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변경문서 보기수정 내역 광종(고려) (버전 비교) [include(틀:역대 고려 국왕)] ----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e6bd0e, #f9d537 20%, #f9d537 80%, #e6bd0e)" {{{#670000 '''광종 관련 틀'''}}}}}}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include(틀:광종(고려))] ---- || [[고려|[[파일:고려 의장기 문양.svg|width=40]]]][br]'''[[고려|{{{#670000 고려 황제}}}]]''' || || {{{-2 {{{#670000 제1대}}}}}} || ||<#FFF,#1f2023> '''{{{#002395,#fff 광종}}}''' || ---- [include(틀:고려의 왕자/국조 ~ 문종)] ---- [include(틀:권지고려국사)] ---- [include(틀:고려사)] ---- [include(틀:한국사의 역대 연호)] }}} ||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e6bd0e, #f9d537 20%, #f9d537 80%, #e6bd0e); color: #670000" '''고려 제4대 대왕[br]고려 초대 황제[br]{{{+1 광종 | 光宗}}}'''}}} || ||<-2>{{{#!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왕이 내리는 금 그릇을 사양하는 서필.jpg|width=100%]]}}} || ||<-2> {{{#670000 {{{-2 광종(오른쪽)의 동상[* 서희 역사관 테마파크에 있으며, 광종이 [[서필]]에게 내린 [[금]] [[그릇]]을 서필이 사양하는 이야기를 토대로 만들어졌다.]}}} }}} || ||<|2> '''출생''' ||[[925년]] || ||[[고려]] [[개성시|개경 개주]][br](現 [[경기도]] [[개성시]] 만월동) || ||<|2> '''즉위''' ||[[949년]] [[4월 13일]] || ||[[고려]] [[개성시|개경 개주]] [[만월대|정궁]][br](現 [[경기도]] [[개성시]] 만월동) || ||<|2> '''사망''' ||[[975년]] [[7월 4일]] (향년 50세) || ||[[고려]] [[개성시|황도 개주]] [[만월대|정궁]] 정침[br](現 [[경기도]] [[개성시]] 만월동) || || '''능묘''' ||[[헌릉(고려 광종)|헌릉]](憲陵) || ||<|2> '''재위기간''' ||'''{{{#670000 제4대 대왕}}}''' || ||[[949년]] [[4월 13일]] ~ [[975년]] [[7월 4일]] {{{-3 (26년)}}} || ||<-2>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본관''' ||[[개성 왕씨]] || || '''휘''' ||소(昭) || || '''부모''' ||부왕 [[태조(고려)|태조]][br]모후 [[신명왕후|신명순성왕후]] || || '''형제자매''' ||25남 10녀 중 4남 || || '''왕후''' ||[[대목왕후]] || || '''후궁''' ||[[경화궁부인]], 현비 김씨 || || '''자녀''' ||2남 3녀 || || '''종교''' ||[[불교]] || || '''자''' ||일화(日華) || || '''묘호''' ||'''[[광종]](光宗)''' || || '''시호''' ||강혜의효숙헌평세선열'''대성대왕'''[br](康惠懿孝肅憲平世宣烈'''大成大王''')[* 《고려사》 <광종 세가> 마지막 조 기준.] || || '''연호[* 고려에서 태조 왕건과 함께 독자적인 연호를 쓴 단 두 명뿐인 군주 중 한 명이다. 949년~953년{광덕(光德)} 그리고 960년~963년{준풍(峻豊)}은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한 기간. 단, '준풍'(峻豊)은 독자적인 연호인지 아니면 당시 [[북송]]에서 쓰던 연호인 '건륭'(建隆)의 [[피휘]]인지 논란이 있다. '건'과 '륭'이 고려의 [[태조(고려)|태조]] 왕'건'과 [[세조(고려)|세조]] 왕'륭'의 [[휘]]이기 때문이다. 이후에는 독자적인 연호가 아닌 북송의 연호인 '건덕'(乾德)을 사용했다.]''' ||[[광덕]](光德, [[949년]] ~ [[953년]]) [br] [[준풍]](峻豊, [[960년]] ~ [[963년]]) ||}}}}}}}}} || [목차] [clearfix] == 개요 == [[고려]]의 제4대 대왕이자 황제[* 고려 역대 황제 중 유일하게 황제 칭호를 사용한 것이 확실한 군주다.]. [[태조(고려)|태조 왕건]]의 넷째 아들이며 [[묘호]]는 광종(光宗), [[시호]]는 대성대왕(大成大王)이며, 휘는 소(昭), 자는 일화(日華)이다. 연호는 [[광덕]](光德) ^^(949년 ~ 953년)^^과 [[준풍]](峻豊) ^^(960년 ~ 963년)^^이다. 즉위 후 [[왕권]]을 강화하고 고려의 [[통치]] 기반을 다졌으며, 후대 조선까지 이어지는 [[과거 제도]]와 [[노비안검법]]을 실시하는 등 [[왕조]]의 기틀을 잡은 [[명군]]으로 평가된다. 초기에는 [[호족(한국사)|호족]] 세력들과 융화하는 행보를 보였으나 재위 중반부터는 [[노비안검법]]과 [[과거 제도]] 시행, 고려의 변두리로 취급받았던 세력들을 중용하는 등의 방법들을 통하여 호족의 힘을 철저히 누르는 한편 모든 [[권력]]을 [[왕]]에게로 집중시키는 [[전제군주제|전제화]] [[정책]]들을 밀어붙였다. 재위 후반부에는 아예 무차별적인 [[숙청]]을 통해 임금에게 맞서거나 의심을 산 사람은 무조건 처형해버리는 [[공포정치]]를 행하여 후대에 비판받기도 한다.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한 [[군주]]이지만 [[칭제건원]] 이후 [[북송]]과 [[거란]]이 [[외교]]적으로 항의했고, 북송과의 외교 관계를 돈독히 하기 위해 공식적으로 칭제건원을 포기하고 [[송나라]]의 연호인 건덕(乾德)을 사용했다. 