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천년민주당

덤프버전 :

파일:대한민국 대통령기.svg 대한민국 여당
참여정부


새정치국민회의
(1998.2.25.~2000.1.20.)

새천년민주당
(2000.1.20.~2002.5.6.)
(2003.2.25.~2003.9.29.)


열린우리당
(2004.5.20.~2007.2.28.)


새정치국민회의
(흡수합당)

새천년민주당

민주당

열린우리당

민주국민당
(개별 합류)

국민통합21
(개별 합류)

파일:새천년민주당 로고.svg
새천년민주당
한문명
-千年民主黨
영문명
Millennium Democratic Party
등록 약칭
민주당
창당일
2000년 1월 20일
당명 변경
2005년 5월 6일 (민주당)
해산일
2007년 6월 27일 (중도통합민주당으로 신설 합당)
통합한 정당

[[새정치국민회의|
파일:새정치국민회의 흰색 로고타입.svg
]]
(2000년 1월 20일 흡수합당)
주소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여의나루로 67 (여의도동)
대표
한화갑 / 4선 (14-17대)
원내대표
이낙연 / 재선 (16·17대)
사무총장
김성순 / 초선 (16대)
정책위의장
김효석 / 재선 (16·17대)
대통령
김대중 / 제15대 (2000.1.20.~2002.5.6.)
노무현 / 제16대 (2003.2.25.~2003.9.29.)
의석 수
9석 / 299석}}}
당 색
청록색 (#00AA7B)}}}
정책 연구소
국가전략연구소
공식 사이트
www.minjoo.or.kr/
2005년 5월 5일 기준

1. 개요
2. 역사
2.1. 창당
2.4. 노무현 전 대통령의 민주당 탈당
2.5. 분당과 17대 총선 참패
2.6. 민주당으로 당명 변경
3. 역대 지도부
3.1. 총재
3.2. 대표
3.3. 원내대표
4. 출신 대통령
5. 역대 선거결과
5.1. 대통령 선거
5.2. 국회의원 선거
5.3. 전국동시지방선거
5.4. 재보궐선거
6. 당가
7. 갤러리
8. 기타
9. 둘러보기



1. 개요[편집]



파일:새천년민주당 창당대회.jpg

새천년민주당 창당 대회에서 당 총재를 맡은 김대중 당시 대통령이 당기를 들고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정계 복귀를 한 후 1995년에 창당한 '새정치국민회의'를 바탕으로, 2000년 1월 20일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 대비해 세력을 확대 개편해 창당한 정당이다.

2002년 제16대 대통령 선거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승리로 정권 재창출에 성공하나, 2003년 노무현 전 대통령의 탈당과 친노 세력의 열린우리당 창당으로 야당이 되었다. 이듬해인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역풍으로 인한 17대 총선에서 크게 패배했다. 이후 2005년 당명을 민주당으로 바꾸었다.

비법인사단(社團)으로는 자그마치 7년 5개월 7일을 존속하여 민주당계 정당 역사상 세 번째로 오래 존속하였다. 참고로 1위는 11년 1개월의 기록을 보유한 신민당이며 2위는 9년 6개월의 기록을 보유하고 있는 현재 최대야당인 더불어민주당[1], 4위는 7년 4개월의 기록을 보유하고 있는 민주한국당[2]. 민주당계 정당의 시조라 할 수 있는 '1955년 민주당'은 5년 7개월의 기록으로 현재 5위이다.

당시 도메인은 'www.minjoo.or.kr'이었다.


2. 역사[편집]










2.1. 창당[편집]


새정치국민회의제16대 국회의원 선거를 대비해 그간의 세력부족을 해결하고 원내 안정의석을 확보하기 위해 1999년 하반기부터 신당 창당을 선언하였다. 국민회의 총재 권한대행[3]으로 있던 이만섭 전 의장이 직접 창당준비위원장을 맡고, 기존의 인물들에 더하여 386세대 민주화운동 인사들, 각계의 전문가 출신 인사들, 지역 정계입문자들, 서영훈KBS 사장과 최영희한국여성단체협의회 회장, 김운용 대한체육회 회장 등의 유명인사들에 장태완 전 수경사령관과 유삼남해군참모총장을 포함한 군인 출신 인사들을 대거 영입했다. 여기에 이미 1998년에 국민신당[4]을 흡수하면서 합류해 있던 이인제에게 중앙선거대책위원장을 맡기고 충청남도 논산시-금산군 지역구 공천을 주며 충청권 공략을 책임지게 했다. 그만큼 세력 규모에서는 한나라당과 맞먹는 정당이 되었다.[5]


2.2. 제16대 국회의원 선거[편집]


그러나 새천년민주당은 16대 총선에서 석패했다. 김대중 대통령이 직접 총재를 맡고[6], 국민신당 세력의 이만섭과 이인제를 전면에 내세우며 기를 몰아주었으나 남북정상회담 개최 소식이 일찍 터지면서 되려 정략적이란 반응으로 야당(=보수 한나라당) 표가 결집한 것. 선거 출구조사만 해도 민주당은 제1당이 될 것으로 예측되었으나 봉화-울진 선거구에서 김중권 후보[7]가 19표 차로 낙선하는 등 접전이 벌어진 선거구 11곳 가운데 10곳에서 패하며 115석에 그쳐, 133석의 한나라당에게 제1당을 내줬다. 한나라당은 이로서 여당의 과반을 저지하고 오히려 원내 과반수에서 4석 모자란 거대 야당으로 자리매김했으며 이회창의 1인 지배 체제를 확고하게 굳혔다.

