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L 벤피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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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SL 벤피카 로고.svg
'''

SL 벤피카
'''
SL Benfica
정식 명칭
Sport Lisboa e Benfica
별칭
Águias (독수리들)
Encarnados (빨간색)
Glorioso (영광의 팀)
팬애칭
벤피퀴스타
약칭
SLB
창단
1904년 2월 28일 (120주년)[1][2]
구단 형태
시민구단[3]
소속 리그
파일:프리메이라 리가 로고.svg프리메이라 리가 (Primeira Liga)
연고지
리스본 (Lisbon)
홈구장
이스타디우 다 루스 (Estádio da Luz)
(64,642명 수용)[4]
라이벌
FC 포르투 - 우 클라시쿠
스포르팅 CP - 리스본 더비
회장
[[포르투갈|
파일:포르투갈 국기.svg
포르투갈
]][[틀:국기|
]][[틀:국기|
]]
후이 코스타 (Rui Costa)
감독
[[독일|
파일:독일 국기.svg
독일
]][[틀:국기|
]][[틀:국기|
]]
로저 슈미트 (Roger Schmidt)
주장
[[아르헨티나|
파일:아르헨티나 국기.svg
아르헨티나
]][[틀:국기|
]][[틀:국기|
]]
니콜라스 오타멘디 (Nicolás Otamendi)
부주장
[[포르투갈|
파일:포르투갈 국기.svg
포르투갈
]][[틀:국기|
]][[틀:국기|
]]
주앙 마리우 (João Mário)
UEFA 랭킹
16위 출처
영구결번
29}}} 미클로스 페헤르 (Miklós Fehér)[5]
공식 웹사이트
파일:SL 벤피카 로고.svg 파일:X Corp 아이콘(블랙).svg[[파일:X Corp 아이콘(화이트).svg 파일:페이스북 아이콘.svg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파일:유튜브 아이콘.svg 파일:틱톡 아이콘.svg 파일:LinkedIn 아이콘.svg
우승 기록
★★★
프리메이라 리가(1부)
(38회 / 최다 우승)
1935-36, 1936-37, 1937-38, 1941-42, 1942-43, 1944-45, 1949-50, 1954-55, 1956-57, 1959-60,
1960-61, 1962-63, 1963-64, 1964-65, 1966-67, 1967-68, 1968-69, 1970-71, 1971-72, 1972-73,
1974-75, 1975-76, 1976-77, 1980-81, 1982-83, 1983-84, 1986-87, 1988-89, 1990-91, 1993-94,
2004-05, 2009-10, 2013-14, 2014-15, 2015-16, 2016-17, 2018-19, 2022-23
타사 드 포르투갈
(29회 / 최다 우승)
1929-30, 1930-31, 1934-35, 1939-40, 1942-43, 1943-44, 1948-49, 1950-51, 1951-52, 1952-53,
1954-55, 1956-57, 1958-59, 1961-62, 1963-64, 1968-69, 1969-70, 1971-72, 1979-80, 1980-81,
1982-83, 1984-85, 1985-86, 1986-87, 1992-93, 1995-96, 2003-04, 2013-14, 2016-17
타사 다 리가
(7회 / 최다 우승)
2008-09, 2009-10, 2010-11, 2011-12, 2013-14, 2014-15, 2015-16
수페르타사
(9회)
1980, 1985, 1989, 2005, 2014, 2016, 2017, 2019, 2023
UEFA 챔피언스 리그
(2회)
1960-61, 1961-62
클럽 기록
최고 이적료 영입
[[튀르키예|
파일:튀르키예 국기.svg
튀르키예
]][[틀:국기|
]][[틀:국기|
]]
오르쿤 쾨크취 (Orkun Kökcü)
(2023년, From 페예노르트 로테르담, 2,500만 €)
최고 이적료 방출
[[포르투갈|
파일:포르투갈 국기.svg
포르투갈
]][[틀:국기|
]][[틀:국기|
]]
주앙 펠릭스 (João Félix)
(2019년, To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1억 2,600만 €)
최다 출장
[[포르투갈|
파일:포르투갈 국기.svg
포르투갈
]][[틀:국기|
]][[틀:국기|
]]
네네 (Nené) - 577경기 (1968-1986)
최다 득점
[[포르투갈|
파일:포르투갈 국기.svg
포르투갈
]][[틀:국기|
]][[틀:국기|
]]
에우제비우 (Eusébio) - 473골 (1961-1975)
리그 득점왕
(32회)
[[포르투갈|
파일:포르투갈 국기.svg
포르투갈
]][[틀:국기|
]][[틀:국기|
]]
주리뉴 (1942-43, 1949-50)
[[포르투갈|
파일:포르투갈 국기.svg
포르투갈
]][[틀:국기|
]][[틀:국기|
]]
조세 아구아스 (1951-52, 1955-56, 1956-57, 1958-59, 1960-61)
[[포르투갈|
파일:포르투갈 국기.svg
포르투갈
]][[틀:국기|
]][[틀:국기|
]]
에우제비우 (1963-64, 1964-65, 1965-66, 1966-67, 1967-68, 1969-70, 1972-73)
[[포르투갈|
파일:포르투갈 국기.svg
포르투갈
]][[틀:국기|
]][[틀:국기|
]]
아르투르 조르즈 (1970-71, 1971-72)
[[포르투갈|
파일:포르투갈 국기.svg
포르투갈
]][[틀:국기|
]][[틀:국기|
]]
후이 조르당 (1975-76, 1979-80)
[[포르투갈|
파일:포르투갈 국기.svg
포르투갈
]][[틀:국기|
]][[틀:국기|
]]
네네 (1980-81, 1983-84)
[[앙골라|
파일:앙골라 국기.svg
앙골라
]][[틀:국기|
]][[틀:국기|
]]
바타 (1988-89)
[[스웨덴|
파일:스웨덴 국기.svg
스웨덴
]][[틀:국기|
]][[틀:국기|
]]
마츠 마그누손 (1989-90)
[[포르투갈|
파일:포르투갈 국기.svg
포르투갈
]][[틀:국기|
]][[틀:국기|
]]
후이 아구아스 (1990-91)
[[포르투갈|
파일:포르투갈 국기.svg
포르투갈
]][[틀:국기|
]][[틀:국기|
]]
시망 사브로자 (2002-03)
오스카르 카르도소 (2009-10, 2011-12)
조나스 (2015-16, 2017-18)
하리스 세페로비치 (2018-19)
카를로스 비니시우스 (2019-20)
피지 (2019-20)
다르윈 누녜스 (2021-22)