태조의 뒤를 이은 형 [[혜종(고려)|혜종]]과 [[정종(고려 3대)|정종]]이 모두 짧은 재위로 인하여 이렇다 할 성과를 내놓지 못 한 상황에서 광종이 20년 넘는 치세 동안 고려의 체제를 정비하고, 조정의 기틀을 닦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개국 이래 2대 ~ 3대 군주가 [[국가]]의 기틀을 다지듯 고려는 4대 임금인 광종이 그러한 기틀을 다졌다고 봐도 무방하다. 광종보다 앞선 국왕이였던 혜종과 정종은 광종의 [[형제]]였고, 재위 기간도 짧았기 때문에 광종을 실질적으로 고려의 2대 내지 3대 [[국왕]]으로 볼 수 있다. == [[묘호]]와 [[시호]], [[존호]] == 공식 묘호는 '''[[광종]](光宗)''', 묘호를 달리 불러 광묘(光廟)라고도 불렸다. 시호는 두가지 버전이 있다. * '''《고려사》 <광종 세가> -총서-''': 홍도선열평세대성대왕(弘道宣烈平世大成大王) * '''《고려사》 <광종 세가> 마지막 조''': 강혜의효숙헌평세선열대성대왕(康惠懿孝肅憲平世宣烈大成大王) 고려의 역대 국왕들의 시호 중 가장 중요한 건 처음 올려진 두 글자다. 그래서 광종의 묘호와 시호를 같이 부를 땐 왕태자 - 정윤이었던 경종이 올린 '대성'(大成)만 불러 '광종 대성대왕'(光宗 大成大王), 줄여서 '광종 대성왕'(光宗 大成王)이다. [[존호]]는 국왕이 생전 사용한 칭호를 이른다. 예를 들면 먼 후손이었던 [[충렬왕]]이 아들 [[충선왕]]에게 양위하며 받은 존호 '광문선덕태상왕' 같은 호칭이 있다. 광종의 존호는 기록에 보이지 않는다. '고달사원종대사혜진탑비'와 '퇴화군대사종'(退火郡大寺鐘)에 '황제'(皇帝)란 군주호가 있어 단편적으론 광종의 존호를 엿볼 수 있다. 광종의 황제 존호는 [[이몽유]]의 '문경봉암사정진대사원오탑비'에도 '오황'(吾皇)으로 등장한다. '보원사법인국사보승탑비'에선 '옥황'(玉皇)으로 불렸으며, 광종의 나이는 '제령'(帝齡), 얼굴은 '천안'(天顔)으로 표현됐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고려 광종 대성대왕 헌릉 2.jpg|width=100%]]}}} || || '''{{{#670000 헌릉 전경 }}}''' || == [[광종(고려)/생애|생애]]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광종(고려)/생애)] == 가족관계 == * 제1비: [[대목왕후]] 황보씨 - [[태조(고려)|태조]]와 [[신정왕후]] 황보씨의 딸 * [[경종(고려)|경종]] * 효화태자(孝和太子) 기록이 없어 정확한 출생년도를 알 수 없으나 형인 경종이 태어난 955년 이후에 태어났을 것으로 보이며, 고려사에 '사적에 그 이름이 실전되었고 후손도 없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경종이 왕태자로 책봉되던 965년은 광종의 공포정치로 인해 많은 호족들과 왕족들이 죽임을 당했는데, 특히 일부 호족들 중에는 왕족을 등에 업고 반란을 일으키려는 자들도 나타났다. 이에 경종 역시 광종으로부터 의심의 눈초리를 받으며 지내야 했지만, 효화태자가 요절해 대안이 없었기 때문에 살려두었다는 견해도 있다. 실제 역사에서 권력다툼으로 인해 아버지가 아들을 죽이거나 아들이 아버지를 죽인 일은 꽤 많았다. 고려시대만 봐도 [[충선왕]]이 세자를 죽이고 [[충숙왕]]에게 양위한 이력이 있다. * 천추전부인(千秋殿夫人) 아지(阿志) 숙부 [[문원대왕]]과 [[문혜왕후]] 류씨의 아들 천추전군(千秋殿君)과 사촌혼을 했으며, 천추전군은 요절했다. 이후 천추전은 [[천추태후]]에게 상속된 것으로 추정된다. * 보화궁부인(寶華宮夫人) 남편은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남매인 경종과 함께 겹사돈을 맺지 않았을까 추정된다. 이후 보화궁은 경종의 제4왕후 [[헌정왕후]]에게 상속된다. 덧붙여 보화궁은 [[안종(고려)|안종]]의 사택이기도 하다. * [[문덕왕후]] 유씨[* 할머니 [[신정왕태후|신정왕후]]의 성씨를 따랐다.] * 후궁: [[경화궁부인]] 임씨 - [[혜종(고려)|혜종]]과 [[의화왕후]] 임씨의 딸 어머니 [[의화왕후]]의 성을 따랐다. 뒷배가 약했던 혜종이 지지기반을 확보하기 위해 시집보낸 것으로 추정되는데 광종은 즉위한 뒤 혜종의 아들 흥화군을 처형시켰고, 경화궁부인은 왕녀였음에도 왕후가 되지 못했다. 그러나 같은 외가 배경을 가진 천안낭군[* 태조 왕건의 후궁 천안부원부인 임씨의 아들인 효성태자]과 진주낭군[* 태조 왕건의 후궁 숙목부인 임씨의 아들인 원녕태자]이 광종의 호족 숙청에 적극적으로 동참한 것을 보면 정치적으로 꽤 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 후궁: 궁인 김씨 → 현비 김씨(賢妃 金氏) 원래 궁인으로, 1029년 11월 [[현종(고려)|현종]]이 현비로 추증한 것으로 보아 그 전에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 평가 == >[[휘]][* 왕의 이름]는 소(昭), [[자(이름)|자]]는 일화(日華)이니, [[정종(고려 3대)|정종]]의 동복 동생이다. 신하를 예(禮)로써 대우하고, 사리를 듣고 판단하는 데에 밝았다. 가난한 사람을 구휼하고 선비를 소중히 여겼으며, 밤낮으로 부지런하여 거의 태평한 정치를 이루었다. 그의 치세 중반 이후로는 참소를 믿어 사람을 많이 죽이고 불법(佛法)을 지나치게 좋아하였으며, 사치함이 절제가 없었다. 26년간 재위하고 수명은 51세였다. >---- >'''《[[동국통감]]》 권13 <고려기> -광종 대성왕에 대한 평가- ''' >광종은 양면성을 가진 군주였다. 