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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한국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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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볼... 아 스트락아웃입니다! 스트락아웃! 스트락아웃! 경기 끝났습니다. 한국 챔피언 롯데 자이언츠! 롯데가 6:4로 승리를 거뒀습니다!
아~ 하프스윙! 하프스윙! 경기 끝났습니다! 경기 끝났습니다! 84년도 한국시리즈, 6:4로 자이언츠가 예상을 완전히 깨고 한국시리즈 참피온이 되는 순간입니다!
KBS 이장우 캐스터의 우승콜
1. 개요[편집]
1984년 9월 30일부터 10월 9일까지 진행되어, 최동원의 전무후무한 나홀로 4승으로 롯데 자이언츠가 우승한 한국시리즈. 전기리그 1위팀이었던 삼성 라이온즈가 악명높은 져주기 게임으로 롯데를 한국시리즈 파트너로 골랐다가 도리어 우승을 놓친 것으로 유명하다. 아울러 역사상 처음으로 최종 7차전에서 4승 3패로 우승팀이 결정된 한국시리즈다.
당시 삼성은 김시진과 김일융의 원투펀치에 더하여 황규봉[1] , 권영호[2] 등의 쟁쟁한 투수진을 자랑했다. 롯데는 임호균[3] 이 나름의 역할을 했지만, 최동원은 롯데가 내세울 수 있는 유일한 필승 에이스였기 때문에 초인적인 완투를 해야만 했다. 거기에 타선도 홍문종과 김용희, 김용철 정도가 있던 롯데에 비해 이만수, 장효조, 김성래, 정현발, 장태수, 허규옥 등 강타자가 즐비한 삼성 타선이 훨씬 높은 평가를 받고 있었다.
시리즈는 전기리그 우승팀이 1-2차전을, 후기리그 우승팀이 3-4차전을, 이후 경기는 잠실에서 치르게 됨에 따라 대구 2경기 - 부산 2경기 - 잠실로 이어진다.
2. 일정표[편집]
3. 진출팀 결정[편집]
1984년 프로야구는 전기와 후기리그로 나누어 100경기를 치렀고, 한국시리즈는 전기리그 우승 팀과 후기리그 우승 팀이 맞붙어 승부를 겨루는 시스템이었다. 이에 따라 한 팀이 전·후기리그를 제패하면 한국시리즈는 자연히 소멸되었던 것이 그 당시의 시스템.[4]
1984년 당시 삼성은 김시진, 김일융의 투톱에 이만수, 장효조를 위시한 강력한 타선을 앞세워 전기리그에서 우승했다. 삼성은 이대로 후기리그까지 우승해 한국시리즈를 무산시킬 계획이었으나, 전기리그 우승으로 인해 분위기가 안이해있었던 삼성과는 달리 마지막 남은 한국시리즈 티켓을 거머쥐기 위해 다른 팀들이 치열하게 경기를 치르면서 선두 경쟁에서 밀려난다. 때문에 삼성은 계획을 바꿔 한국시리즈를 대비해 주전들의 체력을 안배하고 치열한 후기리그 순위 싸움에서 한발 물러서 관망하고 있었다.
막판 2연전만이 남고 어느 정도 한국시리즈 진출 팀의 윤곽이 보이자 삼성은 한국시리즈에 대비해 전력을 비축하는 한편, 손 쉽게 이길 수 있는 팀을 탐색했다.[5] 그리하여 선택된 팀이 전기리그에서 4위를 차지한 롯데 자이언츠. 전기리그에서 삼성이 9승 1패로 롯데를 호구잡고 완전히 압도해버린 데다 최동원마저 정규시즌에서 삼성 상대로는 그리 잘 던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1984년 정규시즌에 무려 27승이라는 어마어마한 성적을 찍은 최동원이었지만, 정규시즌에 삼성 상대로는 그다지 강한 모습이 없었다. 져주기 경기 제외하고는 삼성 상대로는 2승 4패 3세이브에 불과했었다. 하지만 박영길 당시 삼성 타격코치만이 롯데 대신 OB를 밀어줄 것을 주장했다. 박영길은 과거 롯데 자이언트 시절 감독으로서 1981년 코리안시리즈에서 말도 안 되는 최동원의 초인적인 활약상을 보았기에 그것을 우려한 것이다. 그러나 시즌 전적에서도 압살하고 그 최동원도 삼성 상대로 약했던 점이 결정적인 요인이 되어 박영길을 제외한 삼성 코칭스탭은 결국 롯데를 밀어주기로 결정했다. 이러한 밀어주기는 당시 OB 베어스 감독이었던 김성근도 당황하게 했을 정도다.
후기리그가 2경기 남은 시점에서도 리그 우승의 향방은 예측 불가 상태였는데, 위의 표를 보면 알겠지만 OB가 아무리 기를 써도 삼성이 대놓고 롯데를 봐주면 어쩔 도리가 없었다. 롯데를 한국시리즈로 올리겠다고 결정이 났기 때문에 김영덕 감독은 남은 2경기에서 나쁜 의미로 역사에 길이 남을 져주기 게임에 나선다.
