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 청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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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LG그룹 | LG스포츠 | MBC 청룡 | LG 트윈스 | LG 트윈스 2군
주요 인물
구단주 구광모 | 대표이사 김인석 | 단장 차명석 | 감독 염경엽 | 주장 오지환
경기장
1군 서울종합운동장 야구장 | 2군 LG 챔피언스 파크
이전 동대문야구장 · 구리 LG 챔피언스 파크
우승
파일:KBO 한국시리즈 트로피.svg 파일:KBO 한국시리즈 트로피.svg 파일:KBO 한국시리즈 트로피.svg
1990 | 1994 | 2023
역사 정보
구단 역사 | 트레이드 | 1990년 한국시리즈 | 1994년 한국시리즈 | 1997년 한국시리즈 | 1998년 한국시리즈 | 2002년 한국시리즈 | 2023년 한국시리즈 | 역대 감독 | 사건·사고 | 암흑기(453566, 6668587667)
주요 정보
팀 특징 | 선수단 | 등번호 | 유니폼 | 팀 응원가 | 응원단장 | 엘튜브 | 치어리더 | 제휴카드
지역 연고
경기고등학교 | 경동고등학교 | 덕수고등학교 | 배명고등학교 | 배재고등학교 | 서울고등학교 |
서울디자인고등학교 | 선린인터넷고등학교 | 성남고등학교 | 신일고등학교 | 장충고등학교 |
중앙고등학교 | 청원고등학교 | 충암고등학교 | 휘문고등학교 | 제주고등학교
역대 시즌
역대 시즌
현재 시즌
LG 트윈스/2024년
영구 결번
9 이병규 33 박용택 41 김용수
팬덤 정보
LG 트윈스 갤러리 | I love Twins | 유광잠바
라이벌전
잠실시리즈 | 엘꼴라시코 | 엘키라시코
기타
방화신기 | 간채골 | 보루갈 | 빅5 | 사랑해요 LG | 엘롯기 | 엘넥한 | 엘롯한 | 헬로키티 | 탈쥐효과 | 추격쥐 | 쥐평 | 엘나쌩 · 엘상바 클럽 | 아워게임 : LG트윈스 | 이 팀은 솔직히 | 메가트윈스포 | 용택아 나는 무서운 진실을 깨닫고 말았다
파일:LG 트윈스 워드마크.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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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MBC 청룡 엠블럼.svg
MBC 청룡
MBC Chungyong
창단
1982년 1월 26일[1]
매각
1990년 1월 18일[2]
모기업
문화방송
연고지
서울특별시 (1982~1989)[3]
홈구장 변천
동대문야구장 (1982[4], 1988[5], 1989[6])
서울종합운동장 야구장 (1982~1989)[7]
구단명 변천
MBC 청룡 (1982~1989)
LG 트윈스 (1990~ )

1. 개요
2. 홈구장
3. 구단 디자인
3.1. 엠블럼
3.2. 심볼
4. 역사
4.1. 역대 프런트
4.1.1. 구단 담당 이사
4.1.2. 사장
4.1.3. 단장
4.2. 유명 선수
4.3. 역대 시즌
4.4. 기타
4.5. 유니폼
5. 마스코트
6. 역대 성적



1. 개요[편집]


MBC 청룡 - LG 트윈스 프랜차이즈 역사
한국프로야구 출범

MBC 청룡
(1982~1989)

LG 트윈스
(럭키금성그룹 인수)

1982년 서울특별시를 연고지로 삼아서 창단한 한국프로야구의 원년 구단. 1990년 럭키금성그룹이 인수해 오늘날의 LG 트윈스가 됐다. 1982년 3월 27일 서울운동장 야구장에서 열린 삼성과의 개막전을 승리로 장식하면서 한국프로야구 1호 승리 구단이라는 영광의 타이틀을 안고 있다.

모기업은 당시 전국으로 방송을 송출하던 유이한 지상파 방송사[8] 문화방송으로 방송사 주도의 프로구단이라는 의의가 있다.[9] 또한 한국프로야구 출범을 주도한 팀이기도 하다.[10] 팀의 상징색은 파란색, 보조색은 노란색이다.

대한민국 4대 프로 스포츠 중 유일하게 리그 창설 당시부터 서울특별시를 연고로 창단한 구단이다.[11] 축구, 농구, 배구는 리그 창설 당시 서울 연고팀이 없었고 리그가 어느 정도 정착한 이후 서울 연고 신생 구단을 창단하거나 타 지역에서 서울로 연고지 이전을 단행하도록 했다.[12]

1982년부터 1984년까지 서울특별시를 단독 연고지로 썼던 유일한 야구단이다. 참고로 현재 4대 프로 스포츠의 남자 구단 중 서울을 단독 연고지로 삼는 구단은 서울 우리카드 우리WON이 유일하다.[13]


2. 홈구장[편집]


창단 초기에는 동대문야구장을 임시 홈구장으로 사용하다가 세계야구선수권대회가 끝난 후인 1982년 9월부터 잠실야구장에서 경기를 하게 되었다. 정확히는 세계선수권대회 준비 때문에 동대문을 임시 홈구장으로 사용한 것이다. 이는 삼미 슈퍼스타즈인천 야구장을 쓰지 못하고 제2 홈구장이던 춘천 야구장 등 전국을 순회하며 홈경기을 치른 것과 같은 이유이다. 당시 세계선수권대회의 경기장은 잠실, 동대문, 숭의 야구장이었다.


3. 구단 디자인[편집]



3.1. 엠블럼[편집]


파일:MBC 청룡 엠블럼(1982-1985).gif
파일:MBC 청룡 엠블럼.svg
1982~1985
1986~1989

좌측의 엠블럼은 1982년 출범 당시 디자인이며 보도국 소속 디자이너이던 권혁준[14]이 제작했다. 1986년에 우측과 같은 청룡 문양 형태의 엠블렘으로 변경되었다. 폰트 역시 1986년 MBC CI 변경에 맞춰 이른바 문화방송체로 변경되었으며 이 서체는 당시 유니폼의 선수들 이름에까지 사용된다.[15]


3.2. 심볼[편집]


파일:MBC 청룡 심볼(1982~1985).svg
파일:MBC 청룡 심볼.svg
1982~1985
1986~1989


4. 역사[편집]


