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변경문서 보기수정 내역 박기서 (버전 비교) ||<-5>[[파일:attachment/박기서/pks.jpg|width=300]]|| ||성 ||[[박(성씨)]] || || 이름 ||기서|| || 출생 ||[[1948년]] [[12월 9일]] ([age(1948-12-09)]세) || || 출생지 ||[[전라북도]] [[정읍시]]|| || 본관 ||[[반남 박씨]][* 25세손 서(緖)자 항렬을 쓴다.]|| || 직업 ||[[택시 기사]]|| || 가족 ||[[부인]] 원미자, [[자식|슬하]] 1남 2녀|| || 신체 ||160cm, 63kg|| || 종교 ||[[가톨릭]]|| || 범죄 유형 ||[[살인]]|| [목차] [include(틀:-)] == 개요 == [[전북]] [[정읍]] 출신. 일면식도 없던 백범 [[김구]]의 암살범 [[안두희]]를 직접 찾아가 [[1996년]] [[10월 23일]] 오전 11시 30분경 그의 집에서 처단한 것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안두희를 처단했을 당시의 직업은 [[버스 기사]].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6102400209101001&officeId=00020|당시 사건을 다룬 1996년 10월 24일 동아일보 기사]] 이후 [[1998년]] [[3월 1일]] 대사면 때 대상자에 포함되어 동년 [[3월 13일]]에 수감된지 1년 5개월만에 출소했으며 이후로는 [[택시 기사]]로 일하고 있다. == [[안두희]] 처단 == >'''[[김구|국부]]를 시해한 자가 세 치 혀를 놀리며 천수를 다하는 것을 그냥 놔둘 수 없었습니다.''' >'''[[인간 쓰레기]]를 치우는 청소부의 심정으로 ([[안두희]]를) 처단했습니다.''' [[http://www.law.go.kr/LSW/precInfoP.do?evtNo=97%EB%8F%842118|대법원 1997. 11. 14., 선고, 97도2118, 판결]] 처단한 시점인 [[1996년]] 당시 박기서는 48세로, [[부천시]]의 버스회사인 [[소신여객]]의 [[버스 기사]]였다. 1995년, 박기서는 어느 날 초등학생용 [[백범일지]]를 읽은 뒤 민족정기를 해친 사람이 천수를 누리면 안 된다고 생각해 거사를 결심했다고 한다. 그는 길이 40cm 정도의 [[홍두깨]]에 매직으로 '정의봉'이라는 이름을 썼고 근처 문방구에서 장난감 총을 구입한 뒤, 사전답사했던 안두희의 집에 침입해 안두희의 부인[* 이름은 김명희 사건당시 63세였다(동거녀라는 설도 있다). 슈퍼마켓을 가려고 현관문을 여는 순간 서성거리면서 대기하고 있던 박기서가 장난감 권총으로 위협하여 그녀를 밀어 젖히면서 다시 끌고 들어갔다. 그리고 안두희를 처단한 후 약 30분간 감금했다.]을 묶은 후, 자리에 누워있던 안두희를 정의봉으로 '''때려 죽였다'''. 범행 직후 본인이 다니던 성당에 가서 [[고해성사]]를 했고, 고해성사를 담당한 신부는 토스트와 우유를 제공한 후 경찰에 자수하도록 전화를 걸어줬다고 한다. 범행 이후 [[구속(형사절차)|구속]]되고 재판에 회부되었다. 재판에서 1심에서 8년 구형에 5년이 선고되었으나, 최종심에서 3년형을 선고받았다. 살인죄의 법정 최저형량이 5년임을 감안하면 징역 3년은 '''엄청난 선처인 셈이다.''' 당시 법원은 '박기서의 살인 행위는 '''주관적으로는 정당성을 가진다고 하더라도'''[* 대법원 1997. 11. 14., 선고, 97도2118, 판결의 판시사항이 '범행의 동기와 목적이 주관적으로는 정당성을 가진다 하더라도, 사람을 살해한 행위는 사회상규에 위배되지 않는 정당행위가 될 수 없다고 한 사례'이다.] 우리나라 법질서 전체 관점으로 볼 때에는 정당하다고 볼 수 없다.'라고 밝혔는데, 이것만 보면 원칙을 고수한 것 같지만 관점에 따라서는 법조계가 박기서의 행위에 면죄부를 준 게 아니냐고 해석할 수도 있다. '안두희'라는 요소를 빼고 보면 해당 사건은 '''48세 장년이 면식도 없던 79세 노인을 찾아가 잔인하게 때려죽인 사건'''이다.