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변경문서 보기수정 내역 단종(조선) (버전 비교) [include(틀:역대 조선 국왕)] ---- ||<#bf1400>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972000, #bf1400 20%, #bf1400 80%, #972000)" {{{#ffd400 '''단종 관련 틀'''}}}}}}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include(틀:조선의 왕자/목조 ~ 연산군)] ---- [include(틀:역대 조선 왕세자)] ---- [include(틀:역대 조선 상왕)] ---- [include(틀:한국신화의 신들)] ---- [include(틀:한국을 빛낸 100명의 인물들의 등장인물 및 단체)] ---- }}} ||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972000, #bf1400 20%, #bf1400 80%, #972000)" '''조선 제6대 국왕[br]{{{+1 단종 | 端宗}}}'''}}}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단종의어진.jpg|width=100%]]}}} || ||<-2> {{{-2 단종 [[정부표준영정|{{{#ffd400 표준영정}}}]][* 권오창 화백의 상상으로 그린 어진. 조선왕조실록과 행장 등 사료와 전주 이씨 종중의 골상적 특징이 고려되었으며, [[고조할아버지]] [[조선태조어진|태조어진(경기전본)]]과 [[삼촌]] [[세조(조선)/어진|세조 어진 초본]]([[국립고궁박물관]] 소장본)을 검토해 공통된 특징을 추출했다고 한다. [[https://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6279376&plink=ORI&cooper=DAUM&plink=COPYPASTE&cooper=SBSNEWSEND|#]]]}}} || ||<|2> '''출생''' ||[[1441년]] [[8월 18일]][* [[율리우스력]] [[8월 9일]].][br](음력 [[세종(조선)|세종]] 23년 7월 23일)|| ||[[한성부]] [[경복궁 자선당]][* 조선 국왕들 중 최초로 궁궐 내에서 태어난 국왕이다. [[태조(조선)|태조]], [[정종(조선)|정종]], [[태종(조선)|태종]]까지는 고려시대에 태어난 이들이었고, [[세종(조선)|세종]]과 [[문종(조선)|문종]]은 각각 부왕들인 태종과 세종이 왕자 시절에 개인 사저에서 태어난 임금들이었다. 따라서 단종이 조선 왕조 최초로 궁궐에서 태어난 국왕이었다. 여담으로 조선 왕조에서 궁궐 내에서 태어난 임금은 단종, [[성종(조선)|성종]](세자의 아들로서 궁 내에서 태어났다), [[연산군]], [[중종(조선)|중종]], [[인종(조선)|인종]], [[명종(조선)|명종]], [[광해군]], [[숙종(조선)|숙종]], [[경종(조선)|경종]], [[영조]], [[정조(조선)|정조]], [[순조]], [[헌종(조선)|헌종]], 그리고 마지막 임금이었던 [[순종(대한제국)|순종]]이 있다. 27명의 임금들 중 생각보다 적은 14명이 궁궐에서 태어나고 자라 임금에 등극한 셈이었으니, 조선의 왕위 계승이 그만큼 정상적인 경로로만 이루어진 게 아니라 왕실의 사정이나, 이해 관계에 따라 엇갈렸음을 보여준다.][br](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로(서울)|사직로]] 161)|| ||<|2> '''즉위''' ||[[1452년]] [[6월 14일]][*A [[율리우스력]] [[6월 5일]].] (10세)[br](음력 [[문종(조선)|문종]] 2년 5월 18일)[* [[세는나이]] 12세.]|| ||[[한성부]] [[경복궁 근정전]][br](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로(서울)|사직로]] 161)|| ||<|2> '''사망''' ||[[1457년]] [[11월 16일]][* [[율리우스력]] [[11월 7일]].] 이후 (향년 16세)[br](음력 [[세조(조선)|세조]] 3년 10월 21일 이후)[* [[세는나이]] 17세.]|| ||[[강원도]] 영월군 관아 관풍헌[* 관풍헌은 영월 관아에 있던 [[객사]]다.][br](現 [[강원특별자치도]] [[영월군]] 영월읍 중앙로 61)|| || '''능묘''' ||[[장릉(영월)|장릉]](莊陵)|| ||<|8> '''재위기간''' ||'''{{{#ffd400 조선 왕세손}}}'''|| ||[[1448년]] [[5월 14일]][* [[율리우스력]] [[5월 5일]].] ~ [[1450년]] [[9월 5일]][*B [[율리우스력]] [[8월 27일]].][br]{{{-2 (음력 [[세종(조선)|세종]] 30년 4월 3일 ~ [[문종(조선)|문종]] 즉위년 7월 20일)}}}|| ||'''{{{#ffd400 조선 왕세자}}}'''|| ||[[1450년]] [[9월 5일]][*B] ~ [[1452년]] [[6월 14일]][*A][br]{{{-2 (음력 [[문종(조선)|문종]] 즉위년 7월 20일 ~ 문종 2년 5월 18일)}}}|| ||'''{{{#ffd400 제6대 국왕}}}'''|| ||[[1452년]] [[6월 14일]][*A] ~ [[1455년]] [[8월 3일]][*C [[율리우스력]] [[7월 25일]].][br]{{{-2 (음력 단종 즉위년 5월 18일 ~ 단종 3년 윤6월 11일)}}}|| ||'''{{{#ffd400 조선 상왕}}}'''|| ||[[1455년]] [[8월 3일]][*C] ~ [[1457년]] [[7월 21일]][* [[율리우스력]] [[7월 12일]].][br]{{{-2 (음력 [[세조(조선)|세조]] 1년 윤6월 11일 ~ 세조 3년 6월 21일)}}}|| ||<-2>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본관''' ||[[전주 이씨]] || || '''휘''' ||홍위(弘暐) || || '''부모''' ||부왕 [[문종(조선)|문종]][br]모후 [[현덕왕후]] || || '''형제자매''' ||1남 2녀 중 장남 || || '''왕비''' ||[[정순왕후(조선 단종)|정순왕후]] || || '''후궁''' ||[[숙의 김씨(단종)|숙의 김씨]], [[숙의 권씨(단종)|숙의 권씨]] || || '''종교''' ||[[유교]] {{{-2 ([[성리학]])}}} || || '''군호''' ||노산군(魯山君)[br]→ 노산대군(魯山大君)[* 군호는 [[강원도]] [[평창군|평창]]의 별호인 '노산'에서 따왔다. 누나 [[경혜공주]]가 군주(왕세자의 적녀) 시절에 받던 작호도 [[강원도]] [[평창군|평창]]에서 따온 평창군주였다.][* 원래 왕세손-왕세자-국왕 즉위로 국왕이 되기 전에 받은 군호는 따로 없었다가 [[단종복위운동]] 이후 폐위되면서 군호를 받았다. 이후 [[숙종(조선)|숙종]]때 군에서 대군으로 소급 적용하여 격상되었다.] || || '''전호''' ||경희전(景禧殿) || || '''묘호''' ||'''[[단종#s-2]](端宗)''' || || '''존호''' ||공의온문(恭懿溫文) || || '''시호''' ||순정안장경순돈효대왕[br](純定安莊景順敦孝大王) ||}}}}}}}}} || [목차] [clearfix] == 개요 == [[조선]]의 제6대 [[국왕]]이다. [[요절|만 16세라는 어린 나이에 안타까운 죽음을 맞아]] __'''비운의 소년 군주'''__라고도 불린다. [[묘호]]는 단종(端宗), [[시호]]는 공의온문순정안장경순돈효대왕(恭懿溫文純定安莊景順敦孝大王)[* '공의온문'은 세조 1년 7월에 상태왕에게 올린 존호로 이후 실록에 공의온문대왕으로 일컬어졌다. 이후 [[숙종(조선)|숙종]] 때에 시호 '순정안장경순돈효대왕'을 더하였다.], [[휘]]는 홍위(弘暐). [[세종(조선)|세종]]의 적장손이자 [[문종(조선)|문종]]과 [[현덕왕후]]의 적장남으로 태어나[* 기록에 따르면 [[이복형제|이복 형]]들이 두 명이 있었다고 하나 모두 어릴 때 요절해 죽었기 때문에 거의 외아들로 성장하였다.] 왕세손으로 책봉되었으며 세종이 사망한 뒤 문종이 보위에 오르면서 왕세자로 개봉(改封)되었다. 태어나자마자 어머니 현덕왕후가 산후 후유증으로 죽었고 할아버지 세종과 할머니 [[소헌왕후]]도 단종이 어렸을 때 [[사망]]했으며 마지막 남은 직계 존속인 부왕 문종마저 지병 [[등창]]의 재발과 악화로 승하하면서[* 문종은 평소 심한 [[등창]]을 앓고 있었으며 [[세자]] 시절에도 이 때문에 목숨을 잃을 뻔 했지만 다행히 병세가 진정, 약화되었다. 그러나 이후로도 빈번히 재발하여 [[몸]]이 약해졌으며 결국 목숨을 잃게 되었다.] 아무에게도 보호받지 못하는 혈혈단신의 어린 [[나이]](11~12세)로 보위에 올라 [[김종서(조선)|김종서]], [[황보인]] 등 원로 고명대신들의 보좌를 받게 되었다. 즉위한 뒤 1년 후 숙부 [[세조(조선)|수양대군]]이 반란([[계유정난]])을 일으켜 [[권력]]을 잡자 반강제적으로 실권을 빼앗기고 [[상왕]]으로 물러나면서 왕위를 빼앗겼다. 상왕 재위기에 일어난 [[단종복위운동]]의 여파로 자신의 권력에 위협을 느낀 숙부 [[세조(조선)|세조]]에 의해 폐위되어 [[강원도]] [[영월군|영월]]로 [[유배]]당하고 17살이 되던 해에는 끝내 그 곳에서 [[살해]]되었다. == 휘 == 본명은 '''이홍위(李弘暐)'''로 특이하게도 이름이 두 글자이다. 조선의 임금들 중 이름이 두 글자인 사람은 [[이홍위|단종]]과 [[이방원|태종]] 둘뿐이고, 다른 왕들은 원래부터 외자였거나 외자로 [[개명]]했다.[* [[태조(조선)|태조 이성계]]는 이단으로, [[정종(조선)|정종 이방과]]는 이경으로, [[철종(조선)|철종 이원범]]은 이변으로, [[고종(대한제국)|고종 이명복]]은 이재황, 이형, 이희 등으로 고쳤다.] 한국에서는 고려 때부터 [[피휘]] 때문에 임금이나 왕자군은 죄다 외자 이름을 써 왔고, 그 한 글자를 택할 때도 일상생활에 잘 사용하지 않는 글자를 엄선했다. [[태종(조선)|태종 이방원]]은 이름에 흔한 한자인 '꽃다울 방(芳)'과 '멀 원(遠)'을 썼지만 피휘를 신경쓰지 않았다.[* 공자의 가르침에 따르면 이름이 두 글자일 때는 두 글자 한꺼번에 쓰지만 않는다면 괜찮다고 하였으나 그건 원칙상 그렇다는 것일 뿐이고 문제 삼고자 한다면 충분히 문제 삼을 수 있었다. 관세음보살이 관음보살이 된 것도 [[당나라|당]] [[태종(당)|태종 이세민]]의 이름과 겹쳤기 때문이었고, [[조선]] [[숙종(조선)|숙종]] 대에는 [[조선 통신사]]가 일본에 보낸 국서에 光 자가 들어간 것을 두고 [[에도막부|일본 조정]] 측에서 [[에도막부]] 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徳川家光)의 미쓰(光)와 같다며 조선 정부에 정정을 요구한 적도 있었다.(물론 조선 정부는 이런 무리한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영조]]는 이름에 비교적 흔한 글자인 금(昑)이 들어갔기 때문에 자신의 본명을 무려 40년 동안이나 숨겼다고 한다. 자기 이름이 금(昑)이라고 하는데, 임금의 휘를 알게 된 신하가 글을 낭독하다가 금(昑)자가 나와 [[피휘]] 문제로 글을 계속 읽지를 못하자 [[영조]]는 그 사실을 알고 그냥 읽으라 직접 하교하기도 하였다고 한다.[[http://m.khan.co.kr/view.html?artid=201310081114281&code=960201|##]] 다만 조선 초기 임금([[태조(조선)|이성계]], [[정종(조선)|이방과]], [[태종(조선)|이방원]])들은 [[고려|고려 말기]] 때 태어난 사람으로 이름을 지을 때는 왕이 될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외자일 이유가 없었다. [[철종(조선)|철종]] 또한 그의 할아버지인 [[은언군]][* [[사도세자]]의 서자, 정조의 바로 밑 이복동생.]이 [[천주교|천주학]]에 엮이고 역모로 몰려 서인(평민)으로 강등된 후 태어났기 때문에 아버지 대부터는 군호조차 받지 못한, [[조선/왕사|왕위]]와는 거리가 매우 먼 상태였는지라 이름이 외자일 필요가 없었다. [[고종(대한제국)|고종]]은 아예 상태가 더 안 좋아, 전임인 철종과 '''무려 17촌'''이나 차이가 나는, [[인조]]로부터 갈라져 나온 남과 다를 바 없는 상태였다. 즉 태어날 때부터 '''[[조선/왕사|임금]]'''이 될 것임을 알면서도 굳이 두 글자 이름을 지어 가진 사람은 단종이 유일하다. 다만 예전에는 태어날 때 짓는 이름과 족보에 올리는 이름이 달랐는데, 단종의 경우 태어날 때의 이름을 왕이 된 뒤 미처 바꾸지 못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아마 정국이 불안정하여 이름을 미처 바꾸지 못한 상태에서 바로 양위해 개명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보지도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 정통성 == 먼저 조선사 27명의 임금을 거치며 적장자 중에서 [[왕세자]]로 책봉된 이후 별탈 없이 왕위에 오른 임금은 '''오직 7명(문종, 단종, 연산군, 인종, 현종, 숙종, 순종)'''뿐이다. 그 중 단종은 유일하게 적장자 출신 왕세자의 아들로 태어난 적장자, 즉 '''적장손''' 출신 국왕으로, 조선 왕조의 역대 국왕 중 가장 완벽한 정통성을 갖춘 국왕이다. 아버지 [[문종(조선)|문종]]은 할아버지 [[세종(조선)|세종]]의 장남이었고, 단종 본인 또한 문종이 세자 시절에 본 유일한 아들이다. 그리고 아버지 문종은 적장자이긴 했으나 문종이 태어난 [[1414년]](태종 14년)에는 아직 큰아버지인 [[양녕대군]]이 세자였고 아버지인 [[충녕대군]], 즉 세종은 아직 세자가 아닌 상태였다. 즉, 태어날 때는 원손이 아니었다. 그러나 단종이 태어난 [[1441년]](세종 23년)에는 아버지인 [[문종(조선)|문종]]이 세자였고, 할아버지인 [[세종(조선)|세종]]이 왕이었다. 또한 할머니인 [[소헌왕후]]는 중전이었으며 어머니인 [[현덕왕후]] 또한 세자의 정실인 세자빈이었다.[* 누나 [[경혜공주]]는 어머니 [[현덕왕후]]가 당시 후궁일 때 태어났다.] 따라서 단종은 태어날 때부터 자연스럽게 원손(1441~1448)으로 시작하여 이후로 세손(1448~1450) - 세자(1450~1452) - 왕(1452~1455)을 모두 차례대로 거친 조선 유일의 국왕이다.[* 게다가 단종은 작은아버지 [[수양대군]](세조)에게 --반강제적으로-- 왕위를 넘겨주고 상왕(1455~1457)까지 해봤다.] 이런 어마어마한 적통 케이스는 조선엔 당연히 단종 말고는 없고, 왕조 국가 사례를 통틀어도 이 정도 적통은 매우 드물다.[* [[동로마 제국]]의 [[포르피로게니투스]]나 [[사산 왕조]] 페르시아의 [[샤푸르 2세]]의 사례 등을 봐도 알 수 있듯, '[[왕권신수설|특별한 혈통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 정통성의 기반이 되는 세습 군주정 국가에서는 왕위 계승자로 태어난 인물들에게는 그만큼 특별한 정통성이 있다고 여겨지는 경우가 많았다. 현대라면 '부족한 혈통적 정통성을 자신의 노력과 실력으로 극복한 인물'이 더 높은 평가를 받는 경우도 많지만, 전근대 사회에서 실력과 노력으로 지위를 획득할 수 있다는 것은 왕조와 신분제를 뒤흔들 수 있음을 뜻하기에 노력으로 얻을 수 없는 혈통을 정통성의 근거로 삼았다. 때문에 혈통적 정통성이 다른 가치보다 훨씬 우선하던 세습제 사회에서는 다른 요소의 개입 없이 순수한 혈통적 특권을 가진 인물, 게다가 '태어남으로써 얻는' 특권을 '태어나면서부터 얻은' 인물이 그만큼 더 특별하게 여겨진 것. 단종의 혈통적 정통성 문제에서 적장자의 적장손으로 태어나 바로 원손으로 책봉된 뒤 세손으로 책봉되었다는 점이 그렇게 거듭 강조되는 것 역시, 세습왕조국가의 특성상 태어나는 순간부터 언젠가 왕이 될 사람이라고 여겨지는 것이 가진 강력한 상징성 때문인 것. 단종과 비슷한 과정을 거치며 황위에 오른 사람이 명나라의 5대 황제였던 [[선덕제]]다. [[영락제]]가 [[정난의 변]]을 일으키며 황제의 자리에 오르자, 손자인 선덕제도 황태손, 아버지인 홍희제가 즉위하면서 [[황태자]]로 개봉되었고, 이후 [[황제]]에 올랐다. 다만 [[선덕제]]는 출생 당시 황태손이 아닌 연왕의 장손으로 태어났기에, 혈통적 정통성을 태어나면서 얻은 단종에 비하면 정통성이 약하다. 할아버지인 [[영락제]]의 정난의 변 문제도 있고. 물론 [[정난의 변]]은 [[계유정난]]과 달리 나름대로 명분이 있는 [[쿠데타]]였음을 감안해야 할 것이다. 자세한 건 [[정난의 변]] 문서 참고.] 단종 외에도 세손 시절을 거친 왕이 몇 명 있기는 한데, [[현종(조선)|현종]]의 경우 원손 - 세손 테크를 타긴 했지만 아버지인 [[효종(조선)|효종]]이 아직 [[봉림대군]]일 때 태어났으며, 봉림대군의 형인 [[소현세자]]의 아들들이 엄연히 있기에 [[인조]]의 적장손도 아니었다.[* 그러나 소현세자 사망 이후 [[소현세자]]의 세 아들(경선군, 경완군, 경안군)에 대한 조부 [[인조]]의 처분을 보면 거의 호적을 파낸 것과 진배없었기에 적장손이라고 자칭해도 문제없을 정도였다. [[소현세자]]의 세 아들은 소현세자 사망 후 제주도로 유배가 첫째와 둘째는 제주도에서 죽고, 셋째도 스물 두살에 죽지만 그래도 소현세자의 후손은 많이 남겼다.] [[정조(조선)|정조]]나 [[헌종(조선)|헌종]]의 경우 아버지인 [[사도세자]]와 [[효명세자]]가 먼저 죽어 '원손 → 세손 → 바로 왕'의 테크를 탔다.[* 게다가 [[정조(조선)|정조]] 같은 경우는 [[사도세자]]의 형 [[효장세자]]가 있었고, 자신 역시 형 [[의소세손]]이 있기에 따지고 보면 [[영조]]의 차남의 차남이다. 이들이 일찍 죽어서 그렇지 특히 형 [[의소세손]]이 건강하게 컸다면 어림도 없었다.] 게다가 [[정조(조선)|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가 [[영조]]의 정실부인이 아닌 후궁 [[영빈 이씨]]의 몸에서 난 서자였고 자신도 [[사도세자]]의 차남이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사도세자]]가 역적까진 아니어도 [[임오화변|반쯤 죄인으로 죽은 상황]]이었다. [[헌종(조선)|헌종]] 역시 아버지 [[효명세자]]가 젊은 나이에 죽어버려 세자 테크 트리를 밟지 못했다. 거기다가 [[정조(조선)|정조]]나 [[헌종(조선)|헌종]]은 아버지([[사도세자|사도 세자]])나 할아버지([[영조]], [[순조]])가 서출이라는 아쉬움이 있어서 단종과는 처첩제 기반 신분제적 측면에서 수준이 다르다. 장자가 일찍 죽는 경우야 흔하던 시대이니 장자가 아닌 것은 문제가 없으나, 적자가 아닌 것은 보이지 않는 미세한 차별 대우가 있었다.[* 단, [[영조]]의 두 아들(효장, 사도)은 모두 서자임에도 적자 소생이 없기에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당장에 [[임진왜란]] 직전 적자가 없던 [[선조(조선)|선조]]의 후계자로 서자인 [[광해군]]과 [[신성군]]이 부각되었다.)] 단종과 마찬가지로 정통성을 지닌 국왕이 [[숙종(조선)|숙종]]인데 숙종은 태어났을 때 아버지 [[현종(조선)|현종]]이 세자가 아닌 왕이었기 때문에 원손 - 세손시절이 없이 원자 - 왕세자 - 왕 단계를 거쳤다. 단종의 할아버지 세종은 장자([[양녕대군]])[* [[양녕대군]]도 실제로는 장남이 아닌 4남이다. 손위로 일찍 죽은 형이 3명 있는데 그들이 조선이 개국되기도 전인 고려 말에 요절해 죽어서, 정사에 기록되지 않아 [[양녕대군]]이 [[태종(조선)|태종]]의 실질적인 장남으로 대우받았다. 조선 왕조실록에 [[태종(조선)|태종]]이 결혼초에 자식 셋을 어릴 때 잃어서 괴로워했었다는 언급을 한 기록이 있다. 이를 볼 때 [[양녕대군]] 이전에 3명의 자식이 유산되거나 갓난아기 때 병들어 죽은 상황인 것으로 간주된다. 과거에 일찍 죽는 아기가 많았다지만 의료나 위생 환경이 비교적 괜찮은 편인 잘 나가는 사대부 양반 집안에서, 아들이 3명이나 죽은 건 흔치 않은 일이다. [[양녕대군]]이 세자 시절에 온갖 깽판을 치고 다닐 때도 [[태종(조선)|태종]]이 빨리 세자 자리에서 폐위시키지 않고 안타까워했던 건 괜히 그런 게 아니다. [[태종(조선)|태종]]과 [[원경왕후]] 부부에게 있어 [[양녕대군]]은 아들 셋을 연달아 잃은 슬픈 상황에서 4번째 적자로 태어나 겨우 요절하지 않고 자란 그야말로 귀하디 귀한 아들이였기에, 아기 때부터 엄청나게 사랑하며 직접 키운 정이 너무 깊었기 때문이다. 물론 조선 건국 이후 생긴 왕조실록 기록상 그때 죽은 자식들의 생년이나 이름 같은 기록이 없으니, 공식적으로 [[양녕대군|양녕]]이 장자인 걸로 되어 있다.]는 아니나 어머니가 왕비인 적자[* 태종의 적3남.]였고, [[세종(조선)|세종]]의 아버지 [[태종(조선)|태종]]도 장자는 아니나 역시 적자[* 태조의 적5남.]였다. 그러니 단종은 그야말로 고조할아버지이자 초대 군주인 [[태조(조선)|태조]]의, 그 [[신의왕후|정실]] 소생 적자인 [[태종(조선)|태종]]의, 그 [[원경왕후|정실]] 소생 적자인 [[세종(조선)|세종]]의, 그 [[소헌왕후|정실]] 소생 적장자인 [[문종(조선)|문종]]의, 그 [[현덕왕후|정실]] 소생 적장자(단종 본인)인 '''[[완벽]]한 적손이다.''' 