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튀르키예 쿠데타 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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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튀르키예 쿠데타 미수
Türkiye askerî darbe girişimi


파일:터키쿠데타_tank.jpg

발생일
2016년 7월 15일
사고일로부터 2813일
발생 위치
파일:튀르키예 국기.svg 튀르키예 앙카라, 이스탄불, 마르마리스, 말라티아
유형
쿠데타
피해
사망자
군인 104명 사망
민간인 47명 사망
경찰 41명 사망
체포
2,839명 체포
1. 개요
2. 원인
3. 진행
3.1. 7월 15일
3.2. 7월 16일
4. 쿠데타의 실패
5. 쿠데타 이후
5.1. 사후 처리와 대규모 숙청
6. 음모론
7.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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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2016년 7월 15일 오후(현지 시각), 튀르키예군의 일부 세력이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당시 튀르키예 대통령에 반발하여 일으켰으나, 실패한 쿠데타 시도 사건.

2. 원인[편집]


2003년 총리에 취임한 이후 14년 째 장기집권 중인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 터키 주요 언론을 정부가 인수하여 폐간시키고, 소셜미디어를 검열해 비난을 받아 왔습니다. 터키 군부가 쿠데타 직후 '시민의 자유'를 유독 강조했던 이유입니다.

터키는 다른 중동 국가와 달리 여성의 히잡 착용을 금지하는 등 대표적인 세속주의 나라입니다. 하지만 에르도안 대통령은 이에 반대되는 친 이슬람주의 정책을 펴 왔고, 사법부 등 각 분야의 반대파를 몰아냈습니다.

결국 마지막으로 남은 군부 내 세속주의 세력이 궁지에 몰리게 되자, 마지막 남은 자유세력인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켰다는 분석입니다.

2016년 7월 16일 KBS 뉴스

  • 쿠데타의 주요 명분으로는, 현 정부의 IS 대(對)테러 정책에 대한 반감과 과도한 쿠르드족 진압작전으로 인한 병사의 인력 손실에 대한 불만으로 알려졌다. 숱한 튀르키예군 쿠데타가 그렇듯이, 정교일치적 정책을 내세우는 종교주의 정권에 세속주의 정책을 지지하는 군부의 쿠데타라는 것이다. 튀르키예 당국은 미국이 배후라는 음모론까지 주장하며 귈렌을 넘겨달라고 요구 중이지만, 미국 측은 "증거가 없다면 요구를 들어 줄 수 없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으며기사, 테러 배후자로 지목된 페툴라 귈렌도 튀르키예 당국의 주장을 부정했다. #

  • 대통령 에르도안은 세속주의 군인이 아닌 귈렌주의자가 주도했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에르도안은 이번 쿠데타가 "국가의 단합을 원치 않는 군부의 일부가 이슬람 수피즘 성직자인 페툴라 귈렌의 명령을 받아 저지른 것"이라고 말했다.# 비날리 이을드름 튀르키예 총리 또한 "2016년 튀르키예 쿠데타의 배후인물은 펫훌라흐 귈렌과 그 추종자들이라고 추측한다."라고 주장했다. 펫훌라흐 귈렌은 에르도안과 한 때 동반자 관계였으나, 에르도안이 독재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정치적으로 대립했던 인물로, 미국에서 망명 생활 중이다.

  • 사실 에르도안이 쿠데타의 배경으로 귈렌을 지목한 배경에는 세속주의자와 귈렌 운동 측 간의 관계가 상당히 나쁘다는 점도 있다. 귈렌 운동이 아직 에르도안의 동맹이던 시절 귈렌 세력 역시 에르게네콘과 발료즈 사건 때 세속주의 군부를 숙청하는 데에 앞장섰었고, 더 나아 가서 반정부적인 언론인이나 경찰간부 등을 투옥하는 데에도 가담했었기 때문. 2011년 기사 더욱이 일단 '민주적으로' 뽑혔고 선거에서 망하면 어찌할 수가 없는 AKP와 달리 튀르키에 정부의 주장대로 쿠데타 같은 비합법적 방법으로 다른 이슬람주의 세력인 귈렌 운동이 정권을 잡는다면 이를 막을 수도 없다는 우려도 존재한다. 따라서 쿠데타 시도를 귈렌 세력의 시도라고 규정해버리면 세속주의 야권도 일단은 정부를 지지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3. 진행[편집]


  • 이하의 시각은 튀르키예 현지시각 기준이며, UTC +03:00로, 한국 시간보다 여섯 시간 느리다.


