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대 국회의원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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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투표**
6차
1987년 10월 27일
시행 불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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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대 부통령 선거는 대통령 선거와 병행하지 않고 이시영 부통령의 사임에 의해 별도로 시행한 보궐선거이므로 편의상 보궐선거로 분류함.
** 국민투표는 선거에 포함되지 않으나, 편의상 기술함.
*** 2014년 7월 24일 헌법재판소가 국민투표법 제14조 제1항 내용 중 일부에 대해 헌법 불합치 결정을 내렸으나, 국회에서 추가적인 법률 개정이 이뤄지지 않아 2016년 1월 1일자로 효력을 상실하여 시행 불가함.






대한민국 제7대 국회의원 선거

1967년 6월 8일
7대 총선

1971년 5월 25일
8대 총선

투표율
76.1%▲ 4.0%p
선거 결과
파일:7대 총선 결과.png


정당
지역구

전국구

총합
비율
[[민주공화당|

민주공화당
]]
102석
27석
129석
73.71%
[[신민당(1967년)|

신민당
]]
28석
17석
45석
25.71%
[[대중당|

대중당
]]
1석
0석
1석
0.57%

1. 개요
2. 결과
2.1. 선거구별 결과



1. 개요[편집]


1967년 6월 8일 치러진 국회의원 선거로 투표율은 76.1%를 기록했다. 131석의 지역구(소선거구제)와 44석의 전국구를 선출했다. 무소속 출마는 여전히 금지되었고, 선거법은 6대 총선 때와 크게 달라진 게 없었다.


2. 결과[편집]


파일:Screenshot 2020-07-29 at 22.53.01.png

정당 득표율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인

[[민주공화당|
파일:민주공화당_글씨만.png
]]

5,494,922
50.6%
27

[[신민당(1967년)|
파일:신민당 벽보글씨.svg
]]

3,554,224
32.7%
17

[[자유당|
]]

393,448
3.6%

파일:민주당(1967년) 로고타입.svg

323,203
3.0%

파일:대중당 글자.svg

278,477
2.3%

파일:한국독립당(1963년) 흰색 로고타입.svg

240,936
2.2%

[[민중당(1967년)|
]]

180,324
1.7%

[[정의당(1967년)|
파일:정의당(1967년) 흰색 로고타입.svg
]]

142,670
1.3%

파일:통일사회당 글자.svg

104,975
1.0%

파일:자민당글자.png

88,474
0.8%


83,271
0.8%
총합
10,856,008
100.0%
44

제7대 국회의원 선거 결과
지역구
전국구
제1당

[[민주공화당|
파일:민주공화당_글씨만.png
]]

129석
102석
27석
제2당

[[신민당(1967년)|
파일:신민당 벽보글씨.svg
]]

45석
28석
17석
제3당

파일:대중당 글자.svg

1석
1석
0석

민주공화당이 약 50%의 득표율로 개헌선을 넘는 129석을 얻었고, 신민당은 당초 예상보다 저조한 약 33%의 득표율로 45석에 그쳤다. 그래도 대도시에선 승리를 챙겼고(서울 13석 / 부산 5석) 민주공화당 득표율이 저번보다 많이 올라가 6대 총선과 달리 전국구 의석만큼은 그나마 공평하게 분배된게 신민당 입장에선 위안이라면 위안점. 사실 기타 군소 정당들이 표를 갉아먹은 여파도 꽤 컸다.

해당 선거는 이후 전개로도 주목받았는데, 왜냐하면 6.8 부정선거라는 닉네임이 붙을만큼 선거가 끝난 뒤 부정선거 논란이 거세게 일었고 실제 시위와 당선 맥락의 변화도 일어났기 때문. 농촌 지역에서 속칭 막걸리고무신 선거라고 불리는 금품, 물품 살포행위 같은 선거법 위반 행위가 대형 스케일로 저질러져서 여당이 농촌 지역구를 싹쓸이했는데, 이에 신민당이 전면 무효를 외치며 재선거를 요구하기도 했다. 하지만 집권당인 민주공화당의 행위에 미치지 못했을 뿐 신민당도 이러한 막걸리, 고무신 살포를 행하는 흑역사를 찍기도 했다고 한다.(...) 쟤도 하는데 별 수 없잖아?

