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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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Korean Axe Murder Incid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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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1976년 8월 18일 오전 10시
장소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원인
유엔미루나무 벌목 시도
북한군의 벌목 반대
결과
미국폴 버니언 작전 발동
북한에 대한 보복 및 미루나무 벌목 성공
영향
조선인민군 초소 4개 파괴
공동경비구역 경비구역 강화[1]
인명 피해
2명[2] 순직
8명[3] 부상
영향 국가
파일:미국 국기.svg 미국
파일:북한 국기.svg 북한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대한민국

1. 개요
2. 사건 경위
2.1. 발단
2.1.1. 문제의 미루나무
2.1.2. 북한의 주장
2.2. 사건 이후의 전개
2.2.1. 본격적인 준전시 태세
2.2.2. 폴 버니언 작전
2.2.3. 한국의 대응
2.2.4. 북한의 대응
2.3. 결과
3. 여담
4. 둘러보기



1. 개요[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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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당시의 사진.[4]

언어별 명칭
한국어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8.18 도끼 만행[5]
판문점 도끼 살인 사건[6]
판문점 사건[7]
영어
Korean Axe Murder Incident
1976년 8월 18일 판문점에서 북한이 미루나무 벌목 작업을 지도하던 주한 UN 장교 2명을 살해한 사건이다.

2. 사건 경위[편집]



2.1. 발단[편집]



2.1.1. 문제의 미루나무[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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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판문점은 물리적인 군사분계선이 존재하지 않는 단어 그대로의 공동경비구역이었는데, 유엔군 측 3초소(CP 3)는 조선인민군 육군 초소 3개소(KPA 4, KPA 5, KPA 8)에 포위 당한 지점에서 항상 위협에 노출되어 있었다. 그래서 가장 고지대에 위치한 5초소(OP 5) 측에서 3초소를 지켜보고 있어야 했는데, 이 문제의 미루나무가 5초소의 시야를 방해하고 있었다. 8월 3일 주한UN군[8] 경비대 작업반은 3초소의 안전 도모를 위해 미루나무를 자를 것을 권고했다.

이에 8월 6일 한국군 노무자 4명과 UN군 4명이 미루나무 절단을 시도했는데, 이때 북한군이 이의제기를 하면서 작업을 중단시켰다. 그러자 경비대는 8월 18일 절단이 아닌 가지치기만 하기로 결정하고, 오전 10시 30분 한국인 노무자 5명을 동원하여 가지치기 작업에 들어갔으며 경비대 중대장 아서 보니파스 대위, 소대장 마크 배럿 중위 등 UN군 장교 2명 및 병사 4명, 국군 장교 1명 및 병사 4명 등 총 11명의 병사들이 작업 감독에 나섰다.

그러자 북한군 군관 2명과 하전사 8명이 나타나 재차 항의했다. 이에 UN군은 가지치기 작업을 하는 중이라 설명했고, 이때 현장에 있던 북한군도 수긍하여 가지치기를 하는 노무자들에게 가지를 잘 치는 법에 대해 조언을 하는 등 작업은 매우 훈훈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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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10시 47분에서 50분 사이, 박철 중위[9] 등 북한군 장교 2명이 15명의 병력을 이끌고 현장에 나타났고 박철 중위는 보니파스 대위에게 작업 중단을 요구했다. 보니파스 대위는 이를 무시하고 작업을 속행하도록 지시했고, 11시 30분경 북한군 20여 명이 트럭을 타고 추가로 도착했다. 이 때 박철 중위가 "그만두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다"고 재차 위협을 가했으나 보니파스 대위는 재차 이를 무시했다.

박철 중위가 소매를 걷고 차고 있던 손목시계를 호주머니에 넣으며 신호를 보내자 북한군들은 일제히 소매를 걷었고, 박철 중위가 "죽여!"라고 소리를 지르자 북한군들은 트럭에 싣고 온 둔기와 한국인 노무자들이 사용하던 도끼를 이용해 기습적으로 집단 폭행을 가했다. 보니파스 대위가 북한군의 구타에 가장 먼저 쓰러졌고, 북한군 5명이 쓰러진 그에게 달려들어 도끼로 머리를 찍어서 살해했다. 마크 배럿 중위는 발견 당시에는 살아 있었지만 이송 중 사망하였다. 나머지 병사들도 유엔군 병사 1명을 제외한 전원이 부상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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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 조지 보니파스 소령(Arthur George Bonifas 1943년 4월 22일생, 추서 계급), 마크 톰 배럿 대위(Mark Thomas Barret 1951년 6월 9일생, 추서 계급)

보니파스 대위는 사건 당일 한국에서의 근무가 3일 남은 시점이었고, 후임 중대장 역시 JSA에 투입되어 인수인계 과정 중이었기에 가지치기 작업 감독 지휘 정도는 충분히 후임 중대장에게 인계할 수 있는 업무였다. 배럿 중위는 JSA에 전입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박병엽 전 조선로동당 고위 간부[10]의 증언록에 의하면 이 사건은 당시 북한 주석김일성이 아닌 김정일의 지시였다고 한다. 당시 북한은 김정일이 후계 체제를 구축해 나가는 과정이었기 때문에 김정일이 전국에서 일어나는 모든 상황을 통제하고 있었다. 김정일은 당시 UN군이 판문점에서 미루나무 가지치기를 한다는 보고를 받고 "조선 사람의 본때를 보여주라. 단, 남조선 노무자들은 건드리거나 총을 쓰지 말고 미제 놈들에게 본때를 보여줘라."라고 지시했다.[11]


2.1.2. 북한의 주장[편집]


휴전중인 적국 장교를 정당하지 못한 이유로 살해한 것은 명백한 휴전협정위반이었고, 시체를 토막내듯이 다져버린 사람의 정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윤리나 도덕적으로도 이해할 수 없는 행위였다.