공신세력을 축출하여 왕권을 강화시키고 고려왕조의 기틀을 다진 위대한 업적을 세운 군주이면서 병적으로 숙청작업에 몰두한 피의 군주이기도 하였다. >---- >'''네이버 캐스트의《인물한국사》中 실학박물관장 정성희의 평가''' 치세 중에 일으킨 숱한 유혈사태와 말년의 편집증적 행태에도 불구하고, 광종은 [[고려]]조의 [[명군]]을 거론할 때 반드시 포함되는 왕이다. 그만큼 그가 고려라는 국가의 기틀을 닦았으며 훌륭한 치적을 많이 남겼다는 대에는 이견이 없는 편이다. [[태조(고려)|태조 왕건]]이 세운 [[고려]]는 엄밀히 말해 겉모습만 국가였지, 후삼국 말기 지방호족들이 중앙권력을 독점하기 위해 합종연횡과 이합집산, 이전투구를 거듭하던 호족 연맹체의 연장선에 지나지 않았다. 그것이 우리가 아는 본격적인 중앙집권국가 [[국가]] 고려로 탈바꿈된 것은 순전히 광종이 이뤄낸 업적이었다. 광종이 고려 왕가를 피바다로 만들었다며 비판받는 부분은 '''지나치다고 여겨지는''' [[호족(한국사)|호족]]과의 대립, 숙청 부분인데 광종에 대한 비판적 평가들은 당연하게도 모두 그 학살의 피해자인 공신들의 후손, 대호족이나 신권을 강조한 유학자들에 의해서 나왔다는 것도 꽤 유념할 필요가 있다. 대표적으로 [[성종(고려)|성종]](제6대) 때 [[최승로]]의 <시무 28조>에선 태조와 함께 가장 자주 거론되는 국왕이 광종이다. 참소를 믿고 지방 영주들의 목숨을 함부로 빼앗았으며 궁실을 크게 증축하고 사치스러웠는가 하면 [[쌍기|특정 집단]]을 편애했고, [[불교]]를 지나치게 숭상하는 동시에 ([[노비안검법]]으로) 귀•천의 구분도 없어졌고, 궁궐에 호위병을 필요 이상으로 많이 뒀다는 등 온갖 핑계를 대며 그가 거론될 때마다 모진 비판을 가했다. <시무 28조>에서 지적하는 [[고려]] 사회의 폐단은 곧 [[최승로]]가 개인적으로 바라본 광종의 폐단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셈. 시무책 앞에 있는 긍정적인 평가는 <시무 28조> 앞에 실린 <5조 치적평> 초반에 좀 있는 정도이고, 나머진 전부 부정적인 내용 투성이다. 창업 군주의 아들이었지만 장남이 아니었다는 점, 왕위에 오른 뒤 정적들을 냉혹하게 학살했다는 점이 똑같은 [[조선]]의 [[태종(조선)|태종]]과 비교되는 경우도 있으나, 자세히 보면 사정이 꽤 다르다. [[정몽주]]를 제외하면 태종이 상대해야 했던 자들은 [[정도전]] 일파에서 [[심온]] 가문에 이르기까지 대부분 공신과 외척이라는 존재로서 후대의 전주 이씨 왕실에 대한 잠재적 위협이었을 뿐 [[조선]]에 반기를 들거나 왕실을 우습게 여긴 것도 아니고 딱히 태종과 추잡한 이권 다툼 따위로 죽을둥 살둥 대립했던 것도 아니다. 태종과 왕족들이 정도전에게 반발한 것은 표면상 사병 혁파 이전에 왕을 허수아비로 만드는 신권주의 때문이었다. 심지어 태종에게 충성했거나 혹은 심온처럼 천성이 그런 욕심 자체가 없었던 자들이었다. 반면에 광종은 전국 각지에 깔려있는 [[호족(한국사)|호족]]들, 즉 자신의 영지에서는 왕 노릇하며 중앙의 왕씨 왕실을 우습게 여기고, 왕에게 반항하기를 예사로 하는 그 군벌조직인 호족들, 항상 자신들 입맛에 맞는 왕으로 갈아치우려고 자기네들끼리 공작을 펼치거나 왕위에 오른 [[혜종(고려)|두]] [[정종(고려 3대)|명]]의 형들을 요절하게 만든 바로 그 호족들을 모조리 박살내고 왕권을 굳게 세워야 했다. 때문에 훨씬 더 냉혈하고 과격한 방식으로 숙청이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는 점은 충분히 감안해야 할 것이다. 광종이 태종보다 딱히 더 잔인했다고 볼 수만은 없는 것이다. 게다가 이미 사병 혁파 정책으로 군세를 거느리는 것만으로도 반역, 혹은 도발이라고 아예 못을 박아뒀던 [[태종(조선)|태종]]과는 달리, 이 시기 [[고려]]의 [[호족(한국사)|호족]]들은 맘대로 사병까지 거느리고 있었다. 그리고 이 사병들의 원천은 그들이 불법적으로 노비로 삼은 이들이었다. 광종이 이러한 거센 정치적 반발을 감수하면서까지 양인 출신 노비들을 다시 본 신분으로 되돌린 것도 호족의 경제력 뿐 아니라 사병 집단 자체를 아예 없애려는 목적이 컸다. 호족들은 이러한 조건을 바탕으로 얼마든지 군사적으로 [[쿠데타|딴 마음]]을 먹을 수 있었다. 호족 연합 정권에 가까웠던 고려 초기의 이런 특수성을 감안하면, 고려를 '정상적인' 왕권 국가로 나아가게 하기 위해선 한 국가의 기득권층을 또 한 번 뿌리째 들어내야 했기 때문에 광종은 태종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많은 피를 손에 묻힐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단적으로 [[태조(고려)|태조]]의 후비(后妃)(임금의 정실과 후궁)는 29명이나 되었고, 이들은 대부분 호족 집안의 자식들이었다. 자연히 광종이 없애거나 견제해야 할 외척들만 해도 태종보다 훨씬 많을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들은 결코 믿을 만한 자들이 아니었다. 또한 당시 [[고려]]의 유학자들이나 [[조선]] 왕조 유학자들은 유교적 덕치에 반했다는 이유로 광종을 맹렬히 비난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유학자들이 자신의 능력을 증명할 수 있는 기반인 '''[[과거 제도]]의 첫 시행자가 광종이었다'''. 아닌게 아니라, 고려의 정치가 그냥 쭉 지방 대호족에 잠식되었다면 최승로가 속한 6두품 경주 최씨는 아무리 학식이 뛰어나도 호족들에게 눌려 간언을 하지도 못했으리라. 고려 왕조는 물론이고 후대 조선 왕조까지의 명백한 근간이 되는 제도를 처음으로 들여온 왕이라고 할 수 있다. [[태종(조선)|태종]]이 한 일은 남아있는 약간의 불안요소를 확실히 쳐내서 내정을 확실히 안정화시킨 것이였다면 '''광종은 사실상의 내전 가능성 자체를 최대한 줄여준 것이었다.''' 그나마도 광종이 이 때 호족들을 확실히 박살내지 않았다면 다음 왕인 [[경종(고려)|경종]]이 광종이 했을 일을 대신 수행해야 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즉, 광종이 아니더라도 언젠가 한번은 제대로 호족들을 제압하기 위한 피바람이 불어야만 했고, 그것이 그것을 추진할 의욕도 능력도 있고 시기도 알맞았던 광종 본인이 직접 주도한 것이었다. 