나흘 만에 사임했으며 대장대신도 물러났다.

거기다 다케시타 노보루 당시 일본 총리도 리크루트 주식으로 1억 5,000만엔의 부당이익을 챙긴 것이 몇 달 뒤 드러났다.[104] 이 사건으로 다케시타 노보루 총리는 사퇴했고 차기 총리주자였던 미야자와 기이치, 와타나베 미치오, 아베 신타로가 일보 후퇴해야 했다. 그래서 자민당은 당시 총리직과는 자리가 멀어 보였지만 청렴한 관료 이미지가 많이 부각됐던 우노 소스케를 후임 총리로 지명했는데 우노도 이후 불륜 혐의가 드러나며 취임 두 달 만에 사퇴했다. 이후 자민당의 지지율이 급감했고 소비세 신설문제와 함께 엮여 1989년 7월 23일에 치러진 참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은 처참한 성적을 받았다.

이전에는 자민당이 중의원 선거에서 과반수를 확보하지 못하면 '자민당 참패!' 타이틀이 뜨는 수준이었다. 그러던 차에 개선의석의 1/3(126석/ 총의석 252석)조차 확보하지 못하고 총의석에서도 과반에 18석씩 미달하는 상황이 되었으니 자민당 입장에선 이보다 처참할 수 없는 선거결과였던 것. 오죽하면 다음 해 치러질 중의원 선거에서 사회당 중심의 야당연합이 압승하여 55년 체제가 끝장난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였다. 1990년 중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이 과반의석을 확보하면서 55년 체제 붕괴는 몇 년 더 늦춰졌지만...

우노의 사퇴 이후 후임 총리로 선출된 가이후 도시키는 너무나도 커진 버블을 잡기 위해 부동산 대출 총량규제를 실시했는데 이것이 결국 1992년 급격한 버블 붕괴로 잃어버린 10년이라는 장기 불황을 낳아 버리고 말았다. 결국 이 사건이 간접적으로 잃어버린 10년이라는 큰 사건의 단초를 제공해 버린 셈.


5.3. 허영중(이토만) 사건[편집]





6. 거품경제 이후의 일본[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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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1956년 ~ 2008년 실질 GDP 성장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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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1985년 ~ 2013년 정부부채 증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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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연평균 실질 소비지출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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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명목임금, 실질 임금 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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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선진국과 비교한 일본의 실질임금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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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실질 가처분소득 추이

파일:닛케이평균주가.png
닛케이 225 지수 추이

아직도 거품경제 침체의 늪에서 제대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는 일본인은 1991년부터 2001년까지를 '잃어버린 10년'이라고 부른다.[105] 이 시기를 통해 한국은 일본과의 경제적 격차를 크게 줄일 수 있었다.[106] 1990년 기준으로 1인당 GDP가 일본이 25,359달러였던 시절 한국은 6,516달러로 거의 4배 가량 차이가 났다. 2021년 한국의 1인당 GDP가 약 34,758달러로 추산되는데 일본은 39,285달러 수준으로 1.13배 정도밖에 차이가 나지 않으며 33계단 차이나던 1인당 GDP 순위로는 2계단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 일본의 1인당 GDP는 물가를 고려해 보면 사실상 제자리 걸음이다. 2020년 이후 실질적 PPP 또한 대부분 한국이 일본보다 우위에 서게 되었다. 2001년만 해도 일본의 평균임금은 3만 7165달러로 1만 5736달러였던 한국의 2.4배였지만 2022년에는 실질 환율 기준으로 한국의 평균임금은 3만 2532달러로 3만 2503달러인 일본을 앞서게 되었다. 즉, 한국의 최저임금과 실질임금마저 전부 일본을 추월하게 되었다.# 최근 20년간 이코노미스트에선 일본 경제를 다룬 적이 아예 없었단 점에서 이미 전문가들 사이에서 일본 경제에 대한 평가는 과거의 재산으로 버티고 있을 뿐 성장에 대한 기대는 사라졌음을 보여주고 있다.

취업시장 역시 버블 붕괴의 충격을 받았다. 안 그래도 에코 베이비붐(1971~1974년생) 세대가 취업을 준비할 때라 더 많은 일자리가 필요했는데 늘기는커녕 왕창 줄었으니 스펙이 아무리 좋아 봤자 취업문은 바늘구멍이었다.[107] 이 시기를 '취업빙하기'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것이 일본 사회의 출산율 급감의 원인 중 하나로 평가되기도 한다. 덧붙여서 베이비붐 에코 세대 중 상당수가 나이가 들어서도 제대로 된 직장에 취직하지 못하고 비정규직을 전전하거나 니트족으로 남는 경우가 상당했기 때문에 현재까지 일본 경제에 큰 짐이 되어서 막대한 후유증을 남겼으며 에코 베이비붐 세대의 출산율은 매우 낮았기에[108] 일본의 고령화 현상을 가속화하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 2010년대 들어 출생률이 낮아진 시기에 태어난 세대가 본격적으로 취업에 돌입할 시기가 되고 나서부터는 버블경제 시기에 버금갈 정도로 사람 구하기가 힘들어지자 뒤늦게 신입사원을 우대한다거나 외국인 노동력을 수입해야 한다느니 하는 호들갑을 떨기 시작했지만 이미 배는 예전에 떠난 셈이다.

다만 일본의 대졸자 취업구조는 한국과 많이 달라서 취업난의 개념도 다르다. 일본은 대학 4학년 1학기가 시작되는 4월부터 공식적인 리크루팅이 시작되어[109] 이르면 골든위크 전, 늦어도 졸업 전에 입사가 확정되는 시스템이다. 물론 취활(就活-취직활동)은 3학년 1학기부터 시작한다. 3학년 2학기가 되면 취직 세미나 등에 참석하고 빠르면 11월쯤부터 입사면접이 시작되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정년이 보장되며 기업도 30년은 쓸 의도로 뽑기 때문에 일단 입사하면 이직이나 경력자 전직 등의 형태로 회사를 옮기는 것이 쉽지 않다. 간단히 말해 졸업식 전까지 결정된 회사가 이후 인생행로를 결정한다. 마찬가지로 졸업식까지 취직이 결정되지 않았다면 이런 경우 정상적인 취업은 사실상 불가능.[110]

한국처럼 휴학을 반복한다거나, 졸업하고도 계속 도서관 다니며 취업준비하는 경우는 없다기보다 불가능하다. 아주 작은 중소기업도 졸업=신입사원이라는 공식이 박혀 있다.[111] 이렇게 입사하는 사례를 '신졸(新卒)'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졸업예 정인 4학년이 받는 스트레스가 상당하다. 단 몇 개월에 불과한 취업시즌에 인생이 걸린 것과 마찬가지다. 여기서 밀리거나 탈락하면 패자부활의 기회 따위는 없다.[112][113]

그러다 보니 누구나 채용오퍼를 서너 개씩 받아서 느긋하게 골라 가며 졸업 준비하던 거품경제 시기와 비교해서 힘들다는 말이 나오는 것이지 객관적인 수치로 일본의 고용시장은 다른 OECD 국가와 비교해도 상당히 안정적이다. 특히 청년실업률은 일부 유럽국가와 비교해보면 환상적으로 낮은 수준.[114] 물론 1980년대 호황기에 비해서 비정규직이나 블랙기업이 늘어나는 등 일자리의 질은 확실히 떨어졌다고 할 수 있겠다.