따지고보면 경상북도 지역에서 당선인을 낼 뻔 했기도 했고 그 동안 보수 텃밭이라는 이미지가 있었던 강원도 의석 9석 중 5석을 획득하였으며 그때까지 민주당계 정당의 불모지였던 충청권에서 8석을 얻는 등 선전하며 전국 정당으로 자리매김하는 첫발을 떼었지만, 자유민주연합과의 선거 공조 무산으로 수도권에서만 한나라당에게 20석을 내준것이 패인이었다. 만약 자유민주연합과 선거연대가 성사되었다면, 새천년민주당은 과반에 근접하고, 자민련은 교섭단체를 꾸릴 수 있었다.[8]

계속되는 선거 패배, 더 나아가 각종 게이트가 터지면서 김대중 전 대통령의 레임덕이 심해진다. 그리고 동교동계를 번갈아 선임한 서영훈 - 김중권 - 한광옥의 임명직 대표 체제는 흔들리게 되었다. 이 상황 속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은 2001년 11월 8일부로 여당 총재직을 사퇴했으며, 동교동계에서도 분열이 일어나서, 이른바 양갑 - 즉 한화갑과 권노갑의 갈등이 불거지게 되었다. 이 시기에 권노갑을 위시로 한 동교동계는 이인제를 대권으로 밀었으나, 한화갑은 이른바 국민참여경선을 통해서 천신정으로 대표되는 소장파들과 자신의 입지를 넓히고자 하였다. 물론 권노갑은 한화갑에 비해 전면에 나서지 못했는데, 정치사건으로 감옥에 가면서 원외, 당외의 2선으로 밀러났던 탓이 컸다.[9] 그러나 권노갑이 전면에 나서지 못했다고 해서 이인제가 위축된 것은 아니었다.[10]


2.3. 제16대 대통령 선거[편집]


2002년 4월 27일 서울 경선에서 노무현이 새천년민주당 최종 후보로 선출된 후 8개월간 민주당은 갈등의 극치를 보여주기 시작했다. 초반에는 노무현이 한나라당이회창에게 앞서나가는 듯 했으나, 한일 월드컵 기간에 치러진 제3회 지방선거에서 노무현 후보가 장담한 수도권과 부산에서 참패를 하면서 노무현의 입지는 흔들리게 되었다. 이에 따라 당내 비노 내지는 반노세력은 정몽준과 연합, 단일화를 시도하게 된다. 이는 정몽준과 연대하여 정권을 재창출하려는 청와대의 의지도 있었으나, 이미 감정적 앙금은 커진 상태였다. 이에 노무현은 당의 움직임에 대해 후보 재신임을 물었고 민주당은 만장일치로 노무현을 후보로 유지시킨다는 입장을 밝히면서 일단락됐다.

그러나 여당의 분열은 계속되었다. 월드컵 4강 신화의 열풍을 타고 대선 유력 후보로 떠오른 정몽준에게 밀리며 노무현은 3위로 주저앉고, 민주당에서는 다시 후보 교체와 노무현 후보 반대 여론이 일기 시작했다. 거기에 8.8 재보선까지 민주당이 참패하며 노무현과 민주당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도가 바닥을 기어가게 된다. 이 때 안동선 의원이 탈당을 선언하면서 비노계의 탈당이 시작되었다.

9월 정몽준이 대선 출마를 선언하고 국민통합21을 창당한 뒤 민주당은 본격적으로 단일화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급기야 11월에는 후보 단일화를 요구하는 후보 단일화 협의회, 일명 후단협으로 불리는 의원들이 민주당을 집단 탈당하기에 이르렀고 노무현 후보 흔들기가 계속된다. 그러자 노무현은 여론조사를 통해 단일화 작업을 진행하기로 하고 '국민참여운동본부'라는 이름의 대선 캠프를 만들었으며, 11월 25일 여론조사를 통해 노무현이 정몽준을 1.5%차로 이기고 최종 대선 후보로 확정되었다. 이 과정에서 후단협에 참가한 인사 과반수 이상이 다시 결과에 승복하고 원대복귀를 선언하지만 전용학을 시작으로 일부 인사들은 이에 반발하여 아예 한나라당에 입당하여 이회창 후보를 지지하는 상황까지 치닫는다.

노무현 후보는 단일화 효과에 따라 이회창을 5% 이상의 격차로 넉넉하게 따돌렸으며 막판 보수표 결집으로 접전까지 왔지만 역전당할 수준까지는 오지 않았다. 비록 대선 하루 전 정몽준이 노무현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면서 위기가 찾아오기는 했지만 순위가 역전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으며[11], 노무현은 제16대 대통령 선거에서 48.91%의 득표율로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에 극적으로 당선된다.


2.4. 노무현 전 대통령의 민주당 탈당[편집]


“신당 창당에 대해서는 관여하지 않습니다. 다만 민주당이 가진 정통성은 그대로 갖고 갈 것입니다. 민주당 정체성을 배반하고 훼손한 일이 없습니다. 정당하게 제시된 노선, 정통성에 근거한 것을 다 계승하고 발전시키고 있습니다.”

- 2003년 6월 2일, 노무현 전 대통령 취임 100일 차 기자회견


2002년 16대 대선에서 노무현이 당선되자 갈등은 잦아드는 듯 했다. 2003년 초순만 해도 이른바 허니문 기간이었다. 구 당권파, 즉 비주류가 대통령에게 소외 받는다고 불만을 표하는 수준이었고, 대통령이 당내 화합을 다독이는 상황에서 당내 인사들을 청와대 만찬에 초청하는 등 봉합의 가능성도 있었다.

그러나 결국 그해 하순에 와서는 당 내 친노 세력과 대통령의 드라이브로 당내 쇄신 논쟁이 점차 불거졌고, 계파 갈등은 점점 심해졌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김대중 정권과 관련된 대북송금 특검이 터지자 노무현 전 대통령의 지지 세력 중 일부까지 신당 창당에 반대하는 상황까지 생겼다. 대표적인 경우가 추미애 의원과 조순형 의원.