이른바 '적통 OF THE 대통'인 셈.[* 물론 왕의 자손은 그냥 양반과 달리 서자여도 세자나 세손만 되면 정통성에 문제없는 것으로 간주한다. 적통성과 정통성은 다르다. 왕이 안 될 경우 적자는 '대군', 서자는 '군'이라는 호칭차이만 있었다. 다만 단종의 [[조선/왕사|정통성]]에 대한 평가에서 보듯 서출이라도 정식으로 세자나 세손으로 책봉되면 정통성을 인정받지만, 적통성을 가진 경우 그 적통성이 정통성을 보조하여 더더욱 강한 정통성을 보장했다고 보면 적절하다.(중국에서는 嫡庶간의 차이가 그렇게 까지 엄격하게 구분되지는 않는 편인 것과는 달리 한국에서는 嫡庶간의 차이는 무척이나 큰 것이었다. 이는 外家의 신분을 따지는 것이었다.)] 이 적통의 피는 13대 [[명종(조선)|명종]] 대에서 끊긴다. 명종의 외아들 [[순회세자]]가 열네 살에 요절하고 다른 후사를 보지 못하자, 명종의 아버지인 [[중종(조선)|중종]]의 서7남인 [[덕흥대원군|덕흥군]]의 적3남인 [[선조(조선)|하성군]](짧게 말해서 명종의 조카)이 '''방계'''로 왕위를 이으니 이가 바로 선조다. 그야말로 적자&적손+장자&장손+원손+세손+세자+왕이라는, '''조선 역대 왕들 중 절대최강의 순도 100% 정통성을 자랑한다.''' 쉽게 말하면 [[세종(조선)|왕]]의 [[문종(조선)|큰 아들]]의 큰 아들(단종)인 셈. 이런 케이스는 조선 역사에서 단종 단 한명 밖에 없고, 중국 역사를 아무리 뒤지고 찾아봐도 흔치 않은 케이스다. 게다가 [[계유정난]] 이후 실권을 다 뺏겼지만 [[상왕]]까지 거쳤고, 이후 강등된 탓에 '''노산군'''이라는 팔자에도 없던 군호까지 받았다. 더불어 사후 [[숙종(조선)|숙종]]대의 단종 복위 과정에서 '''노산대군'''이라는 대군의 호도 받았다. 그야말로 왕족 남성이 파 볼 수 있는 모든 [[명함]]을 다 파 본 정말 유일한 왕인 셈이다.[* 왕으로써의 묘호, 군호, 대군등 거의 모든 명칭이 한개는 있다고 볼수 있다,] 원래 세손, 세자, 왕 등은 따로 군호를 주지 않는다.[* 출생 후 바로 세자 → 왕 테크를 탈 때의 이야기. 왕자였다가 왕이 된 경우에는 군호가 있다. 충녕대군([[세종(조선)|세종]]), 수양대군([[세조(조선)|세조]]), 봉림대군([[효종(조선)|효종]]), 연잉군([[영조]]) 등.] 우리가 아는 [[효명세자]]나 [[사도세자]] 같은 호칭은 죽고 난 다음 붙은 시호로, 원래 세손이나 세자는 동시대에 무조건 단 한 명만 존재하기 때문에 정상적으로 직위를 유지하거나 계승받는다면 본래 이름과 자기 혹은 타인이 별명처럼 붙여주는 이름 말고는 다른 호칭이 없다. 일례로 [[양녕대군]]으로 알려진, [[태종(조선)|태종]]의 첫 세자인 [[양녕대군|이제]]도 본래 이름 말고는 따로 호칭이 없었고[* 아버지 [[태종(조선)|태종]]은 정상적인 계승이 아닌 [[2차 왕자의 난]]으로 중간에 [[왕세자]]가 되었기 때문에 왕손인 이제도 군호를 받을 수 있었지만, [[태종(조선)|태종]]이 세자가 될 때 이제는 겨우 6살이라 군호를 받기에는 너무 어렸다. 이후 [[정종(조선)|정종]]이 양위하면서 군호 없이 세자가 되었다.] 이제가 폐세자되고 [[충녕대군]]이 세자가 되고 나서야 [[양녕대군]]이란 대군의 호가 내려졌다. 그 유명한 [[연산군]]도 당시 [[성종(조선)|성종]]의 적장자이기 때문에 본래는 세자로만 불렸으며 [[중종반정|반정]]으로 폐위된 후 [[연산군]]으로 봉해진 것이다. [[광해군]]은 다르다. [[광해군]]은 [[선조(조선)|선조]]의 서차남으로, [[광해군]]에 먼저 봉해졌고, [[임진왜란]] 발발한 다음 피난길에 긴급으로 세자에 책봉되었다가 [[1608년]](선조 41년) [[선조(조선)|선조]] 사후 왕이 되었으나 [[인조반정|쿠데타]]로 폐위되는 바람에 [[묘호]]를 받지 못해 지금까지 왕자시절 군호인 '''[[광해군]]'''으로 불린다. == 비운의 소년 군주, 단종 == 태어나는 날부터 그의 앞날을 보여주는 듯한 불길한 일이 있었다. 단종이 태어났다는 소식을 들은 할아버지 [[세종대왕]]이 기쁨에 겨워 2급 이하의 죄수를 모두 사면하는 대사면 교지를 발표했는데, 이 교지를 다 읽기도 전에 용상 근처의 큰 초가 땅에 떨어져 버렸다. 세종 역시 불길한 예감을 느꼈는지 그 초를 당장 치워 버리도록 명했다. >(전략) 교지를 읽기를 끝마치기 전에 [[세종(조선)|전상]](殿上)의 대촉(大燭)이 갑자기 땅에 떨어졌으므로, 빨리 철거하도록 명하였다. >ㅡ 《조선왕조실록》 세종 23년([[1441년|1441]]) [[7월 23일]] 기사.[[http://sillok.history.go.kr/id/kda_12307023_001|##]] 이것이 [[사망 플래그|불행의 전조]]였는지, 결국 다음날에 단종의 생모 [[현덕왕후|세자빈 권씨]]가 단종을 낳고 얼마 안가 숨을 거두고 말았다. 태어나자마자 [[현덕왕후|어머니]]를 잃은 것. 이 세자빈 권씨는 이후 [[현덕왕후]]로 사후 추존되어 소릉에 매장되는데, 단종 복위 운동이 실패한 화가 여기까지 미쳐 소릉이 강가로 이장된다. 이걸 다시 원래 자리로 옮겨야 한다고 주장한 인물이 [[생육신]] 중의 남효온. 일각에서는 어머니 [[현덕왕후]]가 단종 출산 후 사망하지 않아 훗날 왕대비가 되었거나 혹은 할머니인 소헌왕후[* 소헌왕후의 기질을 보여주는 가장 대표적인 에피소드가 [[1426년]] [[한양 대화재]]이다. 이 화재는 하필이면 남편인 [[세종대왕]]과 세자인 [[문종(조선)|문종]] 모두 군사훈련을 나갔을 때 터졌는데, 이 때 만삭의 몸으로 화재진압을 직접 진두지휘한 적도 있을 정도로 엄청난 여걸. <[[용의 눈물]]> 등 [[사극]]에서 보여주는, 아버지([[심온]])를 살려 달라고 울고 불고 싹싹 비는(...) 이미지로만 생각해서는 결코 아니되는 인물이 중전 [[소헌왕후]]이다.]라도 세종, 문종 사후까지 살아서 대왕대비가 되었더라면 어린 나이에 임금이 된 아들/손자인 단종을 [[수렴청정]]하여 보호했을 것이고, [[계유정난]]이라는 비극은 없었을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도 많다. 물론 어머니와 할머니 두 분 다 살아계셨거나 [[아버지]] [[문종(조선)|문종]]이 더 살아 주는 경우라면 더 이상 바랄 것 없는 최고의 시나리오였겠고.[* 단종 즉위 당시 나이가 12살. 아버지 문종이 딱 10년만 더 살아 주었다면, 아니 딱 4~5년만 더 살아 주었다 해도 [[계유정난]] 같은 건 판타지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였을 것이다. 당시 나이로 만 16~17세 정도면 어엿한 성인이었으며 친정(親政)에도 문제가 없었다. 사촌동생(!!) [[예종(조선)]]은 18살에 즉위하여 대소신료들을 잘만 휘어 잡았으며, [[성종(조선)|성종]]은 13살에, [[명종(조선)|명종]]도 12살, [[숙종(조선)|숙종]]은 14살, [[순조]]는 11살, [[헌종(조선)|헌종]]은 8살에 즉위하였고, 다들 즉위 당시의 나이 자체는 큰 문제가 아니었다. 무엇보다 그 어느 누가 '''태조-태종-세종-문종-단종으로 이어지는 무소불위 최강의 정통성'''에 감히 도전한단 말인가? 알다시피 [[태종(조선)|태종]]은 태조의 적5남, [[세종(조선)|세종]]은 태종의 적3남, [[문종(조선)|문종]]은 세종의 적장자, 단종은 문종의 적장자면서 동시에 [[세종대왕]]의 적장손이였다. 후술되듯, 문종에게도 [[계유정난]]을 제대로 대처할 만한 준비를 못한 책임이 없지는 않으나 (비록 잔병치레가 좀 있었다 해도) 한창 나이인 문종이 이렇게까지 빨리 갑자기 [[죽음|승하]]할 것이라 아무도 예상 못 한 탓이 클 것이다.] [[문종(조선)|문종]]은 단종 이전에 2명의 아들을 보았으나, 이 두 아들도 어렸을 때 죽어[* 이 당시에는 유아사망률이 대단히 높았으며, 구중궁궐의 왕실도 예외가 아니었다.] 단종이 문종의 유일한 아들이 되었다. [[세종(조선)|세종]]은 당시 세자(문종)가 어머니 [[소헌왕후]]의 3년상과 지나친 [[과로]]로 인해 건강이 악화되는 것을 알았지만, 만일의 경우 [[수렴청정]]을 할 왕실 최고 웃어른([[소헌왕후|대왕대비]]나 [[현덕왕후|대비]])이 없는 상태가 염려되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죽기 전 여러 신하들에게 이를 부탁했고,[* 매우 안타깝게도 이는 [[계유정난]]의 특성(즉, [[수양대군]]의 상상을 뛰어넘는 인성과 야심이 합작되어 벌어진 누구도 예상치 못한 대참사이다.)때문에 크게 의미 있는 조치가 아니었다. 계속 언급되다시피 [[계유정난]]이 성공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원인은 단종 즉위 시점에 [[세종(조선)|세종]]과 [[문종(조선)|문종]], [[현덕왕후|문종의 왕비]]가 생존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결과론적이지만,) 신하들에게 당부 여러번 하기보단 후대의 왕들처럼 [[소헌왕후]]의 3년상이 끝난 즉시에 왕비나 세자빈을 맞아들이는게 제일 효과적인 [[계유정난]] 방지책이었다.] 심지어 죽기 직전에는 [[김종서(조선)|김종서]]에게 군사를 이끌고 수도([[한성부|한성(한양)]])로 돌아오라는 명까지 내렸다. 문종 역시 원로대신인 [[김종서(조선)|김종서]] 등에게 세자(단종)를 부탁했을 정도로 너무 약한 왕실의 기반을 염려하고 있었다. 단종을 직접 키운 건 세종의 [[후궁]]인 [[혜빈 양씨]]였다. 단종이 막 태어났을 때 단종이 태어나기 얼마 전에 혜빈이 아이를 낳은 상태라 혜빈 양씨가 단종의 [[유모]]가 되었다. [[혜빈 양씨]]는 얼마 전 태어난 자신의 아들을 제쳐두고 직접 단종에게 [[모유수유|젖]]을 물렸다고 한다. 그리고 [[혜빈 양씨]]는 [[소헌왕후]] 사망 후 단종의 보호자로서 왕실에서의 힘이 상당히 강해졌다고 한다. 단종은 어릴 때 무척이나 총명했다고 한다. 할아버지 [[세종대왕]]이 실로 감탄했을 정도였다. 물론 세자나 세손에 대해서 총명하고 영특하고 하는 이야기는 정말 징그럽게 많이 찾아볼 수 있다는 점에서 언플일 수도 있으나, 황표정치 시절에도 할 말은 하는 모습을 종종 보이는 모습을 보아[* 물론 실록에 기록된 것을 보면 뭘 좀 해보려고 하긴 하네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 실제로, 단종이 짧은 재위 기간동안 본인의 힘으로 한거라곤 아버지에게 '[[문종(조선)|문종]](文宗)'이란 [[묘호]]를 올린 것 빼곤 없었다. 그러나 많은 지식과 경험을 필요로 하는 국가의 중대사인 국정 분야를 12살 꼬마 어린이에게 뭘 해 보라는 게 애초에 무리한 주문이기도 하다. 날고 기는 엘리트 중신들이 가득하고, 이해하기도 어려운 말들이 난무하는 어전(御殿)에서, 자신의 보호자나 다름없는 [[김종서(조선)|김종서]]에게 한두 마디라도 자신의 의견을 꺼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기도 하다.] 세간에서 말하는 "아무것도 모르는 나약하고 어린 왕"의 이미지는 아니었던 듯하다. 그리고 [[세조(조선)|세조]] 정권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단종의 총기를 최대한 가리는 편이 유리함에도 불구하고 그 편린을 엿볼만한 장면들이 꽤 많이 남았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당장 비슷한 연배였던 [[이방석]]에 대해 실록에서의 취급이 어떤지만 봐도 차이가 확연하다. 단종의 영특함에 대한 세종의 인정이 단순히 손주를 향한 할아버지의 콩깍지가 아니었음을 암시하는 증거는 '''[[계유정난]] 이후'''의 단종의 행적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수양대군 본인을 포함한 수양대군 일파는 '수양대군=[[문공(주)|주공단]]' 프레임을 씌웠는데, 단종은 직접 반포한 교서를 통해 이 프레임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주공은 형 [[주무왕]]의 승하 이후 어린 나이에 보위에 오른 조카 [[주성왕]]을 보좌한 섭정이자 당대의 명재상이었는데, 왕위에 욕심을 부리지 않고 성왕이 장성하자 겸허히 권력을 이양하고 자신의 영지로 돌아가서 누대에 걸쳐 추앙을 받았을 뿐 아니라 '''[[공자]]가 가장 존경한 인물 가운데 하나였다.''' 그런 주공과 수양대군을 동일시해버림으로써 주공이라는 울타리 안에 수양을 가둬버리려는 고도의 책략이었던 것.[* 유교 국시의 나라 조선에서 공자가 가장 존경한 인물이라는 상징성은 크고도 크다. 당연히 온 천하에 대고 "수양 숙부는 공자께서도 존경하셨던 주공과 같은 분임!"이라고 여론몰이를 시전하면 수양이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지 못하게 만드는 압박 효과가 클 수밖에 없다.] 또한 수양대군에 대해 떠도는 유언비어를 공식 포고문을 통해 공론화한 것도 수양대군의 운신의 폭을 좁히려는 계산이었다는 해석이 존재한다. '수양 주공설'도 해당 포고문에서 나온 것. 좌우지간 허수아비로 전락한 10대 중반의 소년 왕의 머리에서 나왔다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고급진 정치적 한 수였다는 것은 분명하다. 문제는, 상술하였듯 성년이 될 때까지 통치를 해 줄 왕실의 확고한 후견인(웃어른)이 없었다는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왕들은 모두 즉위할 때 왕실의 어른인 대비, 왕대비, 대왕대비 등이 살아 있었고, 그 중 숙종을 제외한 네 왕은 그 당시 제일 서열 높은 대비가 [[수렴청정]]을 했다. 아무리 가까운 왕족이라도, 어린 왕이 즉위했다고 함부로 움직였다가는 역모죄로 [[역관광]]을 당하기 십상이다.[* 게다가 [[숙종(조선)|숙종]]의 경우에도 [[수렴청정]]을 안 했을 뿐이지, 즉위 당시 엄연히 모후인 [[명성왕후]]가 두눈 시퍼렇게 뜨고 멀쩡히 살아있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종법상 증조할머니인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장렬왕후 조씨]]도 아직 살아있었다. 또한 둘 다 숙종이 완전히 성년이 되고 난후까지도 살다가 승하하였다.] 하지만 단종의 할머니 [[소헌왕후]]는 할아버지 [[세종(조선)|세종]]과 아버지 [[문종(조선)|문종]]보다 먼저 사망했고, 어머니 [[현덕왕후]]도 단종을 낳은 직후 사망해, [[수렴청정]]을 할 사람이 없었다. 그 당시 세종의 [[후궁]]들 중에선 가장 큰어른이었던 [[혜빈 양씨]][* 단종이 그녀에게 손자이나, 실제로는 상술된대로 모친이 없는 단종을 자기 아들처럼 길렀고 나이차이도 모자 수준이라, 그를 친아들처럼 생각했고 단종도 할머니인 그녀를 죽을 때까지 진짜 친어머니처럼 모시며 여겼다.]가 자신의 아들들과 함께 단종을 보필하려 했지만, [[수양대군]]이 문종의 후궁인 [[숙빈 홍씨|귀인 홍씨]]의 작위를 숙빈으로 높이면서 수렴청정의 명분도 잃었다.[* 하지만 중국과 달리 정실 왕비만이 [[수렴청정]]이 가능한 조선 특성상 후궁인 이상 [[혜빈 양씨]]든 [[숙빈 홍씨]]든 [[수렴청정]]은 아예 불가능했다. 만약 [[혜빈 양씨]]가 [[세종(조선)|세종]] 살아생전에 왕비가 되었더라면 [[계유정난]]은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혜빈 양씨]]는 세조가 왕위에 오른 후에 자식들과 함께 유배된 후 [[교수형]]에 처해졌다. 이 탓에 [[세종(조선)|세종]]과 [[문종(조선)|문종]]의 어린 단종을 보호, 보필해달라는 고명 유지를 받은 신하들의 힘이 강해지고 왕권은 약해졌다는 상투적인 서술이 등장하는데, 현실은 왕권vs신권의 이분법적 구도로 설명될 만큼 간단한 것이 아니다. 일단 [[김종서(조선)|김종서]]와 [[황보인]]은 신하들을 휘어잡는 막강한 세도가문 출신이 아니라, 국왕의 신임을 받아 정무적인 판단을 내리는 정승이 된 전형적인 행정관료들이었다. 오히려 젊은 관료들과 이들 고명 대신들과의 헤게모니 싸움이 눈에 띄는데, 이것부터가 '신권'이라는 단순한 개념이 오류임을 보여준다. 어쨌든 이는 [[김종서(조선)|김종서]] 등이 왕권을 노골적으로 노리는 [[수양대군]]을 제대로 견제를 하지 못하고, 도리어 그의 세력이 확장되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세종(조선)|세종]]의 치세 말년 [[문종(조선)|문종]]이 [[대리청정]]을 하면서 선발한 대신들이 세종과 문종 사망 이후까지도 계속해서 자리 보전을 하면서 인사적체가 심해진 탓이였다. 그런데 이것이 어쩔 수 없는 것이 당상관직 임용은 왕 아니면 할 수 없는 왕의 고유권한이였는데, 이 왕(단종)을 노회한 대신들이 보좌하고 있었으니 교체가 되지 않는 것은 당연한 것이였다.] 문종이 [[수양대군]]의 (쿠데타 조짐)행위를 미리 예방하지 못했다고 하나, 나름대로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했다. 심복대신들을 키워서 왕족을 견제하는 한편, [[김종서(조선)|정말로 믿을 수 있는]] [[황보인|신하들을]] 고명대신으로 특별히 임명하여 어린 단종의 보좌를 간곡히 부탁했다. 다만 새 왕비를 들이지 않아 사후 단종에게 든든한 후원세력을 만들어주지 못한 점에 대해서는 정말 아쉽다는 평. 하지만 [[문정왕후]]의 경우를 보면, 계비를 들인다고 해서 꼭 후견인이 된다는 보장은 없지만[* 정확히 말하면 좋은 후견인이 될 보장이 없다는 거지, 후견인이 될 보장은 충분히 있다. [[문정왕후]]도 [[경원대군|명종]]을 낳기 전에는 [[인종(조선)|인종]]을 살갑게 대했다. 문제는 새로 들인 왕비가 아들을 낳은 경우, [[문정왕후]]처럼 단종을 제치고 자신의 아들을 왕위에 올리려 할 수도 있고, 아들을 낳지 못한다고 해도 친아들도 아닌 단종을 얼마나 보호해 줄지도 의문이다. 실제로 [[후궁]]이기는 하지만 [[문종(조선)|문종]]이 생전에 총애한 [[숙빈 홍씨]]는 단종의 편을 들지 않았다. (홍씨의 의사는 아니었지만) 오히려 단종의 유모였던 [[혜빈 양씨]]를 견제하는 역할을 한 걸 보면, 소극적이나마 [[수양대군]]의 편을 든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것도 [[문정왕후]]라는 특이한 케이스의 결과론일 뿐, [[정희왕후]] 윤씨, [[정순왕후(조선 영조)|정순왕후 김씨]][* 다소의 논란은 있다. [[정순왕후(조선 영조)|정순왕후 김씨]] 항목 참조.] 등 수렴청정을 잘 해 낸 경우도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정희왕후는 자기 친손자의 후견인이었고, 정순왕후는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경우가 다르다. 새로 들인 왕비가 아들을 낳는다면, 이래저래 위험부담은 따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실제로 '''새로 왕비를 들였다면 어찌됐든 단종이 이렇게까지 이른 나이에 비참하게 왕위를 뺏기지도, 죽임을 당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더 높았을 것이다.''' 당장 [[수양대군]]을 비롯한 종친들뿐만 아니라 [[김종서(조선)|김종서]]와 [[황보인]]을 비롯한 세종과 문종대 고명대신들이 새 왕비가 단종 즉위 후 (대)왕대비가 되어서 [[수렴청정]]을 통해 세력을 크게 구축하는 것을 가만히 보고만 있을 바보들이 아니다. 이를 감안하고 당시의 영아 사망률까지 생각하면 오히려 새 왕비가 아들을 무사히 낳아 장성해서 왕대비가 되어 [[수양대군]]처럼 [[김종서(조선)|김종서]]와 [[황보인]]을 철퇴로 때려 죽이고 단종을 억지로 갈아치우고 자기 아들을 왕으로 앉힌다는게 현실적으로 보면 [[계유정난]]보다도 가능성이 낮다. 이에 대해 대비 정도나 되었으면 수양대군과 달리 [[김종서(조선)|김종서]]와 [[황보인]]을 명분을 짜내서 죽일 수 있다고 반론할수도 있지만 당장 그 악독한 [[수양대군]](세조) 조차도 명분을 못 짜내서 무력으로 급습해서 먼저 죽일수 밖에 없던걸 생각하면 오히려 그렇게까지 하는건 더욱 어려웠을 것이다.] 어쨌든, [[김종서(조선)|김종서]] 등 고명대신을 제외하면 고립무원인 단종에게 왕실 후견의 부재는 악재일 수밖에 없었다. 보다 확실한 솔루션이라면 문종의 계비보다도, 단종의 세자빈을 들이는 쪽일 수도 있다. 실제로 학자들은 [[문종(조선)|문종]]이 세자빈 간택을 서둘렀다면, 특히 빵빵한 가문에서 골랐다면 [[수양대군]]의 [[계유정난|쿠데타]]가 쉽지 않았으리라 보고 있다.[* 다만 할아버지 [[태종(조선)|태종]]이 외가인 민씨 가문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리고 아버지 [[세종대왕]]이 재위 내내 그 불쌍한 외가를 끝까지 신원해주지 않은 것을 쭉 지켜본 문종이, 외척에 의지하여 아들의 왕위를 지키는 선택지를 선뜻 고를 수 있을지가 문제이긴 하다. 어차피 본인의 왕권도 워낙 확고한 터에 1년만 더 하는 생각으로 미루고 미루었을 가능성도 높다.] 