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변경문서 보기수정 내역 연산군 (버전 비교) [include(틀:다른 뜻1, other1=다른 뜻, rd1=연산군(동음이의어))] [include(틀:역대 조선 국왕)]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972000, #bf1400 20%, #bf1400 80%, #972000)" {{{#ffd400 '''연산군 관련 틀'''}}}}}}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include(틀:조선의 왕자/목조 ~ 연산군)] ---- [include(틀:역대 조선 왕세자)]}}}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972000, #bf1400 20%, #bf1400 80%, #972000)" '''조선 제10대 국왕[br]{{{+1 연산군 | 燕山君}}}'''}}}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연산군20100529-6.jpg|width=100%]]}}} || ||<-2> {{{-2 연산군묘 전경}}} || ||<|2> '''출생''' ||[[1476년]] [[12월 2일]][* [[율리우스력]] [[11월 23일]].][br](음력 [[성종(조선)|성종]] 7년 11월 7일)|| ||[[한성부]] [[경복궁 교태전]][* 조선 역사상 최초로 중궁인 교태전에서 태어난 왕이다. 연산군 이전에도 궁궐에서 태어난 왕이 둘([[단종(조선)|단종]], [[성종(조선)|성종]]) 있으나 이들은 세자빈의 거처, 동궁인 자선당에서 태어났다.][br](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로(서울)|사직로]] 161)|| ||<|2> '''즉위''' ||[[1495년]] [[2월 3일]][*A [[율리우스력]] [[1월 25일]].] (18세)[br](음력 [[1494년]], [[성종(조선)|성종]] 25년 12월 29일)|| ||[[한성부]] [[창덕궁 인정전]][br](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서울)|율곡로]] 99)|| ||<|2> '''사망''' ||[[1506년]] [[11월 30일]][* [[율리우스력]] [[11월 20일]].] (향년 29세)[br](음력 [[중종(조선)|중종]] 1년 11월 6일)|| ||[[경기도]] [[강화군]] [[교동도|교동현]] 화개산 인근[br](現 [[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면]])|| || '''능묘''' ||[[연산군묘]](燕山君墓)[* [[중종반정]]으로 신하들에 의해 왕위에서 폐위되었기 때문에 '능'이 아니라 '묘'로 불린다.]|| ||<|4> '''재위기간''' ||'''{{{#ffd400 조선 왕세자}}}'''|| ||[[1483년]] [[3월 23일]][* [[율리우스력]] [[3월 14일]].] ~ [[1495년]] [[2월 3일]][*A][br]{{{-2 (음력 [[성종(조선)|성종]] 14년 2월 6일 ~ [[1494년]], 성종 25년 12월 29일)}}}|| ||'''{{{#ffd400 제10대 국왕}}}'''|| ||[[1495년]] [[2월 3일]][*A] ~ [[1506년]] [[9월 28일]][* [[율리우스력]] [[9월 18일]].][br]{{{-2 (음력 [[1494년]], 연산군 즉위년 12월 29일 ~ 연산군 12년 9월 2일)}}}|| ||<-2>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본관''' ||[[전주 이씨]] || || '''휘''' ||융(㦕) || || '''부모''' ||부왕 [[성종(조선)|성종]][br]생모 [[폐비 윤씨]][br]양모 [[정현왕후]] || || '''형제자매''' ||16남 12녀 중 장남 || || '''왕비''' ||[[폐비 신씨|거창군부인]] || || '''후궁''' ||{{{#!folding 20명 [ 펼치기 · 접기 ] [[숙의 이씨(연산군)|숙의 이씨]], [[숙의 윤씨(연산군)|숙의 윤씨]], [[숙의 곽씨]], 숙의 권씨, [[숙의 민씨]], [[장녹수|숙용 장씨]], [[숙용 전씨]], 숙용 조씨, [[숙원 최씨]], 숙원 장씨, 숙원 이씨, [[숙원 김씨(연산군)|숙원 김씨]], 나인 최전향, 나인 수근비, 나인 정금, 나인 김숙화, 여완 월하매, 여원 안씨, 장씨, 의녀 강금 }}} || || '''자녀''' ||10남 9녀 {{{#gray (10남 10녀) }}} || || '''종교''' ||[[유교]] {{{-2 ([[성리학]])}}} || || '''봉호''' ||'''연산군(燕山君)'''[* 실제로 연산군은 원자 - 왕세자였기 때문에 즉위 이전에 받은 봉호는 없으며, [[중종반정]]으로 폐위 이후에 받았다. 봉호는 [[연기군|구 연기군(燕岐郡)]](현 [[세종특별자치시]])의 별호인 연산([[燕]][[山]])에서 따왔다.] || || '''존호''' ||--헌천홍도경문위무대왕[br](憲天弘道經文緯武大王)-- ||}}}}}}}}} || [목차] [clearfix] == 개요 == >'''임금(上)이 두려워하는 것은 [[역사|사서(史書)]]뿐이다.'''[* 그러나 연산군은 자신이 두려워하던 [[조선왕조실록|역사]]에 영원히 [[폭군]]으로 남게 되었다.] 《춘추(春秋)》에 이르기를 ‘어버이를 위하는 자는 은휘(隱諱)한다.’ 하였으니, 사관(史官)은 시정(時政)만 기록해야지 임금의 일을 기록하는 것은 마땅치 못하다. 근래 사관(史官)들은 임금의 일이라면 남김없이 기록하려 하면서 아랫사람의 일은 은휘하여 쓰지 않으니 죄가 또한 크다. '''이제 이미 사관에게 임금의 일을 쓰지 못하게 하였으나 아예 역사가 없는 것이 더욱 낫다. 임금의 행사는 역사에 구애될 수 없다.''' >---- >[[연산군일기]] 63권, 연산 12년 8월 14일 辛酉 5번째 기사 [[조선]] 제10대 [[국왕]]. [[성종(조선)|성종]]의 적장자이자 [[중종(조선)|중종]]의 이복형으로, 5백 년 조선 왕조 역사에서 [[광해군]]과 함께 반정으로 [[폐위]]된 후 복위되지 못하여 '조(祖)'나 '종(宗)'으로 끝나는 묘호를 영영 끝까지 받지 못한 둘뿐이었던 임금 중 1명이다. [[휘]]는 '융(㦕)'. 폐위되었기에 [[묘호]]와 [[시호]]가 없지만 생전에 받은 '헌천홍도경문위무대왕(憲天弘道經文緯武大王)'이라는 존호가 남아있다.[* 물론 이마저도 [[중종반정]]으로 폐위되면서 삭탈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연산군'보다는 '폐주(廢主)', '폐왕(廢王)', '폐조(廢朝)'이라고 많이 불린다[* 즉 '''버려진 군주, 혹은 버려진 왕, 또는 버림받은 왕이란 의미이다.''' 조선 왕사에서 연산군이 지닌 위치를 보여주는 호칭이다.]. == 내용 == 본인에게 별다른 권력이 없던 [[정종(조선)|공정왕]][* 다만 왕위에 오르기 전에는 아버지 [[태조(조선)|태조]] 휘하의 군세를 통솔하는 2인자이자 실질적 장남으로서 입지가 든든했다. 만약 처음부터 막내 이방석([[의안대군(이방석)|의안대군]])이 아닌 영안군(공정왕)을 [[왕세자]]로 세웠다면 [[태종(조선)|정안군]]이 [[1차 왕자의 난|무인정사]]를 일으킬 명분 따위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후일 태종이 되는 정안군이 본격적으로 야심을 드러내고 실세가 되면서 왕으로서는 큰 권력을 휘두르지 못했다.]과 아무런 잘못없이 성인도 되기 전에 [[세조(조선)|숙부]]에게 강제로 내몰린 [[단종(조선)|노산군]]은 그래도 3백여 년 뒤 [[숙종(조선)|숙종]] 대에 가서 복권되어 각각 '정종(定宗)'과 '단종(端宗)'이라는 묘호를 받게 되었고, 본인과 함께 유일하게 복위 되지 못했던 [[광해군]]은 긍정적으로 보는 의견도 있는 반면[* 임진왜란 때 빈민구제와 행정조치를 취하는 등 세자시절 광해군의 공이 컸고 외치면에서는 좋은 평가를 받는다.] 연산군은 사망한 지 5백여 년이 넘게 지난 현재에도 그 어떠한 반론의 여지가 없고 긍정 평가가 사실상 전혀 없었던 유일한 막장 폭군의 평을 받고 있다. 연산군은 조선 왕조 역사상 중국 [[하나라]]의 [[걸왕]]과 [[상나라]]의 [[제신|주왕]]에 버금가는 폭정을 행사했던 왕이었다.[* 그마저도 중국사에서 걸왕과 더불어 폭군의 대명사인 주왕은 갑골문이 드러나며 그 행적이 파헤쳐짐에 따라 폭군이라는 이미지는 실제가 아니라 주나라에서 만든 프로파간다라는 얘기가 있으니,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주왕에게는 연산군과의 비교가 억울할지도 모른다.] 그의 [[공포정치]]로 인해 연산군 시기의 왕권은 조선 왕조 역사상 가장 견고해졌으나, 아이러니하게도 이 때문에 [[중종반정|신하들이 앞장서 왕을 갈아치우는 최초의 사태가 벌어졌다.]] 대중들에게 가장 잘 알려진 [[한국사]]의 대표적인 [[폭군]]이다. [[성종(조선)|성종]]과 [[폐비 윤씨|중전 윤씨]]의 적장자로 태어나 원자로 책봉되었고 성종의 뒤를 이어 [[조선/왕사|왕위]]에 올랐다. 그래도 즉위 초기에는 국정을 안정적으로 운영해 나갔다는 평가도 있었고, [[무오사화]]의 피바람이 있기는 하였지만 이는 [[사화]]의 원인을 제공한 삼사의 행동에 문제가 있었으며, 연산군이 이 기회를 제대로 포착한 것이다.[* [[무오사화]]의 불씨가 되었던 [[조의제문]]이나 김일손의 사초 기록 시도는, 당시 국왕이었던 연산군의 증조부인 세조에 대해 허위사실까지 가미해가면서 정통성에 심각한 훼손을 시도한 행위이기 때문에 비단 연산군 뿐만 아니라 다른 어떤 다른 왕이라도 묵과하기가 힘들 정도의 내용이었다. 왕의 가까운 직계조상의 정통성을 부정하는건 현 국왕의 정통성도 부정하는 것이다.] 설령 연산군이 아닌 다른 국왕의 치세에 그런 사건이 일어났더라도 큰 옥사가 터질 수 밖에 없는 사건이었기에 무오사화까진 연산군을 폐위해야 한다는 여론은 형성되지 않았다. 그러나 연산군이 재위 10년째의 [[갑자사화]] 기간에 보인 옥사의 잔혹성과 규모는 경악스러울 정도이고, 그 이후로 본격 막장 놀자판으로 막 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사실 후반의 이미지가 너무 강렬해서 그렇지, 전체 재위 기간 중에는 오히려 정상적으로 집무하였던 시기가 더 길었다.''' 그리고 반대로 말하자면 '''2년 남짓한 사이에 벌인 폭정만으로 폐위될만큼 그 정도가 심했다는 것.''' 재위 중후반부터 사치스럽고 방탕한 생활을 하며 폭정을 일삼은 탓에 결국 [[1506년]] [[중종반정]]으로 폐위되어 [[교동도]]로 [[유배]]를 간 뒤에 향년 29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 [[연산군/생애|생애]]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연산군/생애)] == 가계 == * 부: [[성종(조선)|성종]] * 모: [[폐비 윤씨]] * 왕비: [[폐비 신씨]][* [[신수근]]의 동생으로 성격이 후덕하고 엄정하기로 유명하였다. 