초대 감독은 백인천인데, 원래는 MBC 라디오 <홈런출발>, TV 아침프로 <김동엽과 함께> 진행자로 MBC와 인연이 깊었던 김동엽이 감독으로 유력했었다. 하지만 정작 김동엽 감독을 데려간 것은 해태였다.[16] 김영덕 감독도 고려 대상이였으나 OB가 먼저 영입해 갔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박현식, 배성서 등의 이름이 거론되었지만 일본에서 돌아온 백인천으로 정리가 되었다. MBC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5,600만원의 거액을 주고[17] 영입하며 팀 창단 채비를 마쳤다. 프로야구 원년에 한국 야구 역사상 전무후무한 '선수 겸 감독'으로 활동했다.[18] 또한 백인천은 1989시즌이 끝난 후 다시 MBC의 감독으로 선출되었고, MBC 청룡을 인수해 창단된 LG 트윈스의 초대 감독이 되었다. 즉, MBC 청룡의 처음과 마지막 감독이라는 소리.[19]

1981년 12월에 열린 연고지 선수 대상 드래프트에서 28명의 선수와 1982년 2월 13일에 열린 2차 드래프트에서 대구상고를 졸업하고 한국화장품을 거친 내야수 조호와 광주 숭의실고를 졸업하고 실업야구 홍익회에서 뛰던 투수 박석채를 뽑았다. 이렇게 합쳐 총 30명의 선수와 입단교섭에 나섰지만 그들이 모두 MBC 청룡의 멤버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들 중 4명 유대성, 이원녕, 유제룡, 김중근와는 계약에 이르지 못했고 김정호는 입단에 합의했지만 창단식 직전에 이탈하고 말았다.

창단 멤버(23명)
투수
이길환 이광권 차준섭 유종겸 김시철 정순명 하기룡 박석채
포수
최정기 유승안 김용운 신언호
내야수
김인식 김용달 정영기 김용윤 박재천 조호
외야수
이종도[[주장|

C
]] 송영운 김봉기 배수희 최정우

프로야구 원년에는 화려한 멤버를 앞세운 강력한 우승후보였다. 프로야구 공식 개막전이 MBC 청룡 대 삼성 라이온즈였던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두 팀이 시즌 전 가장 강력한 우승후보였기에 그런 대진을 짠 것[20]. 이 개막전에서 이종도의 끝내기 만루홈런이 나오면서 한국프로야구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다들 알다시피 이 해 청룡은 우승에 실패한다. 전국에서 가장 많은 고교팀을 보유한 서울 지역을 연고로 둔만큼 최고의 선수들로 팀을 꾸릴 수 있었으나 실제 MBC는 프로 원년 46승 34패로 전체 3위에 머물렸다.

그 이유는 창단 당시 MBC의 코칭스태프는 물론 선수단 구성에도 문제가 있었는데 나이가 갓 40줄이 된 백인천을 감독으로 선임하다 보니 그보다 나이가 위인 인사를 코치로 데려오기가 어려웠던 터라 동년배인 이재환, 유백만 코치를 데려왔는데 이들은 시즌 내내 매사에 불협화음을 빚었다. 이재환은 경동고 시절 백인천과 배터리로서 호흡을 맞췄던 투수 출신이고 유백만은 부산상고로 학교는 달랐지만 동기생으로 실업야구 시절 노히트노런을 네 차례나 기록했던 명투수였다. 게다가 두 코치는 모두 투수 출신이며, 야수 출신인 백인천 감독이 선수로도 뛰는 점을 감안하면 야수 출신코치를 선임하지 못한 비효율적인 코칭스태프 구성이었다. 결국 MBC는 후기리그가 이어지던 7월 12일 충암고 감독 출신의 한동화를 수비 코치로 영입해 보강할 수 밖에 없었다. 수비전문가였던 한동화의 합류 이후 내야진의 조직력이 원활해지기 시작했고, 백업 플레이 실수 등에서 비롯되는 어이없는 실책들이 눈에 띄게 줄어들기 시작했다.

선수단 구성도 마찬가지였다. 서울 지역 선수들을 대상으로 한 드래프트에서 그해 세계선수권으로 팀 합류가 불가능한 김재박이해창을 지명한 것이다. 그러자 서울지역 지명권을 공동으로 행사한 OB는 재빠르게 박철순을 지명했고 이는 OB 우승의 결정적인 원동력이 되었다. 이로 인해 MBC는 하기룡과 이길환, 이광권이 마운드의 주축을 이뤘지만 확실한 에이스가 없다는 뚜렷한 약점을 가지게 되었다.

청룡의 선수진이 크게 빈약했던 것은 아니였지만 최소한 첫해만큼은 고전을 면하기 어려운 면면이기도 했다. 당장 첫해에 쓸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지명했던 당시 한국야구 최고의 슈퍼스타 김재박, 이해창은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투수를 좀더 보강하지 못했던 점과 지나치게 편중된 포지션 배분은 아쉬운 대목이였다. 특히 포수 출신 선수들이 유별나게 많았다는 점과 마땅한 2루수 요원이 없었다는 점은 심각한 문제였다. 창단멤버 23명 중 유승안, 김용운, 최정기, 신언호, 이종도까지 5명의 선수가 포수로서 국가대표를 지내거나 실업팀의 주전선수로 뛰던 이들이었다. 하지만 한 해 80경기를 치르던 그 해 주전급 포수가 두 명 이상 필요할 리는 없었다. 결국 조호와 박재천을 번갈아 기용했던 초반 15경기에서 무려 15개의 실책이 양산됐던 2루수 자리의 큰 구멍은 4월 말에 성무(공군)에서 전역하고 곧바로 입단한 이광은이 5월 2일부터 출전해 3루수를 맡고 3루에 있던 김인식이 2루로 옮기면서 비로소 메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포수들 중에는 유승안과 김용운이 일단 주전으로서 번갈아 경기에 나서는 한편 신언호와 이종도가 외야로 나가는 교통정리가 단행됐고 그중에서도 신언호가 외야의 어느지점에서든 홈까지 일직선으로 연결되는 엄청난 강견으로 센세이션을 불려 일으키긴 했다. 하지만 수비범위와 타구 판단 등 모든 면에서 안정감이 떨어졌던 외야진의 수비능력은 MBC 청룡의 숨겨진 아킬레스건이었다.

설상가상으로 백인천 감독과 MBC 구단 프런트와의 관계도 원만하지 못했다. 일본에서 프로야구를 먼저 경험하고 온 백인천 감독은 자신의 노하우를 최대한 구단에 전해주려고 했지만 이는 받아들여지기보다 충돌만 낳았다.

1983년엔 전년도 국제대회 때문에 합류하지 못했던 김재박[21]과 이해창이 팀에 합류하면서 MBC의 내외야는 더욱 짜임새 있는 구성을 갖추게 되었다. 포수로는 롯데에서 트레이드로 영입한 차동렬[22]과 신인 박철영이 합류했다. 투수쪽에서는 신인 오영일의 가세로 하기룡 이길환과 함께 10승 투수 3인방을 구성 할 수 있었다. 거기다 미국 마이너리그와 멕시코 리그에서 활약했던 이원국의 영입은 엄청난 사건이었다.