이런 만행을 벌이고도 북한의 공식발표'"미군 측이 나무를 자르는 것을 보고 (북한 측)경비병들이 제지하러 나섰는데, 갑자기 미군이 자신들에게 도끼를 던졌다"였다. 즉 '자신들은 죄가 없다."고 오리발을 내놓은 것이었다. 미군장교를 살해한 경위는 "우리(북한)의 하전사들이 날아오는 도끼를 손으로 잡아 미군들에게 다시던졌다."라고 했는데, 평화적인 실무를 하러 온 비무장 적국 장교를 살해하고서 그에 대한 경위에 대한 변명도 '장군님 축지법 쓰신다'급의 헛소리였다.

심지어 이런 말도 안되는 명분과 말도 안되는 변명을 하고서 뻔뻔하게 미군 쪽에 속죄를 요구했다. 죄 없는 타국의 군인을 살해한 것은 명백한 전쟁행위임에도[12] 사과는 전혀 없고 경비장교 회의 선에서 덮으려고 했다.

이러한 북한의 말 같지도 않은 행위에 대하여 전세계의 공산주의국가들, 심지어 소련의 위성국들이나 다름없던 동유럽사회주의 공화국들조차도 '북한 놈들이 드디어 미친 게 틀림없다' 는 노발대발한 반응을 주로 보였고, 설령 미군이 진짜로 도발을 했다 하더라도 비무장 미군 장교를 도끼로 찍어 죽이는 미친놈들이 어딨냐고 북한 로동당 정부에게 상황 설명을 제대로 하라고 마구 닦달을 해댔다. 이 때문에 김일성은 나중에 동독 군사대표단에게 소란 떨어서 미안하다고 사과까지 해야 했다.

2.2. 사건 이후의 전개[편집]



2.2.1. 본격적인 준전시 태세[편집]


이 사건에서 살해당한 미군 장교는 미국의 장교이기 전에 UN군 소속의 장교들이었다. 이것의 의미는 단순히 미국과 북한의 문제라고 할 수 없는 일이라는 뜻이고 이 사건이 국제적인 대도발 사건이 되었다는 의미다. 정당한 이유가 있었더라도 문제가 되었을 사건이 말도 안되는 명분으로 말도 안되는 과정을 거쳐서 터졌으니 사건이 유하게 해결될리가 없게 된 것이다.

이 사태로 미국은 매우 분노했다. 일반 병사도 아니고 장교를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참혹하게 살해했고 미국은 이를 좌시할 생각이 없었다. 당시 UN군 사령관이자 미 육군의 대장이었던 리처드 스틸웰 장군은 휴가차 일본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사건의 보고가 자신에게 올라오자마자 민항 여객기도 아니고 군의 일반 수송기도 아닌 전투기의 후방석에 탑승하여 급히 한국으로 입국했다. 한국에 입국한 스틸웰 대장은 즉시 회의를 소집한 뒤, 당시 한국의 대통령이었던, 박정희 전 대통령을 만나 데프콘 3[13]를 발동시키자는 합의를 내렸다.

한국에 주둔중인 UN군과 미군 뿐만이 아니라 보고를 받은 미국 본국의 중앙정부도 좌시하지 않고 강경하게 대처하기로 결의했다. 당신 미국 정계는 좌우나 정당 및 파벌을 가리지 않고 더 이상 아시아의 공산주의자들에게 미국의 위신이 깎여서는 안된다는 확고한 인식이 있었다. 베트남 전쟁에서 패배하면서 이전까지 전쟁에서 절대 패하지 않는다는 미군의 자존심이 바닥을 기고 있던 상황이었다. 또한 대통령 경선을 준비하고 있던 제럴드 포드 미국 대통령은 가뜩이나 공산주의자들에게 약하게 보인다는 비판을 받고 있었기에, 이런 비판을 불식시킬 필요가 있었다.

포드 대통령은 즉각 북한을 비판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미국 시간으로 8월 18일 오후 3시, 헨리 키신저 국무장관의 주재로 도널드 럼스펠드 국방장관의 대리인 국방차관 윌리엄 클레멘츠, 해군참모총장미 해군 대장 제임스 핼러웨이 제독, 대통령 안보 부보좌관 윌리엄 하이랜드 등이 참여한 워싱턴 특별대책단 회의가 소집되었다. 회의에서 키신저 장관은 현장 사진을 보고 극도로 분노했고 사진에서, 북한군 시체가 보이지 않는다며 북한군을 권총으로 쏴죽였어야 했다고 분통을 터트렸다. CIA에서는 이 도발이 계획된 것이 틀림없다고 주장했고 이에 참석자들도 동의했다. 키신저는 북한이 미국인 2명을 때려죽인 대가를 반드시 치러야 할 것이라고 소리쳤고, 회의장을 나오면서 빨갱이들의 피를 반드시 보고야 말겠다고 말하는 등 미국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그렇지만 판문점에서 일어난 사건만으로는 전면전을 일으킬 수는 없었다. 특히 중국과 소련을 자극할 우려도 있어 스틸웰 장군은 우선 사건의 원인이 된 미루나무를 자르고, 이에 북한측이 추가 도발을 가하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에 대한 분위기를 조성하자는 대안을 제시했다. 결국 대안이 승인되고 데프콘 등급이 상향되었다. 회의를 마친 키신저 장관은 중국을 통해 북한 측에 조용히 있지 않으면 '중대한 결과'가 초래될 것이란 경고를 보냈다.