운명의 날은 2003년 9월 4일이었다.[12] 중재파였던 정대철 당 대표[13][14] 등이 합의를 계획했으나, 결국 타결 직전 단계에서 박상천/권노갑 등의 동교동 노장파에서 "이념이 다르고, 색깔이 다르기에 함께 갈 수 없다"는 논리를 내세웠고, 당무회의 육탄 저지에 나서면서 합의는 무산되었다.

만약 합의가 성사되었다면 새천년민주당이란 이름은 재창당의 형식으로 명칭이 교체되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13년 이른 열린민주당 국민회의에서 새천년민주당으로 넘어간 선례처럼, 무난한 세확장이 가능한 재창당 안이 엎어진 건 2002년 대선 당시 분란의 연장선에서 바라봐야한다. 이미 후보 재신임, 친노와 비노 한번씩 찔러보았던 외부 세력과 재창당 등의 모든 시나리오가 실패로 돌아간 상황이었던 것이다. 무엇보다 재창당은 결국 의원 공천권의 문제가 되는데, 지분의 문제에서 친노와 비노는 합의가 불가능했다. '공천학살'이란 뒷말이 나올지언정 한 쪽이 온전히 승리하기엔 힘이 부족했던 상황이었다. 당시만 해도 지구당 위원장의 지위가 보장되는 시기였는데, 이들이 자리를 내놓지 않는 상황에서 경선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더불어 제2의 '호남맹주'를 노리는 구 동교동계 거물들과 아예 '호남정당'의 이미지를 표백, 제거하려고 하는 친노의 입장이 일치할 리가 없었다.

2003년 9월 21일, 정대철 대표를 포함한 37명의 의원이 '국민참여 통합신당(가칭)'을 구성하며 새천년민주당을 탈당했다. 뒤이은 9월 29일, 노무현 전 대통령도 새천년민주당을 공식 탈당했다. 명분은 국정 운영 전념이었지만, 이미 대통령이 당 내에서 대북송금사건 이후 호남과 동교동계 의원들에게 큰 비판을 받고 있던 실정이어서 선택의 폭은 좁았다. 또한 친노 인사들도 이미 열린우리당을 창당하기 위해 선도 탈당한 상황이었기에, 분당은 현실화가 되어가고 있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사실 처음엔 100석에 육박하는 여당을 버리고 분당을 하는 것에 회의적이었다. 그러나 명시적으로 반대를 하진 않아왔고, 의원들을 중심으로 신당 창당이 궤도에 오르게 되면서 '내 의견만 고집할 수 없다'며 탈당하게 된 것. 열린우리당 입당을 후일로 미룬 것 역시 같은 이유였다. 훗날 노무현은 자신이 창당한 것이나 다름 없는 열린우리당 역시 탈당하게 되는데, 이를 두고 탈당한 것으로 보이겠지만 실상은 쫓겨난 것이란 인터뷰를 남기기도 했다. #[15]

사실 자신이 주류인 당을 탈당하고 신당을 창당하는 행보는 이미 선례가 있었다. 바로 전 대통령인 김대중 전 대통령이 새천년민주당의 전신인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할 때의 일이다. 주류가 당권을 얻을 수 없거나, 힘겹게 얻더라도 비주류와 함께 가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내렸다는 고육지책[16]으로서의 공통점이 있다. 다만 국민회의는 15대 총선에서 예상보다 훨씬 적은 의석을 얻었고, 열린우리당은 17대 총선에서 승리했다는 차이가 있다. 반면 대통령 선거의 경우, 국민회의는 최초로 여야 정권교체를 이뤘지만 열린우리당은 재보궐과 지선에서 참패를 거듭하다가 기어이 대선까지 패하고 만다. 달리 말하면, 열린우리당의 창당 자체가 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정치적 파행이냐면 그런 것도 아니었다는 것이다. 물론 야당 분열인 국민회의 창당과 여당 분열인 열린우리당 창당은 그 파괴력에서 차이가 있었다고 할 수도 있다.[17][18]

새천년민주당은 노 전 대통령이 희대의 배신을 했다며 강력하게 비난 성명을 냈고, 한나라당은 신당으로 빨리 가라며 합류를 재촉했다. 잔류 민주당은 구(舊)주류의 박상천 최고위원이 대표직을 승계하고 뒤이은 11월 전당대회에서 조순형 대표를 선출하면서 재정비에 나섰다.

2.5. 분당과 17대 총선 참패[편집]


새천년민주당은 탈당파가 창당한 열린우리당과 기존의 새천년민주당으로 쪼개졌고, 양 세력은 서로 극단적으로 대립했다. 분당 시점(2003년 9월)에는 새천년민주당이 제2당(59석)으로 의석수가 더 많았다.[19] 열린우리당은 개혁국민정당 출신 의원 2명[20]한나라당에서 고작 '독수리 오형제'라는 5명의 의원[21]만 추가 편입했을 뿐, 초유의 제3당 여당이었다.

문제는 대통령의 행보였다. 노무현 대통령은 열린우리당에 입당하지 않은 상황에서도 계속 열린우리당에 우호적인 발언을 했고, 선관위로부터 지적을 받기도 했다. 새천년민주당에서는 이에 강력하게 항의하며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을 추진하였다. 탄핵 발의는 민주당 조순형 대표 체제에서 주도하고 한나라당이 동조하는 형태로 진행됐으며, 여기에 자민련이 막판에 끼어들었다.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 및 심판은 국회에서는 탄핵 소추안이 가결되었으나, 결국 헌재 기각으로 끝났다.