실록을 보면 연산군이 신씨를 아낀 대목이 부분부분 등장하는데 '신씨가 왕대비와 [[선릉]]에 친히 제사를 하러 갔다고 연산군이 교외나 제천정에 나가 직접 맞이하였다'는 기록도 있고 신씨가 친잠례를 했다는 이유로 교서를 반포한 적도 있으며 그녀의 후덕함을 황금에 새겨 치하하기도 했다. 서슬퍼런 [[갑자사화]] 때 연산군을 거스르고도 뒤탈이 없었던 거의 유일무이한 인물인데 연산군이 손에 검을 들고 [[자순대비]]에게로 찾아가 얼른 밖으로 나오라며 협박을 하자 신씨가 막아 자순대비를 구원하였다. [[중종반정]] 후 연산군과 신씨는 유배될 때 각각 다른 곳에서 보내졌는데 신씨는 "연산군과 함께 가게 해달라"고 울며 매달렸다고 한다. 실록에 따르면 연산군이 죽자 교동수직장 김양필, 군관 구세장은 이 사실을 [[중종(조선)|중종]]에게 보고하면서 "죽을 때 다른 특별한 말은 없었고 그냥 [[폐비 신씨|중전]]이 보고 싶다는 말만 남겼습니다"라고 말했다. 연산군이 죽고 난 뒤 그의 신주는 신씨가 직접 모셨고 원래 연산군의 무덤은 처음에 [[강화도]]에 있었지만 신씨가 간청하여 몇 년 뒤 오늘의 위치로 이장했는데 신씨 역시 사망한 후 연산군의 옆에 묻히게 되었으니 결국 유언은 이루어진 셈.] * 딸: --[[휘신공주]]-- 이수억(李壽億)[*태지 명 홍치 4년(1491년) 9월 2일 해시에 태어난(皇明弘治肆年玖月貳日亥時生)/세자빈의 딸 수억아기씨의 태를(世子嬪女壽億阿只氏胎)/홍치 6년(1493년) 7월 5일 유시에 묻음(弘治陸年柒月伍日酉時藏)][* 큰딸 [[휘신공주]]는 구문경에게 시집가서 아들 구엄을 낳았는데, 구엄이 연산군을 시봉(侍奉)했고, 지금도 구엄의 후손들이 연산군의 묘를 돌보고 있다. 구엄은 연산군의 외손 봉사를 하면서 왕실로부터 많은 특혜를 받았다. 오래도록 왕실의 외척으로 예우를 받았고, 범죄를 저질러도 연산군의 제사를 끊어지게 할 수 없다는 이유로 감형의 혜택을 받았다. 그러나 구엄에게도 아들이 없었고, 구엄이 사망한 후 외손인 이안눌이 연산군의 제사를 계승했다. 이안눌은 구엄의 친외손자는 아니었는데, 이동의 아들로 태어나 아저씨뻘 되는 이필의 양자로 입양되었고, 그 이필의 부인이 바로 구엄의 딸이었다. 연산군의 제사는 부인 신씨가 시작하여 외손자인 구엄에게 이어졌고, 다시 구엄의 외손자인 이안눌과 그의 후예들에게로 이어졌다.] * 딸: 왕녀[* (중력) 금상 전하(今上殿下)가 우의정(右議政) '''신승선(愼承善)의 따님을 맞이하여 비(妃)로 삼아서 2녀를 탄생하였는데, 모두 어리다."''' - 《성종대왕 묘지문》] * 아들: 원손(元孫)[* 왕세자빈(王世子嬪)이 원손(元孫)을 탄생(誕生)하였다. - 《성종실록, 성종 25년 2월 23일 임오 5번째기사》. 국기일(國忌日)이었는데, 원손(元孫)이 졸(卒)하였다. (후략) - 《성종실록, 성종 25년 3월 29일 무오 1번째기사》] * 딸: 왕녀[* 다만 중궁(中宮)의 산실(産室)이 동궁(東宮)에 있는데, '''다음 달은 바로 중궁의 산월'''이라 <후략>-《연산 1년 2월 11일 을축 1번째기사》] * 아들: [[폐세자 이고]](廢世子 李𩔇)[*태지2 명 홍치 10년(1497년) 12월 19일 자시에 태어난(皇明弘治十年十二月十九日子時生)/원자 금돌이 아기씨의 태를(元子金石乙伊阿只氏胎)/홍치 14년(1501년) 7월 초2일 미시에 묻음(弘治十四年七月初二日未時藏)][* 반정 당시 세자 이고는 8살이었는데, 학구열이 높아서 마치 할아버지 [[성종(조선)|성종]]의 풍모를 가지고 있었다는 말이 전해 내려온다. 야사에 따르면 중전 신씨의 오빠인 [[신수근]]이 [[박원종]]으로부터 [[중종반정|반정]]에 참여해달라는 요구를 받았는데, “임금은 포악하지만 세자가 총명하니까 기대를 걸어보자”며 참여하지 않아 결국 역적으로 몰려 제거되었다고 한다.] * 아들: --[[창녕대군]]-- 이성(李誠)[*태지3 명 홍치 13년(1500년) 5월 20일 미시에 태어난(皇明弘治十三年五月二十日未時生)/대군 인수아기씨의 태를(大君麟壽阿只氏胎)/홍치 17년(1504년) 정월 29일 인시에 묻음(弘治十七年正月二十九日寅時藏)] * 아들: 왕자 이인수(李仁壽)[*태지4 명 홍치 14년(1501년) 5월 14일 오시에 태어난 대군 인수(仁壽) 아기씨의 태를 홍치 14년(1501년) 9월 12일 축시에 묻다. - 《대군인수(仁壽)아기씨태지》][* 전교하기를, '''"둘째 대군(이인수)이 졸하였으니''', 임사홍을 불러 지리관(地理官)들을 데리고 산소 자리를 가보게 하라. 또 이총수(李聰壽) 아기의 산소 자리 본 관원을 가두고 국문하라. 대저 산소 자리를 보는 것은 동생에게도 모두 길하게 하려는 것인데, 지금 이영수(李榮壽)·총수 두 아이가 잇따라 죽으니, 이는 지리 보는데 조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였다. - 《연산군일기, 연산 9년 10월 18일 신해 6번째기사》] * 여덟째: [* 어서(御書)를 내리기를, (중략) 1. '''왕비(王妃)의 해산(解産)이 임박'''했는데, 만약 해산한다면 상사(喪事)와 소선(素膳)에 관한 일을 예관(禮官)을 불러서 의논하도록 하라." 하였다. (후략) - 《연산군일기, 연산 8년 5월 29일 경자 3번째기사》. 《연산군부인 신씨의 묘지명》에 신씨가 아기 때 죽은 자식들도 포함하여 4남 3녀를 낳았다고 적혀있고 아버지 신승선이 사망할 당시, 신씨는 만삭이었는데 연산군이 이를 걱정하여 신씨에게 곡애를 못하게한 기록이 있다. 이것으로 보아 부친상의 충격으로 여덟번째 왕손은 유산 된 것으로 보인다.] * 후궁: [[숙의 이씨(연산군)|폐숙의 이정이(李貞伊)]] * 아들: --[[양평군(조선)|양평군]]-- 이인(李仁)[*태지5 명 홍치11년(1498년) 11월 27일 진시에 태어난(皇明弘治十一年十一月二十七日辰時生)/왕자 강수아기씨의 태를(王子康壽阿只氏胎)/홍치 12년(1499년) 3월 17일 자시에 묻음(弘治十二年三月十七日子時藏)][* 양평군 이인의 이름은 중종 8년에 다시 등장하는데 '만손'이라는 이름의 10대 소년이 스스로 양평군을 자처하는 일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자신은 남학동에서 성장하다가 [[중종반정]]이 일어나자 자신의 종인 '보동'이 자신과 나이가 비슷한 아이를 대신 내어 놓고 자신을 보자기로 덮어 다른 곳으로 빼돌린 후 여러 곳을 전전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양평군을 어릴 적부터 키웠던 '이손'이라는 인물이 증인으로 나타나면서 만손의 사건은 자작극으로 결론이 내려졌다. 이손은 자신이 알고 있는 양평군의 신체적인 특징과 만손의 특징이 너무나도 다르기 때문에, 만손은 거짓을 말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고 주장한 것이다. 결국 만손은 처형되었다.] * 후궁: [[숙의 윤씨(연산군)|폐숙의 윤씨]] * 후궁: [[숙의 곽씨|폐숙의 곽씨]] * 후궁: 폐숙의 권씨 * 후궁: [[숙의 민씨|폐숙의 민씨]] * 후궁: 폐숙용 [[장녹수]]([[張]][[綠]][[水]])[* 장녹수는 [[성관계]]를 안 하기로 유명한 [[예종(조선)|예종]]의 아들 [[제안대군]]의 사노비 여종 출신으로서, 당시 30대였고 [[유부녀]]였으나 엄청난 [[동안]]과 애교로 연산군의 마음을 녹여서 가지고 놀았다고 전해진다. 연산군의 [[후궁]] 노릇을 하면서 권세를 누리다가 [[중종반정]] 이후 처형되었다. 그런데 총애를 받았다면서도 의외로 연산군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는 딸인 이영수 한 명뿐이었다.] * 딸: 왕녀 [[이영수(1502)|이영수(李靈壽)]][*태지6 왕녀 영수의 태를(王女靈壽胎)/홍치 15년([[1502년]]) [[11월 12일]] 양주군 봉접면에 묻고(弘治十五年十一月十二日藏于楊州郡棒接面)/[[쇼와|소화]] 4년에 옮겨 묻음(昭和四年月日移藏)][* (전략) 왕이 '''녹수(綠水)를 총애해서 딸 하나를 낳았는데, 이름을 영수([[靈]][[壽]])라고 했다.''' 왕이 이를 매우 사랑했는데, (후략) - 《연산군일기》, 연산 8년 [[12월 8일]] 병오 1번째 기사] - 권한(權鷴)의 처[* (전략) "권한은 서자(庶子)로서 분수를 모르고 장 숙원(張淑媛)의 딸 【폐주(廢主)의 숙원 녹주(綠珠)가 폐주에게 굄을 받아 낳은 딸이다.】 에게 은밀히 장가들었으니 지극히 놀라운 일로, 본사(本司)가 추문하다가 형장 추문하기를 청하였습니다. (후략)- 《중종 24년([[1529년]]) [[6월 1일]] 갑자 2번째 기사》] * 후궁: [[숙용 전씨|폐숙용 전전비(田田非)]] * 딸: 왕녀[* (전략) 이것은 '''전 숙원(田淑媛)의 딸'''이 몽선의 집에 피접해 있었는데 그 인연으로 대내에 아뢰게 되어 이런 명이 있었다. (후략) -《연산군일기, 연산 11년 10월 12일 계해 1번째기사》][*B 숙용 전씨의 딸 = 이정수(李貞壽)일 가능성이 높다. 이정수(李貞壽)가 연산 11년(1505년) 3월 11일에 태어나고 약 한달 뒤인 4월 18일에 숙원이었던 전씨가 이유없이 숙용으로 진급하였는데 딸을 낳고 품계가 올라간 것으로 추측된다.] * 후궁: 폐숙용 조씨 * 후궁: [[숙원 최씨|폐숙원 최보비(崔寶非)]] * 후궁: [[숙원 김씨(연산군)|폐숙원 김귀비(金貴非)]] * 후궁: 폐숙원 장씨 * 후궁: 폐숙원 이씨 * 후궁: 폐숙원 정씨 * 후궁: 궁인 정금(鄭今) * 딸: 왕녀 이함금(李咸今)[* "폐주(廢主) 가 괴던 장녹수(張綠水)에게서 태어난 이영수(李靈壽)와 '''정금(鄭今)에게서 태어난 이함금(李咸今)'''에게 가사(家舍) 1좌(坐)와 노비(奴婢) 각각 15구(口)와 전(田) 각각 5결(結)을 내리고, 모두 선원록(璿源錄)에 올리소서." -《중종실록, 중종 12년 9월 1일 갑술 2번째기사》][*C 이함금(李咸今) = 신거홍의 처일 가능성이 높다. 연산군의 왕녀들 중 중종시대에도 생존기록이 있는 사람은 휘신공주, 이영수, 이함금 뿐인데 휘신공주는 이미 중종반정 전에 혼인을 하였고 이영수(李靈壽)는 권한의 처가 되었기 때문이다.] * 후궁: 궁인 최전향(崔田香) * 후궁: 궁인 수근비(水斤非) * 후궁: 궁인 김숙화(金淑華) * 후궁: 여완 월하매(月下梅) * 후궁: 여완 안씨 * 후궁: 장씨 * 후궁: 의녀 강금(姜今) * 생모미상의 왕자녀 * 왕녀 이복억(李福億)[*태지7 홍치 12년(1499년) 기미에 태어난(弘治十二年己未生)/옹주 복억의 태를(翁主福億胎)/홍치 12년 기미 5월 9일 삼천군 삼척면에 묻고(弘治十二年己未五月九日藏于三陟郡三陟面)/소화 4년에 옮겨 묻음(昭和四年月日移藏)] * 왕자 이돈수(李敦壽)[*태지8 명 홍치 14년(1501년) 2월 초 4일 미시에 태어난(皇明弘治十四年二月初四日未時生)/왕자 돈수아기씨의 태를(王子敦壽阿己氏)/홍치 19년(1506년)음력 9월 2일[* 양력 9월 18일] 해시에 묻음(弘治十八年二月十九日亥時藏)] * 왕녀 이복합(李福合)[*태지9 ‘홍치(弘治) 14년(1501, 신유) 출생. 