[* 당시에는 양형기준 제도가 없었지만, 3년의 형은 현재 양형기준상 살인에 줄 수 있는 '''가장 최저의 형량이다.''' 양형기준에 비추어 보면 안두희는 79세의 고령이었기에 범행에 취약한 피해자에 해당하며, 안두희가 박기서 개인에게 뭔가 해를 끼친 것도 없기 때문에 [[https://sc.scourt.go.kr/sc/krsc/criterion/criterion_01/murder_01.jsp|살인범죄 양형기준]]의 제1유형인 참작 동기 살인에 해당하는 것도 '원칙적으로는' 불가능하다. 따라서 제2유형인 보통 동기 살인에 특별양형인자인 범행에 취약한 피해자가 겹쳐 적어도 15년형을 받았을 것이다. '참작 동기 살인'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더라도, 범행에 취약한 피해자, 잔혹한 범행수법(둔기로 두들겨 패서 죽임)이라는 특별양형인자의 가중요소가 산적해 있으므로 양형기준상 5년 이상의 형에 해당한다.] 재미있는 점은 이렇게 판사가 [[국민정서법|국민정서를 감안하여]] 엄청나게 관대한 판결을 했음에도 판결문을 읽어나가던 판사에게 [[친일반민족행위자|일제에 부역하는 판사]]랑 뭐가 다르냐며 소리 친 방청객이 있었고 박기서측 변호인들도 무죄 판결을 선고했어야 했다며 사법부를 비난했다는 것이다. [[안두희]]는 사실 1965년에도 [[곽태영]]이라는 김구 지지자에게 목을 찔려 살해당할 뻔 한 적이 있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살인미수]]에 그친 곽태영이 박기서보다 더 중한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 수감된 이후 [[1998년]] [[3월 1일]] [[3.1절]] 대사면 때 대상자에 포함되어 [[3월 13일]]에, '''다행히도 그 3년도 미처 채우지 않고 1년 5개월만에 출소했다.''' 이 사건은 뉴스에 크게 보도되는 등 당시 큰 화제가 되었다. 그리고 민족주의적 여론이 강세였던 사회적인 환경 때문에 일반적인 여론은 박기서를 옹호하는 쪽이었다. 박기서가 감옥에 있는 동안, 사회 각계 단체 및 개인들이 박기서의 안두희 처단을 응원하는 취지의 격려금과 편지들을 보냈다. '박기서 구명위원회'가 조직되었으며, 여기에 서명한 시민 수만 무려 9,000명이었다. 박기서를 위해 변론하겠다는 변호사도 줄을 섰다. 박기서의 아들이 다니던 태권도학원 관장은 아들의 수업료를 면제해주고, 백범기념사업회에서 그의 아내에게 취업자리를 알선해 주기도 했다. 박기서 본인은 익명의 누군가에게 출소할 때까지 매달 백만 원씩을 받았다고도 한다. 출소 후에도 여러 사람들의 도움으로 일자리, 집 등을 제공받았다고 한다. 출소 후 원래 일하던 [[소신여객]]에 복직하여 얼마간 근무했고, 이후 [[택시 기사]]로 전직했다. [[오마이뉴스]]에서는 이 사건에 대해서 그를 여러 번 인터뷰했는데, 본인 증언에 따르면 처음에는 바로 죽일 생각이었으나 막상 대면하고 보니 안두희는 이미 병 들고 힘 없는 노인이어서 주저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안두희의 눈을 보았는데, 눈빛이 매우 날카로웠기에 자칫 잘못하면 자신이 역으로 당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다시 범행에 이르렀다고 한다. 가족들은 인터뷰에서 평소 그가 이런 거사를 행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면서 매우 당혹스러워했다. 한편 안두희 사망 전 그를 추적하면서 김구 암살의 배후를 밝히려고 하던 몇몇 인사들은 그의 죽음으로 진상이 영원히 묻히게 되었다면서 다소 유감스러워하기도 했다. 하지만 [[김구]]를 살해한 악행이 그대로 자신에게 있는 [[안두희]]가 민족주의자들에게 수십 년동안 여러 번의 린치를 당했음에도 끝까지 입을 다물고 있었다는 점, [[이승만]]이 배후였다고 한 고백[* 하지만 어떤 증거도 없다.]