비판이라면 지나친 학살로 인해 아들 경종에게 심적인 부담이 지워졌다는 것인데, 이는 [[명나라]] 태조 [[홍무제]]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겠다. 허나 숙청을 하지 않았다면 어차피 경종은 왕이 되기도 전에 살해당하거나 갈아치워질 수 있는 불안한 정국이었다. 결국 광종의 숙청 덕분에 다음 대의 [[성종(고려)|성종]](제6대)과 [[현종(고려)|현종]](제8대)이 일을 제대로 할 수있었다. '''광종이 자신의 친아들인 [[경종(고려)|태자]]까지 죽이려고 했던 점은 확실히 도가 지나치긴 했다.''' 경종이 유약해진 것의 절반은 광종 탓이라고 해도 할 말이 없을 정도. 그 탓인지 광종 사후 즉위한 그 후계자인 경종이 '''[[복수법|무고를 당한 자의 가족이 사사로이 복수를 할 수 있도록 한 법]]'''을 제정한 것은 광종 시기 지나친 학살의 여파로 보는 견해가 많다. 물론 하도 정신나간 법이라 경종도 질색하여 금방 없애긴 했지만... 광종이 학살을 단행할 수밖에 없었던 원인이 근본적으로 아버지 태조 왕건의 과오에 있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상황이 많이 꼬여버린 것도 있지만 그 왕건이 1비 [[신혜왕후]] 유씨가 낳은 자식을 태자로 세울 수 있었다면 이 정도의 분란까지는 겪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신혜왕후가 자식도 없는 상황에서 사실상 힘을 잃은 바람에 위협거리도 안 되는 집안 출신 [[장화왕후 오씨|2비]]의 아들이 적장자가 되어버린 상태에서 [[신명순성왕후|3비]]와 [[신정왕후 황보씨|4비]]는 알짜배기 대호족 출신이고 [[신성왕후|5비]]는 신라 진골 귀족 출신, [[정덕왕후|6비]]는 1비가 죽었다고 해서 장인인 [[유천궁]]의 가문에 다시 장가들어 얻은 왕후였으니... 결과적으로 혜종은 왕건의 실책으로 불안감 속에서 아무 것도 못하고 죽었으며 정종부터 본격적으로 숙청에 들어가 광종 대에 들어서야 마무리를 짓게 된다. 하지만 한가지 유념해야 할 부분은 광종의 지나친 숙청은 그에 걸맞게 역풍 또한 크게 일으켰다는 점이다. 광종의 대규모 숙청과 개혁은 분명 [[호족(한국사)|호족]]들의 큰 반발을 불러일으켰으며, 그 후 그의 아들인 [[경종(고려)|경종]]과 그 이후 [[성종(고려)|성종]]대에 이르기까지 광종의 정책들은 거의 대부분 롤백을 당하게 되어버렸다. 이 부분에서는 정밀타격식으로 피를 최대한 안 묻히는 방향으로 숙청을 엄격하고 정밀하게 진행하여 [[세종(조선)|자신의 아들]]을 자신을 뛰어넘는 성군으로 만든 조선의 [[태종(조선)|태종]]과 크게 비교되며, 이후 서북면 도순검사 [[강조(고려)|강조]]가 군사력을 동원해서 [[목종(고려)|목종]]을 무력으로 폐위하고, [[현종(고려)|현종]]을 강제로 옹립하여 정권을 장악한 [[강조의 정변]]으로 고려의 왕권이 심각하게 손상되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은 '''과연 광종의 대규모 호족 숙청이 성공적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들 수 밖에 없다.''' 심지어 현종은 이러한 여파 탓에 [[여요전쟁]]으로 인해 퇴각하던 도중에도 지역 호족들의 소규모 군사반란들에 계속 시달리면서 피난을 가야만 했을 정도였었다. 이렇듯 최대한 대상을 가리고 피흘리는 것을 절제해서 엄격하게 숙청을 진행했던 태종과 달리 광종은 자신의 외가와 친조카, 동생들까지 대상을 가리지 않고 모조리 숙청해버려 국왕을 지지해주는 근왕 세력들까지 남김 없이 학살해버렸다. 게다가 아들까지 의심해 아들인 경종은 [[전시과]]를 시행하는 등의 치적을 남겼지만 부왕에게 받은 학대로 인해 말년에 심적 고생을 겪어야 했다. == 기타 == * 《[[정관정요]]》(貞觀政要)라는 책을 애독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이 책은 역시 중국 역사상 최고의 [[명군]] 중 한 명으로 꼽히고 있는 [[당나라]]의 제2대 황제 [[태종(당)|태종]] 이세민이 장군들과 나눈 대화를 엮은 책으로서 '''동양 제왕학(帝王學)의 교과서'''로 여겨지는 저서이다. [[태종(당)|태종 이세민]] 역시 권력 때문에 자기 손에 형제들의 피를 묻혀야 했지만([[현무문의 변]]) 특유의 카리스마로 국가 초기 기틀을 다잡았다는 [[명군]]이었다는 평가([[정관지치]], 貞觀之治)를 받는다. 역사적으로 광종이 자신과 비슷한 황제의 언행을 탐독했다는 게 실로 흥미로운 부분이다. * 《[[고려사]]》 <악지> -속악- 부분엔 광종 대의 일화가 하나 남아 있다. 속악은 우리 가락, 우리 말로 지어진 토착 노래를 의미한다. 고려에서 한자로 만든 노래도 속악에 포함된다. <풍입송>이 대표적이다. * 언젠가 한국에서 비파 하나가 중국 강남 지역까지 흘러갔다고 한다. 그 비파 뒷면엔 한자로 노래가 적혀 있었는데 중국인들 중 아무도 가사 해석을 못했다고 한다. 어느날 광종의 외교관 '장진공'이 사신으로 중국 강남에 갔는데 중국인들이 마침 이 비파를 꺼내 해석을 부탁했다고 한다. 장진공은 바로 해석을 끝내 한시로 내용을 설명하니 이 노래가 바로 <한송정>(寒松亭)이다. 누군가가 비파 뒤에 <한송정>을 기록했는데 한자를 우리 식으로 쓴 이두로 내용을 써서 중국인들이 해석을 못한 것이다. 한송정은 현 [[강원도]] [[강릉시]]에 있는 정자이다. 경포대 근처에 있던 걸로 보인다. * 평농서사 권신(權信)이 대상(大相) 준홍(俊弘)과 좌승(佐丞) 왕동(王同) 등이 반역을 꾀한다고 참소하자 왕이 이들을 내쫓았다. * 외모는 [[고려사]]에 기록된 [[최승로]]의 말에 따르면 용모가 뛰어나고 우수한 자질이 있었다고 한다.