3.1. 7월 15일[편집]


시간
경과
기타
20:56
시내에서 총성 들림.

21:03
쿠데타군, 이스탄불보스포루스 해협을 건너는 다리 두 곳을 봉쇄.

21:42
쿠데타군과 경찰 간 충돌 발생. 수도 앙카라에서 탱크, 전투기 등의 움직임 포착.

21:44
쿠데타군, 튀르키예 국영방송 TRT를 장악하고 정부 측에 성명을 발표[1]함. 이후 모든 방송이 중단됨.

21:53
아타튀르크 국제공항의 모든 항공편 운항이 취소됨. 한국인 환승객 30여명을 비롯한 여객들이 공항에 억류됨.
#, #,#


3.2. 7월 16일[편집]


시간
경과
비고
00:53
앙카라의 TRT 방송국에서 큰 폭발음 발생.
#
01:05
에르도안, 페이스타임을 통한 TV 인터뷰에서 "정부를 위해 국민들이 거리에 나서 줄 것을 촉구한다"고 밝히며, 군사정변에 관해서는 "군부의 소수 세력이 봉기를 시도하는 것"이라고 일축함.
#, #
01:27
이스탄불 중심부인 탁심 광장에서 에르도안 지지 세력과 쿠데타군간 충돌 발생. #, #
01:27
이스탄불 중심부인 탁심 광장에서 에르도안 지지 세력과 쿠데타군간의 무력 충돌 발생.
"알라후 아크바르"를 외치며 달려오는 이슬람 근본주의 에르도안 지지자에게 군인이 총격을 가함.
#1 #2
01:55
이스탄불에서, 이슬람의 기도시간을 알리는 낭송(아잔)이 평소보다 매우 이른 시각[2]에 울려퍼짐.[3]
친이슬람 근본주의 성향인 에르도안 지지자들을 거리로 불러모으려는 시도로 여겨짐.
#
02:07
에르도안, 튀르키예 서부의 이즈미르에 체류 중. 이스탄불이나 앙카라로 돌아오려했으나 공항 폐쇄로 인해 실패함.
#
02:22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튀르키예가 안정을 되찾기를 바란다는 의중을 표시함.
보스포루스 해협 다리에서 총상을 입은 시민들 다수 발생.
#1 #2
03:00
정부군이 국영방송 TRT를 탈환하여 방송이 재개됨. 튀르키예 노동부 장관과 사무원들이 방송국에 진입.
튀르키예 국회의사당에서 폭탄테러 발생, 국회는 "비상 회기에 돌입할 것"이라고 밝힘.
#1 #2
03:33
아타튀르크 국제공항에 에르도안이 도착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공항 주변에 지지자들의 행렬이 이어짐.
#
03:55
탁심 광장에서 대치 중이던 군인 30여명이 경찰에 포위되자 무기를 버리고 투항함.
#
04:00
군인들이 현지 방송인 CNN Turk의 스튜디오를 점거하고 방송 관계자들을 내보냄.
점거 이후에 텅 빈 스튜디오의 모습만 수십 분 간 송출되었다가 방송이 중단됨.
#1 #2
04:05
튀르키예의 국가정보기관 MIT에서 쿠데타가 진압되었음을 선언함. 쿠데타군 잔당이 아직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임.
#
04:30
에르도안, 이스탄불의 아타튀르크 국제공항에 도착하여 TV 기자회견 진행. "튀르키예군의 폐단을 말끔히 정화(clean up)할 것"이라고 밝힘.
#


4. 쿠데타의 실패[편집]


이번 쿠데타 시도를 통해 사망자가 260여명이나 넘게 발생했지만 6시간만에 진압되었다.#

쿠데타가 실패한 가장 큰 이유는 튀르키예 반란군이 에르도안 대통령의 신변을 확보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수도인 앙카라와 최대도시인 이스탄불의 장악에만 초점을 맞추느라, 마르마리스(Marmaris)에서 휴가 중이던 에르도안 대통령을 확보하는데 실패했고 에르도안 대통령은 쿠데타 직후 바로 비행기에 올라타서 이스탄불로 향할 수 있었다. 그리고 에르도안 대통령에 대한 반란군의 공격은 에르도안 대통령이 휴양지를 떠난 직후에야 이뤄졌다.#[4]

