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변경문서 보기수정 내역 목종(고려) (버전 비교) [Include(틀:다른 뜻1, other1= KBS 대하드라마 〈고려거란전쟁〉의 등장인물, rd1=목종(고려거란전쟁))] [include(틀:역대 고려 국왕)]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e6bd0e, #f9d537 20%, #f9d537 80%, #e6bd0e)" {{{#670000 '''목종 관련 틀'''}}}}}}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include(틀:역대 고려 왕태자)] ---- [include(틀:고려의 왕자/국조 ~ 문종)] ---- [include(틀:고려사)]}}}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e6bd0e, #f9d537 20%, #f9d537 80%, #e6bd0e); color: #670000" '''고려 제7대 대왕[br]{{{+1 목종 | 穆宗}}}'''}}} || ||<|2> '''출생''' ||[[980년]] [[7월 5일]] || ||[[고려]] [[개성시|황도 개주]][br](現 [[경기도]] [[개성시]] 만월동) || ||<|2> '''즉위''' ||[[997년]] [[11월 29일]] || ||[[고려]] [[개성시|황도 개주]] [[만월대|정궁]][br](現 [[경기도]] [[개성시]] 만월동) || ||<|2> '''사망''' ||[[1009년]] [[3월 2일]] (향년 28세) || ||[[고려]] [[파주시|적성현]][br](現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 || '''능묘''' ||[[공릉]](恭陵) → [[의릉]](義陵) || ||<|4> '''재위기간''' ||'''{{{#f9d537 고려 개령군}}}''' || ||[[990년]] [[12월 26일]] ~ [[997년]] [[11월 29일]] {{{-3 (6년 11개월)}}} || ||'''{{{#670000 제7대 대왕}}}''' || ||[[997년]] [[11월 29일]] ~ [[1009년]] [[3월 2일]] {{{-3 (11년)}}} || ||<-2>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본관''' ||[[개성 왕씨]] || || '''휘''' ||송([[誦]]) || || '''부모''' ||부왕 [[경종(고려)|경종]][br]모후 [[헌애왕후]] || || '''형제자매''' ||무녀독남 || || '''배우자''' ||[[선정왕후]] || || '''종교''' ||[[불교]] || || '''자''' ||효신(孝伸) || || '''묘호''' ||[[민종]](愍宗) → '''[[목종]](穆宗)''' || || '''시호''' ||정공극영위혜효사'''선양대왕'''[br](靖恭克英威惠孝思'''宣讓大王''')[* 《고려사》 <목종 세가> 마지막 조 기준.] || || '''봉호''' ||개령군(開寧君) || || '''작위''' ||양국공(讓國公) || || '''절일''' ||장녕절(長寧節) ||}}}}}}}}} || [목차] [clearfix] == 개요 == [[고려]]의 제7대 대왕. [[묘호]]는 목종(穆宗), [[시호]]는 선양대왕(宣讓大王), 능호는 의릉(義陵), [[휘]]는 송(誦), [[자(이름)|자]]는 효신(孝伸). [[경종(고려)|경종]](제5대)과 [[헌애왕후]] 황보씨의 아들로 왕자 시절의 봉호는 '개령군'(開寧君)이었다. [[고려]] 초기 왕실 내의 극단적인 족내혼 풍습으로 인해 목종은 '''모든 증조부모, 조부모, 부모가 모두 왕과 왕후'''였다.[* 심지어 부계와 모계 어느 쪽을 거슬러 올라가도 증조부가 태조 왕건이다. '''아버지의 조부/외조부, 어머니의 조부/외조부가 전부 태조 왕건이다!'''] 또한 증조모들은 각 지역의 유력한 호족 출신이었고, 게다가 부인 선정왕후도 아버지는 태조 왕건의 친손자 홍덕원군이었으며, 어머니는 [[광종(고려)|광종]](제4대)의 딸 문덕왕후였으니 그야말로 엄청난 가계도인 셈이었다. 목종 이전이나 이후로도 이런 핏줄을 가진 왕은 탄생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막강한 정통성'''을 가진 목종의 마지막은 아이러니하게도 '''[[고려]] 왕조 최초로 폐위되어 최초로 유배에 처해져 최초로 시해된 왕'''이었다.[* 단, [[혜종(고려)|혜종]](제2대)과 [[정종(고려 3대)|정종]](제3대)도 시해되었다는 의심이 있기는 하다. 그래도 그들은 의심일 뿐 공인된 건 아니라서 현재 공식적으로 시해 사실이 확인된 최초의 고려 왕은 아직 목종이다.] == [[시호]], [[묘호]], [[능호]] == 목종은 고려 왕사에서 첫 번째로 [[시해]]당한 왕이다. 그를 시해한 [[강조(고려)|강조]]는 죽은 군주의 묘호를 '''민종'''(愍宗), 시호를 '''선령대왕'''(宣靈大王)이라 했다. 이어 능호를 '''공릉'''(恭陵)이라 짓고, 자기 맘대로 [[태묘]]에 올렸는데 《[[고려사]]》에 따르면 당시 많은 사람들이 불쾌하게 여겼다고 한다. 처음 [[강조(고려)|강조]]가 올린 묘호, 시호, 능호는 영 좋지 않은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묘호 민종(愍宗)의 '민'([[愍]])은 '근심할 민' 자였다. 그러나 묘호는 기본적으로 찬양의 의미를 담은 한자를 쓰기 때문에 '민'이라는 단어는 전혀 좋은 묘호가 아니었다. '민'(愍)은 시법상으로는 동정이나 위로에 가까운 의미를 갖고 있었다. 때문에 군주의 시호로 사용하게 된다면 보통 불행한 삶을 살거나 비극적인 최후를 맞은 경우에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일단 악시는 아니지만, 찬양의 의미와는 거리가 멀었다. 시호였던 '선령'(宣靈)은 '베풀 선([[宣]])' 자까지는 좋았다. 근데 뒤의 '령'([[靈]]) 자는 [[시법]] 항목에도 나오듯 '''[[후한]] 말기 최악의 [[암군]]'''이었던 [[영제(후한)|영제]] 등 나약한 군주에게 주어졌던 시호였기에 강조는 묘호와 시호 모두 좋지 않게 올린 것이었다. 능호마저 공릉(恭陵), 공손하다 할 때의 '공'([[恭]])으로 그다지 좋지 않은 능호였다. 후계자 [[현종(고려)|현종]]이 고쳐 올린 묘호는 '''목종'''(穆宗), 시호는 '''선양대왕'''(宣讓大王)이었다. 묘호는 나름 괜찮은 한자였다. 시호가 의미심장한데 앞의 '베풀 선'(宣) 자는 유지했지만 뒤 '령'(靈) 자를 '사양할 양'([[讓]]) 자로 바꾸었다. 즉, '''"목종이 현종에게 양위했다."'''는 의미의 시호인 것이다. 강조 때문에 어정쩡한 상태로 즉위하게 된 현종의 고심이 엿보이는 부분이다. 