1. 개요
2. 스쿼드
2.1. 유명 선수
3. 역대 감독
4. 역대 리그 순위
5. 역사
5.1. 창단 그리고 거듭된 성과
5.2. 황금기와 침체기
5.3. 2003년부터 현재
5.5. 2023-24 시즌
6. 엠블럼
8. 이야깃거리
8.1. 구트만의 저주
9. 여담
10. 둘러보기



1. 개요[편집]



파일:aguia-estadio-da-luz-1-new.jpg

E PLURIBUS UNUM
수많은 것들 중 단 하나[6]

스포르트 리스보아 이 벤피카(Sport Lisboa e Benfica; SLB). 일반적으로 벤피카로 알려진 이 프로 축구 클럽은 리스본을 연고로 하며 포르투갈 축구의 최상위 리그 프리메이라 리가에서 경쟁을 펼치고 있다.[7] 홈구장은 2003년도부터 이스타디우 다 루스를 사용중이다.

1904년, 스포르트 리스보아(Sport Lisboa)라는 이름으로 창립된 벤피카는 1933년 프리메이라 리가의 창단 멤버로 일명 포르투갈 축구의 ‘트레스 그란데스(Três Grandes)’[8]라고 불리우며 단 한번도 리그에서 강등된 적이 없다.

무려 84개의 주요 우승 트로피를 획득하며 포르투갈에서 가장 많은 우승 트로피를 손에 넣은 포르투갈 대표 명문 클럽이자 FIFA로부터 12번째로 성공적인 20세기 축구 클럽 그리고 IFFHS로부터 20세기 유럽 축구 클럽 중 9번째로 선정된 클럽이다.

이러한 명성에 힘 입어 포르투갈의 그리스도 훈장, 헨리 왕자 훈장, 공로 훈장을 받는 영예를 떠안았으며 전 세계적으로 1,400만 명의 해외 팬들과 25만 명 이상의 유료 회원을 보유하고 있는 자국 최대 인기 클럽이다. 벤피카의 서포터들은 '벤피퀴스타(Benfiquistas)'로 불린다.


2. 스쿼드[편집]





2.1. 유명 선수[편집]








3. 역대 감독[편집]





4. 역대 리그 순위[편집]


파일:SL 벤피카 로고.svg
역대 리그 순위

[ 펼치기 · 접기 ]
시즌

리그
순위
1906-07
-
리스본 주립리그
2
1907-08
-
리스본 주립리그
3
1908-09
-
리스본 주립리그
2
1909-10
-
리스본 주립리그
1
1910-11
-
리스본 주립리그
2
1911-12
-
리스본 주립리그
1
1912-13
-
리스본 주립리그
1
1913-14
-
리스본 주립리그
1
1914-15
-
리스본 주립리그
2
1915-16
-
리스본 주립리그
1
1916-17
-
리스본 주립리그
1
1917-18
-
리스본 주립리그
1
1918-19
-
리스본 주립리그
2
1919-20
-
리스본 주립리그
1
1920-21
-
리스본 주립리그
4
1921-22
-
리스본 주립리그
2
1922-23
-
리스본 주립리그
2
1923-24
-
리스본 주립리그
3
1924-25
-
리스본 주립리그
3
1925-26
-
리스본 주립리그
5
1926-27
-
리스본 주립리그
5
1927-28
-
리스본 주립리그
2
1928-29
-
리스본 주립리그
2
1929-30
-
리스본 주립리그
2
1930-31
-
리스본 주립리그
5
1931-32
-
리스본 주립리그
3
1932-33
-
리스본 주립리그
1
1933-34
-
리스본 주립리그
5
1934-35
1
프리메이라 리가
3
1935-36
1
프리메이라 리가
1
1936-37
1
프리메이라 리가
1
1937-38
1
프리메이라 리가
1
1938-39
1
프리메이라 디비종
3
1939-40
1
프리메이라 디비종
4
1940-41
1
프리메이라 디비종
4
1941-42
1
프리메이리 디비종
1
1942-43
1
프리메이라 디비종
1
1943-44
1
프리메이라 디비종
2
1944-45
1
프리메이라 디비종
1
1945-46
1
프리메이라 디비종
2
1946-47
1
프리메이라 디비종
2
1947-48
1
프리메이라 디비종
2
1948-49
1
프리메이라 디비종
2
1949-50
1
프리메이라 디비종
1
1950-51
1
프리메이라 디비종
3
1951-52
1
프리메이라 디비종
2
1952-53
1
프리메이라 디비종
2
1953-54
1
프리메이라 디비종
3
1954-55
1
프리메이라 디비종
1
1955-56
1
프리메이라 디비종
2
1956-57
1
프리메이라 디비종
1
1957-58
1
프리메이라 디비종
3
1958-59
1
프리메이라 디비종
2
1959-60
1
프리메이라 디비종
1
1961-62
1
프리메이라 디비종
3
1962-63
1
프리메이라 디비종
1
1963-64
1
프리메이라 디비종
1
1964-65
1
프리메이라 디비종
1
1965-66
1
프리메이라 디비종
2
1966-67
1
프리메이라 디비종
1
1967-68
1
프리메이라 디비종
1'
1968-69
1
프리메이라 디비종
1
1969-70
1
프리메이라 디비종
2
1970-71
1
프리메이라 디비종
1
1971-72
1
프리메이라 디비종
1
1972-73
1
프리메이라 디비종
1
1973-74
1
프리메이라 디비종
2
1974-75
1
프리메이라 디비종
1
1975-76
1
프리메이라 디비종
1
1976-77
1
프리메이라 디비종
1
1977-78
1
프리메이라 디비종
2
1978-79
1
프리메이라 디비종
2
1979-80
1
프리메이라 디비종
3
1980-81
1
프리메이라 디비종
1
1981-82
1
프리메이라 디비종
2
1982-83
1
프리메이라 디비종
1
1983-84
1
프리메이라 디비종
1
1984-85
1
프리메이라 디비종
3
1985-86
1
프리메이라 디비종
2
1986-87
1
프리메이리 디비종
1
1987-88
1
프리메이라 디비종
2
1988-89
1
프리메이라 디비종
1
1989-90
1
프리메이라 디비종
2
1990-91
1
프리메이라 디비종
1
1991-92
1
프리메이라 디비종
2
1992-93
1
프리메이라 디비종
2
1993-94
1
프리메이리 디비종
1
1994-95
1
프리메이라 디비종
3
1995-96
1
프리메이라 디비종
2
1996-97
1
프리메이리 디비종
3
1997-98
1
프리메이라 디비종
2
1998-99
1
프리메이라 디비종
3
1999-00
1
프리메이라 디비종
3
2000-01
1
프리메이라 리가
6
2001-02
1
프리메이라 리가
4
2002-03
1
프리메이라 리가
2
2003-04
1
프리메이라 리가
2
2004-05
1
프리메이라 리가
1
2005-06
1
프리메이리 리가
3
2006-07
1
프리메이라 리가
3
2007-08
1
프리메이라 리가
4
2008-09
1
프리메이리 리가
3
2009-10
1
프리메이라 리가
1
2010-11
1
프리메이라 리가
2
2011-12
1
프리메이라 리가
2
2012-13
1
프리메이라 리가
2
2013-14
1
프리메이라 리가
1
2014-15
1
프리메이라 리가
1
2015-16
1
프리메이라 리가
1
2016-17
1
프리메이라 리가
1
2017-18
1
프리메이라 리가
2
2018-19
1
프리메이라 리가
1
2019-20
1
프리메이라 리가
2
2020-21
1
프리메이라 리가
3
2021-22
1
프리메이라 리가
3
2022-23
1
프리메이라 리가
1