8월 19일에 들어 미국은 군사정전위원회 개최를 요구했으나, 북한측은 여전히 경비장교 회의를 운운하며 사건을 덮으려 했다. 결국 군사정전위원회와 경비장교회의가 동시에 열렸다. 이 자리에서 UN군은 김일성에게 보내는 UN군사령관의 메시지를 통해 군사 정전 위원회 본회의에 당장 나오라는 강경한 최후 통보와 사과 및 배상을 요구했으나, 북한은 여전히 억지 주장을 계속하며 되려 사건 가담 주모자들을 처벌하라는 뻔뻔하기 그지없는 태도를 유지했다. 당연히 협상은 결렬되었고, 스틸웰 장군은 그날 바로 워싱턴 국가안보회의에 데프콘 3를 발동하겠다고 보고했다. 마침내 국내에서 처음으로 데프콘 3가 발령되었다. 이로 인해 6.25 전쟁 이후 최초로 주한UN군과 대한민국 국군이 준전시 체제에 돌입했으며, 북한군도 이에 맞서 북풍 1호(준전시 체제)를 발동, 전군 완전 무장을 지시했다.


2.2.2. 폴 버니언 작전[편집]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으로 남북한 양군이 대치하는 가운데, 폴 버니언[14] 작전(Operation Paul Bunyan)이 세워졌다. 지원병력 감시 하에 미루나무를 벌목한다는 작전이었다. 1976년 8월 21일, 마침내 미국 본토와 대한민국의 주변국에 주둔한 미군 기지에서 병력을 편성했는데, 단순히 벌목을 위한 병력이라고 보기에는 힘든 규모였다.




  • 함재기 65대를 탑재한 미 해군 제7함대[15], 미드웨이급 항공모함순양함 5척이 서해안에 대기.





이런 어마어마한 규모는 위에서 언급했듯이 북한에 대한 전면적 공격보다는 휴전선의 고질적인 문제였던 서해안 부분 정리, 개성 및 연백평야로의 진격, 옛 38선 이남 대한민국 영토의 수복 등을 고려한 병력이었다. 공산권 측에 명분을 주지 않기 위해 북한이 추가 도발 없이 침묵한다면 무력 시위로 끝낼 계획이었지만, 유사시에 북한이 추가 도발을 하면 바로 반격할 생각이었다. 일단 미군의 계획은 작전시 교전 사태가 발생하면 포병 부대는 개성의 인민군 육군 막사에 포격을 개시, 개성 위쪽 시변까지 포격해서 인민군 육군 포병 전력을 싸그리 없앤다는 것이었으며, 북한 육군 전차 부대의 남하와 같은 구체적인 전시 상황 계획까지 완벽하게 수립했다.

미 해군은 동아시아를 작전 지역으로 삼고 있는 7함대를 총동원하고, 미 공군 역시 한국과 일본 주둔 병력 외에도 한반도를 작전 지역으로 삼고 있는 괌의 폭격기[16]를 동원했으며, 미 육군도 1만 2000명의 증파 요청을 감안하면 최소 사단 단위의 병력의 증파를 계획하는 등 여러 모로 미국도 당시 한반도에 동원할 수 있는 거의 모든 병력을 동원했다.

이 작전이 시행되기 전 군사분계선 부근에 데프콘 2[17]가 발령되었다.

육군 항공대AH-1 공격헬기 7대와 다목적 헬리콥터 20대의 직접 엄호 및 도끼와 권총으로 무장한 채 30여 명으로 이루어진 미군 공동경비부대들이 돌아오지 않는 다리 같은 판문점 주변의 주요 시설들을 안전하게 확보했고, 미 육군 공병 8명으로 이루어진 2개 팀이 전기톱으로 미루나무를 자르는 데 성공했다. 북한이 침묵했기 때문에 보복은 하지 않기로 결정하여 작전은 그대로 종결되었다.


2.2.3. 한국의 대응[편집]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를 통해 대한민국 육군 특수전사령부 제1공수특전여단 대원들로 이루어진 64명의 결사대[18]를 조직한다. 1공수특전여단의 지역대장이었던 김종헌 소령이 이 결사대의 지휘관을 맡았다. 이 결사대가 해당 작전 지역에 투입되어 미루나무를 절단하는 미 육군 공병들을 엄호하고, 육군 제1보병사단 수색대는 그 일대에 매복하여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는 보복작전이 수행됐다.