문종도 이 점을 염려했는지, 본인의 재위 2년차에 단종을 위한 세자빈 간택령을 내리기는 했다. 문제는 이 때가 하필이면 문종 본인의 지병이 가장 악화되었을 때였다는 것. 결국 문종의 지병악화로 인해 세자빈 간택은 유야무야되어 버리고, 얼마 후 문종은 급사해 버린다. 할아버지인 [[세종대왕]], 숙부인 [[수양대군]], 사촌동생(!)인 [[예종(조선)|예종]][* 단종이 하도 단명해서 그렇지, [[예종(조선)|예종]]은 단종보다 9살이나 어리다.]은 11세, 사촌형인 [[의경세자]]가 12세에 장가를 갔고, 특히 예종은 11살에 바로 애아버지가 되어 버린 사례들이 많다. 문종도 마음만 먹었으면 어떻게든 [[세자빈]]까지 들일 수 있는 타이밍이 존재했다. [[문종(조선)|문종]]이 생전에 [[수양대군]]을 좀 더 견제했어야 한다는 비판도 있다. 하지만 상술하였듯 문종이 아무것도 안 한 것도 아니며, 변명의 여지도 충분히 많다. 애초에 [[문종(조선)|문종]] 본인의 왕권이 워낙 막강했다. 단명했다는 이미지와 달리, 문종은 아버지 [[세종대왕]]의 조력자로서 일찍부터 국정경험을 쌓기 시작했고, 특히 세종 후반 7년은 건강이 쇠약해진 세종을 대신해 국왕 노릇을 했다. 정통성, 풍부한 국정경험, 화려한 실적에서 오는 자신감, 그리고 문무대신들의 당연하고도 절대적인 [[충성]]을 받는 문종이 동생을 두려워해야 할 이유가 있을 리 없다. [[왕과 비]], [[인수대비]], [[관상(영화)]] 등 [[사극]], [[영화]] 등의 매체에서 하나같이 문종을 병약하고 힘없는 임금으로 그리고, [[수양대군]]이 대놓고 설치고 다니는 것으로 왜곡한 탓이 크다. 문종 생전에 [[수양대군]]은 큰형에게 찍소리도 못하고 [[존버]]만 탔을 뿐이다. [[문종실록]]을 보면 수양은 전횡을 일삼기는커녕, 온갖 아부와 정성으로 열심히 문종의 비위를 짝짝꿍 맞추고 다녔으며, 문종 즉위 전부터 두 사람의 형제애가 매우 두터웠다는 흔적을 여기저기서 찾아 볼 수 있다. 성품이 인자한 문종의 입장에선 모든 것이 완벽한 자신을 깍듯이 모시며, 한없이 정겹게 구는 친동생을 무작정 의심하고 견제할 생각이 들 리가 없다.[* 아버지 세종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세종의 입장에서 가장 위험한 정적은 그 누구도 아닌 형 양녕대군이다. 그러나 세종은 그 [[양녕대군]]의 온갖 막장짓도 다 눈감아 줄 정도의 대인배였다. 막장짓과는 별개로 양녕과 세종은 나름대로 형제의 우애가 깊은 사이였다. 만약 양녕이 작정하고 빼앗긴 왕위를 되찾으려 한다고 한다면 작지만 세력이 형성되지 않았을 리 없다. 그리고 설사 그랬다 하더라도 세종은 그냥 그 세력만 쳐내고 양녕을 살려놨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런 아버지의 영향을 문종도 강하게 받지 않았을까 싶은 추측이 있다. 거기에 온갖 꼬장 다 부리던 형을 살려둔 아버지를 보고 살았으니, 오히려 이미 만렙 먼치킨인 장남인 자신에게 절대 충성을 바치며 지극정성을 쏟는 동생을 의심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또한 [[수양대군]]의 세력은 문종 때는 말할 것도 없고, 단종 때도 경쟁세력들 중 가장 약한 축[* 다만 [[수양대군]]의 세력이 굉장히 약했는가를 생각하면 또 그렇지는 않다. 당장에 왕실 종친들은 자신들이 정치에서 배제되는 것에 대한 불만에 수양대군의 편에 선 자가 많았다. [[임영대군]]과 [[영응대군]]부터 친 수양파. 임영대군은 이후 아들까지 세조에게 적극적으로 협력하여 승승장구하였지만 아들 [[구성군]]이 하늘의 인과응보에 따라 모함을 받아 유배를 가서 쓸쓸하게 죽었고, 영응대군은 [[세종대왕]]과 [[소헌왕후]]의 말자로 부부에게서 많은 사랑을 받았음에도 정작 정통성을 가진 장조카를 버리고, 둘째 형의 편에 선 비루한 자였다. 정확히 말하면 수양대군의 세력이 약한 것이 아니라 강하긴 했지만 김종서와 황보인 등 고명대신들의 세력이 훨씬 더 강했다. 실질적인 실세였던 좌의정 김종서의 권력은 물론이고 황표정사를 통해 인사권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정면대결로는 승산이 없었기에 몰래 준비한 것이다.]이었다. 그리고 당시 조선은 무척 안정된 시기이기도 하였다. 즉 [[여말선초]]나 [[무인정사]] 때처럼 대소신료들이 수시로 떼죽음을 당하는 막장상황이라 '생존'이 쿠데타의 가능성이 될 수 없는[* [[태종(조선)|태종 이방원]]의 경우와는 다르다는 말이다. 이방원으로서는 [[이방석]]이 세자가 된 이상 이르든 늦든 죽음을 맞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기 때문이다. [[정종(조선)|정종]], [[회안대군]] 등 다른 무난한 이복형들이라면 몰라도, 조선개국에 지분이 너무 크고, 지나치게 명석하며 지지세력도 많았던 이방원은, 노쇠한 [[태조(조선)|아버지]] 외에 아무런 뒷배경이 없었던 이방석에게는 왕권의 제1위협요소이기 때문이었기에 무슨 수를 써서든 숙청되었을 것이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것도 [[정도전]]이라는 능력자가.], [[태종(조선)|태종]]~[[문종(조선)|문종]]의 치세를 거치며 조선초기의 관학정치 시스템이 세련되게 정착되어 있었다. 그리고 '[[사병]]혁파' 같은 살벌한 [[떡밥]]도 딱히 없었다. 때문에 당시 3당([[김종서(조선)|김종서]]/[[황보인]] 등 고명대신파, [[안평대군]]파, 수양대군파)은 조선의 다른 시기에 비해 상대적으로 매우 온건한[* 다른 시기에 비해 [[사형]]은커녕, 누가 [[귀양]]을 갔더라는 기록조차 찾아 보기 힘들다.] 정치적 경쟁만 하고 있었을 뿐이다. 다시 말해 설마 누군가가, 그것도 [[수양대군]]이 [[쿠데타]]를 일으킬 것이라곤 생각도 할 수 없었다는 말이기도 하다. 심지어 수양대군의 세력 내에서조차 이런 말도 안 되는 짓에 주저하는 이들이 많았고, 그래서 수양이 직접 선두에 서서 독려해야만 했다. [[계유정난]]이 성공한 건 이런 시대배경 탓에 다들 완전히 [[방심]]하고 있었던 덕이 컸다. 수양이 세종 재위시절부터 왕위를 노리는 듯한 발언을 몇 번 하기는 했지만, 세종과 문종은 그저 패기있는 둘째의 가벼운 호기 정도로만 여기고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만큼 세상이 안정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계유정난]]은 애초에 아무런 이유도, 명분도, 심지어 핑계조차 없는[* [[김종서(조선)|김종서]] 등 고명대신파의 [[황표정사]]가 국정을 [[농단]]했다는 게 유일한 핑계거리가 되었지만, 그것도 있는 대로 부풀려댄 억지에 불과하다. 조선의 신권(臣權)이 동시대 다른 국가들에 비해 강했다는 오해가 있는데, [[훈민정음]]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 조선 역시 어디까지나 지엄한 왕권 중심의 국가였다. 그리고 김종서와 황보인은 그 왕으로부터 국정을 직접 위임받은 사람들로 오히려 왕당파에 가까운 인사들이었다. 원로급의 고명대신들과 젊은 [[집현전]] 출신 신료들 간의 견해 차로 인한 정치갈등은 다소 있었지만, 그들 고명대신들이 정말로 청렴하게 그 권한을 행사했음은 그 누구도 토를 달 수 없었다. 애초에 [[김종서(조선)|김종서]], [[황보인]]도, [[안평대군]]도 모두 과도한 권력욕과는 완전히 거리가 먼 인물들이다. 김종서가 야심가였다면 긴 시간 세종의 오해를 받아가면서까지 [[4군 6진]]개척에 목매달지도 않았을 것이며, 세종도 김종서의 이런 우직함을 잘 알고 있었기에 6진개척이 마무리될 때 즈음에서야 도리어 그 벌레의 [[초상화]]를 그려놓고 선한 성격의 소유자임을 세종도 문종도 알고 있었다. 문종 역시 세자 시절부터 지켜보아(문종은 건강이 쇠약해진 [[세종대왕]]을 대신하여 7년이나 국정을 운영했다) 김종서가 어떤 인물인지 너무 잘 알고 있던 터라 고명대신으로 결정한 것이다. 이들이 권력을 탐한다는 말 자체가 [[수양대군]] 세력이 반란을 일으키고 자신들을 정당화하기 위해 갖다 붙인 헛소리일 뿐이다. 사극들이 죄다 수양대군을 미화하면서 충신 김종서를 권력에 찌든 인물로, 합리적이고 강단있던 명신 황보인을 뒷방늙은이로 꾸며대는 바람에 마치 단종이 이런 노회한 늙은이들에게 휘둘린 것처럼 인식시킨 부분이 매우 크다. 다만 김종서가 자기 친인척 임용에 개입하면서 사리사욕을 추구했다는 의혹이 약간 있기는 하다. 그러나 이 정도는 곧 친정(親政)을 시작할 단종의 입장에서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징계를 하든, 또는 오랜 기간의 공로를 참작하여 가벼운 경고만 하고 넘어가든 어려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김종서의 이 문제가 정말 심각한 수준이었다면 수양대군이 집권전 상대방 견제용으로, 또는 자신의 집권을 정당화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여 PR을 했을 터인데, 그런 흔적이 애초에 전혀 없다. 더욱이 김종서의 아들과 친척들이 벼락출세를 했다는 비판이 들어오자, 단종은 "내가 다 알고 결재한 일"이라고 적극적으로 막아주었다. 김종서는 곧 국왕의 친위세력이었기 때문에 김종서의 세력을 키워주는 것은 오히려 단종에게는 자기 사람을 키워주는 일이 된다. 그리고 말이 벼락출세지, 요직을 김종서의 집안 사람들이 독점했던 것도 아니었다.], 상식적인 사람이라면 아무도 예상할 수 없었던 날벼락이자 역대급 [[양아치]] 짓이었다. 문종으로서는 자기에게 그토록 우애깊고 살갑게 구는 동생이 언제일지도 모르는 미래에 이런 정신나간 짓까지 할 수 있다고 예상하는 게 더 정신나간(?) 노릇이 아닐까.[* 시대가 변한 탓이 크다. 이방원은 [[난세]]에 태어나서 자란 사람이다. [[고려|자신이 벼슬을 하며 충성을 맹세한 나라]]를 [[이성계|아버지]]가 멸망시킬 때 그 선두에 섰던 인물이며 [[정몽주|친했던 조정의 대선배]]를 직접 암살하기까지 했다. 이후 왕위다툼에서 형제들과 비유가 아닌 [[1차 왕자의 난|실제 전쟁]]을 하며 동생들을 죽이기까지 한 인물이다. 이런 인물이라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며 철저히 준비하는 게 당연하다. 실제로 말도 안 되는 일들을 저지르기도 하고 겪어보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이런 태종도 자식들은 자신이 겪은 일을 되풀이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자식들에게 항상 우애있게 지낼 것을 신신당부했고(그래도 세종에게 큰형 양녕이 허튼짓을 하거든 언제든 쳐내라는 당부도 했었다), 세종은 항상 형들과 우애를 다졌으며 문종은 할아버지가 온갖 생난리를 치며 다져놓은 강력한 왕권을 이용해 역대 최고의 성군이라 평가받는 아버지가 다스리는 나라에서 자라난 인물이다. 형제간 권력 다툼의 기운이 옅어져가고 태종대부터 본인 문종대까지 왕권에 감히 진지하게 도전하는 정신나간 자는 존재하지도 않을 정도로 탄탄 기반에서 살아온 사람이, 내가 죽으라면 죽는 시늉까지 할 정도인 동생 녀석이 감히 그런 짓을 저지르리라곤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여하튼, 조선 27명 임금들 중 가장 강력한 정통성을 지니고 태어난 단종은 역설적이게도 가장 불운한 임금이었던 셈이다. 결국 이렇게까지 지독한 불운의 결과로 단종 1년 (1453년) 10월 10일 [[계유정난]]은 일어나고야 말았다. 이날 단종의 보호자, 지지자 대부분이 살해 당하거나[* [[계유정난]] 당일에 참살, 격살 당한 신료들만 100명이 넘으며, [[안평대군]] 등 다른 이들도 얼마 지나지 않아 죽음을 당한다.] 유배를 당하면서 자신의 세력을 하루아침에 잃어버린 것이다. 그 자리를 고스란히 차지한 수양대군의 세력은 1년 남짓한 시간이 흐른 후 수양에게 양위를 해야 한다는 압박을 하기 시작하였고, 오래지 않아 단종 3년인 1455년, 단종은 수양대군에게 양위하고 상왕으로 밀려나고야 만다. [[계유정난]] 이후, 단종도 숙부 [[수양대군]]이 전권을 행사하는 자신의 처지가 한스러웠는지 [[경복궁]] 자미당 난간을 보더니 서서 "[[세종(조선)|할바마마]]께서 살아 계셨다면 나에 대한 사랑이 어찌 적겠는가?"라며 탄식하자 단종을 따르던 시종들이 모두 슬피 울었다. 자미당에서 할아버지 세종을 떠올린 이유는, 세종이 말년에 자미당에서 거처했었기 때문. 이를 전해들은 [[세조(조선)|수양대군]]과 그 부인 [[정희왕후|윤씨]]도 울었다고 실록의 이 날(1454년 11월 25일) 기록은 전한다. 그러나 단종이 세종을 떠올리고 울었던 것은 수양에게 핍박받는 자신의 처지 때문인데, 정작 그 가해자이자 [[찬탈|앞으로의 계획]]을 이미 다 짜 놓은 수양과 그 부인이 피해자인 단종을 순수하게 동정하여 눈물을 흘릴 리가 없다. 그저 가증스러운 [[악어의 눈물]]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2년 후인 1456년(세조 2년), 그를 복위시키려는 [[사육신]][* 이들의 충절은 아름다운 일이지만, 이들이 정작 계유정난 당시에는 수양대군을 지지했다는 게 아이러니이다. 설마 김종서, 황보인 등 고명대신과 100명이 넘는 신료들을 무더기로 때려잡은 수양이, 더 이상 권력을 탐하지 않고 얌전히 재야로 내려갈 것이라는 순진한 기대라도 한 것일까. 현실적으로 보면 이상한 일도 아니다. 일단 살아있어야 뒷일을 도모할 수 있는데 나는 새도 떨어뜨리는 김종서도 때려잡는 마당에 충절을 지키겠답시고 이들이 수양을 반대했다간 당장 죽은 목숨이었을 테니까. 이들의 목적은 죽어서 충절을 증명하는 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단종의 복위였다. 이게 실패한 상황에서야 어차피 할 수 있는 게 없으니 목숨을 구걸하는게 아니라 세조를 욕하며 당당하게 죽은 것이지, 단종 복위의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남아있을 때는 연기를 해서라도 일단 사는 게 최선이었다.] 사건이 일어난다. 단종은 복위를 꾀하기 위해 자신을 찾아온 [[성삼문]]에게 칼을 하사하며 지지를 표명했지만, 잘 알려진 것처럼 계획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국문장에서 성삼문이 자신에게 단종이 칼을 주었다는 말을 한 순간, 단종의 운명은 결정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금성대군]] 등 계유정난의 화를 피해 살아 남은 몇 안 되는 지지자들도 이 일로 목숨을 잃는다. 그리고 상왕 단종은 팔자에도 없었던 군호인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머나먼 [[강원도]] [[영월군|영월]]로 유배된다. [[두물머리]]를 비롯한 단종의 영월행 유배길 곳곳에는 백성들이 구름처럼 몰려 들어 온통 [[눈물]]바다였다는 슬픈 이야기가 전해지며, 이는 영월 [[장릉(영월)]]에 꾸며진 단종기념관 등에도 잘 전시되어 있다. [[영월군|영월]]로의 압송 임무를 수행한 금부도사 [[왕방연]]이 이때의 심정을 남긴 시조도 유명하다. 귀양지인 영월 청령포는 영월 읍내에서 조금 떨어진 '육지의 섬'인 곳이다. 남한강의 지류인 영월 서강이 삼면을 둘러싸고, 유일한 육지에 접한 남쪽은 가파른 절벽이어서 도주가 거의 불가능한 곳이다. 현대에도 청령포에 들어가려면 나루터에서 배를 타야 들어갈 수 있다. 그런데 [[연려실기술]]에는 단종을 영월로 압송한 금부도사가 왕방연으로 나오는데, [[숙종실록]]에는 바로 이 왕방연이 단종에게 [[사약]]을 내리는 임무 역시 수행한 것으로 나온다. 그 때문인지 단종에게 사약을 전달할 때는 차마 올리지 못하고, 그저 단종 앞에 엎드려 통곡하기만 하였다는 일화가 숙종실록과 야사에 함께 전해져 내려온다. > [ruby(一自寃禽出帝宮, ruby=일자원금출제궁)] > 한 마리 슬픈 새 궁전을 나와 > [ruby(孤身隻影碧山中, ruby=고신척영벽산중)] > 외로운 그림자 푸른 산을 헤매이네 > [ruby(假眠夜夜眠無假, ruby=가면야야면무가)] > 밤이 오고가나 잠을 이루지 못하고 > [ruby(窮恨年年恨不窮, ruby=궁한연년한불궁)] > 1년이 오고가나 이 원한을 다하지 못하네 > [ruby(聲斷曉岑殘月白, ruby=성단효잠잔월백)] > 새 지저귐 끊긴 새벽 남은 달빛은 흰데 > [ruby(血流春谷落花紅, ruby=혈류춘곡낙화홍)] > 봄 계곡에 핀 꽃은 피 같이 붉더라 > [ruby(天聾尙未聞哀訴, ruby=천롱상미문애소)] > 하늘은 귀가 멀었는가, 슬픈 기도는 듣지 못하고 > [ruby(何乃愁人耳獨聽, ruby=하내수인이독청)] > 어찌 수심 깊은 내 귀에만 들려오는가 >---- > 단종이 유배길에 잠시 들린 자규루[* 영월읍내 중앙시장 앞에 아직도 남아 있다. 2019년 현재 보강공사 중.]에서 지은 시. >천만 리 머나먼 길에 고운 님 여의옵고 >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 안 같아 울어 밤길 예놋(간)다 단종에겐 장자 계승의 원칙에 기인한 강력한 정통성, 그리고 세종과 문종이 여기저기 신경을 많이 쓴 덕분에 지지하는 이들은 많았다. [[혜빈 양씨]]와 그녀의 아들들의 세력, 그 유명한 김종서, [[황보인]] 등 세종의 고명대신들이 있었고 그 밖의 세종의 아들들 중 단종을 지지하는 이는 많았다. 큰 실정을 한 적도 없고 [[광해군]]이나 [[연산군]]처럼 적이 많았던 것도 아니라서 [[사육신]], [[생육신]] 같은 이도 있다. 거꾸로 수양을 지지하는 세종의 자식들도 적지 않았지만[* 대표적인 것이 세종과 소헌왕후의 4남인 임영대군과 8남인 영응대군이다. 그리고 세종의 후궁인 [[신빈 김씨]]의 아들들, [[정현옹주]]의 남편이자 ~~옹주의 남자~~ 윤사로[* 이 쪽은 아예 [[정희왕후]]와 같은 파평 윤씨 집안출신이라 처가쪽으로도 가까운 인척이기도 했다.], [[정의공주]]의 남편인 안맹담도 수양을 지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수양의 무자비한 칼날 앞에서 단종의 지지자들과 조력자들은 거의 모두 비참한 죽음을 맞았다. 세종의 6남인 [[금성대군]]은 단종을 복위시키려다가 발각되었고, 귀양을 간 후 사사되었다. 비슷한 이유로 단종이 총애하던 문종의 부마 전 형조판서 영양위 [[정종(부마)|정종]](鄭悰)([[경혜공주]]의 남편)도 마찬가지로 귀양보냈다가 역모가 들통나 [[능지처참]]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빼앗은 세조 이후의 조선은 연달아 어린 임금들이 즉위하게 되었다.[* 세조의 치세가 생각보다 길지 않았던 이유도 있다. 그 다음 임금인 예종은 즉위 후 1년 뒤 요절하였다.] [[예종]]이 18세에 즉위하였으며, [[성종]]은 단종보다 약간 많은 12세에 왕위에 올랐다. 만약 단종이 성종이 즉위할 때까지 살아 있었다면 28세가 되는데,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유배 등의 사건이 없이 그가 계속 왕실에 남아 있었다면 그 이후의 왕위 승계가 어떻게 되었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세조가 온갖 무리수를 두면서까지 단종 및 그 지지세력을 철저히 제거한 이유 중에는 이런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만약 단종을 살려두었으면 왕실에 정통성이 막강하면서 나이까지 젊은 상왕이 있는 상황인데, 이는 (설령 단종이 복위에 관심이 없는 것처럼 행동하더라도) 세조에게 굉장히 정치적으로 부담스러운 상황일 수밖에 없다. 특히 후계 문제에 있어서는 더더욱.] 참고로 그 뒤를 이은 [[연산군]], [[중종]] 역시 10대 나이에 즉위하였다. 한편, 정통성도 뛰어나고 지지기반도 분명 좋았지만 단지 왕실어른이 없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게 명분이 되어 왕위도 찬탈당하고, 결국 종친에 불과한 세조의 세력이 지지를 받았던 것이기에 이를 멀리서나마 지켜본 조선왕실은 정비가 죽더라도 훗날 왕실어른, 즉 왕대비나 대왕대비가 될 수 있는 계비를 무조건 맞이하는 것을 암묵적인 예법으로 삼기 시작했다. 훗날 [[인목왕후]]와 [[장렬왕후]]가 어린 나이에 당시 기준 자기 할아버지 뻘인 [[선조(조선)|선조]]와 [[인조]]와 결혼한 것도, 숙종이 계비 [[인현왕후]]까지 사망한 뒤에도 또 계비 [[인원왕후]]를 맞이한것도, [[영조]]가 나이 다 들어서 자식도 사실상 못 보는데도 본인의 증손자 뻘이기도 한 [[정순왕후]]를 맞이한것도 이 계유정난의 나비효과인 셈이다. 실제로 단종 다음으로 정통성이 무지막지한 [[숙종(조선)|숙종]]은 되려 할아버지인 [[효종]]의 정통성에 큰 흠집이 있었던 점, 큰 할아버지인 [[소현세자]]의 후손들이 여전히 살아있었고, 그들이 더 왕위 계승에 적합 및 정통성이 있다는 인식이 아직도 남아있었던걸 감안하면 친어머니 [[명성왕후]], 법적 증조모인 [[장렬왕후]]가 본인이 즉위 이후 및 성년이 될때까지도 살다가 승하한 것은 매우 큰 행운이었던 셈이다. 