실제로 2011년 기준으로 일본의 대학 졸업 예정자의 취업내정률[115]은 90%를 넘었고 잃어버린 20년 동안에도 90% 선이 깨진 것은 미국 금융위기가 폭발한 직후인 2009년 정도다.[116]

버블경제 다음에 장기 불황까지 오면서 세대 갈등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20년에 달하는 기간 동안 취업빙하기를 직접 겪은 세대는 경기 침체 시대에 힘들게 살고 있는 이유가 버블경제 때에 호황을 누리면서 고생도 안 해 본 기성세대 때문이라고 비난하는 경우가 꽤 많다. 이런 세대 갈등은 한국도 비슷하지만 일본은 더욱 심하다.[117]

다만 위의 장점은 뒤집어 말하면 고용유연성이 극단적으로 낮다는 뜻도 되며 직접 현장에서 일해 보지 않고는 정확히 깨우치기 어려운 본인의 적성과 맞지 않는 직업을 택해 버렸거나, 한순간의 부주의나 실수로 중과실을 저질러 또는 무언가 밉보여 해고(권고사직 포함)당하거나, 사고, 질병 등으로 장기간 상병하게 된 상태로 휴직연한을 초과하거나, 조직문화가 맞지 않거나, 정년퇴직하였으나 퇴직금을 날려먹거나 빚을 갚는 데 전부 쓴 경우라면 그 즉시 사회 최하층의 나락으로 떨어져서 아예 평생 재기불능 상태가 되어 생활보호대상자(대한민국의 기초생활수급자)로 여생을 보낼 것을 강요당한다는 단점도 있다.

그래서 일본 블랙기업에서 시달리다가 더 이상 못 버티는 경우 십중팔구 퇴사가 아니라 자살을 선택하는 것이다. 물론 재취업이 어려운 건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이긴 하나 일본은 그 정도가 거의 전 사회적 낙인 수준으로 매우 극단적이라는 것. 과거 1회 이상 전직했거나, 졸업 이후 2년 안에 취직을 못 했거나, 입사한 지 2년이 지나서 전직을 시도하는 구직자가 일본 취업시장에서 받는 대우는 전과자가 받는 대우와 비슷한 수준이라고 한다. 그나마 근래 완화되었다곤 하나 취직 후 1~2년 이내에 단 한 번의 기회(제2신졸)밖에 없고 여전히 불이익을 감수해야 한다. 전과기록은 벌금형은 납부 후 2년, 3년 이하의 실형(집유포함)은 출소 후 5년이 경과하면 말소되는 것을 감안하면 일본에서의 그것은 어쩌면 한국 전과자보다 더할 수도.


7. 세계에 끼친 영향[편집]


플라자 합의로 인하여 세계의 경제 주도권은 다시 영국을 비롯한 서유럽 국가들과 미국에게 돌아가게 되었다. 일본으로 넘어갈 듯하던 세계 경제의 패권이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자 미국에서도 엄청난 거품경제가 발생했는데 빌 클린턴 시대의 닷컴 버블이 그것이다. 일본 거품경제와 달리 장기화되지는 않았지만 IT버블 붕괴 이후 투기자본이 대거 부동산으로 몰리면서 부동산 거품이 생겼고 정부에서 이를 방관하다가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터지면서 일본 못지 않게 힘들어졌다. 이 당시 벤 버냉키는 거품경제에 대한 일본정부의 대책을 보고 꾸준히 적당량의 돈을 계속 푸는게 아니라 헬리콥터에서 돈을 뿌리는 수준의 양적완화를 해야된다는 교훈을 얻고 그대로 실행했다.

참고로 북유럽은 일본과 같은 시기인 1980년대 중반에 부동산 거품이 달아오르다가 1990년대 초반에 꺼지며 경제위기를 겪었는데 특히 스웨덴핀란드의 타격이 가장 심했다.[118] 1994년에는 전 국민의 20%가 실업자였을 정도였다. 다행히 IT 산업 육성 등을 비롯해 체질 개선으로 일본만큼 '길게 잃어버리는' 일은 면했다. # 그러나 2008년에 아이슬란드 은행 연쇄부도를 시작하여 북유럽은 또다시 위기에 빠졌는데, 아이슬란드 정부에서 은행을 모두 국유화한 뒤 부채를 탕감해주는 식으로 경제위기를 해결해 일본처럼 길게 잃어버리지는 않았다.

8. 서브컬처 관련[편집]



8.1. 버블 시대의 작화[편집]


버블시대 이후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종종 한국의 인터넷에서는 도시전설화된 버블시절의 산물에 대한 이야기가 종종 회자되곤 한다. 가장 대표적으로 '버블 시대 애니메이션'이라며 대부분 1990년대 애니메이션의 움짤들 몇 개가 올라오고 '일본에 돈이 넘쳐나던 시절에만 나올 수 있었던 작품'이라며 그 시절에 대한 이야기가 회자되고는 한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면 반은 맞지만 당시 사회상을 모르는 대한민국에서만 쓰이는 엉터리 용어다.

버블시대에 표면적으로나마 페이가 늘어난 건 사실이지만 사실 애니메이션 업계는 버블 시대의 혜택을 받지 못했다. 1980년대 초부터 TV에서 쫓겨나기 시작해 OVA를 만들게 되었기 때문. 한마디로 일하는 스태프들 입장에서도 받는 돈이 특별히 많거나 하지 않았다. 당시도 원화와 동화는 단가제였고 1980년대 업계에 들어온 애니메이터들의 인터뷰를 들어보면 첫 월급이 3만 엔이네, 2만 엔이네 하는 얘기가 수두룩하다. 오오히라 신야, 후쿠다 미츠오, 오오노 츠토무, 와카바야시 아츠시처럼 지금은 애니메이션으로 생계를 잇는 베테랑이어도 중간에 현타가 와서 잠깐 그만뒀던 사람들도 꽤 된다. 정말로 애니메이션이 버블의 혜택을 받았다면 디즈니 애니메이션 같은 매수와 스케일, 퀄리티로 제작되어야 했다.

그렇게 돈이 많이 돌았는데 기업들이 애니메이션에 투자하지 않은 이유는 단 하나다. 부동산과 주식에 투자하면 몇 배로 돈이 벌리는데 애니메이션에 돈을 투자할 리 만무하다.

그 시절 작품이라고 올라오는 것들도 대부분 그 시대를 벗어난 1990년대 애니메이션이며[119] 일본에서는 1991년부터 내려가기 시작해 1992년이면 바닥을 쳐서 버블이 끝난 것으로 본다. 1990년대 중반은 일본 경제가 너무 심하게 몰락해서 잃어버린 10년이라고 부르며 이 시대의 애니메이션 중에 암울한 내용이 많았던 건 버블 붕괴로 인해 일본인들이 입은 상실감, 허탈감의 영향이 크다.[120] 그러나 한국의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는 그런 시대의 애니메이션도 버블 애니메이션이라고 하고 있다. 당연히 1990년대 애니의 대부분은 버블 덕을 전혀 볼 수 없었다. 1990년대부터 퀄리티가 상승한 것은 그저 잘 그리는 사람들이 잘 그려서 그런 것에 지나지 않는다. 1980년대 말부터 우츠노미야 사토루이소 미츠오류 작화가 등장하며 이전의 매수를 매우 적게 쓰는 스타일에서 매수를 많이 쓰며 더욱 복잡하고 리얼한 움직임과 디자인을 추구하는 조류가 등장했기 때문이다. 애니메이션 업계 밖이나 한국에서는 지금까지도 크게 신경쓰지 않는 변화지만 당시 애니메이터들은 서로 영향을 받은 경우가 많았다. 이런 스타일이 다른 계열보다 우월한 것은 아니지만 움직임이나 디자인에 있어서 사실적이기 때문에 현재의 한국 오타쿠들에게도 '좋은 작화'라고 다가오는 경향이 크다.