특전사 결사대원들은 카투사로 위장, 권총과 수류탄은 전투복 속에 숨기고, 크레모아, M79 유탄발사기 등은 삽, 곡괭이 등 작업도구 밑에 감추는 식으로 트럭에 탑승하여 공동경비구역에 들어가 도끼와 몽둥이를 가지고 북한군 초소 4개를 파괴하였다.[19] 대원들이 초소에 접근해 손에 도끼와 소총을 들고 활보하며[20] 초소를 난장판으로 만들자, 북한군은 모조리 도망쳤다. 간간히 나타난 북한군은 독이 오른 특전사 대원들이[21] 위협을 하며 욕을 퍼붓자 그대로 사라져버렸다. 당시 매복 작전을 수행 중이던 1사단 수색대원은 훗날 인터뷰에서 이러다 정말 일이 나는 것이 아닌가 할 정도로 살벌한 분위기였다고 한다.

특전사 결사대는 북한군이 특전사의 공격에 대해 무력 대응을 할 경우엔 북한군들을 과감히 사살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다만 먼저 북한군을 사살하지는 말라는 명령이 내려져 있었다. 즉, 북한군을 구타하고 깽판을 놓다가 북한군이 발포하면 바로 응사해서 사살하도록 되어 있었다. 따라서 북한군에게 선제공격을 당하는 대원들은 전사하게 될 것이므로 그야말로 죽음을 각오한 결사조로서의 투입인 것이다. 실제로 출동 직전에 유서와 손톱 등을 남겼다는 말도 있다. 그러나 북한군이 처음부터 저항 없이 무조건 도망가기만 해서 교전은 발생하지 않았다.

실제로 작전에 투입된 1공수 대원 증언에 따르면 유서 작성, 손톱과 머리카락을 잘라서 남겼고, 출동 전까지 외출 외박이 금지된 채 영내 대기를 하였다. 초소를 부술 때 북한군 초소 병력들은 도주를 했지만, 곧이어 소총으로 무장한 병력들이 분계선을 따라 도열하여 대치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발포 등의 공격은 없었고 모든 초소를 파괴하는 걸 구경만 하였다. 특전사 대원의 증언에 따르면 무표정한 북한군 무장 군인들의 표정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고 한다. 초소를 파괴하는 동안 나머지 특전사 대원들도 소총으로 무장하고 북한군 출동 병력과 서로 마주보고 있었다.[22]

미국은 어디까지나 나무를 벌목하기만 하고 북한의 반응을 볼 계획이었기에, 실제 전쟁을 수행할 전력을 동원했어도 무력 시위에만 그쳤고, 그렇다 보니 한국 육군 특전사 대원들이 북한 초소를 공격하자 대경실색했다. 미루나무를 자른 후에 특전사 대원들이 북한군에 욕설을 퍼붓고 인민군의 초소로 달려나가자 엄청 당황했다고 한다.[23] 미군이 전쟁 발발을 우려해 결사대를 제지하자, 특전사 대원들은 북측 도로 차단기를 제거하기 위한 진격에 불응하는 미 육군 트럭 운전병권총으로 위협하기도 했다.[24]

당시 1공수여단에는 19대 대통령인 문재인이 특전병으로 복무하고 있었다. 당시 문재인은 현장에 투입된 결사대는 아니고, 부대에서 행정업무를 소화하는 작전상황팀 소속이었다고.

2.2.4. 북한의 대응[편집]


북한 입장에서는 이렇게까지 미국이 강하게 나설 줄은 상상도 못했다. 하지만 미국은 자국민이 외국인에 의해 살해 당하는 것에 극도로 민감하게 반응하는 국가이며, 이들에 대한 처벌로 전쟁도 불사하는 국가이다. 애초에 미국 내부의 여론도 군인에게 매우 우호적이며, 특히나 미국인들에게 악명 높은 IRS의 눈 밖에 나거나 살인마, 마약사범처럼 여론을 등질 범죄자가 아닌 엘리트 중의 엘리트로 예우 받는 현역 장교를 어처구니 없는 이유로 죽였으니, 당연히 뒤집어질 것을 북한이 예측하지 못했다는 건 그만큼 미국에 대해 제대로 파악도 못했다는 소리가 된다. 이는 자국민 보호라는 매우 당연한 수칙도 제대로 지키지 못할 경우 초강대국이라는 미국의 위상에 먹칠을 할 수 있다는 인식도 한 몫 한다. 애초에 미국의 저런 태도가 한두 번 있는 일도 아니었다. 스티븐스 저격사건 제외하면 1차대전 참전 원인 중 하나인 루시타니아호 침몰 사건, 2차대전 참전의 직접적 원인인 진주만 공습, 베트남전 발발 원인으로 삼았던 통킹만 사건, 판문점 사태 이후긴 하지만 아프가니스탄-이라크 전쟁을 비롯한 테러와의 전쟁의 직간접적 원인이던 9.11 테러 등 미국의 전쟁 발생 중 다수는 자국민 희생이었다.

그나마 미국 측이 나무를 자르는 동안, 심지어 한국 특전사 대원들이 초소에 침입해 불을 지르고 온갖 난장판을 만들고 있을 때도 대응은 커녕 초소를 비우고 도망쳤다. 김정일 주도설을 제기했던 신경완의 증언에 의하면, 미군 장교를 죽일 정도로 막나갈 것을 예상하지 못한 상태[25]에서 미군 장교를 둘이나 살해했다는 보고가 상부에 올라가자 김정일을 포함한 수뇌부에서도 난리가 났다고 한다.