이후 시호가 계속 추봉되어 공식 [[존호]]는 '''목종'''(穆宗) '''정공극영위혜효사선양대왕'''(靖恭克英威惠孝思宣讓大王). 능호도 '''의로울 의'''(義) 자를 써서 '''의릉'''(義陵)으로 바꾸었다. == 생애 == ||||||<:><#f9d537>'''{{{#670000 고려의 역대 개령군}}}'''|| ||<:><#f9d537>'''{{{#670000 대수}}}'''||<:><#f9d537>'''{{{#670000 작호}}}'''||<:><#f9d537>'''{{{#670000 이름}}}'''|| ||<:><#f9d537>'''{{{#670000 초대}}}'''||<(> 정윤(正胤) 개령군(開寧君) ||<(> [[왕치|왕치(王治)]] || ||<:><#f9d537>'''{{{#670000 2대}}}'''||<(> '''개령군(開寧君)''' ||<(> '''왕송(王誦)''' || >성종 재위 9년(990년) 12월, 교(敎)하다. > >"[[주나라|주(周)]]가 [[동성제후|인적]](麟趾)[* 기린의 친족, 즉 왕실의 일원들을 의미.]들을 봉(封)하여 번병(藩屛)[* 제후국의 별칭. 한국사에선 고구려계 [[보덕국]]이 [[신라]]의 번병을 자처했다.]을 예우해준 것과 한(漢)이 제후를 봉한 제(制)는 종지(宗支)[* 역시 왕실을 의미.]를 의(義)로써 대하기 위함이다. > >그리하여 대명(大命)[* 임금의 천명(天命).]을 사방(四方)에 펼쳐 본지(本支)[* 국가, 왕조의 다른 말.]를 백세(百世)동안 전했다. 나(予) 또한 성공한 전례를 당연히 따를 것이다. > >숭덕궁(崇德宮)[* 목종의 어머니인 [[헌애왕후]]의 관저.]의 적남(嫡男) 송(誦)은, 태조영손(太祖令孫)이자 과인(寡人)의 유자(猶子)[* [[조카]]를 의미하는 고대 한자어.]이다. > >어려서부터 바름(正)을 길러냈고 빼어난 재주를 가졌다. 덕을 키우는데 있어 게으름을 피우지 않으니 이미 성인의 그릇(成人之器)을 가졌다. > >옛 일을 떠올리고 되뇌이니 친족을 아끼는 것은 백세(百世)의 양규(良規)이고 어린 친족을 보다듬는 것은 5상(五常)의 아지(雅旨)이다. 아직 어린 나이지만 감히 소봉(疏封)[* 봉토(봉)를 내려줌(소).]함을 아낄 수 있겠는가? 곧 아름다움을 펼칠 것이라 믿고 오늘을 시작으로 은혜를 내리겠다. > >'''지금 공관어사(工官御事) 지도성사(知都省事) [[박양유]](朴良柔)와 사부전중감(使副殿中監) 조광(趙光) 등을 보내 지절(持節)과 예(禮)를 갖추어 널(爾) 개령군(開寧君)으로 책봉한다.''' > >나라를 자신의 집으로 삼고 효(孝)를 바꾸어 충(忠)으로 삼으라. 군신(君臣)을 부자(父子)의 규범으로 대하고 위엄과 의례를 잃지 말라. 예(禮), 악(樂), 시(詩), 서(書)의 가르침을 배우고 열심히 살라. > >사치해지지 말고 주색을 탐하지 말라. 씨앗을 심고 거두는 것의 어려움을 알고 조정을 보조해야 한다. > >'''존경하라! 진중하라! 내 명령을 저버리지 말라.'''" >---- >《[[고려사]]》 <[[성종(고려)|성종]] 세가> 중 발췌. -[[서경(고려)|서경]] [[장락궁|본궐]]에서 후계자를 공인하다.- 왕송은 [[경종(고려)|경종]](제5대) 재위 5년 차에 태어났다. 하지만 아버지 경종이 1년만에 붕어해버린 탓에 어머니 헌애왕후 황보씨와 함께 숭덕궁에서 살게 되었다. 왕송은 10세가 되던 날에 재위 중이던 삼촌 [[성종(고려)|성종]](제6대)을 따라 서도(西都)[* 지금의 [[평양시]].]에 행차했다. 성종은 [[장락궁]]에 도착한 뒤, 자신의 조카인 왕송에게 한 때 본인의 봉호였던 '''개령군'''(開寧君)을 물려주어 그가 자신의 뒤를 이을 것이라고 천명했다. 봉지로 하사된 개령은 현(現) [[대한민국]] [[경상북도]] [[김천]]이다. 성종이 서경에서 후계자를 공인한 것처럼 [[예종(고려)|예종]](제16대)도 서경에서 [[인종(고려)|인종]](제17대)을 태자로 삼으려 했지만 [[김인존]]이 반대하여 개경에서 했다고 한다. [[현화사비]] 기록에는 993년, 목종이 13살 때 [[헌정왕후]]가 [[붕어]](崩御)하자 성종은 '''잠룡'''(潛龍)[* [[현화사비]] 원문 기록. 임금이 왕위에 오르기 전 상태]인 목종을 시켜 제사를 대리하게 했다. 아마 동생의 제사를 통해 2대 개령군의 입지를 다져 놓기 위함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왕송은 삼사청(三司廳)[* [[삼사(관청)|삼사]] 부서의 관사. 삼사는 정부의 재정을 담당했다.] 안에 빈소를 차리고 제궁빈비(諸宮嬪妃)[* 고려는 후비나 여성 왕족들에게 [[궁호|궁(宮), 전(殿), 원(院)]]을 하사하여 [[작위]]로 봉했다. 그래서 '제궁의 비빈들'이라 한 것이다.]와 문·호 양반(文虎兩班)[* 조정의 문신과 무신들. 원문 기록으로 제2대 [[혜종(고려)|혜종]]의 이름 '무'(武)를 [[피휘]]했다.]을 이끌고 금봉문(金鳳門)[* 발해 [[상경성]]과 조선 [[경복궁]]에도 금봉문이 있었다.] 앞에서 발상(發喪)했다고 하며, 5년 뒤에 17살의 보령으로 왕위에 오르게 된다. === 초중기의 업적 === 초기에는 제법 의욕적인 면모로 정사를 돌봤는데 어머니 [[헌애왕후]]가 [[섭정]]을 맡았다는 기록을 통해 목종이 이룬 업적들의 전부 또는 대부분이 사실 그녀의 업적이라고 주장하는 견해도 있다. [[대하사극]] 《[[천추태후(드라마)|천추태후]]》에도 이러한 시각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하지만 실제로 [[강조의 정변]]을 보면 헌애왕후는 종교 정책을 제외하면 그냥 아들을 좀 도운 수준일 뿐 실권은 목종이 다 쥐었을 가능성이 높으므로 목종의 업적이 맞다고 볼 수 있을 듯하다. 오늘날에는 17세가 미성년 고교생이지만 과거에는 15세에 [[관례]]식을 하여 성인으로 보았다. 하지만 의욕적인 종교 관련 정책과 친인척들을 통해 목종의 즉위를 돕는 등 헌애왕후도 아들에게 꽤 도움을 주었다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 서경 우대 ==== 목종은 본래 [[서경(고려)|서경]]과 인연이 깊었는데 본래 선왕 [[성종(고려)|성종]]의 '개령군'(開寧君)이라는 [[봉호]]를 서경에서 이어받았다. 다시 말해서 목종이 정당한 왕위 계승자로 임명된 장소가 바로 서경이라는 것이다. 이런 인연 탓인지 목종은 즉위하자마자 서경을 '''호경'''(鎬京)[* 고대 중국 [[주나라|서주]] 왕조의 수도명이었다.]으로 개칭하는 한편 서경의 관부도 유수관에서 태조때의 낭관으로 환원시켰으며, 자주 행차하여 제사까지 지냈다. 뿐만 아니라 서경에 대한 조세 감면과 사면 조치도 여러 번 내렸고, 서경의 관리들과 군인들을 진급시키거나 포상했으며, 서경 안의 노인들과 과부들에게 물건이나 명예직을 내리는 등 후히 대접했다. 또 오랫동안 벼슬길에 오르지 못한 50세 이상의 남자들에게 모두 벼슬을 내리는 등 재위 기간 내내 서경을 우대하는 모습을 보였다. ==== 국가 체계 관련 ==== 왕의 모친 황보씨(皇甫氏)를 왕태후(王太后)로 승격시키고, '''응천계성정덕왕태후'''(應天啓聖靜德王太后)라는 존호를 올렸다. 