또 애니메이션의 제작 편수가 적었던 시절이라 이런 좋은 애니메이터가 한 작품에 여러 명이 모이는 경우가 많았다. 돈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다. 오히려 1980년대 초중반의 애니메이션계는 실력 있는 애니메이터는 미국 하청 애니메이션을 그리고 일본 애니메이션은 그리지 않아 일본 애니메이션 작화의 질이 좋지 못했다. 미국 하청 애니메이션이 한국 등으로 넘어가고 위에서 말한 변화가 생기며 상황이 1990년대에 바뀐 것이다. 이후 제작위원회 시스템이 도입되면서 애니메이션 전체의 제작비가 올라갔다.[121]

이 제작위원회 시스템이 도입된 90년대 후반부터 심야 애니메이션 제작이 활성화되면서 매년 애니메이션의 제작 편수가 올라가다가 2006년을 정점으로 내려오기 시작한다. 일본에서 アニメバブル(애니메이션 버블)이라고 하는 것은 이 현상을 말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버블경제 시절 애니가 작화가 좋다는 인식은 당시 방송 환경에 있다. 일본은 1980년대 후반부터 아날로그HD 방송인 MUSE를 NTSC를 대체하는 포맷으로 밀었고 MUSE 고화질 포맷에 맞추어 버블경제 시기 지상파 방영이 된 애니메이션 대부분은 신세기 에반게리온과 같은 35mm 필름을 사용해서 제작했기 때문에 좋은 화질+실력 있는 애니메이터가 겹쳐 좋아보이는것이다. 하지만 1990년대 애니메이션 중에도 투자 못 받고 지상파에서도 방영 못해서 케이블이나 OVA로 대충 만든 작품은 작화가 안 좋으므로 시대로 묶어서 그 시대의 작품은 전부 작화가 좋다 나쁘다고 논하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 작품마다 만들어지는 환경이 다른데 그걸 시대로 묶어 버리는 것은 성급한 일반화에 불과하다.

8.2. 이 시대의 작품 및 시대상의 작품[편집]


의외로 버블 시대에는 당시를 배경으로 한 일본 서브컬처가 많지 않았다. 자신들의 일상이 특별하다는 감각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버블기에도 혜택이 골고루 돌아간 것은 아니라서 직장인들은 버블기의 혜택을 보기는커녕 도시 외곽이나 지방으로 밀려나는 게 부지기수였기 때문이다. 버블 경제 시대에는 오히려 희망적인 미래를 그려낸 SF가 유행했다. 그렇다고 나중에 와서 재현하려고 해도 기억과 일부 자료에만 의존해야 하니 제대로 재현이 힘들어 잘 나오지 않는 편이다.

  • 고지라 vs 킹기도라 - 거품 붕괴가 오지 않은 세계에서 먼 미래에 일본이 세계를 석권하자 이에 반발하는 미래인들이 괴수를 이용해 일본을 망치려는 내용의 영화. 장래에 일본이 세계 최강이 될 것이라고 진심으로 믿었던 당시 일본인들의 자뻑이 근간에 깔려 있다.
  • 크레용 신짱 - 버블 시기 말엽부터 연재가 시작되었기 때문에 당시의 현실을 반영하거나 꼬집은 에피소드가 많았다.[123]
    • 노하라 히로시는 버블 피크기에 도쿄 교외인 사이타마시에 집을 마련해 35년간 주택융자를 갚아 나가고 있는 일본 도시 서민의 대표적인 모습이다. 현재 부동산 가격이 1/3로 폭락했다. 그런 융자를 갚자니 원래는 사치를 좋아하는 아내 노하라 미사에도 절약하고 살 수밖에 없다.
    • 짱구야쿠자 두목같이 생긴 원장 선생님을 처음 보고 지아게야(땅값 투기를 노리는 용역깡패)냐고 묻는다. 애시당초 해당 장면 자체가 바로 버블 시대의 부동산 상황을 풍자한 것인데 한국판에서는 '유괴범'이나 '고리대금업자' 등으로 의역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배경이 잘 알려지지 않았다.
    • 짱구네 가족이 뷔페에서 최고급 캐비어를 먹으려는 장면이 존재한다.
    • 극장판 짱구는 못말려: 어른제국의 역습은 작품 자체에서 이 시대가 큰 의미를 갖는다.[122]
  • 도쿄 80's - 이 때가 배경인 만화.
  • 맛의 달인 - 작가가 배경을 좀 대충 그려서 티가 안 나지만 만화가 시작될 시기 초반부는 버블 시대 초기이며 애니메이션은 버블이 절정일 때 나왔다. 또한 버블 시대 때 일본 전역에 미식 열풍도 돌았고 손님을 대접하는데, 참치 한 마리를 통째로 사서 그 자리에서 직접 회를 떠서 준다든가, 캐비아와 푸와그라를 쉽게 구하는 등 통 큰 미식 스케일이 곳곳에서 나오고 있다.
  • 블랙 레인 - 범죄 스릴러 물이지만 외국인의 눈으로 본 이 시절 일본의[124] 휘황 찬란한 모습들을 그대로 담고 있다. 그리고 본작의 메인 빌런인 사토 코지 역으로 당시 일본의 국민 배우였던 마츠다 유사쿠가 맡았다.[125]
  • 백 투 더 퓨처 - 정확히는 2편. 주인공 마티의 미래에서 세계를 휘어잡은 대기업 후지쯔 필름이 등장한다. 시리즈 막바지의 중요한 키워드를 담은 마티의 해고 통지서도 여기서 보내준 것.
  • 사이버펑크 - 1980년대 당시 일본의 경제가 미국을 넘어설 것이라는 공포가 반영된 장르다.
  • 시티 팝 - 1970년대 말 무렵부터 시작된 일본의 음악적 사조는 이 시절 넘쳐나는 돈으로 호화로운 장비들과 함께 제작된 재즈락 류의 노래들이 많다. 또 시대가 시대인 만큼 모던-프로그레시브 계열과 디스코 재즈 계열 간의 경계에 걸쳐있다는 특징이 있다. 여유가 많던 시절이기 때문에 현재의 노래들과 마스터링 내지 프로듀싱 수준이 비슷하다는 점 또한 시티 팝의 특성.
  • 시티헌터
  • 신입사원 토오루군 - 1984년 코나미에서 제작한 게임. 한국 오락실에서는 신입사원 석돌이라는 제목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 해외판은 Mikie라는 제목으로 발매되었다.
  • 아이돌 마스터 Cinderella Lady - 작중 연극사업부 부장과 여주인공의 아버지로부터 당시의 전성기를 상기하며[126] 작중 상무이사들 간의 갈등 역시 버블 붕괴로 인한 사업 방향이 시발점이다 보니 작중에서 버블 시절이 자주 언급된다.]
  • 오오에도 줄리아 나이트
  • 오렌지 로드 - 거품경제 시대 때 만들어진 애니메이션으로 작품 시대 상도 시티 팝과 거품경제 시대다.
  • 용과 같이 제로: 맹세의 장소와 메인 테마인 バブル - 게임 배경은 물론 테마마저 거품경제의 황혼기인 1988년 일본을 묘사하고 있다. 시리즈 중 유일하게 이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데 시대상에 맞게 전작에 있던 경험치 등은 전부 삭제하고 오로지 모든 걸 돈으로 해결하는 시스템으로 바꿨다. 부가게임인 머니 아일랜드라는 것 역시 부동산 관리로 막대한 수익을 불리거나 하기도 하고 챕터를 클리어할 때마다 벌었던 수익을 당시 물건값, 혹은 평균 월급의 얼마치를 벌었는지 알려준다. 적들을 때릴 때마다 우수수 떨어지는 돈다발 역시 거품경제 컨셉을 제대로 각인시키는 요소. 그런가 하면 서브 퀘스트에 등장하는 전직 부동산 업자 야마노이는 '지금 일본이 누리는 호황은 언젠가 사라질 것'이라고 예측하기도 한다.[127]
  • 우마무스메 프리티 더비마루젠스키 - 실제 마가 활동한 시기가 거품경제 시대인 것을 고증해서 자가용이 당시 유행한 고성능 외제 스포츠카인 것과 그때 유행했던 디저트를 소개하는 것과 줄리아나 도쿄의 상징 부채춤을 후배들에게 가르쳐 주는 게 빼박 거품 경제 세대 확정이다.
  • 웃는 세일즈맨: 구애니 한정(1989-1992). 10분 내외로 되어 있지만 방영 당시 사회상이 어땠는지 알 수 있는 작품이다. 작중 출연하는 조연들이 파멸하는 과정은 당대 일본 중산층들의 허영심과 과소비 풍조를 풍자했다고 볼 수 있다. 또 거품경제 시기의 디스코텍 등 밤 문화도 제대로 보여준다.
  • 유희왕 세븐즈 - 아타치 미미의 말버릇, 행동거지, 그리고 사용하는 카드들 거의 전부
  • 타임 프린세스의 스토리 중 하나인 '비의 속삭임'이 일본 거품경제 당시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 파푸루 - 해당 세대를 살아온 인물들의 생활 문화가 모티브이고 이름의 유래 역시 버블 경제다.
  • 폭음열도 - 80년대 초중반 최고점을 찍었던 폭주족 문제와 더불어 배경으로 당대 일본 사회의 소소한 모습들이 잘 묘사되어 있다.
  • 히카루GENJI
  • AKIRA(1988) - '버블 시대 애니메이션'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아키라의 실질 제작비는 7억 엔[128] 정도로 역대 극장판 애니메이션 제작비 랭킹 중에서는 그렇게 높지 않은 수준이다. 엄청난 컷수를 사용한 것 치고는 높지 않은 제작비라는 것은 결국 사람을 엄청나게 갈아댔다는 말이다. 당시 많은 일본 SF가 희망적인 미래를 그리고 있던 시기에 버블은 끝나고 일본 경제는 망할 것이라고 예견한 몇 안 되는 작품이다.
  • beatmania IIDX 14 GOLD - 이때를 컨셉으로 잡은 시리즈.
  • GS 미카미 극락대작전!!
  • 20세기 소년 - 주인공들의 어린 시절은 70년대 오사카 만국박람회 시기지만 청년 시절은 버블 시기다. 특히 쇼군이 태국으로 간 원인을 설명하면서 거품경제 시기 잘 나갔던 모습이 언급된다. 안보/마보의 성공도 이 시대의 산물.