5. 역사[편집]


파일:SL BENFICA.webp}}}

5.1. 창단 그리고 거듭된 성과[편집]


파일:1905년 벤피카.jpg}}}
1904년 당시 벤피카 1군 선수들
1904년 2월 28일, 카타타우스 그룹(Catataus Group)과 아소시아소 도 벰(Associação do Bem) 사람들은 포르투갈 선수들로 구성된 스포르트 리스보아(Sport Lisboa)라는 이름의 사회문화적인 축구 구단을 결성하기 위해 만난다. 총 24명이 이 회의에 참석하였는데, 이 회의 과정 속에 조세 호사 호드리게스가 클럽의 회장으로, 다니엘 도스 산토스 브리토가 총무로, 마누엘 구를레이드가 재무 담당관으로 임명되었다. 창립자들은 구단의 색상을 빨간색과 흰색, 로고는 독수리로, 그리고 모토는 “수많은 것들 중 단 하나(E pluribus unum)”로 하기로 결정한다. 스포르트 리스보아는 1905년 1월 1일, 새해에 자신들의 첫 경기를 치뤘으며 이 경기에서 구단 역사상 첫 골까지 기록하며 이 경기를 승리로 장식한다. 여러 경기들을 치루고 승리를 거듭하면서 명성을 알리기 시작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구단은 열악한 운영 조건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홈 경기장인 테하스 도 디짐바르가도르(Terras do Desembargador)가 잔디가 아닌 흙 경기장이였다는 점이였다. 이러한 열약한 환경으로 인해 1907년 8명의 스포르트 리스보아 선수들이 스포르팅 CP로 이적을 하였으며 이러한 과정 속에 두 구단과의 라이벌리가 심화되기 시작하였다.

1908년 9월 13일, 스포르트 리스보아는 상호합의하에 그루포 스포르트 벤피카(Grupo Sport Benfica)[11]를 인수하고 구단의 이름을 스포르트 리스보아 이 벤피카(Sport Lisboa e Benfica), 줄여서 SL 벤피카로 변경한다. 합병에도 불구하고 이 두 그룹은 서로를 맞춰가며 구단을 운영하였는데, 스포르트 리스보아측은 본인들이 맨처음 구단을 성립할 때 정한 팀의 정체성, 팀색상, 독수리 문양 및 모토를 유지하였으며 그루포 스포르트 벤피카측은 본인들이 사용하던 홈 경기장인 캄포 다 페이테라(Campo da Feiteira)와 메인 디렉터 그리고 클럽 하우스를 유지하기로 한다. 이 두 그룹은 스포르트 리스보아가 포르투갈 내에서 인정받는 구단이고 축구의 인기에 힘입어 리스본내에서 꽤 대중적인 구단이였기에 SL 벤피카의 창단일을 스포르트 리스보아에 맞추기로 결정한다. 로고와 관련해서는, 벤피카 로고에 있는 사이클 바퀴는 스포르트 리스보아 구단 로고에 사이클 바퀴를 추가하여 그루포 스프르트 벤피카의 가장 중요한 스포츠 종목인 사이클링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홈 경기장인 캄포 다 페이테라를 임대하는 것에 문제가 존재하였고, 마침내 벤피카는 1913년 최초의 잔디 축구장인 캄포 데 세치 히오스(Campo de Sete Rios)로 홈 경기장을 이전하게 된다. 4년 뒤, 벤피카는 이번엔 인상된 임대료를 내는 것에 거부를 하며 다시 한번 홈 경기장을 캄포 지 벤피카(Campo de Benfica)로 이전한다. 결국 1925년에 마침내 본인들 소유의 경기장인 이스타디우 다 아모레이아스(Estádio das Amoreiras)를 홈 경기장으로 사용하게 되었고 1940년 이스타디우 도 삼포 그란지(Estádio do Campo Grande)로 옮기기 전까지 그 곳에서 홈 경기를 치루게 된다.

포르투갈 리그 출범은 1934년에 시작하였는데, 벤피카는 첫 출범 시즌 3위를 기록 한 뒤, 이후 세 시즌 연속 우승을 차지하게 된다. 1940년대에는 벤피카는 3번의 프리메이라 리가 우승[12]과 4번의 타사 드 포르투갈[13] 우승을 경험한다.

벤피카의 첫 번째 국제적인 성과는 1950년 라틴 컵[14][15]에서 우승했을 때이다. 이 트로피는 포르투갈 구단이 획득한 최초의 국제적인 우승 트로피이다. 1957년 벤피카는 다시 한번 결승전에 오르며 우승을 노렸으나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에서 레알 마드리드에게 패하고 만다.

1952년, 조아킴 페레이라 보갈류가 회장으로 선출되고 1954년 오토 글로리아 감독이 부임함에 따라 벤피카는 더욱 현대화되고 전문화된다. 초기 좌석 수용 인원이 4만명인 에스타디오 다 루즈(Estádio da Luz)로 홈 경기장을 이전하였으며, 1960년에는 좌석 수용 인원을 7만명까지 확장한다.

1950년대 벤피카는 3번의 프리메이라 리가 우승[16]과 6번의 타사 드 포르투갈[17]을 우승한다. 1955년에 벤피카는 포르투갈의 챔피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직위로부터 초대 유러피안컵을 초대받지 못하였고, 결국 1957/58시즌 세비야를 상대로 UEFA 대회 데뷔전을 치루게 된다.