흔히 '''[[천추태후]]'''로 잘 알려져 있는 인물이다. 국왕인 자신의 [[생일]]을 '''장녕절'''(長寧節)로 명명했고, 선왕과 선후(先后)들의 휘호(徽號)를 덧붙였으며, 해당 관청에 선왕들의 제사를 지내는 법식을 확정지었다. [[과거 제도|과거법]]을 정비해 확정지었고, 필요없다고 판단되는 직책과 지방관들을 심사하여 정리했으며, 3품 이상의 관료들에게 훈호를 내리고, 9품 이상으로 벼슬한지 만 20년이 된 자는 개정된 관복을 착용하게 했다. ==== 인재 등용 ==== 즉위하자마자 성종의 붕어로 인해 진사(進士)가 되었음에도 등용이 지체되었던 사람들을 급제시켰다. 그리고 매해 꾸준히 인재를 등용하여 확인되는 숫자만 해도 약 250여 명이었고, 이름이 확인되는 경우만 해도 주인걸(周仁傑), 강주재(姜周載), 송굉(宋翃), 박원휘(朴元徽), [[황주량]], [[최충]], [[주저]][* [[북송]] 온주(溫州)에서 고려에 건너와 의탁했다고 한다.], [[조원]][* [[제2차 여요전쟁]]에서 [[강민첨]]과 함께 함락 직전의 [[서경]]을 수비한 장수였고 [[귀주대첩]]으로 대표되는 [[제3차 여요전쟁]]에서는 [[요나라|거란]]군 10,000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은 용장이다.], 손원선(孫元仙) 등이 있었다. 1006년에는 6품 이상의 문관들에게 유능한 사람들을 각각 1명씩 추천하게 하여 사실 여부에 따라 추천자에게 상벌을 내리는 조치를 공표했다. ==== 불교 정책 ==== 즉위하자마자 승려들의 계급을 1등급씩 올려주었고, 개경 남쪽에 진관사(眞觀寺)를 지어 태후의 원찰로 삼았으며 몇 년 후에는 그 절에 9층탑을 쌓았다. 또한 숭교사(崇敎寺)를 창건해 왕실의 원찰로 삼았다. 1006년에는 선종(禪宗)과 교종(敎宗)의 승려로서 대덕(大德)[* [[고승]] 중 최하위 등급] 이상에게는 법호를 덧붙여주었고, [[환갑]]을 넘은 승려들에게는 차등을 두어 승직을 올려 주었다. ==== 외교 정책 ==== 즉위 직후 합문사(閤門使) 왕동영(王同穎)을 [[거란]]에 보내 왕위를 계승한 사실을 알렸고, 거란에서도 수 차례 사신을 보내 목종의 작위를 높이는 등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는 한편, 이부시랑(吏部侍郞) 주인소(朱仁紹)를 [[북송]]에 보내서 >"우리나라는 중국의 풍속을 사모하는데 거란에게 위협당해 방해를 받고 있다." 고 하는 등 [[송나라|북송]]과 [[요나라]] 양국 사이에서 무난한 외교를 전개했다. ==== 국방 정책 ==== [[전시과]]를 개정하고, 덕주(德州)[* 現 평남 덕천], 평로진(平虜鎭)[* 現 평북 영변], 등주(登州)[* 現 함남 안변군], 귀성(龜城)[* 現 평북 귀성군], 용진진(龍津鎭)[* 現 함남 정평군], 흥화진(興化鎭)[* 現 평북 의주군], 익령(翼嶺)[* 現 강원 양양군], 울진현(蔚珍縣)[* 現 경북 울진군], 통주(通州)[* 現 평북 선천군] 등 많은 곳에 성을 쌓았을 뿐만 아니라 1003년에는 새로 쌓은 덕주성을 포함하여 가주(嘉州), 위화(威化), 광화(光化)의 성들을 보수했다. 새로 쌓은 많은 성들이 훗날 [[여요전쟁]]에서 주요 전장이 된 것을 고려하면 매우 현명한 조치였다. 또한 많은 공사들로 군사들이 힘들어하자 6위(六衛)의 부대에 소속된 군사들에게는 잡역을 면제해주는 등 사기 저하를 막으려고 노력했고, 동여진의 침공에도 장수를 보내 대응했다. 또한 군역을 개편해 16세 이상 60세 이하의 정상적인 모든 남자에게 군역의 의무가 부과되는 병제를 완성했는데, 이는 한반도 역사상 최초로 징병제가 완성된 것이다. ==== 민생 정책 ==== 즉위하자마자 국내 산천의 신령들에게 모두 훈호를 붙였다. 불교가 도입된지 오래되었으나 토착 신앙도 무시할 수 없는 만큼 이는 민심을 안정시키려는 조치로 추측된다. 행차가 지난 주와 현은 1년치의 전조(田租)[* [[토지세]]]를 감면했다. 군주의 행차가 지나가는 지역은 여러가지 준비를 해야 돼서 힘들었다. 흔히 군주가 [[사냥]]을 자주 나가면 백성들이 힘들어했다는 이유도 같은 이유이다. '''중국사 최악의 [[폭군]]'''이었던 [[양제(수)|수 양제]]의 경우, 그가 행차했던 지역에는 죽은 이들이 널렸다고 하며, 청 고종 [[건륭제]] 또한 할아버지 성조 [[강희제]]에 비해 여러 지역을 행차하며 지나치게 경비를 쓴 것에 대한 비판이 있다. 1006년 흉년이 들자 백성들의 조세와 공물을 탕감하고, 창고의 곡식을 굶주린 백성들에게 빌려주었다. [[경주시|경주]] 사람 융대(融大)가 보낸 노비들을 사실 양민인 줄 알면서도 받은 평장사 한인경(韓藺卿)과 이부시랑(吏部侍郞) 김낙(金諾)을 유배보내고, 마찬가지로 노비를 받은 궁인(宮人) 김씨(金氏)에게는 [[구리]] 100근으로 벌금을 내게 하니 많은 사람들이 이를 듣고 경하했다. ==== 신하들에 대한 대우 ==== 자신을 호종하거나 자신의 행차가 지난 주와 현의 관리들에게 잔치를 열어주며 물건을 하사하고, 진급시키기도 하며, 여러 군과 현의 호장(戶長)으로 70세가 된 자를 '''안일호장'''(安逸戶長)으로 삼아 직전을 내려 대우했다. [[제1차 여요전쟁]]에서 [[소손녕]]과의 외교 담판으로 유명했던 [[서희]]가 57세의 나이로 죽자 예를 갖춰 장사지내고, 후한 부의와 '''창위'''(彰威)란 시호를 내린 후, 선왕 성종의 묘정에 배향했다. [[문하시중]] [[한언공]]의 공로를 치하하는 의미로 그의 본관인 중원부(中原府)[* 現 장단군]에 행차했을 때 그 곳을 단주(湍州)로 승격시켰다. 그가 병에 들자 의원과 약을 보내주고, 온천에 가서 목욕하게 하면서 타고 갈 수레도 보냈으며, 그에게 필요한 물품을 공급해줄 것을 각 주현에 명하고, 왕실에서 쓰는 말 세 필을 내려 쾌차를 기도하는 제물로 쓰게 했다. 그러나 결국 한언공이 죽자 서희 때와 마찬가지로 후한 부의와 '''정신'''(貞信)이란 시호를 내리고, 내사령(內史令)을 증직하여 예를 갖춰 장사지냈다. ==== 기타 긍정적인 일화 ==== [[일본]]에서 도요미도(道要彌刀) 등 20호가 와서 의탁하자 이들을 [[이천]]군에 정착시켰다. 5품 이상의 중앙 관리들에게 나랏일을 지적하게 하여 폭넓은 의견을 경청했을뿐 아니라 화폐 제도가 실익은 적고, 백성들의 불편은 가중된다는 한언공의 상소를 받아들여 다점이나 주점 등 일부에서만 화폐 사용을 강제하도록 제도를 완화하였다. === 폐위와 비극적인 최후 === 여기까지만 보면 괜찮은 군주의 무난한 행보로 보여진다. 그러나 정치를 잘해나가던 목종의 불행은 섭정을 맡은 그의 어머니 [[헌애왕후]]가 초래했다. 원래 대부분 섭정자는 임금이 성년이 되면 섭정을 거두지만 헌애왕후는 목종이 [[섭정]]이 필요가 없는 나이임에도 섭정을 맡으며 권력을 장악했다. 