하여튼 정황증거가 너무 명확하다보니, 분노한 대학가에서 휴학 열풍까지 일 정도가 되자 정부측도 여론의 압력에 부딪혀 부랴부랴 1명의 당선자를 정정하고 공화당은 꼬리자르기식으로 일단 7명을 제명 조치했다. 이에 야당 낙선자들은 소송을 냈으나 재보선이 대대적으로 벌어져서 정부의 권위가 추락하고 공화당 의석이 개헌선 아래로 떨어지는 건 싫어했던[1] 당시 행정부가 사법부에 압력을 넣은 탓에 대부분 패소하고 만다.[2] 한편, 공화당 탈당자들 중 일부는 의원직도 내려놓은 후 정계 은퇴를 하기도 했지만[3] 나머지는 '10·5구락부(클럽)'이란 어용단체를 구성했다가, 3선 개헌 시즌에 은근슬쩍 친정인 민주공화당으로 복당한다.

경향신문6월 12일 기사에서 공화당이 압승하고 신민당이 참패한 것, 불과 얼마 전 대선에서 나타난 지역별 특정 정당 선호가 그대로 재연되는 대신 전국에서 공화당이 이긴 것, 지난 대선 당시 윤보선이 이긴 호남 지역에서 호남 푸대접론에도 불구하고 민주공화당이 이긴 것이나 반대로 박정희가 이겼던 부산에서 신민당이 압승한 것 등은 완전히 일반의 예상을 뒤엎은 것이며, 이승만 정권 시절의 여촌야도 현상이 재현된 것, 군소 정당들은 한국독립당 전진한 후보나 자유당 장택상 후보 등 원로급 정치인들마저 낙선하는 등 전혀 힘을 쓰지 못한 것, 공개 투표, 대리 투표, 매표, 투표장 폭력 사건, 개표 조작 등으로 수많은 부정 선거 논란이 일어난 것 등이 흥미로운(?) 점이라고 평했다.[4]

전국적으로 서울을 제외하면 공화당이 지역구 대부분을 싹쓸이한 가운데, 부산 3선거구(서구)의 김영삼과 전남 3선거구(목포시)의 김대중의 당선이 두드러진다. 박정희는 불과 재선[5]의 김대중 의원의 당선을 저지하려 진력했는데, 심지어 국무회의를 사상 초유로 목포에서 열 정도로 공화당 후보를 밀어주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엄창록이란 걸출한 책사를 낀 김대중의 생환... 영화 킹메이커에서도 충실하게 이 대목을 다루고 있다.

사족으로 이때 경상남도는 신민당이 1석만 차지했는데, 그곳이 어딘가 하면 바로 성낙현이 당선 된 창녕군이었다. 오늘날 창녕이 합천군, 산청군 등과 같이 보수정당의 텃밭 지역이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꽤나 격세지감인데, 아니나 다를까, 성낙현은 3선 개헌을 앞두고 개헌에 찬동하는 변절을 해버린다.(...) 실제 성낙현은 신민당의 셀프 해산으로 의원직을 잃은 후 민주공화당에 입당했으며, 창녕군도 이후 보수 텃밭으로 오늘에 이르게 된다.


2.1. 선거구별 결과[편집]


제7대 국회의원 선거/지역구 국회의원 항목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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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실제 해당 국회 시기 3선 개헌안이 통과된다. 어찌보면 헌정 역사에 분기점이 된 선거였던 것.[2] 예외적으로 김옥선만은 승소하여 늦깎이 등원을 하였다. 이후 이중재는 재보궐선거로 당선되었다.[3] 이중엔 김종필도 있었는데, 여긴 선거 때문에 직후 탈당한건 아니고, 박정희의 2인자 견제가 원체 심해지자 6.8 부정선거의 책임을 진다는 명목하에 사실상 반강제적으로 1968년 6월 2일 정계은퇴를 선언하며 탈당한다.[4] 해당 기사에선 당시 공화당 내 차기 대권 경쟁도 잠깐 다루고 있는데, 알다시피 당시 그런 준비를 하고 있던 사람들은 얼마 안 가 눈물을 머금고 꿈을 접어야 했을 것이다.[5] 더구나 1961년 5월 재보궐 선거는 그 직후 5.16 쿠데타로 국회의원이정지되어 사실상 초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