왕녀 복합의 태를 홍치 14년(1501, 신유) 6월 17일에 황주군 인교면에 묻음. 소화 4년(1929)에 옮겨 묻음(弘治十四年辛酉生 王女福合胎 弘治十四年辛酉六月十七日 藏于黃州郡仁橋面 昭和四年 月 日移藏).’ - 《연산군의 딸 왕녀 복합(王女 福合, 1501~?)의 태지석》] * 왕자 이총수(李聰壽)[* 전교하기를, "둘째 대군이 졸하였으니, 임사홍을 불러 지리관(地理官)들을 데리고 산소 자리를 가보게 하라. 또 이총수(李聰壽) 아기의 산소 자리 본 관원을 가두고 국문하라. 대저 산소 자리를 보는 것은 동생에게도 모두 길하게 하려는 것인데, 지금 이영수(李榮壽)·총수 두 아이가 잇따라 죽으니, 이는 지리 보는데 조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하였다. - 《연산군일기, 연산 9년 10월 18일 신해 6번째기사》][*D 1. 대군 이인수가 죽었을 때, 산소 자리를 보는 것은 동생에게도 모두 길하게 하려는 것인데 이총수 아기의 산소 자리를 잘 알아보지 못해 두 아이가 연달아 죽었다는 점 2. 대군 이인수에게는 대군이라 칭하지만 이 둘에겐 그러지 않은 것으로 보아 후궁 소생으로 보인다.] * 왕자 이영수(李榮壽)[*D] * 왕녀 이정수(李貞壽)[*태지10 명 홍치 18년(1505년) 3월 11일 유시에 태어난(皇明弘治十八年三月十一日酉時生)/왕녀 정수 아기씨의 태를(王女貞壽阿只氏胎)/홍치 18년 5월(弘治十八年五月十)/7일 묘시에 묻음(七日卯時藏)][*B] * 왕자 이태수(李泰壽)[*태지11 명 정덕원년(1506년) 3월 17일 인시에 태어난(皇明正德元年三月十七日寅時生)/왕자 태수아기씨 태를(王子泰壽阿只氏胎)/정덕원년 6월 18일 자시에 묻음(正德元年六月十八日子時藏)][* 1506년 연산군의 아들들이 모두 사사 당했을 당시, 이태수는 포함되어있지 않았는데 이를 보아 중종반정 전에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 왕녀 - [[신거홍의 처]][* 서녀는 신거홍(愼居弘)에게 시집갔다. 벼슬은 판관이다. 후취로 시집갔다.- 《연산조 고사본말(燕山朝故事本末)》][*C][* 생모가 누구인지 알려지지 않은 서녀는 신거홍에게 시집가서 4남 4녀를 낳았다.] 연산군은 유일한 정실 부인이었던 [[거창군부인]] 신씨와의 사이에서 연년생으로 8명의 자식을 얻었다.[* 거창군부인 신씨가 친상을 입을 당시에 8번째 자식의 해산이 잘못된 것으로 추정되어 정상적인 통계는 7명이다.] 반면 연산군이 후궁에게서 얻은 자식은 5남 7녀로 후궁들이 낳은 자식들을 모두 합친다 해도 연산군이 신씨 1명과의 사이에서 낳은 자식들보다 고작 3명 많았다. 연산군의 후궁 숫자가 정확히 얼마나 되는지는 역사 책마다 다른 편이라 단언을 내릴 순 없지만 가장 많은 경우를 가정하면 약 20명인데 그 20명의 후궁들 중 정작 연산군의 아이를 가진 후궁은 별로 없었다는 얘기가 된다. 또한 자식들 중 거창군부인 신씨의 자식들을 가장 아꼈다고 한다.(특히 장녀 휘신공주를 워낙 아끼고 챙겼다고...)[* 아들중에서는 창녕대군 이성을 가장 아꼈다고 한다.] 연산군과 거창군부인 신씨 사이에서 두 번째로 태어난 아들이었으나 살아남은 아들 중 장남이었던 세자 이고의 성품은 아버지 연산군과 매우 정반대였다고 하는데[* 사실 연산군도 세자시절~즉위 초중반까지는 매우 정상적이였으며 재능이 뛰어나다고 언급되있으며 영특하다고 기록되있다. 다만 학문을 배우는 것을 몹시 싫어했으며 학문에는 재능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세자시절 연산군은 학문을 배우는 것을 몹시 싫어해 자주 빼먹기 일수여서 성종에게 잦은 꾸중을 들었으며 또한 문리를 통하지 못하여 학문의 진도를 한 단계씩 늦추면서 배워나갔다고 한다.] 세자 이고는 만 4세에 왕세자로 책봉되었는데 실록에 연산군의 언급에 따르면 "자질이 온화하고 도량이 원대하며 어릴 때부터 높게 빼어나서 이미 성인의 도량이 있었고 장성하여서는 훌륭한 덕망으로써 진실로 구가의 돌아감에 응할만하고 하다" 라고 기록되있다. 또한 총명하고 학구열이 높았다고 한다. 연산군이 내관에게 세자가 얼마나 성취하였나고 묻자 내관은 "세자의 기상이 꼭 성종을 닮았다"고 말하였는데 말이 끝나자마자 무섭게 연산군은 내관을 향해 칼로 쳐서 내관은 거의 죽다 살아났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연산군은 워낙 성종에게 증오와 반감을 가졌기에 내관의 발언에 잠시 화를 불러일으킨 것이 아닌가는 추측이있다.] 이 외에도 반정이 일어나기 전 박원종 등이 중종을 임금으로 추대할 뜻을 품고 일찍이 거창군 신씨의 친오빠이자 연산군의 처남인 신수근에게 누이와 딸[* [[단경왕후]] ] 중 어느 편이 더 중하냐고 묻자 신수근은 "임금은 비록 포악하나 총명한 세자를 믿고 살겠다" 라고 말했는데 결국 중종반정 때 신수근은 역적에 몰려 제거당했다. 실록에 따르면 세자 이고가 만 7세 됐을 때에는 성품이 굳세며 침중하고 엄숙하였는데 어느 날 연산군이 경회루에서 잔치를 치르며 흥청들과 함께 음악을 연주하고 있는 도중 세자 이고를 불러 흥청들을 가리키며 내가 죽은 뒤에도 이들을 잘 돌보겠냐고 물었는데 뜻밖에도 이고는 연산군 물음에 대꾸하지 않고 묵묵히 있어[* 이고는 아비의 물음에 대답할 가치가 없고 한마디로 개무시한 것으로 보인다.] 연산군은 이 일을 계기로 세자를 꺼렸다고 한다.(은근히 아버지와 기싸움을 하는 듯한...) 연산군의 아들 중에서 연산군이 폐위된 이후 반정 공신들에 의해 사약을 받아 사사되었다고 이름이 기록된 것은 4인이며 이들 이외의 연산군의 아들들도 추가로 사사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사사받은 4인의 아들 이외에는 대체로 영아 시절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반정 공신들의 조치 역시 당시에는 엄연한 불법인데 조선의 법도는 설령 역적의 자손이라 해도 16세 미만의 경우는 사형을 금하고 노비로 만드는 것이 최고형이었다. 딸들은 여자라 왕위에 위협되지 않아 손대지 않았다. 서인으로 전락하긴 했지만 어차피 딸들은 출가외인인지라 신분에 큰 변화는 없었고, 게다가 삼불거(三不去) 중 하나로 부인을 내쫓아도 돌아갈 곳이 없는 경우 내치는 것은 법으로 금지되어 있었다.[* 사실 조선시대 아내가 실질적으로 쫓겨날 수 있는 사유는 직접적인 간통, 시부모에 대한 악질적인 불효, 치료 불가능한 전염병 등으로 극히 한정되어 있었다.] == 기타 == * 흔히 연산군을 '''조선 왕조 역사상 처음으로 쫓겨난 왕이자 군(君)으로 강등당한 왕'''이라고 하지만 사실 이는 연산군이 처음은 아니었다. 진짜로 처음으로 쫓겨난 왕이자 군으로 강등당한 왕은 바로 '''6대 임금인 [[단종(조선)|단종]]이었다.''' 단종의 경우 숙부인 수양대군([[세조(조선)|세조]])에 의해 강제로 상왕으로 물러난 것으로도 모자라서 결국 조선 왕조 처음으로 군으로 강등되면서 '노산군(魯山君)'이 되었고 묘도 능이 아닌 '노산군묘(魯山君墓)'라고 불렸으며 실록 또한 '노산군일기(魯山君日記)'로 격하되고 종묘 신위에도 모셔지지 않았다. 연산군의 경우 노산군에 이어서 두 번째로 이 사례를 가진 왕이지만 후에 19대 임금 [[숙종(조선)|숙종]]이 노산군의 지위를 격상하여, 노산대군에 이어 '단종(端宗)'이라는 묘호를 얻었고 노산군묘도 '장릉(莊陵)'으로 격상되었으며 실록 또한 일기에서 실록으로 격상되고 종묘 신위에도 뒤늦게 모셔지게 되었다. 이에 비해 연산군은 재위 기간동안 폭정을 일삼고 살육을 일삼았던 악행 때문에 왕위에서도 축출되고 단종에 이어서 두 번째로 군으로 강등되어서 묘도 당연히 '연산군묘(燕山君墓)'로 불리게 되었고 후에 15대 [[광해군]]이 이러한 사례를 이어가면서 조선 왕조에서 유이하게 광해군과 함께 군 지위를 받고 실록마저도 일기로 격하되었으며 종묘 신위에도 모셔지지 않은 왕으로 남게 되었다. 또한 연산군이 어머니 [[폐비 윤씨]]를 '제헌왕후(齊獻王后)'로, 폐비의 묘를 '회릉(懷陵)'으로 격상시켰지만 후에 [[중종반정]]이 일어나면서 다시 왕비에서 폐비로, 능에서 묘로 환원되었다. * 당시의 [[군주]] 체제에 '폭군의 절대적 기준을 세운 왕'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연산군이 폭군으로 [[흑화]]한 이후, 그가 행한 패악질들은 '성군으로는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행위'로 간주되었다. 설령 그것이 해당 [[임금]]의 입장에서는 자잘하고 미미한 [[취미]] 생활의 하나였다고 해도, 반드시 금해야 할 [[금기]]로 치부되어 막았으니[* 왕들이 이런 것을 취미로 즐기려고 시도하면 신하들이 득달같이 "전하도 연산군이 되시려고 그러세요?"라고 반발하고 나서기 때문에 불가능했다.] 후대의 왕들에게 [[반면교사]]가 된 셈이다. 그러나 후기로 갈수록 이는 [[왕권]]을 견제하는 수단으로 악용되기도 했다. 일단 [[왕]]으로서의 권한으로 일을 해보려고 하면 연산군을 사례로 들어 [[신하]]들이 공격했기 때문에, 왕으로서의 정당한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권리를 제한당했고 그럴수록 신하들은 자신의 권한을 강화시켜 나갔기 때문이다. 왕이 신권을 어떻게든 견제하려고 하면 이건 연산군이나 했던 일이라고 반항하는데 뭐라 반박하기도 까다롭기 때문이다. 연산군으로 인해 신하들이 후대 왕에게 압력을 가하는 빌미가 되었다. * [[사림]]들은 연산군이 몰래 [[임사홍(조선)|임사홍]]의 집을 찾아가 임사홍으로부터 자신의 어머니 [[폐비 윤씨]]가 사형당해 죽었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었다고 믿었는데 증거가 있는 이야기는 아니다. 반정 [[공신]]들이 반정 명분을 공고히 하기 위해 연산군에 관한 이야기 중 일부를 날조하거나 과장했다는 주장도 있다. 실제로도 흔히 [[설화]]에서 다루는 외할머니 신씨와의 접촉설도 정작 연산군은 즉위 직후부터 신씨에게 양곡을 후원하는 등 폐비와 그 가족들의 행방을 잘 알고 있었으며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임사홍의 충동질도 정작 임사홍은 [[갑자사화]] 도중에 친분 문제로 같이 [[숙청]]당할 뻔한 사실을 생각해보면 설득력이 매우 떨어진다.[* 이를 다루는 도서로 《연산군을 위한 변명》, 《연산군, 그 허상과 실상》 등의 책이 있다.] 반정 공신 대부분이 연산군 체제에서 근무하던 [[관료]]였으며 대표적인 인물로 [[박원종]]이 있다. <[[태종실록]]>에서 [[1차 왕자의 난]]을 [[정도전]]의 반란을 조기에 진압하기 위해 일으킨 사건인 것처럼 서술했듯 연산군의 악행 또한 과장되었을 수 있다는 주장이다. * 대하드라마에서 연산군이 임금이던 시절 자신을 연산군으로 부르는 것은 사실 [[고증오류]]이다. 연산군이란 이름은 [[중종반정]]으로 폐주가 되면서 왕자 신분으로 강등될 때 새로 붙여진 봉호이기 때문이다. 연산군은 부왕인 성종의 적장자 자격으로 원자에 책봉되었다가 이후 왕세자 신분을 거쳐 임금의 자리에 오른 인물이므로 세자 시절에 봉군된 적이 없다.