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DN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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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파일:SDN48 멤버.jpg

{{{#!wiki style="margin: 5px 10px -10px"
2012년 2월 SDN48 재적멤버


SDN48
에스디엔포티에잇
エスディーエヌフォーティーエイト
}}} ||
국적
[[일본|

일본
display: none; display: 일본"
행정구
]]

결성일
2009년 8월 1일
(결성일로부터 5360일, 14주년)
데뷔일
2010년 11월 24일
(데뷔일로부터 4880일, 13주년)
해체일
2012년 3월 31일
데뷔 공연
SDN48 1st Stage
誘惑のガーター
[1]
데뷔 음반
[1] 2009년 8월 1일부터 2012년 3월 28일까지 2년 8개월간 진행되었다.
[[GAGAGA|
GAGAGA
]]
장르
J-POP
캡틴
노로 카요
소속사
AKS
레이블
유니버설 뮤직 재팬
공식 사이트
파일:SDN48 워드마크.svg[[파일:SDN48 흰색 워드마크.svg(폐쇄)

1. 개요
3. 활동
3.1. 활동 역사
3.1.1. 2009년: 결성
3.1.2. 2010년: 한류풍 아이돌?
3.1.3. 2011년: 표류하는 SDN48
3.1.4. 해산 발표
3.1.5. 전원 졸업과 그 이후
4. 여담
4.1. 다른 그룹과의 차이점
4.2. 파생 그룹: 7cm



1. 개요[편집]


일본의 여성 아이돌 그룹. 2012년 3월 '전원 졸업'으로 인해 해체되었다.

AKB48, SKE48으로 성공한 프로듀서 아키모토 야스시의 프로듀스 하에 2009년 결성. SDN은 SaturDay Night의 약자이며, 돈키호테 아키하바라점에 위치한 AKB48 시어터에서 토요일 밤에 공연을 하기 때문에 붙은 이름. 단, 때에 따라서는 평일 밤이나 토요일, 일요일 등에도 공연을 할 때가 있다. 그룹명에 들어간 48은 인원수를 나타내지않는다.

AKB48, SKE48, NMB48, HKT48와 마찬가지로 모든 곡의 작사 및 프로듀스를 아키모토 야스시가 담당하고 있다. 뒤에 들어가는 ~48을 보면 알 수 있듯이 AKB48의 자매 그룹이다. 또한, AKB48이나 SKE48의 이벤트 (악수회 등) 때에 진행 스탭으로 참가하거나 AKB48의 해외 공연시 통역으로 참가하기도 하고 (외국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소위 '귀국자녀'나 (영어 통역 담당인 콘도 사야카), 외국인 (중국인인 첸츄, 한국인인 시연), AKB48 연구생들의 트레이너 (보컬/댄스)로 활약하는 멤버들이 많다.


2. 구성원[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SDN48/전 멤버 일람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 활동[편집]



3.1. 활동 역사[편집]



3.1.1. 2009년: 결성[편집]


SDN48은 AKB48의 성인 버전이라는 컨셉으로 결성되었다. 2009년 8월 1일 첫 오디션 합격자들이 1기생으로서 데뷔하였고, 같은 날 극장 공연인 <誘惑のガーター> 공연을 시작하였다. 이 공연은 지금까지의 AKB48 극장 공연과는 다르게 성에 관한 노골적인 가사로 성인층을 공략하기 위한 목적이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하지만 아이돌의 지나친 성적 어필을 좋아하지 않는 기존의 일본 아이돌 오타쿠들은 이러한 SDN48의 콘셉트를 좋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성 초기 AKB48의 코하라 하루카, 오오호리 메구미, 노로 카요, 우라노 카즈미, 사토 유카리, 그리고 SKE48의 마에다 에이코(테즈카 마치코)가 이적해왔다. 이것은 그룹 내에서 활동하다가 연령이 높아져서 48 그룹의 교복 컨셉을 소화할 수 없게 된 멤버들을 이적시키고 새로운 연구생을 승격시키기 위한 수단이기도 하였고, 인지도가 높은 멤버들을 이적시켜옴으로써 초기 팬덤 형성을 쉽게 하기 위함이기도 하였다. 나이가 들었다는 이유로 한직으로 좌천된 모양새이기 때문에 AKB48의 팬들은 반발을 많이 했다. 이후 코하라 하루카를 제외한 멤버들은 SDN48에선 아쉽게도 그런 파워는 받지를 못했지만, 소속사에서 이런 이미지를 이용해 많은 일을 할 수가 있었고, 지금의 입지를 다지게 되었다.