[[https://db.history.go.kr/KOREA/item/level.do?itemId=kr&bookId=世家&types=r#detail/kr_093r_0010_0020_0030|출처]] * 개경을 "황도"로 칭하고, 서경을 "서도"로 칭하였다. == [[광종(고려)/대중매체|대중매체]]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광종(고려)/대중매체)] [[분류:광종(고려)]]||<-5><:><#FFD700>[[고려청자|https://67.media.tumblr.com/d0ab98e78c55c6369f20b702ab560e77/tumblr_o9zoipyqmm1sqk8veo5_r2_400.png?width=50]][br] '''{{{+1 [[고려/왕사|{{{#800080 고려의 역대 국왕}}}]]}}}''' || ||<:> 3대 [[고려 정종(3대)|정종]] 왕요 ||<:> {{{+1 ←}}} ||<:><#FBEC5D> '''{{{#black 4대 광종 왕소}}}''' ||<:> {{{+1 →}}} ||<:> 5대 [[경종(고려)|경종]] 왕주 || ||<:> '''[[묘호]]''' ||||<:> '''[[광종]](光宗)''' || ||<:> '''[[시호]]''' ||||<:> 홍도선열평세숙헌의효강혜대성대왕[br](弘道宣烈平世肅憲懿孝康惠大成大王) || ||<:> '''[[연호]]''' ||||<:> 광덕(光德) 준풍(峻豊) || ||<:> '''[[능묘]]''' ||||<:> 헌릉(憲陵) || ||<:> '''[[성]]''' ||||<:> 왕(王) || ||<:> '''[[휘]]''' ||||<:> 소(昭) || ||<:> '''[[자(이름)|자]]''' ||||<:> 일화(日華) || ||<:> '''[[왕후]]''' ||||<:> 대목왕후(大穆王后) 황보씨[* [[왕건|태조 왕건]]과 왕건의 제4비 [[신정왕후|신정왕태후]] 황보씨의 딸로, 광종과 대목왕후는 이복남매 사이다. 혜종과 정종은 왕이 될 가능성이 높았으므로 호족들과의 정략혼인을 할 수 밖에 없었지만, 광종과 다른 자식들에게서도 왕위 계승의 가능성을 여긴 왕건은 광종 이하의 자식들을 대부분 족내혼 시켰다. 광종과 대목왕후의 혼인은 그 첫 케이스.] || ||<:> '''[[부왕]]''' ||||<:> [[왕건(고려)|고려 태조]] || ||<:> '''모후''' ||||<:> 신명순성왕후(神明順成王后) 유씨 || ||<:> '''종교''' ||||<:> [[불교]] || ||<|2><:> '''생몰년도''' ||<:> 음력 ||925년 ~ 975년 5월 23일 || ||<:> 양력 ||925년 ~ 975년 7월 4일 (51세) || ||<|2><:> '''재위기간''' ||<:> 음력 ||949년 3월 13일 ~ 975년 5월 23일 || ||<:> 양력 ||949년 4월 13일 ~ 975년 7월 4일 (26년 88일) || ||<:> '''사망지''' ||||<:> 고려 [[개경]] [[만월대|정궁]] || [목차] == 개요 == '''[[호족]] 세력을 숙청하고 중앙집권적 [[관료]]제 국가를 수립하여, 실질적으로 고려 왕조라는 나라 자체의 기반을 단단히 마련한 [[고려]]의 [[명군]].''' '''[[왕건(고려)|아버지]]의 [[혜종(고려)|아]][[고려 정종(3대)|들]]들 중에서 제일 유전자를 잘 물려받은 사람''' 고려의 제4대 왕. [[태조 왕건]]의 넷째 아들로 신명왕후 유씨의 소생. 형인 이 젊은 나이에 각각 급사하자 형들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다. 으레 개국 이래 2, 3대 군주가 국가의 기틀을 다지듯, 고려는 4대 임금인 광종이 그러한 기틀을 다졌다고 봐도 무방하다. 묘호는 광종(光宗), 시호는 홍도선열평세숙헌의효강혜대성대왕(弘道宣烈平世肅憲懿孝康惠大成大王), 능호는 헌릉(憲陵)이다. == 국가 기틀 확립 == 광종은 고려 초기 왕권 다툼의 혼란 속에 집권하여 왕권 강화를 꾀했으며 여러가지 정책을 통해 고려의 기반을 단단히 마련한 왕이다. 불교를 장려하고 민심안정책을 시행하였으며, 지배층인 [[호족]]들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여러 가지 수단을 강구하였다. 한편으로는 천태종에 간접적으로 기여한 인물이기도 한데, 당시 중국은 천태종이 남아 있기는 했지만 회창법난으로 불교 전적들이 엄청난 손실을 입어 중국 본토에는 불교 전적들이 많이 부족했다. 그러나 광종이 중국의 요청으로 고려에 남아 있던 천태종 관련 서적들을 중국에 보내는 동시에 천태종 승려 제관을 중국으로 보냈고, 제관이 중국에서 살다 죽으면서 그가 남긴 유작 <천태사교의>는 한중일 삼국의 천태학의 교과서가 되었다. === 노비안검법 === ||자세한 부분은 [[노비안검법]]을 참고할 것|| 우선 광종은 호족의 사적인 군세를 약화시키기 위해 호족들에 의해 강제로 노비가 된 자들을 해방시키는 '''[[노비안검법]]'''을 실시하였다. 노비안검법이란 양인이었다가 억울하게 노비가 된 사람을 조사하여 다시 양인이 될 수 있도록 조처한 법이다. 이때의 호족은 후삼국들간의 다툼 와중에 포로가 되었거나 빚을 갚지 못한 것과 같은 까닭으로 양인에서 노비가 된 사람들을 많이 소유하였다. 당시 관념상 노비는 재산이었다. 또 단순히 하인이 아니라 '''소작농 겸 사병'''이었으므로 호족의 경제적·군사적 기반이 되었고 이는 왕권을 위협하는 것이므로 왕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찍어누를 필요가 있었다. 물론 이런 속마음을 대놓고 명분으로 삼을 수는 없었기에 광종이 내건 명분은 ''''신라-고려의 왕조 교체기를 통하여 혼란했던 사회적 신분 질서를 바로잡는다''''였다. 이를 통해 호족의 군사력과 경제력을 동시에 약화시켜 그들의 세력을 뿌리부터 흔들 수 있었던 것은 물론이요, 양인 계층으로 포섭된 해방 노비들은 세금을 내게 됐으므로 그야말로 일석이조의 효과를 가져올수 있는 정책이었다고 하겠다. === [[과거제]] 도입 === 광종은 [[중국]]의 마지막 오대 왕조인 [[후주]] 출신의 [[쌍기]]를 등용한 후 그의 제안으로 호족들의 직위 세습을 막고 이미 중국에서 시행되고 있었던, '''[[과거제]]를 한반도에서 최초로 실시하였다.''' 