하지만 백인천 감독이 구단과의 계약 문제를 둘려 싼 이견과 사생활 문제로[23] 인해 중도 퇴진하고 이후 한동안 유백만 코치의 대행 체제로 운영하다 결국 전기리그 막바지 김동엽 감독을 사령탑에 선임한다고 발표했다. 백인천 감독은 후기리그 들어 삼미 슈퍼스타즈에 트레이드 되었다. 후기 들어 코칭스태프가 안정되면서 급격한 상승세를 보였고 추운 날씨에 적응을 실패하여 부진한 이원국 대신 하기룡, 오영일, 이길환, 유종겸, 이광권 등 다섯명의 국내파 선수가 고르게 100이닝 이상 씩 분담하며 아낀 체력을 바탕으로 8월 31일에는 처음 단독선두로 나서게 된다. 그리고 우승경쟁 상대였던 삼미와 해태에게 승리를 거두면서 결국 30승 1무 19패로 후기리그 1위를 차지하며 그 해 한국시리즈에 진출하였다. 하지만 선수들이 리그 우승 보너스 문제로 불만을 가져 거의 태업하다시피하며 패퇴한다.

1983년 11월 5일 한국시리즈 졸전의 책임을 물어 김동엽 감독을 해임한 MBC 청룡은 동아대 감독으로 있던 어우홍 감독을 후임 3대 감독으로 선임했다. 1984년 개막 직후 5경기에서 4승 1패로 순항했으나 4월 중순부터 그 달 말까지 12경기에서는 무려 1승 11패로 고꾸라지는가 하면 5월과 6윌 사이에는 다시 20승 11패로 솟구쳐 오르는 롤러코스터식 흐름이 반복됐다. 급등락하는 성적 앞에서 의연한 대응을 하지 못했다는 점이 문제였다. 에이스 하기룡을 5월에만 선발과 구원 가리지 않고 9번이나 투입하는가 하면 사실상 6월에 접어들면서 전기리그 우승의 가능성이 희박해졌음에도 불구하고 다승왕 욕심에 이틀 간격으로 구원승과 완투승을 반복하는 무리를 방치한것이 특히 아쉬웠다. 그 결과 하기룡은 전기리그에서는 10승을 수확하며 다승 선두로 기세를 올렸지만 후기리그 들어 방전된 그는 급격히 페이스가 떨어지며 5승 만을 추가하는데 그쳤고 특히 롯데, OB와 치열한 선두다툼을 벌이던 8월 중순에는 단 1승도 추가하지 못하며 오히려 팀 연패를 이어가는 고리 역할을 하고 말았다.

이듬해인 1985년에도 양상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시즌 초반 에이스 역할을 하던 하기룡이 4월 말부터 좀처럼 승수를 쌓지 못하고 경기초반 무너지기 반복했고 하기룡과 더불어 청룡 마운드의 양대 기둥이었던 오영일 마저 1승과 1패를 반복하며 전혀 필승의 확신을 주지 못했지만 끝내 별다른 대책을 마련하지 못했다. 그해 전기리그 내내 화제의 중심이었던 18연패의 기록을 세운 삼미에게 청룡은 그 연패를 끊는 완봉승을 헌납해가며[24] 5위에 머물고 말았다. 결국 MBC 청룡은 6월 17일 어우홍 감독을 해임하고 전임자인 김동엽 감독을 다시 불러들이는 조치를 내놓았다. 김동엽 감독은 부임하자마자 선수단 전원을 합숙시키며 또 한번 후기리그 둘풍을 꿈꾸었지만 이번에는 여의치 않았다. 1985년에 청룡은 전기리그 5위에 이어 후기리그 6위로 추락하며, 처음으로 시즌 최하위를 기록했다. 그나마 전기리그에서 삼미가 3할에도 미치지 못하는 승률을 기록해준 덕분에 1년 기준으로 최저승률팀의 수모를 면할 수 있었다.

1985년부터 서울을 공동연고지로 가지고 있던 MBC 청룡과 OB 베어스가 지명권 분할이 이루어졌다. 1986년은 1983년부터 시행한 연고지 출신 선수들에 대한 무제한 지명권은 폐지되었지만 10명까지는 보장을 받고 있었기에 실제로 별 차이는 없었다. 신인 지명행사에서 MBC 청룡은 김건우김태원을 선택했다. 그 뒤로 국가대표 포수 서효인, 내야수 민경삼, 투수 이재홍과 이바오로, 외야수 이경재까지 모두 일곱 명을 지명했다.

타자에서 투수로 전향한 신인왕 김건우가 18승을 올렸고 9구원승, 26세이브를 기록한 구원왕 김용수를 앞세운 황금계투와 이광은, 김상훈이 버티던 타선의 조화를 앞세워 포스트시즌에 진출할 뻔했으나 실패했다. 두명의 투수를 제외하면 4년차 오영일이 12승, 원년멤버 유종겸이 10승으로 그나마 제 몫을 해주었을 뿐 에이스 하기룡이 6승으로 부진했고 차세대 에이스로 큰 기대를 모았던 김태원이 2승으로 부진했던 것이 아쉬웠다. 게다가 부지런히 뛰며 메우긴 했지만 7개 구단 중 가장 팀 홈런이 적었기 때문에(33개)[25] 짧은 방망이가 결정적인 고비마다 분위기를 반전 시키는 힘이 부족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전기리그에서 4위에 그쳤던 청룡은 후기리그에서 해태-OB와 치열한 선두경쟁을 했지만 결국 최종전 결과로 인해 아쉽게 3위로 포스트시즌에 나가지 못했다.[26] 여담으로 1986년의 팀 승률은 청보-빙그레로 인한 극심한 승률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0.590인데 MBC 청룡 역대 최고승률이다.

김정수의 교통사고 사망과 함께 시작했던 1987년 전기리그는 개막 5연패와 함께 시작하며 삐걱거렸다. 플레잉코치를 맡은 김재박은 수비가 흔들렸고, 지난해 에이스 김건우는 소포모어 징크스를 맞았다. 정삼흠이 분전했으나 운이 따르지 않았으며 김용수와 유종겸은 팀을 이탈해있을 때가 많았다. 하기룡과 이광권은 사실상 전력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결국 빙그레에도 밀리며 6위까지 내려왔다가 겨우 5위로 마쳤다. 결국 올스타전 직후 김동엽 감독은 선수단 투표와 함께 청룡에서만 2번째 경질을 당했고, 유백만 2군 코치가 감독을 맡았다. 하지만 실질적인 권한은 일본에서 온 투수코치였던 미즈타니 히사노부였다. 후기리그에서 김건우와 김용수가 폼을 되찾고 부활하며 팀은 한창 치열한 2위 경쟁을 하는 가운데 김건우가 교통사고로 중상을 당하면서 팀은 에이스를 잃게 되고 결국 시즌 막바지 해태와 롯데에 추월당해 후기 4위로 가을야구에 실패했다.