헌애왕후는 오래 전 함께 통정하다가 그녀의 친오빠 [[성종(고려)|성종]]에 의해 쫓겨났던 [[김치양]]을 다시 궁으로 불러들여 관계를 맺고 권력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목종은 이를 저지하고 자신의 권력을 정돈하기는커녕 자신의 동성연인인 유행간이 [[권신]]으로 커지는 것을 막지 못해 국정의 혼란을 더욱 가중시켰다. 마침내 헌애왕후가 김치양의 아들을 낳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고, 급기야 그 둘은 자신들의 아들을 왕위에 올리려는 [[음모]]까지 꾸미며 자신들의 계획에 방해가 되는 당시 유일한 왕위 계승권자였던 [[현종(고려)|대량원군]]까지 제거하려고 했다.[* 물론 대량원군 이외에도 태조와 동양원부인(태조 왕건의 제9비 동양원부인(東陽院夫人) 유씨 - 평주(평산) 유씨(平州 庾氏) [[유금필]]의 딸)의 소생인 [[효은태자]]의 직계 자손들이 있었다. 다만 광종대 반역자로 몰려 왕족 신분을 박탈당한 처지였다. 만약 대량원군이 제거되었다면 천추태후와 김치양의 소생이 다음 고려 왕이 되었을 수도 있지만, 왕씨 왕조의 유지를 바란 강조와 같은 대다수 신료들은 고구려의 [[창조리]]가 [[미천왕|을불]]을 찾아냈듯, 효은태자의 자손들을 끝끝내 찾아내 왕위에 올렸을 것으로 보인다. 실제 강조는 현종을 보위에 올리고도 효은태자의 자손들을 찾아내 종실에 입적시켜 현종 유고 시의 대안을 마련한 바 있다.] 이에 목종은 대량원군을 불러들여 확실히 자신의 후계자로 삼는 계획을 세우고, 이내 서북면 도순검사 [[강조(고려)|강조]]를 개경으로 불러들여 일단 김치양은 제거했지만 우발적이건 계획적이건 도리어 강조에게 뒤통수를 당해 폐위당했다. 그리고 어머니 헌애왕후와 함께 충주로 내려가던[* 목종이 [[최항(972)|최항]]에게 새 임금(현종)을 잘 보좌할 것을 당부하며 '시골에 가서 늙고 싶으니 새 임금에게 그렇게 전해 달라.'라며 [[충주]]로 내려갔다.] 도중 적성현[* 지금의 [[파주시]] [[적성면(파주)|적성면]].]에서 강조의 명령으로 김광보, [[안패]] 등에 의해 시해당하는 비운을 맞고 만다. 자세한 이야기는 [[강조의 정변]] 항목을 참조할 것. == 가족관계 == || 본인 || 부모 || 조부모 || 증조부모 || ||<|13> 목종[br] ||<|6> [[경종(고려)|경종]] ||<|3> [[광종(고려)|광종]] || || '''[[태조(고려)|태조]]''' || || [[신명왕후]] || ||<|3> [[대목왕후]] || || '''[[태조(고려)|태조]]''' || || [[신정왕후]] || ||<|7> [[헌애왕후]][br] || ||<|3> [[대종(고려)|대종]] || || '''[[태조(고려)|태조]]''' || || [[신정왕후]] || ||<|3> [[선의왕후]] || || '''[[태조(고려)|태조]]''' || || [[정덕왕후]] || 고려 초기에는 [[태조(고려)|태조]]의 아들들[* 왕건은 9명의 딸이 있었는데, 경순왕 김부와 결혼한 2명을 뺀 나머지 7명 중 6명이 이복 형제와 결혼했다. 이들 중 유일하게 남편이 미상인 [[순안왕대비]]도 이복형제인 [[안종(고려)|안종]]의 정실로 추정된다.]과 손자들이 [[근친혼]][* 목종의 조부모와 외조부모가 그 대표적 예다.]을 많이 했기에 목종의 조부모는 모두 형제자매였으며, 외할아버지와 친할머니는 아예 친남매였다. 즉, 목종의 증조부는 친가, 외가 모두 '''[[태조(고려)|고려 태조]] 단 한 명뿐'''이다. [[족내혼]]을 하지 않았다면 증조부가 4명이 되어야 하나 족내혼으로 인해 증조부가 1명인 것이다. 왕후인 [[선정왕후]] 유씨는 목종과 사촌[* 선정왕후의 어머니 [[문덕왕후]]는 목종의 아버지 경종의 누이이다.] 겸 6촌[* 선정왕후의 아버지는 홍덕원군으로 왕건의 손자(수명태자의 아들)로 목종에게는 5촌 당숙이 된다.]지간으로 슬하에 자녀가 없다. 후궁인 요석택 궁인(邀石宅 宮人) 김씨 사이에서도 자녀가 없다. == 평가 == 오랜 기간 목종에 대해서는 [[헌애왕후]]와 [[김치양]]의 전횡을 막지 못한 무능한 [[군주]]라는 부정적 시선이 강했으며, [[이제현]]은 목종의 비극에 대해 >"개인적으로는 불행이지만 국가적으로는 다행이었다." 는 식으로 평가를 내릴 정도였다. 다만 목종이 과연 기존 평가처럼 실권도 없던 나약한 군주였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상당한데 업적이 생각보다 많고, 그 업적을 [[섭정]]직에 있던 헌애왕후가 모조리 했다고 보기에는 목종의 실권이 생각보다 상당했던 것으로 여겨질법한 대목도 많기 때문이다. [[성격]]도 상당히 군자스러운 면모가 보이지만 어찌됐든 결국 효심이라는 핑계로 [[헌애왕후|어머니]]의 전횡을 제때 막지 못해 본인과 어머니 둘 다 끝이 좋지 않았다는 점과 집안 단속을 제대로 못한 점은 변명의 여지가 없으며, 본인이 신뢰하기도 한 다음 임금 [[현종(고려)|현종]]이 [[여요전쟁]]을 마무리짓고, 고려를 중흥기에 올리면서 '''존재감이 묻히는 경향도 있다.''' 다만 [[강조(고려)|강조]]가 멋대로 목종을 폐위하고 묘호와 시호, 능호를 올리자 신하들과 백성들이 불쾌해했다는 것을 보면 어찌 되었든 당시 사람들은 목종이 마땅히 폐위당해야 할 [[폭군]]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당대 사람들이 강조를 손가락질한 것은 일개 신하가 감히 정변으로 임금을 갈아치웠다는 데에 있을 것이다. 전근대에 왕권은 신성한 것이었으며, 또한 아직 건국 100년도 되지 않은 고려는 [[용손]]임을 주장하여 [[왕권신수설|왕권신수]]를 공고히 하였으므로 더더욱 그러하다. == 기타 == * [[한국사]]에서 명시적으로 기록된 첫 번째 [[게이]] 임금이다. 세계사를 통틀어 [[양성애자]] 성향으로 추측되는 군주들은 많으나, 목종의 경우 [[동성애자]] 성향을 가장 적극적으로 드러낸 군주 중 하나이다. 목종 이전 [[신라]] 제36대 [[혜공왕]]도 "본래 여자로 태어나야 했으나 상제에게 부탁하여 억지로 남자로 태어나게 한 탓에 행동이 여성스러웠다"는 설이 적혀 있으나 《[[삼국유사]]》 자체가 [[불교]] 설화적 [[뉘앙스]]가 짙은 기록이고, 시녀들과 어울려 여성의 놀이를 좋아하고 여성스러운 행동을 했다는 기록들은 있어도 구체적으로 남성과 성관계를 했다는 암시 등의 동성애 성향은 서술되지 않았다. 신라 혜공왕의 경우, 기록대로라면 동성애자라기보다 [[트랜스여성]] 내지 굳이 성애적으로 봐도 [[양성애자]]로 볼 수 있다. 목종 이후 동성애 관련 언급이 알려진 왕은 원 간섭기 [[충선왕]](제26대)인데 그는 한 명의 남자 애인과 다수의 여자 애인을 거느린 [[양성애자]]였다. 