중국에서 과거제가 최초로 정착된 '수', '당'이 그랬듯, 귀족적 관료제의 특성을 벗어나진 못했지만 그럼에도 과거제 실시는 그 의미가 상당히 크다. 고려 이전 신라 하대의 원성왕 때 [[독서삼품과]]가 시행됐지만 하급 관리에 제한되어 실시하였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광종의 과거제 도입은 한반도에 중앙집권적 관료제 국가를 확립하는 결정적 요소가 되었다. === 공복 제정 === 또한 백관의 공복을 제정하였는데, 그 전엔 그야말로 입고싶은 걸 맘대로 입고오는--패션쇼?--지경이어서 왕보다도 화려한 옷을 입고 오는 신하가 있을 정도였다. 당연히 이런 모양은 왕권과 조정의 기강을 산만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광종 치세에는 이후 당연한 것이 될 통일된 공복을 제정하여 조정의 기강을 바로잡고 왕권을 강화시키는데 일조하였다. === 외교 === 광덕(光德)이나 준풍(峻豊) 등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면서 스스로를 [[황제]]라고 칭하는 등 자주의식을 표방한다.''' 하지만 뒤에 [[송]]과의 외교 관계를 돈독히 하기 위해 송의 연호인 건덕을 사용했다. 두 개의 연호 가운데, 광덕은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어 이견이 없지만 청주 용두사 철당간과 일본의 조련사 동종에서 확인되는 준풍은 이게 독자적 연호인지 그 당시 송에서 쓰던 연호 건륭[* 건은 왕건, 륭은 왕건 아버지 왕륭의 휘이다.]의 피휘인지 논란이 분분하다. 이후 960년에 문화적, 경제적 목적을 가진 고려와 군사적인 목적을 가진 [[북송]]와의 윈윈 통교를 시작했으며, 연호와 칭호는 송의 것을 따른다. 당연히 [[거란]]은 개무시. == 치세 == 잇따른 왕권의 강화 정책에서 분노한 호족들의 반발과 암살 위협에 대응하여 조금이라도 의심이 가는 호족이나 반대 세력들을 제거하는 강경책을 단행하였다. 자신의 이복동생인 효은태자[* 태조왕건과 개국공신 [[유금필]]의 딸인 동양원부인 사이의 아들이다.]를 처형하는 것은 물론 형인 혜종과 정종의 아들들인 흥화군과 경춘원군을 역모를 꾀한다는 참소를 들은 후 죽음을 내리기도 하였다. 이 과정에서 [[경종(고려)|자신의 아들]]도 의심하였다.[* 걸핏하면 그를 협박하고 야단을 쳤는데 그 영향인지 경종은 훗날 왕이 된 후 말년에 정사에 흥미를 잃고 어딘가 병약한 모습을 보이게 된다. [[조선]]의 [[숙종(조선)|숙종]]과 [[영조]]를 합친 케이스.] 개혁 과정에서 쌍기를 비롯한 귀화인 세력을 우대해 호족들의 재산을 강제로 빼앗어 쌍기에게 주었다. 이걸 두고 광종에게 '내 집도 바칠 테니 그냥 쌍기에게 주셈'하면서 비아냥이 담긴 직언을 한 서필이라는 신하가 있었는데, 광종은 그의 말에 느낀 바가 있어 특별대우를 줄였다고 한다.(이 서필의 아들이 훗날 요나라의 1차 침공에서 외교 담판으로 고려를 구원한 [[서희]]이다)[* 그 손자는 서눌이다. 서필, 서희, 서눌 3대는 살아서는 재상의 지위에 올랐고, 죽어서는 3대가 모두 [[배향공신]]에 봉해지는 등 큰 영광을 누렸다.] 쌍기의 아버지 쌍철은 쌍기가 고려에서 귀빈 취급을 받자 귀화해 고관 자리에 오른다. 호족들을 견제한 광종의 모습을 생각해보면 다분히 의도적인 처우라고 할 수 있겠다. 결국 이러한 처우는 국내 관료들의 불만을 사게 된 원인이 되어 광종 사후 최승로의 <5조 정적평>, 이제현의 <사략>에서 그를 비판하는 주된 원인이 되었다. 광종은 나라의 학자들 또한 기존 호족들과 연관이 있다 생각해서인지 '''국내 기반이 취약'''해 자신에게 충성을 하기 좋은 귀화인들을 선호한 듯 하다. 고려 성종 때 활약한 최승로가 광종의 귀화인 우대정책과 호족 숙청을 강하게 비판했지만, 국내 학자 출신 관료들이 득세하도록 길을 열어준 게 그 광종이라는 건 아이러니다. 다만 광종과 대립각을 세우고 광종에게 숙청당한 호족 집단들은 이미 후삼국시대나 고려초기 자신의 지역과 왕에 이합집산을 하며 ''''그야말로 믿을 수 없는 자들''''이었다. 실제로 고려 태조가 만부교사건을 일으킨 것도 호족들의 무분별한 합종연횡과 이합집산을 멈추기 위함이고, 결국 저러한 대숙청을 감행했고 실제로 혜종과 정종의 재위년도나 헤종시절 의문의 암살 미수 사건들과 이해되지 않는 죽음만 봐도 저렇게 죽여버렸다. 고려 역사상 가장 위선자같은 귀족세력이 고려의 호족세력들인데 당장에 혜종과 정종의 죽음만해도 너무나도 석연치않으며 숙청된 호족세력들의 막장성도 천하에 드러나지도 않았다. 당장에 노비안검법과 과거제를 시행한 것도 반대했는데 공신이라고 떠드는 자들이 노비를 떳떳하게 모았는지 과거제에 붙을만큼 검증되었는지도 의문이었다. 태종이 죽이고 숙청한 신하들보다 더 믿을 수 없는게 적어도 정도전은 노비문제에 대해서 나름 떳떳하고 과거제를 통해 들어온 신하이자 정도전이 상대한 태종 또한 위선보단 위악을 행한 인물이었다. 민무질, 민무구 두 형제도 저 호족들보단 낫다. 그리고 무엇보다 최승로나 이제현 두 학자의 혹평은 간혹 유체이탈식으로 말을 막던지는 경향이 종종 있어서 액면 그대로를 믿으면 곤란하다. 특히 이제현 선생의 경우는 무신정권을 향해 왕을 누른다고 하면서 정작 왕권을 가장 드높인 광종을 향해선 피의 군주라고 지탄을 한다. 호족연합체는 그 태생부터 일관성이고 나발이고 던진 집단들중 하나다. 적어도 태종이 숙청한 정도전과 정도전이 숙청한 이숭인같은 신진사대부들과는 비교도 안되게 더 믿을 수 없는 집단들이었다. 삼국지에 나오는 후한 말기 군벌들과 같다고 생각하면 된다. 그나마 후한 왕조는 400년의 정통성이 있었지만, 고려는 호족 출신인 태조 왕건이 정통성 없는 후고구려를 찬탈한뒤 신라를 흡수한데다가 분열된 후삼국을 통일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기 때문에 자칫하다간 또다시 분열될 가능성이 있었다. 