김정일은 즉각 철수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미군 장교가 북한군에게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기절초풍한 김일성이 노발대발하면서 이런 짓을 왜 했느냐고 질책했다. 이에 김정일은 "미군의 의식적인 도발이다. 저들이 전쟁을 일으키려고 도발했다."는 뻔뻔한 거짓 보고를 올렸다. 당 비서들은 차마 김정일이 시켰다는 말은 못 하고 인민무력부 놈들이 미쳐서 그랬다고 보고했다. 김일성은 극대노하여 인민무력부장 최현을 불러서 쌍욕을 있는 대로 퍼부었고, 김정일의 죄를 뒤집어 쓴 최현은 역시나 열 받아서 작전국장을 불러서 조지고 책벌했다고 한다. 상기된 대로 미국의 보복 작전이 준비되자, 김일성은 "사람이 죽었으니 유감을 표명하라. 푸에블로호 사건 때도 미국이 사과를 했지 않았는가?"라는 면피성 지시를 내렸다. 다만 북한은 이 사건을 좀 더 정치적으로 써먹고는 싶었는지, 몇 시간 뒤에 스리랑카에서 진행 중이었던 비동맹회의에서 "이 사건은 미국놈들 탓이다."라며 한미 연합군을 질타하는 결의안을 제안했고 결국 승인되었다.

이후 사건의 주동자가 누군지 확실하게 밝혀지자마자 정세는 확실히 북한에 불리하게 돌아섰다. 상술했듯이 기자들이 찍은 사진들이 신문에 실리자마자 가해자는 북한, 피해자는 미국이라는 사실이 명백해진 것. 북한은 긴급하게 수석대표회의를 요청했고, 결국 김일성이 직접 유감 성명을 표했다. 처음 미국은 "유감 성명은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다."라면서 거부했다가 하루 지나서 결국 수락했다.[26] 그리고 북한은 미국이 쳐들어올까 봐 쫄아서 1년 동안이나 준전시 체제를 유지했고, 미군은 일단 폴 버니언 작전 병력들을 철수시켰지만 이후 남북한의 군사력 증강 대결이 일어났다.

이 당시 북한에게는 같은 공산권인 소련과 중국이라는 동맹이 있기는 했으나, 당연하게도 소련과 중국은 북한이 벌인 정신 나간 행위에 전쟁을 벌여줄 의사 따위는 없었다. 하물며 소련과 중국이 미국과 전쟁을 벌인다? 바로 3차 대전 개전이다. 당연히 최소 수백만 명은 희생당할 것이다. 이런 이유로 냉전기에 미국과 소련은 서로 극심하게 대립하기는 했지만, 소련의 베를린 봉쇄 실패와 더불어 양 세력 간의 핵무기 경쟁으로 인해 전면전만큼은 피하기 위해 긴장 수위를 어느 정도 조절했다.[27] 한국 전쟁 때도 소련의 지원은 공공연한 사실이었지만 미국은 모른 체했고, 베트남전에서 미국이 이웃 캄보디아라오스까지 작전을 넓히고 자기 앞마당 남미에서 공산 정권이 들어서자 델타포스까지 동원해서 몰아내도 소련은 침묵했다. 그런데 전시 긴장 상태인 위험한 장소에서 고작 나무 한 그루 때문에 미군, 아니 UN군 장교를 죽이고 전쟁 위기를 불러온 북한의 이 정신 나간 짓거리는 소련과 중화인민공화국을 욕 보인 행위였다. 실제로 소련과 중화인민공화국은 "니들이 잘못한 거 맞잖아? 빨리 사과나 해" 라고 일갈하는 등 냉정하게 반응했다.

미군이 동원한 전력이 고작 12,000명의 지상군 증파만으로는 북한 전역을 점령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북한의 주요 시설을 공중 폭격으로 손보고 휴전선이 조금 더 북쪽으로 올라갈 저력은 됐다. 이에 북한은 총동원령을 내려 대학생들을 군에 동원했으며 노농적위대, 교도대 등의 예비군들도 모조리 동원했다.

심지어 김평일은 이 사건 직후 김일성 종합대학 학생들을 불러 모아놓은 자리에서 전 학생들의 군 입대를 독려했고, 그 자신이 제일 먼저 그 자리에서 인민군 육군에 입대함으로써 군부의 절대적 신임을 얻게 된 계기를 만들었다. 제대한 장교들도 60세 미만은 전부 다 군으로 복귀했고, 생산 시설들을 후방에 옮길 준비가 착수되었다. 또한 평양황해도, 강원도의 최전방지대 주민들의 소개 작업이 시작되었는데, 노약자와 성분 불량 계층을 함경도로 이주시키는 작업이었다. 이 때문에 평양을 비롯한 해당 지역은 완전히 난리통이었다고 한다.[28] 8~11월까지 석 달 동안은 모든 군인들이 군장을 싸놓고 잠을 잤다고 하며, 노동자들도 직장에서 나와 전투 위치로 배치되었고 대학생들도 건장한 사람들은 죄다 인민군에 끌려가서 사실상 휴학 상태에 들어갔다. 너무도 급한 소개 작업 때문에 식량 문제가 심각했고, 자살하는 사람들도 속출했다고 한다.

2.3. 결과[편집]


북한이 혼자 사고 치고 난리를 치든 미국은 나무가 벌목되는 동안 북한이 총알 한 발이라도 도발을 가하면 대대적인 반격을 가할 생각이었기에[29] 북한이 침묵하자 결국 미루나무를 자르는 선에서 작전을 종결 짓고 사태는 마무리 되었다.