도 사실은 자신이 고문을 못 이겨 허위로 말한 것이라고 번복했던 점(당시 김구 암살을 지시했다는 장택상은 외무부 장관도 아니었고 야인이었다) 등 때문에, 박기서에게 살해당하지 않았더라도 죽을 때까지 끝내 입을 열지 않았을 것이라는 반론도 있다. 박기서가 당시 안두희를 처단하고 자수했을 때 그를 담당한 형사가 "정말로 수고하셨습니다. 선생님."이라고 말하면서 수갑을 채우지 않고 연행했다고 하는 뜬소문도 있다. 박기서가 [[팟캐스트]] 고상만의 수사반장 시즌 2에 출연했을 때 그러한 말을 들었다고 회고를 했는데([[http://www.podbbang.com/ch/7456?e=21919602|해당 팟캐스트 내용]]) 본인의 주장일 뿐이라서 진위는 알 수 없다. == 출소 이후의 근황 == [[2004년]] 각종 [[친일민족반역자|친일반민족]]성 발언으로 구설수에 올랐던 [[김완섭]]을 구타하면서 불구속 입건된 적이 있다. 이때 구타당한 김완섭은 [[개소리|"박기서는 안두희 살해범 박기서가 아니라, 나 김완섭 구타범 박기서로 역사에 남을 것이다."]]라는 말을 지껄였다.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143&aid=0000015668|#]] [[2011년]] [[김삼웅]] 前 독립기념관장과 [[http://cafe.daum.net/hyosasa/Kg7U/33|사진을 찍었다.]] 안두희 주살 15주년 기념 [[http://www.amn.kr/sub_read.html?uid=4117|서울의 소리 인터뷰]] [[2013년]] [[8월 4일]] [[장준하]] 관련 최고 의혹 용의자 김용환을 찾아가 [[http://www.amn.kr/sub_read.html?uid=10225|따귀를 때리고]] [[http://youtu.be/HGkSw3VqJVI|추궁하기도 했다.]] 이후 김용환이 박기서의 처벌을 원치 않는다고 하여 별다른 충돌없이 마무리가 되었다. == 세간의 평가 == 살해당한 피해자 [[안두희]]는 김구를 죽이고 나서 형을 선고받았으나, 1년 후 [[6.25 전쟁]]이 일어나자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어 1953년 소령으로 예편할 때까지 군에서 탄탄대로를 걸었다. 그리고 제대 후 강원도 양구로 건너가 군납업자로 상당수의 재산을 축적하였다. 이렇듯 김구를 암살했음에도 잘 살고 있던 그를 대다수의 사람들은 좋게 보지 않았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박기서에게 처단된 것은 지은 죗값을 뒤늦게 받은 것이라고 생각하였고, 이에 따라 박기서에게 호의적인 여론이 대부분이었다. 또한 사고가 일어난 당시인 [[1996년]]은 [[대한민국]]이 [[1987년]] 일어난 [[6월 민주항쟁]]을 통해 [[군사독재]]에서 벗어난 지 10년도 되지 않던 해다 보니 [[반일감정]] 등 [[민족주의]] 열풍이 뜨겁던 때였고, 범죄자의 인권에 대한 인식이 지금에 비해 낮은 편이었기에 더더욱 그러했다. 상기 '수고하셨습니다'라는 루머 또한 당시 박기서의 행동에 통쾌해하는 사람이 많았기에 생겨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에도 박기서와 관련된 기사에는 그를 칭찬하는 댓글들이 많이 올라오며 '반도의 [[퍼니셔(마블 코믹스)|퍼니셔]], 다크나이트, 각시탈, 기서노트'라고 긍정적 희화화를 하는 표현도 있다. 오프라인에서도 국내 김구와 관련한 전시회나 시민단체들의 민족주의 고취 행사에 심심찮게 이 사람이 정의봉을 들고 있는 사진이 등장한다. 분명히 그는 적지 않은 한국인들로부터 '민족정기를 바로 세운 시대의 의인'으로 존경받고 있다. 하지만 그를 비판하는 의견도 있다. 단순히 김구에 대한 평가나 정치 성향 때문에 반대하는 의견도 있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박기서는 엄연히 법의 테두리 밖에서 독단적으로 [[사적제재]]를 범했기 때문이다. 