만약 이 두 여인이 숙종 즉위 전에 현종 대에 일찌감치 다 사망했다면 숙종은 오히려 명분적으로도 단종 대에 비해 본인부터 크게 밀렸기에 왕위에 어떤 위협을 받을지 모르는 일이다.[* 실제로 단종의 어머니인 [[현덕왕후]]는 단종을 낳자마자 산후병으로 사망했고, 숙종의 어머니인 [[명성왕후]]도 사실 숙종 이후에도 공주를 여럿 낳았으니 산후병으로 일찍 죽을 가능성과 위험은 현덕왕후와 비슷했다. 그럼에도 산후병에서 무사했던 명성왕후조차 결국 독감에 걸려서 42세의 이른 중년 나이에 사망했고, 숙종의 친할머니 [[인선왕후]]는 아예 아버지 현종 승하 6개월여 전에 54세 나이로 단종의 친할머니인 [[소헌왕후]]와 비슷한 50대 초반 나이에 사망했다. 하물며 오히려 왕비시절부터 건강이 좋지 않았던 법적 증조모 [[장렬왕후]]가 되려 1688년까지 살다가 60대 나이에 승하한건 더더욱 기적에 가깝다. 아무리 인조가 왕의 권위를 앞세워 소현세자 가계를 정리하고, 봉림대군인 효종의 직계를 내세운다한들 결국 정당한 명분도 없이 정리하고, 되려 후손은 남아있는 이상 이 불씨는 꺼질래야 꺼질수 없다. 실제로 이 불씨를 경종 및 영조 대에 영조에 원한이 있던 선의왕후와 이인좌가 이용하려다 실패한 전적도 있다. 실제로 실록을 보면 대놓고 장렬왕후를 무시하고 월권을 행사한 기록까지 있는 어머니 명성왕후와 달리 숙종 본인은 정반대로 명성왕후 생전 및 사후에도 법적 증조모인 장렬왕후에게 효도하고 그녀의 건강에도 큰 신경을 쓰는 등 지극정성이었다. 그 장렬왕후가 되려 본인이 추구하는 절대 왕권을 견제할수 있는 인물인데도 말이다. 이는 인간의 도리와는 별개로 현실적 및 계산적으로 봐도 숙종 본인이 할아버지 효종의 정통성에 흠이 있는 것을 알기에 그 흠을 지우거나 메워주고 감싸줄수 있는 인조의 계비이자 (법적)증조모인 장렬왕후는 오히려 건강하게 잘 살수록 그거대로 숙종에게는 더 나은것이기 때문이다. 그에 보답하듯이 장렬왕후는 숙종이 좋아하는 후궁인 희빈 장씨의 오작교 역할을 충실히 해주고 둘의 사이가 방해받지 않도록 인현왕후 및 서인 중신들로부터 보호하였다. 장렬왕후 사후 숙종이 그녀의 국상중인데도 원자정호를 성급히 정하려하고, 기사환국 및 인현왕후를 무리하게 폐위한것도 자신의 후원자인 장렬왕후가 사망했기에 서인들에게 당하기전에 본인이 먼저 선수친거에 가까운 것이다.] == 비극적인 죽음과 그 후 == [[1457년]] 11월 16일(음력 [[세조(조선)|세조]] 3년 10월 21일)에 [[금성대군]]의 [[사약|사사]]와 장인 송현수(宋玹壽)의 [[교수형|교형]]이 결정되자, 단종은 나중에 영월에서 이 소식을 듣고 자살했다고 하나, 실질적으로는 단종의 사사 역시 이때 결정된 것으로 보인다. 고달픈 유배 생활의 최후였다. 흔히 영월 청령포에서 최후를 맞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청령포에는 몇 달 머물지 않았고, 여름이라서 홍수의 위험이 있다는 이유로 곧 영월 관아 내의 객사로 옮겨 졌으며 단종은 그곳에서 최후를 맞는다. === 죽음 === [[세조실록]]에는 "노산군이 장인 송현수와 숙부 [[금성대군]]의 죽음을 듣자 슬픔을 못 이겨 목을 매고 [[자살]]하였고, 후에 예를 갖춰 장사지냈다."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승정원일기]]나 이후 무덤을 방치해 둔 것, 그리고 후대 왕들의 기록을 보면 타살이 확실해 보이고, 아마도 [[사약]]을 거부한 후 [[타살]]로 추측된다. [[선조(조선)|선조]]실록에 [[기대승]]이 [[경연]] 때 단종 사망 당시 영의정이던 [[정인지]]를 비판하면서 금부도사가 [[사약]]을 주었다고 말하면서, 그 근거로 사약기록이 [[의금부]]에 남아 있고 당시 사형장면을 현지인이 기록하였고 이것을 관찰사가 보았다는 것 등을 내세운 것으로 보아, 사약을 받은 것은 확실해 보인다. 실제로 [[사약]]을 받은 사람이 약발이 잘 받지 않거나 반항하거나 하여 [[참살]]이나 [[교살]]로 직접 죽이는 경우가 적지는 않았지만, 단종의 경우에는 스스로의 의지로 사약을 거부하다가 끝내 타살을 당한 것이라는 견해가 유력하다. [[사약]] 항목에서도 알 수 있듯, 사약은 문자 그대로(賜, 줄 사) 임금이 신체를 온전히 보존하는 죽음을 내리는 은사의 개념이었는데, 단종은 세조의 이런 '하사품'만큼은 단호하게 거부했다는 이야기이다. 숙종실록 및 야사에서는, [[사약]]을 들고 온 금부도사 [[왕방연]]도 단종에게 차마 말을 꺼내지 못하고 그의 발앞에 꿇어 엎드려 울기만 하자, 옆에 있던 노비가 제 딴에는 공을 세워 보겠답시고 [[활]]줄을 풀어 들어 나와 단종을 직접 [[교살]]하겠다고 했다가 그 직후 칠공(七孔, [[눈(신체)|눈]], [[코]], [[귀]], [[입]]의 일곱 구멍)에서 피를 뿜으며 즉사했다는 이야기도 숙종의 언급 중에 나온다.[[https://sillok.history.go.kr/id/ksa_12501002_001|실록]] 유명 [[만화]]인 [[맹꽁이 서당]]에서도 이를 다루는 에피소드가 있다. 참고로 이 교살설에 따르면 한 가지 버전이 더 있다. 정당한 왕인 단종이 사약을 마실 수는 없어 거부하고, 그 대신 자신은 방에 들어가 앉아 있고, 활줄을 자신의 목에 감고 밖으로 내어 당기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 뜻을 몰랐던 하인이 아무 생각없이 있는 힘껏 당겨 사망했다는 이야기이다. 후일담으로 이걸 알게 된 하인이 죄책감을 이기지 못 하고 자살했다고 한다. 물론 이때는 스스로 독약을 마시고 피를 토하고 죽는 건 덤이다. === 시신 === 단종이 죽은 뒤에는 그 [[시신]]을 영월의 호방(지방 아전)인 [[엄흥도]](嚴興道)가 남몰래 거두어 매장했다. 이에 관해서 여러가지 이야기가 전해진다. [[조선왕조실록]]에 남아있는 기록은 다음과 같다. > 우승지 신상(申鏛)을 보내 노산군(魯山君)의 묘에 치제(致祭)[* 왕이나 높은 사람으로부터 아랫사람에게 배푸는 제사이다. [[중종(조선)|중종]]은 단종은 물론이고 [[연산군]]에게도 제사를 지내주려고 했다. 물론 연산군 제사는 주변의 엄청난 반대로 막힌다.]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이미 수호군(守護軍)을 정했고 또 내신(內臣)을 보내 치제하였으니, 이는 어진 덕으로서 또한 족히 외로운 영혼을 위로할 수 있는 일이나, 유독 후사(後嗣) 세우는 일을 빼놓으니 사림(士林)들의 애통이 심했는데, 간사한 의논이 김응기(金應箕)에게서 발단되고 이맥에게서 확대되었던 것이다. >또 논한다. 신상(申鏛)이 와서 복명하고, 김안국과 함께 말하다 눈물을 흘리기까지 하며 ‘묘는 영월군 서쪽 5리 길 곁에 있는데 높이가 겨우 두 자쯤 되고, 여러 무덤이 곁에 총총했으나 고을 사람들이 군왕의 능이라 부르므로 비록 어린이들이라도 식별할 수 있었고, 사람들 말이 「당초 돌아갔을 때 온 고을이 황급하였는데, 고을 아전 엄흥도(嚴興道)란 사람이 찾아가 곡하고 관을 갖추어 장사했다.」 하며, 고을 사람들이 지금도 애상(哀傷)스럽게 여긴다.’ 하였다. >---- >[[중종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ka_11112010_002|중종실록 27권, 중종 11년 12월 10일 병진 2번째기사, 우승지 신상을 보내어 노산군의 묘에 치제하다]] 단종이 세상을 떠난 이후 영월부사가 부임하는 날에 급사하는 일이 연이어 일어났다. 때문에 영월로 부임하려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 영월은 폐읍이 될 지경에 이르렀다. 이에 한 대담한 사람이 영월부사를 자청하여 부임하였다. 부임 첫 날에 의관을 정제하고 앉아있는데 어디선가 찬바람이 불더니 [[익선관]]에 [[곤룡포]]를 입은 소년 왕이 [[신하]]들을 거느리고 나타났다. 신임 부사가 곧 단종임을 직감하고 부복하니 단종은 "내가 죽을 때 목을 조른 활줄이 아직 남아있어 목이 갑갑해 그것을 풀어달라고 하려고 왔는데 지금까지의 영월부사들은 겁이 많아서 나를 보자마자 급사했다"는 것이다. 신임 영월부사가 단종의 시신이 어디 있는지를 묻자 단종은 "엄흥도 호장이 알 것"이라는 말을 남기고 단종은 홀연히 사라졌다. 다음 날 영월부사가 엄흥도 호장을 불러 전날의 이야기를 해주자 엄흥도는 자신이 단종의 시신을 수습했다고 밝힌다. [[역사]] 기록이나 [[설화]] 양쪽 다 엄흥도가 단종을 장사지낸 후 자취를 감췄다고 하므로 이건 말이 맞지 않는데 설화의 다른 버전 중에는 [[꿈]]에서 단종이 영월부사에게 엄흥도를 찾아가라는 말을 듣고 찾아갔다는 내용도 있다. 단종의 무덤을 파보니 과연 활줄이 목에 얽혀 있어 활줄을 푼 뒤 다시 묻고 정중히 제사 올렸다고 한다. 그 후 영월부사가 급사하는 일은 없어지게 되었다. 이 이야기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영월의 [[관리]]들이 여럿 죽는 일이 벌어졌는데 박충원이라는 사람이 영월 군수로 부임한 뒤 제문을 지어 단종의 넋을 위로했고 그 뒤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http://sillok.history.go.kr/id/knb_11402001_007|선조수정실록 14년 2월 1일 7번째 기사]])[* 이 이야기는 [[맹꽁이 서당]] 1권에서도 등장한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걸 보면 [[장화홍련]]전이나 [[박문수]] 전설 같은 것에서 종종 나오는 애꿎은 [[사또]] 쇼크사시키는 [[귀신]]의 원조인 듯. 다른 이야기도 있다. 엄흥도와 그의 아들이 단종의 시신을 수습해 매장할 곳을 찾아 헤맸으나 눈보라가 내리치는 엄중설한이라 땅이 모두 얼어 붙어 무덤을 파는 일은 불가능해 보였다. 그 때 어디선가 [[노루]] 1마리가 홀연히 나타나 눈밭에 앉아 잠시 쉬고 가니 그 눈 녹은 자리를 파 단종의 시신을 묻었다고 한다. 노루가 눈밭에서 쉬고 갔을 리 없겠으나 약관도 채 되지 않아 [[권력]]다툼에 의해 짧은 생을 마감한 소년 왕과 눈보라 치는 설원의 가냘픈 노루 1마리는 어째 서로가 닮은 [[이미지]]가 아닐까 한다. 훗날 복위된 단종의 [[왕릉]]을 이장하기 위해 조정에서 지관을 보내어 장릉의 지세를 살폈는데 실제로 가본 지관들은 엄흥도가 임시방편으로 모셨던 그 자리가 이미 천하길지라는 것을 알고 이장하지 않고 묘제만 왕릉의 격식에 맞추어 고쳤다고 한다. 엄흥도 암매장 [[전설]]이 모두 여기에 근거하고 있다. 엄흥도가 숨었다는 이야기도 없고 암매장했다는 이야기도 없다. 고을 아전 1명이 매장하고 [[무덤]] 쓰면 그걸로 예를 갖춰서 매장했다고 판단할 여지도 <[[중종실록]]> 편찬자 기준에서는 충분하다. 비참한 [[사망]] 과정까지 논할 필요도 없이 단종이 죽고 60년이나 지난 시점까지 무덤 위치 이야기가 이렇게 돌았다는 사실만으로도 주변 사람들은 다 알았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으므로 암매장했을지라도 그리 문제가 안 되고 엄흥도를 찾으려고 했던 흔적도 이 시기에는 없다. <조선왕조실록>과 달리 단종이 복위된 다음 숙종 시기를 거친[* 민중의 이야기인 민담이 진짜로 복원된 시기가 없는 시점에서 돌 때나 그렇다. 단종 복위가 끝나고 후대에 엄흥도가 단순히 저 공로만으로 [[정승]]급으로 추승된 이후에는 상류층에 의해서도 온갖 이야기가 다 만들어지기 마련이다.] 민담과 설화들은 이렇게 안 끝난다. 엄흥도가 단종의 시신을 수습하여 몰래 묻을 때 자신의 노모를 위해 미리 준비해 두었던[* 이때 뿐 아니라 현재에도 어르신들 사이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풍습이다. 깨끗한 [[죽음]]을 미리 준비하는 뜻인데 건강할 때 [[영정]][[사진]]을 미리 예쁘게 찍어 두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관(장례)|관]]과 [[수의]]를 썼다고 한다. 주변 사람들이 후환을 두려워해 그를 말리자 "옳은 일을 하고 화를 당하는 것은 괜찮다."는 [[폭풍간지]] 대사를 남기며 강행하고야 만다. 매장을 마친 후 엄흥도는 그 길로 [[가족]]들과 함께 영월을 떠나 영영 자취를 감추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엄흥도의 일가족이 어디에 사는지 알고 있었던 주변 사람들이 제법 있었지만 아무도 관에 고하지 않았으며 현지 [[주민]]들은 단종이 묻힌 무덤을 [[묘]]가 아닌 왕릉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 후 엄흥도는 [[숙종(조선)|숙종]] 때 단종이 복위되면서 그 이듬해에 공조좌랑에 추증되었고 [[영조]] 때 공조참의, 공조참판에 추증되었으며 [[정조]] 때는 [[장릉배식록]]에 포함되었고 [[순조]] 33년(1833년)에는 [[공조판서]]로 추증되었다. 6부 중 공조로 추증되었던 것은 왕릉의 조영([[건설]])을 담당하는 부서가 공조였으며 엄흥도의 일을 왕릉 조성으로 평가하였기 때문이다. [[고종(대한제국)|고종]] 14년(1877년)에는 '충의공'이란 [[시호]]와 함께 '의금부사 오위도총부 도총관'이란 정승급 [[벼슬]]이 추증된다. 엄흥도가 원래 지방의 미관 말직이었던 점에 비추어 단종의 시신을 수습해낸 그의 충의를 후세가 얼마나 높게 평가했는지 알 만하다. [[계유정난|세조가 얼마나 살벌하게 집권했는지]]를 생각하면 [[피끝마을|그야말로 자신과 일가족의 목숨을 걸고 한 일]]이니 말이다. [[생육신]] 중 하나였던 조려가 단종의 죽음을 전해듣고 영월로 달려가 시신을 수습했다는 말도 있다. 이 때 강물이 불어서 영월로 건너가지 못한 조려가 통곡을 하자 [[호랑이]]가 나타나서 등에 태워 강을 건넜다는 설화도 존재한다. === 복권 === 한동안 단종의 폐위와 죽음은 정치적인 금기가 되었다. 이는 세조 다음의 왕들이 모두 세조의 직계후손들이기 때문이다.[* 8대 [[예종(조선)|예종]]부터 27대 [[순종(대한제국)|순종]]까지 모두 세조의 직계후손 왕들이다. 즉 세조 다음의 왕들이 낳은 자녀들과 그들의 후손들 또한 모두 세조의 직계후손이다. 순종 이후의 역대 [[대한제국]] [[왕위 요구자/아시아#s-2.2|황제위 요구자]]들 또한 모두 세조의 직계후손이다.] 하지만 유교 이념에 반하는[* 유교 이념 상 반란이든 세력다툼이든 뭐든 명분은 무조건 존재해야 했다. 하다못해 표면적인 핑계에 불과하다 치더라도 말이다. 예를 들어 훈구파가 사림파를 다수 제거한 4번의 사화는 모두 명분이 있었다. 헌데 계유정난은 이런 최소한의 명분조차 없었다. 비단 유교 이념이 아니더라도 정상적인 어떤 이념상으로도 계유정난은 명분이 아예 없었다. 물론 달콤한 권력을 얻는답시고 명분이고 뭐고 짓밟고 왕위를 찬탈하는 경우는 동서고금 막론하고 많았지만 단종이 쫓겨난 사례는 세계사적으로도 유례를 찾기 힘들정도로 매우 불운이 심하게 겹치고, 명분이 없었다.] 무력과 강압에 의지한 정변과 그로 인한 강제 폐위, 그리고 사사는 조선의 성리학에서는 용납되지 않는 무도한 짓이었다. 단종이 당한 이 모든 수모에 대한 명분마저 전무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때문에 단종의 사후에도 그에 대한 논란이 불거지게 된다. 폭정과 실정이라는 해명거리가 있는 연산군[* 반대파에 대한 무자비한 숙청, 지니친 엽색 행각, 민생 파탄.]과 광해군[* 반대파에 대한 무자비한 숙청(폐모살제), 국가 재정을 고려하지 않은 무리한 궁궐 증축, 민생 파탄.]과 달리 단종은 12살에 왕위에 올라 어린 나이에 올랐다는 이유만으로, 17살에 반정 세력들에 의해 폐위되어 죽임을 당했기 때문에 살아생전 폭정과 실정을 저지를 기회조차도 가져보지 못했다. [[연산군]]이 일으킨 [[무오사화]]의 계기도 이와 관련되어 있었으며, [[중종반정]] 이후 연산군이 폐위된 이후로도 [[사림]]에서 복권 논의가 나왔다. 사림에서 강력한 세력을 자랑하던 서인과 노론에서 적극적으로 단종과 단종비 정순왕후 송씨의 복권을 주장하며[* 조선 유교의 거목이자 노론의 영수인 [[송시열]]이 단종 복권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송시열은 단종 외에도 단종에게 충의를 다한 [[사육신]]들의 복권까지 주장하였다.] 중종과 효종 때 단종의 복권에 대한 사대부들의 지지 여론 형성에 나서며 단종에 대한 복위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사림이 단종 복권에 적극적인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단종이 당한 비극들은 이전에 조선의 주도권을 거머쥐고 뒤흔든 훈구 세력들의 만행이었고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으로 친조카의 정당한 왕위를 강제로 찬탈한 일은 아무리 조선의 선대 임금이 했다고 할지라도 성리학을 이념으로 삼아 어떤 일이든 명목과 그 명목에 합당한 본분을 갖추어야 한다고 인식하는 사림들과는 맞을 수가 없었다.[* 어느 정도인가 하면 사림은 권근과 같은 조선 건국에 크게 기여한 유학자들보다도 오히려 고려 왕조에 절개를 지키고 최후를 맞이한 정몽주를 조선 성리학의 시조 중 한 사람으로 삼고 크게 존경했다.] 계유정난을 적극적으로 미화했던 훈구파 세력이 서인에 흡수되어 계속 조선의 지배층으로 남아있기는 했지만, 애초에 서인 자체가 사림파에서 갈라져나온 거라서 결국 서인 내 훈구파계 후손들조차도 더 이상 계유정난을 대놓고 미화하지는 못하게 되었다. 이러한 조선을 이끄는 지식인/지배층인 사림들의 단종 복권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면서 중종대 소릉 복위, 노산묘에 대한 치제 거행, 노산군묘에 대한 수리와 치제 등으로 이어지며 점점 단종 복권의 여론이 형성되었다. 결국 [[숙종(조선)|숙종]] 7년(1681년) [[http://sillok.history.go.kr/id/ksa_10707021_001|노산대군으로 승격]]된 후 숙종 24년(1698년) [[http://sillok.history.go.kr/id/ksa_12411006_002|단종으로 복위/추존]]되었으며 동시에 단종의 부인인 [[정순왕후 송씨]]에게 '정순'이라는 시호도 함께 올렸다. 무력으로 폐위된 왕이기 때문에 단종릉에는 다른 왕릉과는 달리 무인석이 없다.[* 숙종은 이런 분야에 관심이 많았는지, 묘호가 없던 2대 임금 [[정종(조선)|정종]]도 당시까지는 명나라에서 준 시호인 공정왕으로 불리다가 이때 정종이 된다. 정통성이 강력해서인지 왕실 복권, 추승에 거리낌이 없었다.] 복권시킬 때의 명분은 [[완곡어법|단종이 강등되고 사사된 것은 세조를 모시던 신하들의 요청과 강요 때문이었기에, 단종을 복위시킨다고 세조에게 누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논리다.]] === 무덤과 제사 === 단종의 첫 무덤은 크기도 작고, 단종의 것임을 숨기기 위해 인근에 다른 무덤이 많은 곳에 묻은 것으로 보아 [[세조실록]]에서 말하는 "예로써 장사지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죽은 후 [[금성대군]]과 같이 왕실 족보에서도 삭제당한 것도 타살설과 이 견해를 함께 뒷받침한다. 다만, [[중종(조선)|중종]] 대까지 단종의 능(장릉, 복권 전에는 '노산군 묘')을 아무도 몰랐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이는 아무런 근거가 없다. 단지 무덤에 [[제사]]를 지내지 않았기 때문에 관심이 없었다가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중종 대에 '노산군 묘'에 대한 언급이 처음으로 등장하는데, 그때까지 80대의 고령으로서 생존해 있던 단종의 비 [[정순왕후(조선 단종)|정순왕후]]([[중종실록]] 내에서는 '노산군 부인') 때문이다. 중종은 당시 송씨의 딱한 처지를 듣고 재산을 새로 보태주는가 하면,[* 고령이었던 [[정순왕후(조선 단종)|정순왕후]]는, 조정에서 받은 노비와 재물 등을 자신이 죽으면 시누이 [[경혜공주]]의 아들인 [[정미수]]에게 상속하게 하여 단종의 제사를 계속 지낼 수 있게 해달라는 부탁을 한 장면도 기록되어 있다.] 단종에 대해서도 최초로 제사를 지내주었기 때문이다. 단종의 무덤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고 있었다면 이런 빠른 처리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남의 무덤을 잘 챙겨준 [[중종(조선)|중종]] 자신은 [[임진왜란]] 때 능이 도굴되는 바람에 시신이 영영 사라지고 말았다. 한양에서 영월까지 따라와 그를 모셨던 [[궁녀]]들은 단종이 세상을 떠나자 모두 강물에 뛰어내려 자결했다는 식의 전설이 만들어져서, 훗날 숙종대에 단종이 복위되면서 그 궁녀들을 제사 지내는 단도 만들어졌다. 