결국 김건우의 부상과 주축 선수들의 노쇠화와 겹쳐 1988년과 1989년 하위권으로 추락했다. 1988년에는 이용철이 신인왕, 김상훈이 타격왕에 올랐으나 전기 태평양에도 밀린 꼴찌, 후기 OB와 공동 5위로 팀 역사상 처음으로 승률 4할에 미달하여 종합 6위에 그쳤다. 전후기리그가 사라지고 단일리그가 된 1989년에는 전반기까지는 가을야구가 주어지는 4위 경쟁을 하다 후반기 11연패를 당하며 꼴찌까지 떨어진 끝에 막판 8연승으로 롯데를 반 게임차로 겨우 앞서 꼴찌를 모면했다.

1983년 준우승 이후 가을야구는 커녕 바닥과 가까운 성적을 꾸준히 지속한 탓에 야구단 운영에 대한 브랜드 홍보 효과가 떨어지면서[27] 매각 순위 1순위가 되었다. 1989년 시즌 종료 직후부터 MBC가 야구단을 포기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가장 먼저 움직인 기업은 럭키금성그룹이었다. 당시 럭키금성을 이끌던 구자경 회장은 프로야구에 참여하지 못한 것을 엄청난 한으로 삼았고[28] 1984년부터 KBO가 신규 구단 창단을 추진할 때면 줄기차게 리그 참가 의사를 내비쳤다. 결국 1989년 12월 중순부터 매각 협상을 본격화했고 1990년 1월 18일에 매각대금 총액 130억원의 조건으로[29] 매각됐다. 매각 조인식이 보도된 당시 MBC 뉴스데스크 기사 영상. 이 과정에서 계열사 럭키금성스포츠 측은 야구단 운영권만 넘겨받았고 MBC 청룡은 존속법인으로 1993년 6월까지 유지되다가 MBC 아카데미에 흡수되었다.

수도 서울을 연고로 하는 프로야구 인기 구단이었고 경기 호황 시대에 맞춰 급격한 수익을 얻고 있던 전국 단위 TV 방송국을 모기업으로 뒀으며 매주 꾸준히 팀 경기가 전국에 생중계된다는 메리트가 있었지만 청룡 구단 운영의 실체는 개판 중의 개판이었다. 우선 KBO 규약에 프로야구팀은 '자본금 2억 이상의 상법상의 주식회사'여야 한다는 규약이 있었는데, 다른 5개 팀은 이미 창단년도인 1982년에 맞춰 주식회사로 전환시킨 상태였지만 MBC 혼자만 1985년까지 밍기적 대다 겨우 독립법인화 되었다.

애초에 MBC 청룡은 3S 정책으로 대표되는 프로야구 출범에 맞춰 방송사가 참가해야 프로야구가 활성화된다는 이해관계를 통해 창단된 팀[30]이라는 한계가 있었던 데다가 MBC는 공식적으로 딱히 누구의 소유권이 있는 기업[31]이 아니었기 때문에 감독은 '사장'이 모셔온 전문가라는 인식도 못 받았던 데다 그냥 '특정 부서의 長' 정도로만 여겨지는 바람에[32] 야구 좀 본다 싶은 사람들이 개나 소나 다 운영에 대해 태클을 걸었다고 한다.

야구에 대해서 아는 점이 없는 MBC의 고위 임원들이 툭하면 구단 운영에 간섭하는 바람에 이때 당시 몇 가지 웃지 못할 에피소드가 발생하기도 했다. 고위 임원 A는 청룡 코치진에게 "왜 선발투수9이닝을 다 던져야 하느냐?[33] 투수 1명이 1이닝씩 담당하면 되지 않느냐?"고 묻는 일이 있는가 하면 또 다른 임원 B는 "야구장 외야가 그렇게 넓은데 그 빈 공간으로 공을 보내는 연습을 하면 되지 않느냐"는 얘기도 있었다고 한다. 아울러 나무 배트가 부러지거나 공을 더는 못 쓰게 될 상황이어서 새 장비 구입을 위해 예산을 청구해야 할 때는 "공놀이 하나 하는데 무슨 돈이 그렇게 많이 들어가느냐", "공은 한 박스만 쓰고 부족하면 그때 얘기해라", "어차피 또 부러지고 터질 방망이와 공이라면 그냥 수리해서 쓰면 되는 것 아니냐?"라고 지적을 하는 일도 있었다. 또 따뜻한 지역에서 전지훈련을 해야 할 상황이라 상대적으로 겨울 기후가 따뜻한 강원도 강릉시에 가려고 했는데 "뭐하러 그 먼 곳까지 가서 훈련을 하느냐? 그냥 맨날 쓰는 건국대 야구장에서 훈련하면 되는 것 아니냐?"고 반문을 하기도 했다.

특히나 1981년까지 문화방송 사장이었던 친정부 인사 이진희가 프로야구 창설을 주도했고, 직접 MBC 청룡의 구단주로서 KBO의 총재직까지 겸임할 생각까지 했다는 증언이 있을만큼 이진희 사장 재직까지만 해도 프로야구에 관심이 많았으나, 막상 82년 프로야구 개막할때가 되어선 문화공보부 장관으로 영전하는 바람에 구단 고위층에 운영에 전문적이고 주도적으로 나갈 사람이 없었다.[34] 다만 립서비스일지는 모르겠으나 김용수가 MBC의 지원은 나쁘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감독의 잦은 교체가 가져온 혼란을 들수 있다. 창단 첫해부터 1989년까지 MBC를 거쳐간 감독만 8명. 1984년부터 6년간의 암흑기에는 5명이 MBC 감독 명함을 받아들었다. 수시로 감독을 갈아치우는 구단에서 감독이 힘을 갖고 자기야구를 제대로 펼치기란 처음부터 불가능했다. 김동엽 감독을 다시 불러들인 1986년이 대표적인 예다. 그해 MBC는 일본에서 미즈타니 코치를 투수코치로 영입해 투수와 관련된 모든 권한을 부여했다. 김동엽 감독이 취재진에게 오늘 우리팀 선발투수가 누구냐고 물어봐야 할 정도였으니 제대로 된 리더쉽이 발휘될 일이 없었다.