너무 표가 나다 못해 지켜보는 사람이 눈살을 찌푸리며 항의, 야유를 퍼부을 정도로 노골적인 게임을 치렀다. 안타 치고 고의로 오버런해서 주루사를 당하고, 수비할 때는 플라이성 타구를 일부러 안 잡아서 롯데 선수들을 진루시켜 주고, 이만수의 타격왕도 지킬 겸 홍문종이 칠 차례만 되면 무조건 고의사구로 출루시키질 않나[6] , 고의적인 실책으로 롯데 주자들을 계속 진루시켜 주는 등 그야말로 일부러 져주기 위한 발악의 연속이었다. 게다가 리그 마지막 2경기가 후기리그 우승팀을 결정짓는 경기인 만큼 전국 방송 중계였기 때문에 더욱 지탄을 받았다. 허구연 해설위원의 회고에 따르면 당시 중계를 맡았던 MBC는 대놓고 져주기 경기가 이어지자 중계를 중간에 끊을 것을 검토하였다고 한다.[7][8] 당시 뉴스에서는 야구장을 찾은 시민의 "삼성은 져주기 게임을 해서 싫어요"라는 인터뷰가 대놓고 나가기도 했다.
물론 김영덕 감독은 공식적으로는 져주기를 부인했다. 선수들도 자기 기록이 달려있는데 어떻게 져주기를 할 수 있냐고. 하지만 이 때 삼성이 선발 출장 시킨 선수들은 후보급이었기에 기록을 세워준다는 변명도 무의미했다. 경기력이 형편없어도 그래도 후보급이었고 한국시리즈를 위한 체력 안배 차원이었으면 말이 될 텐데... 이 선수들이 감독의 뜻도 몰라주고 날아다녔다는 것이다.[9] . 거기다 삼성이 후보 선수들을 선발로 출장시킨다는 소식을 듣자 롯데도 체력을 아끼면서 무난하게 2연승을 한다는 생각으로 똑같이 후보 선수들을 출전시킨다. 그러다보니 경기가 김영덕 감독의 의도대로가 아닌 삼성의 일방적인 경기로 기울기 시작하자 감독의 의중을 알만한 주전들이 나오고... 그 뒤로는 저 위에 나온 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삼성이 역전패로 졌다. 23일 경기에서도 삼성은 3점을 먼저 내지만 전날과 비슷한 경기 운영을 보여주며 또 역전패.
한편 최종 2연전에서 해태도 OB를 상대로 져주기를 시전했다. 우리가 한국시리즈에 못 가도[10] 제과업계 라이벌인 롯데가 한국시리즈로 가는 꼴은 절대로 볼 수 없다는 자세였다.[11] OB는 그 보답(?)으로 김일권에게 도루를 대량 허용하면서 김일권이 세 시즌 연속 도루왕에 등극하는데에 도움을 줬다. 하지만 롯데가 2승을 거둠으로써 결과적으로 실패. 물론 삼성의 져주기보다는 훨씬 덜 알려져 있다.
이후 져주기 게임 경기는 25년 뒤 다시 한 번 나오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당시 OB 베어스 감독으로 져주기 게임의 피해자였던 김성근이 이끄는 SK 와이번스가 이번엔 져주기 게임의 가해자가 되었다. 이 때와 다른 점은, 져주기를 하나 안하나 SK에게는 이득이 없다는 점과 무승부 = 패로 직결되는 규정의 불합리함에 항의하는 차원이라는 것으로, 시즌 후에 승률제로 환원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4. 엔트리[편집]
엔트리 표기 순서는 전후기 우승팀 순서로 적었다. 삼성 라이온즈가 전기리그 우승팀이므로 1, 2차전을 대구구장에서 개최하였다.
4.1. 삼성 라이온즈[편집]
4.2. 롯데 자이언츠[편집]
5. 시리즈 전 분위기[편집]
이런 기사들이 나올 정도로 삼성에 대한 여론은 온통 비난 일색이었고, 희대의 져주기 경기 때문에 KBO에서는 고의로 지는 경기가 없도록 규정을 손보겠다고 했다. 박영길은 회고에서 "만일 삼성이 이 해 한국시리즈에서 승리했다면 이기기 위해서는 이런 변칙을 써서 이길 수 있다는 잘못된 선례를 남길 수 있기에 삼성의 패배가 오히려 약이 되었다." 라고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롯데 자이언츠 강병철 감독은 한국시리즈를 준비하는 미팅 자리에서 최동원 선수한테 1,3,5,7차전 선발을 통보한다. 이건 너무 무리한 일정이라면서 반발하는 최동원 선수한테 강병철 감독은 나직히 한 마디를 남기는데...
그리고 최동원은 딱 한 마디를 남기고 마운드로 향한다.동원아... 우짜노? 여까지 왔는데...