워낙 비극적인 장면이라 몇몇 사극에서도 이를 연출하기도 했지만, 궁녀는 [[내명부]]에 등록되어 궁궐 안에서만 일하게 되어 있는데, 폐위되고 부인과도 강제로 생[[이별]]하며 머나먼 영월까지 끌려가야 했던 (왕도 아닌) '노산군'을 궁녀가 따라가 모신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하지만 이런 전설이 당연한 듯 통했다는 건 그만큼 세간의 관심과 동정이 매우 컸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궁중의 금지옥엽으로 태어나 이렇게 비참하게 생을 마감하고 왕실 족보에서도 제외되고 없는 단종의 [[제사]]를 왕실에서 지내줄 리는 없었다. 대신 [[생육신]]을 포함한 여러 충신이나 단종의 살아남은 일부 혈육들이 제각각 제사를 모시기는 했다. 공식적으로는 단종의 조카인 정미수[* 단종의 누나 [[경혜공주]]의 아들.]와 그 자손들이 단종의 제사를 지냈으며 이것은 어디까지나 사가에서 치르는 제사였을 뿐이다.[* 몰래 지낸 것은 아니다.] [[파일:external/hanja.pe.kr/king6-01.jpg]] 단종의 능호는 [[장릉(영월)|장릉]](莊陵)으로 여러 조선 왕릉과는 달리 [[경기도]]가 아닌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에 위치한다.[[http://whc.unesco.org/en/list/1319/multiple=1&unique_number=1613|#]] 참고로 [[북한]]에 있는 태조의 왕비 [[신의왕후]] 한씨의 제릉, 정종의 후릉, 그리고 왕릉의 제식을 갖추지 못한 연산군묘와 광해군묘는 세계유산이 아니다. 신기하게도 장릉 주변의 [[소나무]]는 마치 절을 하듯 장릉 방향으로 굽어져 있다. 정말로 장릉에 가면 볼 수 있다. 특히 능역 근처에 가면 단종의 능을 향해 유난히 기울어진 소나무가 한 그루 남아 있는데, 이 소나무를 '충절송'이라고 부른다.[* 참고로 청령포에 있는 단종 어소(거처) 주변의 소나무도 어소 방향으로 굽어진 것을 많이 볼 수 있으며, 어소 바로 옆에는 장릉의 충절송처럼 유난히 기울어진 소나무가 있다.] 살아 생전에 노산군으로 강등되었기 때문에 [[종묘]] 신위에서도 빠져있었고 왕실족보에서도 빠져있었다. 그러나 [[숙종(조선)|숙종]]이 추증과 복위를 승인함에 따라 뒤늦게 공식적으로 [[종묘]] 신위에 포함되어 역대 선대왕의 신위와 나란히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단종 신위는 종묘 정전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영녕전에 모셔진 유일한 조선 국왕의 신위이다. === 추모 === 단종이 죽은 영월 일대에서는 민간에서 단종이 죽고 태백산의 산신령이 되었다는 믿음이 퍼졌다. 실제로 아직까지도 이 일대의 무속인들은 태백산신 아기대왕을 섬기는 이들이 많은데, 이게 바로 단종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일대에선 산신제를 올리면서 [[태백산]]신제라는 이름으로, 그것도 매우 다양한 형태로 치러 와 오늘날에까지 이르고 있다. 이 태백산신제에서는 소를 잡아서 그 고기를 올렸다는 점이 특기할만한 점이다. 당시 소는 농업의 근간이라하여 함부로 잡지 못했고,[* 현대에도 20~30년 전까지만 해도 소를 팔아 대학을 보낸다든가 할 정도로 소는 귀중한 재산이었는데, 하물며 전형적인 농업사회이면서 농업생산력이 낮았던 [[강원도]] 일대에서는 더더욱 귀한 재산이었다.] 소를 잡아 그 고기를 쓰는 제사는 왕에게만 올리는 것이었다. 민간에서 소를 잡는 제사는 태백산신제가 유일하다시피 하는데, 민간에서 산신령에 대한 민간신앙으로 가장하여 단종에게 왕의 예로 제사를 올린 것으로 추측된다. 이런 제사가 매년 군 관아뿐만 아니라 시골에서 리(里) 단위로 이루어졌는데, 가령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299783&cid=40942&categoryId=32175|녹전리서낭제]] 등이 있다.[* 이곳의 경우 원래 서낭당이 둘이었는데, 한 곳이 새마을운동 때 청년회에 의해 불타 없어졌다고 한다. 그런데 이후 서낭당을 없앤 청년회 일원들이 하나둘 죽어나가고, 주민들의 신앙은 더 두터워졌다. 그 서낭당의 신목은 마을 입구, [[녹전중학교]] 앞길에 그대로 남아있다. 뱀발로 나머지 한 곳의 서낭당도 아직 남아있는데, 당시 마을 입구에 있던 서낭당이 불타는 걸 보고 충격먹은 당시 어르신들은 "이것까지 없어지면 정말 큰 해가 내린다"고, 기거까지 하며 사수해냈고, 그것이 전해져온다.] 단종이 공식적으로 복원되기 전까지는 그를 언급하거나 기리는 것이 [[피끝마을|얼마나 위험한 일이었는지를]] 알고도 백성들이 이렇게까지 지극정성으로 목숨 걸고 단종을 모셨다는 것은, 그만큼 비운의 어린 왕으로서 크나큰 동정을 얻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이 태백산신제는 상당히 큰 규모를 유지하며 계속 명맥을 이어갔다. 영월 뿐 아니라 인근 지역에서도 이 산신제를 보러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통에 관련된 지명까지 남아 있을 정도. 여러 형태의 태백산신제는 오늘날에도 계승이 되어 산신제만 무려 8가지, 서낭제가 5가지, 한풀이굿 2가지가 잘 유지되고 있다.([[http://yeongwol.kccf.or.kr/home/main/history.php?conf_kccf_addr=yeongwol&menuinfo_code=folk&folk_idx=513|참고자료: 영월문화원 홈페이지]]) [[영월군]]의 공식축제인 단종문화제(매년 양력 4월 하순)도 태백산신제의 후계자라고 할 수 있는데, 사육신제와 함께 매년 지내고 있는 제사이자 중요한 지방축제이다. 영월 젊은층들이 인식하는 단종문화제는 축하행사에 유명한 연예인들[* 특히 [[남학교]]들인 [[영월중학교]]와 [[영월고등학교]]는 [[걸그룹]]이 오기를 기다린다.]이 오고, 국장행렬재현에서 봉사활동 시간을 쌓고, 야시장에서 간식을 먹을 수 있고, 바이킹 등 임시로 설치된 각종 놀이기구를 체험할 수 있다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이러한 일 때문에 혹시나 수업[* 정규 수업이 아니라 [[보충수업]], [[야간자율학습]] 시간에는 빠진다. [[영월중학교]], [[영월고등학교]], [[석정여자중학교]], [[석정여자고등학교]] 등 영월 소재 [[일반계 고등학교]]들은 명문대를 보내야 하기 때문에 꽤나 규율이 엄격하고, [[보충수업]], [[야간자율학습]]을 강제한다. 이게 어느 정도냐면, [[영월고등학교]]는 토자라고 [[토요일]]에 자율학습을 강제했던 적이 있었다.]을 빠지고 가는 것을 방지하려 [[교사]]들이 순찰을 돈다. == 가족관계 == * 부: [[문종(조선)|문종]] * 모: [[현덕왕후]] * 누나: [[경혜공주]][* 단종의 친누나란 이유로 남동생의 폐위 과정에서 휘말려 갖은 불운을 겪었는데 남편인 영양위 [[정종(부마)|정종]]은 [[사육신]] 사건에 연루되어 [[경기도]] [[김포시|김포]]와 [[전라도]] [[광주광역시|광주]]로 귀양을 가고 대역죄인으로 능지처참에 처해졌다. 이후 경혜공주는 남편의 죽음으로 [[비구니]]가 되어 몹시 [[가난]]하게 살았다고 한다. 아들 [[정미수]]는 궁중에서 자라 후일 [[성종(조선)|성종]]이 되는 자을산군과 친분을 쌓게 되었는데 이 덕에 15세에 돈령부 직장에 오르고 형조정랑, 선전관 등의 벼슬자리를 거쳐 [[중종반정]]에 공을 세워 정국[[공신]]에까지 오르게 된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세조(조선)|세조]]의 엄명에 따라 [[예종(조선)|예종]]에게도 당부하여 경혜공주와 정미수의 경우 연좌시키지 말도록 전교를 한 기록이 있다. 또한 2012년 분재기에서 볼 수 있듯이 [[대중매체]]에서 나온 것과는 달리 실제로 경혜공주가 [[공주]] 신분을 잃었던 적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어머니가 단종을 낳고 7일만에 죽은데다 아버지가 죽고 단종이 즉위한 뒤에는 [[수양대군]]과 [[안평대군]], [[권신]]들에게 눌려 살았기에 자주 친누이의 집을 찾았다고 한다. 아무래도 의지할 사람이 없는 [[궁궐]]보다는 그래도 친누나와 자형이 있는 곳이 더욱 편안하게 느껴진 모양. 경혜공주의 [[집]]은 문종이 직접 신경을 써서 지금 북촌 자리에 만들어준 집이라 궁에서도 가까웠다. 실제로 [[계유정난]]도 단종이 경혜공주의 집에서 자던 날 밤 일어났는데 대중매체에서 수양대군이 자기 세력을 몰고 무장하고 대전으로 쳐들어가 궁인과 신하들을 죽이고 단종은 옥좌에 앉아 울고 있는 장면은 사실이 아니다. 2011년 [[KBS]] 드라마 <[[공주의 남자]]>에서도 이를 반영하여 단종이 누이의 병문안을 위해 경혜공주의 집에 방문한 날 계유정난이 벌어진다.] * 왕비: [[정순왕후(조선 단종)|정순왕후]][* 송현수의 딸. 그녀는 82세까지 장수해서 [[중종(조선)|중종]]의 치세 때까지 살아 있었다.] * 후궁 * [[숙의 김씨(단종)|숙의 김씨]][* 김사우의 딸. 단종이 쫓겨나면서 폐출되었다. 정순왕후만큼 오래 살았는데 [[연산군]] 시절까지 폐위된 [[임금]]의 후궁이라고 하여 특별히 지원하지 않았다. [[중종(조선)|중종]] 대에 이르러 80세의 [[노인]]이라는 점에서 매년 [[쌀]]과 [[소금]]을 보내주는 등 은혜를 베풀었다.] * [[숙의 권씨(단종)|숙의 권씨]][* 권완의 딸. 아버지 권완이 [[단종복위운동]]에 참여하였다는 이유로 아버지는 능지처참당하고 본인은 [[노비]]가 되었다. 나중에 [[세조(조선)|세조]]가 노비에서 방면시켜 주지만 이미 집안이 몰락한 상황이라 곤궁하게 살아야 했다.] == 직접 쓴 글과 시 == > {{{+1 '''영월군의 누각에서 지음'''}}} > 달 밝은 밤 두견새 우는데 > 시름겨워 누각에 기대었네 > 네 울음소리 슬퍼 나 듣기 괴롭구나 > 네 소리 없으면 내 시름없을 것을 > 이 세상 괴로운 이에게 말을 전하니 > 춘삼월 자규루에는 부디 오르지 마소 >---- >[[열성어제]][* 강진숙 번역본] >---- >{{{+1 '''영월군의 누각에서 지음'''}}} > 외로운 몸 외딴 그림자 푸른 산속을 헤맨다 > 밤마다 잠을 청하나 잠들 길 없고 > 해마다 한을 끝내려 하나 끝없는 한이네 > 산봉우리에 울음소리 끊오지니 새벽달이 비추고 > 봄 골짜기에 피 흐르니 붉은 꽃이 떨어진다 > 하늘은 귀 먹어서 하소연 못 듣는데 > 서러운 몸 어쩌다 귀만 홀로 밝은가 >---- >[[열성어제]][* 강진숙 번역본] [[영월군]] 객사인 동헌에서 머물 때 지은 시이다. 관풍매죽루에 올라 시를 읊었다. 이 시 구절을 듣고 울지 않은 이가 없다고 한다. 이 내용은 단종의 무덤인 노릉에 관한 책인 노릉지에 실려있다. == 전설 == === 피끝마을 전설 === 한편 단종의 작은 아버지이자 세조의 동생이기도 한 금성대군은 계유정난에 반발, 단종 복위 운동을 도모하다 발각되어 본인을 포함하여 관련자들은 물론 해당 지역의 백성들까지 모조리 멸절당했다는 전설이 있다. 이를 '정축지변'이라 한다. 정축지변 자체가 실제가 아니라 단종 복위 운동에 대한 전설이지만, 그만큼 당시 세조의 찬탈 과정과 단종 복위 운동을 겪으면서 멸절당한 왕족이나 양반 계층들이 많았기 때문에 당시 세조의 찬탈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자세한 설명은 [[피끝마을]] 항목 참조 === 추익한 전설 === || [[파일:vJ6dL7a.jpg|width=550]] || || 영월 보덕사 산신각 외벽에 그려져 있는 탱화 중 하나. || 한성부윤 관직을 지냈으며 나이들어 은퇴한 후에 고향에 낙향해 있던 추익한이라는 이가 영월에 유배 온 단종에게 [[머루]]를 바치는 등, 단종이 친구처럼 꽤 가까이했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날, 평소처럼 [[머루]]와 여러가지를 준비하여 단종이 유배된 곳으로 가는데, 강가에서 [[백마]]를 타고 있는 단종을 만났다. 그런데 단종은 서민복이 아닌 [[곤룡포]]를 입고 있었다. 단종은 왕에서 강등되어 노산군이 되었으니 왕의 옷인 곤룡포를 입을 수 없다. 이에 놀란 추익한이 꿇어 엎드리며 이게 어찌 된 일이냐고 여쭈었더니, 단종은 간단히 "[[태백산]]으로 가는 길이오."라고 대답하더니 사라졌다. 추익한은 불안한 마음에 단종의 거처로 달려갔지만, 단종은 사약을 받고 죽은 후였다. 추익한은 울면서 단종의 환상을 보았던 강가로 달려가서는 거기서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이 때 추익한의 나이는 75세였다.[* 태백산 산신각에 걸려 있는 단종의 초상화가 바로 이 말을 타고 가는 단종에게 머루를 바치는 그림.] 이 때문에 추익한은 사후에 벼슬을 하사받았으며 이에 유래하여 단종은 민간신앙에서 태백산의 산신령으로 여겨진다. 덧붙어 단종복위를 꾀하다 죽은 금성대군은 소백산의 산신령이라고.[[http://www.oneclick.or.kr/contents/nativecult/area09.jsp?cid=66262|#]] 하지만 역대 한성부윤 중 추익한이라는 사람은 없는 걸로 보아[* 한성부윤은 조선의 종묘, 왕궁이 위치한 중요한 지역인 한성부의 수장이고 정 2품의 고관임에도 불구하고] 후대의 창작으로 보인다. === [[현덕왕후]] 전설 === 단종 본인에게 해당되는 일은 아니지만, 단종을 폐위시켰던 [[세조(조선)|세조]]는 이후 [[현덕왕후]]의 유령에 시달렸다고 한다. 세조는 꿈 속에서 현덕왕후(문종의 비, 단종의 어머니)가 뱉은 침을 맞았고, 이 때문에 그 이후로 침 맞은 자리를 시작으로 온 몸에 종기가 생겼으며 세조의 장남 [[의경세자]]는 큰어머니(현덕왕후)의 유령에 시달리다 죽었다. 다만 이 내용은 야사이고, 정사의 기록에서는 [[의경세자]]가 단종보다 먼저 죽었다. [[왕과 비]]에서는 "꿈에 형수님이 피를 흘리며 나타나서는 '네놈이 내 아들을 죽이려 하니 본보기로 네 아들을 데려간다'고 말했다"는 세조의 대사를 통해 정사와 야사를 적절하게 섞었다. 자세한 내용은 [[세조(조선)|세조]] 항목 참고. 참고로 의경세자가 단종보다 1달 정도 일찍 죽었는데, 이 때문인지 왕과 비에서는 단종을 죽인 걸 의경세자의 죽음에 대한 세조의 복수로 각색. === 영월부사의 고뇌 === 단종은 폐위되어 유배된 후 때때로 인근 정자에 나아가 경치를 구경하곤 했는데, 영월부사가 사사건건 간섭하며 괴롭히자 결국 괴로운 마음에 경치 구경마저 그만두었다. 그런데 이후로 영월부사가 외출할 때마다 어디서인지 모르게 돌팔매가 계속 날아왔다. 단종을 동정하던 인근 주민들이 괘씸한 마음에 부사에게 던진 것이었다고. 하지만 동정심에 단종에게 잘해줬다가는 조정에서 벌을 받을 수도 있었고, 그렇다고 단종을 괴롭히자니 민중의 시선이 싸늘했기에 사람들은 영월부사 자리를 매우 어렵게 여겼는지, 새 영월 부사가 부임한 지 며칠 지나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죽고 말았다는 괴이한 헛소문까지 퍼졌을 정도였다. === 정효준 전설 === 단종의 조카인 [[정미수]]의 후손을, 단종의 혼령이 혼인을 맺어줬다는 야사가 있다. [[정미수]]의 후손들은 대대로 단종과 [[정순왕후(조선 단종)|정순왕후]]의 제사를 지켜왔는데, 정효준의 대에 이르러서는 벼슬도 하지 못해 가세가 매우 기울었다. 정효준은 3번이나 결혼했지만, 부인들이 모두 일찍 죽고 자식도 남기지 못해 늙은 홀아비로 살아가는 비참한 처지였다. 그나마 부사(府使)를 지낸 친구 이진향과 교류하며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 하루는 정효준과 이진향이 함께 장기를 두며 이야기를 나누는데, 갑자기 정효준이 이진향에게 "자네의 딸과 결혼해 자네의 사위가 될 수 없겠나"라고 질문했다. 이에 이진향은 "황당한 일을 다 본다"며 단칼에 거절해 버렸다. 그런데 그날밤 이진향의 꿈 속에 단종이 국왕의 모습으로 나타나, "정효준과 너의 딸을 결혼시켜라"라고 명했다. 이진향은 꿈 속에서는 그리하겠다고 했지만, 쉽게 결정하기 힘든 일이라 부인과 상의했다. 당연히 부인은 "가난뱅이 홀아비와 딸을 결혼시킬 수 있냐"며 거절했다. 그런데 그 다음날 밤 꿈속에서 다시 단종이 나타나 "왜 나의 명령을 따르지 않느냐"며 부인에게 곤장을 때렸고, 결국 정효준의 청혼을 수락해야 했다.[* [[윤승운]] 화백이 그린 만화에서는 꿈에서 깬 이진향이 옆에서 부인도 같이 깨서 한숨을 푹 쉬고 있는 것을 보고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제 꿈에 노산(단종)께서 나타나 왜 내 말을 듣지 않았느냐며 저에게 곤장을 치셨는데 꿈에서 깨서도 그 맞은 자리가 아파서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하더라고 나온다.] 그런데 그 이후, 정효준도 "나 역시 꿈 속에 단종이 나타나 '이진향의 딸과 결혼하라'고 명했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한 것"이라고 토로했다. 결국 정효준은 이진향의 딸과 결혼했고, 이후엔 아들들을 낳아서 모두 높은 벼슬을 하고, 정효준 역시 높은 벼슬을 하여 부귀영화를 누렸다는 이야기다. 해당 전설은 야사에 따른 것으로, 정효준은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를 역임하고 해풍군으로 추서된 실존인물이다. 또한 정효준의 묘에 세워진 비문의 내용에 따르면,[[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947351&cid=62132&categoryId=62132]] 정효준은 3번의 상처(부인의 죽음) 이후 4번째 부인으로 경상우병마절도사 이진경의 딸과 혼인하였다고 나온다. 부사(府使)라는 정식벼슬은 없으며, 있다하더라도 고려조의 벼슬이기에, 야사에서의 부사라는 의미는 현재로 따지면 지자체장 쯤으로 봐야 하는데, 절도사는 장군의 개념이므로 이또한 실재역사와는 다르므로 틀린 정보가 되겠다.[[https://blog.naver.com/roaltlf/223083241082]] 이진경이 이진향으로 소개된 부분은, 경(卿)자와 향(鄕)자가 비슷한 데서 나오는 인식의 오류로 보인다. 야사에는 정효준이 이진경의 딸과 결혼하기 전 3번의 상처와 함께 자손조차 없다고 되어있지만, 죽은 처들과의 관계에서 자손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4처인 이진경의 딸이 정효준에게 출가하여 5남2녀의 자식을 두었는데, 자신의 친자식보다 전처의 자식을 더 지극히 보살폈다는 내용이 비문에 나오기 때문이다. 고 고우영 화백의 작품 "오백년"에서도 해당 야사의 내용을 다루고 있다. === 의미 === 위의 야사나 민담들도 그렇고 전설도 그렇고 단종은 조선 왕 중에서 이런 이야기들을 많이 남긴 왕인데, 이것은 그만큼 단종의 생애가 민중들의 동정을 받았고, [[수양대군]] 일당이 얼마나 민중들에게 미움을 받았는지를 시사하는 예다. 당장 [[숙종(조선)|숙종]] 때 단종 복위를 논하면서도 "단종의 일을 안타깝게 여기지 않는 백성이 없다."라는 말이 나오는 것으로도 보아 이러한 단종에 대한 동정심은 사림과 백성을 막론하고 광범위한 여론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종합해서 정리해 보면 [[혈연 때문에 개고생]]이라고 봐도 무방할 듯하다. 실제로 아직도 [[강원도]] [[영월군]]에서는 해마다 제사를 지내며, 단종제와 [[사육신]]제는 영월의 명물로 홍보되고 있다. [[유시민]]은 [[알쓸신잡]] 영월편에서 이러한 현상에 대해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택한 방법이 결코 옳지 못했던 [[수양대군|세조]]에 대한 민중의 역사적 단죄'''라고 해석했다. 백성들로서는 단종이 [[계유정난]]을 겪지 않고 오래 집권했다고 해서 할아버지나 아버지 정도의 군주가 되었을지는 장담할 수 없고 단종 자신의 집권기 동안 무언가 자신들을 위한 업적을 그렇게 많이 남겨준 것도 없었을망정,[* 그런데 재위 기간이 워낙 짧고 그 기간의 나이도 워낙 어렸던지라 뭔가 중요한 업적을 남기는 것 자체가 어렵긴 했다.] 특별히 어떤 정치적 실책이나 정통성의 흠결도 없이 단순히 정치적 이유로 죽음을 맞은 희생양이기에 더욱 그를 추모하고 동시에 그럴싸한 좋은 목표를 내세우며 그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부정한 방법과 수단을 정당화하는 일이 역사에 또 일어나선 안 된다는 생각에 공감했기 때문이었다는 것.[* 다만 여기서 [[유시민]]은 [[수양대군|세조]]에 대해 "단종의 일만 아니었다면 [[세종대왕]]급은 아니더라도 [[정조(조선)|정조]] 정도의 평은 받았을 것"이라며 세조의 치적을 다소 과대평가하고 있다는 지적이 있다. 세조가 세종, 문종 치하에서 실무를 오래 맡아 보는 등 아주 능력 없는 인물은 아니었고 명석한 사람이었던 건 맞지만, 이미 시작(탈법의 극치로 집권)부터 큰 문제가 있던, 즉 유시민이 말한 '단종의 일'이 아니었다면 애초에 임금이 되는 것이 절대 불가능했던 사람이다. 그리고 세조 치하에서 [[관학파|중요한 핵심 인재]]들이 대거 소멸되고 [[훈구파|공신들을 중심으로 한 관리]]들의 부정부패가 극심해지기 시작하는 등 그 실적이라는 것도 알고 보면 상당히 부실하다. 