그래도 AKB였던 멤버들에게 주목이 집중되어 정작 SDN48 오디션을 통해 합격한 멤버들은 세리나를 제외하고는 대중적인 인기를 얻지 못하는 상황이 펼쳐지기도 하였으나[2], 각자 노력을 하여 졸업 후엔 연예계 내에선 꾸준한 활동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입지를 다졌다. 그 예로 1기의 오코치 미사는 인디 아티스트로 활동하면서 라이브를 할 때마다 표를 매진시키고 있으며, 2기의 키모토 유키는 팬 투표로 이루어지는 모바일 게임 CM모델에 1등으로 뽑히면서 그 위력을 보여줬었다.


3.1.2. 2010년: 한류풍 아이돌?[편집]


2010년 11월 24일 첫 싱글인 <GAGAGA>가 발매되었다. 이 싱글은 지금까지의 AKB48 관련 싱글들과는 다르게 K-POP적인 편곡과 멜로디가 특징인 곡이었다. 실제로 HARANHN(하라는)이라는 한국인 작곡가를 기용해서 곡을 썼다. 그렇게 탄생한 <GAGAGA>는 원더걸스의 <So Hot>이나 티아라의 <Apple is A>나 카라의 <루팡 (Lupin)#루팡 (Lupin)>을 베꼈다는 의혹을 받았고, 의상은 소녀시대의 <>을 베꼈다는 의혹도 받았다. 또한 가사에도 한국어 구절을 집어넣는 등 일본 아이돌로서는 파격적인 시도를 하였다. 이 작곡가는 뚜렷한 커리어가 있는 사람은 아니었으며[3], 훗날 레인보우에게 Black Swan이라는 곡을 주어 혹평을 받은 바 있다. 어느 정도냐면 사실상 이 곡을 끝으로 레인보우의 커리어가 박살났다는 게 중론일 정도로 망한 곡이다.

파일:SDN48_1st_At.jpg
<GAGAGA> 싱글은 한국에도 동시에 발매되었다. 한국 싱글 발매와 함께 SDN48 멤버들이 한국에서 사인회를 열고 엠 카운트다운 등의 방송에도 출연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일본에서 방영된 <GAGAGA> 싱글의 TV 광고에는 'K-POP을 대항할 J-POP 탄생' 등의 슬로건을 내세우는 등 K-POP을 의식하는 행보를 보였다. 이 한국 활동에 대해서는 평가가 엇갈리는데, 한국에서 제대로 활동을 해보려고 했다는 시각이 있는가 하면 단순히 'K-POP의 본고장 한국에서도 활동하고 온 그룹'이라는 이미지를 일본 국내 마케팅에 쓰기 위한 일회성 활동이었다는 분석도 있다. 한국에서는 이미 형성되어 있던 소수의 AKB계열 아이돌 팬층을 제외하고는 이렇다 할 반응을 받지 못하였다.