[* 이는 복권 전까지 왕자로 취급되어 노산군으로 불렸던 [[단종(조선)|단종]]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단, [[광해군]]은 폐위되면서 봉호를 받은 게 아니라 세자 책봉 전에 받은 봉호가 광해군이다. 그는 본디 부왕 [[선조(조선)|선조]]의 후궁인 [[공빈 김씨]] 소생인 데다 [[임해군|장남도 아니었으니]] 처음부터 세자가 될 수 없었던 신분이었기에 세자 시절뿐만 아니라 왕으로 있는 동안에도 내내 정통성 논란에 시달려야 했다.] 장자로서 세자를 거쳐 왕위에 오른 조선시대 다른 임금들도 마찬가지로 봉호가 없다. 27명 중에서 이러한 사례에 포함되는 임금은 11명 뿐이다.[* [[문종(조선)|문종]]([[세종(조선)|세종]]의 적장자), [[단종(조선)|단종]](문종의 적장자), '''연산군'''([[성종(조선)|성종]]의 적장자), [[인종(조선)|인종]](중종의 적장자), [[현종(조선)|현종]]([[효종(조선)|효종]]의 적장자), [[숙종(조선)|숙종]](현종의 적장자), [[경종(조선)|경종]](숙종의 서장자), [[정조(조선)|정조]]([[사도세자|장조]]의 적장자), [[순조]](정조의 서장자), [[헌종(조선)|헌종]]([[효명세자|문조]]의 적장자), [[순종(대한제국)|순종]]([[고종(대한제국)|고종]]의 적장자)] * 성종실록을 보면 연산군 즉위 전 성안에 요귀(妖鬼)들이 나타났다고 한다. 호조 좌랑 이두(李杜)의 집에서 여귀(女鬼)[* 성종실록 17년 11월 25일의 기록에 따르면, 이두의 집의 귀신은 상반신이 없었다고 한다.]가 말을 하며 음식을 먹고[* 상반신이 없어 음식이 허공에서 없어지는 것처럼 보였다고 한다.], 영의정 [[정창손]]의 집에서는 귀신이 집안의 물건을 옮겼다는 [[폴터가이스트]] 기록이 있다. * 어린이용 위인전이나 역사 만화에서는 사치스러운 [[폭군]]이었음을 강조하기 위해서인지 간혹 비만인 모습으로 묘사되기도 하는데, 실제와 거리가 멀다. 연산군의 체형은 호리호리 하였으며 실록에서는 연산군이 허리와 몸이 가늘어 한 군사에게 웅장하지 못하고 위대하지 않다며 한마디로 임금의 위엄이 없다는 비판을 들었고 야사에서는 외모가 [[폐비 윤씨]]를 닮아 [[미남|고운 이목구비]]를 가지고 있어 [[오토코노코|여인네 같다]]고 뒷말을 들었다고 한다. 이러한 모습 때문에 연산군은 자신의 외모를 기피하고 컴플렉스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대에는 수염이 길고 육중하고 웅장한 떡대좋은 체형이 건강과 더불어 미의 상징으로 여겼다.[* 당시 기준으로는 못생겨서 연산군이 잘생겼다고 쓰라는 명을 내렸다는 얘기가 있는데 이는 사실 무근이다.] 성격은 [[태조(조선)|선조]]들을 닮아서 무인 기질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키는 작은 키도 중키도 아닌[* 연산군과 중종이 키가 작았다거나 중키였다는 얘기도 있는데 실제로는 둘 다 키가 컸다는 기록 뿐이며 키가 작거나 중키였다는 묘사는 야사나 실록에 전혀 언급이 없으며 온라인상에서 잘못 알려진 정보이다.] 전해내려온 기록에 따르면 실제 연산군은 아버지 [[성종(조선)|성종]]을 닮아 키가 컸다고 한다. * 연산군의 아버지 [[성종(조선)|성종]]의 키가 정확히 몇 척인지는 전해 내려오는 것이 없지만, 간접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기록이 전해져온다. 기록에 따르면 어느 날 [[성종(조선)|성종]]이 내전에 있는 [[폐비 윤씨|중전 윤씨]]를 찾아갔는데 마침 명주를 짜고 있던 중전이 베틀에서 내려와 [[성종(조선)|성종]]을 맞이하면서 어찌 그리 키가 크냐고 물었다고 한다. 그러자 성종은 자기보다 더 큰 사람도 있다며 당시 조정 대신 중 장신 축에 들었던 허종이라는 신하를 내전에 불러들였다고 한다. 실록을 포함한 기록에는 [[허종(조선)|허종]]이 기골이 장대하다라는 표현만 있고 구체적인 키는 묘사되지 않았는데 조선 후기 인물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사고에 의하면 11척 2촌이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를 당시 척으로 환산하면 키가 2미터가 족히 넘는다고 한다. 비교하면서 성종은 조정에서 허종 다음으로 자신이 제일 컸다고 하였는데 이를 볼 때 성종도 상당히 장신이었다는 것을 예측할 수 있고 연산군도 아버지를 닮아 키가 컸다고 하므로 장신이었을 것이다. * 즉위 초에 [[치통]]을 앓았다고 한다. 근데 아버지 [[성종(조선)|성종]]과 이복동생 [[중종(조선)|중종]]도 치통을 앓았다는 기록이 있다. 일종의 가족력. 중종은 무려 재위 25년까지 치통으로 고생했다고 하며, 연산군은 즉위 초에 치통을 계기로 최초로 칫솔을 사용한 인물로 남아있다. 나무로 만든 양치목으로 양치를 했다는 내용. * 그런데 이로 인해 연산군이 항상 치통으로 고생해 표정과 입매가 비틀어졌다 또는 돌아갔다는 떠도는 이상한 [[루머]]가 나돌고 있어 연산군 외모에 대해 잘못 오해하는 경우가 있는데, 실은 즉위 초에만 치통을 앓았었고 가볍게 앓았는지 극심하게 않았는지에 대한 언급은 나와있지 않고 실록에서는 그저 치통을 앓았다고만 표기되어 있다. 일생동안 앓지는 않았으며 치통으로 인해 표정과 입매가 비틀어졌다는 등 이에 대한 내용은 일절 실록이나 야사에 존재하지 않는 기록들이다. 연산군의 외모 묘사에도 이에 대한 내용은 찾아볼 수 없으며 이 외에도 온라인상에서 네티즌이 실록에 연산군이 손이나 빨고 있고 하도 화를 내 주름이 졌다고 주장한 적이 있으나 연산군은 손을 빨은 적도 없고 자주 화를 내지도 않았으며 얼굴에 주름이 있었다는 기록은 이 역시 마찬가지로 일체 언급되지 않았다. 연산군 외모 기록에도 이에 대한 내용은 존재하지 않는다. 연산군이 폭군이라 폭군의 이미지만 보고 날조된 내용이 많이 퍼진 것 같다. * 연산군을 정말 고생시켰던 질병은 [[피부병]]이다. 세자 시절부터 연산군은 창진이라는 피부병을 앓았으며 치료의 기록이 자주 나온다. 치료의 효과를 봐 [[성종(조선)|성종]]이 의원과 내관에게 말과 목면을 내려주었다. 또한 창병이 아닌 면창이라는 피부병을 앓았었다. 창병을 앓은 기록은 없다. 세자 시절부터 즉위하고 나서도 면창을 앓아 이때 신하들은 면창의 원인을 추위로 보고 연산군에게 추위를 피하라고 하였다. 이후 연산군의 얼굴이 붉어지고 고름이 나며 소변이 잦은 증상이 있자 어의들은 면창의 원인을 추위로 인한 양기[* 본문에서 뜻하는 양기는 심신의 기력을 뜻한다.] 부족과 스트레스로 보았다. 그 이후에도 임금의 얼굴에 진물과 종기[* 부스럼]로 성할 날이 없어 면창을 치료하기 위해 의관들이 명나라에 가서 웅황해독산과 선응고라는 귀한 치료제들을 구해왔다. 우선 일단 함부로 임금의 용안에 먼저 사용할 수 없기에 연산군과 같은 피부병 증상이 있는 노비에게 시험했다. 이후에 치료제들을 사용한 노비의 얼굴에 있는 종기가 서서히 완화되는 효과를 보이자 의관들은 다시 명나라에 가 치료제들을 많이 구해오고 제조법을 물어온 다음 임금에게 치료를 하기 시작했다. 또한 찬바람을 피해 몸을 최대한 따뜻하게 하였고 양기에 좋은 음식과 약재로 기력을 보충하여 원기와 양기를 회복하였으며 소변이 잦는 증상도 멈추었다고 한다. 그 이후에 면창 증상에 대한 언급이 딱 한번 있었으나 [* 아직 치료를 진행하고 있는 시기일 수도 있다.] 전과 비해 증상이 조금씩 완화되가고 있었다. 그 후 재위 중반 넘어가면서부터 재위 말기까지 증상이 어떠하다고 연산군 본인과 신하들이 피부질환에 관해서 더 이상 언급하지 않았기에 치료하여 완치된 것으로 보인다.[* 초기때는 면창 증상 언급이 잦았다.] 사관이 직접적으로 언급은 안했으나 뒤늦게 치료의 효과가 나타났거나 서서히 자연스럽게 가라앉은 것으로 추측. 연산군의 얼굴에 종기(부스럼)이 떠나지 않았다는 내용은 세자 때의 기록이며 치료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피부병으로 인한 흉터나 자국이 생겼을 거라는 추측이 있지만 이에 대한 얘기는 실록이나 야사에 일체 언급되지 않았다. 이덕형[* 한음 [[이덕형]]이 아닌 동명이인이다.]이 기록한 수필집 죽창한화를 보면 연산군 피부병은 완전히 호전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임진왜란]]이 터져 전라도에 머문 이덕형이 97세인 한 노인을 만나 그 노인한테서 연산군 외모 묘사를 듣고 자세하게 서술한 기록이다. 어린시절 노인은 당시 [[한성부|한양]]에서 재위 끝무렵 연산군의 얼굴을 직접 봤으며 그 해 가을에 [[중종반정|반정]]이 일어났다고 하였다. 노인은 연산군이 키가 컸으며 빛은 희고 수염이 적으며 눈에는 붉은 기운이 있었다고만 묘사하였다. 이를 볼 때 연산군의 피부병 치료가 제대로 안됐다면 분명 노인은 빛은 희나 용안이 얽었다 또는 곰보 자국과 종기와 흉터(자국)이 있었다고 언급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얘기는 일체 언급되지 않았기에 연산군의 피부병은 제대로 치료되었으며 만성적인 피부병도 아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보통 미디어에서 연산군의 피부병 얘기가 나올 때 피부병을 치료한 이에 대한 얘기는 언급이 없고 일생동안 피부병을 앓았다~ 여드름이 많았다 식으로만 알려져있다. 또한 연산군 뿐만 아니라 이복동생인 중종은 얼굴과 몸에 아토피 피부 질환이 있었으며 세조 또한 극심한 피부병을 앓았었다 이 외에도 태종, 세종, 문종, 성종, 광해군, 정조는 종기 질환을 숙종, 현종, 헌종은 천연두를 앓은 적이 있다. 이렇듯 수많은 조선 임금들은 유전처럼 피부병을 앓았었다.] 즉위 초 연산군은 잔병치레가 잦았다 재위 중반~ 후반에 들어서는 눈병 외에는 다른 병상은 없었고 사소하고 가벼운 증상들만 있었는데 금방 호전되었으며 재위 후반에는 아무런 증상이 없었다. 스트레스도 하나의 원인으로 보았다고 앞서 언급했었는데 그동안 연산군은 대간들로 인한 스트레스 영향으로 금방 완쾌되지 않았고 완쾌 됐어도 다시 또 재발하는 등 이러한 과정을 반복했다. 그러나 연산군이 신하들을 억누르고 나서부터는 신하들의 족쇄로부터 자유를 찾았는지 몰라도 확실히 초기 때와 달리 활기차고 연산군의 몸 상태는 많이 좋아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참고로 운평과 흥청들의 외모를 항상 중요시여겨 부스럼같은 피부질환이 있으면 곧 치료하게 하였다. * 영화 [[간신]]에 나오는 연산군은 실제 외모 고증과 상관 없이[* 실제 연산군 얼굴에는 반점이 있었다는 기록이 일체 없다.] 관자놀이에 붉은 반점을 그려넣었는데 이에 대해 배우 [[김강우]]는 인터뷰에서 연민을 넣고 이해를 시키고 싶어 붉은 반점을 그려넣었다고 하였다. 어머니로 인해 미쳐가는게 아닌 태생적으로 결핍이 많은 사람으로 설정하였으며 결핍을 디테일하게 표현하기에는 시간이 없으니 외적으로 이해가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연산군 얼굴에 붉은 반점을 그려넣었던 것이라고 밝혔다. * 연산군의 어진은 실제로 전해내려 오는 것이 없다. 