9. 참고/관련 자료[편집]




10. 같이보기[편집]


  • 그리스 경제위기
  • 거품경제
  • 겐로쿠
  • 닷컴 버블
  • 롯데월드[129]
  • 잃어버린 10년/일본
  • 줄리아나 도쿄
  • 하우스 텐 보스 - 나가사키현 사세보시에 있는 유럽테마파크. 바로 버블 경제 시절 돈지랄의 산물. 빈말이 아니라 모나코 공국보다 큰 부지에 헤이그에 있는 왕궁인 실제 하우스 텐 보스를 똑같이 재연했다. 버블경제 시절에는 입장료만 무려 2만엔. 그걸 돈 주고 들어가는 사람이 있었으니 현재도 유지되고 있다. 지금 입장료는 약 4~5천엔 정도 한다.
  • 헤이세이ABC
  • 혼다 CBR 250RR
  • 혼다 NR
  • 흑자도산
  • 1990년대 외환위기 이후 2000년대 한국 - 1997년 외환 위기 전까지 전두환 정권이었던 1980년대부터 경제 급성장이 지속되었다.[130] 그러다가 1997년 IMF 외환위기 이후 국민의 정부 시기부터 초고속 인터넷망 구축을 기반으로 가정에 컴퓨터가 보급되기 시작했으며 사회문화 전반에 점점 자유로운 분위기가 퍼지기 시작했고 특히 음악으로 대표되는 대중문화 시장은 양적 황금기를 맞았다. 그러나 한국IMF 외환위기를 극복하고 경제성장을 지속하여 2020년대 실질 GDP가 1990년대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증가한 반면 일본은 버블이 꺼진 이후 당시의 실질 GDP와 실질임금을 현재까지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따라서 1990년대 한국버블경제 시대 일본의 공통점은 높은 고용률과 낙관적인 사회 분위기, 그리고 기업의 과잉투자 정도다. 경제 규모만을 따지자면 예나 지금이나 일본에 상대가 안된다.