5.2. 황금기와 침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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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유로피언컵 2연패 이후 우승 트로피를 들고 있는 당시 팀의 수문장, 코스타 페레이라
명장 벨라 구트만 감독이 이끄는 벤피카는 1961년 유로피언컵 결승에서 바르셀로나를 3:2로 승리하면서 우승을 차지한 뒤 바로 다음 해 다시 한번 결승에 진출하였고, 레알 마드리드도 5:3 으로 격파하면서 2년 연속 유럽 챔피언이 된다. 결과적으로 인터컨티넨탈컵에도 참가하였으나 1961년에는 페냐롤, 1962년에는 산토스에게 패해 준우승을 차지한다. 이후 벤피카는 1963년, 1965년, 1968년 총 3번 더 유로피안컵 결승전에 진출하였으나 63년에는 AC 밀란에게 패배, 65년에는 인터 밀란에게 패배, 1968년에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게 패배하면서 3번의 준우승을 경험하게 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벤피카는 1965년, 1966년, 1969년에 UEFA 클럽 랭킹 1위를 차지하는 위엄을 달성한다. 그뿐만 아니라, 1968년에는 프랑스 풋볼 선정 올해의 유러피언 팀 상을 수상한다. 1960년대 벤피카는 8번의 프리메이라 리가 우승[18], 3번의 타사 드 포르투갈[19] 및 두 번의 유로피안컵 우승[20]을 달성한다. 이러한 성과 대부분은 흑인 최초이자 포르투갈 클럽에서 최초로 발롱도르를 수상한 에우제비우의 엄청난 활약상이 큰 역할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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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발롱도르를 수상하는 벤피카 역대 최고의 레전드 에우제비우
1970년대 벤피카는 보르게스 쿠티뉴 회장하에서 6번의 프리메이라 리가 우승[21] 및 2번의 타사 드 포르투갈[22] 우승을 차지한다. 1971/72시즌 유러피언 컵 준결승에도 진출하였지만 요한 크루이프가 에이스로 팀을 이끌던 아약스에게 패하고 만다. 이 다음 시즌에는 포르투갈 클럽 최초로 지미 하간 감독의 지휘아래 무패 리그 우승을 해내는 위엄을 선보인다.[23] 게다가 에우제비우는 본인의 최다 득점 기록에 2골 부족한 40골을 기록하며 유럽 최다 득점자가 되었으며 그렇게 1968년에 이어 두 번째 유러피언 골든부츠를 수상하는 영예를 안게 되었다. 1976년 10월부터 1978년 9월까지 벤피카는 무려 리그에서 56경기 무패를 달성하였고 1979년에는 외국인 선수까지 영입하며 이렇게 벤피카의 70년대는 마무리된다.

80년대도 마찬가지로 벤피카는 계속해서 번창을 거듭하는데, 1980/81시즌엔 수페르타사 드 포르투갈[24], 프리메이라 리가, 타사 드 포르투갈을 모두 우승하며 한 시즌에 자국 트로피를 모두 획득한 최초의 포르투갈 클럽이 된다. 그 이후 팀에 부임한 스벤고란 에릭손 감독의 지도하에 프리메이라 리가 2연패[25] 및 타사 드 포르투갈[26] 1회 우승을 차지하였고 1983년에 UEFA컵 결승에도 진출하나 안더레흐트에 패해 아쉽게 준우승을 한다. 홈 경기장인 에스타디오 다 루즈도 확장 공사를 통해 1985년 3층까지 경기장을 넓히며 당시 유럽에서 가장 크고 전 세계에서 3번째로 큰 경기장으로 탈바꿈 시킨다. 1년 뒤, 1985년 수페르타사 드 포르투갈 우승, 1986년 타사 드 포르투갈을 우승한 벤피카는 이후 1988년부터 1994년까지 3번의 프리메이라 리가 우승[27] 1번의 타사 드 포르투갈[28] 1번의 수페르타사 드 포르투갈 우승[29]을 차지한다. 1988년과 1990년엔 유러피언컵 결승전까지 진출하나 결승에서 PSV와 AC 밀란에게 패해 이번에도 아쉬운 준우승에 만족해야만 했다.

1980년대 초반부터 발생한 재정 문제 그리고 이 10년이라는 기간 동안 선수단에 투입한 대규모 투자는 클럽 재정을 악화시키기 시작하였다. 그저 막연한 지출 및 의심스러운 선수 계약[30]이 더욱 상황을 악화시켰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벤피카는 엄청난 빚을 지게 되었으며 세금과 선수들에게 급여를 지불하기도 벅찬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1994년부터 2003년까지 벤피카에 11명의 감독들이 팀을 지휘하였는데 1995/96시즌 타사 드 포르투갈에서 우승은 차지하나 1999년 셀타비고에게 7:0 수치스러운 패배를 당하며 유럽 클럽 대항전에서 가장 큰 패배를 경험한다. 더 나아가 2001/02시즌 리그 6등을 차지하면서 2년간 유럽 대항전에도 진출하지 못하게 된다. 하지만 마누엘 빌라리뉴가 당시 벤피카 회장으로 새롭게 선출된 이후 팀을 살리기 위해 노력하였고 새로운 에스타디우 다 루즈 건설을 승인한다.

5.3. 2003년부터 현재[편집]


마누엘 빌라리뉴 회장에 뒤를 이어 회장 자리를 역임한 루이스 필리페 비에이라 회장과 함께 벤피카는 조세 무리뉴 감독이 지휘하는 FC 포르투를 상대로 타사 드 포르투갈 우승을 차지하면서 드디어 우승 트로피 가뭄을 끝낸다. 이듬해에는 리그 우승까지 차지하면서 1994년 이후 10년만에 다시 한번 리그 트로피를 가져왔으며 수페르타사 드 포르투갈 우승도 함께 이룬다. 그 이후 새롭게 출범한 컵대회 타사 다 리가 우승까지 해내며 포르투갈 클럽 최초로 모든 자국 컵대회 우승을 이루는 팀이 된다. 하지만 이후 2009년까지 어떠한 우승 트로피도 없는 무관이 계속된다. 유럽 대항전에서 벤피카는 2005/06시즌 이후 챔피언스 리그 조별예선에 3년 연속 진출하였으며, 가장 기억에 남는 성과는 2005/06시즌 16강에서 당시 유럽 디펜딩 챔피언이던 리버풀을 1,2차전 합계 3:0으로 꺾으며 8강에 진출했을 때이다.