새천년민주당은 탄핵이라는 최악의 수를 둔 대가로 2004년 17대 총선 때는 겨우 9석 의석을 갖는데 그쳤다. 그나마도 전국구 4석을 포함한 결과.[22] 조순형 전 대표가 험지인 대구에 출마하고, 추미애 비상대책위원장이 삼보일배를 하는 등 반성 행보를 보였지만, 민심은 민주당을 외면했다. 탄핵도 탄핵이지만, 총선 와중에도 공천권을 두고 구주류와 신주류가 선관위까지 가서 서로 싸우며 자기가 공천권 행사하는 게 맞다고 쟁투하는 등 난리도 아니었으니 9석이나 얻은 게 용할 지경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당의 상황은 엉망이었다. 참고로 이 때 새천년민주당 비례대표로 국회의원이 된 사람이 바로 김종인.

사면초가의 상황에서 새천년민주당 세력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지지에 마지막 희망을 걸었지만 김 전 대통령은 탄핵을 저지른 그들에게 크게 실망하여 오히려 열린우리당을 공개적으로 지지하였고, 결국 호남에서도 처참하게 박살이 났던 것이다.[23]

이 총선 참패로 민주노동당에 의석수를 역전당해 원내 제4당까지 내려오면서, 2005년 4월 재보궐선거에서는 왕년의 여당이었던 당이 기호 4번을 다는 진풍경(?)이 연출되었다.[24]


2.6. 민주당으로 당명 변경[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민주당(2005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파일:민주당(2005년) 로고.svg

제17대 총선 이후 전남권(광주+전남) 지역정당으로 전락해 별볼일 없는 모습을 보여줬다. 설상가상으로 열린우리당 계열 인사[25]가 대선 당시 사용한 비용처리 문제를 두고 정당 보조금에 가압류까지 걸어버리면서 새천년민주당 지도부가 시위를 하며 갈등의 골이 더 깊어지는 사태까지 벌어지고 만다.

이후 정통성을 강화한다는 명분으로 2005년 5월 6일, 당명을 '민주당'으로 바꿨다. 꼬마민주당 시즌 3

이후 역사는 민주당(2005년) 문서 참조. 다만 흥미로운 건, 새천년민주당보다는 당명 개정 직후의 민주당이 당세가 조금이나마 나았다. 물론 회광반조였지만.

사단(社團)으로서의 새천년민주당-민주당은 2007년 6월 27일 민주당이 열린우리당에서 탈당한 김한길계 의원들(중도개혁통합신당)과 합당해 중도통합민주당으로 신설창당을 하면서 7년 5개월만에 끝났다. 그러나 중도통합민주당은 불과 2개월이 안된 8월 13일, 김한길계의 탈당으로 2개월만에 도로 2007년 민주당으로 돌아간다. 이후 2008년 2월 17일 총선을 앞두고 대통합민주신당과 합당하면서 통합민주당으로 거듭났을 때를 사실상 새천년민주당의 끝으로 보기도 한다. 창당 만 8년 28일만이었다.


3. 역대 지도부[편집]


파일:새천년민주당 흰색 로고.svg 파일:새천년민주당 흰색 로고타입.svg 총재 및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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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재와 지명직대표최고위원 병행
초대 총재
김대중
권한대행
한광옥

1-2대 대표
서영훈
3대 대표
김중권
4대 대표
한광옥

선출직대표최고위원
5대
한화갑
6대
정대철
7대
박상천
8대
조순형
비대위
한화갑

대표
9-10대
한화갑


* 초대부터 4대까지의 대표최고위원은 총재가 임명하는 지명직 대표최고위원이다. 5대부터 8대까지의 대표최고위원은 선출직 대표최고위원이며 그후 대표로 바뀌었다.




3.1. 총재[편집]


  • 초대: 김대중 (2000.1.20.~2001.11.8.)[26]
  • 권한대행: 한광옥 (2001.11.12.~2001.12.3.)[27]


3.2. 대표[편집]


  • 지명직 대표최고위원[29]
    • 초대: 서영훈 (2000.1.20.~2000.8.30.)
    • 2대: 서영훈 (2000.8.30.~2000.12.19.)[28]
    • 3대: 김중권 (2000.12.20.~2001.11.8.)
    • 4대: 한광옥 (2001.11.9.~2002.4.26.)
  • 선출직 대표최고위원
    • 5대: 한화갑 (2002.4.29.~2003.2.22.)[30]
    • 6대: 정대철 (2003.2.23.~2003.9.21.)[31]
    • 7대: 박상천 (2003.9.22.~2003.11.27.)[32]
    • 8대: 조순형 (2003.11.28.~2004.4.16.)[33]
  • 비상대책위원장
    • 임시 한화갑 (2004.4.19.~2004.4.26.)[34]
  • 대표
    • 9대: 한화갑 (2004.4.27.~2005.2.3.)
    • 10대: 한화갑 (2005.2.3.~2005.5.6.)[35]

저 중에서 한화갑, 한광옥은 그들이 그렇게도 싫어하던 한나라당의 후신인 새누리당의 대선 후보 박근혜를 지지하였다.[36] 한편 조순형은 한나라당의 총재였던 이회창과 손을 잡고 자유선진당 소속으로 18대 의원[37]을 지냈으며, 자유선진당이 새누리당에 합당될 무렵에 탈당했다.[38]


3.3. 원내대표[편집]


파일:새천년민주당 흰색 로고.svg 파일:새천년민주당 흰색 로고타입.svg 원내대표

[ 펼치기 · 접기 ]

||<-2><tablewidth=100%><bgcolor=#00aa7b> 원내총무 ||
||<width=50%> 초대
박상천 ||<width=50%> 제2대
정균환 ||
|| 제3대
이상수 || 제4대
정균환 ||
||<-2><bgcolor=#00aa7b> 원내대표 ||
|| 제5대
유용태 || 제6대
이낙연 ||
||<-2><width=50%><bgcolor=#fff,#1F2023> ||