[19] 유럽은 물론이고 미국조차 기술과 품질로 무장하고 들어온 일본 제품에 의해 점령당했고 이로 인해 GE, RCA, 웨스팅하우스 같은 전자회사들은 가전제품 시장에서 철수하거나 고사되는 등 후폭풍을 앓았다.[20] 사실 전술한 업체들은 가전도 하지만 전력사업 등 기업, 정부 대상 대규모 사업이 사실상 메인이며 이 쪽이 이윤도 더 많이 남는 분야다. 경제원리로 봐서도 슬슬 소비재 가전은 철수하고 B2B 사업에 집중하는게 맞으며, 그런 이유로 가전시장에서 철수핬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이윤폭은은 적어도 일반인들에게 인지도가 높은 사업이기 때문에 이들 사업이 철수하고 일본 제품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는 것은 일반 미국인들에게 큰 영향을 줬다. 아래 단락에 나오는 미국인들의 반응 또한 이런 사실에 기인한다. 삼성전자 등 주력 사업이 반도체 등 B2B에서 나오는 기업들도 소비재 가전, 그 중에서도 이윤폭이 거의 없다시피 한(AS망 유지까지 포함하면 사실상 손해인) 주방가전, 소형가전 등을 완전히 포기하지 못하고 중소기업 OEM으로라도 유지하는 이유가 바로 이런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이미지 때문이다.[21] 이 시기 미국 업체들(주로 앞 엔진 후륜구동 레이아웃이 주류였으며 중형차로 분류되는 차종들도 전장이 5m대에 달했다)은 유럽, 일본의 가로배치 앞 엔진 전륜구동 레이아웃을 성급하게 벤치마킹하려다가 경력직 엔지니어 상당수의 은퇴, 제너럴 모터스 내 재무부서의 권력 독점으로 대표되는 숫자 중심의 회사경영, 엔지니어링 및 재무팀의 지나친 제품개발 간섭, 효율만 쫓다가 다른 경쟁력을 말아먹은 1970년대 말~1980년대 초중반 배지 엔지니어링의 남발 등으로 경쟁력을 대거 상실했고 품질 및 신뢰성 문제도 속출해 고객들의 외면을 받았다. 반면 토요타를 비롯한 일본 업체들은 비용절감을 하면서도 품질을 유지하는 것이 전제조건이었기 때문에 미국 차 대비 고품질이라는 인식을 심어 줄 수 있었다.[22]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는 당시 일본 경제의 성공 요인을 주제로 하여 그 유명한 피터 드러커가 쓴 장문의 분석글을 게재한 적이 있다.[23] 그리고 이때부터 일본에서도 "이제는 우리도 (미국에 대해) 우리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이른바 저자세에서 벗어나자는 여론이 커지기 시작했고 그래서 나온 것이 이시하라 신타로모리타 아키오가 공저한 ''No'라고 말할 수 있는 일본'이란 책이다.[24] 일본의 경제학자들과 관료들은 이미 70년대부터 소비세 신설을 주장했지만 세금 인상에 따른 유권자들의 반발로 두 차례 정도 쓴맛을 본 자민당이 계속 막고 있었다. 하지만 부동산 폭등이 계속되자 이러다간 더 큰 민심이반이 올 것이라고 판단한 자민당이 전격적으로 소비세 신설을 밀여붙였다.[25] 단 일본의 LTV 규제에 대해서는 명시적인 텍스트가 없어 확인이 필요하다. 기껏해야 홋카이도타쿠쇼쿠은행에서 120%짜리 대출을 해줬다는 사례가 언급되는 정도. 현재 일본에는 정부가 공식적으로 적용하는 LTV 규제가 없는데 한국 텍스트에는 (아마도 정부의 간접 지도 또는 금융기관 자체 기준을 인용해서) 80% 혹은 100%로 쓰는 경우가 많다. 또 미즈호 은행 계열 연구소 자료에 의하면 일본 기업용 부동산 대출의 LTV 비율은 이미 버블에 들어서기 전부터 감소하고 있었고 지가가 하락한 1992년 이후에는 오히려 상승했다. 더불어 1988~1990년 사이 부동산 대출 총량이 20~30%씩 급증하다가 브레이크가 걸려서 그렇지 어쨌든 대출 자체가 감소한 해는 없었다.[26] 일본 전체의 공시지가를 보면 1989~1991년 사이 상업용지는 40%, 주거용지는 36% 상승하는데, 1992년에 각각 -4%, -5.6% 떨어졌다. 특히 가장 등락이 심했던 오사카권은 동기간 주거용지가 95% 상승했다가 -23%로 급반전했다.(관련 논문)[27] 투금계정이란 재무상태표에만 나타나고 손익계산서에는 기타포괄손익으로 처리할 수 있는 특별자산들을 모아놓은 펀드 투자자산 계정이다. 기업들이 펀드 투자할 수 있는 건 당연한 거 아닌가 싶겠지만 일본에서는 1984년 이전까지 비금융권 기업이 펀드에 투자하는 것을 불법으로 규제해 왔다. 회사의 본업을 망각하고 돈놀이에만 올인하면 안 된다는 이유. 한국에서는 불법이었던 적이 없다. 대신 한국에서 펀드라는게 유행을 탄 것은 1997년 외환 위기 이후였기에 1997년 이전에는 한국 기업회계에 투금계정이 있다고 하더라도 기업에서 활용하지 않았던 것이다.[28] 위 50대기업 시가총액 표에서 1위인 NTT 항목을 보라. 2위와는 아예 자릿수부터 다른 것을 알 수 있다.[29] 시장 가격 10억짜리 땅을 가지고 있으면 20억까지 대출해 준다는 소리. 물론 은행들이 '언젠간 2배가 될 거니까 그 정도 쯤 쳐줘도 된다'는 생각에 이런 담보율을 설정했다고 단순화시킬 수는 없다. 타 은행과의 경쟁, 실제 파산 비율 등도 고려해야 하니까. 하지만 그런걸 감안해도 LTV 200%는 그만큼 은행이 자신이 있었다는 뜻이고 당시에는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다.[30] 2020년대 한국 LTV는 50% 내외다.[31] 다만 농촌은 제외. 도심에서 먼 지역을 보면 당시 소득 대비 큰 거품이 끼었다고 보기 어렵다. 산골은 말할 것도 없고... 아라카와 히로무백성귀족 6권에서 이 당시 분위기를 전하는데 워낙 깊은 산골짝이라 땅값이 한 푼도 안 올랐다고 말하는 작가 아버지와 이놈의 땅을 긴자에 들고 가서 팔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냐고 말하는 작가 어머니의 표정이 압권.[32] 당시 토지 가격을 보자면 미나토구는 평당 1,900만엔, 스기나미구는 350만엔을 기록했다. 오사카시는 평당 200만엔, 나고야시는 85만엔, 후쿠오카시는 45만엔까지 치솟았다. 긴자는 평당 1억엔을 기록하는 기염을 토했다. 1980년대에! 그리고 일본은 버블 붕괴 이후 20년 동안 지속적인 디플레이션을 겪었기 때문에 실질 가치는 명목상의 1,900만엔보다 훨씬 높았다.[33] 미나토구 중에서도 아자부나 아오야마 같은 곳은 평당 5,000만엔에 육박했다. (출처:상기한 KBS스페셜)[34] 현재는 이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약 한화 2조 2천억원 정도의 규모다.[35] 현재의 시오도메 시오사이트 부지.[36] 그러나 부동산 거품이 최고조에 달한 2022년 한국에서도 “50년 만기” 주택담보대출 상품이 등장하면서 일본의 버블경제를 떠오르게 했다.[37] 타마 지역. 이 지역은 한국으로 친다면 1970년대-1980년대 강남구노원구 비슷한 지역이라고 볼 수 있다.[38] 일본의 교통비가 비싸다 보니 직장에서 교통비를 별도로 내 주는 게 관행인데 이를 이용해 직장에서 신칸센으로 출근해서 집세와 집값을 아끼는것이다. 다만 이런 게 없는 직장에 다닐 경우에는 비싼 신칸센비를 다 내야 해서 일반전철을 타야 했다. 일본에서 히키코모리 현상이 한국보다 두드러지게 심각한 이유 중 하나였다.[39] 하지만 버블 붕괴 후엔 상황이 반전되어서 상속을 받았다가 거액의 세금을 무는 바람에(이 경우에는 버블 시기에 재산 신고해서 서류상 재산은 빠방했는데 막상 상속받을 시기가 되자 부동산이 팔리지 않아 애물단지가 되어 버리고 설사 부동산이 팔리더라도 엄청나게 손해를 보기 때문에 세금 감당도 못 할 지경이 되면서 결국 파산하게 되는 것) 파산하는 일이 잦아서 상속을 포기하는 사례가 많았다는 웃지 못할 일도 많았다고 한다.