2009/10시즌에 조르제 제수스 감독이 새로운 감독으로 임명되어 2015년까지 벤피카 감독직을 수행하였는데, 이 6시즌 동안 벤피카는 2013/14시즌 포르투갈 축구에서 전례없는 도메스틱 트레블[31]을 달성한 것을 포함하여 10개의 자국 트로피를 획득하였으며 2013/14시즌 이후 2014/15시즌에도 리그 우승을 차지하며 마지막 리그 연속 우승이였던 1982/83시즌, 1983/1984시즌 이후 첫 리그 2연패를 달성한다.

유럽 클럽 대항전에서는 17년만에 2009/10시즌 유로파 리그 준결승까지 진출하였으며 2011/12시즌에는 챔피언스 리그 8강, 2012/13시즌과 2013/14시즌에는 2년 연속으로 유로파 리그 결승전까지 진출하며 2015년 유에파 클럽 랭킹에 무려 6위에 자리하기 까지 한다.

이 후 제수스 감독의 후임으로 온 후이 비토리아 감독의 지휘 아래 4년 연속으로 프리메이라 리그 우승을 차지하였으며[32] 이 기간동안 1번의 타사 드 포르투갈과 타사 다 리가 우승과 2번의 수페르타사 드 포르투갈 우승을 이루어낸다. 하지만 유럽 대항전에서는 그렇다할 성과를 보이지 못하는데 2015년에는 챔피언스 리그 조별예선에서 FC 바젤에서 무려 5:0 대패를 당하는 수모까지 겪으며 결국 조별예선 탈락이라는 부진한 성적을 거둔게 된다.

2018/19시즌 부진한 성적에 책임을 지고 비토리아 감독이 경질되자 브루노 라즈 감독이 소방수로서 시즌 중반을 책임졌으며 이 시즌 바로 리그 우승을 차지하며 벤피카의 37번째 리그 우승을 안겨주게 된다. 이후 슈퍼컵에서 스포르팅을 꺾은 뒤 우승을 차지한 뒤로 벤피카는 아직까지 그 어떠한 트로피도 얻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다시 2020/21시즌 제수스 감독이 팀에 복귀한 뒤 코로나 19 대유행이라는 힘든 상황속에서 150m 유로라는 대규모 투자를 해줬음에도 챔피언스 리그 3차 예선에 탈락하며 조별 리그에도 진출하지 못하였고 수페르타사 드 포르투갈에서 패배, 타사 드 포르투갈 결승전에서 패배, 우승도 이루지 못하며 3위를 기록한다.

2021/22시즌 후이 코스타가 회장이 된 벤피카는 리그에서는 저번 시즌과 마찬가지로 3등을 기록하지만 챔피언스 리그에서는 8강에 오르며 오래간만에 유럽 대항전에서 좋은 성적을 기록한다. 특히 조별리그에서 FC 바르셀로나를 유로파리그로 보내버리면서 16강 진출에 성공했으며, 16강에서는 6전 전승으로 올라온 아약스를 꺾고 8강에 올라가는 등 굵직굵직한 성과를 만들어냈다.

5.4. 2022-23 시즌[편집]





5.5. 2023-24 시즌[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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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가르브 컵
2023년 7월 21일 금요일 03:30(CET+8)

이스타디우 알가르브 (파로)
주심: 플라비오 두아르테
관중: 17,516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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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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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피카
알 나스르 F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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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득점 아이콘.svg
-
경기 하이라이트 | 매치 리포트

6. 엠블럼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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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피카 엠블럼 변천사
벤피카 엠블럼에 있는 독수리는 자주성, 권위, 그리고 고귀함을 상징하며 각각 용기와 평화를 상징하는 빨간색과 흰색이 방패 위에 덧칠해져 있다. 모든 구성원 간의 화합을 상징하는 클럽의 모토 “E pluribus unum(수많은 것들 중 단 하나)”가 방패 위에, 클럽의 이니셜 SLB는 축구공 위에 써있다.

이 모든 것들이 그루포 스포르트 벤피카의 첫 번째 스포츠인 사이클링을 나타내는 자전거 바퀴 위에 겹쳐져 있다.

1904년 벤피카가 창단된 이후, 총 네 번의 엠블럼이 존재한다. 현재 엠블럼의 기원은 스포르트 리스보아와 그루포 스포르트 벤피카가 합병한 1908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가장 최근 변경된 사항은 독수리 모양 변경 및 재배치 그리고 휠 크기 축소이다.

7. 홈 구장[편집]





8. 이야깃거리[편집]



8.1. 구트만의 저주[편집]


벤피카가 유럽을 평정할 당시 팀의 최전성기를 이룩하던 벨라 구트만[33] 감독은 프리메이라 리가와 유럽대항전을 휩쓸고 보드진에게 급료 인상을 요구했다. 성공적인 모습을 보여주었기에 당연히 요구를 받아들일 것이라 생각했지만 보드진은 차갑게 거절했고, 그 소식에 불쾌함을 나타낸 구트만 감독은 팀을 떠나면서 벤피카에게 크나큰 저주를 내린다. 가히 축구판 염소의 저주.

앞으로 100년 동안 벤피카는 유럽 대회 우승을 차지하지 못할 것이다!

Sem mim, nem em cem anos o Benfica vai conquistar outra taça europeia!

벤피카의 서포터들은 처음에는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으나... 구트만이 나간 그 이후 정말로 벤피카는 지금 현재까지도 유럽대항전에서 우승을 차지하지 못하고 있다. 챔피언스 리그야 워낙 벤피카를 뛰어넘는 상위급 팀이 즐비하니 그렇다 치더라도, 유로파리그 정도는 충분히 우승을 노려봄직한데도 결승은커녕 제대로 성적을 낸 적이 별로 없다. 그 내용들을 보자면 정말 벤피카 팬들 입장에서는 눈물이 절로 나오는 저주다. 벤피카 팬들에게는 더 절망적인 내용은 2023년 기준으로 저주가 풀리려면 아직도 39년이 남았다.