3.1.3. 2011년: 표류하는 SDN48[편집]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번째 싱글인 <愛、チュセヨ>(사랑, 주세요)에서는 '신영섭'이라는 신인 한국인 작곡가를 기용했다. 그러나 조잡하게 깨지는 신스 사운드와 유치한 멜로디로 곡은 별로였다는 평이다. 이런 곡이 오리콘 일간 차트 1위를 한 걸 두고 한국의 언론에서는 '한국의 무명 작곡가가 일본에서 성공했다'라는 식으로 보도했으나, 이건 순전히 SDN48의 인기 때문이지 곡이 좋아서 그렇게 된 게 아니다. 그리고 아예 제목에 한국어를 넣는 등 K-POP을 의식한 행보를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이러한 행보는 일본 내의 한류에 대한 반감과 맞물려서 SDN48에 대한 안 좋은 이미지를 형성하는 요인이 되고 말았다. 그외에 알려진 한국인이 작곡한 곡은 1기 니시쿠니하라 레이코의 솔로곡 <愛、チュセヨ> 싱글의 '愛よ, 動かないで' 아르헨도이현도가 작곡한 발라드 곡으로 매우 좋다.

파일:external/www.cdjournal.com/Z322006166.jpg
한편으로 <愛、チュセヨ>의 PV에는 멤버들이 나체로 춤을 추는 장면과 목욕하는 장면이 등장해서 팬들로부터 원성을 샀다. 아무리 컨셉이 성인 취향 아이돌이라지만 너무한 게 아니냐는 것. 하지만 이 이후로도 SDN48은 각종 그라비아 잡지에 출연해서 거의 헐벗은 것이나 다를 바 없는 사진을 찍는 등 성적인 컨셉으로 활동할 수밖에 없었다.[4] 이렇게 수위가 지나친 섹시 어필은 SDN48의 코어팬을 모으지 못한 계기가 되기도 했다.

2011년 8월에는 세 번째 싱글인 <MIN・MIN・MIN>을 발매하였다. 이 곡은 토키와 약품 공업의 에너지 드링크 '면면타파'(민민다하)의 광고 주제가로 기용되었다. SDN48의 곡이 광고에 타이업된 것은 이 것이 처음이었다. 이 시기 SDN48은 민민다하 관련 활동에 주력했다. CM에서는 일반적인 샐러리맨들을 응원하는 아이돌이라는 컨셉으로, 에너지 드링크의 주 소비자층인 2~30대 직장인 남성들을 공략했다. 토키와 약품 공업에서 주최한 신바시 라이브 이벤트에서는 센터인 세리나가 지나가는 직장인들을 향해 'Y셔츠를 입은 모습이 귀여워요'라는 말을 외치는 등 CM 컨셉에 맞게 샐러리맨을 공략하였다.[5] 이 시기가 SDN48이 활발히 활동했던 마지막 시기였다.

파일:SDN48_3rd_A.jpg
곡은 <愛、チュセヨ>보다는 좋은 평을 들었으나 의상이 문제였다. 은색으로 번쩍번쩍거리는 데다가 등에는 매미의 날개를 형상화한 커다란 판자가 달려있어 멋있다는 인상보다는 괴기하다는 인상을 심어주었다. 여기서 '민민민'은 매미의 울음소리를 나타내는 일본어 의성어이다. '민민다하'의 '민민'을 매미의 울음소리로 표현한 언어 유희로, 가사 내용도 '연인이 되기까지 매미처럼 오랜 세월을 기다려왔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헤어지다니'라면서 자신의 처지를 매미에 비유하는 내용이었다. 아키모토 야스시의 작품인 만큼 발상이나 가사의 내용은 괜찮은 수준이었다. 다만 의상까지 매미처럼 만든 것이 문제였을 뿐.

AKB48처럼 남성 팬들의 지갑을 열게 하는 귀여움과 생기발랄함을 지닌 것도 아니고, 일반적인 한류 아이돌처럼 1~20대 여성들을 사로잡는 멋진 의상과 화려한 퍼포먼스도 없는 SDN48은 그 어떤 계층으로부터도 호응을 받지 못하고 헤매고 있었다.