또한 법을 중시해야 할 법원이 엄연히 계획적인 살인사건에 대해 법정형보다 적은 선고를 내려 국민정서를 이유로 사적제재를 일정 부분 용인했다는 점에서, ~~평소엔 정당방위조차 잘 인정 안해주는 주제에~~ 이 역시 민족주의가 과잉되었던 시대적 분위기로 인해 공정성과 객관성이 결여된 것이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 정의봉 == [[파일:견리사의견위수명.jpg|width=333]] 正義棒 정의봉 옆에 쓰인 글자는 견리사의 견위수명(見利思義, 見危授命). [[논어]] 현문편 13장에 나오는 구절로 '이익을 보거든 정의를 생각하고, 위태로움을 보거든 목숨을 주어라' 라는 뜻이다. [[안중근]] 의사가 [[뤼순감옥]]에 갇혔을 때 쓴 글로도 유명하다. 박기서가 안두희를 죽일 때 사용한 도구이다. 이 도구는 사건 이후 경찰이 증거물로 압수하였으나 재판 후 되돌려줬다. '''살인에 사용한 흉기를 범인에게 다시 줬다'''는 점에서부터 이 사건이 일반적인 살인 사건과는 매우 다르게 받아들여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파일:촛불문화제 정의봉 할아버지.png]] 앞서 서술했다시피 이 사건 이후로 '정의봉'이라고 써놓은 몽둥이가 시위나 집회 때 흔히 사용되곤 한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진 이후 2016년 11월 12일 민중총궐기에서 어떤 할아버지가 [[다큐 3일]]에 직접 출연해서 인터뷰한 장면이 꽤나 화제가 되었다. 그 뒤 정의봉은 쭉 [[https://news.naver.com/main/ranking/read.nhn?mid=etc&sid1=111&rankingType=popular_day&oid=308&aid=0000023640&date=20180911&type=1&rankingSeq=8&rankingSectionId=102|한지로 감싸서 박기서의 집에 잘 보관]]되어 있다가, 2018년 10월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10416049&viewType=pc|식민지역사박물관에 기증]]되어 역사의 한 자료로 보존되게 되었다. == 관련 문서 == * [[국민정서법]] * 권중희: 박기서 이전에 안두희에게 사적 제재를 가한 인물. 안두희 처벌 탄원운동을 하던 권중희는 오랜 시간 동안 지속적으로 안두희를 쫓아다니면서 폭행을 통해 안두희의 증언을 유도해냈다고 한다. * [[김구]] * [[김다운]]: [[이희진(1986)|이희진]]의 부모를 칼로 살해한 범인. 참고로 이희진은 수백억대 사기꾼으로, 사건이 일어난 당시 교도소에서 복역 중이었다. 사건 직후 많은 네티즌들은 박기서와 종종 비교를 하곤 했다. * --[[장대호]]--: 장대호의 주장이지만 이는 엄연히 장대호의 잘못이다. 많은 네티즌들이 장대호와 종종 비교하는 글이 심심찮게 나오고 있다. * [[민족주의]] * [[민족주의 테러]] * [[사적제재]] * [[안두희]] * [[범죄자/목록/대한민국]] [[분류:대한민국의 살인범]][[분류:1948년 출생]][[분류:정읍시 출신 인물]][[분류:반남 박씨]][[분류:유명인]] [include(틀:다른 뜻1, other1=북한의 군인, rd1=박기서(북한))] ||<-2>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img (21211).jpg|width=100%]]}}} || || '''이름''' ||박기서 (朴琦緖) || || '''본관''' ||[[반남 박씨]][* 25세손 서(緖)자 항렬을 쓴다.] || ||<|2> '''출생''' ||[[1948년]] [[12월 9일]] ([age(1948-12-09)]세) || ||[[전라북도]] [[정읍군]] [[산외면]][br](現 [[전라북도]] [[정읍시]] 산외면) || || '''거주지''' ||[[경기도]] [[부천시]] [[도당동]] || || '''직업''' ||[[택시 기사]][* [[안두희]] 암살로 구속 전에는 [[버스 기사]]였다. 택시 기사는 출소 이후부터 하는 중. 