온라인상 연산군 상상화라고 알려져있는 그림은 화백이 그린 것이 아닌 한 네티즌이 그린 것으로 밝혀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각에서는 그 그림이 연산군의 실제 모습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 예술에도 재능이 있었다. 노래와 춤, 악기를 다루며 음악을 연주하는 것을 즐겼다고 한다. 연산군은 춤 중에서도 [[처용|처용무]]를 좋아하고 가장 즐겨췄다. 궁중에서 [[처용]]의 가면을 쓰면서 춤을 추었을 정도였다. 또한 많은 시를 남겼으며 실록에 수록되어 있는 연산군의 시는 총 141편이다. 자신의 시를 모아서 정리하기 위한 어제찬집청(御製撰集廳)을 특별히 설치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반정 이후 연산군이 남긴 한시의 흔적은 일소되었으며, 역대 조선 왕들의 시문을 종합한 [[열성어제]](列聖御製)에도 당연히 수록될 수 없었다. 하지만, [[연산군일기]] 안에는 그의 시 141수가 시기별로 창작 날짜까지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으며, 해당 한시들이 창작된 이유와 정황까지 기사에 설명되어 있거나 앞뒤의 기사 내용을 바탕으로 분석할 수 있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실록에 수록된 연산군의 시 141수 중 애민시(愛民詩)는 단 한 편도 없고, 군주로서 신하에 대한 애정과 배려를 담은 시들이 대부분이며, 이러한 시를 쓰고서는 군주가 신하에게 하사하는 술인 선온(宣醞)과 각종 화분을 함께 내리는 경우가 허다했었다. 그리고, 종종 신하의 역심을 경계하며 은근히, 혹은 노골적으로 협박을 내비치는 시를 쓰기도 했었다. 또, 평소 연회와 음주가무를 즐겼던 혼군인 만큼, 향락에 대한 탐욕과 희구의 마음이 가득한 시들을 창작하기도 했었다. 그런 반면에 간혹 성종의 계비인 자성대비 [[정현왕후]]에 대한 효심을 담은 시를 짓기도 했었으며, 때로는 시적 감수성이 흘러넘쳐 인생의 덧없음을 한탄하는 자기연민에 빠진 시를 읊조리기도 했었다고 한다.[[https://www.kci.go.kr/kciportal/mobile/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2943426|출처: 연산군 한시의 전개양상에 대한 고찰]] 연산군이 지은 시는 격조와 운율이 청고하다는 평이 있으며 현대 문학가들로부터 허무주의를 멋지게 살려 놓으며 풍류성이 뛰어나고 문장이 깔끔하다는 평을 받았다고 한다. * 상당한 미식가였으며 귀하고 비싼 음식을 많이 먹었다. 전국 팔도를 쥐어짜서 귀한 식재료를 공수하는 걸로 모자라 [[명나라|중국]]에서 수입해 먹기도 했다. 실록을 보면 중국에 가는 사신에게 중국의 귀한 과일인 [[리치(과일)|여지]]와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130100&cid=40942&categoryId=32816|용안]]을 구해오게 한 기록이 있다.[[http://sillok.history.go.kr/id/kja_11104006_001|#]] 중국 수박을 먹고 싶어할 때 반대한 신하를 사형시켰다. 또한 얼음을 깔아놓은 쟁반에 청포도를 올려 시원하게 먹는 것을 굉장히 좋아했다고 하고 귤도 좋아해서 제주도에 가서 직접 귤나무를 베어오라고 명하였다. 연산군 때문에 후대 왕들은 비싸고 맛있는 것 좀 먹으려 하면 신하들에게 '연산군이 했던 짓입니다!' 하면서 제동이 걸렸다. 그가 즐겨먹은 음식 중에는 마늘을 넣고 백숙처럼 익혀먹은 장어 요리도 있었는데, 본의 아니지만 이 기록의 존재 덕분에 [[황교익]]의 장어 요리는 일본에서 유래했다고 떠드는 만물일본설을 버로우시켰다.[* [[황교익]]은 한국은 장어를 약재로만 쓰였고 식용으로 안 쓰다가 [[일본]]의 영향으로 식재료 활용을 했다고 우겼는데 연산군이 장어백숙을 즐겨 먹었다는 기록으로 인해 단번에 반박이 가능했다. 다만 연산군이 장어백숙을 먹었다는 기록적 근거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 기록으로 제시되는 <식요찬요>는 세종 대에 쓰여진 책이다. 존재하지도 않았던 연산군에 대한 얘기가 있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 그리고 <식요찬요>에서 등장하는 장어요리는 죽과 된장구이 정도이고 백숙은 언급되지 않았다. 여러 모로 진위 여부가 의심되는 대목.[[http://nestofpnix.egloos.com/7426714|#]] 다만 어찌 되었건 간에 황교익의 궤변은 한방에 논파된다. 세종 대에 장어를 요리로 먹었다는 사실 자체는 확고부동하니까.] 또한 닭 중 [[오계]]를 제일 좋아했다고 한다. 그래서 천연기념물 연산 오계를 기르는 논산시의 동네 이름은 연산면이다.[* 이 품종은 [[천연기념물]]265로 지정되어 있다.] * 연산군 집권 초중반기는 실존 인물인 [[홍길동]]이 한창 활동하던 시기였다. 그래서 이후 [[홍길동전]] 등 홍길동이 '의적'이란 이미지를 얻게 된 것에는 연산군의 이러한 폭정에 대한 민중들의 반감도 작용했다는 추측이 있다. 다만, 역사 속 홍길동은 매우 해로운 도적이 맞았고, 활동하다가 잡혔을 때까지 연산군은 아직 안정적으로 정치를 잘 하고 있을 시기였다. * 조선왕조실록 연산군일기 10년 5월 12일자 기사를 보면 [[코끼리]] 발을 사들이라고 연산군이 지시했다는 기록이 있다. 위의 미식가 기질을 볼 때 정말 먹으려고 했는지, 아니면 약재로 사용하려 했는지는 불분명하다. * 연산군 시기에 [[연은분리법]]이 개발되었다. 이는 훗날 [[동아시아]] [[은]]생산량 발달에 큰 영향을 끼치며 훗날 세계사조차 바꾼다. [[조선]]은 그 사실을 전혀 모르지 않았으나[* 이 시기의 세계관은 우리 예상보다 훨씬 넓었다. [[순조]] 때 [[나폴레옹]]을 알 정도. 허나 겉으로만 알 뿐이고 그 이상은 알지 못했다. 아니, 관심 자체가 없었다.] 조선에 은이 별로 없어 잘 적용되지 않았다. * [[연산군일기]]의 연산군 11년 12월 29일의 기사에서는 광대 [[공길]]이 늙은 신하 흉내를 내며,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며, 아비는 아비다워야 하고, 아들은 아들다워야 한다. 임금이 임금답지 않고, 신하가 신하답지 않으면 아무리 곡식이 있더라도 내가 먹을 수 있으랴.'라고 말하자 그 말을 들은 연산군은 불경죄를 물어 공길을 곤장을 쳐서 멀리 [[유배]]보냈다는 사실이 나온다. 이 일화를 바탕으로 연극 이(爾)[* 현대 중국어의 니(你). '너'.]와 영화 [[왕의 남자]]가 나왔다. * 한편 위의 [[왕의 남자]]를 감상한 가수 [[안예은]]은 연산군과 공길의 감정변화를 공길의 시점에서 풀어나간 노래 '홍연'이라는 노래를 작사, 작곡했다. 이 노래로 [[K팝 스타 시즌5]] 예선에 참가한 안예은은 [[유희열]]에 의해 슈퍼패스로 합격한 것이 화제가 되었고, 후일 안예은이 데뷔한 이후, 이 노래는 연산군 시대의 이야기를 다룬 사극 [[역적 : 백성을 훔친 도적]]에서 6화와 7화의 엔딩곡으로도 사용되었다. * 조선 왕조 [[건국]] 이래 최초로 [[반정]]으로 축출되어 [[왕권]]을 상실했던 [[임금]]이었기 때문에 [[광해군]]과 함께 역대 임금들과는 달리 행적 기록을 담은 <조선왕조실록> 호칭도 실록이 아닌 일기인 《[[연산군일기]]》로 격하되었다. 그래서 연산군과 [[광해군]]의 행적 기록은 역대 임금들과는 달리 '''실록'''이 아닌 '''일기'''로 부른다.[* [[폭군]]은 아니지만 [[계유정난]]으로 축출된 [[단종(조선)|단종]] 역시 이전에는 실록이 아닌 《노산군일기》로 격하되어 불렸다가 [[숙종(조선)|숙종]]이 추존(追尊)을 승인하게 되면서 《노산군일기》에서 《단종실록》으로 승격되었다. 사실상 실록이 아닌 일기라는 호칭을 가진 임금은 연산군과 광해군 뿐이다.] * 연산군은 재위 기간 동안에 [[누가 기침 소리를 내었는가|기침을 한 신하를 처벌한 적이 있었다]]. 가령 [[연산군일기]] 12년(1506) 3월 27일에는 김새(金璽)가 왕 앞에서 기침을 했다며 이는 매우 거만한 행동이므로 [[국문]](鞠問/鞫問)하라고 명령을 내렸다는 기록이 있다. * 충무공 이순신과 약간의 인연이 있다. 세자 시절 연산군을 교육한 세자 시강원의 관리 중 이거(李琚)라는 사람이 있는데, 이순신의 증조부이다. 이거는 연산군이 즉위한 뒤엔 순천부사 등의 자리를 역임했으며 연산 8년 무렵에 사망했다는 기록이 있다. == 대중매체 == 잊을 만하면 재탕, 삼탕해주는 [[사극]]의 [[주인공]]. 조선 [[왕조]] 최악의 [[폭군]]으로 잘 알려져 있는데다가 개인사 뿐만이 아니라 가족사를 비롯해 워낙 인생이 [[드라마]]틱해서 대중매체에서 유난히 많이 다뤄지는 것 같다. 진짜 주인공이 아니더라도 최종 [[보스]]급으로 비중이 높은 경우도 많다. 1980년대 이전에도 미디어 믹스가 자주 이루어진 인물이었는데 연산군의 유난한 [[막장]] 행보가 군사 독재 [[정권]]의 잔혹한 행위를 좀 더 나아보이게 한다는 이유 때문이었다는 다소 [[견강부회]]적인 분석도 존재한다. 이대근, 정진영 등을 빼고는 20~30대 [[배우]]가 대부분 담당하였으나[* 본래 연산군은 19살에 즉위해서 30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요절]]한 인물인 만큼 20대 배우가 연기하는 것이 연령 [[고증]]에 부합하는 편이다.] 이상하게 연산군은 40대 배우가 많이 담당한다는 편견이 있는데 이는 한국 [[영화]] 역대 최고의 흥행작 중 하나인 <[[왕의 남자]]>의 정진영의 잔상인 듯하다. 실제로 2010년대 이후로 주로 30대 중후반 배우들이 연산군을 많이 연기하게 된다. 그만큼 대사량이 많고 감정선도 오락가락하는 인물이라 연기력이 웬만큼 절륜하지 않는 이상 연기하기 굉장히 힘든 배역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외워야하는 대사의 양이 장난 아니게 많은 배역으로 악명이 높다. [[왕과 나(드라마)|왕과 나]]에서 연산군을 연기했던 [[정태우]]는 예능 [[놀러와]]에서 보통 왕들은 근엄한 이미지때문에 대사의 양이 많지 않아 연기하기 그렇게 어렵지 않으나 연산군은 왕 치고는 말이 많은 인물이라 그만큼 대사가 많아 연기하기 힘들었다고 토로한 적이 있고, [[왕과 비]]의 [[안재모]]는 언론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이 연산군이라는 배역때문에 하루하루가 '''대사와의 전쟁'''이라고 그 고충을 털어놓은 적이 있다. 엄청난 양의 대사때문에 타 출연진보다 미리 대본을 먼저받아 대본외우는 연습을 해야하는가 하면, 심지어 [[SBS]] 시트콤 행진 촬영현장에서도 [[왕과 비]]의 대본외우기를 해야할 정도였다고 한다.] 