4. 출신 대통령[편집]


대한민국 대통령
파일:대한민국 대통령 문장.svg

이름

임기
선출 방식
정당
취임일
퇴임일
8
파일:Kim_Dae-jung_presidential_portrait.jpg
파일:external/static.tumblr.com/purple_pixel.png
김대중
(1924 ~ 2009)
15
1998년 2월 25일
2003년 2월 24일
1997년 대선
직선 40.3%
새정치국민회의 (1998 ~ 00)
새천년민주당 (2000 ~ 02)
무소속 (2002 ~ 03)
9
파일:노무현_대통령.jpg
파일:external/static.tumblr.com/purple_pixel.png
노무현
(1946 ~ 2009)
16
2003년 2월 25일
2004년 3월 12일
(직무정지)
2002년 대선
직선 48.9%
새천년민주당 (2003)
무소속 (2003 ~ 04)
고건 국무총리가 권한대행 (2004년 3월 12일 ~ 2004년 5월 14일)
2004년 5월 14일
2008년 2월 24일
직무 복귀
(탄핵소추 기각)
무소속 (2004)
열린우리당 (2004 ~ 07)
무소속 (2007 ~ 08)


5. 역대 선거결과[편집]



5.1. 대통령 선거[편집]


연도
선거명
후보자
득표수 (득표율)
결과
2002년
16대
노무현
12,014,277 (48.91%)
당선

5.2. 국회의원 선거[편집]


연도
선거명
지역구 (비율)
비례대표 (득표율)
총 의석 (비율)
결과
2000년
16대
96 / 227 (42.3%)
19 / 46 (41.3%)
115 / 273 (42.1%)
원내 2당
2004년
17대
5 / 243 (2.0%)
4 / 56
9 / 299 (7.1%)
원내 4당


5.3. 전국동시지방선거[편집]


연도
선거명
광역단체장 (비율)
기초단체장 (비율)
광역의원 (비율)
기초의원 (비율)
2002년
3회
4/16 (25.0%)
49/232 (21.1%)
143 / 680 (21.0%)
[ㄱ]


5.4. 재보궐선거[편집]


연도
국회의원
광역단체장
기초단체장
광역의원
기초의원
2000년 1월

0 / 2

2000년 6월

1 / 7
9 / 32
0 / 57[ㄴ]
2000년 10월

0 / 2
2 / 9
0 / 37[ㄴ]
2001년 4월

0 / 7
1 / 6
0 / 14[ㄴ]
2001년 10월
0 / 3

2002년 8월
2 / 13

2002년 12월
0 / 1

0 / 1
0 / 3
0 / 4[ㄴ]
2003년 4월
0 / 3

0 / 2
0 / 4
0 / 23[ㄴ]
2003년 10월

0 / 4
1 / 9
0 / 66[ㄴ]
2004년 6월

1 / 4
1 / 19
2 / 38
0 / 53[ㄴ]
2004년 10월

2 / 5
1 / 7
0 / 35[ㄴ]
2005년 4월
0 / 6

1 / 7
1 / 10
0 / 21[ㄴ]


6. 당가[편집]


파일:새천년민주당 당가 악보.jpg

듣기[39]

찬란한 새 아침이 이 땅을 비출 때면
희망찬 내일 맑게 열린다 우리 함께 달린다
너와 나 하나 되어 힘차게 나아가자 민주당
새 시대 새 희망 창조하는 민주당
새 시대 열어가는 새천년민주당
화합과 개혁의 정치를 우리가 이뤄나갈 때
밝은 미래와 희망의 나라 우리 앞에 열린다
정의와 평화를 이루어 힘차게 나아가자 민주당
새 시대 새 희망 창조하는 민주당
새 시대 열어가는 새천년민주당


7. 갤러리[편집]



파일:16대 총선 전국구 새천년민주당1.jpg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비례대표 선거 포스터 (2000)


파일:17대 비례 민주당.jpg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비례대표 선거 포스터 (2004)


8. 기타[편집]



8.1. e-민주양[편집]


국내 정당 최초로 사이버 캐릭터를 만들어 마스코트로 활용한 정당이다. 자세한 사항은 e-민주양 문서 참조.


9. 둘러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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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독립촉성국민회|파일:대한독립촉성국민회 글씨(흰색).png

대한독립촉성국민회
]]
(1948.7.~1951.12.)
[[자유당|]]
(1951.12.~1960.4.)
[[민주당(1955년)|]]
(1960.8.~1961.5.)
[[한국민주당|파일:한국민주당 글씨(흰색).png

한국민주당
]]
(1948.7.~1949.2.)
[[민주국민당|파일:민주국민당 글씨(검정).png

민주국민당
]]
(1949.2.~1949.11.)
대한국민당
]](1949.11.~1951.12.)
박정희 정부

전두환 정부

노태우 정부

[[민주공화당|]]
(1963.12.~1973.3.)
[[민주공화당|]]
(1973.3.~1979.10.)
[[민주정의당|]]
(1981.1.~1990.1.)
[[민주자유당|]]
(1990.1.~1992.9.)
파일:유신정우회_한글로고.svg
(1973.3.~1979.10.)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

[[민주자유당|]]
(1993.2.~1996.2.)
[[신한국당|]]
(1996.2.~1997.11.)
파일:새정치국민회의 흰색 로고타입.svg

(1998.2.~2000.1.)
[[새천년민주당|]]
(2000.1.~2002.5.)
[[새천년민주당|]]
(2003.2.~2003.9.)
[[자유민주연합|]]
(1998.2.~2001.8.)
[[민주국민당(2000년)|]]
(2001.4.~2001.8.)
참여정부

이명박 정부

박근혜 정부

[[열린우리당|]]
(2004.5.~2007.2.)
[[한나라당|]]
(2008.2.~2012.2)
[[새누리당|]]
(2012.2.~2017.2.)
[[자유한국당|]]
(2017.2.~2017.3.)
문재인 정부

파일:대한민국 대통령 문장.svg

(2017.5.~2020.3.)