[40] 개중에는 '지아게야'라 해서 야쿠자가 운영하는 개발 회사들도 많았다. 이 경우 굉장히 폭력적인 방법까지 동원해서 억지로 땅을 사들였기 때문에 원주민 입장에서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만화 드래곤볼에서 수하들을 동원해 행성들을 정복하는 악당 프리저는 이런 개발사들을 모티브로 삼았다.[41] 한국과 다른 점이 있다면 한국에서는 이런 상황이면 공공기관에서 토지 수용 후 전면 개발한다. 공공의 수용이므로 감정가의 2배 이내에서 수용가가 결정된다. 반면 일본에서는 공공의 수용이 아닌 민간이 토지를 다 사야 하므로 개중에 몇 몇 알박기 등으로 인해 토지가가 무한정 올라갈 수 있다.[42] 한국은 일개 건설사가 독자적으로 도시 개발을 할 수 없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보통 한국토지주택공사나 지방공사가 도시개발을 하고 건설사는 단지 시공만 한다.[43] 일본 최대의 구직정보회사. 한국으로 치면 사람인이나 잡코리아, 인크루트 같은 회사다.[44] 물론 핑크 플로이드가 뼛속까지 붉은 좌익 밴드긴 하지만 당시 영국병으로 경제난이 극심한 상황에 냉전과 일본과의 경쟁을 힘겹게 치러야 했던 영국의 상황을 잘 나타낸 가사다. 거꾸로 말하자면 당시 일본의 거품이 냉전에 비교될 만큼 심각했단 것.[45] 뉴스위크의 1989년 10월 9일자 표지는 "JAPAN INVADES HOLLYWOOD(일본이 할리우드를 침공하다)"라는 표지로 컬럼비아 픽처스를 34억불에 매입하는 일본의 위세를 승리의 여신이 기모노를 입고 횃불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패러디했다. 버블 시대 일본의 해외 투자 광풍을 상징하는 이미지 중 하나다. 링크[46] 이 기모노 입은 일본인은 한국계 미국인 배우인 알렉시스 리(Alexis Rhee)로, 블레이드 러너로 데뷔하였다. 훗날 영화 블랙팬서에는 여자 꽈찌쭈 수산시장 아줌마로 나온다. “사고치기 좋아하는 애들이라고?”라는 명대사를 남긴다.[47] 빌런은 독일계인데 독일도 플라자 합의에 일본과 같이 불려나간 전적이 있다.[48] 심지어 극중 나카토미 사장을 건물에서 추락시켜 죽인다.[49] 이러한 것들의 영향으로 SF의 상류층 집은 일본적인 인테리어나 정원 등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종종 묘사된다. 블랙 레인(1989년)은 아예 일본 본토까지 날아와 찍었고 데몰리션 맨에서도 지배층은 일본 문화를 향유하고 있다.[50] 사이버펑크 2020은 아직 버블 시절이었던 1990년에 나온 게임이다.[51] 1980년대 미국 남성의 평균 수명은 만 70년 정도로 2차 대전 참전용사(대략 1917~1926년생) 중 대부분은 생존 중이었다. 19세기 출생자들도 살아 있던 시대인데 1910~20년대 생들이 살아 있는 건 이상하지 않았다.[52] 멀리 갈 필요 없이 6.25 전쟁은 휴전한 지 당시 기준으론 32년밖에 안 되었다.[53] 그것도 자잘한 전투에 휘말린 정도가 아니라 치치지마 식인 사건의 희생양이 될 뻔했다! 그래서 1989년 쇼와 덴노 사망 이후에야 "이제야 겨우 일본을 용서할 마음이 들었다"는 술회를 했고 장례식에도 참석했다.[54] 이런 응수는 미국 언론사는 아니지만 영국 파이낸셜 타임즈2015년 니혼게이자이신문전액 현금 일시불로 질러 버리는 모습을 통해 반쯤 실현됐다.[55] 이게 왜 남아 있냐면 이 해바라기 최고가 낙찰 기록은 무려 17년이나 있다가 갈리기 때문이다. 인플레이션을 고려하면 엄청난 금액이 아닐 수 없다.[56] 실제 매입비용은 수수료 등을 포함하여 $39,921,750이었다.[57] 물론 거품 꺼진 뒤에는 예술품 가격도 폭락했다.[58] 당시 돈 좀 있다 싶은 부동산 회사는 명화를 입구부터 사장실까지 걸어 놨다고 한다. 어떤 미국인이 사업차 와서 이를 보고 뒷담화를 까기도 했다고.[59] 만화 갤러리 페이크에서는 주인공 후지타 레이지가 이렇게 거품경제에 미친 졸부와 은행들의 농간에 휘말린 명화들을 거래하거나 복원하다가 진품은 자기가 챙기고 복제품을 파는 식으로 나름대로의 복수를 하는 내용이 많이 나온다.[60] 파이낸셜 타임즈는 원래 미국 월스트리트 저널블룸버그가 인수의향서를 제출하고 경쟁했는데 인수의향서를 제출하지도 않았던 일본 니혼게이자이신문의 키타 츠네오(喜多恒雄) 회장이 파이낸셜 타임즈의 모회사 피어슨 그룹의 회장을 1:1로 만나서 007 가방에 들어있는 현금 다발을 보여주고 그 자리에서 니혼게이자이의 FT 인수가 확정됐다.(...) 이게 무슨 첩보 영화도 아니고 사실 이런 인수과정은 인수의향서를 제출하고 정식으로 인수 경쟁을 하는 인수 후보 기업들한테는 엄청난 결례다.[61] 일본 엔화가 기축통화에 준하는 격을 가지고 있어서 가능한 일이다. 미국에서도 연준이 주가 부양을 위해 비슷한 일을 한다. 당연히 한국에서 하면 큰일난다.[62] 본래 일본은 플라자 합의로 인해 기업들의 수출 경쟁력을 위해 금리 인하를 단행했으나 부동산 시장의 과도한 거품으로 인해 금리 인상을 단행한 것이다.[63] 실시 기간 : 1990.03.27 ~ 1991.12.20[64] 다만 규제의 기한이 지나고 불경기가 지속되자 다시 LTV를 올렸고 2021년 기준으로 90~110%까지 대출을 해 주고 있다.[65] 그래서 이 시기에 많은 수입차들이 한국, 중국, 동남아, 러시아, 인도 등지로 중고로 팔려나갔다. 현재도 구소련권에 가면 1980~90년대에 나온 우핸들 차들이 많이 보이는데 이 시절에 팔려나간 차들이다.[66] 이 시기를 기점으로 아이린 지구의 슬럼화가 진행되었다.[67] 여담으로 이로 인해 그의 아내는 우울증에 걸리게 되고 심지어 자살 시도까지 했을 정도로 가정도 파탄났다. 〈욕망과 혼돈의 기록, 도쿄 1991〉 를 촬영할 당시 스즈키의 집이 나오는데 아내가 머물고 있는 문을 찍기만 할 뿐 얼굴도 비추지 않는 것으로 보아 우울증이 현재진행형임을 암시하고 있다.[68] 별빛의 왈츠, 북국의 봄 등으로 유명했던 엔카 가수. 향토적인 외모와 양 눈썹 사이의 커다란 검은 사마귀(현재는 없음)가 트레이드 마크였으며 노래 또한 서정적이고 향토적인 분위기의 곡이 많았다. 당시 사람들은 '센()' 마사오가 아니라 '억()' 마사오라고 불렀고 전용 헬기를 타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사업을 했고 그를 풍자한 개그 프로그램 등이 만들어질 정도였다.[69] 본래 3천억엔에 달했지만 현재 은행으로의 공적 자금 투입으로 인해 최종적인 개인 부채액은 1,034억엔이 되었다.[70] 바로 위 유튜브 동영상 썸네일에 손가락을 입에 가져다대고 '쉿' 제스쳐를 하는 노인이다.[71] 그가 진 100억엔의 빚을 다 갚기까지 소요될 기간을 직접 계산해서 보여줬는데 무려 8333년이 걸릴 것이란 답이 나왔다! 한마디로 평생 못 갚는단 얘기.[72] CF 속 미소 짓는 여주인공은 마츠모토 타카미(松本 孝美, 1965년생)다. 연인으로 나온 남자는 일본계 미국인인 켄 브레니스(ケン・ブレニス 일본에서 활동하다가 나중에 버블경제가 꺼지고 잃어버린 10년이 도래하자 미국으로 다시 건너갔다). 참고로 2분쯤부터 나오는 광고는 80년대 한국에서도 거의 똑같이 리메이크되어 방영된 바 있다. 심혜진이종원이 출연했으며 CM송도 한국어 가사였다. 코카콜라 내부 정책에 따라 일본의 원본을 정식으로 로컬라이징했다. 다른 영상들이 있는 버전도 있다.[73] 이는 단지 광고를 카피한 게 아니라 당시 한국의 분위기도 일본 버블 경제의 영향을 받아서 패션, 영화, 드라마 등 전반적으로 일본과 거의 흡사했다. 한국에서 리메이크한 코카콜라 광고도 당시의 한국 분위기나 사회상과 전혀 위화감이 없을 정도로 잘 어울렸고 많은 젊은이들이 광고 속에 나오는 샐러리맨들처럼 되기를 바라며 대학생활을 즐기던 때였다.