드라마적으로 해석하면 [[출생의 비밀]], [[성격]]적 결함, [[예술가]]적 기질, 동정을 불러일으키는 [[과거]]사, [[최후]]의 파멸 등을 겸비한 [[그리스 비극|그리스 고전 비극]]의 주인공 같은 인물이다. 한국 사극에서 연산군을 많이 다룬 작가 하면 드라마 작가 [[정하연]]을 빼놓을 수가 없다. 정하연 작가는 《[[장녹수(드라마)|장녹수]]》, 《[[왕과 비]]》, 《[[인수대비(드라마)|인수대비]]》 등의 집필을 맡아서 연산군 시대를 다룬 드라마만 3개를 집필하는 진기록을 세웠다. [[파일:external/photo-media.daum-img.net/20080327123202.897.0.jpg]] 위는 《[[왕과 나(드라마)|왕과 나]]》의 정태우, 아랫줄 왼쪽은 《[[왕의 남자]]》의 정진영, 오른쪽은 《[[왕과 비]]》의 안재모 * 1962년 [[새해 첫날|신정]]과 [[설날|구정]]에 연달아 개봉한 [[신상옥]] 감독의 2부작 《[[연산군(1962)|연산군]]》과 《[[폭군 연산]]》에서는 배우 [[신영균(배우)|신영균]]이 연기했다. 이 2부작 영화는 당대에 보기 힘든 [[해석]]으로 유명하다. 포인트는 연산군이 모든 잘못을 깨닫고 정치를 원상태로 돌리려고 하는데 다음 날 [[중종반정]]이 일어난다. [[한국]] 영화로서는 정말 이례적으로 상영 [[시간]]이 3시간을 넘긴다. 그러나 [[신상옥]] 본인은 《연산군》과 《폭군 연산》을 [[흑역사]]로 생각했는데 그 이유는 《연산군》은 신정 프로에 맞춰서 서둘러 제작하느라 제작 기간이 불과 2개월 밖에 걸리지 않았고 《폭군연산》 역시 흥행업자들의 독촉으로 서둘러 만드느라 [[작품]]의 완성도가 떨어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심지어 [[북한]]에 있을 때 신상옥 감독은 [[서울특별시|서울]]에 있던 조카에게 편지를 보내 《연산군》과 《폭군 연산》의 오리지널 네가를 소각하라고 지시하기도 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미 [[한국영상자료원]]에 보관되어 있는 오리지널 네가를 어떻게 할 수 없었는데 신상옥 감독은 귀국한 후에 한국영상자료원에 보관되어 있는 《연산군》과 《폭군 연산》의 오리지널 네가를 반출해 가서는 각각 14분, 54분씩 삭제 재편집을 해서 가져다 놓았다. 심지어 《폭군 연산》은 반출해 간 네가가 유일본이었던지라 《폭군 연산》의 사라진 54분은 이제 영원히 볼 수 없게 되었다. * 1970년 개봉한 공포영화 [[https://youtu.be/DDca1nKs4mg|《이조괴담》]]에서는 배우 이강조가 연기했다. 당시 [[신상옥]] 감독이 만든 공포 호러 영화로서 전형적인 우리가 알고 있는 [[전설의 고향]]을 [[모티브]]의 원조격으로 내용은 [[발정]]난 연산군이 [[선비]]의 아내를 취하려고 하자 속이려 몸종을 들여보냈는데 이를 뒤늦게 알아챈 연산군이 화내어 몸종을 죽인다. 연산군은 선비 [[가족]]을 붙잡아 죽이려 군졸을 보냈는데 선비는 도피 안하는 대신 아내만 도피를 시키는데 도와준 선비는 연산군에 의해 붙잡아 죽임을 당한다. 선비의 아내는 같이 키우고 있는 [[고양이]]와 도피했지만 같이 키우고 있는 고양이가 없어지자 아내는 고양이를 찾아 헤매지만 결국 고양이가 있는 자기가 살고있는 [[집]]으로 오게 된다. 이 때 남편이 죽었다는걸 알아채고 아내는 [[자결]]을 하게 되는데 고양이는 죽은 주인의 [[피]]를 먹고 자신의 부탁으로 다른 여인인 [[장녹수]]의 몸을 빌려 처절하게 복수한다는 내용. 유치하지만 당시 파격적인 고전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데 [[EBS]]에서 방영하기도 했다. * 1984년 [[MBC]] 드라마 《[[조선왕조 500년]] - [[설중매]]》에서는 배우 [[임영규]][* 임영규의 경우에는 [[현실]]에서도 약간 그런 성격이라는 말이 있다.]가 연기했다. 《[[조선왕조 오백년]]》의 [[신봉승]]이 자주 다루는 시대가 세조 ~ 연산군까지이다. [[인수대비]]의 일생의 마침표를 찍는 비극으로 그리고 있는데 실제로 최고의 [[인기]]작인 《[[설중매]]》의 후반부가 바로 이 사건을 다루고 있다. [[임영규]] – 연산군, [[이미숙(1960)|이미숙]] – [[장녹수]], [[고두심]] – [[인수대비]]인데 원작 [[소설]]은 대단히 잔인하고 [[검열삭제]]가 난무하는 작품이다. 이를테면 검열삭제 묘사가 제대로 나오고 [[귀인 엄씨]]와 [[귀인 정씨(성종)|귀인 정씨]]를 처단하고 [[시체]]를 훼손하는 이야기 역시 아들들에게 직접 때려 죽이게 하고 완전히 [[나체]]로 만들어 현장에서 찢어버리게 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그에 비해 드라마판은 가급적 수위를 낮추었다. * 1987년 개봉한 영화 《[[연산군(1987)|연산군]]》에서는 배우 [[이대근]]이 연기했다. * 1988년 개봉한 영화 《[[연산일기]]》, 연극 《문제적 인간 연산》에서는 배우 [[유인촌]]이 연기했다. 특히 유인촌은 연극인 《문제적 인간 연산》에서 [[햄릿]] 연기[* 연극에서 연산군이 [[폐비 윤씨]]의 비밀을 안 이후에 햄릿의 아버지 [[유령]]과 같은 폐비의 유령 때문에 고뇌한다. 완전히 햄릿 [[짝퉁]] 연산군.]와 [[칼리굴라]]의 연기를 그대로 보여준다.[* 이 작품을 그대로 영화화한 것이 [[김진아(영화배우)|김진아]]와 공연한 [[임권택]] 감독의 영화 《[[연산일기]]》로 유인촌 최고의 걸작이다.] * 1994년 [[KBS]] 드라마 《[[한명회(드라마)|한명회]]》에서는 배우 [[이민우(배우)|이민우]][* 역대 최연소 성인 연산군이었지만 [[고증]]에 가장 부합하는 나이였으며 연기력도 손색없이 해냈다. [[고등학생]] 신분으로 출연해 성인 역을 수행해 1994년 [[KBS 연기대상]]에서 아역상을 수상한다.]가 연기했다. 드라마 끝 부분에 잠깐 나와 비중은 적었지만 [[한명회]]가 죽은 후 [[갑자사화]]를 벌여 [[부관참시]]를 하는 장면이 아주 강렬했다. 특히 [[북(악기)|북]]을 두들기며 "닥치시오!"하고 외치는 장면은 [[인터넷]]이 발달한 현재라면 [[플짤]]감이다. 이 때가 이민우가 막 성년이 된 무렵인데 연산군 연기로 그는 아역 배우에서 성인 배우로 성공적으로 전환했다. [[링크]]된 영상에서 [[노사신]]이 앉아 있는건 노사신이 이미 [[무오사화]]가 끝난 뒤 얼마 안되어 죽었기 때문에 이는 [[고증오류]]다. 극중에서 [[홍귀달]]이 [[폐비 윤씨]]의 신원에 반대하다 유배간 걸로 묘사되었지만 홍귀달은 갑자사화 당시 [[경기도]] 관찰사 자리에 있었으며 손녀를 입궐시키라는 명을 거역한 죄로 [[장형]]을 받고 유배되던 도중 교살되었기 때문에 이 역시 고증 오류다. * 1995년 [[KBS]] 드라마 《[[장녹수(드라마)|장녹수]]》에서는 배우 [[유동근]]이 연기했다. [[파천무]]의 세조 이후 유동근의 두번째 조선 국왕 배역이며, 유동근은 연산군 이후에 태종 [[이방원(용의 눈물)]], [[흥선 대원군]]([[명성황후(드라마)|명성황후]]), 태조 [[이성계(정도전)]]까지 맡게 된다. 재밌는 것은 유동근은 장녹수 종영 이후 이어서 방영된 KBS 사극 '조광조'에선 [[조광조]]역을 맡았다는 점. * 1996년 [[SBS]] 드라마 《[[임꺽정(드라마)|임꺽정]]》에서는 제3화까지만 나오는 [[조연]]이다. * 1998년 [[KBS]] 드라마 《[[왕과 비]]》에서는 배우 [[안재모]][* 당시 연산군에 [[캐스팅]]될 때만 하더라도 전작 《[[용의 눈물]]》의 반듯하고 어진 [[세종(조선)|충녕대군]] 이미지가 남아있던터라 미스 캐스팅이 되지 않을까 싶었는데 오히려 폭군 역을 절륜하게 소화하여 큰 호평을 얻었다. 한국 역사상 최고의 [[성군]]과 최악의 [[폭군]]을 그것도 20대 초반의 나이에 모두 연기한 셈.][* 안재모가 연기한 연산군의 경우 자기 복제가 심한 [[정하연]] 작가 특성상 전작이었던 <[[장녹수(드라마)|장녹수]]>의 배우 [[유동근]]이 연기했던 연산군과 겹치는 대사와 장면이 많았다. 자칫 어설프게 연기했다가는 '유동근 복제판'이 되었을 수도 있었지만 안재모의 절륜한 연기 덕분에 이 둘의 연산군은 [[스타일]]이 많이 달라졌고 덕분에 전혀 복제판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훗날 안재모는 [[정도전(드라마)|정도전]]에서 선배 유동근의 뒤를 이어 태종 [[이방원(정도전)]]역을 맡아, 선배의 연기와 겹치지 않는 자신만의 재해석을 보여주며 호평을 받았다.]가 연기했다. 특히 폐비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할머니 [[인수대비]]의 지독한 냉대로 인해 점차 [[사이코패스]] 반항아가 되어 항상 할머니한테 [[엿]] 날릴 궁리를 주로 하며[* 오죽하면 최측근인 [[임사홍(조선)|임사홍]]과 [[김자원]]마저도 [[인수대비]]는 오래 살지 못할테니 조금만 기다리자고 말릴 정도. 하지만 연산군 본인은 할머니가 죽기 전에 모든 복수를 하려고 했기 때문에 [[인수대비]]는 죽기 전에 정말 못볼 꼴을 다보면서 죽게 된다. 심지어 죽고 나서도 빈전에 올리는 술에다가 가래침까지 내뱉는 건 덤.], 나중에 [[갑자사화]] 이후로는 서로 '나 죽고 너 죽자' 식으로 달려들며 대립한다. 마지막에 [[폐위]]되면서까지도 "할머니 소원대로 폐주가 되었습니다!"라고 광기를 부리면서 외쳐대는 것은 덤. 극 중 인수대비와 연산군의 치열한 대립은 살벌했던지라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등골을 서늘게 만들 정도다. 덕분에 중반까지 부진하던 《왕과 비》가 연산군의 등장으로 [[시청률]]이 크게 상승하는 뒷심을 발휘하여 [[유종의 미]]를 거뒀다. * 2001년 [[SBS]] 드라마 [[여인천하]]에서도 배우 [[김양우(배우)|김양우]]가 연기하였으나 대사없이 첫 회 폐위장면, 회상신으로만 등장했다. * 2003년 레전드 사극 [[대장금]] 에서도 극 초반에 잠시 등장하며 배우는 [[정기성]]. 등장이 적은 만큼 다른 작품들에 비해 악행과 횡포들은 직접 나오지 않지만 후에 자신의 모친인 폐비를 모신 궁녀가 모친이 사약을 먹고 피를 토하며 묻혔던 손수건을 보여주자 극대노 하여 [[갑자사화|대대적인 숙청을 시행한다]]. * 2005년 개봉한 영화 《[[왕의 남자]]》[* 《왕의 남자》의 원작인 연극 [[이#s-11|《이》]]에서는 [[공길]]에 의해 [[비역|남색]]과 [[사디즘]]에 눈을 뜨는 것으로 그려진다. 폭정보다는 [[장녹수]]와 공길 사이에서의 [[삼각 관계]]가 부각되는게 특징.]에서는 배우 [[정진영(배우)|정진영]]이 연기했다. 현재까지 대중적인 연산군 연기의 최고봉으로 광기와 애정 갈구가 혼재된 연산군의 [[심리]]를 가장 잘 묘사해 냈다. * 2007년 [[SBS]] 드라마 《[[왕과 나(드라마)|왕과 나]]》에서는 배우 [[정태우]][* 과거에 [[단종(조선)|단종]]을 3번이나 맡았던 정태우는 [[MBC]] 예능 [[공감토크쇼 놀러와]]에 출연해서 "본래 사극 속 왕은 말 수가 없고 근엄해서 대사가 그렇게 많지 않은 편인데 연산군은 자신이 맡았던 배역 중 '가장 말 수가 많았던 왕'이라 그만큼 대사량이 많아 연기하기 많이 어려웠다"고 회고했다. 