(2020.3.~2020.5.)

(2020.5.~현재)
[[더불어시민당|]]
(2020.3~2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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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 문서가 없는 평가 및 논란은 해당 주제 관련 문서를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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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 및 심판 · 고건 권한대행 체제 · 룡천역 열차 폭발사고 · 한칠레 FTA · 경부고속철도 1단계 개통 · KTX 운행 시작 · 광주 도시철도 1호선 개통 ·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 일본 문화 개방 · 환생경제 · 주 5일 근무 제도 시행 · 수능 9등급제 발표 · 4대 개혁 입법 · 질병관리본부 설립 · 이라크 평화·재건 사단 파견 · 김선일 피랍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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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철도공사 발족 · 다케시마의 날 조례 제정 · 2005년 재보궐선거 · 대연정 파동 · 호주제 민법 개정안 통과 · 530GP 사건 · 삼성 X파일 사건 · 8·31 종합부동산 대책 · 농민시위 · 부산 APEC 다자 정상회담 개최 · 황우석 배아줄기세포 논문
2006년
국민과의 인터넷 대화 · 한일관계에 대한 특별 담화문 · 대포동 2호 발사 사건 · 2006년 재보궐선거 ·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 · 전시작전통제권 환수 논란 · 헌재소장 공석 사태 · 남북출입사무소 설립 · 대전 도시철도 1호선 개통 · 북한 1차 핵실험 · 방위사업청 개청 · 대추리 사태 · 11.15 부동산 대책 · 사학법 재개정 논란
2007년
한미 FTA 타결 · 2007년 재보궐선거 · 행정중심복합도시 착공 · 남북열차 시험운행 · 참여정부 청와대 기자실 통폐합 논란 · 샘물교회 선교단 아프가니스탄 피랍 사건 · 2007 FIFA U-17 월드컵 대한민국 · 참여정부 평가포럼 · 10.4 남북공동선언 · 신정아 게이트 · 수능 등급제 시행 · 삼성 1호-허베이 스피릿 호 원유 유출 사고 · 제17대 대통령 선거
2008년
숭례문 방화 사건 · 호주제 폐지 · 이천 냉동창고 화재 사고
별도 문서가 없는 평가 및 논란은 해당 주제 관련 문서를 참고
노무현 개인과 관련된 문서는 틀:노무현 참고







''' 1996.5.30. ~ 2000.5.29.'''

[ 임기 개시 ]
여당

파일:신한국당 로고.svg

142석

야당
파일:새정치국민회의 흰색 로고.svg

79석


파일:자유민주연합 흰색 로고_축약.svg

48석


파일:민주당(1991년) 흰색 로고.svg

8석

무소속

15석

재적

299석

}}}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min-width: 33.3%; margin: 0 -10px"
[ 후반기 개시 ]
연립 여당
파일:새정치국민회의 흰색 로고.svg

87석


파일:자유민주연합 흰색 로고_축약.svg

49석

야당

파일:한나라당 흰색 구 로고.svg

152석



8석

무소속

3석

재적 {{{#!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2px 3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590009; font-size: .8em"
299석
}}}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min-width: 33.3%; margin: 0 -10px">
[ 임기 종료 ]
연립여당

파일:새천년민주당 흰색 로고.svg

98석


파일:자유민주연합 흰색 로고_축약.svg

52석

야당

파일:한나라당 흰색 구 로고.svg

128석


파일:민주국민당(2000년) 로고 흰색.svg

8석


파일:희망의 한국신당 흰색 로고.svg

3석

무소속

9석

재적

298석

제국 중추원 · 임시의정원
제헌 · 2 · 3 · 4 · 5민 · 5참 · 6 · 7 · 8 · 9 · 10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000.5.30. ~ 2004.5.29.'''

[ 임기 개시 ]
연립여당

파일:새천년민주당 흰색 로고.svg

119석


파일:자유민주연합 흰색 로고_축약.svg

17석

야당

파일:한나라당 흰색 구 로고.svg

133석


파일:민주국민당(2000년) 로고 흰색.svg

2석


파일:희망의 한국신당 흰색 로고.svg

1석

무소속

1석

재적 {{{#!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2px 3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580009; font-size: .8em"
273석
}}}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min-width: 33.3%; margin: 0 -10px"
[ 후반기 개시 ]
여당

파일:새천년민주당 흰색 로고.svg

111석

야당

파일:한나라당 흰색 구 로고.svg

130석


파일:자유민주연합 흰색 로고_축약.svg

14석


파일:민주국민당(2000년) 로고 흰색.svg

1석


파일:한국미래연합 흰색 로고.svg

1석

무소속

3석

재적 {{{#!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2px 3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580009; font-size: .8em"
260석
}}}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min-width: 33.3%; margin: 0 -10px">
[ 임기 종료 ]
여당

파일:열린우리당 1차 로고.svg

49석

야당

파일:한나라당 흰색 신 로고_가로.svg

139석


파일:새천년민주당 흰색 로고.svg

59석


파일:자유민주연합 흰색 로고_축약.svg

10석


파일:국민통합21 로고3.svg

1석

무소속

12석

재적

271석

제국 중추원 · 임시의정원
제헌 · 2 · 3 · 4 · 5민 · 5참 · 6 · 7 · 8 · 9 · 10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004.5.30. ~ 2008.5.29.'''