제31대 [[공민왕]]도 이런 언급이 있긴 하나 공민왕 이후 《고려사》 기록이 조선 왕조의 개국 과정에 중요한 명분으로 작용한 <[[우창비왕설]]>을 아예 사전에 깔고 서술되어 있는 지라, 목종, 충선왕의 사례와 달리 오늘날에는 공민왕의 피를 이은 자식이 없다는 것을 어필하기 위해 조선 건국 세력들이 곡필했거나 과장한 것 아니냐는 주장도 있다. * 목종은 혈기 왕성한 청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자에게는 도통 관심을 두지 않은 탓에 아내도 [[선정왕후]](宣正王后) 유씨 1명[* 물론 [[첩]]이지만 요석택 궁인 김씨도 있기는 하다.] 뿐이었거니와 슬하에 자식도 없었으며 이 때문인지 젊은 [[나이]]에 후사를 걱정하는 듯한 발언을 하기도 했다. * 그는 왕으로 있는 동안 아름다운 용모를 지닌 사내들을 곁에 끼고 살다시피했다. 《[[고려사]]》 <유행간 열전>에서는 '목종은 용모가 아름다운 사내였던 유행간을 매우 아껴서 용양(龍陽)의 관계까지 맺었다'고 했는데 여기서 '''용양'''이란 소위 남색(男色, 동성연애)을 했다는 의미이다.[* [[용양지총]]이라고 하여, [[전국시대]] 위왕의 총애를 받던 [[용양군]]의 군호에서 따왔다.] 이후 유행간은 목종의 측근이 되어 별다른 공이나 재주가 없으면서도 합문사인이라는 높은 [[벼슬]]에 올라 목종의 곁에서 정사를 좌지우지했는데 성품이 오만해서 신하들을 깔봤으며, 고개와 눈짓으로 [[신하]]들에게 명령을 내리기까지 했다. 유행간이 소개[* 가끔 "유충정이 [[신체]]가 뛰어난 탓에 유행간의 소개를 받아 목종의 총애를 받았다"는 말이 돌아다니고 있으나 [[사료(역사)|사료]]적인 근거는 없다.]한 [[발해]] [[유민]] 출신인 유충정 역시 목종의 총애를 받아서 유행간과 더불어 측근으로 활동했는데 유충정 또한 동성 연인이 아니었나 하는 추측은 있지만 유행간과는 달리 목종과 유충정이 동성애를 했다는 직접적인 기록은 없다. 유행간은 [[강조의 정변]] 이후, 국정을 농단했다는 죄목으로 처형당했으나 유충정은 어떻게 되었는지 불확실한데 목종이 [[궁궐]]에서 도망쳐 나올 때 유충정이 옆에서 보좌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는 유충정을 목종과 유행간을 죽일 때 같이 죽였다고 썼지만 《고려사》 원문에는 '유행간 등 7명을 죽였다'(殺行簡等七人)라고만 했지, 유충정도 죽였다고 명시하지는 않았다. 목종이 죽고 20여 년 뒤인 1030년 [[발해부흥운동]] 세력인 [[흥료국]]에서 고려에 지원을 부탁할 때 유충정의 이름이 다시 언급되는데 [[동명이인]]일 가능성도 있지만 이름이 [[한자]]까지 같다. 유충정이란 동명이인은 《[[삼국사기]]》,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등 [[한국]]의 주요 [[역사서]]를 통틀어 더이상 나오지 않을 정도라서 흔한 이름이라고 보기 힘들다. 또 발해계라는 공통점이 있어서 목종의 실각 이후, 발해 [[땅]]으로 가서 발해부흥운동에 몸 담았을 여지도 있다. * 고려 역사상 처음이자 공식적으로 신하에 의해 폐위되고 시해당한 [[군주]]이다. 제2대 [[혜종(고려)|혜종]]이나 제3대 [[정종(고려 3대)|정종]]도 시해당했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으나 기록상으로는 목종이 최초 사례다. * [[태조(고려)|태조 왕건]] 사후 제4대 [[광종(고려)|광종]]에게서 이어진 광종계 왕통의 마지막 [[국왕]]이다. 이후 고려 왕은 제34대 [[공양왕]]까지 전부가 [[안종(고려)|안종 왕욱]]의 혈통이다. 참고로 고려 초기의 [[족내혼]]으로 인해 목종은 친가, 외가, 처가가 모두 태조의 직계 [[후손]]이다. 아버지 [[경종(고려)|경종]]은 태조의 친손자이자 외손자이며, 어머니 [[헌애왕후]] 황보씨도 태조의 친손녀이자 외손녀이다. 게다가 이는 부인 [[선정왕후]]도 비슷한데 선정왕후의 아버지는 태조의 아들 수명태자의 아들 홍덕원군이었으며, 어머니는 태조의 아들 광종의 딸 [[문덕왕후]]였다. 누구인지 불분명한 선정왕후의 친조모를 제외해도 그녀의 조부, 외조부, 외조모 모두가 태조의 후손이다. 결과적으로 목종의 조부, 조모, 외조부, 외조모, 아버지, 어머니, 장인, 장모가 모두 태조의 자식이자 손자들인 셈. 고려의 왕 중에서 이 정도로 막강하게 태조의 핏줄을 타고 난 왕은 없다. 그러나 정작 목종 본인은 폐위당하고 시해당한 점은 [[아이러니]]한 부분이다. * 한국사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제주도]]의 [[한라산]]이 분화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1002년 6월에는 5일간의 분화가 있었고, 1007년에는 1주일간 분화가 일어나 산이 솟아 올랐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 기록을 끝으로 한라산은 분화 기록이 없으며,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간간히 [[지진]] 기록이 나오는 것이 전부이다. 그래서 한때 [[휴화산]]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2014년부터는 한라산 내부에 [[마그마]]방이 여러 개 존재하는 것이 확인되면서 다시 [[활화산]]으로 지정해 관리에 들어가고 있다. >5년([[1002년]]) 6월. 탐라산(耽羅山) 네 곳에 구멍이 나면서 붉은 물이 솟아나더니 닷새만에 그쳤으며 그 물은 모두 와석(瓦石)이 되었다. >10년([[1007년]]) 탐라(耽羅 : 지금의 제주도)에 상서로운 산이 바다 가운데서 솟아났기에 태학박사(太學博士) 전공지(田拱之)를 보내 살펴보게 했더니 탐라(耽羅) 사람들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산이 처음 솟아나올 때에 구름과 안개로 어두컴컴했으며 땅이 진동하여 우레가 치는 것 같았습니다. 이레 밤낮 만에야 비로소 걷히니 산의 높이는 백장(丈)이 넘고 둘레는 40리(里)가 넘었으며 초목은 없고 연기가 그 위를 덮고 있어 바라보면 석류황(石硫黃)과 같기에 사람들이 두려운 나머지 가까이 가지 못했습니다.” > >전공지(田拱之)가 직접 산 아래까지 가서 그 모습을 그려서 바쳤다. >---- >'''《[[고려사]]》 권55, <지>제9, -오행-(五行)3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672834&categoryId=49630&cid=49617|'산붕']]''' == 대중매체 == === 드라마 === ==== 강감찬 ==== 필름이 남아있지 않아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지만, 27화부터 62화까지 그의 치세가 묘사되었다. 