  • 1962-63 유러피언컵 결승전 1-2 패배 AC 밀란
당시 1961-62 시즌 위너로서 디펜딩 챔피언의 입장이였던 벤피카에게 새로운 변혁의 바람이 불고 있었다. 벤피카의 기둥이자 주장이였던 조제 아구아스는 혜성같이 나타난 특급 유망주 흑표범 에우제비우와 함께 큰 활약을 펼치며 팀을 유럽의 챔피언으로 올려놓았지만, 1962-63 시즌에는 아구아스가 부진하면서 주전 경쟁에서 지고 만 것이다. 어쩌면 원인은 이때문일수도 있었다. 벤피카의 유일한 에이스가 된 에우제비우는 팀을 3연속 결승에 올려놓는 활약을 펼쳤다. 그렇게 해서 만난 결승 상대는 유럽의 명문이자 붉은색 유니폼을 입은 밀란의 축구팀이였다. 결승전이 시작되자 에우제비우가 선제골을 넣으며 앞서 벤피카의 3연속 우승에 청신호가 켜졌었다. 그러나 밀란의 조제 알타피니[34]에게 후반전, 두골을 얻어맞고 역전당했다. 그리고 이것을 기점으로 저주가 시작됐다. 이 결승전이 벤피카에겐 특히 아쉬울 수 있는 게, 이때 우승했다면 벤피카는 3연속 유로피언 컵 우승으로 포르투갈 팀들 중 유일하게 UEFA 영예의 배지를 부착할 수 있는 팀이 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다음 시즌에는 16강전에서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를 만나 일찌감치 탈락하고 말았다. 하필이면 에우제비우가 결장했던 도르트문트 원정 경기에서 1차전의 승리가 무색하게 0-5 스코어로 대패했기 때문이다.

이 당시의 벤피카는 벤피카의 챔피언스리그 역사상 가장 강력했던 모습을 보였던 시즌이다. 저번 시즌 16강딱을 겪은 이후로 절치부심했는지, 에우제비우를 필두로 조세 토레스, 조세 아우구스투 삼각편대가 유럽을 폭격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승전까지 도달하면서 에우제비우와 조세 토레스가 각각 9골로 공동 득점왕을 달리고 있었고, 조제 아우구스투도 5골을 기록하는등 폭발적인 화력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렇게해서 만난 상대가 이번에는 저번 시즌 레알을 격침시키고 유로피언 컵 우승을 차지했던 푸른색 유니폼을 입은 밀란의 축구팀이였다. 밀라노에서 열린 유로피언 컵 결승전은 인테르가 안방의 가호를 받은 덕분인지 벤피카의 삼각편대가 역대급으로 조용했었고, 오히려 16강전에서 2골을 넣은게 전부였던 인테르의 검은 화살 자이르 다 코스타에게 결승골을 헌납하여 패배하고 만다. 다만 단순 안방가호 뿐만이 아니라 당시 인테르도 초 강팀이었다, 루이스 수아레즈, 산드로 마촐라와 자친토 파케티를 주축으로 하여 마리오 코르소, 타르키시오 부르니치 등 우수한 선수들을 이끌며 62-63 시즌 및 64-65, 65-66 시즌의 세리에 A를 연속으로 우승함과 더불어 63-64시즌과 언급한 64-65 시즌도 우승하여 유러피언컵 2연패를 달성하였으며 또한 유럽 챔피언과 남미 챔피언끼리 맞붙는 인터컨티넨탈컵에서 1964년과 65년 모두 승리하며, 1960년대의 인테르는 그 유명한 '위대한 인테르(L‘a Grande Inter)'라는 별명으로 명성을 날리던 팀이었다.

후반전에 벤피카가 동점을 만들면서 경기는 연장전까지 갔지만 그후 3골을 내리 얻어맞고 진다.


당시 PSV는 8강전 보르도전과 준결승 레알전 모두 1, 2차전 무승부를 거둔 후 승부차기로 올라왔다. 결론은 5연속 무승부로 우승했다. 트레블까지 달성했다. 당시 PSV의 감독을 맡고있던 사람은 바로 거스 히딩크다.

  • 1989-90 유러피언컵 결승전 0-1 패배 AC 밀란
결승전을 앞두고 에우제비우와 수뇌부는 구트만의 묘소에 참배를 하였지만 그 결과는 당시 밀란이 자랑하는 오렌지 삼총사 멤버 중 한 명인 레이카르트에게 결승골을 얻어맞고 1-0 패배했다.

  • 2012-13 유로파 리그 결승전 1-2 패배 첼시 FC
바르사셀틱 FC때문에 유로파로 밀려났으나 30년만에 유로파 결승까지 진출하는 쾌거를 이룬다. 그러나 함께 챔스 조별리그에서 유로파로 밀려난 첼시 FC에게 패하며 우승을 헌납하였다. 후반전까지 1:1로 잘 버티다가 추가시간이 다 끝났을 무렵 첼시의 마지막 공격인 코너킥에서 이바노비치에게 헤더 한방 얻어맞고 그대로 끝났다.

  • 2013-14 유로파 리그 결승전 0-0 승부차기 (2-4) 패배 세비야 FC
유로파리그에서 2연속 결승 진출에 성공하지만 이번엔 세비야 FC에게 승부차기까지 가는 접전 끝에 져서 준우승했다. 참고로 이 시즌 우승을 차지한 세비야는 2013-14, 2014-15, 2015-16 시즌까지 유로파 리그 3연패를 비롯해 총 7번의 유로파 리그 우승을 달성하며 유로파 최다 우승 클럽이라는 영예와 함께 '유로파의 제왕'이라는 별명을 얻는다.
그럼에도 벤피카는 1962년 마지막 우승 이후로 유럽대항전 8강에 21번[35] 진출하였고, 준결승에서는 4번 진출[36]하였다. 특히 강호들이 즐비한 챔피언스리그에서만 결승전을 제외하고도 8강이상의 성적을 12번이나 냈다.[37] 그러나 2015년 이후로는 결승전은커녕 그 근처에도 가지 못하는 실정이다. '강호'의 이미지는 옅어지고 빅클럽에 유망주를 팔아 먹고사는 셀링클럽 취급을 받고 있다. 이처럼 구트만 감독의 저주와 함께 챔피언스리그에서의 결승전 5회, 유로파리그 결승전 3회에서 우승 기회를 싸그리 다 날려버린 역사는 벤피카 최대의 오점으로 남게 되었다.[38][39] 이에 더해서 벤피카는 챔피언스리그 우승팀들 중에서는 유일하게 빅 이어를 들어보지 못한 구단이다. 왜냐하면 지금의 빅 이어는 1966-67 시즌부터 사용했기 때문이다.

2022년 벤피카 U-19 팀이 UEFA 유스 리그를 우승하면서 일부 언론은 ‘저주가 깨졌다’는 기사를 내보내기도 했지만, 고작 유스 우승으로 저주가 깨졌다고 볼 수 있는지는 애매한 것이 사실이다.