한 때 퇴직하였다고 알려졌으나, 2020년 8월 기준으로 어느 [[교통 마이너 갤러리]] 유저의 글을 통해 [[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transit&no=254984|여전히 일하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부천시]] 면허의 개인택시이다.] || || '''차량''' ||[[기아 K8]][* 2021년 11월 당시 택시차량이다.][* 이전 차량은 [[현대 쏘나타/5세대|NF 쏘나타]], [[기아 K5#s-2.2|기아 K5 2세대]]] || || '''가족''' ||[[부인]] 원미자, [[자식|슬하]] 1남 2녀[* 이중 둘째딸은 암으로 사망.] || || '''신체''' ||160cm, 63kg || || '''종교''' ||[[천주교]] || [목차] [clearfix] == 개요 == 백범 [[김구]]의 암살범 [[안두희]]의 집을 찾아가 [[1996년]] [[10월 23일]] 오전 11시 30분 경 그를 자신이 수제로 제작한 둔기인 일명 '[[정의봉]]'으로 살해한 것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안두희를 살해했을 당시의 직업은 [[버스 기사]].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6102400209101001&officeId=00020|당시 사건을 다룬 1996년 10월 24일 동아일보 기사]] 이후 [[1998년]] [[3월 1일]] 대사면 때 대상자에 포함되어 동년 [[3월 13일]]에 수감된 지 1년 5개월만에 출소했으며, 이후로는 버스 기사로 일하다가 [[택시 기사]]로 일하고 있다. == [[안두희]] 살해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안두희 피살 사건)] === 출소 이후 === 출소 후에도 여러 사람들로부터 도움으로 일자리, 집 등을 제공받았다고 한다. 원래 버스기사로 일하던 [[소신여객]]에 복직하여 4년간 근무하다가, 퇴사 후 운전경력을 인정받아 2002년 개인택시 면허를 취득하여 2021년 6월 기준으로 부천에서 택시기사로 근무하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Q5mYDbDhVY0|관련 인터뷰]] [[2004년]] 각종 [[친일반민족행위자|친일반민족]]성 발언으로 구설에 올랐던 [[김완섭]]을 구타하면서 불구속 입건된 적이 있다. 김완섭은 꿍꿍이가 있었는지 박기서에 처벌 불원서를 내어 풀어주었고 이때 구타당한 김완섭은 "박기서는 안두희 살해범 박기서가 아니라, 나 김완섭 구타범 박기서로 역사에 남을 것이다."라고 말했으나, 당연히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143&aid=0000015668|#]] [[2011년]] [[김삼웅]] 前 독립기념관장과 [[http://cafe.daum.net/hyosasa/Kg7U/33|사진을 찍었다.]] 안두희 주살 15주년 기념 [[http://www.amn.kr/sub_read.html?uid=4117|인터뷰]] [[2013년]] [[8월 4일]] [[장준하]] 관련 최고 의혹 용의자 김용환을 찾아가 [[http://www.amn.kr/sub_read.html?uid=10225|따귀를 때리고]] [[http://youtu.be/HGkSw3VqJVI|추궁하기도 했다.]] 이후 김용환이 박기서의 처벌을 원치 않는다고 해서 별다른 충돌 없이 마무리되었다. 한동안 정의봉나누기라는 단체를 통해 정의봉을 보급하기도 했다. 박기서 본인이 직접 대나무를 불로 구워 만든 수공예품이라고 하는데 용도는 안마봉이다. 