[ 임기 개시 ]
여당

파일:열린우리당 1차 로고.svg

152석

야당

파일:한나라당 흰색 신 로고_가로.svg

121석


파일:민주노동당 흰색 로고.svg

10석


파일:새천년민주당 흰색 로고.svg

9석


파일:자유민주연합 흰색 로고_축약.svg

4석


파일:국민통합21 로고3.svg

1석

무소속

2석

재적 {{{#!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2px 3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580009; font-size: .8em"
299석
}}}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min-width: 33.3%; margin: 0 -10px"
[ 후반기 개시 ]
여당

파일:열린우리당 흰색 2차 로고.svg

143석

야당

파일:한나라당 흰색 신 로고_가로.svg

126석

파일:민주당(2005년) 흰색 로고.svg

11석


파일:민주노동당 흰색 로고.svg

9석


파일:국민중심당 흰색 로고.svg

5석


파일:자유민주연합 흰색 로고_축약.svg

1석

무소속

2석

재적 {{{#!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2px 3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580009; font-size: .8em"
297석
}}}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min-width: 33.3%; margin: 0 -10px">
[ 임기 종료 ]
여당

파일:한나라당 흰색 신 로고_가로.svg

117석

야당
파일:통합민주당(2008년) 흰색 로고.svg

141석

파일:자유선진당 흰색 로고.svg

10석


파일:민주노동당 흰색 로고.svg

7석


파일:친박연대 가로 로고.svg

3석


파일:창조한국당 흰색 로고.svg

1석

무소속

17석

재적

295석

{{{#!wiki style="font-size: .8em"
제국 중추원 · 임시의정원
제헌 · 2 · 3 · 4 · 5민 · 5참 · 6 · 7 · 8 · 9 ·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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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신인 새정치민주연합이 2014년 3월 26일에 창당된 것을 기준으로 하였다. 현재 당명인 더불어민주당으로서는 2023년 9월 기준, 7년 9개월을 기록하고 있다.[2] 5공 당시 관제 야당.[3] 총재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었으나 국정 운영에 전념하느라 총재 권한대행으로 전직 국회의장인 이만섭 전 의원(7선)을 세워두었다.[4] 이만섭 전 의장은 한나라당을 탈당하고 국민신당으로 가서 이인제 계파와 같이 행동했다.[5] 당초에는 공동 여당의 지위를 가지고 있던 자유민주연합과의 통합도 고려했으나 김대중 전 대통령과 김종필 전 국무총리의 회동 끝에 최종적으로 무산됐다.[6] 이 당시엔 대통령이 총재를 맡는 것이 결코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대통령 겸 여당 총재가 공천에도 직접 관여하면서 제왕적 대통령제를 더 심화시켰다는 평이 많다. 이후 2001년 11월, 김대중 대통령이 민주당 총재직을 사퇴하고 이후 총재 자리를 없애버리면서 이 풍경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7] 본래 민주정의당 출신이었지만 민주당계 정당으로 합류한 인사이다.[8] 충청은 자유민주연합이, 나머지는 새천년민주당이 담당함을 가정한 단순 득표율 합산. 다만 1998년 지방선거에서 당선인을 낼뻔했다가 선거 공조 무산으로 한나라당에게 당선인을 내준 곳임을 감안해야 하기는 한다.[9] 대선 경선 초기 레이스에서 김근태가 권노갑에게 정치자금 받은 것을 고백하면서 권노갑의 세가 약해졌다는 분석도 있다.[10] 이 때만 해도 이인제는 부동의 여권 차기 대권주자라는 정치 거물로, 이인제가 피닉제라고 평가받게 된 것은 훨씬 후인 2008년의 일이다.[11] 당시 비하인드 스토리를 보면 출구조사 기관에서 조사한 결과로는 오전에는 장노년층들이 많이 투표했기 때문에 이회창 후보가 소수점 차이로 노무현을 앞섰지만, 오후에 젊은층들이 몰려오면서 뒤집었다.[12] 이 날의 육탄갈등 도중 난닝구라는 멸칭이 생겼다.[13] 대선 당시에 선대위원장을 맡았다.[14] 사실 정대철은 당 내에서 거물 중진 중 한 사람이었지만, 13대 대선 당시의 '후보 단일화 실패로 인한 대선 패배' 주장과 97년 전당대회 당시 김상현과 연합전선을 펴면서 반 김대중에 가까운 행보를 펼쳤기 때문에 동교동계와는 거리감이 있던 중재파의 역할을 할 수 있었다. 김상현(1935), 조순형 등 동교동계와 거리를 두며 계파색이 옅은 중진 의원들은 대선 당시 노무현 후보를 지지했던 사람들이다.[15] 흥미로운 건 열린우리당 붕괴 와중에 창당 주역인 신기남 의원이 '대통령은 열린우리당 창당도 처음엔 반대하지 않았는가'라며 정당의 운명은 자신들이 결정한다는 근거에 이 건을 가져다 썼다는 점이다. # 친노이자 열린우리당 중심의 통합을 주장했던 신기남조차도 열린우리당이 '노무현당'은 아니었다고 토로한 것이다.[16] 어느 정도였냐면 당시 싯가로 50억 정도의 가격이던 당사까지 비주류에게 넘기고 당을 떠났다.