김일융과 김시진의 확실한 원투펀치와 선발-불펜 가리지 않고 준수한 투구를 보여준 황규봉과 권영호가 있던 삼성에 비해 롯데의 확실한 에이스는 최동원뿐이었다. 비록 10승에 2.95의 성적을 기록한 임호균이 있었지만 특히 후반기에 미친 성적을 올린 최동원의 포스에는 한참 못 미쳤고, 그랬기에 창단 첫 한국시리즈 우승을 노리는 롯데의 강병철 감독은 이런 극단적인 투수 기용을 선택한 것. 삼성은 1985년 전후기 통합우승으로 한국시리즈를 무산시켜버렸을 정도로 전력이 탄탄했지만, 롯데로서는 한국시리즈가 언제 다시 올 지 모를 기회[13] 였다. 당시의 분위기를 고려하면 충분히 생각할 수 있는 일이다. 최동원이 있었음에도 전기리그 4위를 하고, 후반기마저도 삼성이 져주기 게임을 해줘서 간신히 한국시리즈로 올라왔던 롯데로서는 무슨 수를 써서든 이겨야만 했다. 특히 열성적인 부산팬들의 염원을 고려해서라도 반드시 우승해야 했던게 롯데의 사정이었다.알겠심더. 마, 함 해 보입시더.[12]
삼성도 위와 같은 롯데의 약한 투수진을 잘 알고 있어서, 김영덕 감독 역시 최동원과 임호균만 피하면 승산이 충분한 시리즈라고 판단했다. 어쩌면 그래서 최고 에이스였던 김일융을 최동원이 나오지 않는 2, 4, 6차전에 올라오도록 로테이션을 짜고, 최동원이 지친 시리즈 후반에 승부를 걸려고 했을지도 모르겠다. 당연한 계획이었겠지만 삼성도, 심지어 롯데도 간과한 것은 롯데의 유일한 에이스 최동원은 자신의 선수생명을 갉아 먹는 한이 있더라도 롯데를 우승시킬 생각이었던 것이다.
6. 경기 결과[편집]
6.1. 1차전[편집]
- 승리 : 최동원 (9이닝 0실점 완봉승)
- 패배 : 김시진 (3이닝 4실점(3자책))
- 홈런 : 박용성(2회초, 2점)
- 심판 : 주심 이규석/1루 김동앙/2루 김옥경/3루 황석중/좌선 김광철 /우선 오광소
양 팀의 에이스 투수들이 맞붙어 투수전이 되리라 예상되었지만 의외로 김시진이 2회초에 박용성에게 투런 홈런을 허용당한데 이어 4회초 김용희에게 적시타를 두들겨맞고 박용성의 번트타구에 실책을 범하며 4실점을 하고 강판당했다. 2012년 3월 11일 MBC <히스토리, 후>에 따르면, 김시진은 한국시리즈 1차전을 앞두고 경기장으로 향하기 위해 차를 몰던 중 동네에서 놀던 꼬마와 접촉사고가 났는데, 이를 수습하느라 경기장에 늦게 도착했다고 한다. 다행히 꼬마는 크게 다치지 않았지만 큰 경기에 앞서 마음을 여유롭게 먹을 겨를이 없었다는게 문제.
결국 경기는 최동원이 7개의 삼진을 잡으면서 한국시리즈 사상 최초의 완봉승으로 끝났다. 김시진 강판 이후 릴리프로 올라온 권영호가 6이닝 3피안타로 호투했고 삼성도 나름대로 최동원의 공에 대한 공략법을 가지고 있어서 7안타를 치며 분전했지만 산발로 끝나며 무득점에 그친다. 권영호의 경우에는 이후에도 선발 및 불펜으로 등판하여 준수한 투구를 보여준다.
이 경기가 김시진의 한국시리즈에서의 불명예의 시작점이라고도 할 수 있다. 김시진은 통산 124승을 거뒀지만 한국시리즈에서는 0승 7패를 기록했다.
6.2. 2차전[편집]
- 승리 : 김일융 (9이닝 2실점 완투승)
- 패배 : 안창완 (2.1이닝 3실점)
- 홈런 : 장효조(3회말, 2점)
- 심판 : 주심 김광철/1루 오광소/2루 황석중/3루 김옥경/좌선 김동앙/우선 이규석
롯데의 2차전 선발은 신인 투수 안창완으로, 84년 프로에 데뷔하여 불펜으로 뛰면서 27경기 70이닝 1.67이라는 좋은 성적을 냈다. 당시 불펜이 다 그랬듯 안창완도 2~3이닝씩 던졌고 선발로 뛰기도 했으므로 이닝 소화력 역시 검증된 선수였다. 하지만 삼성의 선발 투수가 에이스 김일융이었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결과가 예측된 경기였다.