정조의 경우 비록 나름대로 한계는 있었어도 일단 전체적으로 보면 훌륭한 명군이었고 최소한 세조 수준의 치명적인 실책을 저지른 적은 없었다. 유시민과 같거나 비슷한 세대의 사람들은 정치적 성향을 떠나 군사정권 시절의 세조 미화에 따른 영향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한 감이 있다. 그리고 세조가 본격적으로 암군 취급을 받게 된 것도 2010년대 이후의 일이고 그 전까지는 세조를 비판하더라도 쿠데타 및 과도한 정적 숙청을 비판할 뿐 군주로서의 능력을 비판하는 일은 없다시피 했다. 즉, 민주화 이후 세조가 부정적으로 재평가되기 시작할 때도 2010년대 이전까지 세조는 쿠데타와 별개로 군주로서는 명군이라는 게 대중의 인식이었다.] == 어진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972000, #bf1400 20%, #bf1400 80%, #972000)" {{{#ffd400 단종의 어진}}}}}}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단종어진 근접.jpg|width=100%]]}}} ||단종 [[표준영정]] 확대본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단종의어진.jpg|width=100%]]}}} ||단종 어진 (국가표준영정 100호)[* 권오창 화백의 상상으로 그린 어진. 조선왕조실록과 행장 등 사료와 전주 이씨 종중의 골상적 특징이 고려되었으며, [[고조할아버지]] [[조선태조어진|태조어진(경기전본)]]과 [[삼촌]] [[세조(조선)/어진|세조 어진]] 초본(국립고궁박물관 소장본)을 검토해 공통된 특징을 추출했다고 한다. [[https://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6279376&plink=ORI&cooper=DAUM&plink=COPYPASTE&cooper=SBSNEWSEND|#]]]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vJ6dL7a.jpg|width=100%]]}}} ||강원도 영월군 영모전에 봉안돼있던 단종 승마 영정 || == 대중매체 == [[파일:attachment/ekswhdtpwh.jpg]] [[KBS1]] <[[역사저널 그날]]>에서.(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의 저자인 만화가 박시백의 그림이다.) === 영화/드라마 === * 단독 작품으론 1929년에 소설가 이광수가 쓴 《[[단종애사]]》가 있는데, 1956년에 전창근 감독과 유치진 작가가 처음으로 영화화했다. 1963년에도 이규웅 감독과 이서구 작가가 리메이크했으며 1956년판은 배우 [[황해남]]이, 1963년판에선 김운하가 각각 연기했다. * 1959년작 연극 《대수양》에선 여배우 조미령과 옥경희가 더블캐스팅 방식으로 연기했다. * 1968년작 영화 《풍랑객》에선 배우 박기범이 연기했다. * 1970년작 영화 《세조대왕》에선 배우 [[송재호]]가 연기했다. * 1971년작 영화 《나를 버리시나이까》에선 아역배우 김정훈이 연기했다. * 1980년작 KBS-TV 일요사극 《[[파천무]]》에서는 여성 아역배우 [[윤유선]]이 단종을 연기했다. 수양대군의 야심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천연덕스럽게 수양대군과 팔씨름을 하고[* 물론 야심을 철저히 감추고 있던 수양대군은 이홍위에게 일부러 져주며 이홍위가 왜 일부러 지냐고 따지자 수양대군은 그렇다면 자기 대신 겉과 속이 다르지 않은 대충신 [[김종서(조선)|김종서]]랑 팔씨름하는 게 더 좋겠다고 능글맞게 대답한다.] 문종이 승하하자 신하들이 어서 곤룡포를 입고 보위에 오를 것을 간청하자 눈물을 흘리며 누나에게 "누님 제가 꼭 왕이 되어야 하나요?"라고 하는 모습이 상당히 안타깝다. 이 드라마에서 수양대군은 [[김흥기]], 성삼문은 [[임혁]], 김종서는 [[신구|신구]]이다. 공교롭게도 훗날 [[용의 눈물]]에서는 김흥기가 [[이방석]]의 충신 정도전으로 임혁은 [[정안대군]]을 도와 이방석을 제거하는데 앞장선 [[하륜]]으로 나오게 된다. 그리고 [[왕과 비]]에서는 신구가 [[양녕대군]]을 맡아 김종서의 살해를 강력히 주장하는 역할로 나온다. * 1980년작 MBC 드라마 《고운 님 여의옵고》에선 아역배우 [[손창민]]이 연기했다. * 1984년작 영화 《사약》에선 배우 [[이재학]]이 연기했다. * 1983년작 MBC 드라마 《[[조선왕조 오백년]]》'[[뿌리깊은 나무(MBC)|뿌리깊은 나무]]'에선 [[이민우(배우)|이민우]]가 연기했다. * 1984년작 MBC 드라마 《[[조선왕조 오백년]]》 '[[설중매]]'에선 아역배우 [[신성원]]이 연기했다. * 1990년 KBS2 드라마 [[파천무]]에서는 문종의 생존시 아역으로는 장덕수[* 후에 그룹 [[야다]]에서 키보드를 연주하게 된다.]가, 중반기의 소년 왕때는 윤선빈이 각각 연기했다. * 1994년 KBS2 드라마 《한명회》에선 아역배우 [[정태우]]가 연기했는데, 1998년 1TV 대하드라마 [[왕과 비]]에서도 같은 배역을 맡았다.[* 아역시절 정태우는 사극에서 누군가의 아역이나 어린 나이에 요절하는 인물을 주로 연기하는 사망전대 담당 배우였다.] * 1995년 1월 2일자 KBS1 《역사의 라이벌》에선 배우 [[윤준식]]이 연기했다. * 2007년 SBS 드라마 [[왕과 나(드라마)|왕과 나]]에서는 배우 [[이풍운]]이 단종을 연기했다. * 2011년 KBS2 드라마 [[공주의 남자]]에서는 배우 노태엽이 단종 역을 맡았다. * 2011년 JTBC 드라마 [[인수대비(드라마)|인수대비]]와 2013년작 영화 [[관상(영화)|관상]]에서는 배우 [[채상우]][* SBS [[뿌리깊은 나무(SBS)|뿌리깊은 나무]]에서는 [[강채윤]]의 아역을, [[장옥정, 사랑에 살다]]에서는 [[숙종(조선)|숙종]]의 아역을 맡았다. 심지어 [[녹두꽃]]에서는 이성계([[태조(조선)|조선 태조 이성계]]와는 동명이인인 가상인물)를 연기했다.]가 단종 역을 맡았다. * 2019년 영화 [[나랏말싸미]]에서는 [[정시율]]이 [[세종(조선)|세종]]([[송강호]])의 어린 세손, 즉 단종 역을 맡았다. === 소설/웹툰 === * 김종훈의 데뷔작 [[살생부(웹툰)|살생부]]에서는 숙부에게 왕위를 빼앗긴 이후 세조에 대한 복수에 눈이 멀어 주인공인 길도의 동생을 외면하는 바람에 이에 빡친 길도는 단종복위음모를 세조와 [[한명회]]에게 다 밀고하여 실제 역사대로 유배 이후 자살을 하게된다. 창작물에서 비극성만 강조되는 기존의 모습과 달리 [[고인드립|상당히 교활한 모습]]을 [[창작물의 반영 오류|많이 보인다.]] * 그 외에도 단종을 주인공으로 해 수양대군의 반정을 막아내고 실제 역사에선 세조에 의해 제거될 인재들과 강력한 정통성을 무기로 조선의 부흥을 그리는 대체역사물이 많이 있다. [[죽지 않는 왕-무왕 단종]], [[군에서 종으로, 종에서 조로]] 등이 대표적 사례. == 여담 == * 단종 2년인 1454년 단종이 도통사(都統使)에게 명하여 청계산(淸溪山)에서 사냥하게 하였는데, 이때 동속로첩목아(童速魯帖木兒)와 낭발아한(浪孛兒罕)·이귀야(李貴也) 등 여러 [[여진족]] 족장들이 따라갔다고 한다. 이때 여진족들은 태상왕(太上王), 즉 태조 [[이성계]]가 다시 나온 줄 알고 내알(來謁)한 것이라고 말했는데 당시 조선과 여진족들의 관계 그리고 이성계의 여진족들에 대한 영향력을 알 수 있는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참고로 [[이만주]] 또한 부르려고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http://sillok.history.go.kr/id/kfa_10212017_001|임금이 청계산에서 사냥하다]] 또 한편으로는 단종 3년인 1455년에 여진족들에 대한 대대적인 호구 조사까지 한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나와 있다. [[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alternative_history&no=36534&exception_mode=recommend&page=27|조선의 편집증적인 여진 기록의 일례.]] * [[고종(대한제국)|고종]] 황제의 [[칭제]] 이전의 (왕 취급을 받는) 조선 왕 중에서 유일하게 [[중국]]으로부터 받은 [[시호]]가 없는 왕이다. 고종이 [[칭제건원]]을 하고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기 이전의 조선왕들은 [[연산군]], [[광해군]] 같은 왕 취급을 하지 않는 폐주가 아닌 이상 모두 중국으로부터 시호를 받았는데 오직 단종만이 중국으로부터 시호를 받지 못했다. [[숙종(조선)|숙종]]이 단종을 복권하면서 [[청나라]] 측에 단종의 시호를 내려달라고 요청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단종은 청나라 황실의 입장에서 동정의 대상이 되어도 이상하지 않았던 왕이다. 청나라는 쿠데타에 의한 황제위 찬탈이 단 1번도 없었던 나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숙종이 단순히 청나라 측에 단종의 시호를 내려달라고 요청하지 않은 것을 넘어, 아예 자신이 단종을 복권시킨 사실을 청나라 측에 알리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만약 청나라 황실에서 그것을 알았다면 상국으로서 위엄을 보이기 위해 단종의 시호를 내려주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래서 단종은 아직 조선이 중국의 [[제후]]국 취급을 받을 때의 임금임에도 불구하고 중국으로부터 받은 시호가 없는 왕이다. * 권오창 화백이 표준영정을 제작하였다.[[https://n.news.naver.com/article/032/0003069224|#]] *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조선의 [[국왕]] 중 가장 단명한 왕이며 [[예종(조선)|예종]]과 함께 만 20세가 되기 전에 [[사망]]한 둘뿐인 국왕이다. * 단종실록은 단종이 즉위하였던 시절 단종의 행적과 그 시절 왕실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기록한 실록이었는데 단종이 수양대군의 쿠데타로 폐위되고 노산군으로 강등되면서 당초에는 노산군일기로 격하되어 기록되었다.[* 그나마 이것도 [[명나라]]의 전례보다는 나은 편이었는데 단종과 비슷하게 숙부에 의해 쫓겨난 [[건문제]]는 독립적인 실록이 편찬되지 못하고 대신 숙부인 [[영락제]]의 실록인 태종실록에 건문제 재위 기간의 기록을 포함시켜 편찬하였다. 만일 조선이 이 전례를 따랐다면 노산군일기를 편찬하지 않고 세조실록에 포함시켜 편찬했겠지만 세조 사후에 노산군일기를 따로 편찬했다. 노산군일기는 세조 재위 기간에 편찬 준비 작업이 진행된 기록은 있으나 정확한 편찬 시점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은데 수양대군을 묘호인 세조로 기록한 점으로 보아 세조 사후에 편찬된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단종 이후에도 10대 [[연산군]]과 15대 [[광해군]]이 반정으로 축출되고 왕권까지 상실하면서 당시까지는 연산군, 광해군과 함께 실록이 아닌 일기로 기록되는 임금이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대 [[숙종(조선)|숙종]]이 단종 추존을 승인하게 되면서 노산군일기가 단종실록으로 승격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는데 제목만 바뀌었을 뿐 내부 서술은 계속해서 노산군으로 기록되며 당시 수양대군을 세조라 적고 있어 아쉬움이 남는다.[* 애초에 완성된 실록은 차라리 개수본 형태로 재판을 하면 했지 그 내용을 뜯어 고치는 것이 금지되어 있다. 설령 개수실록이 나오더라도 원본 실록과 함께 보존하는 것이 원칙. 그나마조차 제목이라도 바꾼게 굉장히 큰 사건일 정도.] 어쨌든 실록이 아닌 일기로 기록되는 임금은 연산군과 광해군만 남게 되었다. == 관련 문서 == * [[계룡산 초혼각지]] * [[단종대왕실록부록찬집청의궤]] * [[단종실록]] * [[단종애사]] * [[마도 4호선 수중발굴 조선시대 유물 일괄]] * [[사육신]] * [[생육신]] * [[애장왕]] * [[정업원]] * [[피끝마을]] *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 [[헌종(고려)|헌종]] * [[홍무정운역훈]] == 둘러보기 == [include(틀:조선 왕실)] ---- [include(틀:진승총(기타 사서 포함))] [[분류:단종(조선)]][[분류:나무위키 한국사 프로젝트]]||||||||||||||<:><#94153E>http://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5/58/Coat_of_Arms_of_Joseon_Korea.png?width=40 [br] '''{{{+1 [[조선/왕사|{{{#red 조선의 역대 국왕}}}]]}}}''' || ||<:> 5대 [[문종(조선)|문종]] 이향 ||<:> {{{+1 ←}}} ||<:><#94153E> '''{{{#yellow 6대 단종 이홍위}}}''' ||<:> {{{+1 →}}} ||<:> 7대 [[세조(조선)|세조]] 이유 || ||||||||<:> [[파일:ec6ClWt.jpg|width=276&height=368]] || ||||||<:> '''[[묘호]]''' ||<:> '''[[단종]](端宗)''' || ||||||<:> '''[[시호]]''' ||<:> 공의온문순정안장경순돈효대왕[br](恭懿溫文純定安莊景順敦孝大王)[* 폐위되어 시호가 없었다. 이후 숙종 때 [[정종(조선)|정종]]과 함께 묘효와 시호가 올려졌다.] || ||||||<:> '''[[본관]]''' ||<:> [[전주시|전주]](全州) || ||||||<:> '''[[능묘]]''' ||<:> [[장릉(영월)|장릉]](莊陵) || ||||||<:> '''휘''' ||<:> 이홍위(李弘暐) || ||||||<:> '''[[자(이름)|자]]''' ||<:> 휘지(輝之) || ||||||<:> '''[[고향|출생지]]''' ||<:> 한성 [[경복궁]] 자선당[* 역대 조선 국왕 중 최초로 궁궐 내에서 태어난 국왕이다.] || ||||||<:> '''사망지''' ||<:> [[강원도]] 영월 관아 관풍헌 || ||||||<:> '''배우자''' ||<:> [[정순왕후 송씨|정순왕후]](定順王后) 송씨 || ||||||<:> '''아버지''' ||<:> [[문종(조선)|조선 문종]] || ||||||<:> '''어머니''' ||<:> [[현덕왕후]](顯德王后) 권씨 || ||||||<:> '''종교''' ||<:> [[유교]] ([[성리학]]) || ||||<|2><:> '''생몰기간''' ||<:> [[음력]] || [[1441년]] [[7월 23일]] ~ [[1457년]] [[12월 24일]] || ||<:> [[양력]] || 1441년 [[8월 9일]] ~ [[1458년]] [[1월 9일]] (16년 5개월, 5,997일.) || ||<|4><:> '''재위'''[br]'''기간''' ||<:><|2> 왕 ||<:> 음력 || [[1452년]] [[5월 14일]] ~ [[1455년]] 윤 [[6월 11일]] || ||<:> 양력 || 1452년 [[6월 1일]] ~ [[1455년]] [[6월 25일]] (3년 24일, 1,119일.) || ||<|2><:> [[태상황|상왕]] ||<:> 음력 || 1455년 윤 6월 11일 ~ 1457년 [[6월 21일]] || ||<:> 양력 || 1455년 [[6월 25일]] ~ 1457년 [[7월 12일]] (2년 17일, 748일.) || ||||||||||||||<:><#94153E> '''{{{+1 [[왕세자|{{{#red 조선의 역대 왕세자}}}]]}}}''' || ||<:> [[세종대왕|세종]] 이도 ||<:> {{{+1 ←}}} ||<#94153E><:> '''{{{#yellow 단종 이홍위 (왕세손)}}}''' ||<:> {{{+1 →}}} ||<:> 단종 이홍위 || ||<:> 단종 이홍위 (왕세손) ||<|2><:> {{{+1 ←}}} ||<|2><#94153E><:> '''{{{#yellow 단종 이홍위}}}''' ||<|2><:> {{{+1 →}}} ||<|2><:> [[의경세자|덕종]] 이장 || ||<:> [[문종(조선)|문종]] 이향 (왕세자) || 端宗[* 이 묘호는 [[남송]] 말기의 소년 [[황제]] [[송단종]]과 함께 역사상 2명만이 존재한다.] [목차] == 소개 == '''정통성은 완벽했고 자질도 훌륭했으나, [[수양대군|숙부]]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 비운의 소년 왕.''' [[세종대왕]]의 장손이자 [[문종(조선)|문종]]의 [[장남]]. 조선의 제6대 왕. 기록에 따르면 [[형]]이 둘 있었으나, 모두 어릴 때 죽었기 때문에 사실상 [[고명아들]]로 성장했다. 즉위할 때 [[세종대왕|할아버지]], [[소헌왕후|할머니]], [[현덕왕후|엄마]], [[문종(조선)|아빠]] 모두 다 잃고 열두살 혈혈단신으로 옥좌에 오른 임금. 본명은 이홍위. 희한하게도 이름이 두 글자다. 특별한 이유 없이 그냥 두 글자인 듯. 조선 임금들 중 이름이 두 글자인 사람은 태종과 단종 뿐이다. 다른 왕들은 원래부터 외자 였거나 왕이 된 후 두 글자에서 한 글자로 고쳤다. 태조 [[이성계]]는 이단으로, 정종 [[정종(조선)|이방과]]는 이경으로, 철종 [[철종(조선)|이원범]]은 이변으로, 고종 [[고종(조선)|이재황]]은 이형으로. 태종 [[이방원]]은 개명하지 않았다. 우리나라에서는 [[피휘]]때문에 고려 때부터 임금이나 군, 대군의 이름으로 죄다 외자를 써왔고, 그 한 글자를 고를 때도 평소에 잘 사용하지 않는 글자를 고르고 골라서 이름으로 썼다. 태종 이방원은 이름에 흔한 한자인 '꽃다울 방(芳)'과 생활 필수 한자인 '멀 원(遠)' 이 있었지만 (꽃다움과는 거리가 멀다는 뜻(?)), 태종은 이름을 고치려는 마음이 없었고, 자신의 이름을 피휘하지 않는다고 잡아가두거나 한 일도 없기 때문에[* 예법에 따르면 이름이 두 글자일 때 각 한글자씩만 따로 떼서 쓰면 예법상 하자는 없다는 공자님 말씀이 있었다지만, 그런 건 원래 높은 놈 마음인 법이라... [[관세음보살]]이 관음보살이 된 사연도 당태종 [[이세민]] 이름에 세 자가 들어가서 그렇게 된 건데 이방원이라고 못할 이유는 없었다. 그냥 안 한거지.] 사람들은 '방'자 '원'자 안 쓰기를 포기하고 마음껏 썼다. 다만 태종 이방원은 고려 때 태어난 사람으로 이름을 지을 때는 왕이 될 사람이 아니였고, 철종은 왕위 계승 순위에서 매우 멀어 왕이 될 가능성이 사실상 없었고, 고종은 흥선군 이하응의 로비로 왕이 된 케이스이기 때문에 태어나서 이름을 지을 때 외자로 지을 이유가 없었다. 즉, 태어날 때부터 임금이 될 것임을 알면서도 굳이 두 글자 이름을 지어 가진 사람은 단종이 유일하다. 오류) 문단 전체를 수정할만큼 지식이 없어 그대로 두지만 세조는 이방원에서 이유, 철종은 이원범에서 이변으로 개명함. 따라서 세조가 끝까지 두글자 이름을 유지했다는 말은 틀림. 개인적으로 알기엔 원래 왕족도 두글자 이름을 가지지만 왕으로 등극할 때 피휘때문에 한글자로 개명하는 것으로 알고 있음. == 정통성 == 조선왕조의 역대 국왕 중 '''가장 완벽한 정통성을 갖춘 국왕'''. 적장자로서 최초로 왕위에 오른 조선의 왕은 아버지 [[문종(조선)|문종]]이지만 적장'''손'''으로 태어나 왕위에 오른 사람은 단종밖에 없다. 문종이 태어난 1414년에는 아직 큰아버지인 [[양녕대군]]이 세자였고 아버지인 세종은 [[충녕대군|충녕'''대군''']]인 상태였다. 그러나 단종이 태어난 1441년에는 아버지인 문종이 세자였고 할아버지인 세종이 왕이었다. 따라서 단종은 태어나자마자 '''원손-세손-세자-왕'''테크를 타고 즉위한 조선의 유일한 왕이다. 이후에는 이런 이상적인 적통 케이스가 하나도 없고, 왕조국가 사례를 통틀어도 이 정도의 적통은 매우 드물다. 세손 시절이 있었던 왕이 몇 명 있기는 한데, [[현종(조선)|현종]]의 경우 원손-세손 테크를 타긴 했지만 아버지인 [[효종(조선)|효종]]이 아직 봉림대군일 때 태어났으며, 봉림대군의 형인 [[소현세자]]의 아들들이 엄연히 있기에 [[인조]]의 적장손도 아니다. [[정조(조선)|정조]]나 [[헌종(조선)|헌종]]의 경우 아버지인 [[사도세자]]와 [[효명세자]]가 먼저 죽어 '원손→세손→곧바로 왕'의 테크를 탔다.[* 게다가 정조 같은 경우는 [[사도세자]]의 형 [[효장세자]]가 있고, 자신 역시 형 [[의소세손]]이 있기에 따지고 보면 [[영조]]의 2남의 2남이 된다. --[[콩라인]]--] 게다가 [[정조(조선)|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가 영조의 정실부인이 아닌 후궁 [[영빈 이씨]]의 몸에서 난 서자였고 자신 역시도 사도세자의 장남이 아닌 차남이었다. [[헌종(조선)|헌종]] 역시 아버지 [[효명세자]]가 젊은 나이에 죽어버려 세자테크트리를 밟지 못했다. 