[17] 집권 여당이 분당하는 선례가 아예 없던 것은 아니다. 제2공화국에서 민주당장면 총리가 소속된 신파 중심으로 돌아가자 윤보선 대통령이 소속된 구파가 뛰쳐나가 신민당을 창당한 것이 대표적이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 소추 이후 새누리당에서 탈당한 비박계가 창당한 바른정당, 김영삼 대통령에 의해 민주자유당에서 숙청당한 김종필이 만든 자유민주연합, 제15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신한국당에서 갈라져 나온 이인제국민신당도 꼽을 수 있다. 하지만 대통령(내각제 시절의 경우 총리)이 분당의 주체였던 경우는 처음이다.[18] 다만 국민회의 창당과 열린우리당 창당은 1987년 13대 대선으로 양김씨가 분열한 이래 갈라져 있던 영호남 민주세력을 다시 한 번 분열시켰다는 점에서는 책임을 면키 어려웠다. 호남 세력인 동교동계가 국민회의로 넘어가자 민주당이기택 등 영남 세력이 이끄는 미니 정당 신세가 됐다가 여당 신한국당과 한나라당으로 합당했다. 당시 노무현 등은 한나라당 합류를 거부, '통추'를 조직하여 국민회의로 입당해 영남 민주 세력의 계보를 이어갔지만, 열린우리당 분당으로 이번엔 영남 출신 노무현을 위시한 친노가 열린우리당을 창당함으로써 새천년민주당 호남 세력과 갈라선 것이다. 열린우리당과 새천년민주당이 재합당하긴 했지만, 동교동계 핵심 인사들은 훗날 2012년의 정통민주당 등을 거쳐 친박으로 넘어가기도 했다. 게다가 국민회의 창당으로부터 20년, 열린우리당 창당으로부터 13년 뒤에는 새정치민주연합더불어민주당(영남 세력이 주도적 역할)과 국민의당(호남 세력이 주도)으로 분당해 민주당계 정당은 다시 한 번 분열하였다. 국민의당으로 넘어갔던 인사들이 바른미래당, 민생당 등을 거쳐 대부분 더불어민주당에 복당하며 분당이 일단락될 때까지 4년의 세월이 걸렸다. 와중에 민생당 출신 호남 정치인 일부는 진영을 바꾸어 국민의힘으로 들어가 버렸다. 사실상 1992년 14대 총선, 2000년 16대 총선, 2008년 18대 총선 3회를 제외하고는 13/15/17/19/20/21대까지 총 6번의 총선들이 크든 작든 민주당의 분열로 치러졌는데, 이 가운데 가장 격렬하고 가장 막장으로 치달으며 앙금도 가장 컸던 사건이 바로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 및 심판이였다.[19] 다만 전국구 19석을 제외한 지역구로 한하자면 민주당은 40석으로, 전원이 지역구 의원이었던 열린우리당(47석) 쪽이 조금 더 많았다.[20] 유시민, 김원웅[21] 김부겸, 김영춘, 안영근, 이부영, 이우재.[22] 전남의 새천년계 무소속까지 합쳐도 10석이다.[23] 이때의 전설 같이 회자된 이야기가 손석희 아나운서와 연관된 "그러면 (탄핵을) 안 하면 될 것 아닙니까?". 문서 참조.[24] 2004년 10월 재보궐선거에서는 기호 3번을 달아야 할 민주노동당이 한 곳도 후보를 내지 않아서 새천년민주당이 대신 3번을 달게 되었다.[25] 김원기 국회의장의 동생이 운영하던 홍보물 업체가 대금 지급이 늦어지자 아예 가압류를 걸어버린 것.[26] 당시 대통령직과 겸임. 2001년 재보궐선거 패배로 사퇴[27] 총재직 폐지[28] 대한적십자사 총재로 가면서 당 대표직과 국회의원직을 사퇴했으며 이후 정계에서 은퇴했다.[29] 당 총재(김대중 대통령)가 임명. 다만 권위주의 시대처럼 대통령이 직접 여당 총재를 맡는 것이 비민주적이란 여론이 불거지자, 김 대통령은 동교동계 중진이었던 한광옥 대표를 지명하고 즉각 물러났다. 이후 상기 총재 항목에 명시된 것처럼 한광옥 대표는 6개월 간 총재 권한대행의 권한도 함께 갖게 되었다. 정당 민주주의 강화 과정에서의 과도기적 상황이었다고 평가 할 수 있다.[30] 참여정부 출범과 함께 당 대표직 사퇴[31] 한화갑 사퇴로 승계, 열린우리당 합류를 위해 사퇴[32] 정대철 사퇴로 승계[33] 17대 총선 패배로 사퇴[34] 대표로 추대[35] 2005년 5월 6일, 민주당(2005년)으로 당명 변경[36] 다만 한화갑은 지지만 했을 뿐 실제 입당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그리고 최순실 게이트가 터지자 박근혜 지지를 철회하긴 했다. 한광옥은 한 술 더 떠서 친박계로 변했고, 박근혜의 마지막 대통령 비서실장이 된다. 친박으로 변신한 동교동계로는 잠깐 친노(!)이기도 했던 김경재 의원도 있는데, 자유총연맹 회장을 지내며 극우행보를 이어갔다. 그러나 자기가 젊어서 한 일이 있는지 김대중 대통령 기념 사업을 벌이는 등 희한한 행보를 보였다. [37] 비례대표, 당시 7선[38] 조순형의 경우엔 깨끗한 정치라는 이념에 동조하여 제3지대 신당으로서 자유선진당에 참여한 것이며, 새누리당 합당 직전에 탈당한 것이므로 변절이라고 보긴 어렵다. 다만 2006년 재보궐선거에서 생환하여 2005년 민주당의 유력 대선후보였으나, 돌연 입당한 이인제의 조직에도 밀려 대선 경선에서 중도 사퇴 후 탈당하여 자유선진당으로 간 행보가 괴해 보이는 것은 사실.[ㄱ]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까지는 기초의원직에 정당공천제가 실시되지 않아 정당 소속이 없었다.[ㄴ] A B C D E F G H I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이전까지는 기초자치단체의원직에 정당공천제가 실시되지 않아 정당 소속이 없었다.[39] 제16대 대통령 선거 전남 경선 당시 영상이며, 해당 영상 뒷부분에 앵커 목소리와 함께 배경음악으로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