사실 반란군의 F-16은 에르도안 대통령이 탑승한 비행기를 찾아내어 락온했고 까딱하면 2대의 호위기만 있는 상태에서 격추하여 살해할 수 있었다. 그런데 조종사들이 주저하여 에르도안 대통령이 탄 비행기를 그냥 보내주었다. 아무리 쿠데타를 한다 하더라도 국가의 원수를 그 자리에서 그냥 살해하면 정국이 혼돈으로 변하는 건 100%고, 생포와 달리 암살은 도가 지나친 행동으로 판단되어 잠재적인 지지자들까지 등 돌릴 가능성도 높다.#

튀르키예 국민들은 물론, 튀르키예군 내부에서도 군 수뇌부가 소수 부대를 이끌고 일으킨 쿠데타에 전혀 공감하지 않았다. 시민들은 거리로 나와서 쿠데타에 맞서 반쿠데타 시위를 벌였으며, 튀르키예 야당들도 쿠데타를 지지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쿠데타를 반대한 튀르키예 군인들도 기존의 명령체계를 통해 에르도안 대통령의 쿠데타 진압 명령이 내려지자 쿠데타에 가담한 군인들을 상대로 반격을 가했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페이스타임을 통해 몇몇 언론과 차례대로 한 인터뷰에서 시민들을 향해 반란군에 맞서 싸울 것을 촉구하는 동시에 정상적인 지휘계통으로 튀르키예군에게 쿠데타 진압을 명령했다.

통신기술의 발달도 쿠데타 실패에 한 몫 했다. 만약 통신기술이 발달하지 않은 시절이었다면 에르도안 대통령과 튀르키예 정부군이 반란군을 진압하는 게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SNS를 비롯한 통신기술의 발전 덕분에 방송국 몇 곳을 장악하는 것만으로는 시민들의 귀를 막고 수뇌부에 혼선을 주는 것이 쉽지 않았다.

반란군 규모 또한 장군 및 제독 34명, 군인 및 군사학교사관생도를 합쳐 대략 2800여명으로# 쿠데타에 동원한 병력이 한국의 8배나 되는 영토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적은 편이었다는 점도 있다. 반란군의 총 병력은 1천 명 미만으로 추정되는데, 이 병력으로 앙카라와 이스탄불의 주요 거점을 모두 확보하려다보니 상당한 무리가 왔고 이를 통해 정부군+경찰의 반격에 저항하지 못했으며 시민들에게 쪽수로 밀려 항복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게다가 반란군은 징집병들이 다수라 쿠데타 지도부와는 달리 쿠데타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동기가 부족했고 이는 사기 저하와 전투력 감소로 이어져 경찰과 시민들이 진압을 시도하자 그대로 무너졌다.

튀르키예 쿠데타가 5시간 전 정보당국에 이미 파악됐다는 정보가 나왔다. 튀르키예군 참모본부가 쿠데타 5시간 전 이미 정보당국(MIT)으로부터 쿠데타 모의가 진행되고 있다는 정보를 들었으며 이에 참모본부가 튀르키예군에 장비이동 금지명령과 기지폐쇄명령을 내렸다는 것이다. 꼬리가 밟힌 쿠데타 세력은 예정보다 급하게 행동에 나섰으며, 쿠데타에 가담한 장성급이 100명이 넘는 데도 쿠데타 당일 병력이 크지 않았던 이유 역시 이 결과로 해석된다.#



5. 쿠데타 이후[편집]


파일:external/media2.s-nbcnews.com/160716-world-turkey-anger-soldiers-kick-0556_b7dfa1104456478e14e5666c33420274.nbcnews-ux-1024-900.jpg
  • 265명이 사망하고, 1,400명이 부상당했으며, 쿠데타에 가담하여 체포당한 군인은 2,839명이다.

  • 쿠데타 실패 이후, 유혈사태에 분노한 시민들이 쿠데타에 가담한 군인들을 폭행하기도 했다.

  • AKP의 깃발을 든 지지자들이 쿠데타 투항병 중 쿠르드인 병사들을 납치 및 살해했다. 이 중 한 명은 AKP 지지자가 인터넷에 참수장면을 중계하는 충격적인 모습을 보였다.