3.1.4. 해산 발표[편집]


2011년 10월 16일, SDN48에 대한 충격적인 내용이 발표되었다. 2012년 3월을 마지막으로 SDN48이 해산을 한다는 것. AKB48 시어터의 지배인이자 AKB48의 운영진 중 하나인 토가사키 토모노부가 공식 블로그를 통해 해산 이유를 올린다. 이 글을 통해 운영진은 '멤버들이 SDN48이라는 좋은 환경 때문에 안이해졌다'라면서[6] '멤버들이 꿈을 이루기 위해서 놓아주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라는 식의 발언을 하였는데, 멤버들의 잘못으로만 몰아가는 해명에 대해 팬들은 당연히 납득할 수 없다며 분노하였다.

사실 이건 그냥 핑계고, SDN48을 지원해주던 스폰서였던 모바일 게임 제작사인 그리가 스폰서를 그만 두면서 활동에 어려움이 생겼기 때문에 해산시켰다는 설이 거의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리는 SDN48의 블로그 계정을 제공하고 레귤러 방송이었던 <습뽄노 온나타치>의 제작비를 지원하는 등 다양한 면에서 SDN48을 지원하고 있었기 때문에 중요한 물주였던 그리가 철수하면 SDN48을 유지하기가 어려워지는 것이었다.

SDN48은 다른 AKB48 자매 그룹에 비해 인기를 못 얻고 있었기 때문에 결정적으로 스폰서 기업도 철수하는 마당에 계속 유지시킬 매력을 못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 대중들로부터 인기를 얻지 못한 것이야 그렇다 쳐도, 오타쿠들의 인기도 얻지 못했으니 답이 안 나왔던 것은 확실하다. 음반 판매량도 8만 장 정도로 나쁘지는 않았지만 1년이 넘도록 10만 장을 못 넘고 있었다. 8만 장이 결코 적은 숫자는 아니지만, 일단 AKB계통 그룹들은 멤버수가 많고 극장 세트리스트 구성 등으로 인해 유지비가 다른 그룹의 몇 배는 더 많이 드는데다가, 그걸 커버할 만큼 공연흥행이나 CF같은 굵직한 일거리도 잘 받아오질 못했다. 지하 아이돌 취급을 받는 다른 그룹들이 2~3만 장 정도 판매량으로도 그룹 유지가 가능한 것과는 정 반대다. 사실 8만 장 정도 싱글이 팔리는 그룹이라면 광고는 못 따내도 자력으로 최소한 홀 투어 정도는 매진시킬 수 있어야 하는데, 이 8만 장이라는것도 AKB 특유의 허수가 많아서 실질적인 관객동원이나 구매력으로 이어지질 못했던 듯 하다.[7]

다른 AKB48 계열 그룹들이 해체 없이 계속 유지되고 있는 걸 감안하면 사실상 AKB48 계열 그룹중 지속적인 흥행에 실패한 안타까운 그룹이다. 2021년 시점까지만 해도 유일하게 AKB48 그룹 계열내의 해체단명한 그룹이라는 불명예를 안고 있었으나 2021년 AKB48 해외의 SGO48이 3년간의 활동을 끝으로 해산했다. 이쪽은 그래도 여기보단 반 년은 더 오래 갔다.

파일:SDN48_4th_T.jpg
네 번째 싱글인 <口説きながら麻布十番 duet with みのもんた>(꼬드기면서 아자부주반)은 일본의 유명 사회자인 미노 몬타(みのもんた)와의 듀엣으로 제작되었다.

참고로 미노 몬타(みのもんた)는 2013년에 TBS 테레비의 'みのもんたの朝ズバッ!(미노 몬타의 아사즈밧)'라는 방송 진행을 맡으면서 옆에서 방송을 같이 진행하던 아나운서 요시다 아키요((よし((あき()의 엉덩이를 손으로 만지려다가 제지당하는 장면이 고스란히 전파를 타고 나가서 지탄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타격을 입은 건 오히려 요시다 아키요 측이었다.[8] 일본의 여성인권이 얼마나 낮은지 보여주는 사례.