2019년 연합뉴스 TV에서 관련 다큐멘터리를 방영했다. [[https://www.youtube.com/watch?v=pwJ-Ri0zpuo|김구 70주기 연합뉴스 영상]] 2023년 8월 [[육군사관학교 독립유공자 흉상 철거 논란]]과 관련해서 [[서울의소리]] 유튜브와 인터뷰를 했다. [[윤석열]] 정권이 역적 짓을 하고 있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https://youtube.com/shorts/4ZE2eHkHy-A?si=Xuf_1SY4CZtgjzMK|#]] == 정의봉 (正義棒) == [[파일:견리사의견위수명.jpg|width=333]] 박기서가 안두희를 격살할 때 사용한 도구이다. 이 도구는 사건 이후 경찰이 증거물로 압수하였으나 재판 후 되돌려줬다. '''[[살인]]에 사용한 둔기를 범인에게 돌려줬다'''는 점에서부터 이 사건이 일반적인 살인 사건과는 매우 다르게 받아들여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범행도구는 형 선고와 함께 '''[[몰수]]하여 폐기해야 하는게''' 일반적이다.] 정의봉 옆에 쓰인 글자는 견리사의 견위수명(見利思義 見危授命). [[논어]] 현문편 13장에 나오는 구절로 "이익을 보거든 정의를 생각하고, 위태로움을 보거든 목숨을 주어라."라는 뜻이다. [[안중근]] 의사가 [[뤼순감옥]]에 갇혔을 때 쓴 글로도 유명하다. [[파일:촛불문화제 정의봉 할아버지.png]] 앞서 서술했다시피 이 사건 이후로 '정의봉'이라고 써놓은 몽둥이가 시위나 집회 때 흔히 사용되곤 한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진 이후 2016년 11월 12일 민중총궐기에서 어떤 할아버지가 [[다큐 3일]]에 직접 출연해서 인터뷰한 장면이 꽤나 화제가 되었다. 그 뒤 [[https://news.naver.com/main/ranking/read.nhn?mid=etc&sid1=111&rankingType=popular_day&oid=308&aid=0000023640&date=20180911&type=1&rankingSeq=8&rankingSectionId=102|정의봉은 쭉 한지로 감싼 채 박기서의 집에 잘 보관되어 있다가]]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10416049&viewType=pc|2018년 10월 안두희 살해에 사용한 밧줄과 장난감 권총과 함께 식민지역사박물관에 기증되어 역사의 한 자료로 보존되었다.]] == 평가 == === 긍정적 === [[안두희]]는 김구를 죽이고 나서 형을 선고받았으나, 1년 후 [[6.25 전쟁]]이 일어나자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어 1953년 소령으로 예편할 때까지 군에서 탄탄대로를 걸었다. 그리고 제대 후 강원도 [[양구군|양구]]로 건너가 군납업자로 상당한 재산을 축적하였다. 이렇듯 김구를 암살했음에도 잘 살고 있던 그를 대다수의 사람들은 영 좋게 보지 않았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박기서에게 살해당한 것은 지은 죗값을 뒤늦게 받은 것이라고 생각하였고, 이에 따라 박기서에게 [[정의구현]]이라는 호의적인 여론이 대부분이었다. 또한 사고가 일어난 당시인 [[1996년]]은 [[대한민국]]이 [[1987년]]에 일어난 [[6월 민주항쟁]]을 통해 [[군사독재]]에서 벗어난 지 10년도 되지 않던 해다 보니 [[민족주의]] 열풍이 뜨겁던 때였고, 범죄자의 인권에 대한 인식이 지금에 비해 낮은 편이었기에 더더욱 그러했다.[* 거기다 바로 전 해에 해방 50주년 기념 분위기를 성대히 치르면서 반일과 민족주의적인 분위기가 굉장히 고조된 면도 있다. 7, 80년대보다 반일 민족주의 감정이 도리어 훨씬 심했던 시기였던 것. 당장 [[전여옥]]의 '[[일본은 없다]]'가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시기도 90년대 중반이었다.] 상기 '수고하셨습니다'라는 루머 또한 당시 박기서의 행동에 통쾌해하는 사람이 많았기에 생겨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에도 박기서와 관련된 기사에는 그를 칭찬하는 댓글들이 많이 올라오며 '반도의 [[퍼니셔(마블 코믹스)|퍼니박]], [[배트맨(다크 나이트 트릴로지)|기서나이트]], [[각시탈(드라마)|박시탈]], [[데스노트|기서노트]]'라고 긍정적 희화화를 하는 표현도 있다. 