판문점 경비초소에는 사건 이전과 같은 애매한 경계 대신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확실한 경계가 세워졌다. 경계 밖에 있던 양측 초소는 모두 철거되고 현재와 같은 상태가 되었다. 벌목된 미루나무의 일부는 JSA 안보견학관에 전시하여 방문객들에게 공개되고 있으며, 미루나무는 완전히 사라지고 대신 그 자리에 미루나무 둥치 둘레 만큼의 둥근 시멘트 위에 희생자들을 위한 추모비가 세워졌다. 판문점 관람 코스에 버스를 타고 추모비 앞을 지나는 것이 포함되어 있으며 버스 안에서 이 추모비를 볼 수 있다.


3. 여담[편집]



  • 이 사건을 이후로 당시만 해도 양측 군인들 간에 개인적인 안부를 물을 정도였던 판문점은 지금처럼 완전히 갈라진 경색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 당시 북한군이 판문점에 들어가려면 돌아오지 않는 다리를 건너야만 했다. 이 사건 이후로 돌아오지 않는 다리로 통행이 불가능해진 북한군은 사건 발생 1주일동안 북한측 판문각 뒤로 우회하는 도로와 다리를 개설해야 했다고 한다.

  • 한국에서는 이 사건을 다룬 두 편의 영화가 있는데, 하나는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이고 다른 하나는 <판문점 미루나무 작전>이라는 영화이다. 두 편 다 이낙훈태현실이 주연을 맡았다.

  • 외국인들에게는 관광 명소가 된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을 담당하는 미 육군 부대 주둔지 이름은 원래 '캠프 키티호크'였으나, 이 사건 중에 살해 당한 아서 보니파스 대위의 이름을 따서 '캠프 보니파스'로 이름이 바뀌었다.

  • 사건의 원흉인 박철 중위는[30] 처벌은커녕 사건 이후에도 판문점에서 행패를 부렸다. 다만 8년 후 판문점에서 소련 관광객이 남측으로 귀순하는 사건이 발생했을 때 경비병력 간의 총격전 뒤 다시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공식적인 증거는 없으나 당시 미군에게 사살된 북한군 중에 박철 중위가 있었다는 이야기도 나돌았는데, 2018년 7월 8일자 이제 만나러 갑니다 방영분에서 사건 당시 근무 중이던 하사의 증언을 통해 박철 대위의 사살이 진실임이 확인되었다.

  • 북한은 이후로 미국에게 직접적으로 시비를 걸거나 감히 무력도발을 하지 못했다. 방송이나 성명서는 미 제국주의자를 맹비난하지만 진짜로 건드리는 경우는 사실상 없다. 미국을 건드렸다가 진짜로 지도에서 나라가 지워질 뻔했던 경험은 북한이 자기 주제를 깨닫기에 충분했다. 시간이 흘러 미국 본토가 진짜로 공격 당한 9.11 테러 때는 환영 성명이나 미국을 향한 비난 성명이 아니라 국제 테러리즘을 맹비난하면서 자기들이 주체가 아님을 보여주며 눈치를 살폈고,[31] 보스턴 마라톤 폭탄 테러 때도 테러를 비난하면서 자신들의 무고함을 드러냈다.

  • 대외적으로는 그랬지만, 북한 내부에서는 이 사건이 인민군의 영웅적 행위로 칭송되며 관련자들이 영웅 대접을 받고 있는 모양이다. 북한에서 제작된 다큐멘터리에서는 이 사건이 북한 내에서 어떻게 선전되고 있는가가 여실히 드러난다.

  • 존 에버라드의 '영국 외교관: 평양에서 보낸 900일'을 보면 북한에서 이 사건에 사용한 도끼를 박물관에 전시 중이라고 한다.

  • 일부 종북주의자들은 사건 현장의 사진이 남았다는 것은 미국측에서 자신들을 계획적으로 도발, 음모를 꾸미기 위해 미리 기자들을 대기시킨 것이 아니냐고 주장하며 물의를 빚곤 했다. 대표적인 것이 야후 코리아가 있던 시절 모 재미교포 블로거가 그런 시리즈물까지 올려가며 허황된 소리를 했던 사건.