이 싱글은 곡이 아이돌에게는 안 어울리는 엔카인데다가, 나이가 든 남성과의 부적절한 관계를 소재로 한 가사로 인해 많은 이들을 아연실색하게 하였고 SDN48 싱글 중에서 가장 판매량이 낮은 곡으로 남고 말았다. 이것이 마지막 싱글이 되리라고 예상했던 팬들은 절망에 절망에 연속이었으나, 엔카 차트에선 1위를 하여 당시 공약이었던 미노 몬타와 아자부주반 걷기 이벤트를 진행하기도 하는 등 나름 선방을 하였다.


3.1.5. 전원 졸업과 그 이후[편집]


파일:SDN48_5th_T.jpg
다행인지 불행인지 해산을 코앞에 둔 2012년 3월 7일 마지막 싱글인 <負け惜しみコングラチュレーション>이 발매되었다. 이 싱글에서는 그동안 SDN48 팬들이 그렇게나 바라지만 하지않던 정통파 아이돌 컨셉을 볼 수 있었다. 항상 빤짝이 나이트 의상만 입고 활동하던 SDN48은 이 싱글에서 교복을 연상케하는 밝고 화사한 의상을 입고 무대에 설 수 있었다. 아쉽게도 오리콘 싱글 차트 주간 1위는 하지 못하였지만 그래도 주간 2위를 기록함으로써 최고 기록을 갱신할 수 있었다. 졸업공연일인 3월 28일에 발매한 베스트 앨범 <NEXT ENCORE>가 앨범 주간 차트에서 1위를 한 것으로 위안을 삼을 수 있었다.

졸업을 앞둔 2012년 초에는 AKB48의 리퀘스트 아워에서 SDN48의 극장곡 '孤独なランナー'가 3위를 차지했다. 그리고 마침내 3월 26일 2/3기가, 28일 1기 멤버들이 2년 반 동안이나 공연했던 극장 공연 <誘惑のガーター>의 마지막 공연을 가졌으며, 한 사람 한 사람 팬들에게 감사인사를 할 때에는 극장 전체가 울음바다였다고 한다. SDN48 첫 단독 콘서트이자 졸업 콘서트인 'NEXT ENCORE'는 3월 31일 NHK홀에서 열렸는데, SDN48이 그동안 발표했던 35곡 전곡을 한 번에 피로하며 마지막을 장식했다.

아키모토 프로듀서는 1년 후에 동창회 같은 식으로 이벤트를 열겠다는 입장을 밝혔고, 1년 뒤인 2013년 3월 31일 실제로 AKB 극장에서 공연을 펼쳤다. 그 후 SDN48이라는 그룹으로서의 활동은 AKB48의 리퀘스트 아워나 극장 세트리스트 리바이벌 콘서트에 출연하는 정도이며 그마저도 2014년 이후로는 그렇게 많지 않다. 일부 멤버들은 후술할 7cm 등 새로운 유닛으로 활동하거나 싱어송라이터, 버라이어티 탤런트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을 하고 있다. 그 중 센터였던 세리나는 2015년 이후에는 방송에서 자주 보기 힘들어졌지만 2014년까지는 나름대로 버라이어티 탤런트로서 이름을 날렸다. 오야마 아이미는 솔로가수로 활동하는듯. Y&Co.가 오야마를 여러번 피쳐링하기도 했다. 한편 오오호리 메구미, 첸추, 타니사키 토모미, 후쿠야마 사쿠라 등의 멤버는 결혼을 하여 가정을 꾸리기도 하는 등 각자의 길에서 삶을 이어나가고 있다.

2019년 8월 1일 결성 10주년을 기념해 AKB48 극장에서 '유혹의 가터' 특별공연을 했다.