3회말 장효조가 2점 홈런으로 기세를 제압하기 전까지는 1:1로 나름 팽팽한 경기였다. 이후에도 강병철 롯데 감독은 차례로 좌우 번갈아가며 임호균, 천창호, 배경환을 투입했지만 7회말 삼성이 4점을 득점하며 승부를 매듭지었다. 3회에 점수가 벌어지자 강병철 감독도 임호균을 구원으로 짧게 던지고 내려보내는 등 2차전에 더 이상 큰 미련을 보이지 않으며 이후 경기를 대비하는 모습을 보였다.
6.3. 3차전[편집]
1차전 리턴매치. 롯데가 삼성 수비진들의 실책을 틈타 2회말, 3회말에 연달아 1점씩을 얻었고 최동원은 4회 1실점 이후 호투를 하다가 7회 득점권 상황에서 장효조에게 적시타를 맞는 바람에 1실점을 했지만 그외 삼성 타자들은 철저히 누르는 투구를 보여주고 있었다.
김시진은 1차전과 달리 산발 5피안타로 2실점만 내주며 7회까지 호투를 이어갔으나, 8회말 2사 주자 없는 상황에서 홍문종의 강한 타구에 왼쪽 발목을 맞으면서 쓰러져버리고 만다.[14] 이후 긴급히 등판한 권영호가 8회를 무실점으로 마무리 지으나 9회말 1사 2루 상황에서 정영기에게 끝내기 안타를 맞으면서 롯데가 승리.[15]
1차전 완봉 이후 이틀 쉬고 나온 최동원은 12탈삼진으로 당시 한국시리즈 한 경기 최다 탈삼진 기록과 함께 완투승을 거두며 시리즈 2승째를 거둔다.
6.4. 4차전[편집]
최동원에 가려져 있지만 임호균은 1984년 롯데에서 최동원에 이은 제2선발로 활약하며 롯데의 후기리그 우승에 공헌했다.[16] 임호균은 1984시년 최동원을 제외하고 롯데에서 유일하게 두 자리 승수를 거둔 투수였다. 하지만 이날 삼성의 선발은 1선발 김일융으로, 222이닝을 던져 2.27을 찍은 압도적인 성적에 비할 바는 못 되었다. 결국 투타 모두에서 압도적인 전력을 자랑한 삼성은 5회까지 3점을 먼저 내고 이후에도 정현발과 송일수의 홈런을 곁들여 4점을 더 보태 7:0으로 화끈한 완승을 거둔다.
삼성의 선발 김일융은 8이닝 4피안타 8탈삼진으로 롯데 타선을 가볍게 누르고 시리즈 2승을 따낸다.
6.5. 5차전[편집]
- 승리 : 김일융 (3이닝 무실점)
- 패배 : 최동원 (8이닝 3실점 완투패)
- 홈런 : 정현발(7회말, 1점)
- 심판 : 주심 김옥경/1루 황석중/2루 김광철/3루 이규석/좌선 오광소/우선 김동앙
원래 김시진이 올라올 계획이었지만 3차전에 당한 부상이 회복되지 않았고 한국시리즈 들어 부진했기 때문에 권영호가 선발로 대신 등판한다.
경기 초반은 최동원이 5회까지 3안타만을 허용하며 무실점으로 던지고 있는 롯데가 2:0으로 리드를 잡아나갔으나 계속된 연투에 지친 최동원이 6회에 홍승규의 3루타와 장효조의 적시타로 인해 1점을 내줬고, 이후 장효조의 도루와 롯데의 실책으로 2-2 동점이 된다. 그러나 계속되는 연투에 지친 최동원보다 나은 투수는 롯데에는 없었고, 최동원은 8회까지 완투한다.
이 상황에서 7회에 삼성은 원래 6차전 선발로 내정했던 김일융을 투입하는 강수를 둔다. 그리고 김일융은 그 기대에 호응하듯 이후 3이닝을 무실점을 막았으며 그 사이 7회말에 대타 정현발이 솔로홈런을 날리면서 승부를 결정짓는다. 구원 등판한 김일융은 시리즈 3승을 먼저 거둔 반면, 최동원은 6피안타 6K로 호투했으나 완투패를 기록하게 된다.
최동원을 투입하고도 진 롯데로서는 이제 남은 길이 없었다. 애초에 최동원 하나만 믿고 가기로 한 시리즈였고, 다른 투수를 믿을 생각은 애초에 하지도 않았다. 반면 삼성은 최동원이 등판하지 않는 6차전만 잡으면 되기에 우승은 따놓은 당상인 듯했다. 1,3,5차전을 모두 완투한 투수가 6차전에 올라온다는 것 자체가 상식을 아득히 벗어나는 일이고, 설령 올라온다고 하더라도 전날 8이닝을 던진 투수가 제 컨디션일 가능성은 0에 가까웠기 때문.