그래도 본인은 이 연산군 연기를 통해 그동안 남아있던 단종 [[이미지]]를 벗을 수 있게 되어 연산군 배역에 애착이 많이 가는 듯.]가 연기했다.[* 참고로 정태우는 1995년 KBS 역사다큐 "역사의 라이벌"에서도 [[https://www.youtube.com/watch?v=dKWJ3elA_ww|어린 시절의 연산군]]을 연기한 적이 있다. 그러나 역사의 라이벌은 일종의 역사 다큐 형식이고 대사도 없어서 실질적으로는《왕과 나》가 첫 연산군 연기 도전이다.] 정태우는《왕과 나》의 연산군 역에 도전하여 당시 막장가도를 달리던 이 드라마를 연기력으로 살려냈다는 평가도 받고 있다. 《왕과 나》 후반부는 '왕과 나'가 아니고 '연산군'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처선]]이 죽은 후 드디어 정신을 차리고 다음 날부터 바른 [[정치]]를 하겠다고 다짐[* [[장녹수]]는 그 결심이 오래 가지는 못할 거라고 봤다.]하는데 그날 밤 [[중종반정]]이 일어난다. 반정군이 들이닥치자 처음에는 어이없어하며 몇몇 중신에게 "네가 [[왕좌]]에 앉으려 하느냐?"고 패기 넘치게 따진다. 그러나 반정군이 [[중종(조선)|진성대군]]을 옹립하기로 했다는 말을 듣고는 표정이 순식간에 누그러진다. 진성대군이라면 [[양위]] 받을 자격이 있다며 순순히 왕의 자리에서 물러난다.[* 작중에서 연산군의 폭정을 부추기는 간신배 [[김자원]]의 협잡으로 '폭군을 몰아내고 [[안양군]]을 옹립하자'는 벽보가 나돌자 "진성대군도 아니고 안양군 따위를 옹립한다고?"라며 연산군이 분노했던 장면이 있다. 이렇게 간접적으로 진성대군을 내심 인정하는 모습이 보이기는 했다. 사실 "아래가 위를 능멸하는 짓거리"를 누구보다 혐오했던 [[군주]]권 지상론자 연산군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엄연히 왕의 정실인 [[중전]] 소생의 '적자'인 진성대군과 [[후궁]] 소생의 '서출'인 안양군은 애초부터 [[신분]]상의 차이가 [[넘사벽]]일 수밖에 없다. "진성대군도 아니고 안양군 따위를"이라는 발언은 다르게 생각하면 "고작해야 천한 후궁 소생의 [[서자]]를 엄연한 정실 소생에 적통인 나와 비교해? 그것도 모자라서 그따위 천한 서출을 만인지상의 군주에 앉히겠다고? 이것들이 임금 알기를 뭘로 아는 거야?"라는 의미라고 해석할 수 있다. 한마디로 진성대군을 인정한 게 아니라 그냥 윗전은 윗전, 아랫것은 아랫것 이런 [[뿌리]]박힌 신분주의에서 기원한 오만.] 또한 [[정현왕후]] 및 [[소혜왕후|인수대비]]와의 관계도 다른 사극에서의 평면적인 적대 관계가 아니라 상당히 입체적으로 나온다. 작중 연산군의 반발감도 단순한 [[증오]]가 아니라 왜 자신을 좀 더 아껴주지 않았냐는 [[애정]] 갈구에 가깝다. 친아들이 아닌데도 따뜻하게 대해주는 정현왕후에 대한 연산군의 심정은 복잡미묘하다. 연산군이 인수대왕대비전에 난입하여 [[패륜]]을 저질렀을 때만은 정현왕후가 참다 못해 "대왕대비에게 사죄하라"며 "이를 듣지 않으면 지금이라도 회초리를 들겠다"고 단호히 충고했는데 이 때 연산군이 심경을 털어놓는다. [[술]]을 퍼마시며 반항적이던 눈빛이 갑자기 울먹이는 눈빛으로 변하고 "대비마마, 어찌 진즉 소자에게 이리 말씀해주시지 않으셨사옵니까? 어찌 소자가 잘못하였을 때 질책하고 회초리를 쳐주지 않으셨사옵니까? 소자, 대비마마께오서 귀하게 키워주셨사오나 친자식이 아니어서 회초리 한 번 맞아보지 못한 것이 더 한스러웠다는 것을 어찌 모르셨사옵니까? 소자는 진성대군이 참으로 부럽사옵니다." 이에 정현왕후도 차마 더 뭐라 하지는 못하고 연산군을 안쓰럽게 본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과는 다르게 특이하게도 꼬꼬마 [[원자(왕족)|원자]] 시절부터 [[폐비 윤씨|자신의 생모]]의 존재를 알고 있으며 자신의 생모가 사사되었다는 사실까지도 이미 인지하고 있다는 것.[* 실제로 [[폐비 윤씨]]가 사사당하고 나서 [[성종(조선)|성종]]은 폐비의 폐자도 꺼내지 말도록 함구령을 내리며 그 때문에 연산군은 한동안 [[계모]]인 정현왕후를 자신의 친모로 알고 있었다. 갓 태어났을 때도 오랫동안 피접을 나가 [[봉보부인]]에 의해 길러졌기 때문에 아예 생모의 [[얼굴]]조차 모르고 있었다.] * 2011년 [[JTBC]] 드라마 《[[인수대비(드라마)|인수대비]]》에서는 배우 [[진태현]]이 연기했다. [[정하연]] 작가는 1998년 [[KBS]] 드라마 <[[왕과 비]]> 대사를 그대로 복붙해버린다. 안타깝게도 극 중 진태현이 연기했던 연산군은 [[안재모]]가 연기했던 연산군의 어설픈 [[복제]]판으로밖에 보이지 않아 [[시청자]]들로부터 안재모의 연기와 비교당하면서 혹평을 얻기도 했다. * 2014년 개봉한 영화 《[[간신(영화)|간신]]》에서는 배우 [[김강우]]가 연기했다. 작정하고 [[19금]] 성인영화로 나온 만큼 연산군 영상물 중에서 가장 포악하고 광기어린 연산군을 구현해냈다. 잔혹한 살육 행각과 [[섹스]] 중독적 엽색 행각[* 영화 결말부에서 [[중종반정]] 때 도망가던 중 [[임숭재]]의 함정으로 [[돼지]] 우리에 빠졌는데 임숭재마저 자신을 배신했다는 절망과 광기가 뒤섞인채로 기어코 암퇘지와 [[수간]]을 해버린다. 이 모습을 본 [[유자광]]은 "마지막 [[성관계|성은]]은 돼지가 입었구만?"하고 질색한다.], 격한 감수성과 합쳐진 광기, 한편으로는 치세 초반에는 왕으로서 제법 제대로 [[통치]]했었다는 것이 납득될 통찰력도 보여준다. 덕분에 폭군으로서는 가장 실제 [[역사]] 기록에 가까운 연산군 묘사로 꼽힌다. 이런 모습을 열연했던 덕분인지 [[극장]]가에서는 잔혹성과 선정성에 [[호불호]]가 갈려서 큰 재미는 못봤지만 2차 판권에서 [[대박]]을 쳤으며 김강우의 연산군 연기 자체는 높은 평가를 받는다. * 2017년 [[MBC]] 드라마 《[[역적 - 백성을 훔친 도적]]》에서는 배우 [[김지석(배우)|김지석]][* 김지석은 이 연기로 2017년 제10회 코리아 드라마 어워즈와 [[MBC 연기대상]]에서 남자 최우수연기상을 받았다.]이 연기했다. 김지석이 연산군 역을 맡아 "[[양반]]이든 [[천민]]이든 [[여자]]든 [[남자]]든 다 똑같은 [[인간]]이다. 유일하게 다른 이가 있다면 하늘님의 자식인 왕 하나 뿐이다. 왕 외의 모든 이들은 왕의 종일 뿐이다."라며 전제 왕권이라는 미망을 좆아 광기에 휩싸이는 연산군 역을 잘 연기했다. [[역적 : 백성을 훔친 도적/등장인물#s-1.3|해당 문서 참조.]] * 2017년 [[KBS]] 드라마 《[[7일의 왕비]]》에서는 배우 [[이동건]]이 연기했다. 그런데 팬층 사이에서는 '이 드라마는 [[중종(조선)|이역]]과 [[단경왕후]] 신씨의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를 다룬 드라마가 아니라 연산군을 미화하려고 만든 드라마다', '이 드라마의 [[진주인공]]은 연산군이다'라는 소리가 나올 정도로 연산군의 비중이 크고 가장 서사가 탄탄한 [[캐릭터]]로 그려져 있다. 잘못된 [[성격]]을 타고난건 아니었지만 어머니 [[폐비 윤씨]] 때문에 연산군을 [[왕위]]에 올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아버지 [[성종(조선)|이혈]]이 죽기 직전 자신에게 "[[중종(조선)|진성대군]]이 성인이 되거든 왕위를 양보하고 [[상왕]]으로 물러나라"는 유언을 남겼고 그걸로도 모자라 자신의 유언을 적은 [[비밀]] 유언장까지 만들어 어딘가에 감춰뒀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 "어머니가 폐비라는 이유로 모든걸 진성에게 빼앗기고 살았는데 원래부터 내 것이었던 왕위까지 진성에게 양보하라는 말이냐!"는 이유로 진성대군을 호시탐탐 의심하고 괴롭히다 끝내 진성대군과는 돌이킬 수 없는 관계가 되고 말았다는 설정이 붙었다. 연산군이 광기 어릴 정도로 [[권력]]을 추구했던 이유도 아버지의 비밀 유언장 때문에 왕위를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으로 인하여 어떤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는 절대적인 [[왕권]]을 갖고자 했기 때문으로 나온다. 나중에는 주인공인 [[신채경]]을 두고 진성대군과 연적 관계로까지 얽히게 되는데 드라마를 보면 신채경이 진성대군보다 연산군과 함께 있는 장면이 더 많이 나오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유배]]를 가던 도중 [[박원종]] 일파가 보낸 [[자객]]들의 습격을 받고 [[상처]]를 [[치료]]하지 못해 끝내 유배지에서 [[죽음]]을 맞게 되는데 임종 직전 자신을 보러 온 진성대군에게 사죄하면서 눈을 감으려던 찰나 자신을 향해 손을 내미는 아버지의 [[환상]]을 보며 "드디어 아바마마께서 내게 손을 내미셨다"는 유언을 남기고 절명한다. * 《연산군을 위한 변명》(신동준 著, 지식산업사)에서 그에 대한 재조명을 추구했다지만 실은 극단적인 옹호로 일관하고 [[역사학]]계의 연구는 거의 무시했다.(그래서 [[불쏘시개]] 목록에도 올랐다.) 《연산군-그 인간과 시대의 내면-》(김범 著, 글항아리)이 연산군의 면모를 아는 데에는 훨씬 낫다. *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얼굴에 거의 항상 [[반창고]]를 붙이고 다닌다. 연산군은 [[세자]] 시절부터 재위 중반까지 [[피부병]]을 앓아 얼굴에 [[종기]]가 났었는데 이걸 표현한 것이다. 나중에 8권([[중종(조선)|중종]]), 15권([[경종(조선)|경종]], [[영조]]), 18권([[헌종(조선)|헌종]], [[철종(조선)|철종]]), 20권(망국)에서 [[엑스트라]]로 나왔을 때도 빼먹지 않고 붙이고 나왔다. 이 책에서는 즉위 4년까지 [[군주]]로서 건실하게 [[나라]] 일을 한 모습을 재조명했지만 후에 [[왕권]]을 강화한답시고 연이은 사화를 일으켜 엄청나게 비대해진 대간과 [[훈구]] 대신들을 찍어 누르고 강해진 왕권으로 [[국가]] 업무에 대한 비전없이 그저 자기 마음대로 흥청망청 놀고먹고 [[백성]]들까지 괴롭힌 것을 비판하면서 그저 [[폭군]]에 지나지 않았음을 피력하며 "그 후 조선에서 연산 같은 왕은 더이상 나오지도, 나올 수도 없었다."는 총평을 내리고 있다. 그야말로 [[반면교사]]가 어떤 것인지 몸소 보여준 인물로 조선 [[왕조]]에서 유일하게 [[중국]] 황제급의 [[권력]]을 휘둘렀던 국왕이었다고 언급되는데 [[선조(조선)|선조]], [[인조]], [[고종(대한제국)|고종]] 등과 함께 가장 통렬한 비판을 받은 군주들 중 1명이다. 그래도 연산군 편의 부제가 "'''절대왕권을 향한 위험한 질주'''"인 데서 보이듯이 '위험한 질주'와 더불어 '절대왕권'의 배경이 무엇인지 나름 입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 [[대체역사물]]로는 <[[봉황의 비상]]>, <[[이순신의 나라]]>를 쓴 [[슈타인호프#s-4]] 작가가 주인공이 연산군에 빙의하여 조선을 발전시킨다는 <[[명군이 되어보세!]]