거기다 선수단의 파워도 다른 구단에 비해 센 편이었는데, 선수단의 항의에 의해 감독이 잘려나간 게 3번이었다. 좋은 성적을 냈던 김동엽은 1983년엔 이해창의 내부 고발, 1987년엔 선수단 투표로 인해 해고당했고, 1989년도 감독인 배성서[35]정삼흠 항명사건 등 불화 끝에 퇴진했다.

연고지, 홈구장, 기존 MBC 청룡의 팬과 MBC 청룡이 점유하고 있던 모든 권리가 인수 과정에서 그대로 LG 트윈스로 이어졌다. 선수들의 기록도 MBC-LG를 이어서 기록한다.

4.1. 역대 프런트[편집]



4.1.1. 구단 담당 이사[편집]



4.1.2. 사장[편집]


1985년 법인화 후 사장제가 신설되었다.

  • 이수정 (1985~1987)
  • 이은명 (1987~1988) - 이후 대전MBC 사장 역임
  • 양성연 (1988)
  • 이명석 (1988~1989) - 이후 대구MBC 사장 역임
  • 이건영 (1989~1990) - LG 트윈스로 팀명이 바뀐 후 구단 고문으로 있다가 MBC로 복귀해 청주MBC 사장 역임


4.1.3. 단장[편집]


  • 조광식 (1982/1989~1990)
  • 고처황 (1982~1983)
  • 이증 (1983~1988) - 이후 울산MBC 사장 역임
  • 심규성 단장대행 (1988~1989) - 이후 울산MBC 사장 역임

4.2. 유명 선수[편집]


백인천, 이종도, 하기룡, 김재박, 이해창, 이광은, 김용수, 정삼흠, 김태원, 김건우, 이광권 등의 스타플레이어들이 활약하였으며, 1990년에 럭키금성그룹에 인수되고, LG 트윈스로 이어지게 된다.

파일:MBCbluedragon41.png
MBC 청룡
No.41 김용수

파일:attachment/백인천/백인천4할.png
파일:external/pds.joins.com/htm_20131008233549123.jpg
MBC 청룡
No.2 백인천
No.5 이종도

파일:external/static.inven.co.kr/94490842.png
파일:정삼흠.jpg
MBC 청룡
No.34 하기룡
No.1 정삼흠

파일:external/blog.koreadaily.com/28063624_2.jpg
파일:attachment/김건우/김건우1.png
MBC 청룡
No.1 이해창
No.28 김건우

파일:김상훈 김재박 이광은.jpg
MBC 청룡
No.9 김상훈
No.7 김재박
No.33 이광은

파일:attachment/2005021412105111001.jpg
파일:external/imgnews.naver.net/151605344_ddddd.jpg
MBC 청룡
No.27/42 심재원
No.20 박흥식

파일:MBC 청룡 이길환.jpg
No.11 이길환

No.24 김기범
No.32 신언호
No.35 김태원
No.36 이용철

파일:external/www.interview365.com/20087239583265361.jpg
No.38 김동엽

4.3. 역대 시즌[편집]



4.4. 기타[편집]


파일:청룡 트윈스.png
트윈스의 시작, 청룡

  • 창단 직전에 팀명 공모를 했는데 MBC 드래곤즈라는 의견이 압도적으로 많았고, 이 당시 MBC의 사옥이 있던 중구 정동[36]이 과거부터 '용마루'라고 불렸다는 점 때문에 팀 이름으로 선정됐다고 한다. 그에 대한 배경 설명. 그러나 당시 지나친 외래어 사용을 지양하자는 분위기가 있었던데다 이웃나라 리그드래곤즈라는 이름을 쓰고 있는 팀이 있다는 이유로 드래곤즈 대신 '청룡'이라는 이름을 쓰게 된다. -롯데는 일본에 동명의 팀 이름이랑 똑같이 지었던데- 실제로 그런 인연으로 1982년 MBC 청룡 창단 시절부터 주니치 드래곤즈는 자매결연 구단이었으며, 이후 이 팀의 후신인 LG 트윈스와도 자매결연 구단 관계를 이어가고 있다. 이는 한국프로야구 사상 최초이자 유일하게 팀명을 한자로 지은 팀으로도 기록된다.

  • 팀 자체의 승률을 떠나서 드래곤 간지와 서울이라는 입지 덕분에 해태 타이거즈와 함께 그 당시 국민학교 학생들이 제일 좋아하는 팀이기도 했다. 나일론으로 만든 싸구려 청룡 바람막이를 국딩들한테 자주 무료배포했던 이유도 있다. 프로야구 출범 당시 어린이 회원 모집을 대대적으로 진행하며 팬 확보에 나섰는데 서울이라는 연고 특성상 자연스럽게 많은 팬을 끌어모을수 있게 된 것.

  • 모기업이 방송사였으므로 문화방송은 당연히 MBC 청룡 경기를 무지하게 자주 중계해주었다. 그 덕에 자회사인 엠스플에서 1980년대 프로야구 프로그램을 할 때만 되면 잘 틀어준다. 물론 1980년대 프로야구 중계는 사실 MBC보다 KBS가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았다. 오죽하면 한때 KBS의 별명이 "Korean Baseball System"이라고 불렀을 정도. 괜히 전두환의 3S에 프로야구가 들어가는 게 아니다.[37]

  • 모기업이 제작하는 여러 프로그램에 유명 선수들이 종종 출연한 바 있다. 1980년대 유명 프로그램이었던 스포츠 예능 프로그램 '명랑운동회'나 국민학생 대상의 어린이 쇼 프로그램 '야! 일요일이다!' 등에 게스트로 출연했는데 유튜브에도 당시 제작된 회차의 일부 영상이 남아있다.

  • 주로 전지훈련은 일본으로 많이 간 것 같다.

  • MBC가 중계할 때는 'MBC 청룡'이라는 풀네임을 자유롭게 언급했지만 KBS가 중계할 때에는 죽어도 경쟁사 이름을 호명해주기 싫은 고집 덕택에 그냥 '서울 청룡'이라는 식으로 명명했다.[38] 공통적인 것은 '청룡'이라는 명칭이 강조됐다는 점. 더불어 연고지인 서울을 적극적으로 많이 내세웠는데, 원정 유니폼 가슴에 '서울'을 한글과 영문으로 박았는가 하면, MBC의 M과 서울의 S를 겹친 캡로고를 썼다.