2021-2022 시즌부터 유로파 컨퍼런스 리그가 생겼는데 위상은 낮은 대회지만 어쨌거나 챔피언스리그와 유로파 리그처럼 공식 유럽 대항전에 속하고 난이도도 상대적으로 낮은 대회인만큼 이 대회에 참가하면 저주를 깰 가능성이 어느 정도 생겼다. 물론 벤피카가 이 대회에 나가려면 챔피언스리그와 유로파 리그에 못나갈 정도 수준으로 리그에서의 성적이 상대적으로 좋지 않아야 한다.

사실 진지하게 분석하자면 진짜 저주 때문에 그런게 아니라 1990년대 이후로 유럽 축구가 빅리그와 다른 리그와의 격차가 커지면서 유럽대항전 우승을 빅리그의 빅클럽들이 독식하면서 이런 현상이 빚어진 거라고 보는 편이 더 타당할 것이다.[40][41] 벤피카 뿐만 아니라 포르투갈 축구 자체도 1960년대 이후부터 2000년대 이전 사이엔 유럽 축구계에서 변방으로 몰락하여 월드컵과 유로 본선 진출을 가끔 하는 수준이었던 시절도 있던 것도 이런 불운이 강화, 지속 되는 원인 중 하나일 것이다.


9. 여담[편집]


  • 2006년 11월 9일, 벤피카는 가장 많은 유료 회원인 160,398명이 등록됨에 따라 기네스북에 등재되었다. 2009년 9월 30일, 벤피카는 200,000번째 유료 회원이 등록되었다고 발표되었다. 2004년 5월, 벤피카는 94,714명에서 200,000명으로 회원을 늘리기 위해 소시오 정책을 실시하였다. 그 결과로 5년 후, 벤피카는 기존의 94,714명의 회원에서 105,000명이 넘는 신규 유료 회원을 추가하여, 회원수가 두 배 이상 증가하였다. 벤피카는 국제적으로 가장 영향력 있는 클럽으로 손꼽힌다. 2022년 8월 26일, 벤피카는 300,000명의 유료 회원이 등록되었다고 발표했다.

  • 대한민국과도 인연이 있는 구단이다. 1970년 9월에 에우제비우가 소속될 당시 내한하여 국가대표팀인 청룡(1진)팀과 백호(2진)과 친선경기를 가진 바 있다. 경기 결과는 백호는 0-5로 뭉개졌고 청룡은 이회택이 1골을 먼저 넣었지만 페널티골를 허용하며 1-1로 비겼다. 참고로 당시 벤피카의 주전 선수 중 한 명이 이후에 대한민국 국대 감독이 될 움베르투 코엘류였다. 그리고 19년 뒤인 1989년 6월에 대통령배 국제축구대회 조별예선에서 청룡팀과 다시 한번 맞붙었는데 이번에는 정반대로 청룡팀이 최순호가 페널티킥 골을 조긍연이 추가골을 넣으면서 2:0로 이겼다.

  • 세계적인 명장 주제 무리뉴가 처음으로 감독 커리어를 시작한 팀이 바로 벤피카다. 1999-2000시즌이 끝나고 유프 하인케스가 벤피카의 감독직을 사임하자 하인케스의 후임으로 무리뉴가 들어왔지만 구단 수뇌부와의 충돌로 인해 9경기만에 무리뉴는 팀을 떠나고 말았다. 그 후, 2년이 지나 FC 포르투의 지휘봉을 잡은 무리뉴는 포르투의 두번째 전성기를 열었고 벤피카는 무리뉴를 붙잡지 않은 점을 땅을 치며 후회했다고 한다.

  • 유럽대항전에서 2위로 분류되는데 거기다가 덧붙이자면 레알 마드리드 다음으로 두 번째로 챔스 우승을 하였고 참가 시즌도 레알에 이어 두 번째로 많다.

  • 그 하기 힘들다는 무패 준우승도 리그에서 한번, 유로파 리그에서 한번 총 두 번 해봤다.[42]

  • 구단 자체 TV 채널을 운영하며, 영어로도 중계한다. 근데 영어 해설 위원들 억양에 유럽 포르투갈어 억양이 섞인 걸 봐서 포르투갈인들이 직접 해설하는 모양이다. Eurosport 아태판이 이들의 중계를 받아 내보내니 참고해서 직접 들어보자.


  • 여자 축구팀도 있다. 벤피카 여자 축구팀은 그야말로 리그를 씹어먹는 수준으로, 아니 그냥 그 어느 팀도 못 건드리는 수준의 강호 그 이상이다. 어느 정도냐면 15경기(리그+컵) 중 15경기 전승은 물론이고 261득점 0실점이라는 기록과 함께 야구에서나 보일법한 스코어를 매 경기마다 펼치는 중. 열 골을 넘기는 경기가 대다수이고 그나마 가장 적게 득점한 경기는 스포르팅과의 맞대결이었는데, 그 적게 득점한 것도 4골차 승리했다. 한 경기에 가장 많이 터트린 득점수는 28득점이었다.

  • 서정원이 이적할 뻔했던 곳이다. 사실은 공식 선수로서 프리 시즌 경기도 뛰었으나 모종의 이유로 국내 복귀를 해야만 했다. 자세한 내용은 서정원 문서 참고. 그렇지만 벤피카 측에서는 여전히 서정원을 공식 선수로 예우하고 있음이 밝혀졌고, 이를 뒤늦게 안 서정원이 직접 벤피카에 확인차 연락을 했다가 사실임을 확인하고, 관계자가 구단에 찾아와달라고 해서 만남이 성사, 서정원의 이름이 프린팅 된 9번 유니폼을 건넸다. 본인 인증샷


10. 둘러보기[편집]