3.2. 발매 음반[편집]




4. 여담[편집]


콘셉트는 '조금 어른스러운 아이돌'. 멤버들이 전체적으로 20대 후반인 것도 있지만, 그룹 컨셉이 성인 남성들을 타깃으로 삼은 섹시 컨셉이다. AKB48 및 기타 자매 그룹들이 10대~20대 초반의 남성을 주 타깃으로 하는데 비해, SDN48은 20대 중반 이상의 성인 남성을 타깃으로 삼는다. 또한 멤버들의 나이가 다른 아이돌 그룹에 비해 높은 편이라 일본 아이돌 치고는 수위가 센 편이다. 뮤직비디오, 가사 등에도 노출 및 성적 묘사가 있어 비판의 목소리도 적지 않았다. 공연 곡 중에는 대놓고 '섹스가 하고 싶다'라는 가사도 있다. '普通のあなた'라는 곡으로, 18세 미만 해금 이후에는 저 부분에 '삐-'하는 소거음이 들어갔다. 리바이벌 공연 당시 캡틴인 노로 가요가 '삐-는 아니잖아!'라고 절규.

문제는 SDN48의 섹시라는 것은 일본에서 인기가 높은 '섹시 스타'인 아무로 나미에, 코다 쿠미, 그리고 당시 일본은 동년배 여성들이 보고 '나도 저렇게 되고 싶다'라고 동경을 할 수 있는 식의 은근한 섹시 스타일이 아니라 마치 그라비아 아이돌식의 섹스어필을, 즉 대놓고 남자들 보고 좋으라고 만들어 놓은 것이라 여성들에게는 당연히 인기를 못 얻었다. 그렇다고 남성들을 충족시킬 정도로 섹스어필이 파격적이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한국 아이돌 기준에서 보면 재롱잔치처럼 보일 수도 있다.

2010년 18세 미만 해금 이전까지 SDN48의 극장 공연은 미성년(18세 미만자, 18세가 넘더라도 고등학생 신분인 자) 관람 불가였으며, 수위도 더 높았다. 단, SDN48의 공연이 미성년 관람불가였던 이유는 그 공연의 내용이나 수위 때문이 아니라, '도쿄 청소년의 건전한 육성에 관한 조례' 때문이다. 이 조례에 따르면 10시 이후의 공연 등에는 청소년이 참여 할 수 없게 되어 있으며, 당시 SDN48의 공연은 8시 30분에 공연 시작, 10시가 넘어서 공연이 끝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2010년에 있었던 18세 미만 해금을 기준으로 (이것은 메이저 데뷔를 위한 포석이기도 하였지만) 공연이나 가사 등의 성적 코드 수위가 내려 간 것은 사실.


4.1. 다른 그룹과의 차이점[편집]


  • 평균 연령이 10대 후반인 AKB48 자매 그룹들과는 달리 구성원들이 모두 20대이다. 연령 하한선은 있지만 상한선은 없다.
  • 팀A, 팀K, 팀B, 팀4로 나뉘어 활동하는 AKB48과는 달리 SDN48 전체가 하나의 팀으로만 활동한다. 다만 극장 공연은 1기생과 2/3기생으로 나뉘어 진행했다.
  • 구성원들의 연애가 공식적으로 허용되어 있다. 연애가 그리 자유롭지 않은 일본 아이돌 시장에서는 이례적인 경우. 단 기혼자의 경우 활동 중에 아이를 가져서는 안 된다.
  • SDN48에 들어오기 전에 다른 방면으로 연예계 활동을 하던 멤버들이 많다.
  • AKB48과는 달리, 극장 공연 관람료가 연령/성별 구별 없이 3,000엔으로 고정되어있다.
  • 싱글 선발이 16명이 아닌 12명이었다.
  • 48그룹 멤버들은 일반적으로 가명 사용이 금지되어 있지만[9] 이 그룹에서는 가명 사용이 허용되어 있다.