결국 개국 초 수백에 이르던 호족들이 대부분 숙청되어 불과 수십여명 밖에 남지 않았다고 한다.사실 얼마만큼의 호족이 죽었는지는 기록의 부실로 확실하게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고려 성종 때 최승로가 '태조를 모시던 구신이 '''40여'''명 밖에 남지 않았다'는 발언을 한 대목을 보면(자연사한 이들도 있을 테지만) 숙청 과정에서 호족들이 상당히 큰 타격을 입었던 것으로 보인다. 호족들을 숙청한 후 뭔가 죄의식이 있었는지 절을 세우고 그들을 위한 제를 자주 지냈고 잦은 불사로 인해 이 당시 승려를 자처한 [[땡추]]들의 횡포가 극심했다고 '''전해졌었다.''' 원래 글쓰던 유학자들은 한중 가리지 않고 불교가 조금이라도 득세한 듯보이면 목숨 바쳐서 물어뜯곤 한다. 하지만 '''[[페이크다 이 병신들아|이마저도 실상은 최후의 최후까지 호족들을 견제하기 위한 목적으로]]''' 사원들을 국가에서 지원하고 죄다 개경을 둘러싸는 형식으로 만들어 승려 세력들로 하여금 '''왕에게 충성을 다짐'''하게 만들었다. 이 사원들은 훗날 [[희종(고려)|희종]]이 [[최충헌]]을 죽이려고 시도하다가 실패하여 승려들은 전부 죽게 되고, 사원들도 죄다 철폐되면서 고려 불교 성격 또한 교종 중심에서 선종 중심으로 바뀌는데 일조한다. 사찰을 대규모로 건립한 부분도 알고 보면 무서운데, 이게 바로 대각국사 [[의천]] 보다 이른 시기의 불교통합 시도이다. 광종은 교종인 귀법사의 [[균여]]를 중심으로 '''화엄종'''(신라 때부터 대표적인 왕권을 옹호하는 성격이 강한 종파)을 통합하게 한 다음, [[천태종]]을 후원하여 법상종(고려초기 문벌귀족들의 지원을 많이 받은 종파)까지 포함한 교종 통합을 하려 하였다. 여기에 또 중국에서 '''법안종'''(선종 중심으로 교종을 시도한 종파)을 들여와서 선종을 통합하고, 이걸 다시 앞의 교종과 통합해 불교의 완전한 교선일치를 시도하였다. 하지만 광종이 죽으면서 법안이 쇠퇴하였고, 이 시도는 물건너간다. 제국의 아침에서는 이 과정은 좀 더 극적으로 그리고 있다. 그리고 이걸 그대로 따라한 인물이 바로 [[의천]]이다. 의천의 선교양종통합은 불교사에서만 주로 언급하지만, 왕족이었던 의천의 주요한 목적은 바로 왕권의 강화와도 관련이 있었다. == 평가 == === 긍정론 === 광종이 태조에 이어 고려라는 나라의 기틀을 다진 군주라는데는 아무런 이견이 없다. 고려가 통일을 이루기는 했지만 그 연합 구조가 다소 불안정했던 초기였던만큼 나라의 기틀을 다질, 광종같은 명철한 군주의 등장은 불가결한 것이었다. 광종이 비판받는 부분은 '지나치다고 여겨지는' 호족과의 대립, 숙청 부분인데 '''광종에 대한 비판적 평가들은 당연하게도 모두 그 숙청의 피해자인 공신들의 후손, 대호족이나 신권을 강조한 유학자들에 의해서 나왔다는 것도 유념할 필요가 있다.''' 대표적으로 성종 때 시무28조를 올린 최승로. 최승로의 시무28조에선 태조와 함께 가장 자주 거론되는 왕이 광종인데 참소를 믿고 사람을 마구 죽임, 궁실을 크게 만들고 사치스러움, 특정 집단(쌍기)을 편애, 불교를 지나치게 숭상함, (안검법으로)귀천의 구분이 없어짐, 궐에 호위병을 필요 이상으로 많이 둠 등등 온갖 이유를 들어 거론할때마다 비판 받는다. 시무28조에서 지적되는 사회의 폐단=최승로가 보는 광종의 폐단이라 봐도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 시무책 앞에 있는 긍정적인 평가는 시무 28조 앞에 실린 5조 치적평 초반에 좀 있는 정도이고 나머진 전부 부정적인 내용이다. 조선 태종과의 비교도 굉장히 시대착오적인데 ''''정말 일부만 제거해서도 왕권을 확립할 수 있었던 [[조선]] [[태종]]과는 달리'''', 고려 광종은 수많은 호족들을 제압하고 왕권을 확립해야 했기 때문에 훨씬 더 과격한 방식으로 숙청이 이루어졌을 수 있다는 점은 감안해야 할 것이다.[* 이 부분에서 역사저널 그날에서는 아마 태종이 광종을 모티브로 삼아 배울건 배우고, 버릴건 버린게 아니냐는 얘기를 했었다.] 이미 사병 혁파 정책으로 군세를 거느리는 것만으로도 반역, 혹은 도발성을 띄는 태종 시기와는 달리 고려의 호족들은 멀쩡히 사병을 거느리고 있었고 이들의 사용, 연합은 충분히 골칫거리였다. 이러한 조건을 띈 채 딴 마음을 먹을 수 있는 호족이 널리고 널려 있었던 것. 호족연합정권에 가까웠던 고려 초기의 특수한 사정을 고려하면, 이런 고려를 군주의 입장에서 '정상적인' 왕권국가로 전환시키기 위해 흘려야 할 피가 어마어마했기 때문에 조선과 고려의 차이가 발생했다고 볼 수 있다. 단적으로 고려 태조 왕건의 후비는 29명이나 되며 이들들은 대부분 호족집안 출신이다. 자연히 광종이 제거하거나 견제해야 할 외척들만 해도 조선 태종보다 훨씬 많을 수 밖에 없었다. 상기대로 이들이 그다지 믿을만한 자들도 아니었다. 또한 당시 고려의 유학자들이나 조선왕조 유학자들이 욕을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유학자들을 증명할 과거시험의 창시자가 광종이다. 고려 왕조는 물론이고 후대 조선 왕조의 명백한 근간이 되는 제도를 처음으로 들여온 왕이라고 할 수 있다. === 비판론 === 왕권을 꾀하는 과정에서 외척, 공신들을 무자비하게 숙청한 면에서 [[통일신라]]의 [[신문왕]][* [[삼국통일]]로 이전 [[경상도]]의 [[신라]]보다 몇 배로 커져버린 통일신라를 사실상 새로운 국가로 본다면, [[문무왕]]이 첫 번째 개국 군주이고 신문왕이 두 번째 왕이다.]이나 조선의 [[태종(조선)|태종]], [[세조(조선)|세조]]와 비교할 수 있다.아닌 게 아니라 왕조의 초기에 왕권을 강화하고 국가 발전의 기반을 쌓았다는 업적에서도 비슷하지만 왕권에 장애가 될 존재들을 제거하였다는 점에서 특히 유사하다. 광종은 특히 조선의 태종과 비교되는데 조선 태종의 숙청은 이복동생들과 그 관련자들, 처남들과 그 관련자들의 목숨을 뺏었다. 하지만 그런 걸 제외하면 처남들도 그 가족들을 연좌해 죽이진 않았으며 특별히 대규모 숙청을 단행하진 않았으므로 광종이 숙청의 양쪽에서는 더 위였다고 볼 수 있으며 지나친 숙청으로 인해 자신의 대를 이을 아들에게까지 정치적 부담을 주었다는 점에서 조선 태종과는 다르다. 