천추태후와 김치양의 불륜에 분노했다가 침식을 전폐하고 술로 날을 보냈다고 하며, 김치양을 물리치기 위해 강조에게 밀서를 보냈다고 한다. ==== [[천추태후(드라마)|천추태후]] ====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PS-0001075110-01-000_00_04.png|width=100%]]}}}|| ||<#f9d537> '''드라마《[[천추태후(드라마)|{{{#000 천추태후}}}]]》에서의 목종''' || 2009년 [[KBS]] 드라마 《[[천추태후(드라마)|천추태후]]》에서는 아역때 개령군 시절을 배우 [[박지빈]]이, 성인 시절을 배우 [[이인(배우)|이인]][* 2003년 대하사극 《[[무인시대]]》에서는 [[강종(무인시대)|강종(청년기)]] 역, 2004년 KBS 대하사극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광해군]] 역, 2010년 KBS 수목드라마 《[[추노(드라마)|추노]]》에서는 [[효종(조선)|봉림대군]] 역, 2010년 KBS 대하사극 《[[근초고왕(드라마)|근초고왕]]》에서는 [[아직기]] 역]이 연기했다. [[주인공]]의 아들인 만큼 비중있게 등장하는데 어린 시절 고생하며 실제 역사와는 달리 목종이 이룩한 업적 모두 [[헌애왕후|천추태후]]에게 빼앗겨 버리고[* 그래도 작중 후반부 모친에게 내정에 한해 실권을 받은 이후에는 꽤 무난하게 정사를 돌보는 모습을 보이기는 한다.] 의욕없는 [[임금]]으로 전락해버린데다 뜬금없이 [[뇌전증]] 환자가 되어 툭하면 쓰러져 발작을 일으키는 바람에 천추태후를 놀라게 만든다. 어머니보다 아버지를 더 많이 닮은데다 성종이 최지몽의 예언 때문에 [[아기]] 때부터 [[헌애왕후|천추태후]]와 떼어놓았고 이로 인해 사실상 성종의 아들로 성장했다. 어렸을 때부터 친어머니와는 한달에 한번 볼까 말까인데다 자신의 주변 환경과 성향이 다른 친어머니를 꽤나 어려워하는 모습을 보이지만 어머니를 싫어하지는 않고 잘 따랐으나 어머니 옆에 있는 [[김치양]]은 매우 싫어했다. 이 때문인지 훗날 성장한 후에는 왕의 자리가 싫어 [[왕위]]와 [[김치양]]과 관련해서 번번히 어머니와 심하게 반목하지만 천추태후가 매번 암살을 시도했던 사촌동생인 [[현종(고려)|대량원군]]과는 친한 것으로 나온다. 처음에는 [[고자]]처럼 등장했지만 결국 유행간[* 이 역할을 맡은 사람은 배우 [[박진우]]인데 훗날 《[[정도전(드라마)|정도전]]》에서 똑같은 [[고려시대]]의 왕이자 폭군인 [[우왕]] 역할을 맡게 된다. 박진우는 이 작품에서 우왕 연기할 때 《천추태후》에서 목종 역할을 맡았던 이인의 연기를 참고했다고 한다.]과의 동성 연애도 재현되었으며, 왕후와 후반에 [[갑툭튀]]한 김씨[* 요석택 궁인 김씨], 유행간과의 애정씬도 등장한다. 김치양의 반란 즈음해서 평소 모습과는 다르게 부인과 어머니를 극진히 챙기는 모습을 보여줘 팬들 사이에서는 [[다중인격]]이라는 이미지도 있다. ==== [[고려거란전쟁]]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목종(고려거란전쟁))]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고려거란전쟁_목종.jpg|width=100%]]}}}|| ||<#f9d537> '''드라마《[[고려거란전쟁|{{{#000 고려거란전쟁}}}]]》에서의 [[목종(고려거란전쟁)|목종]]''' || 2023년 [[KBS]] 드라마 《[[고려거란전쟁]]》에서 [[백성현]]이 배역을 맡아 [[제2차 여요전쟁]] 발발 이전 초반 잠시 나온다. 무책임하면서도 최소한의 정도는 알고 있고 자상한 면모도 갖춘 퇴폐미 있는 쿨한 군주로 등장하며 유행간과의 애정신도 1화부터 등장한다. 신하들 사이에선 [[김치양]]이 문제되는 것을 알면서도 [[헌애왕후|천추태후]] 때문에 일단 딱히 조치를 안 한다는 사실 및 정사에 무관심한 면모 때문에 크게 신망을 받지는 못하는 듯하지만, 최소한 개경에서 임금으로서의 권위는 인정받는 듯하며 백성들을 위해 노약자를 포함하여 연회를 베풀기도 하거나 화재로 인해 놀라서 도망가는 도중 쓰러진 노인을 보고 도와주려고 하기도 하는 등 분량은 적지만 드라마 《천추태후》의 목종과 다르게 특이하고 복잡한 캐릭터성을 지닌 점으로 인해 호평 받았다. === 출판물 === * 과학&역사 학습만화 《[[Why?]]》시리즈 <쫒겨난 임금> 편에서 등장, 흔히 알려진 속설 그대로 김치양과 천추태후에게 이리저리 휘둘리면서도 고려의 사직을 지키기 위해 강조를 호출하지만 목종은 강조에게 "태후께선 업적이라도 있는데, 당신은 모든 걸 태후와 김치양 탓으로 돌리고 놀기에만 바빴다."는 일갈을 듣고 태후와 함께 쫒겨난다. 이후 역사대로 강조가 보낸 자객들이 목종에게 사약을 마시라고 요구하지만 목종은 이를 거부하였으며 이에 군사들이 사약이 싫다면 칼로 죽으시라 외치자 목종은 "어명도 없이 날 죽이려는 것이냐?'는 일갈과 함께 태후에게 강조는 "내가 살아있으면 복위 운동이라도 일어날까 봐 두려운 것 같다."고 한탄하며 결국 군사들 손에 죽는다. == 관련 문서 == * 《[[보협인다라니경]]》 [각주][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목종, version=74)] [[분류:980년 출생]][[분류:1009년 사망]][[분류:개성시 출신 인물]][[분류:고려 국왕]][[분류:폐위된 군주]][[분류:한국의 성소수자]][[분류:성소수자 군주]][[분류:살해된 인물]][[분류:대한민국의 객사한 인물]]||<-5><:><#FFD700>[[고려청자|https://67.media.tumblr.com/d0ab98e78c55c6369f20b702ab560e77/tumblr_o9zoipyqmm1sqk8veo5_r2_400.png?width=50]][br] '''{{{+1 [[고려/왕사|{{{#800080 고려의 역대 국왕}}}]]}}}''' || ||<:> 6대 [[성종(고려)|성종]] 왕치 ||<:> {{{+1 ←}}} ||<:><#FBEC5D> '''{{{#black 7대 목종 왕송}}}''' ||<:> {{{+1 →}}} ||<:> 8대 [[현종(고려)|현종]] 왕순 || ||<:> '''[[묘호]]''' ||||<:> [[민종]](愍宗) → '''[[목종]](穆宗)''' || ||<:> '''[[시호]]''' ||||<:> 효사위혜극영정공선양대왕[br](孝思威惠克英定恭宣讓大王) || ||<:> '''[[군호]]''' ||||<:> 개령군(開寧君) || ||<:> '''[[작위]]''' ||||<:> 양국공(讓國公) || ||<:> '''[[능묘]]''' ||||<:> 공릉(恭陵) → 의릉(義陵) || ||<:> '''[[성]]''' ||||<:> 왕(王) || ||<:> '''[[휘]]''' ||||<:> 송(誦) || ||<:> '''[[자(이름)|자]]''' ||||<:> 효신(孝伸) || ||<:> '''절일''' ||||<:> 장령절(長寧節) || ||<:> '''[[왕후]]''' ||||<:> 선정왕후(宣正王后) || ||<:> '''[[부왕]]''' ||||<:> [[경종(고려)|고려 경종]] || ||<:> '''모후''' ||||<:> [[천추태후|헌애왕후]](獻哀王后)[*별칭 천추태후(千秋太后)] || ||<:> '''종교''' ||||<:> [[불교]] || ||<|2><:> '''생몰년도''' ||<:> 음력 ||980년 5월 20일 ~ 1009년 2월 3일 || ||<:> 양력 ||980년 7월 5일 ~ 1009년 3월 2일 (30세) || ||<|2><:> '''재위기간''' ||<:> 음력 ||997년 10월 27일 ~1009년 2월 3일 || ||<:> 양력 ||997년 11월 29일 ~ 1009년 3월 3 (12년) || [목차] == 소개 == [[고려]]의 제7대 왕. [[경종(고려)|경종]]과 [[천추태후]]의 아들. 