반면 삼성은 김시진이 등판 대기중이었고, 그 뒤에는 황규봉이라는 준수한 투수가 버티고 있었다. 여차하면 3이닝을 던진 김일융을 경기 막판에 투입하여 승부수를 던질 수도 있었다. 그렇게 시리즈의 승자는 라이온즈일 것임이 기정사실화 되어갔다.
6.6. 6차전[편집]
삼성의 선발은 부상으로 5차전을 거르고 나온 김시진. 사실 김시진은 부상이 회복되지 않은 채 나온 것이었다. 김시진이 회상하기를 진통제 먹고 던졌는데 공을 던지니까 진통제로도 막을 수 없을 정도의 고통이 시작되었지만 그걸 참으면서 자존심을 위해 던졌다. 무엇보다 김일융이 한국시리즈 내내 호투하면서 최동원과 김일융의 대결구도가 흐르는 것도 김일융에게 라이벌 의식이 있었던 김시진으로서는 참을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롯데는 일단 예정대로 2선발 임호균이 등판했다.
선취점은 삼성이 냈다. 이만수와 장효조의 적시타로 1점을 냈고 이제 에이스로서의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 올라온 김시진의 호투만 있으면 삼성이 이길 것 같았는데 4회말 1사에서 조성옥의 볼넷 출루에 이어 클린업 트리오인 홍문종, 김용철, 김용희가 연속 안타를 터트리고, 그 후 김민호의 땅볼로 3점을 뽑아 역전에 성공한다.
그런데 4회까지 1실점으로 호투하고 있던 롯데 선발 임호균이 마운드에서 내려왔다. 훗날 KBS N 스포츠에서 강병철 감독이 밝힌 이유는 임호균의 손가락 살이 까져서 공을 던질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17] 마땅히 구원투수로 올라올 선수도 없는 상황이었는데...
최동원이 등판했다.
벼랑 끝에 몰린 롯데는 전날 완투한 최동원을 5회부터 등판시켰다. 최동원이 등판한 5회 이후 삼성 타선은 최동원을 상대로 단 3안타만을 기록하며 맥없이 물러나고 만다. 이후 롯데 타자들이 최동원의 역투에 보답하듯 8회에 3점을 더 내며 6:1로 롯데가 승리한다.
에이스의 자존심을 찾으려 했던 김시진은 완투 끝에 한국시리즈 2패를 당한다. 5회부터 구원등판한 최동원은 5이닝 3피안타 6탈삼진 무실점으로 구원승을 기록하며 시리즈 3승을 거둔다.
3:3의 시리즈 스코어로, 롯데와 삼성이 비슷한 상황인 것 같지만 롯데는 가장 믿을 수 있는 투수들인 최동원과 임호균을 모두 소모했다. 반면 삼성은 5차전 3이닝만을 던진 김일융을 7차전에 낼 수 있었기에, 여전히 유리한 고지를 점하고 있었다.
경기 후 강병철 감독은 7차전에도 최동원이 나올 수 있음을 알렸다. 앞에서 다른 투수들이 원 포인트로 시간을 끌어주고, 최동원이 구원으로 등판하여 경기를 잡는다는 계획이었다. 그런데 말이 쉽지, 최동원을 제외한 다른 투수들은 시리즈에서 1승도 기록하지 못했고 그 최동원은 이틀 간 13이닝을 던진 상황이었다. 강병철 감독의 계획은 말 그대로 계획으로 끝날 가능성이 너무나 높았다.
6.7. 7차전[편집]
- 승리 : 최동원 (9이닝 4실점 완투승)
- 패배 : 김일융 (7.1이닝 6실점)
- 홈런 : 오대석(6회말, 1점), 유두열(8회초, 3점)
- 심판 : 주심 이규석/1루 김옥경/2루 오광소/3루 김광철/좌선 황석중/우선 김동앙
6.7.1. 선발 수비 포지션[편집]
6.7.2. 선발 타순[편집]
6.7.3. 경기 내용[편집]
한국시리즈 사상 처음으로 7차전이 열리게 되었다. 당시 시리즈 시작 전부터 져주기 게임으로 삼성에 대한 숱한 비난 여론으로 화제가 되었던 시리즈였고, 7차전까지 가는 대접전으로 세간의 폭발적인 관심을 반영하듯 잠실구장에서 벌어진 7차전은 입장 정원을 훌쩍 넘는 35,000명을 불러들였다.