  • 한 외국인이 이 사건을 각색한 유튜브 애니메이션 영상을 제작했다. #


4. 둘러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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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섭군 자살사건 · 경주고도개발 10개년 계획 확정 · 7.4 남북 공동 성명 · 통일미 개발 · 8.3 사채 동결 조치 · 제1차 남북 적십자 회담 · 10월 유신 · 울산석유화학단지 준공 · 제3차 국민투표 · 통일주체국민회의 발족 · 제7차 개헌 · 서울시민회관 화재 사고
대한민국 제4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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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학공업화 선언 · 치산녹화 10개년 계획 추진 · 남서울아파트 분양 · 장발 및 미니스커트 단속 · 승압사업 개시 · 제9대 국회의원 선거 · KBS 설립 · 베트남 전쟁 종전 · 유신정우회 창립 · 윤필용 사건 · 남산 부활절 연합예배 사건 · 서울어린이대공원 개장 · 1973 서울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 · 화전민정리 5개년 계획 수립 · 포항종합제철소 준공 · 대덕연구단지 착공 · 불국사 복원공사 준공 ·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시행령 제정 · 김대중 납치 사건 · 소양강댐 준공 · 제1차 오일쇼크 · 최종길 교수 의문사 사건 · 태백선 고한-황지 구간 개통(완공) · 호남고속도로 전주-순천 구간, 담양지선 개통(완공) · 남해고속도로 개통 · 친아랍 성명 4개 조항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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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 백지계획 발표 · 박흥숙 살인사건 · 월성 원자력 발전소 기공 · 고리 원자력 발전소 1호기 가동 · 의료보험 시행 · 부가가치세 시행 · 남해화학 여수공장 완공 · 반국가행위자의 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법 제정 · 구마고속도로 개통 · 이리역 폭발사고
1978년
한미연합사령부 발족 · 대한항공 902편 격추 사건 · 여천석유화학단지 준공 ·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특혜분양 사건 · 제9대 대통령 선거 · 8.8 조치 시행 · 백곰 미사일 발사 성공 · 자연보호헌장 선포 · 안동교구 가톨릭농민회 사건 · 제10대 국회의원 선거
1979년
서울 지하철 2호선 착공 · 정부 제2청사 착공 · 보문관광단지 개장 · 고리 원자력 발전소 3.4호기 착공 · 2차 오일 쇼크 · YH 사건 · 성수대교 개통 · 김영삼 총재 의원직 제명 파동 · 김형욱 실종 사건 · 부마항쟁 · 삽교천방조제 준공 · 10.26 사태 · 최규하 권한대행 체제 · 서울의 봄 · YWCA 위장결혼식 사건 · 12.12 군사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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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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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공동경비구역 이전에는 선이 없었지만 사건 이후 콘크리트로 설치했다[2] 유엔군 장교[3] 미국인, 한국인 각각 4명[4] 왼쪽 위 흰 헬멧을 쓴 사람이 도끼로 공격당한 배럿 중위, 트럭 앞에 쓰러져 발만 보이는 사람이 보니파스 대위. 배럿 중위는 공격당한 지 한시간 반이 지나서 발견되었으며, 당시 살아있었지만 후송중 사망하였다.[5] 한국 측이 과거에 사용하던 명칭. 현재는 거의 쓰이지 않는다.[6] 북한 측의 명칭이라고 알려져 있는 경우가 있었지만 사실이 아니다. 오히려 한국 내의 일부 보도 자료에서 사용된 용어다. '만행'이라는 말이 감정이 개입되어 있고 두리뭉실한 표현이라는 이유로 한국어 위키백과에서도 한때 이 용어를 표제어로 사용한 적이 있다.[7] 북한 측 명칭. 조선대백과사전에 이 명칭으로 수록되어 있다. '8.18 사건'이라고도 한다.[8] 한미연합군사령부는 2년 뒤인 1978년에 창설되어 주한UN군사령관이 연합사령관을 겸임하게 된다.[9] 본명은 홍성문으로 평소 군화에 쇠징을 박고 다닐 정도로 괴짜였고, 행실이 워낙 개차반이라서 한국군에서는 미친개, 미군에서는 BULLDOG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1년 전 헨더슨 소령 사건을 주도한 전력도 있었다.[10] 1922~1998. 1980년대에 3국을 통해 탈북했으며, 북한 정부의 보복을 피하기 위해 서용규, 신경완, 신평길 등의 가명과 필명을 썼다.[11] 실제로 현장에 한국인 노무자 5명이 있었지만 단 한 명도 부상당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신빙성이 크다.[12] 심지어 상대는 미국이다. 자국 민간인에 대한 공격도 가만히 보지 않는 미군이 아군병사가 죄없이 살해당했는데, 가만히 있을리가 없다. 장교라면 더더욱[13] 훈련(연습) 용어로는 '라운드 하우스'라고 불리며, 영내에 있는 모든 물자를 방치품/적재품/파기품으로 분류하고 "당장이라도 막사 뺄 준비하고 기다리는 것" 을 말한다.