이름은 송(誦)이고 왕자 시절의 군호는 개령군(開寧君)이다. 고려 역사상 처음으로 신하에 의해 폐위된 군주이다. 동성애 의혹이 있는 왕으로 신라 [[혜공왕]]도 비슷한 의혹이 있긴 하다. 항목 참조. [[왕건(고려)|태조 왕건]] 사후, 고려 [[광종(고려)|광종]]에게서 이어진 광종계 왕통의 마지막 국왕이다. == 일생 == === 초기 === 불과 생후 13개월만에 부왕 경종이 붕어하면서 재위는 당숙이자 외삼촌인 [[성종(고려)|성종]]이 이었다. 그러나 성종 역시 후사가 없었기에, 그 뒤를 이어 18세의 나이로 즉위했다. 즉위 후 어머니에게 '천추태후'의 칭호를 올렸다. 초기에는 제법 의욕적인 면모로 정치를 해 나갔는데, 아버지 경종이 제정한 [[전시과]]를 손보고 학자들에게 많은 혜택을 줘 학문을 장려했으며, 지방을 순시하며 그 지방의 빈민 구제와 민생 안정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특히 서경을 '호경(鎬京)' 이라 이름을 바꾸고 여기에 자주 행차했다. 호경은 [[서주]]의 수도로 종주(宗周)라 불렸고 낙읍은 성주(成周)로 불리었다. 또한 개칭과 동시에 서경의 관부도 태조대의 낭관으로 환원시켰는데 이는 서경유수로 격하되었던 서경의 권위를 복구시키고 나아가 서경이 고려의 근원지라는 의식의 발호였다. [[요나라]]의 침입에 대비해 북방의 성들을 수축하고 군제를 개편하기도 했다. 일각에서는 이 목종의 업적을 섭정하던 어머니 천추태후의 업적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목종과 천추태후가 몰락하는 강조의 정변 때 처리를 보면 이 때 숙청된 천추태후와 김치양 일파가 40여명에 불과해 왕이 바뀐 정변치고는 비교적 적은 편이다. 또한 당시 하공진이나 탁사정처럼 목종을 보위하는 무장들도 강조의 정변에 가담하기도 했다. 천추태후가 군제 개편을 해서 군부를 장악했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이 때 목종을 보위한 무장들까지 강조에게 가담한 것을 보면 섭정을 했다고는 해도 천추태후에 대한 불만세력이 많았으며, 정변 때 숙청된 사람 수를 보면 이는 그녀의 국정 장악력이 생각보다는 대단치 않았다는 반증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나름대로 정치를 잘 해나가던 목종의 불행은 그의 어머니였던 '''천추태후가 초래했다.''' 천추태후는 권력욕에 불타 아들인 목종의 나이가 성년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경험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내세워 섭정하였다. 또한, 천추태후는 외척인 [[김치양]]과 간통을 저지른 끝에 아들을 낳았는데, 이들은 후에 처벌받을 거라는 위기감과 목종에게 후사가 없는 것을 노려 이 아이로 하여금 다음 왕위를 잇게 할 음모를 꾸미게 된 것이다. 목종 역시 저 둘의 사이를 알고 있었지만 다름 아닌 자신의 어머니라서 처벌하지 못했다. 때문에 목종의 뒤를 이을 유력한 왕위계승 후보였던 [[현종(고려)|대량원군 왕순]]을 강제로 중으로 만들어서 삼각산의 신혈사로 보내버렸다. 왕순은 출가한 이후 신혈소군이라 불리었다. 고려시대엔 왕위계승권이 미약한 왕자를 소군이라 하여 출사시켜 그 계승권을 박탈시켰는데, 그 시초가 되었다. 그러나 말이 좋아서 승려로 만든 것이지, 사실상 왕위에 오를 길을 막아버리기 위해 궁에서 몰아내버린 것이다. 이것으로도 안심이 되지 않았는지 계속 대량원군을 암살하려하였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번번히 목종과 신혈사의 승려들이 방해하여 실패하였다. 한편 천추태후의 총애를 받던 김치양의 권세는 대단히 커져서 자신의 친족들을 제멋대로 요직에 앉혀 국정을 어지럽히는가 하면 재물을 긁어 모아서 초호화 저택을 짓는 등 그 사치와 낭비가 매우 극심했다. 이런 인물이 권세를 쥐고 있으니 국가의 기강이 흔들리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 말년 === 이처럼 천추태후의 총애를 등에 업은 김치양의 세력이 강성해지자 목종은 김치양을 견제하려 하였으나 천추태후의 잇달은 훼방으로 실패하였다. 이 일을 계기로 하여 목종의 재위 초기에 보였던 의욕이 넘치던 모습은 사라져버렸으며, 신하 접견을 거부하거나 향락에 빠지는 등 갑자기 무기력한 군주로 변모해 버린다. 이 모습은 말년에 정치에 뜻을 잃고 항락에 빠져 소일했다는 아버지 경종과 비슷하다. 이 때에 유행간이라는 남자가 등장하여 목종의 동성 연인이 되었다. 유행간은 외모가 아름답고 신체가 뛰어나서 굉장한 [[미남]]이었다고 전한다. 이 덕분에 유행간은 목종의 총애를 받았고 별다른 공도 없이 벼슬과 재물을 얻었다. 이후로 유행간이 목종에게 발해 유민 출신인 유충정이라는 남자를 소개해주기도 했는데 그 역시 미모가 수려하려 목종의 총애를 받았다. 이 때문인지 뒷날의 [[공민왕]]과 더불어 남색 경험이 있는 고려 국왕이 되어 버렸다. 단, 공민왕의 남색은 날조라는 설이 있다. 1009년 봄에 왕실 기름창고에서 불이 나서 천추태후가 거처하던 천추전이 불탔다. 이 화재사건을 목종을 시해하기 위한 김치양의 소행으로 보는 경우가 많다. 고려사에는 이 때문에 왕이 근심이 심해져 병환이 나 정사를 돌보지 못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미 천추태후와 김치양의 등쌀에 떠밀려 의욕을 상실한 목종은 병환까지 얻어 정사조차 돌볼 수 없는 사태에 이르게 되었던 것이다. 이후로 유행간과 유충정은 왕의 총애를 등에 업고 많은 궁인을 부리며 조정의 신료들을 업신여기는 등 갖은 행패를 부리면서도 병에 걸린 왕을 보좌한다는 명목으로 제멋대로 권력을 휘둘렀다. 