원래 7차전은 10월 8일에 열릴 예정이었으나, 이날 서울에 비가 내려 7차전 날짜가 하루 밀렸다. 아무리 최동원이 무쇠팔이라 해도 5차전과 6차전 이틀간 13이닝을 던진 상황에서 7차전까지 연투를 했다면 도저히 버틸 수가 없었을 것이다. 한 자락 가을비가 지쳐 있던 최동원의 어깨에 일말의 휴식을 준 셈이다. 더욱이 7차전은 당시 공휴일이던 한글날[19] 에 열렸음에도 낮 경기가 아닌 오후 6시에 시작했다. 결국 이 비가 사실상 양 팀의 승부를 가른 셈이 됐다.[20]
경기 전 KBS가 짧게 진행한 그라운드 인터뷰에서 김일융은 컨디션이 좋느냐는 질문에 "안 좋습니다"라고 답한 모습이 후일 전파를 탔다. 하기야 초인적이다 못해, 상식을 벗어날 정도로 무리한 등판을 했던 최동원에 가려졌을 뿐 2, 4, 6차전에 등판하여 20이닝 가까이 던진 김일융의 컨디션 역시 좋을 리 없었다.[21]
최동원은 계속된 연투에 지쳐 구위가 상당히 떨어져 있었다. 삼성은 2회말 1사 만루에서 배대웅의 2루수 앞 땅볼과 송일수의 적시타로 먼저 3점을 내고 이후에도 오대석의 솔로 홈런을 더해 4점을 선취하며 승기를 굳히는 듯했다.
롯데의 본격적인 반격은 7회초부터 시작되었다. 3회초 박영태와 정영기의 출루 후 김재상의 적시타로 1점을 만회한 롯데는, 이전 타석까지 한국시리즈 내내 19타수 1안타의 빈타에 허덕이던 유두열이 7회초 선두 타자로 나와 김일융의 옆을 스치는 중전 안타로 출루했고, 한문연의 우측 라이너성 타구를 우익수 장효조가 낙구지점 판단을 잘못하여 머리 위로 넘겨버리는 실책성 플레이[22] 를 저지르며 3루타가 되어 버렸다. 유두열이 홈을 밟으며 2:4를 만든 후 정영기도 우전 적시타로 한문연을 불러들이며 3:4까지 따라 붙었다. 정영기의 타구는 완전히 먹혀서 우익수가 조금만 앞으로 과감하게 대쉬했다면 평범한 플라이 처리도 가능했지만[23] 장효조는 바로 전에 저지른 만세 탓에 위축되었는지 주춤거리다가 바로 앞에 떨어지는 안타를 만들어주고 말았다. 7회말 2사 후 장효조는 실수를 만회하려는 듯 우전 안타를 뽑아내었고 최동원의 견제 악송구를 틈타 3루까지 진루해 추가 득점의 기회를 마련했지만, 이만수가 3루 땅볼에 그치며 무위로 돌아갔다.
이후 운명의 8회초. 롯데는 홍문종이 중견수 뜬공으로 물러났지만 김용희와 김용철이 연달아 중전 안타로 출루하면서 1사 1, 3루[24] 라는 절호의 기회를 만들었다. 이때 김일융은 3일을 쉬었다고는 하지만 2,4차전 선발 등판에 5차전 구원으로 마운드에 오른 뒤 7차전에 출전했기 때문에 체력은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이 경기에서는 최동원보다 안타를 더 많이 맞은 상황에서 위기가 계속되자 김일융은 몇 번이고 덕아웃을 쳐다보며 교체 요청을 했고 그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서 김영덕 감독은 머리속이 굉장히 복잡했겠지만, 시리즈 내내 호투했던 김일융의 관록과 노련함을 믿으려고 했는지 결국 김일융의 애원을 외면하고 말았다.[25]
이어서 다음 타석에는 유두열이 들어섰다. 볼카운트는 1-1. 롯데 응원석에서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김일융은 1루에 힘없는 견제구를 던진 뒤 병살 유도 내지는 최소한 장타만은 맞기 않기 위해 몸쪽으로 낮게 파고드는 패스트볼을 던졌고[26] 유두열은 이를 절묘한 스윙으로 퍼올렸다.
쳤습니다, 좌측! 높게 날아갑니다! 높게 가느냐, 넘어가느냐, 홈런이냐... 홈런!! 유두열! 쓰리런 홈런! 유두열의 쓰리런 홈런! 아~ 극적인 유두열의 쓰리런 홈런입니다. 아~ 이건 극적인 상황입니다. 네~ 유두열의 쓰리런 홈런! 아~ 이거 참... 유두열, 대단합니다.
그리고 백스핀이 걸린 타구는 왼쪽 담장을 훌쩍 넘겨 폴대 오른쪽을 통과했다. 역전 쓰리런 홈런이 터져 나오는 순간이었다.원 앤드 원, 제3구. 레프트! 레프트 큽니다. 레프트 크다! 크다! 레프트 크다! 레프트 크다! 홈~런!! 홈런입니다. 석점 홈런!
점수는 롯데 6:4 삼성, 롯데는 결국 승부를 뒤집었다.[27]
이후 김일융은 바로 강판되고 몸을 풀고 있던 황규봉이 구원등판하지만 이미 분위기는 롯데 쪽으로 완전히 기울어졌다.[28]#거기에다 유두열의 역전 홈런을 계기로 힘을 얻은 최동원의 구위도 더욱 위력을 발휘했다. 후일 이날 포수이던 한문연 선수가 최동원의 작고 후 방영된 KBS 다큐에 출연해서 한 말로는 공이 점점 빨라지고 살아 들어오는 느낌이었다고. 거기에 한술 더 떠 상대팀에 있던 박영길은 10일 정도 놀다 온 최동원이 던지는거 같다고 회고했다.