물론 정조나 헌종이나 정통성 문제야 하나도 없지만, 아버지(사도세자)나 할아버지(영조, 순조)가 서출이라는 아쉬움이 있어서 단종과는 처첩제 기반 신분제적 측면에서 수준이 다르다. 장자가 일찍 죽는 경우야 흔하던 시대이니 장자가 아닌 것은 문제가 없으나, 적자가 아닌 것은 보이지 않는 미세한 차별대우가 있었다. 단종의 할아버지 세종은 장자([[양녕대군]])[* 사실 [[양녕대군]]도 원칙적으로 장자는 아니다. 일찍 죽은 그의 형 3명이 태어나고 죽던 시기가 조선시대가 아니라 고려 시대 말이라서 기록이 없어서 그렇지[* 태종이 양녕의 장자됨을 확고히 하기 위해 고의로 기록 못하게 했다는 설도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태종이 결혼초에 자식 셋을 어릴때 잃어서 괴로워했었다는 언급을 한 기록이 있다. 그의 이전에 3명의 자식이 유산되거나 갓난 아기때 병들어 죽은 상황을 당한 것으로 간주된다. 과거에 일찍 죽는 아기가 많았다지만 의료나 위생 환경이 비교적 괜찮은 편인, 잘 나가는 양반집안에서 3명이나 아들이 죽는 것은 그렇게 흔한 건 아닌데, 양녕이 세자로서 깽판치고 다닐때도 태종이 빨리 세자 자리에서 안 자르고 안타까워했던 건 괜히 그런 게 아니라 4번째로 태어나 안 죽은 적자, 그야말로 계속 아들 잃고 피눈물로 낳은 아들이라 아기때부터 아빠엄마가 엄청나게 사랑하며 키운 정이 너무 깊었기 때문이다. 물론 조선건국 이후 생긴 왕조 실록 기록상 그때 죽은 자식들의 생년이나 이름 같은 기록이 없으니, 공식적으로 양녕이 장자인 걸로 되어 있는 건 사실이다.]는 아니나 어머니가 왕비인 적자[* 태종의 적3남]였고, 세종의 아버지 태종도 장자는 아니나 역시 적자[* 태조의 적5남]였다. 그러니 단종은 그야말로 고조 할아버지 태조때부터 첩의 피가 전혀 섞이지 않고 내려온 완벽한 적손이다. 이른바 '''적통 OF THE 대통'''인 셈.[* 물론 왕의 자손은 그냥 양반과 달리 서자여도 세자나 세손만 되면 정통성에 문제없는 것으로 간주한다. 사실 적통성과 정통성은 다르다. 왕이 안 될 경우 적자는 '대군', 서자는 '군'이라는 호칭차이만 있었다.] 이 적통의 피는 13대 [[명종(조선)|명종]]에서 끊긴다. 명종의 외아들 [[순회세자]]가 열네살에 요절하고 다른 후사를 보지 못해, 이복동생이자 아버지 [[중종(조선)|중종]]의 서7남인 [[덕흥대원군|덕흥군]]의 적3남인 [[선조|하성군]]이 (짧게 말해서 조카) 왕위를 이으니 이가 바로 선조다. 그야말로 적자(면서 적손)+장자(면서 장손)+원손+세손+세자+왕 경력이라는 순수 정통성 측면에서 순도 100% '''조선 역대 왕 중 절대최강.''' 게다가 [[계유정난]] 이후 실권을 다 뺏겼지만, [[상왕]]까지 밟았다. 이후 강등된 탓에 '노산군'[* 군호인 노산은 [[강원도]] [[평창군]]의 옛지명인 노산(魯山)에서 유래했다.]이라는 팔자에도 없던 군호까지 받았다. 더불어 사후 [[숙종(조선)|숙종]]대의 단종 복위 과정에서 노산대군이라는 대군호도 받았다. * 원래 세손, 세자, 왕 등은 따로 군호를 주지 않는다. 우리가 아는 [[효명세자]]나 [[사도세자]] 같은 호칭은 죽고 난 다음 붙여준 시호로 원래 세손, 세자는 동시대에 무조건 단 1명만 존재하기 때문에 정상적으로 직위를 유지하거나 계승받는다면 본래 이름과 자기 혹은 타인이 별명처럼 붙이는 자 말고는 다른 호칭이 없다. 일례로 [[양녕대군]]으로 알려진, 태종의 첫 세자인 이제도 본래 이름 말고는 따로 호칭이 없었고[* 아버지 태종은 정상적인 계승이 아닌 [[왕자의 난]]으로 중간에 왕세자가 되었기 때문에 왕손인 이제도 군호를 받을 수도 있었지만, 태종이 세자가 될 때 이제는 겨우 6살이라 군호를 받기에는 너무 어렸다.] 이제가 폐세자 되고 [[충녕대군]]이 세자가 되고 나서야 양녕대군이란 이름을 지어 받은 것이다. == 비운의 소년 왕 == 태어나는 날부터 그의 앞날을 보여주는 듯한 불길한 일이 있었다. 단종이 태어났다는 소식을 들은 할아버지 [[세종대왕]]이 기쁨에 겨워 2급 이하의 죄수를 모두 사면하는 대사면 교지를 발표했는데, 이 교지를 다 읽기도 전에 '''용상 근처의 큰 촛대가 땅에 떨어져 버렸다.''' 세종 역시 안 좋은 예감을 느꼈는지 그 촛대를 치워 버리도록 명했는데, 사흘 후 단종의 생모 [[현덕왕후|세자빈 권씨]]가 숨을 거두고 말았다. 태어나자마자 어머니를 잃은 것. >(전략) 교지를 읽기를 끝마치기 전에 전상(殿上)의 대촉(大燭)이 갑자기 땅에 떨어졌으므로, 빨리 철거하도록 명하였다. >ㅡ 《조선왕조실록》 세종 23년(1441년) 7월 23일 기사.[[http://sillok.history.go.kr/url.jsp?id=kda_12307023_001|##]] 이 세자빈 권씨는 이후 [[현덕왕후]]로 추존되어 소릉에 매장되는데, 단종 복위 운동이 실패한 화가 여기까지 미쳐 소릉이 강가로 이장된다. 이걸 다시 원래 자리로 옮겨야 한다고 주장한 인물이 [[생육신]] 중의 남효온. 일각에서는 [[현덕왕후]]가 단종 출산 후 사망하지 않았다면 대비가 되어 어린 나이에 임금이 된 아들을 잠깐동안이나마 [[수렴청정]]하여 보호했을 것이고, [[계유정난]]이라는 비극은 없었을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도 많다. 문종은 단종 이전에 2명의 아들을 보았으나, 1400년대 당시에는 유아 사망률이 높았고, 때문에 이 두 아들이 어렸을 때 죽어 단종이 문종의 유일한 아들이 되었다. 세종은 당시 세자(문종)가 어머니 [[소헌왕후]]의 3년상과 지나친 과로 때문에 건강이 나빠져, 만약 세자가 일찍 사망할 경우 [[수렴청정]]을 할 왕실 웃어른(대왕대비나 대비)이 없는 상태인데 세손(단종)은 너무 어리므로 여러 신하들에게 그를 부탁했고, 심지어 죽기 직전에 [[김종서#s-1|김종서]]에게는 군사를 이끌고 수도로 돌아오라는 명까지 내렸다. 문종 역시 [[김종서#s-1|김종서]] 등에게 세자(단종)를 부탁했을 정도로 너무 약한 왕실의 기반을 염려하고 있었다. 단종을 직접 키운 건 세종의 [[후궁]]인 혜빈 양씨였다. 단종이 막 태어났을 때 단종이 태어나기 얼마 전에 혜빈이 아이를 낳은 상태라 혜빈 양씨가 단종의 [[유모]]가 되었다. 혜빈 양씨는 얼마 전 태어난 자신의 아들을 제쳐두고 직접 단종에게 젖을 물렸다고 한다. 그리고 혜빈 양씨는 [[소헌왕후]] 사망 후 단종의 보호자로서 왕실에서의 힘이 상당히 강해졌다고 한다. 참고로 단종은 어릴 때 무척이나 총명했다고 한다. 총명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할아버지 [[세종대왕]]이 감탄했을 정도였다. 물론 세자나 세손에 대해서 총명하고 영특하고 하는 이야기는 정말 징그럽게 많이 찾아볼 수 있다는 점에서 언플일 수도 있으나, 황표정치 시절에도 할 말은 하는 모습을 종종 보이는 모습을 보아[* 물론 실록에 기록된 것을 보면 뭘 좀 해보려고 하긴 하네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 뭐 이거야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다.] 세간에서 말하는 "아무것도 모르는 나약하고 어린 왕"의 이미지는 아니었던 듯하다. 즉위할 때 나이가 12살이었으나 따지고 보면 [[성종(조선)|성종]]은 13살에, [[명종(조선)|명종]]도 12살, [[숙종(조선)|숙종]]은 14살에 즉위했고. 뒤로 가면 [[순조]]는 11살, [[헌종(조선)|헌종]]은 8살에 즉위한 걸 보면, 즉위에 있어서 나이는 큰 문제가 아니었다. 문제는 성년이 될 때까지 통치를 해줄 왕실의 확고한 후견인이 없었다는 것. 위에서 언급한 왕들은 모두 즉위할 때 왕실의 어른인 대비, 왕대비, 대왕대비 등이 살아 있었고, 그 중 숙종을 제외한 네 왕은 그 당시 제일 서열 높은 대비가 [[수렴청정]]을 했다. 아무리 가까운 왕족이라도, 어린 왕이 즉위했다고 함부로 움직였다가는 역모죄로 [[역관광]] 당하기 십상이다.[* 게다가 숙종의 경우에도 [[수렴청정]]을 안 했을 뿐이지, 즉위 당시 엄연히 모후인~~ 한 성깔하는~~ [[명성왕후]]가 멀쩡히 살아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단종의 할머니 [[소헌왕후]]는 아버지 [[문종(조선)|문종]]보다 먼저 사망했고, 어머니 [[현덕왕후]]도 단종을 낳은 직후 사망해, [[수렴청정]]을 할 사람이 없었다. 그 당시 세종의 [[후궁]]들 중에선 가장 지위가 높았던 혜빈 양씨가 자신의 아들들과 함께 단종을 보필하려 했지만, 수양대군이 문종의 후궁인 귀인 홍씨의 작위를 높이면서 수렴청정의 명분도 잃었다. 혜빈 양씨는 후에 단종 복위운동에 가담했다가 자식들과 함께 유배된 후 [[교수형]]에 처해졌다. 이 탓에 세종과 문종의 단종을 보호해달라는 유지를 받은 신하들의 힘이 강해지고 왕권은 약해졌는데, 이 때문에 문종 때부터 있었던 집현전 학자들과 김종서 등의 고관들 사이의 갈등이 더 벌어졌다. 이는 김종서 등이 왕권을 노골적으로 노리는 [[수양대군]]을 제대로 견제를 하지 못하고, 도리어 그의 세력이 확장되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문종이 수양대군의 행위를 미리 예방하지 못했다고 하나, 문종은 나름대로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했다. 신권을 강화해 왕족을 견제하고 믿을 수 있는 신하들에게 단종의 보좌를 부탁했다. 다만 새 왕비를 들이지 않아 사후 단종에게 든든한 후원세력을 만들어주지 못한 점에 대해서는 아쉽다는 평. 하지만 '''[[문정왕후]]의 경우를 보면, 계비를 들인다고 해서 꼭 후견인이 된다는 보장은 없다.'''[* 정확히 말하면 좋은 후견인이 될 보장이 없다는 거지, 후견인이 될 보장은 충분히 있다. 문제는 새로 들인 왕비가 아들을 낳은 경우, [[문정왕후]]처럼 단종을 제치고 자신의 아들을 왕위에 올리려 할 수도 있고, 아들을 낳지 못한다고 해도 친아들도 아닌 단종을 얼마나 보호해줄지도 의문이다. 실제로 [[후궁]]이기는 하지만 문종이 생전에 총애한 홍씨는, 단종이 아니라 수양대군의 편에 붙었다. 일단 '''결과적으로 후견인의 부재는 단종의 수명을 단축해버린 원인이 되고 말았다.'''] 다만 이건 문종의 계비가 아니라 단종의 '세자빈'을 들였어야 한다는 말이 와전된 것일수도 있다. 실제로 학자들은 문종이 세자빈 간택을 서둘렀다면[* 특히 빵빵한 가문에서 골랐다면], 수양대군의 쿠데타가 쉽지 않았으리라 보고 있다. 수양대군을 좀 더 견제했어야 한다는 평가가 있다. 애초에 '''문종 본인의 왕권이 워낙 막강했던데다, 문종은 훗날 사극에서 보여주는 유약한 이미지와는 전혀 거리가 멀었다.''' 이 시기 [[수양대군]]은 큰형에게 찍소리도 못하고 버로우타야만 했다. 문종 실록을 보면 수양대군은 사극에 나온 것처럼 전횡을 일삼는게 아니라 열심히 문종의 비위를 맞추고 다녔으며 문종의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형제 간의 우애도 굉장히 돈독했다.[* 이것이 수양대군의 가식이었을지라도 문종의 입장에선 자신을 깍듯이 형으로 모시며 한편으론 정겹게 구는 동생을 무작정 의심하고 견제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사극처럼 문종이 수양대군을 두려워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애시당초 이런 주장이 나온 배경은 왕과 비부터 [[인수대비]]까지 방송사 불문하고 '''사극들이 죄다 문종을 병약하고 힘없는 임금으로 그리고 문종 때부터 수양대군이 설치고 다니는 것으로 왜곡'''한 탓이다. '''수양대군의 세력은 문종 때는 말할 것도 없고 단종 때도 경쟁세력들 중 가장 약한 축이었다.''' 그래서 설마 쿠데타를 일으킬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했고, 수양대군의 세력내에도 주저하는 이들이 있어 수양대군이 직접 앞장섰다. [[계유정난]]이 성공한 건 이런 인식 때문에 다들 방심하고 있었던 덕이 컸다. 솔직히 이렇게 비정상적인 형태로 반란을 일으키지 않았다면, 수양대군의 쿠데타는 실패로 끝났을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달리 말하면, 수양대군의 세력이 정상적으로 싸우기에는 매우 약했다는 것을 증명한다. 실제로 당시에 수양대군은 김종서, [[안평대군]]에 이어 제3당의 영수에 불과했다. 그렇기에 문종의 입장에서 수양대군은 별로 신경 쓸만큼 대단한 인물이 아니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김종서나 안평대군도 권력은 갖고 싶어했지만, 보위를 노리는 사람들은 아니었기에 문종 입장에서는 그리 큰 걱정거리가 아니었을 것이다. 하여튼 [[계유정난]] 때 단종의 보호자이자 지지자인 사람들 대부분이 사망하거나 유배당했고, 약 1년이 지난 후에 수양대군의 세력은 단종이 양위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기 시작했다. 결국 단종은 수양대군에게 양위하고 상왕으로 밀려났다. 그 후, 그를 복위시키려는 [[사육신]] 사건이 일어나자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영월로 유배된다. 단종은 [[사육신]] 사건 때 찾아온 [[성삼문]]에게 칼을 내려주어 지지를 표명했다. 하지만 계획은 그대로 물거품이 되고 말았고, 단종이 자신에게 칼을 주었다는 말을 성삼문이 한 순간, 사실상 단종의 운명은 결정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단종을 [[영월군|영월]]로 압송하는 임무를 수행한 금부도사 왕방연이 이때의 심정을 남긴 시조가 유명하다. 그런데 이 왕방연이란 인물도 좀 복잡한 것이, [[연려실기술]]에는 이 시조가 단종을 영월로 압송한 금부도사가 지은 시조로 나오는데, 숙종실록에는 바로 이 왕방연이란 인물이 '''단종에게 [[사약]]을 내리는 임무 역시 수행한 것으로 나온다.''' 사실이라면 [[흠좀무]]. 그 때문인지 이 숙종실록의 기록에서도 그렇고 야사에서도 그렇고, 사약을 내릴 당시 차마 사약을 올리지 못하고 엎드려 있기만 했다고 전해져 내려온다. >천만 리 머나먼 길에 고운 님 여의옵고 >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 안 같아 울어 밤길 예놋다 단종에겐 장자 계승의 원칙과 세종이 하도 신경을 쓴 탓에 그를 지지하는 이들은 많았다. 혜빈 양씨와 그녀의 아들들의 세력, 그 유명한 김종서, [[황보인]] 등 세종의 고명대신들이 있었고 그 밖의 세종의 아들들 중 단종을 지지하는 이는 많았다. 세종의 6남인 [[금성대군]]은 단종을 복위시키려다가 발각되었지만 그래도 왕족이라서인지 귀양을 갔다가 나중에 처형되었다. 비슷한 이유로 단종이 총애하던 문종의 부마 전 형조판서 영양위 [[정종(부마)|정종]](鄭悰)([[경혜공주]]의 남편)도 마찬가지로 귀양보냈다가 역모가 들통나 [[능지처참]]되었다. 거꾸로 수양을 지지하는 세종의 아들들도 많았다. 대표적인 것이 세종의 4남이자 [[양녕대군]]을 닮은 걸로 유명한 임영대군이다. 그리고 양녕대군과 세종의 후궁인 신빈 김씨의 아들들도 이복형 수양을 지지하고 있었다. 그래도 거의 고립되어 있던 [[소현세자]]보다는 몇 배나 정치적으로 유리한 입장이었다. 큰 실정을 한 적도 없고 (아무것도 못 하고 숙부에게 왕위를 내놓은 것이 실정이라면 실정이지만) [[광해군]]이나 [[연산군]]처럼 적이 많았던 것도 아니라서 [[사육신]], [[생육신]] 같은 이도 있다. 다만, 문제는 이 세력이 너무 많았고 각각의 의도를 가지고 있어서 하나로 뭉쳐진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특히 김종서, 황보인 등의 고명대신들이 정승정치를 주도하면서 왕실들과 [[집현전]] 학자들은 모두 이에 대한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세조의 [[계유정난]]은 이들 고명대신들의 기존세력과 경쟁자인 안평대군을 같이 제거하려한 것이었고, 집현전 학사들과 [[안평대군]] 세력에 속하지 않은 왕족들은 적어도 이를 방관했다. 괜히 정난공신에 집현전 학자들이나 왕실인물들이 이름을 올리고 있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수양대군이 사실상 단종을 폐위하고서 즉위한 거나 마찬가지고, '''이 과정에서 왕권강화 시도'''를 했다는 것이었다. 이에 불만을 품은 이들은 세조를 대체하거나 혹은 세조 사후에 어린 세자인 후일의 예종 대신에 단종을 옹립해야 한다는 의도를 품고 복위운동을 벌였다. 어쨌든 [[계유정난]] 이후, 단종도 숙부 수양대군이 전권을 행사하는 자신의 처지가 한스러웠는지 [[경복궁]] 자미당 난간을 보더니 서서 "'''[[세종대왕]]께서 살아 계셨다면 나에 대한 사랑이 어찌 적겠는가'''?"라며 탄식하자 단종을 따르던 시종들이 모두 슬피 울었다. 자미당에서 할아버지 세종을 떠올린 이유는, 세종이 말년에 자미당에서 거처했었기 때문. 이를 전해들은 수양대군과 그 부인 [[정희왕후|윤씨]]도 울었다고 실록의 이 날(1454년 11월 25일) 기록은 전한다. 그러나 단종이 세종을 떠올리고 울었던 것은 수양에게 핍박받는 자신의 처지 때문인데, 그걸 모를 리 없는 수양과 그 부인이 같이 울 리는 없다는 점에서 정치적 야심을 무럭무럭 키우고 있던 무서운 어른들이 흘리는 [[악어의 눈물]]이었을 가능성이 굉장히 높다. == 비운의 죽음과 그 후 == 유배된 이후 고달픈 생활을 하다가 반정 세력들이 재반정을 두려워하여 죽이고 만다. 세조실록에는 "노산군이 장인 송현수와 숙부 [[금성대군]]의 죽음을 듣자 슬픔을 못 이겨 목을 매고 자살하였고, 후에 예를 갖춰 장사지냈다."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승정원 일기나 이후 시신과 무덤을 방치해 둔 것, 그리고 후대 왕들의 기록을 보면 타살이 확실해 보이고, 아마도 [[사약]]을 거부한 후 타살로 추측된다. 선조실록에 [[기대승]]이 경연 때 단종 사망 당시 영의정이던 [[정인지]]를 까면서 금부도사가 [[사약]]을 주었다고 말하고 그 근거로 사약기록이 [[의금부]]에 남아있고 당시 사형장면을 현지인이 기록하였고 이것을 관찰사가 보았다는 것 등을 증거로 내세운 것으로 보아, 사약을 받은 것은 확실해 보인다. 이후 숙종실록 또는 야사에서 [[사약]]을 가져온 금부도사 왕방연이 단종에게 차마 말을 꺼내지 못하고 엎드려 울기만 하자 옆에 있던 하인이 대신 목을 졸라 죽였다고 나온다. 숙종이 직접 언급한 말로, 진실이거나 당시 가장 잘 알려진 전설로 보인다.[* 실제로 [[사약]]을 받은 사람을 직접 죽이는 것은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었다. 왜냐하면 사약을 먹어도 잘 안 죽었기 때문. 사약의 약발이 잘 받지 않거나 반항하는 이들도 존재했다. 이들은 결국 활줄을 풀어서 목을 졸라 죽여야 했다. 또한 그 하인은 칠공에서 피를 뿜으며 사망했다는 이야기가 숙종실록에서 숙종의 언급 중에 나온다.] 참고로 이 설에 따르면 2가지 버전이 있는데 하나는 정당한 왕인 자신이 사약을 마실 수는 없어서 자신은 방에 들어가고 활줄을 자신의 목에 감고 밖으로 내어 하인에게 당기라고 했는데 그 뜻을 몰랐던 하인이 당기자 사망했다는 것이 한 가지. 다른 하나는 단종이 사약을 마시지 않고 버티자 단종을 살해하면 상을 받으리라 생각한 한 하인[* 혹은 면천을 노린 천인이었다고도 함]이 단종의 목을 졸라버렸다는 것이다.[* 그 뒤 그 하인도 천벌을 받았는지 피를 토하고 급사한 장면이 [[맹꽁이 서당]]에 등장하기도 한다.] 어느 쪽이든간에 죽은 뒤에도 중앙관리가 아닌 지방 아전인 엄흥도가 몰래 매장했고 무덤 크기도 작고, 위치도 단종의 무덤임을 숨기기 위해 다른 무덤이 많은곳에 묻은 것으로 보아, 실록의 "예로서 장사지냈다"라는 것은 사실이 아니고, 죽은 후 금성대군과 같이 왕실 족보에서도 삭제당한 것으로 보아 타살이 거의 확실하다. 게다가 진짜 예로서 장사지냈다면 중종 때까지 묘의 행방을 알 수 없었다는 게 말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기묘하게도 [[중종(조선)|중종]]은 [[임진왜란]] 때 능이 도굴되어 시신이 행방불명되어 다시 찾지 못했다. 실제로 몇몇 사극에서는 그런 장면이 나왔다. 한편 한양에서 영월까지 따라와 그를 모셨던 [[궁녀]]들은 단종이 세상을 떠나자 모두 강물에 뛰어내려 자결했다. 훗날 숙종대에 단종이 복위되면서 그 궁녀들을 제사지내는 단도 만들어졌다. 흔히 영월 청령포에서 최후를 맞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사실 청령포에는 얼마 머물지 않았고, 여름이라서 홍수의 위험이 있다는 이유로 곧 영월 관아 내의 객사로 옮겼다. 그래서 단종은 영월 관아의 객사에서 최후를 맞는다. 시신 수습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이야기가 전해진다. 우선 영월의 호방 엄흥도(嚴興道)가 강물에 떠도는 단종의 시신을 수습하여 몰래 묻었다는 이야가 있다. 