[74] 영상의 자막에 '광고로써'라고 잘못 쓰여 있다. '~로써'는 '~를 사용하여'라는 뜻이므로 여기서는 '광고로써'라고 써서는 안되며, '광고로서'라고 써야 맞다.[75] 소형차는 2000년대 이후다.[76] 현 벤츠 C클래스의 전신이다. 당시 상대는 BMW의 3시리즈.[77] 아기벤츠(子ベンツ) 혹은 작은 벤츠(小ベンツ)로 해석 가능.[78] 토요타의 준중형 세단. 한국에서 흔히 쓰는 "강남 쏘나타"와 비슷한 표현이다.[79] 전술하였듯 지금 대한민국에서 돌아다니는 오래된 병행 수입 차량 대부분이 이시기 일본에서 출고된 차를 한국에 들여온 것이다. 해당 차량들이 출시되었던 시기의 초록색 바탕의 지역 번호판 대신 현행 흰색 번호판을 달고 있는 경우 십중팔구 해당된다. 1987년 수입차 시장 개방 이전 대한민국에서 수입차를 구입할 수 있는 방법은 주한미군의 중고차를 구매하거나 신성일포드 머스탱처럼 운송료, 관세, 수입쿼터까지 붙여서 원래 자동차 가격의 몇 배나 되는 부대비용까지 들여서 수입하는 것이었다. 1987년 수입차 시장 개방 이후에는 정식 딜러를 통한 구입이 가능하게 되었지만 2000년대 FTA 체결 이전까지 수입차는 여전히 국산차보다 많이 비쌌다.[80] 그럼 여기서 우핸들이면 우측통행인 대한민국의 도로에서 운전하기 힘들지 않을지 의문이 들 수 있는데 일본에서는 수입차가 많지 않던 시절부터 좌핸들=수입차=부의 상징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그래서 불편을 감수하더라도 수입차는 좌핸들로 뽑는 경우가 많았다. # 일본의 중고차 사이트들에서도 한국에서 우핸들 수입차를 찾는 것보다 좌핸들 수입차들을 훨씬 많이 찾아볼 수 있다.[81] 면접비만 모아서 차를 산 사람도 있었을 정도. 전체적으로 인력이 모자란 시기라 면접에 대한 견제도 있어 면접 이후 지원 여부에 상관없이 면접자들을 하와이로 관광 보내 주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그동안 다른 회사 면접을 보러 가지 못하게 위해 돈을 부어서 견제를 한 것이다.[82] 연간 노동시간이 2,200시간 정도였다. OECD 노동시간 2위를 찍은 한국의 연간 노동시간은 2016년 기준으로 2,113시간이다.[83] 문을 닫은 이유가 적자 때문인게 아니라 처음부터 10년간 한정 운영이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동호인들 덕에 마지막까지 흑자였다고 카더라(…).[84] 지금은 이케아 일본 1호점이 생겼다. 그러나 이 이케아는 엄밀히 말해서 최초의 일본 1호점은 아니다. 일본에서 한 번 실패를 겪은 뒤 2000년대에 재진출해서 리부트로 1호점을 다시 세웠는데 공교롭게도 자우스가 있던 자리라고 한다.[85] 지브리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도 이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치히로의 부모님이 작중 주요 배경이 되는 유바바의 목욕탕과 부속시설을 거품경제 당시 만들어졌다가 망한 테마파크로 오해한다.[86] 유니버설 스튜디오 재팬은 2001년 개장이라 해당되지 않는다.[87] 1980년대 일본 전자 기업들이 완전한 오리지널은 아니더라도 각각의 8, 16비트 컴퓨터 아키텍처를 갖고 있었던 것을 상기해 보자. 현재 일본의 8대 전자 회사로 일컬어지는 대형 전자기업 중 NEC, 후지쯔, 샤프, 히타치 등은 CPU에서 모니터 브라운관까지 대부분의 부품을 자사 공장에서 만들어서 자사 소프트웨어로 돌리는 PC를 출시할 수 있었다.[88] 물론 버블 당시의 일인지라 버블 시대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는 현재의 젊은층은 수록되어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사람이 많다.[89] 당시 기준으로 월 10만 엔. 단, 해당 만화에서는 엔화가 아닌 미화 900달러로 나온다.[90] 대한민국 해군은 당시 2차대전때 쓰던 기어링급 구축함이 막 퇴역을 하고 있었으며 현대해전에 걸맞지 않는 울산급, 포항급이 주력이었고 그나마 현대 해전에 조금이나마 어울릴만한 광개토대왕급 구축함 도입 사업을 진행하고 있었다.[91] 사실 중남미의 잃어버린 10년(1980년대)나 러시아의 잃어버린 10년(1990년대)과 비교해 봐도 그 차이가 크다. 저 두 사례는 기본임금과 복지혜택마저 줄어드는 초유의 사태였던 데 반해서 일본은 최소한 1997년까지는 미약하게나마 임금이 올랐다. 이후부터는 쭈욱 침체지만.[92] 이때 주로 미국, 남미, 유럽, 아프리카, 중동 같이 매우 먼 지역들은 물론 급부상하던 한국, 동남아, 호주, 인도 같은 지역으로도 여행을 자주 갔다.[93] 1982년 오사카에서 개업한 디스코 클럽으로, 오사카 본점보다는 도쿄 아자부주반 지점이 더 유명했다. 시기적으로는 이 클럽의 영업 시기가 진짜 거품경제 시대와 일치한다. 다만 줄리아나와 달리 복장 규정이 까다로운 등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컨셉은 아니었다.[94] 엄밀히 말하면 줄리아나 도쿄는 1991년에 처음 개장했으므로 거품경제와는 관련이 없다. 하지만 적어도 1995년까지는 사회 분위기가 거품경제 시기와 거의 차이가 없어서 그 시절의 문화라고 봐도 무방하긴 하다. 실제로 일본인들 스스로도 줄리아나 도쿄를 거품경제 시기의 상징들 중 하나로 여긴다.[95] 당시 이런 삶은 졸부나 재벌 같은 상류층들만 누렸다. 일반인들은 지금과 다를 것 없이 살았다. 당장 저 당시 일본의 가계저축률은 30%를 넘었는데 그건 세계적으로도 제일 높은 수준이었다. 오죽하면 당시 저축 장려 캠페인에서 상투적으로 나온 말이 '선진국이 되려면 일본의 저축을 본받자'였으니... 또 당시 한국에서 일본을 평가하는 말 중 하나는 '나라는 부자이고 국민은 가난한 나라'... 일본의 고소득을 아득히 뛰어넘는 고물가와 대한민국의 서민들 집보다도 더 작은 일본 서민들의 집 등 당시 일본 일반인들의 삶이 한국인보다 나을 게 없다고 생각하는 분위기도 분명히 있었다. 물론 저런 이미지에서 일본인들은 돈 있다고 흥청망청 안 쓰니 일본이 강대국이 된 것이라는 식의 결론을 내기도 했지만 어쨌던 돈 있다고 일반인들이 흥청망청 쓰고 살던 시기와는 한참 거리가 멀었던 것.[96] 한국도 사람들이 물질적으로 풍요롭고 안정된 시기로 여기는 3저 호황1997년 외환 위기 직전까지의 시기와 외환위기를 막 벗어난 2001년부터 2006년까지의 호황기에도 전반적으로 서민들에게는 조기 해외유학이나 해외여행 같은 것은 꿈같은 얘기였고 특히 후자의 시기에는 현재진행형으로 심각하게 거론되는 청년실업 문제와 부동산 가격의 폭등 문제가 처음 대두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시기의 한국은 명백히 각 가정의 가처분소득이 증가하고 복지정책이 조금씩 확충되던 시기였으므로 서민들의 경제력이 크게 상승한 시기였던 것도 맞다. 때문에 이 시기에 대한 향수가 생겨나는 것이고 이 점이 일본인들이 버블경제 시기를 긍정적으로 인식하는 것과 같은 부분이다.[97] 물론 싱가포르, 홍콩도 일본만큼 1년에 몇 번씩 해외여행 가거나 좋은 집 사거나 이런 일들은 하기 좀 힘들었다.[98] 물론 세계적으로 오버핏이 유행한 경향이 있었으나[99] 오사카의 흑녀, 거품 부인(Bubble lady)이라는 이명이 있다.[100] 어머니는 독실한 밀교 신자였다.[101] 이는 실제로 문재인 정부 시절 부동산 상승 상황에서 일부 지방 부동산에서 발생했던 일이다. 