당시 안두희에 대한 여론이 얼마나 나빴는지는 사망 후 장례식의 풍경에서도 볼 수 있다. 안두희의 빈소에는 조문객이 '''단 한 명도''' 오지 않았다. 가족은 이미 외국으로 보내서 어쩔 수 없다 치지만 [[친척]]조차 한 명도 오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당연히 영정사진도 없이 '''안 두 희''' 라는 이름만 걸려 있었을 정도였다. 유일하게 옆 빈소에서 장례 일을 하던 [[장의사]]가 대신 촛불을 켜고 정리를 해 주는 선에서 그쳤다.[[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6102500209137010&editNo=45&printCount=1&publishDate=1996-10-25&officeId=00020&pageNo=37&printNo=23348&publishType=00010|당시 기사]] 오프라인에서도 김구와 관련한 전시회나 시민단체들의 민족주의 고취 행사에 심심찮게 이 사람이 정의봉을 들고 있는 사진이 등장한다. 그래서 그는 적지 않은 [[한국인]]들로부터 '민족정기를 바로 세운 시대의 [[의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 부정적 === 박기서는 엄연히 법의 테두리 밖에서 독단적으로 [[사적제재]]를 저질렀기 때문에 법리적으로 비판감이 된다. 또한 일각에선 법을 중시해야 할 법원이 엄연히 계획적인 살인사건에 대해 법정 최저형의 판결을 해 국민정서를 이유로 사적제재를 일정 부분 용인했다는 점에서 공정성이 결여된 것 아니냐는 비판을 하기도 한다. 21세기 이후 [[법치주의]]적인 성향이 한국 사회 전반에 확산되면서 살인이라는 사적제재를 저지른 그가 사회적으로 마치 [[의사(동음이의어)#義士|의사]]처럼 떠받들어지는 데 대한 불편함을 나타내는 사람도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김구도 임정 이절 이전부터 일본인 민간인이나([[치하포 사건]]), [[김립(1880)|김립]] 같은 독립운동가를 사적으로 죽인 바 있다. 냉정한 시각에서 바라보면 박기서의 살인은 이런 사적제재의 연장선상에 가깝다. 안두희 살인 외에도 [[김완섭]]에 대한 폭행이나, 확실하지 않은 의혹만 믿고 죄의 유무도 불확실한데도 김용환[* [[장준하]]의 사망과 관련해 타살 의혹이 있는데, 장준하가 [[실족사]]했다는 목격 증언을 김용환이 하여 단순 실족사로 처리됐다.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01/0005951392|#]]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47/0002007328|#]] 자세한 내용은 [[장준하]] 문서 참고.]을 찾아가 그의 뺨을 치는 등 그 외 폭행을 저질렀던 것 때문에 비판받기도 한다. == 관련 문서 == * 권중희[* 박기서 이전에 안두희에게 사적 제재를 가한 인물. 안두희 처벌 탄원운동을 하던 권중희는 오랜 시간 동안 지속적으로 안두희를 쫓아다니면서 폭행을 통해 안두희의 증언을 유도해 냈다고 한다. 참고로 권중희의 저서를 읽고 박기서가 그를 찾아가 대화를 나눈 적이 있어 둘은 구면이었다.] * [[안두희 피살 사건]] * [[김구]] * [[백색테러]] * [[민족주의 테러]] * [[국민정서법]] * [[사적제재]] * [[김구 암살 사건]] * [[안두희]] * [[야마가미 데쓰야]][* [[아베 신조 피살 사건]]의 범인으로 박기서처럼 살인을 했으나 사람들에게 옹호받는다는 공통점이 있다.] [[분류:1948년 출생]][[분류:정읍시 출신 인물]][[분류:반남 박씨]][[분류:대한민국의 가톨릭 신자]][[분류:대한민국의 택시 기사]]Load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