4.2. 파생 그룹: 7cm[편집]


파일:external/stage48.net/7cmPromo.jpg

공식 홈페이지

이 그룹은 엄밀히 말해서는 SDN48의 유닛은 아니다. SDN48이 전원 졸업한 후, 졸업 멤버들중 1년간 뮤지컬에서 함께했던 멤버들이었던 이토 마나, 이마요시 메구미, 우메다 하루카, 카이다 쥬리, 카토 마미, KONAN, 호소다 미유로 새롭게 결성한 그룹이다. 처음에 캐치프레이즈는 "졸업했던 nhk홀에서 다시 공연을!"였으며, 인디 앨범을 냄과 동시에 이벤트에서 팀 결성을 발표하였다. 이후 유튜브 채널을 통해 그룹의 탄생을 알렸고, 이벤트 등으로 모은 수익으로 2014년 1월, 에이벡스 트랙스를 통해 두번째 미니 인디 앨범을 발매하였다. SDN48 시절과는 다르게 상당히 에이벡스 같은 곡들이 수록된 것이 특징. 당시 다시 "20대 후반의 악바리근성"이란 캐치프레이즈를 내세우며 길거리 라이브 등 여러가지 이벤트를 펼쳤다. 심지어는 3000장을 넘기지 않으면 전원해산이란 강수를 두고 활동했다. 팬들의 성원으로 3000장을 달성했으나, 7월 1주년 단독라이브에서 우메다, 카이다, 카토, KONAN이 졸업을 발표하였다. 표면적인 이유는 각자의 길을 가기 위해서였지만, 코난 블로그에 따르면 프로듀서가 바뀌면서 트러블이 생겼던 것 같다. 이후 2014년 연말에는 호소다, 이토까지도 그룹을 떠났다. 이후 이마요시 메구미의 전 소속사에서 추가 멤버를 영입해서 'TRY OUT'이라는 별개의 그룹으로 이들은 7cm의 영혼을 계승받는다는 컨셉으로 곡도 똑같은 곡으로 해서 활동을 하며 맥을 잇고 있었으나, 몇년 뒤 이마요시가 탈퇴하면서 결국 해체의 길을 걷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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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받으려는 사이에 해체를 해버렸으니 대중적인 인기를 끌 수도 없었다[3] 당시에는 내가 네트워크 소속이었다.[4] 여기에 대해서 추가로 설명하면 일본에선 그라비아 아이돌은 연예계의 한 직업군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거기에 SDN48이 잡았던 컨셉까지 더해서 수위가 높은 화보가 탄생을 한 것이다.[5] 이 기사 참고.[6] 실제론 저렇게까지 심하게 적혀 있지 않았다. 그냥 이러한 환경에서 활동하는 건 힘들 것이라는 정도였다. 저 내용은 찌라시에 있던 내용이다. 마지막 앨범 다큐멘터리 특전에선 토가사키가 멤버들의 잘못이 아니라고 말하기까지 한다.[7] SDN48의 레이블이었던 유니버설 재팬은 이 과정에서 꽤 고생을 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유니버설은 이미 이전에도 Chocolove라는 AKB48의 유닛과 계약했었는데, 이 Chocolove가 나카니시 리나의 졸업으로 인해 공중 분해된 적이 있다. AKB48 관련으로 두 번이나 고생을 한 셈. 그 후 타카하시 미나미HKT48이 유니버설 재팬을 통해 음반을 내면서 48 그룹과 유니버설 사이의 안 좋은 인연은 끝을 맺었다.[8] 이에 방송국 홍보부 측에서는 구두주의하겠다는 발언만 할 뿐 미노 본인에 대한 이야기는 언급도 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피해자 여성은 오히려 방송을 접고 한동안 잠적해야 했다. 다만 미노 본인도 이 건과 방송사 직원이었던 차남의 절도 행위 후 체포 건으로 끝없이 구설수에 올랐지만, 기자 회견 자리에서는 여전히 성희롱 사실을 부인했다. 이후 그가 진행하던 방송 프로그램 다수가 하차 조치되었고, 몇개월 뒤에 복귀했으나, 이전 만큼의 인기는 아니게 되었고, 결국, 2021년 3월을 끝으로 고정으로 진행하는 프로가 전무한 상황이 되었다. 결국 퇴사하고 프리랜서로 전향했다. 하지만 기업인으로서의 미노 몬타는 아버지가 운영하던 닛코쿠라는 제조업체를 물려받았고, 지금도 사장으로 있기 때문에 별 타격없이 활동하고 있다.[9] 단, 야마다 나나는 제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