  • 쿠데타가 종결되었다는 에르도안의 발표 이후, 지지자들이 밤마다 차를 몰고 나와 퍼레이드를 벌이고 있으며 에르도안 지지자와 반대자 사이의 충돌도 빈번하게 이어지고 있다. 구호 중에는 페툴라 귈렌을 사형시켜라, 샤리아 부활 같은 구호도 등장하고 있다. 앞으로 1주일 동안 이 퍼레이드는 계속될 예정이며, 현재 이스탄불, 앙카라, 콘야, 가지안텝을 비롯한 주요 도시들은 축하의 의미로 시내대중교통을 전면 무료화했다.

  • 2016년 튀르키예 군사반란에 가담한 군인 7명과 민간인 1명이 2016년 7월 16일 오전 12시에 블랙호크를 타고 그리스로 건너가 망명을 신청했다고 한다. 그리스 정부는 일단 이들을 경찰서로 인계하고 망명 승인여부를 검토 중이라고 한다.

이에 메블류트 차뷰 튀르키예 외무장관은 "우리는 그리스 정부에게 가능한 빨리 반역자 8명을 튀르키예로 넘겨 줄 것을 요청한다."라고 말했다.# 그리스 측에서 이들의 망명을 기각하였다.# 그리스 법원에서 총 8명 중 7명이 튀르키예 송환을 거부하고 있다.#

  • 프랑스 외교장관이 튀르키예 쿠데타 후속 조치를 악용해서 삼권분립에 대한 훼손에 대해서 강도 높게 비난하였다.#

  • 휴먼라이츠워치(HRW)가 국가비상사태 이후 경찰의 고문사례가 다수 확인되었다.#

  • 튀르키예 공화국 조폐국에서 기념화폐를 발행했다. 은 재질이며 5000장 한정이다.#

  • 2017년부터 이 날을 민주주의의 축일(Demokrasi Bayramı)로서 기념하기 시작했다. 이로써 튀르키예의 공휴일은 총 15일이 되었다.



5.1. 사후 처리와 대규모 숙청[편집]


  • 미셀 루빈에 따르면, 지금 튀르키예인들이 느끼고 있는 공포는 그저 빙산의 일각이라고 한다.
  • 쿠데타와 관련하여 판검사와 헌법재판관 등 법조인 3,000명을 체포했다.[5]
  • 튀르키예에선 1984년 이후로 사형이 한 번도 시행된 적이 없는데 (2004년 공식적 폐지) 이번 쿠데타를 계기로 사형제를 부활해 쿠데타 주동자들을 사형에 처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고 한다.
  • 전국의 국공립 및 사립대학 학장 전원인 1,577명에게 반란에 연루 혐의로 사직서를 쓰라고 통보했다. 동시에 교육부 소속 15,200명, 내무부 8,777명, 총리실 257명 등 25,000명의 공무원도 반란 연루 혐의로 해고했다. TV와 라디오 방송국 24곳도 반란 연계 누명을 씌워 방송허가가 취소됐다.#
  • 20일, 에르도안 대통령은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군사 쿠데타 세력의 위협제거를 위해 근 3개월 간 실시된다고 한다. #
  • 위키리크스는 집권당 AKP가 주고받은 전자우편을 대거 공개했다. https://wikileaks.org/akp-emails 에서 볼 수 있다.
  • 친정부 시위 참가 여성들 중 유독 히잡을 착용한 여성들이 많이 보이는 편.
  • 밀고자는 소령으로, 쿠데타 당시 정보당국으로 찾아가 수장을 납치하는 임무를 맡아야 했지만 그냥 수장을 찾아가 쿠데타를 밀고했다. 그래서 쿠데타가 예정보다 6시간 빨리 진행된 것. #
  • 에르도안의 권위주의 통치에 대해서 서방세력이 간섭할 시 친러시아로 갈 수 있다고 신 밀월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 , #
  • 공군 파일럿 300여명이 숙청되어 전투기를 조종할 사람이 없게 되었다. 일단 민간기 파일럿을 대타로 넣었지만 제대로 돌아 갈 리가 없기에 한국에까지 파일럿 위탁교육을 요청할 지경이 되었다.# #
  • 쿠데타의 최종 배후로 지목된 펫훌라흐 귈렌에 대해 정질서 파괴와 무장 테러조직 운영, 테러 재정 지원 등의 혐의를 적용해 2회 종신형과 징역 천9백 년형을 구형됐다.#
  • 2017년에도 법관·군인 등 공직자 4천 명을 해고하였다.#
  • 2017년 들어서 튀르키예 내의 대표적인 좌파, 세속주의 신문인 쇠즈쥐(Sözcü)에 대해 쿠데타 미수사건 당시 휴가지에 있던 에르도안이 머물던 호텔의 위치를 보도해 쿠데타 측에 정보를 누설했다는 죄목으로 쇠즈쥐 신문 편집장과 해당 기사를 작성한 기자, 편집팀 전체를 구속해 수사하고 있다. 쇠즈쥐에서는 강력히 반발해 2017년 5월 19일자 신문을 처음부터 끝까지 완전히 백지로 발행하고, "5월 19일 언론자유를 위한 특별판"이라는 헤드라인을 걸었다. 링크
  • 쿠데타에 연루한 군인 115명을 체포하였다.#
  • 2020년 2월이 돼서야 쿠데타에 연루한 군인들을 체포영장을 발부했다.#
  • 2020년 6월에 쿠데타 배후 조직에 연루된 혐의로 기소된 주이스탄불 미국 총영사관 직원에게 징역형을 선고했다.#
  • 쿠데타 가담 혐의로 기소된 86명에게 '가중처벌 종신형'을, 35명에게는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 기소된 피고인 337명에게 종신형을 선고했다.#
  • 2021년 3월에 전국 53개 주(州)에서 체포 작전을 벌여 전·현직 군인 203명을 체포했다.#
  • 2021년 4월에 쿠데타에 가담한 혐의를 받는 군인 22명에게 종신형을 선고했다.#
  • 2021년 7월에 총 3,000여명이 종신형 선고받았다. 이중 1600여명은 가석방이 훨씬 더 어렵고 수감조건도 혹독한 가중처벌 종신형이다.#