[1] #[2] 신기하게도 독일 분데스리가의 명문인 바이에른 뮌헨과 창단일이 단 하루 차이다.[3] 시민구단이기 때문에 구단주는 없고, 소시오들의 투표하에 회장이 당선되는 방식이다.[4] 포르투갈 축구 국가대표팀 제2홈구장이다. 한국으로 치면 서울올림픽주경기장 급 위상. 제1홈구장은 리스본 외곽에 위치한 37,593명 규모의 자모르 국립 경기장.[5] 2000년대 SL 벤피카 소속으로 활약했던 헝가리 국적의 공격수 미클로스 페헤르의 등번호인 29번이 영구결번으로 지정되어 있다. 2004년 1월 25일 비토리아 SC와의 경기 도중 심장마비로 쓰러졌고 안타깝게도 다음날 오전 0시 10분에 사망했다. 이후 벤피카는 선전을 하면서 2003~04 시즌 페넌트레이스를 우승하고 우승 트로피를 바치며 그를 기렸다.[6] 사진 속 독수리는 벤피카의 마스코트 '빅토리아'로, 홈 경기 전 필드 위를 날도록 하는 전통이 있다. 팀의 모토인 라틴어는 미국 국장에 새겨진 문구로 유명한데, 이때는 '여럿으로 이루어진 하나'로 해석한다.[7] 축구 팀이 전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하지만 아무래도 종합 스포츠 클럽이다보니 풋살, 농구, 핸드볼, 배구팀 등을 함께 운영하고 있다.[8] SL 벤피카, FC 포르투, 스포르팅 CP. 즉 포르투갈 리그의 빅3이다.[9] 벤피카의 황금기를 이끈 레전드 선수이다.[10] 임대.[11] 번역하자면 스포츠 벤피카 그룹[12] 1941/42시즌, 1942/43시즌, 1944/45시즌[13] 1940년, 1943년, 1944년, 1949년[14] 일명 코파 라티나, 포르투갈어로는 타사 라티나(Taça Latina). 라틴 유럽 국가인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갈의 클럽들 간에 펼쳐진 축구 토너먼트이었다.[15] 1949년에 첫 대회가 개최되었는데, 각 국의 최상위 리그 우승 팀들이 참가하였다. 1957년 대회가 유러피언컵의 탄생으로 마지막이 되었으며 미트로파컵이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 사라지고 유러피언컵이 탄생하기 전까지의 기간 동안은 라틴컵이 유럽의 가장 권위있는 대회로 여겨졌다.[16] 1949/50, 1954/55, 1956/57[17] 1951년, 1952년, 1953년, 1955년, 1957년, 1959년[18] 1959/60시즌, 1960/61시즌, 1962/63시즌, 1963/64시즌, 1964/65시즌, 1966/67시즌, 1967/68시즌, 1968/69시즌[19] 1962년, 1964년, 1969년[20] 1961년, 1962년[21] 1970/71시즌, 1971/72시즌, 1972/73시즌, 1974/75시즌, 1975/76시즌, 1976/77시즌[22] 1970년, 1972년[23] 총 30경기 가운데 무려 23경기 연승을 달성하며 28승 2무 리그 득점은 101골 기록[24] 프리메이라 리가 우승팀과 타사 드 포트루갈 우승팀이 붙는 컵대회[25] 1982/83시즌, 1983/84시즌[26] 1983년[27] 1988/89시즌, 1990/91시즌, 1993/94시즌[28] 1993년[29] 1989년[30] 이 기간동안 100명이 넘는 선수를 영입한다.[31] 프리메이라 리가, 타사 드 포르투갈, 타사 다 리가 세 대회 우승[32] 이 기록은 포르투갈 축구 역사상 최초의 리그 4연패 기록이다.[33] 헝가리가 자랑하는 전설적인 명장 중 한명이다. 선수시절에선 오스트리아미국에서 활동하였고 은퇴 후 감독으로써 헝가리,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아르헨티나, 포르투갈, 스위스, 루마니아, 그리스, 브라질, 우루과이, 키프로스의 클럽을 지휘하는 등 북미, 남미와 유럽무대에서 잔뼈가 굵은 감독이었으며 벤피카에선 에우제비우와 함께 UEFA 챔피언스리그(당시 유러피언컵)을 두번이나 제패하는 등 정상급 감독이었다.[34] 알타피니는 이 대회에서만 14골을 넣으며 득점왕도 차지한 바 있다.[35] 챔피언스리그 16번, 유로파 리그 2번,컵 위너스 컵 3번[36] 챔피언스리그 1번, 유로파 리그 1번, 컵 위너스 컵 2번[37] 90년대 이전에는 빅 리그 팀이 아니더라도 8강에 간혹 진출하는 팀들이 있었다지만 딱 의외의 모습만 몇번 보여주는것에 그쳤을 뿐이었고 1993년 유로피언 컵이 챔피언스리그로 개칭되면서는 더욱 리그간 격차가 더 심해져 이후에 조별리그에서 탈락할것이라 생각한 팀들이 8강에 올라오면 거의다 이변수준의 평가를 받는다.[38] 챔피언스 리그에서는 7회 준우승을 한 세리에 A유벤투스에 이어 분데스리가바이에른 뮌헨과 함께 준우승 횟수 공동 2위에 랭크되어 있다. 다만 뮌헨은 6회 우승 기록도 보유하고 있는 빅 이어 영구 소장팀이다.[39] 유로파 리그에서는 아예 리그 1올랭피크 드 마르세유와 함께 공동 최다 준우승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40] 비슷하게 염소의 저주 때문에 월드시리즈 우승을 못한다는 소리에 시달리던 시카고 컵스의 경우도 오래 되고 열악한 홈경기장으로 인해 낮경기를 주로 하는 특성을 비롯한 구단 운영의 문제, 그리고 염소의 저주라는 소문 때문에 어차피 우승 못하는 팀으로 인식 되어 잘 하는 선수들은 굳이 오려고 하지 않고, 소속 선수들은 소속 선수들대로 염소의 저주를 의식하고 부담을 느끼는 경우 등이 겹쳐서 염소의 저주가 깨진 2016년 이전까지 오랫동안 월드시리즈 우승을 못했던 것이라고 분석 되고 있다.[41] 1990년대 이후로 빅리그의 빅클럽이 아닌 클럽이 유럽대항전에서 우승을 한 경우로 대표적으로 벤피카의 라이벌인 FC 포르투의 2003-2004 시즌 챔피언스리그 우승의 경우가 있긴 하지만 당시의 포르투의 감독과 선수들이 역대급 수준이었고 또한 이 시즌은 포르투 뿐만 아니라 AS 모나코데포르티보 라 코루냐가 일찌감치 레알 마드리드, 첼시 FC, 유벤투스 FC, AC 밀란 등 기존의 빅클럽들을 탈락 시키는 등 역대급 이변이 속출한 대회였다. 게다가 포르투의 토너먼트 대진도 16강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의 경기를 제외하면 8강 올랭피크 리옹, 4강 데포르티보, 결승 모나코라는 쉬운 상대였다.[42] 1977-78 시즌 21승 9무 0패 리그 준우승 & 2013-14 시즌 결승전까지 6승 2무였을 뿐 아니라 결승전까지 0:0(승부차기 패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