[14] 북미의 벌목꾼들 사이에 전해지는 설화에 등장하는 거인 나무꾼이다.[15] 당시 제7함대는 제2차 세계 대전, 특히 태평양 전쟁기의 제7함대(당시는 제7함대라는 이름 대신 태평양 함대로 불렸고 그 산하에 제7함대가 번호함대로 편성되는 형태였다.)와 달리 미국에서 약체라고 불렸다. 이 당시나 지금이나 7함대를 총동원하면 어지간한 국가 하나는 단독으로 갈아버릴 수 있을 수준이다.[16] 전술 폭격기 F-111 및 전략 폭격기 B-52.[17] 기지방호 용어로는 'Fast Pace(천막을 도는 속도를 높임)'라 불린다. 부대 편제 인원이 100% 충원되며 실탄이 지급된다. 데프콘 2가 발령된 것은 이 때가 처음이고, 1994년에 김일성 사망으로 1회 추가 발령된 이후에는 발령이 되지 않고 있다.[18] 5개 팀, 1개 지역대 규모이다.[19] M16 소총은 샌드백에 넣어 가져갔는데, 미군이 물어보면 방호벽으로 둘러댔다.[20] 당시 특전사 지휘관의 인터뷰에 의하면, 박 대통령은 북한군이 30m만 접근해도 발포하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정병주 특전사령관이 30m를 100m로 고쳤다고 한다.[21] 초소를 난장판으로 만들 때, 초소 안의 김일성 초상화를 깨부수고 커튼 등을 약탈했으며, 북쪽을 향해 오줌발까지 갈겼다고 한다.[22] 1공수 백모씨의 증언이다. 1987년 청취되었다.[23] 한편 이 사건 전까지 박정희 정권과 미국의 사이가 소원해져 주한미군 축소 움직임이 있었기 때문에, 국지전을 발발시켜 주한미군을 붙들어놓기 위해 박정희 정권이 결사대 작전을 지시했다는 분석도 있다. 더불어 베트남 전쟁 이후 전반적인 반전 움직임과 더불어 미국이 묵인했던 독재 세력들을 차근차근 정리해나가는 시기이도 했기에, 이는 박정희에게는 충분한 위협으로 받아들여져 무리수를 두었다는 평도 존재한다.[24] 이 일로 김종헌 소령은 군법회의에 회부되었으나 흐지부지되며 무죄 판결을 받았다.[25]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본때를 보여주되 총기는 일체 사용하지 말 것!"이라고 말한 것처럼 김정일은 사살이 아닌 단순히 미군을 도발, 어느 정도 구타하여 자신의 권력 장악과 체제 선전에 이용하려 한 것이다. 이 사건이 있기 얼마 전에 일어났던 헨더슨 소령 사건이 대표적인 사례다. 또한 푸에블로호 사건처럼 미국이 국제 정세상 힘들 때 대충 북한을 인정해 주면서 타협하려고 하는 등의 모습도 보였으므로, 김정일도 이 기회에 후계자를 확고히 하고 당 내부에서는 지지도를 얻으며 크게는 체제 선전을 통해 정치 권력을 확고히 하려고 했을 것이다. 총기 대신 도끼로 저런 미친짓을 할거라고는 감히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26] 이는 아직까지 소련이 건재한 상황에서 정말로 끝까지 나간다면 3차 세계대전이 터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소련은 북한을 내다버린 자식 취급하고 있었지만 미국이 보기에는 엄연히 공산국가를 자처하는 이상 소련은 공산국가의 수장으로서 북한을 지원할 것이 뻔했고, 미국은 베트남전의 패배로 인해 아직까지 반전 여론이 강한 상황이었다. 만일 워터게이트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유감 성명을 받아들였던 제럴드 포드와 다르게 닉슨 독트린을 깨버린 채 푸에블로호 복수를 천명하였을 테고, 북한은 지구상에서 사라졌을 것이다.[27] 이러한 외적 요인도 있지만 때마침 미국, 소련, 중국 3국 모두 각자 전쟁을 피하려 했던 내적 요인도 있었다. 미국은 베트남전이 패배로 끝난 지 채 1년이 지나지 않은 상황이라 반전 여론이 거셌기에 전쟁 운운했다가는 그야말로 여론의 뭇매를 맞을 상황이었다. 소련의 경우에는 이미 소련의 말을 지지리도 안 듣는 김일성 때문에 북한에 대해 반쯤 손을 놓은 상태였으며, 이 시기 동유럽에서 한창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고 있었기에 그걸 탄압하는 동유럽 군부 정권들을 지원해주고 있는 상황이었다. 중국의 경우는 문화대혁명 끝무렵이긴 했으나 이미 나라는 개판이 되어 있었고, 자기들 마음에 안 들면 다 때려부수는 홍위병들의 병크로 인해 전쟁은 커녕 당장 내부 정리에도 급급해서 북한을 지원할 여유가 없었다.[28] 소개 작업은 김정일의 지시로 국가정치보위부가 주도했으며, 평양에 주민소개 지도위원회가 설치되어 장성택이 모든 작업을 실질적으로 지휘했다고 한다. 8월 말부터 11월 중순에 걸쳐서 20만 명의 주민들이 이주되었고 황해도, 강원도에서 8천 세대의 성분 불량자와 노약자들이 '솎아졌다.' 작업은 은밀하고도 강압적이기 그지없었는데, 보위부원들이 소개장을 전달하며 정해진 시간까지 짐을 싸라고 지시한 후, 옆집도 모르게 온 식구를 실어 날라버렸다고...[29] 계획에 의하면 연백평야를 점령할 생각이었다고 한다. 북한 전체가 타겟이 아닌 것은 당연히 소련과 중국 때문.[30] 실제 이름은 홍성문. 후에 공화국 영웅 칭호까지 받았다.[31] 9.11 테러가 일어나기 전 김정일은 비동맹회의 의미가 없어지자 미국과 일본 등 자유진영 상대로 저팔계 외교를 시행하였고, 적들에게 바지를 벗어주는 행동을 일체 하지 말 것을 지시하였다. 이는 북한답지 않은 현명한 행동이었는데, 전 세계가 벌벌 떨 동안에 세상물정 모르고 미국보고 천벌을 받았다고 깝죽거리던 이라크사담 후세인은 즉각 테러의 배후로 몰려 자신이 다스리던 나라와 집안 가족들은 풍비박산나고 본인은 교수대 위에서 비참히 죽어야 했다. 즉 북한이 여기서 어그로를 끌었다면 즉각 테러 지원국, 또는 평화의 적으로 몰려 진작에 사라졌을 수도 있었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