삼성은 8회 함학수가 우익수와 중견수가 겹치면서 만들어진 3루타로 1사 3루의 기회를 잡고 추격을 노렸지만, 오대석의 깊숙한 2루수 플라이 때 3루 주자 함학수가 나름 롯데 야수진의 허점을 노렸는지 홈으로 태그업을 시도했고 박영태는 침착하게 정확히 홈으로 송구하면서 더블 아웃, 그리고 공수가 교대되었다. 사실 이 타구를 중견수가 잡았다면 홈 방향으로 달려오면서 포구하여 던지기 쉬운 타구였지만 2루수가 잡아서 송구할 때는 백모션으로 송구하기에 정확히 송구해 아웃시키기는 어려운 타구였으나 박영태는 정확하게 한문연에게 공을 던져 아웃시켰다.
드디어 마지막 9회말. 여기서 삼성은 1사 1루에서 박승호가 좌중간 안타를 때려냈지만, 선행 주자인 송일수가 3루까지 가는 사이에 박승호가 2루까지 무리하게 주루하다가 아웃되었다. 이렇게 2아웃이지만 홈런 한 방이면 동점이 될 수 있기에 경기는 끝까지 긴장을 늦출 수 없게 진행되었다.
여기서 등장한 삼성의 타자는 장태수. 풀카운트에서 최동원의 라이징 패스트볼이 들어오자 하프스윙 후 볼넷이라고 판단해서 1루로 뛰어갔지만, 주심은 스윙으로 판정해 삼진 아웃이 되었다. 최동원은 환호하면서 포수 한문연과 힘차게 포옹하고, 순식간에 달려온 선수들과 기쁨을 함께 했다.
이로써 롯데 자이언츠의 사상 첫 한국시리즈 우승이 결정되고, 최동원은 가을의 전설이 되었다.
7. 기타[편집]
당시 최동원은 10일(9월 30일~10윌 9일) 중 5일을 등판하면서 40이닝, 610구(즉, 경기당 평균 8이닝에 120구 이상)를 소화하였다.[30] 프로야구 리그의 특정 포스트시즌 기간에 이보다 많이 던진 선수는 메이저리그 초창기의 데드볼 시대에도 없었다. 단일 시리즈에서 한 투수가 홀로 4승을 거둔 것은 과거 일본에서만 2명[31] 이 있었다.그 이후로 단일 시리즈에서 혼자서만 4승을 올린 투수는 나오지 않고있다. 선수 본인의 기량이 뒷받침되느냐는 둘째치고, 선수생명 관리 차원에서도 결코 용납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다음날 생각해보니까, '이상하다. 내가 정말 4승을 할 수 있었던가?' 해 놓고도, 결과가 나와 있는데도, 제가 제 자신을 못 믿는 거 있죠."
중에서)
"아부지, 해태는 선동열이 델고 그래 우승을 많이 했는데, 롯데는 와 최동원이를 델꼬 우승을 한 번빼끼 몬 했십니꺼?"
"아들아, 해태는 해태가 선동열이를 델꼬 우승을 했지만은, 롯데는 최동원이가 롯데를 델꼬 우승을 한기라."
어느 한 롯데 팬 부자의 대화.
- 이 시리즈에서 최동원이 거둔 성적은 5경기 등판 4승 1패 4완투 2완투승 1완봉승 1완투패 1구원승 40이닝 투구 평균자책점 1.80 WHIP 1.08[33] . 김일융 역시 최동원에 묻히긴 했으나 2, 4, 5, 7차전 4경기에 나와 27.1이닝을 던져 3승 1패를 기록했다. 만약 삼성이 우승했다면, 한국시리즈 4승 투수라는 전설은 김일융의 몫이 되었을 것이다.
- 당시 롯데는 6개 구단 중 유일하게 투수코치가 없는 팀이었다. 1983시즌 종료 후 김명성 투수코치를 경질한 뒤에 고려대 최남수 감독을 후임으로 영입하려 했지만, 최 감독이 완강히 거부하는 바람에 시즌 내내 투수코치가 공석이었고,[34] 고교 때 포수였던 도위창 코치와 최선참 투수 김문희가 투수코치 역할까지 해야 했다(...)
- 한국시리즈에서 최동원의 첫 삼진 제물이었던 장태수는 7차전 9회말 2아웃에서 시리즈를 끝내는 마지막 삼진을 당하며 한국시리즈의 시작과 끝을 장식했다(...). 이로 인해 늘 1984년 한국시리즈 영상이 나오면 항상 마지막 삼진을 당하는 타자로 등장을 하게 된다.