  • 역대 한국프로야구 팀명 중에서 유일하게 팀명(스폰서 및 모기업 명칭은 제외)이 영어가 아닌 한자어인 팀이기도 하다. 다만 당대에는 프로야구를 제외하면 딱히 특이한 사항은 아니었다. 민속씨름의 경우에는 1990년대 말 이전까지는 팀 이름에 영어나 외래어를 일절 쓰지 않았고, 프로축구의 경우에는 팀 이름에 영어나 외래어를 쓴 팀과 순우리말, 한문을 쓴 팀이 혼재되어 있었다. 대표적으로 일양 원비, 현대 코끼리, 삼익가구 사자, 부산조흥상호신용금고 호랑이, 국민은행 까치, 현대 호랑이, 유공 코끼리, 럭키금성 황소, 일화 천마 등이 있었다. 이후로는 민속씨름의 인기가 사그라들고 프로축구는 지역명을 먼저 사용하는 것이 용례가 되고, 팀 이름에 FCXX로 짓는 경우가 늘어나면서 줄어들었지만 WKBL의 춘천 우리은행 한새와 V리그의 서울 우리카드 한새가 있었다. 이후 두 팀 모두 위비로 팀명이 바뀌었다.


  • 1982년 4월 15일 광주 무등야구장에서 해태 타이거즈를 상대로 1경기 7실책을 저질러 KBO 흑역사의 한 귀퉁이를 차지했었다. 이 흑역사는 32년 후 SK 와이번스에 의해 희석된다.[39]


  • LG 트윈스 구단은 MBC 청룡 관련 이벤트를 거의 하지 않는 편이지만 개별적으로 청룡 유니폼[40]을 구입하여 직관하러 오는 팬이 아직도 상당수 있으며, MBC 청룡의 흔적은 사라진 지 30년을 훌쩍 넘긴 2020년대 초반인 현재도 서울종합운동장 야구장에서 찾아볼 수 있다.

  • 1983년 후기리그에서 우승을 차지해 1983년 한국시리즈에 나갔는데 이 한국시리즈가 MBC/LG 프랜차이즈의 첫 번째 한국시리즈다.

  • 서울특별시라는 최대 규모의 연고지와 서울 출신의 많은 스타들을 보유했으나, LG로 바뀌는 1990년까지 포스트시즌은 1983년 단 1회에 그쳤다. 1983년 한국시리즈에서는 1무 4패로 패했기 때문에 MBC-LG 프랜차이즈의 한국시리즈 첫 승은 1990년 1차전이다.

  • 8년 동안 포스트시즌 진출이 단 한 번밖에 없지만 이는 당시 포스트시즌 제도의 영향이 크며, 5할 승률을 넘긴 시즌이 4시즌으로 절반이다. 그렇기 때문에 MBC 청룡을 마냥 약체 취급하는 것은 어폐가 있다.

  • KBO 사상 최초로 몰수패를 당한 구단이다.

  • 유난히 교통사고를 당했던 선수들이 많았던 팀이다.
    • 원년 선수이자 원년 KBO 골든글러브 수상자였던 김용운은 은퇴 후 2005년에 대전에서 마산으로 이동하던 도중 교통사고로 사망하였다.
    • 김정수가 1986년 겨울에 교통사고로 사망했으며, 그의 승용차에 함께 탑승하고 있었던 1984년에 입단했던 김경표는 후유증으로 고생하다고 1990년 초에 은퇴하였고, 은퇴 이후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동승자였던 안언학 역시 후유증으로 고생하다가 1991년에 은퇴하였다.
    • 김건우는 투수로 뛰어난 활약을 하다가 1987년 시즌 후반에 교통사고로 두 팔에 골절상을 당했다. 이후 타자로 전향했지만 그다지 좋은 활약을 하지 못했고 1997년에 은퇴하였다.

  • KBO 사상 최초로 '부정선수' 투입 사례를 만들었던 구단이기도 하다. 1983년 5월 17일 롯데전 9회말 2아웃 상태에서 볼넷으로 출루한 유승안 선수 대신 조호 선수를 대주자로 투입시켰고, 와중에 다음 타자였던 김정수의 안타로 진루까지 한 상황에서 조호 선수가 25명 출전선수 명단에 없었다는 사실이 발견되었다. 그러나 부정선수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에 관한 이렇다 할 규칙이 없었기 때문에, 당시 심판은 그냥 쿨하게 아웃을 선언했다. 당시 상황이 9회말 2아웃이었으므로 경기는 그 자리에서 끝나버렸다.

  • 원년 개막전과는 인연이 깊던 팀으로 만루홈런 친 타자(이종도), 만루홈런 맞았던 투수(이선희), 최초로 삼진당한 타자(천보성)까지 전부 MBC/LG를 거쳐갔다. LG 트윈스와 삼성 라이온즈는 기업간의 라이벌 의식으로 트레이드가 2000년대까지 거의 없었지만 MBC 시절에는 트레이드가 활발했다.

  • 2020년대인 현재까지 역대 프로야구 팀들 중 둘밖에 없는, 팀명이 단수인 팀이다. 2014년까지는 유일했으나 2015년에 kt wiz가 창단하였다.


4.5. 유니폼[편집]


유니폼 변천사는 여기로.


5. 마스코트[편집]


파일:external/www.gasengi.com/b6f143e6b882a220e7e675028ffef544_y8vtga3zKp6OFMFWp.jpg
마스코트는 당연히 청룡이었다.

파일:NISI20220716_0019033544_web.jpg
이후 오랫동안 사람들에게서 잊혀졌지만 2022년 KBO 올스타전에서 KBO 40주년을 기념하여 현대 유니콘스, 청보 핀토스, 태평양 돌핀스, OB 베어스 등의 예전 마스코트들과 함께 잠시나마 부활하기도 했다.

프로야구 원년을 다룬 영화 슈퍼스타 감사용에도 작중 네이구루미를 입은 마스코트로 등장한다. 삼미가 연패에 빠지자 선수단 버스를 가로막은 성난 팬들을 피해서 삼미의 선수가 청룡의 인형탈을 쓰고 빠져나오다가 걸리는 장면이 코믹하게 그려지는데, 당시 실제 선수의 인터뷰에 의하면 영화에서 웃기려고 만든 허구의 에피소드가 아니라 실제로 일어난 일이라고 한다. https://youtu.be/1aUyGsR_hDM?si=ufPz5XjGIk24_xyj&t=347
다만 영화처럼 인형탈을 쓴게 인호봉선수는 아니었다고 한다.