당시 나이가 많아 언제 죽을지 몰랐던 노모를 위해 준비해둔 관과 수의를 썼다고.[* 이때 주변 사람들이 후환을 두려워해 그를 말리자 엄흥도 왈 '''"옳은 일을 하고 화를 당하는것은 괜찮다."'''] [[생육신]] 중 하나였던 조려가 단종의 죽음을 전해듣고 영월로 달려가 시신을 수습했다는 말도 있다. 이 때 강물이 불어서 영월로 건너가지 못한 조려가 통곡을 하자 [[호랑이]]가 나타나서 등에 태워 강을 건넜다는 설화도 존재한다. 당시에는 당연히 단종의 추모가 공식적으로 금지되었던지라 후환이 두려웠던 엄흥도는 매장을 마친뒤 그의 가족들을 데리고 그 길로 영월을 떠나 자취를 감췄다고 한다. 실제로는 인근 주민들이 엄흥도 일가족이 어디에 사는지 알고 있었으나 아무도 관에 고하지 않았다고.[* 숙종 때까지 현지 주민들은 단종이 묻힌 무덤을 '왕릉'이라고 부르면서 어린 아이들도 함부로 봉분 위에 올라가 노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덕분에 그는 단종 복위 다음 해에 공조좌랑, 영조때 참의와 참판을 거쳐 순조 33년(1833년)에는 [[공조판서]]로 추증되었다. 육부중에서도 공조판서로 추증되었던 것은 왕릉의 조영을 담당하는 부서가 공조이기 때문이라고 추측된다. 엄흥도가 한 일은 약소하긴 해도 단종의 묘는 어찌되었든 왕릉이니까. 그리고 마침내 고종 14년(1877년)에 충의공이란 시호와 함께 '의금부사 오위도총부 도총관'이란 정승급 벼슬에 추증된다. 엄흥도가 원래 아전 정도의 미관말직이었던 것을 고려하면 단종의 최후에나마 그 시신을 수습한 충의를 후세가 얼마나 높게 평가했는지 알만하다. 세조가 살기등등하던 시절이었으니. 궁중의 금지옥엽으로 태어나 이렇게 비참하게 생을 마감하고 왕실 족보에서도 제외되고 없는 단종의 [[제사]]를 왕실에서 지내줄 리는 없었다. 대신 [[생육신]]을 포함한 여러 충신이나 단종의 살아남은 일부 혈육들이 제각각 제사를 모시기는 했다. 공식적으로는 단종의 조카인 정미수[* 단종의 누나 [[경혜공주]]의 아들.]와 그 자손들이 단종의 제사를 지냈으며 이것은 어디까지나 몰래 제사지내거나 사가에서 치르는 제사였을 뿐이다. 단종이 죽은 영월 일대에서는 민간에서 단종이 죽고 태백산의 산신령이 되었다는 믿음이 퍼진다. 실제로 아직까지도 이 일대의 무속인들은 '태백산신 아기대왕'을 섬기는 이들이 많은데, 이게 바로 단종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일대에선 산신제를 올리면서 [[태백산]]신제라는 이름으로 치렀는데 특기할만한 점은 이 태백산신제에서는 소를 잡아서 그 고기를 올렸다는 점이다. 당시 소는 농업의 근간이라하여 함부로 잡지 않았고 소를 잡아 그 고기를 쓰는 제사는 '''왕에게만 올리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민간에서 소를 잡는 제사는 태백산신제가 유일하다고 하는데 이 산신제의 대상이 단종이라는 것을 고려하면 사실상 민간에서 산신령에 대한 민간신앙으로 가장하여 단종에게 왕의 예로 제사를 올린 것으로 추측된다. 현대에도 20~30년 전까지만 해도 소를 팔아 대학을 보낸다든가 할 정도로 소는 귀중한 재산이었고 전형적인 농업사회이면서 농업생산력이 낮았던 [[강원도]] 일대에서는 더더욱 귀한 재산이었다. 이런 제사가 '''매년''' 군 관아뿐만 아니라 시골에서 리단위로 이루어졌는데, 가령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299783&cid=40942&categoryId=32175|녹전리서낭제]] 등이 있다.[* 이곳의 경우 원래 서낭당이 둘이었는데, 한 곳이 새마을운동 때 청년회에 의해 불타 없어졌다고 한다. 그런데 이후 서낭당을 없앤 청년회 일원들이 하나둘 죽어나가고, 주민들의 신앙은 더 두터워졌다. 그 서낭당의 신목은 마을 입구, 녹전중학교 앞길에 그대로 남아있다. 뱀발로 나머지 한 곳의 서낭당도 아직 남아있는데, 당시 마을 입구에 있던 서낭당이 불타는 걸 보고 충격먹은 당시 어르신들은 이것까지 없어지면 정말 큰 해가 내린다고, 기거까지 하며 사수해냈고, 그것이 전해져온다.] 태백산신제는 상당히 규모가 큰 것이어서 영월만이 아니고 인근 지역에서 이 산신제를 보러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관련된 지명도 남아있다. 이것은 지금도 이어져서 [[영월군]]에서 사육신제와 함께 매년 지내고 있다. 한동안 그의 폐위와 죽음은 정치적인 금기가 되었다. [[연산군]]이 일으킨 [[무오사화]]의 계기도 이와 관련되어 있었다. http://hanja.pe.kr/phi_1/p1_img/king6-01.jpg [[숙종(조선)|숙종]] 7년(1681년) 노산대군으로 승격 된 후 숙종 24년(1698년) 단종으로 복위/추존되었다. 무력으로 폐위된 왕이기 때문에 단종릉에는 다른 왕릉과는 달리 무인석이 없다.[* 숙종은 이런 분야에 관심이 많았는지, 묘호가 없던 2대 임금 [[정종(조선)|정종]]도 당시까지는 명에서 준 시호인 공정왕으로 불리다가 이때 정종이 된다.] 복권시킬 때의 명분은 단종이 강등되고 사사된 것은 [[사육신]]의 설레발 때문에 얽혀들어간 것이지 본인의 허물 탓이 아니며, 세조도 본래 단종을 죽일 생각이 없었으니 단종을 복위시킨다고 세조에게 누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논리. 단종의 능호는 [[장릉(영월)|장릉]](莊陵)으로 여러 조선왕릉과는 달리 [[경기도]]가 아닌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에 위치한다. 참고로 이전 버전에는, 장릉이 강원도에 있어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서 제외되었다고 설명했는데 그렇지 않다.[[http://whc.unesco.org/en/list/1319/multiple=1&unique_number=1613|#]] 참고로 [[북한]]에 있는 태조의 왕비 [[신의왕후]] 한씨의 제릉, 정종의 후릉, 그리고 왕릉의 제식을 갖추지 못한 연산군묘와 광해군묘는 세계유산이 아니다. 신기하게도 장릉 주변의 [[소나무]]는 마치 절을 하듯 장릉 방향으로 굽어져 있다. 정말로 장릉에 가면 볼 수 있다. 특히 능역 근처에 가면 단종의 능을 향해 유난히 기울어진 소나무가 한그루 남아 있는데, 이 소나무를 '충절송'이라고 부른다. 살아 생전에 노산군으로 강등되었기 때문에 [[종묘]] 신위에서도 빠져있었고 왕실족보에서도 빠져있었다. 그러나 [[숙종(조선)|숙종]]이 추증과 복위를 승인함에 따라 뒤늦게 공식적으로 [[종묘]] 신위에 포함되어 역대 선대왕의 신위와 나란히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반정으로 폐위된 [[연산군]]과 [[광해군]]은 [[종묘]] 신위에서 제외되어 신위가 모셔지지 않았다. == 그 외 가족들 == 단종이 양위한 건 15세, 사망했을 땐 17세였으므로 결혼하지 못했던 것으로 오해하기 쉬운데, 결혼은 했다. 강제로 했지만. 단종의 아내 송씨는 후에 [[정순왕후 송씨|정순왕후]]라는 시호를 받았다. 그녀는 장수해서 [[중종(조선)|중종]]의 치세 때까지 살아 있었다.[* 무려 82세까지 살았다.] 자세한 건 [[정순왕후 송씨]] 항목을 참고. 야사에 따르면 단종의 친누나 [[경혜공주]] 또한 남동생의 폐위 과정에서 휘말려 갖은 불운을 겪었는데, 이때 남편인 영양위 정종은 대역죄인으로 능지처참에 처해지고 그녀는 노비로 전락하여 순천의 관비생활을 하기도 했다.[* 연려실기술에는 순천, 순암집에는 장흥으로 표기되어 있다.] 그나마 이를 안쓰럽게 여긴 세조의 중전 [[정희왕후]]의 배려로 경혜공주의 아들인 정미수와 경혜공주의 딸은 면천될 수 있었다. 정미수는 궁중에서 자라 후일 [[성종(조선)|성종]]이 되는 자을산군과 친분을 쌓게 되었는데, 이 덕에 15세에 돈령부 직장에 오르고 형조정랑, 선전관 등의 벼슬자리를 거쳐 나중엔 [[중종반정]]에 공을 세워 정국공신에까지 오르게 된다. 실록에 따르면 [[세조(조선)|세조]]의 엄명에 따라 그리고 [[예종(조선)|예종]]에게도 당부하여 [[경혜공주]]와 [[정미수]]의 경우, 연좌시키지 말도록 전교를 한 기록이 있고 2012년 분재기(자세한 것은 [[경혜공주]] 참조)에서 볼 수 있듯이 [[공주]] 신분에서 벗어난 적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전라도 광주로 귀양가거나 남편의 죽음은 실제. 게다가 남편의 죽음으로 [[비구니]]가 되어 몹시 가난하게 살았다고 한다. [[경혜공주]] 본인도 이때 노비와 집을 하사받고 사실상 면천되었으나, 공주로 복위된 것은 [[영조]] 대에 이르러서야 가능했다. 단종은 어머니인 [[현덕왕후]]가 자신을 낳고 3일만에 죽은데다, 아버지인 문종이 죽고 즉위한 뒤에는 후일 세조가 되는 [[수양대군]]이나 [[안평대군]], 그 외의 권신들에게 눌려 살았기에 자주 이 친누이의 집을 찾았다고 한다. 아무래도 의지할 사람이 없는 궁궐보다는 그래도 친누나와 매형 정종이 있는 곳이 더욱 편안하게 느껴진 모양. 게다가 경혜공주의 집은 아버지인 문종이 직접 신경을 써서 만들어 준 집이니 더욱 각별하게 여겼을 법 하다. [[계유정난]]이 일어났던 날 밤에도 단종은 경혜공주의 집에서 묵고 있었다. [[공주의 남자]]에서도 이를 반영하여, 단종이 누이의 병문안을 위해 경혜공주의 집에 방문한 날 [[계유정난]]이 벌어진다. 한편 단종의 삼촌이자 세조의 동생이기도 한 [[금성대군]]은 [[계유정난]]에 반발, 단종 복위 운동을 도모하다 발각되어 본인을 포함하여 관련자들은 물론 해당 지역의 백성들까지 모조리 멸절당하기도 하였다.'''(정축지변)'''([[피끝마을]] 항목 참조.) == 전설 == [[파일:attachment/ekswhdtpwh.jpg]] [[KBS]] <[[역사저널 그날]]>에서. 억울한 죽음 때문에 민중의 동정을 받았는지, 그의 떠도는 혼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전해지며 무가에서 모시는 신 중 하나이기도 하다. 한국 무속에서 신이 되기 위해서는, 일단 원한을 가지고 죽어야 한다.([[남이]], [[최영]], [[임경업]], [[사도세자]] 등) 아니면 능력이 만렙이거나 백성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거나('''[[이순신]]''', [[박문수]] 등). === 추익한 전설 === || [[파일:조선단종.jpg|width=550]] || || 영월 보덕사 산신각 외벽에 그려져 있는 탱화 중 하나. || 한성부윤 관직을 지냈으며 나이들어 은퇴한 후에 고향에 낙향해 있던 추익한이라는 이가 영월에 유배 온 단종에게 [[머루]]를 바치는 등, 단종이 친구처럼 꽤 가까이했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날, 평소처럼 [[머루]]와 여러가지를 준비하여 단종이 유배된 곳으로 가는데, 강가에서 [[백마]]를 타고 있는 단종을 만났다. 그런데 단종은 서민복이 아닌 '''[[곤룡포]]'''를 입고 있었다. 단종은 왕에서 강등되어 노산군이 되었으니 왕의 옷인 곤룡포를 입을 수 없다. 이에 놀란 추익한이 꿇어 엎드리며 이게 어찌 된 일이냐고 여쭈었더니, 단종은 간단히 "[[태백산]]으로 가는 길이오."라고 대답하더니 사라졌다. 추익한은 불안한 마음에 단종의 거처로 달려갔지만, 단종은 사약을 받고 죽은 후였다. 추익한은 울면서 단종의 환상을 보았던 강가로 달려가서는 거기서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이 때 추익한의 나이는 75세였다.[* 태백산 산신각에 걸려 있는 단종의 초상화가 바로 이 말을 타고 가는 단종에게 머루를 바치는 그림.] 이 때문에 추익한은 사후에 벼슬을 하사받았으며 이에 유래하여 단종은 민간신앙에서 태백산의 산신령으로 여겨진다. 덧붙어 단종복위를 꾀하다 죽은 금성대군은 소백산의 산신령이라고.[[http://www.oneclick.or.kr/contents/nativecult/area09.jsp?cid=66262|#]] 하지만 단종 및 세조 때 한성부윤 중 추익한이라는 사람은 없다. 전설은 전설일 뿐. === 엄흥도 전설1 === 단종이 세상을 떠난 이후 영월부사가 부임하는 날에 급사하는 일이 연이어 일어났다. 때문에 영월로 부임하려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 영월은 폐읍이 될 지경에 이르렀다. 이에 한 대담한 사람이 영월 부사를 자청하여 부임하였다. 부임 첫 날에 의관을 정제하고 앉아있는데, 어디선가 찬바람이 불더니 익선관에 곤룡포를 입은 소년 왕이 신하들을 거느리고 나타났다. 신임 부사가 곧 단종임을 직감하고 부복하니, 단종은 "내가 죽을 때 목을 조른 활줄이 아직 남아있어 목이 갑갑해 그것을 풀어달라고 하려고 왔는데, 지금까지의 영월 부사들은 겁이 많아, 나를 보자마자 쇼크사했다"는 것이다. 신임 부사가 단종의 시신이 어디 있는지를 묻자, 단종은 "엄흥도가 알 것"이라는 말을 남기고 단종은 홀연 사라졌다. 다음 날 부사가 호장 엄흥도를 불러 전날의 이야기를 해주자, 엄흥도는 자신이 단종의 시신을 수습했다는 사실을 밝힌다. 역사 기록이나 설화 양쪽 다 엄흥도가 단종을 장사지낸 후 자취를 감췄다고 하므로 이건 말이 맞지 않는데, 설화의 다른 버전 중에는 꿈에서 단종이 영월부사에서 엄흥도를 찾아가라는 말을 듣고 찾아갔다는 내용도 있다. 단종의 무덤을 파보니 과연 활줄이 목에 얽혀 있어 활줄을 푼 뒤 다시 묻고 정중히 제사 올렸다고 한다. 그 후 영월부사가 급사하는 일은 없어지게 되었다. 이 이야기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영월의 관리들이 여럿 죽는 일이 벌어졌는데 박충원이라는 사람이 영월 군수로 부임한 뒤 제문을 지어 단종의 넋을 위로했고 그 뒤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선조수정실록 14년 2월 1일 7번째 기사)[* 참고로 이 이야기는 [[맹꽁이 서당]] 1권에서도 등장한다.] === 엄흥도 전설2 === 다른 이야기도 있다. 엄흥도와 그의 아들이 단종의 시신을 수습해 매장할 곳을 찾아 헤맸으나, 눈보라가 내리치는 엄중설한이라 땅이 모두 얼어 붙어 무덤을 파는 일은 불가능해 보였다. 그 때 어디선가 [[노루]] 1마리가 홀연히 나타나 눈밭에 앉아 잠시 쉬고 가니, 그 눈 녹은 자리를 파 단종의 시신을 묻었다고 한다. 노루가 눈밭에서 쉬고 갔을 리 없겠으나, 약관도 채 되지 않아 권력다툼에 의해 짧은 생을 마감한 소년 왕과 눈보라 치는 설원의 갸날픈 노루 1마리는 어째 서로가 닮은 이미지가 아닐까 한다. 훗날 복위된 단종의 왕릉을 이장하기 위해 조정에서 지관을 보내어 장릉의 지세를 살폈는데 실제로 가본 지관들은 엄흥도가 임시방편으로 모셨던 그 자리가 이미 천하길지라는 것을 알고 이장하지 않고 묘제만 왕릉의 격식에 맞추어 고쳤다고 한다. === [[현덕왕후]] 전설 === 단종 본인에게 해당되는 일은 아니지만, 단종을 폐위시켰던 [[세조(조선)|세조]]는 이후 [[현덕왕후]]의 유령에 시달렸다고 한다. 세조는 꿈 속에서 현덕왕후(문종의 비, 단종의 어머니)가 뱉은 침을 맞았고, 이 때문에 그 이후로 침 맞은 자리를 시작으로 온 몸에 종기가 생겼으며 세조의 장남 [[의경세자]]는 큰어머니(현덕왕후)의 유령에 시달리다 죽었다. 다만 이 내용은 야사이고, 정사의 기록에서는 [[의경세자]]가 단종보다 먼저 죽었다. [[왕과 비]]에서는 "꿈에 형수님이 피를 흘리며 나타나서는 '네놈이 내 아들을 죽이려 하니 본보기로 네 아들을 데려간다'고 말했다"는 세조의 대사를 통해 정사와 야사를 적절하게 섞었다. 자세한 내용은 [[세조(조선)|세조]] 항목 참고. === 영월부사의 고뇌 === 단종이 유배된 후 때때로 단종이 인근 정자에 나아가 경치를 구경하곤 했는데, 이를 영월부사가 사사건건 간섭하며 괴롭혀서 단종이 괴로운 마음에 그만두었다. 그런데 이후로 영월부사가 외출할 때마다 어디서인지 모르게 돌팔매가 계속 날아왔다. 단종을 동정하던 인근 주민들이 괘씸한 마음에 부사에게 던진 것이었는데, 그렇다고 단종에게 잘해줬다가는 조정에서 벌을 받을 수도 있어서 사람들이 영월부사 자리를 매우 어렵게 여겼다. 또 그렇다고 단종을 괴롭히자니 민중의 시선이 싸늘하고... === 정미수 전설 === 단종의 조카인 정미수의 후손을, 단종의 혼령이 혼인을 맺어줬다는 야사가 있다. 정미수의 후손들은 대대로 단종과 [[정순왕후 송씨]]의 제사를 지켜왔는데, 정효준의 대에 이르러서는 벼슬도 하지 못해 가세가 매우 기울었다. 정효준은 3번이나 결혼했지만, 부인들이 모두 일찍 죽고 자식도 남기지 못해 늙은 홀아비로 살아가는 비참한 처지였다. 그나마 부사(府使)를 지낸 친구 이진향과 교류하며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 하루는 정효준과 이진향이 함께 장기를 두며 이야기를 나누는데, 갑자기 정효준이 이진향에게 "자네의 딸과 결혼해 자네의 사위가 될 수 없겠나"라고 질문했다. 이에 이진향은 "황당한 일을 다 본다"며 단칼에 거절해 버렸다. 그런데 그날밤 이진향의 꿈 속에 단종이 '''국왕'''의 모습으로 나타나, "정효준과 너의 딸을 결혼시켜라"라고 명했다. 이진향은 꿈 속에서는 그리하겠다고 했지만, 쉽게 결정하기 힘든 일이라 부인과 상의했다. 당연히 부인은 "가난뱅이 홀아비와 딸을 결혼시킬 수 있냐"며 거절했다. 그런데 그 다음날 밤 꿈속에서 다시 단종이 나타나 "왜 나의 명령을 따르지 않느냐"며 부인에게 곤장을 때렸고, 결국 정효준의 청혼을 수락해야 했다. 그런데 그 이후, 정효준도 "사실 나 역시 꿈 속에 단종이 나타나 '이진향의 딸과 결혼하라'고 명했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한 것"이라고 토로했다. 결국 정효준은 이진향의 딸과 결혼했고, 이후엔 아들들을 낳아서 모두 높은 벼슬을 하고, 정효준 역시 높은 벼슬을 하여 부귀영화를 누렸다는 이야기다. === 의미 === 위의 야사나 민담들도 그렇고 전설도 그렇고 단종은 조선 왕 중에서 이런 이야기들을 많이 남긴 왕인데, 이것은 그만큼 단종의 생애가 민중들의 동정을 받았고, 세조 일파가 얼마나 민중들에게 미움을 받았는지를 시사하는 예라고 할 수 있다. 숙종 때 복위를 논할 당시에도 "단종의 일을 안타깝게 여기지 않는 백성이 없다."라는 말이 나오는 것으로도 보아 단종에 대한 동정심은 사림과 백성을 막론하고 광범위한 여론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아직도 [[강원도]] [[영월군]]에서는 해마다 제사를 지내며, 단종제와 사육신제는 영월의 명물로 홍보되고 있다. == 노산군일기와 단종실록 == 단종이 즉위하였던 시절 단종의 행적과 그 시절 왕실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기록한 실록이었는데, 단종이 수양대군의 쿠데타로 폐위되고 노산군으로 강등되면서 당초에는 단종실록이 아닌 '''노산군일기'''로 격하되어 기록되었다. 그리고 후에 단종 이후에도 10대 왕이었던 [[연산군]]과 15대 [[광해군]]이 반정으로 축출되고 왕권자격까지 상실하면서 당시까지는 연산군, 광해군과 함께 실록이 아닌 '''일기'''로 기록되는 임금이 되기도 하였다. 단종과 함께 국왕으로 인정이 좀 애매하였던 정종의 경우는 '''공정왕실록'''이라는, 뭔가 좀 애매하기는 하나 어쨌든 실록의 형태로 기록되어 전해졌다. 그러나 19대 임금 [[숙종(조선)|숙종]]이 선대왕 단종 추존을 승인하게 되면서 노산군일기가 단종실록으로 승격하게 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후로 실록이 아닌 일기로 기록되는 임금은 연산군과 광해군만 남게 되었다. * 참고: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분류:조선의 왕]] == 창작물에서 == 1990년 KBS 드라마 "파천무"에서는 [[장덕수]]가 1994년 KBS 드라마 "한명회'' 와 1998년 KBS 드라마 [[왕과 비]]에서는 [[정태우]]가 단종역으로 분하였고[* 아역시절 정태우는 사극에서 누군가의 아역이나 어린 나이에 요절하는 인물을 주로 연기하는 사망전대 담당 배우였다.] 2011년 KBS 드라마 [[공주의 남자]]에서는 배우 [[노태엽]]이 단종 역을 맡았다. 2011년 JTBC드라마 [[인수대비(드라마)|인수대비]]와 영화 [[관상(영화)|관상]]에서는 배우 [[채상우]]가 단종 역을 맡았다. 대체역사소설 [[아침의 나라]]에서는 조부 세종에 의해 확인된 [[홋카이도]]인 북해도에서 쿠릴과 얄류산 열도를 거켜 확인된 북아메리카에 원 역사대로 권좌에서 내려왔으나 공신들과 같이 쫓겨가서 세워진 동조선의 첫 군주로 기록. 이후, 북아메리카 핵심지역들을 동부를 빼고, 장악하면서 후에 중국을 능가할 대국으로서의 기반 다지기와 만주 공략을 위해 빠르게 왕세자에게 물려주고, 상왕으로서 개입을 하게 된다. ~~묘하게 할아버지를 닮은 통치...~~ == 관련 항목 == * [[계유정난]] * [[단종애사]] * [[사육신]] * [[생육신]] *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각주]Load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