6. 음모론[편집]


일각에서는 쿠데타가 현 튀르키예의 이슬람 정권을 공고히 하기 위한 군 조직과 정부세력의 음모가 아니냐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일종의 친위 쿠데타가 아니냐는 것. 실제로 튀르키예인 10명 중 3명은 쿠데타가 에르도안의 자작극이라 믿는다는 조사 결과가 존재한다.[6]

에르도안 본인은 CNN과의 인터뷰에서 이러한 자작극 주장을 부정했다.[7]


7. 관련 문서[편집]




8. 둘러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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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쿠데타군은 "정부가 새로운 입법부와 행정부를 구성하는 동시에 '평화의회'를 구성할 것, 평화의회의 구성원은 종교, 인종, 언어를 가리지 않고 선출할 것, 현재 즉시 계엄령을 발령할 것"을 요구하였으며, "튀르키예군 참모총장을 비롯한 정부 고위인사들을 인질로 잡고 있다."고 발표함.[2] 대체로 새벽 5시~6시경 첫 기도를 올린다.[3] 예배시간이 아닌데 울리는 아잔은 전통적으로 적의 기습으로 인한 위기상황 및 동원령을 의미한다. 콘야에서는 아잔 이후, 모스크에서 "당신이 무슬림이라면 집에 있지 말고 당장 거리로 나오라!" 라는 선동도 들렸다.[4] 쿠데타가 일어날 경우 수도가 장악되더라도 국가원수가 적대 세력에게 붙잡히지 않았고, 국민들이 국가원수를 지지한다면 쿠데타는 절대로 성공할 수 없다. 쿠데타 세력을 진압할 수 있는 권력과 국가를 지도할 수 있는 권한은 여전히 국가원수에게 쥐어져 있기 때문. 오히려 이들이 수도 앙카라와 이스탄불의 점령보다 에르도안 대통령의 납치를 통한 신변 확보를 중요시했더라면 상황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물론 이러한 경우에도 즉시 부통령이나 국방장관 등의 권한대행진압 작전대통령 구출 작전을 펼쳤을 가능성이 높다.[5] 터키 쿠데타軍·법조인 6천 명 체포·해임…대대적 '피의 숙청'(종합)
전국 판·검사 2천745명도 쿠데타 동조혐의 해임·체포영장
사형제 부활 거론…국제사회 '법치 통한 후속대응' 당부 http://m.yna.co.kr/kr/contents/?cid=AKR20160717014351009&site=
[6] 나머지 여론은 정부가 배후자로 지목한 페툴라 귈렌의 소행이라 응답했다.[7] 영어 통역이 없는 튀르키예어 영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