태종에 의해 숙청된 인물들 중 진짜 억울한 사람은 [[세종대왕]]의 장인 심온 정도 뿐인데 그마저도 심온만 제거하고 남은 가족들은 관노로 삼는 정도에 그쳤으며 그 가족들도 곧 복권된다. 심온도 억울하긴 했겠지만 태종이 워낙 외척 세력을 경계해서 그랬던 것으로 결과적으로 보면 아들의 왕권 확립에 도움이 됐다. 그러니까 태종은 최소한 아들까지 불안하게 만들지는 않았고 다음 대에까지 숙청의 후유증이 남을 정도로 심하게 하진 않았다. 고려와 조선의 왕권의 격, 사정이 달랐다고 해도 실제로 왕권에 도전할 만한 왕족이나 호족들도 딱히 없었다. 이미 광종 스스로가 제일 강한 정통성을 타고난 왕자였고 형인 [[고려 정종(3대)|정종]]도 왕권 콤플렉스가 있었기 때문에 이미 형 대에서 많이 숙청되었다. 그런데 또 숙청의 질로 따진다면 아무래도 [[태종(조선)|태종]]과 비교하기 어렵다. 당장 광종의 숙청은 광종의 죽음과 함께 그 효과를 대부분 잃어버리지만 [[태종(조선)|태종]]의 숙청은 [[세종대왕]]의 안정적인 치세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 능침 == || [[파일:attachment/rhkdwhd.jpg]] || [[개성특급시]] 송악산 기슭에 남아 있는 광종의 헌릉. 광종의 능호는 헌릉(憲陵)이다.[* 공교롭게도 그와 많은 면에서 비슷한 조선 태종의 능호도 헌릉이다. 다만 한자는 다른데 광종의 헌릉은 법 헌(憲)자를 쓰고, 태종의 헌릉은 바칠 헌(獻)자를 쓴다.] 2009년에 [[북한]]에 남아 있는 고려 왕릉의 모습이 일부 공개되었는데 헌릉은 2009년의 모습이 드러나지 않았다. 북한의 고려 왕릉 보존 상태로 보아 저 사진보다 많이 훼손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 가족 관계 == 정비 대목왕후와의 사이에서 장남인 [[경종(고려)|경종]]을 비롯한 2남 3녀를 보았다. 이 중에서 막내딸이 [[성종(고려)|성종]]의 1비 문덕왕후 유씨[* 할머니 신명순성왕후 유씨의 성을 따랐다.]인데 성종은 대목왕후의 친남매인 [[대종(고려)|대종]]의 아들이다. 즉, 대목왕후와 대종은 남매인 동시에 사돈이다. 후궁으로는 경화궁부인(慶和宮夫人) 임씨와 현비 김씨가 있지만 후궁 소생의 자식은 없다. 현비 김씨는 궁인 출신으로 기록이 거의 남아있지 않다. [[현종(고려)|현종]] 20년에 광종의 궁인을 현비로 추증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을 뿐이다. 경화궁부인은 혜종과 의화왕후 임씨의 딸이며 광종에게 시집간 것은 당시의 혼란스러웠던 정국과 관련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고려왕실의 풍습인 족내혼의 전통에 의해 어머니 의화왕후의 성을 따라 임씨로 칭하였다. 왕의 딸임에도 왕후에 이르지 못한 것은 혜종의 미약했던 왕권과 동복남매였던 흥화궁군이 광종에 의해 숙청된 것이 이유가 된 것으로 보인다. == 미디어믹스 == 미디어 매체에서 상대적으로 덜 다뤄지는 경향이 있는 고려 초기의 임금들 중에서는 미디어 매체에서 가장 많이 출연한 군주이다. 그뿐만 아니라 현대의 미디어 매체에서는 고려의 창건자이자 아버지인 왕건보다도 더 많이 창작물의 주역으로 등장하는 편. === 드라마 === http://img.kbs.co.kr/cms/ICSFiles/artimage/2004/02/27/c_d_emp07/20040227_101843.jpg * 부왕인 [[태조(고려)|태조]]를 드라마화한 [[태조 왕건]] 이후 제작된 [[드라마#s-3|드라마]] [[제국의 아침]]은 이 광종이 주인공이다. 부자가 연속으로 사극 주인공이 된 례. 배우는 [[김상중]]. [[https://www.youtube.com/watch?v=9o91lG7J7Q4|광종 그것이 알고 싶다]] [[태조 왕건]]과 달리 이 드라마는 별로 흥행하지 못했으나 김상중의 광종 연기는 매우 뛰어났기에 [[2003년]]의 [[KBS 연기대상]]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http://file2.instiz.net/data/file/20150222/a/1/7/a17b97f0aa15993f177190b3926e22cc.jpg * 전 드라마 [[빛나거나 미치거나]]에서는 [[장혁]]이 연기했다. http://img2.sbs.co.kr/img/sbs_cms/CH/2016/08/26/CH80000898_w300_h300.jpg * 전 드라마 [[달의 연인 - 보보경심 려]]의 [[배우]]는 [[이준기]]. === 게임 === * 게임 [[제국의 아침(게임)|태조 왕건: 제국의 아침]]에서는 정규 캠페인 외에 패치로 추가된 '제국' 캠페인의 주인공으로 등장했는데, 해당 캠페인에서 [[왕건|아버지]]와 유닛 스킨을 --[[아서스 메네실|계승]]-- 공유했다(...). === 만화 === * [[네이버 웹툰]] [[문아]]가 광종 연간을 무대로 전개되는데, 작중의 시대적 배경은 광종 7년(956)이다. 작중에 실제로 등장하며 자세한 내용은 [[광종(문아)|항목]] 참조. ~~모에선 맞은 광종~~ 실제로도 꽤나 수려한 외모를 지녔다고 한다. == 기타 == * 광종이 정관정요(貞觀政要)를 애독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책은 역시 [[명군]]으로 알려진 [[당나라]]의 2대 황제 [[이세민|태종]]이 신하들과 나눈 대화를 엮은 책으로서 제왕학(帝王學)의 교과서로 여겨지는 책이다. 특유의 카리스마로 국초 기틀을 잡는 등 역사적으로 광종 자신과 비슷한 군주의 언행을 탐독했다는 게 흥미로운 점. * 광종은 용모가 상당히 수려하였다고 하며 키가 매우 커 180을 넘었다고 한다! 그 당시에는 완전히 거인이고 지금도 매우 큰 키이다. [[분류:고려의 왕]] Load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