과거에 비해 온라인 부동산 카페 등이 활성화되고 수많은 회원들이 있다 보니 어디 A가 유망하다 하는 말 하나에 회원들이 A를 집중 매수, 폭등하기도 했다. 지방 중,소도시 아파트들은 주변에 비교대상이 작고, 전체로도 매물 수가 많지 않아 한 단지에서 몇 개 매물만 집중 매수하면 당연 상승하며, 대도시의 투자자들이 단체로 와서 샀다는 소문이 돌면 해당 지역 원주민들도 '이거 사야되는거 아냐?' 해서 매수에 동참하게 되어 더 오른다. 부동산이라는게 사실상 정가가 존재하지 않는 데다가, 그래도 여전히 대도시보다 절대 가격이 저렴하다 보니 이게 거품인지도 알기 어려웠던 것.[102] 일본 굴지의 구인구직정보 회사인 리크루트의 자회사. 역시 부동산 사업을 하던 곳이다.[103] 당시 주식을 받았던 사람은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총리, NTT 회장, 니혼게이자이(日本經濟) 회장 등 약 50명이었다.[104] 당시 총리를 대신해서 현금을 받은 비서는 자살했다.[105] 다만 거품 붕괴의 후유증이 오래 간 만큼 그 충격도 서서히 나타나서 1995년까지는 분위기가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실제로 90년대 초까지만 해도 일본위협론이 아직 힘을 얻던 시기였다.[106] 자세한 설명은 한국/경제, 일본/경제 문서로.[107] 그 시기에 한 명문대생이 취직하지 못한 것을 비관해서 전철역에서 투신자살한 사건이 일어나 일본 열도를 충격에 빠뜨린 적도 있다.[108] 실제로 베이비붐 에코세대가 본격적으로 출산에 돌입할 시기가 출산율이 가장 낮은 시기다.[109] 대기업은 설명회 등의 비공식적인 리크루팅을 그해 1월부터 시작한다.[110] 물론 이것도 이제는 과거의 일이라고 할 만큼 많이 달라졌다. 아직도 50년 이상 유지되는 중견기업 등은 이런 경우가 종종 있긴 하지만 대부분의 기업들에서는 이직이 상당히 자유로운 편이고(특히 대기업의 경우에는 이직이 상당히 자유로운 편이다) 졸업 이후에 직장을 구하려는 사람도 많다. 현직 리크루팅 회사들도 졸업과 동시에 취업을 하지 않는다면 '왜 바로 졸업을 하지 않았는가'에 대한 스토리가 충분하다면 면접을 통과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111] 대한민국의 중, 고등학교처럼 생각하면 편하다. 대한민국은 군대 때문에 대학 졸업시기가 제각각이라 다소 약하지만 병역의무가 없는 일본은 그렇지 않은 것. 입사담당자가 고등학교 1년 휴학한 학생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겠는가? 믿고 뽑을 수 있겠는가?[112] 물론 그 대신 일본은 다른 방식의 라이프스타일을 선택하는 것에 한국보다 비교적 관대한 편이긴 하다. 졸업 이후 뭔가 예술을 하고 싶다거나 사회운동을 하고 싶어서 취직을 하지 않고 이런저런 일을 전전하는 경우도 많다. 그리고 나서 취업을 하는 경우도 있다. 물론 이런 식으로 취업한 회사는 일반적인 이미지의 회사보다는 조금 크리에이티브한 일자리 혹은 그만큼 이직이 잦은 일자리다. 소위 말하는 '리크루트 수트' 입고 돌아다니는 회사원의 인생과는 많이 다른 것.[113] 다만 상술했다시피 이것도 대략 2010년대까지나 통용되던 상식이고 한국만큼은 아니더라도 화이트칼라 직종이라고 하더라도 이직이나 졸업 이후 취직도 많이 관대해졌다. 외자계 기업은 특히 그렇다.[114] 고용시장을 파악할 수 있는 대표적인 지표만 보더라도 고용률이 70%를 넘으며(평균 65% 수준. 그 이하도 수두룩하다) 비정규직 비중도 평균 수준이고(근데 이건 비정규직의 정의가 기관, 학자마다 차이가 크기 때문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청년 고용률도 정확히 평균. 거의 모든 면에서 한국보다 훨씬 낫다. OECD/중위 가처분 소득 문서로. 물론 국가 경제의 문제라고 본다면 맞지만.[115] 졸업 예정자 중 진학 등을 제외한 취업 희망자 대비 합격판정을 받은 비율[116] 일본은 세계에서도 톱을 달리는 경직된 채용 시스템이 굴러가는 나라이기 때문에 특히 대졸자의 취업률을 다른 나라와 같은 잣대로 비교할 수는 없다. 반대로 한 번 입사했다가 1~2년 정도의 단기간에 퇴사한 자가 재취업을 하는 소위 '제2신졸' 바닥은 다른 나라에서 나름의 경력직 대접을 받는 것과 달리 근래 들어와 다소 개선되었다고 해도 여전히 불이익을 감수해야 하며 이직자에 대한 인식도 그다지 좋지 못하다. 다만 어쨌든 완전실업률을 포함한 일본의 고용 사정은 한국을 비롯해 다른 나라보다는 여전히 낫고 완전고용에 가깝다. 게다가 일본 고등학교 졸업생의 대학 진학률은 2018년 기준 54.67%로 한국(69.7%)에 비해 낮으며 인구 변화 요인도 있기에 대졸자의 취업내정률은 아직까지 90% 이상으로 높은 편이다.[117] 한국은 그나마 IMF를 겪은 후 다시 옛날만큼은 아니더라도 꾸준하게 성장세를 이어 왔기에 그럴 수도 있다. 한국 경제가 외환위기 당시 구제금융을 받아야 할 정도로 충격이 컸지만 보통 구제금융을 받는 나라는 진짜 돈 자체가 없어서 받는 반면 한국은 돈은 있는데 외화가 없었기에 받아야 했던 일종의 흑자도산에 가깝다. 그래서 극복이 비교적 쉬웠다. 적어도 일본처럼 마이너스 성장, 저성장은 많이 없었다. 무엇보다 IMF로 고생한 건 기성세대도 마찬가지였고 외환위기의 원인이 과소비에 있다는 음모론스러운 주장과는 달리 일반 대다수 국민은 외환위기에 책임이 없다.[118] 노르웨이는 거품이 몇 년 일찍 꺼져 저 두 국가만큼 심한 위기를 겪지는 않았다. 특히 핀란드는 경제교류가 많았던 소련러시아로 바뀌면서 10년간 막장 상태에 접어드는 바람에 핀란드 경제도 불황을 겪었다.[119] 특히 1992년 이후 나온 애니메이션.[120] 그나마 GS 미카미, 세일러문은 이런 것은 거의 없고 배경이나 분위기는 버블시대에 가까웠다.[121] 한국에서는 애니메이션 회사를 착취하는 시스템으로 잘못 알려져 있으나 그것은 부작용의 일부이고 원래는 리스크를 줄이면서 투자금액을 올리기 위해 도입한 시스템이다.[122] 여기서는 이 시대를 기억하는 쇼와 세대(어른들)과 이 시대를 모르는 헤이세이 세대(아이들)의 세대차이를 극복한다. 또한 최종보스인 은 일본을 이 시대로 되돌리고자 하는 인물이다.[123] 그러나 1990년대 중반부터는 그런 경우는 거의 없어지고 현재 상황을 반영하여 연재하기 시작했다.[124] 정확히는 오사카.[125] 그러나 헐리우드 진출작이었던 이 작품을 마지막으로 투병 중이었던 방광암으로 사망하면서 유작이 되고 말았다.[126] 전자는 초라한 지금과 달리 관객이 얼마나 됐든 무지막한 예산을 들이붓을 수 있었던 환경, 후자는 돈을 펑펑 쓰는 등 잘 나가던 은행원 시절.[127] 물장사의 캬바걸 에피소드에서도 마지마 고로가 접객 연습을 할 때 선택지에 따라 달라지는 대사 중 앞으로 일본이 최고의 나라가 될 거라는 대사와 어떻게 단물이 나오는지는 모르고 얻어먹기만 하니 그게 바닥나면 가라앉을 거란 대사도 나온다.[128] 현재 물가 기준으로 보면 대충 21억 엔 정도.[129] 신격호도쿄 땅 50평 팔아서 세웠다는 도시전설이 있다. 물론 실제로는 일본 롯데의 주력 계열사들을 모두 동원한 대규모 투자 프로젝트였다. 다만 이때 롯데가 엄청나게 성장한 건 사실. 80년대 당시 신격호는 세계 4위의 부자였다고 하며 실제로 당시 세계 부호 리스트에서 일본의 10억 달러 이상 자산가에 나와 있다. 참고로 같은 시기 그 리스트에 이름을 올린 한국 재벌이병철정주영 두 명밖에 없었다.[130] 다만 1980년대 후반 절정을 이루었던 자산시장의 거품은 1990년대 초반 1기 신도시 건설로 땜빵했기 때문에 일본처럼 대규모 버블이 일어나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