6. 역대 성적[편집]


­
우승
­
준우승
­
포스트시즌 진출

포스트시즌 진출 실패

연도
정규시즌 순위
최종 순위
경기수



승률
MBC 청룡
1982
3위/6팀[41]
3위
80
46
0
34
0.575
1983
1위/6팀[42]
준우승
100
55
2
43
0.561
1984
4위/6팀[43][44]
4위
100
51
1
48
0.515
1985
5위/6팀[45]
5위
110
44
1
65
0.404
1986
3위/7팀[46]
3위
108
59
8
41
0.590
1987
5위/7팀[47]
5위
108
50
7
51
0.495
1988
6위/7팀[48]
6위
108
40
4
64
0.385
1989
6위/7팀
6위
120
49
4
67
0.423
LG 트윈스
1990
1위/7팀
우승
120
71
0
49
0.592
1991
6위/8팀
6위
126
53
1
72
0.425
1992
7위/8팀
7위
126
53
3
70
0.433
1993
4위/8팀
4위
126
66
3
57
0.536
1994
1위/8팀
우승
126
81
0
45
0.643
1995
2위/8팀
3위
126
74
4
48
0.603
1996
7위/8팀
7위
126
50
5
71
0.417
1997
2위/8팀
준우승
126
73
2
51
0.587
1998
3위/8팀
준우승
126
63
1
62
0.504
1999
매3위/4팀[49]
3위
132
61
1
70
0.466
2000
1위/4팀[50]
4위
133
67
3
63
0.515
2001
6위/8팀
6위
133
58
8
67
0.464
2002
4위/8팀
준우승
133
66
6
61
0.520
2003
6위/8팀
6위
133
60
2
71
0.458
2004
6위/8팀
6위
133
59
4
70
0.457
2005
6위/8팀
6위
126
54
1
71
0.432
2006
8위/8팀
8위
126
47
4
75
0.385
2007
5위/8팀
5위
126
58
6
62
0.483
2008
8위/8팀
8위
126
46
0
80
0.365
2009
7위/8팀
7위
133
54
4
75
0.406
2010
6위/8팀
6위
133
57
5
71
0.429
2011
6위/8팀
6위
133
59
2
72
0.450
2012
7위/8팀
7위
133
57
4
72
0.442
2013
2위/9팀
3위
128
74
0
54
0.578
2014
4위/9팀
4위
128
62
2
64
0.492
2015
9위/10팀
9위
144
64
2
78
0.451
2016
4위/10팀
4위
144
71
2
71
0.500
2017
6위/10팀
6위
144
69
3
72
0.489
2018
8위/10팀
8위
144
68
1
75
0.476
2019
4위/10팀
4위
144
79
1
64
0.552
2020
4위/10팀
4위
144
79
4
61
0.564
2021
3위/10팀
4위
144
72
14
58
0.554
KBO 통산 40시즌
V2
5059
2419
125
2515
0.490
[1] 법인 설립은 1985년 8월에 했다.[2] 단, 야구단만 LG스포츠에 매각했고 법인은 매각 금액이 완불될 때(1993년 6월)까지 존속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페이퍼컴퍼니로 존속하다가 1991년 1월부터 MBC 방송문화원이 되었고 현재는 성격이 다른 MBC 아카데미라는 회사가 되었다.[3] OB 베어스보다도 먼저 서울에 터를 잡은 최초의 서울 연고 구단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LG 트윈스 팬들이 상당한 자부심을 갖는다.[4]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가 끝날 때까지 사용했다.[5] 1988 서울 올림픽 기간 동안 OB 베어스와 함께 홈 구장으로 사용했다.[6]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가 열린 1989년 9월 16일부터 23일까지 사용.[7] 세계야구선수권대회로 인해 1982 시즌 초에는 사용하지 못하고 1982 시즌 말미부터 사용했다. 이후 LG 트윈스로 이어진다.[8] 청룡 야구단이 있을 당시 지상파 방송사라고는 한국방송공사문화방송뿐이었다. 이전의 지상파 민간 방송사였던 동양방송은 1980년 언론통폐합에 의해 강제로 문을 닫았고 1990년에 문을 연 서울방송은 청룡이 LG로 넘어간 이후에 생겼다.[9] 이와 비슷한 구단으로 실업-프로농구의 SBS 스타즈(現 안양 KGC인삼공사)가 있었고, MBC가 게임채널을 운영하며 e스포츠에 발을 들여놓을 때 MBC GAME HERO라는 구단을 운영한 적도 있다. 2010년대에 내팽겨쳤지만.[10] 네이버 스포츠 박동희 칼럼 매거진S 하일성-허구연 대담 "마이크가 나를 불렀다." #[11] 현재 LG 트윈스와 같은 홈구장을 쓰는 두산 베어스OB 베어스 시절인 원년부터 1984년까지 충청도를 연고지로 삼았다가 1985년 서울로 올라왔다.[12] 축구는 리그 출범 당시 유공 코끼리에게 서울·인천·경기 연고권을 배당했지만 지역 순회 방식으로 리그를 치렀기에 큰 의미가 없었다. 홈 앤드 어웨이 방식 채택 이후 최초로 등장한 실질적 의미의 원조 서울 연고 축구단은 1989년 창단한 일화 천마로 볼 수 있다. KBL은 당시까지 챔프전 우승 경험을 갖춘 부산 기아, 대전 현대, 수원 삼성, 청주 SK 등 4개 구단 중 서울 입성을 희망하는 2개 구단에 서울 연고권 개방을 선언했고 결국 삼성과 SK의 서울 입성을 허가했다. 배구는 리그 출범 4년차를 맞은 2008년에 서울 연고권을 개방해서 신생 구단 서울 우리캐피탈 드림식스의 창단과 인천 GS칼텍스 여자배구단의 서울 입성을 허가했다.[13] K리그에는 1부 리그 구단인 FC 서울 외에도 2부 리그 구단인 서울 이랜드 FC도 있다. 1부와 2부로 나뉘어져 있을 뿐 두 리그를 별개로 보지 않기 때문에 복수의 구단이 서울을 연고로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14] 1967년 KBS 미술부에 입사하여 1972년 KBS부산 TV 개국 당시 준비위원으로 참여했다. 1973년 MBC로 이직하여 1981년부터 1년여 간 춘천MBC의 ID 영상용 카드, 공익 스팟, CM 카드, 세트 디자인 등을 맡았으며 1992년부터 2년 동안 보도국 보도미술부 스포츠그래픽담당 부장을 지냈다. 1994년 영상미술국 미술2부 부장을 끝으로 명예퇴직.(출처: MBC 사우회보 제57호(2020년 1월 15일자) 5면)[15] 아래 유명선수들 항목의 김용수 사진에 MBC 청룡 시절 유니폼 뒷모습을 볼 수 있다.[16] 해태 타이거즈의 박건배 구단주와 박종세 단장이 김동엽 감독과는 경복고등학교 동문이었다.