당시 목종이 유행간과 유충정을 제외하고는 아무하고도 만나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대신들은 유행간과 유충정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을 어명과 같이 여길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자 조정은 곧 천추태후의 세력을 등에 업은 김치양과 목종의 총애를 받는 유행간, 유충정 등의 손아귀에 놀아나는 신세로 전락했다. === [[강조의 정변]], 그리고 폐위 === 그러나 아무리 만사에 무관심해진 목종이라도 김치양의 득세는 눈에 거슬렸던 모양이다. 보다 못한 목종은 양위를 결심한 뒤 몰래 중추원부사 채충순을 불러 신혈사에 있던 대량원군을 불러 오라는 명령을 내리는 한편, 서북지역을 지키던 도순검사 [[강조]]에게 밀사를 보내어 '김치양 일파를 처단하고 나라를 안정시키라'는 지령을 보낸다. 이 밀지를 받은 강조는 군대를 이끌고 개경으로 출발했는데, 도중에 거짓왕명이라는 말에 속아 넘어가 돌아갔다. 그 후에 강조의 아버지가 빨리 개경으로 오라고 편지를 보냈는데, 편지 내용 중에 '목종이 이미 죽었다'는, 당시 나라에 돌던 뜬소문이 적혀 있었다. 아버지의 편지를 읽은 강조는 사태가 심각하다고 생각해 목종의 명령에 따라 김치양 일파를 처단하고 목종의 후계자인 대량원군을 추대하기 위해 군사들을 이끌고 수도로 왔다. 그런데 막상 수도에 오니 목종은 살아 있어서 입장이 난처해졌고, 결국 수하들과 의논한 끝에 김치양 일파를 처단한 뒤 아예 목종을 폐위시켜 '나라를 양보한 [[공작]]'이라는 뜻의 존호(尊號)인 '양국공(讓國公)'으로 끌어내린 다음에 대량원군을 즉위시켰다. === 최후 === 졸지에 믿는 사람에게 배신당한 목종은 몇몇 궁인들과 함께 어머니를 모시고 자신의 외가가 있는 황주로 내려가게 되었다. 이 궁인들은 폐위된 목종이 황주로 내려갈 때 유행간과 유충정도 같이 갔다는 말이 있는 걸로 보아, 불온세력으로 간주되어 함께 썰려나간 것으로 보인다. 목종은 자기를 망쳐버린 어머니의 말고삐를 직접 잡아 끌었고, 어머니가 배고프다고 하면 음식을 나눠먹을 정도로 극진히 보살폈다. 그러나 후환이 두려웠던 [[강조]]는 부하인 김광보와 안패를 시켜 목종을 추격하게 하였다. 이들은 결국 후에 따로 충주로 향하던 목종을 뒤쫓아가서 임진강변의 적성에서 그를 시해하였다. 이렇게 목종은 향년 30세로 생을 마감했다. 목종을 시해한 후 강조는 현종에게 "목종이 자살했다"고 보고를 올렸다고 한다. 그후 강조는 민종(愍宗)이라는 묘호와 공릉이라는 능호를 올렸으나 이후 현종에 의해 목종과 의릉으로 고쳐졌다. == 평가 == 훗날 [[귀신]]이 되어 통주에서 [[요성종]]에게 대패하여 수세에 몰린 강조 앞에 나타나 '''"너도 이제 끝장이다!"'''라며 일갈하기도 한다. 이 목종의 혼령을 본 강조는 털썩 무릎을 꿇으며 [[데꿀멍]]했다는 기록이 '''정사인 고려사에''' 나온다. 사실 후대의 각색임이 분명하지만, 진짜 데꿀멍했다는 기록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목종 귀신 때문이 아니라 그도 장수였던만큼 자신의 패배가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알았기 때문에 목종을 떠올리고는 후회하며 털썩 주저앉았다고 보는 게 맞을지도. 여러 가지로 의욕이 넘치는 젊은 군주였지만 어머니와 김치양 때문(그를 죽인 건 강조였지만 일이 이렇게 된 근본적인 원인은 이 둘이 제공했다)에 신세를 망쳐버린 불행한 군주. 어떤 의미에서는 본래 받은 묘호인 '민종'이 그에게 걸맞는 묘호라 하겠다. 또한 병에 걸려 정사를 포기했다는 기록때문에 병약한 군주로 여겨지기도 쉽겠지만 목종 개인적으로는 뛰어난 명궁이었으며 말타기에도 뛰어났다고 한다. 또한, 귀양길에도 자신과 번번히 충돌했던 어머니 천추태후를 극진히 모셨다는 기록이 남아있으니 개인적으로는 성품이 올바르고 효심도 상당했던 것 같다. 어쩌면 강조의 정변을 당한 이후로 초탈하여 성격에 변화가 왔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 동성애 == 고려 역사서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게이왕. 어린 나이에도 여자에겐 관심이 없어서 아내도 선정왕후(宣正王后) 유씨 1명 뿐이고 선정왕후와의 사이에 자식도 없었으며 이 때문 젊은 나이에 후사를 걱정하는 듯한 말을 하기도 했었다. 더욱이 그는 왕으로 있는 동안 아름다운 용모의 남자들을 곁에 끼고 살다시피 했다. 『고려사』 열전의 유행간 열전에서는 목종은 용모가 아름다운 신하였던 유행간을 매우 아껴서 용양(龍陽)의 관계까지 맺었다고 하였는데, 여기서 용양이란 것은 소위 말해 남색(男色), 즉 동성연애와 같은 의미이다. 이후 유행간은 목종의 측근이 되어 높은 벼슬에 올라 목종의 곁에서 정사를 좌지우지 했는데, 성품이 오만해서 신하들을 깔보며 고개와 눈짓으로 신하들에게 명령을 내리기까지 했다. 또한 발해 유민 출신인 유충정이라는 사람 또한 별다른 이유 없이 목종의 총애를 받아서, 유행간과 더불어 목종의 곁에 붙어다니면서 그의 측근으로 활동했는데, 그 또한 목종의 동성연인이 아니었나 하는 추측은 있지만 유행간과는 달리 목종과 동성애를 했다는 집적적인 기록은 없다. 유행간은 강조가 정변을 일으켰을 당시에 살해당했으나 유충정은 어떻게 되었는지 불명.[* 가끔 유충정이 신체가 뛰어난 탓에 유행간의 소개를 받아 목종의 총애를 받았다는 말이 돌아다니고 있으나 사실 사료적인 근거가 없다,] == 대중 매체에서의 모습 == [[천추태후(드라마)]]에는 주인공의 아들인만큼 비중있게 등장. 배우는 [[불멸의 이순신]]에서 [[광해군]]을 연기했고, 이후 [[근초고왕(드라마)|근초고왕]]에서 [[아직기]]를 [[추노]]에서 [[봉림대군]]역을 맡은 이인. 그런데 본인의 업적을 모두 천추태후에게 빼앗겨 버리고 본인은 대단히 의욕 없는 왕으로 전락해 버렸다. 어머니보다 아버지를 더 많이 닮은 편인데다 성종이 아기 때부터 그를 천추태후와 떼어놔 사실상 성종의 아들로 성장했기에, 한 달에 한 번 볼까말까인데다 어렸을 때부터 자신의 주변환경과 성향이 다른 친어머니를 어려워했다. 어쨌든 어머니를 싫어하지는 않으나 어머니 옆에 있는 김치양을 싫어해서, 그리고 왕의 자리가 싫어서 김치양과 왕위 관련해서는 어머니에게 매우 대든다. 사촌동생인 [[대량원군]]과는 친한 편. 처음에는 마치 [[고자]]처럼 등장하더니 결국 유행간과의 동성연애도 재현되었다. [[http://tvdaily.asiae.co.kr/read.php3?aid=124951172914801002|#]] 일단 부인이나 후반 갑툭튀한 김씨나 유행간과 할 수 있었던 걸로 봐서 고자는 아니니 다행. 그리고 김치양의 반란 즈음 해서 평소 모습과는 다르게 부인과 어머니를 극진히 챙기는 모습을 보여주지만...팬들 사이에선 '''다중인격'''이라는 이미지도 있다. 그야말로 [[안습]].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목종, version=74)] [[분류:고려의 왕]] Load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