- 이 결과에 경악한 삼성은 다음 해인 1985년에는 한국시리즈조차 생략해 버리고 전후기 리그 통합 우승을 일궈낸다. 그것도 당시 롯데의 홈인 구덕 야구장에서 우승을 확정지었다. 이후 삼성은 18년 뒤인 2002년이 되어서야 LG 트윈스를 상대로 극적인 역전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뤘다. 당시 한국시리즈 6차전에서 LG 마운드의 자존심 이상훈을 상대로 3점차를 뒤집는 이승엽-마해영의 연속타자 홈런. 특히 마해영의 홈런은 끝내기였다. 이후 한국시리즈 끝내기 홈런은 2009년의 나지완이 7차전에서 기록하게 된다. 자세한 내용은 2002년 한국시리즈 문서 참조. 이는 원년 6개 멤버 구단들 가운데 가장 늦은 한국시리즈 우승으로 기록되었다.
- 이전에도 최동원은 혼자서 시리즈 우승을 일군 적이 있다. 정규시즌에서도 롯데 팀 전체가 소화한 324이닝 중 최동원 혼자서 206 이닝을 소화하는 괴력을 과시하기도 했고, 1981년 코리안시리즈에서도 무승부 포함 6경기에 모두 등판해 3승 1세이브를 거두며 롯데의 우승을 이끈다. 팀이 소화한 6경기 54이닝 중 혼자서 42⅓이닝을 투구했다.
- 10월 25일 - 1차전 0:3 패, 9이닝 3실점 완투
- 10월 26일 - 2차전 4:5 패, 7이닝 무실점 구원
- 10월 27일 - 3차전 6:6 무, 6이닝 3실점 구원
- 10월 29일 - 4차전 7:4 승, 7이닝 3실점 1자책 선발승, 8회 2사 만루 구원(1루수)
- 10월 30일 - 5차전 5:3 승, 3이닝 무실점 구원
- 10월 31일 - 6차전 6:4 승, 9이닝 4실점 완투
당시 삼성 코치였던 박영길은 실업 롯데 감독 시절에 이러한 최동원의 원맨쇼를 직접 보았기 때문에 혼자서 롯데가 아닌 OB를 밀어줄 것을 주장했다. 여기에 박철순이 부상으로 이탈하고 장호연만 공략하면 이길 확률이 높다는 점도 있었다. 그러나 김영덕 감독을 위시한 나머지 삼성 코칭스태프는 페넌트레이스에서 최동원을 상대로 잘 공략했다면서 기각했다. 그리고 시리즈 후 결과는 어느 쪽이 옳았는지를 분명히 보여주었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 박영길은 인터뷰에서 '영덕이 형이 내 말을 들었으면 삼성이 우승을 했을 수도 있었을텐데...'라며 아쉬운 반응을 드러냈다.
- 최동원은 우승 직후 인터뷰에서 무엇이 가장 하고 싶냐는 질문에 "자고 싶다"라고 말했다. 우승 축하 파티 도중에 쌍코피를 터뜨릴 정도였으니... 당시 7차전의 해설을 맡았던 허구연도 그를 보고 무척 피곤해 보인다고 얘기했다.
- 한국시리즈 MVP는 한국시리즈 4승을 한 최동원이 아니라 7차전에서 3점홈런을 날린 유두열.
역시 인생한방대신 최동원은 시즌 MVP를 가져갔다.[35] 그 당시의 분위기 상 시즌 MVP와 한국시리즈 MVP를 동시에 주기는 힘들다는 정서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1993년 이종범도 1993년 한국시리즈 MVP를 가져가는 대신에 신인상을 양준혁에게 넘겨줬다. 시즌 MVP와 한국시리즈 MVP를 동시에 석권할 수 없었던 이 불문율은 2017년의 양현종이 2017년 한국시리즈 MVP를 차지하면서 깨졌다. 이 해 양현종은 KBO 골든글러브, 최동원 상, 플레이어스 초이스 어워드, 조아제약 프로야구 대상, 카스포인트 대상, 일구상 최고 투수상과 동아스포츠 대상 프로야구 부문 올해의 선수상을 모조리 쏟아담으며 상금만 2억을 넘게 가져갔다.
- 유두열의 한국시리즈 MVP 사례로 비교되는 사례는 2009년 한국시리즈 당시 나지완이나 2018년 한국시리즈 당시 한동민이 언급되긴 하지만 2009년 한국시리즈 당시 나지완은 4차전 이전에는 부진했으나 4,5,6차전 모두 안타가 하나씩 있었고 7차전에서는 SK가 초반 대량득점해 5:1까지 벌어진 상황에서 추격의 투런 홈런과 9회말 끝내기 홈런을 친 공로가 있었다. 물론 시리즈 동안 2승을 거둔 아킬리노 로페즈가 받는 게 타당한 상황이긴 했지만, 유두열과 비교하기는 어렵다. 2018년 한국시리즈 당시 한동민은 1차전 선제 홈런, 6차전 결승 홈런을 쳤다. 비록 1할대 타율이긴 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