[17] 계약금 2,000만원과 연봉 3,600만원이 포함된 가격이었다. 특히 연봉의 경우 감독 몫으로 1,200만원, 선수 몫으로 2,400만원이었는데 당시 대우 수준으로 2,400만원은 최고급 대우였다. 이때 돈 2,400만원이면 서울 강남의 대형 아파트를 살 수 있는 가격이었다고 한다.[18] 플레잉코치(코치 겸 선수)는 몇 명 더 있었다. 대표적으로 우용득, 지연규, 나경민 등이 선수생활 말년에 플레잉코치로 뛰었다. 그런데 이들이 선수로 출장한 것은 몇 타석 안 돼서 기억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 또, 백인천은 삼미로 이적했을 때도 플레잉 코치를 하였다.[19] 거기에 더해 백인천은 한국프로야구에서 유일무이한 4할 타자이기도 했으며 초대 타율왕이었다.[20] 그해 한국시리즈 우승팀인 OB베어스는 시즌 전엔 4위 정도의 전력을 가진 것으로 예상되었다 [21] 1982 시즌 막바지에 합류해 세 경기에 나오긴 했다.[22] 원년 롯데의 주전 포수였던 차동렬은 심재원, 한문연, 김호근이 보강되면서 자리가 없어진 상태였고 마침 MBC에서 김재박의 본격 가세로 역시 자리가 사라진 정영기를 내주고 차동렬을 데려왔다.[23] 당시 백인천과 살던 부인은 재일 한국인이었는데 한국 정착 문제와 시부모 봉양 문제 등을 놓고 심한 갈등을 겪었다. 그리고 머지 않아 이 부인과 매우 안좋게 결별하게 되는데 하필이면 그 사유가 간통이었다.[24] 하지만 그 18연패를 끊은 다음 날 삼미는 구단매각을 발표했고, 청보 핀토스가 후기리그부터 삼미를 대신하여 참가했다.[25] 1위는 해태 99개[26] 최종전에서 청룡이 해태를 이긴 가운데 OB는 홈에서 최동원의 3년 연속 20승 여부가 걸려있던 롯데 자이언츠에게 패배하면 후기리그 2위로 포스트시즌에 나갈 수 있는 상황이었다. 9회말까지 OB는 최동원에 막혀 3-1로 지고 있었으나 9회말에 최동원을 공략하며 3-4 역전승을 거두면서 MBC 청룡의 가을 꿈은 끝내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27] 경영난 때문이라는 얘기도 있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당시 MBC는 1988 서울 올림픽과 경기 호황에 따라 매년 매출이 급속히 늘어 수백억원의 흑자를 내고 있던 상황이었다. 애시당초 당시 광고 판매율이 거의 100%에 달하던 상황이었고 SBS도 없었던 시절이기에 영상 광고 시장을 KBS와 사실상 독점하는 체제였다. 1988년에 발생한 MBC의 총파업도 민주화 이후 공정 언론보도와 보도 등 3개부문 국장 3배수 추천제 관철 등을 쟁취하기 위한 파업이었다.[28] 프로야구 출범 준비 당시 청와대가 럭키금성 측에 부산·경남 연고팀 창단 의사를 타진했는데 하필이면 이 때 구자경 회장이 해외 출장 중이어서 제때 대답을 못했다. 결국 부산·경남 연고팀의 주인은 롯데그룹으로 넘어갔고 구자경 회장은 땅을 치고 후회했다고 한다. 오죽하면 웬만해서 화를 잘 안 내던 구 회장이 프로야구단 창단 의견 전달을 보류한 고위 참모들을 향해 대노했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였다.[29] 청룡 야구단 법인 운영권 인수비용이 100억원이었고 나머지 30억원은 MBC에 광고협찬을 하는 조건의 금액이었다. 인수비용 100억원은 1990년부터 1993년까지 4년간 분할 납부했다.[30] 한국프로농구에서도 비슷한 취지로 생긴 팀이 있었다. 바로 안양 SBS 스타즈. 다만 SBS는 이미 실업농구 시절부터 팀을 운영했다는 점에서 MBC 청룡과 다르다.[31] 당시 MBC가 공식적으로 KBS(1988년 이후에는 방송문화진흥회)가 지분의 다수를 차지한 (준)공영방송이었기 때문. 딱히 주인이 없다는 점은 후에 창단된 kt도 마찬가지여서(KT는 민영화가 되었다고는 해도 공기업의 이미지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그렇게 될 수도 없다.) 이런 사정을 알고 있던 전문가나 팬들이 불안해했다.[32] 즉, 높으신 분들 시선으로 봤을 땐 인사부장, 운영부장, 영업부장 정도로만 봤다고 생각하면 쉽다.[33] 21세기에 들어와서는 완투형 투수를 찾기 쉽지 않지만 청룡이 있던 1980년대만 하더라도 선발투수는 완투 능력을 갖춰야 성공한다는 야구 문화가 뿌리깊게 박혀 있었다. 윤학길이 무려 100번이나 완투를 할 수 있던 것은 그 시절의 야구 문화도 한몫을 했다.[34] kt 창단 초창기에 창단에 관심있던 사장이 물러나면서 중구난방스러운 운영으로 비판받았던 것과 유사하다.[35] 빙그레 이글스 초대 감독이었다.[36] 1970년대 경향신문MBC가 한 식구였던 시절이 있었는데 그때 쓰던 사옥이다.[37] 이계진 전 국회의원(전 KBS 아나운서)의 자서전 "뉴스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딸꾹!"에서 발췌.[38] 역시나 이계진 아나운서의 책. 이외에도 많은 KBS 출신들의 증언이 한가득이다. 사실 방송국 내에서 타 방송사 언급이 자유로워진 것이 생각보다 오래되지 않아서, MBC 청룡이 인수된지 한참 후인 2000년대에도 예능 프로그램 등에서는 대놓고 타 방송사를 언급하기가 어려워 고육지책으로 X본부 등의 용어를 쓰는 게 고작이었다. 하물며 그것보다도 훨씬 방송문화가 보수적이었을 80년대에, 유일한 라이벌 방송국 이름을 경기 내내 호명하는 것은 KBS 입장에서는 자존심 때문이라도 용납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한편 SBS는 MBC 청룡이 LG 트윈스로 바뀐 1990년 이후에 생겼기에(1991년 12월 9일 개국) 청룡 시절 경기는 단 한 번도 중계한 적이 없다. [39] 아이러니하게도 두 경기 모두 상대가 타이거즈다.[40] 1986-89 유니폼이 대부분이다.[41] 전기 3위, 후기 3위[42] 전기 3위, 후기 1위[43] 전기 3위, 후기 3위[44] 종합 승률만 따지면 3위지만 4위였던 롯데가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함으로 인해 종합순위는 4위가 되었다.[45] 전기 5위, 후기 6위[46] 전기 4위, 후기 3위[47] 전기 5위, 후기 4위[48] 전기 7위, 후기 6위[49] 전체 6위[50] 전체 4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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