>를 연재했다.[* 연산군의 시대는 1부 한정, 2부는 선조의 재위기였던 16세기 후반, 3부는 17세기 후반의 시대를 다룬다.] [[대체역사 마이너 갤러리]]에 독자가 올린 [[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alternative_history&no=537805|박시백 조선왕조실록 무종만화]]에 이 작품 세계선에서 [[후손]]들이 본 무종(연산군)의 모습이 요약되어 있다. 외전에서 연산군의 원래 영혼은 즉위하고 몇 달만에 재석에게 몸과 왕좌를 탈취당했기에 태조에게 잡귀에게 몸이나 뺏기는 놈이라며 구박받고 있다. 그나마 원 역사와 같은 폭군이 되기 전에 재석에게 몸을 빼앗기고 죽은 것으로 처리되어 영혼이 극락으로 보내졌고, 공식적으로 몇 달이라도 임금 노릇을 해보기는 해서 성친왕과 달리 임금 모임에는 낄 수는 있지만, 제대로 임금 노릇도 못 해봤기에 업적이 없는지라 [[없을 무]] 자를 써서 무종([[無]]宗)이라는 별명으로 놀림받는다. 생전에 공식적으로 지은 죄만 없을 뿐이지 [[저승]]서도 성격은 그대로여서 그가 재석인 줄 알고 찾아온 왕비 신씨에게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퍼부어 쫓아내고, 후손들이 무종에게 올리는 제삿밥은 뻔뻔하게 받아먹고 있다. * 대체역사물 <[[대군으로 살어리랏다]]>에서도 [[중종(조선)|진성대군]]에 [[빙의]]한 주인공의 형으로 등장한다. 여기서는 백성을 위한 정치를 펼치라 하면서 정작 [[선비]]의 길을 따르지 않는 대신들의 모순에 대해 고뇌하는 등 입체적인 모습이 두드러지며 [[흑화]] 직전의 시점에서 주인공의 개입으로 [[폭군]]의 길에서 벗어나 이 시대에 만연한 [[유교탈레반]]을 쓸어버리고 [[오키나와]]를 정복하며 [[요동]]을 [[명나라]]로부터 넘겨받아 선정을 베푸는 등의 업적을 세우며 후세에 희대의 [[명군]]으로 평가받기까지 하는 [[제왕]]이 된다. 묘호는 무종 웹툰판에선 현대에 넘어와서 배우생활을 하기도 했다. * [[중종(조선)|중종]]이 여성으로 치환되어 나오는 가상의 역사물 <[[조선공주실록]]>에서는 [[성종(조선)|성종]]의 외사촌 형제인 한건과 [[폐비 윤씨]]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호적]]상 이복여동생인 [[중종(조선)|진성공주]]를 여자로서 [[사랑]]하고 있다. * 2023년 개봉된 한국 영화 [[익스트림 페스티벌]]은 정종 축제가 연산군 축제로 바뀌면서 문화 [[스타트업]]에 의해 벌어지는 막장 축제 상황을 담았는데, 축제 구성이 사약 빨리 먹기 대회, 연산군 정신 스피치 경연대회, 각종 전통 고문체험, 갑자사화 공연으로 그야말로 개막장이다(...). == 관련 문서 == * [[조선/왕사]] * [[갑자사화]] * [[광해군일기]] * [[연산군일기]] * [[사화]] * [[조의제문]] * [[중종반정]] * [[폐비 윤씨]] * [[피 묻은 적삼]] * [[효자]] == 둘러보기 == [include(틀:역대 조선 국왕 관련 문서)] ---- [include(틀:진승총(기타 사서 포함))] ---- [include(틀:조선 왕실)] [각주][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연산군/생애, version=12)][include(틀:표절, version=2637, source=해피캠퍼스(학부생 보고서))] [[분류:연산군]][include(틀:다른 뜻1, other1=북한의 행정구역(延山郡), rd1=연산군(황해북도))] [include(틀:다른 뜻1, other1=1914년까지 존재했던 충청남도의 행정구역(連山郡), rd1=논산시)] ||||||||||||||<:><#94153E>http://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5/58/Coat_of_Arms_of_Joseon_Korea.png?width=40 [br] '''{{{+1 [[조선/왕사|{{{#red 조선의 역대 국왕}}}]]}}}''' || ||<:>9대 [[성종(조선)|성종]] 이혈 || {{{+1 ←}}} ||<:><#94153E> '''{{{#yellow 10대 연산군 이융}}}''' || {{{+1 →}}} ||<:> 11대 [[중종(조선)|중종]] 이역 || ||<:> '''[[묘호]]''' ||||<:> 없음 || ||<:> '''[[시호]]''' ||||<:> 없음 || ||<:> '''[[존호]]''' ||||<:> 헌천홍도경문위무대왕[br](憲天弘道經文緯武大王)[* 폐위되었기 때문에 시호는 존재하지 않으며, 살아있을 때 받은 존호가 있다.] || ||<:> '''[[본관]]''' ||||<:> 전주(全州) || ||<:> '''[[군호]]''' ||||<:> 연산군(燕山君) || ||<:> '''[[능묘]]''' ||||<:> [[연산군묘]](燕山君墓) || ||<:> '''[[휘]]''' ||||<:> 이융(李漋) || ||<:> '''[[자(이름)|자]]''' |||| || ||<:> '''[[고향|출생지]]''' ||||<:> 한성 [[경복궁]] 자선당 || ||<:> '''사망장소''' ||||<:> [[교동도|교동현]](喬桐縣) || ||<:> '''배우자''' ||||<:> [[폐비 신씨]](廢妃愼氏) || ||<:> '''아버지''' ||||<:> [[성종(조선)|조선 성종]] || ||<:> '''어머니''' ||||<:> [[폐비 윤씨]](廢妃尹氏) || ||<|2><:> '''생몰'''[br]'''기간''' ||<:> [[음력]] || [[1476년]] [[11월 6일]][* 《성종실록》에는 11월 6일 밤 3경 5점에 태어났다고 되어 있고, 《연산군일기 총서》에는 11월 7일에 태어났다고 되어 있다.] ~ [[1506년]] [[11월 6일]][* 《성종실록》의 출생일 기록을 따른다면, 연산군은 자신의 생일에 유배지에서 사망한 것이다.] || ||<:> [[태양력|양력]] ||1476년 [[11월 22일]] ~ 1506년 [[11월 20일]](29년 11개월 28일, 1만 954일.)|| ||<|2><:> '''재위'''[br]'''기간'''[br] ||<:> 음력 ||[[1494년]] [[12월 25일]] ~ [[1506년]] [[9월 2일]]|| ||<:> 양력 ||1495년 [[1월 21일]] ~ 1506년 [[9월 18일]](11년 7개월 28일, 4,257일.)|| ||<:> '''종교''' ||||<:> [[유교]] ([[성리학]]) || ||||||||||||||<:><#94153E> '''{{{+1 [[왕세자|{{{#red 조선의 역대 왕세자}}}]]}}}''' || ||<:> [[예종(조선)|예종]] 이황 ||<:> {{{+1 ←}}} ||<#94153E><:> '''{{{#yellow 연산군 이융}}}''' ||<:> {{{+1 →}}} ||<:> [[이황(폐세자)|이황]] || [목차] == 설명 == >'''人君所畏者, 史而已'''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역사 뿐이다. >ㅡ 연산군 [[http://sillok.history.go.kr/id/wja_11208014_005|#]] [[조선]]의 10대 왕. [[성종(조선)|성종]]의 장남, [[어머니]]는 [[폐비 윤씨]]다. 본관은 전주 이씨. '''한국사 전체를 통틀어서도 이런 막장은 거의 없다. '''[[충혜왕]]을 비롯한 조선 이전의 일부 연산군을 초월한 막장 오브 막장 임금이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연산군이 그나마 괜찮은 편인 것도 아니고… 그리고 사실 그런 임금이 많은 편도 아니다. 게다가 [[충혜왕]]은 누구라고 콕 집을 것 없이 그냥 다같이 미쳐 돌아가는 막장 분위기 속의 막장 임금이었던 반면, 연산군은 잡다한 문제가 있긴 했어도 어느 정도 균형에 맞춰 멀쩡하게 돌아가던 정치판에서 뜬금깽판을 쳐버렸으니 더욱 막장일 수밖에… [* 그런데 [[충혜왕]] 항목에 들어가면 정작 "연산군은 세자 시절에는 그냥 평범했을 뿐더러 즉위 초에는 나름대로 괜찮은 왕이었던 편이라, 비극적인 죽음을 맞은 어머니 때문에 비뚤어졌거나 정신이상을 겪은 것일지도 모른다는 설이 있지만, 충혜왕은 꼬꼬마 세자 시절부터 막장. 정말이지 답이 없다. 그야말로 막장 오브 막장. 반도의 귀축왕."이라고 적혀있다(…). 굳이 따지자면 재위 10년째에 [[갑자사화]]를 일으키기 전까지 연산군은 나름의 정치적 감각과 국정 운영 능력으로 그럭저럭 조정을 잘 이끌었고, 다만 갑자사화 이후 절대권력을 손에 넣은 이후부터 급속도로 막장의 나락으로 굴러떨어졌다는 점을 고려하면 재위기간 온갖 패륜에 막장행각만 일삼은 충혜왕보다는 연산군이 그나마 낫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갑자사화 이후 연산군은 충혜왕보다 나은 점이 하등없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연산군을 기점으로 조선이 이전의 건강함을 점점 잃어갔으며, 이후 즉위하는 조선 왕의 능력 부재로 인해 [[기묘사화]]와 [[을사사화]], [[문정왕후]]의 외척 세도를 거쳐, 결국에는 '''[[임진왜란]]'''으로 이어지게 된다고 평가한다. 문제점도 있었고 뻘짓도 있었지만, 아직 망할 나라는 아니었다. 실제로 임란 이후로도 300년을 더 갔고. 연산군의 막장짓에 비례해서 조선왕조상 왕권이 가장 강했던 시기는 [[갑자사화]] 이후 연산군이 폐위된 2년간일지도... 조선 역사 중에서 묘호[* ~조(祖) or ~종(宗)]를 받지 못한 4명의 왕들 중 하나이나, 본인에게 딱히 별다른 권력이 없던 [[정종(조선)|정종]](공정왕), 성인도 되기 전에 [[세조(조선)|작은아버지]]에게 강제로 내몰린 [[단종(조선)|단종]](노산군),[* [[정종(조선)|정종]]과 [[단종(조선)|단종]]은 그래도 [[숙종(조선)|숙종]] 대에 가서 묘호를 받았다.] 실리외교와 분조 지휘 등으로 인해 상대적으로 더 빛나 보이는 등의 재조명으로 인해 현대에 긍정적으로 재평가된 [[광해군]][* 심지어 (가상이긴 해도) [[2002년]]에 사이버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광해는 '''조선 혜종(惠宗)'''이라는 '''사시'''(私諡)까지 받는다!]과는 반대로 '''반론의 여지가 없는 막장'''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 실록을 보면 알겠지만, 《연산군일기》는 《광해군일기》하곤 '''차원이 다르게 잔인한 내용이 담겨 있다.'''] 물론 나라에 해를 끼친 왕이야 조선 시대에도 꽤나 많았지만, 그 왕들이 아무리 문제가 있어도, [[선조|최소한의 업적은 있거나]], [[고종(조선)|무능했으나 일제와의 타협을 끝까지 거부하여 독립운동을 이끈 공이 있거나]] 등의 최소한의 실드 칠 거리라도 있는데, 연산군은 [[그런 거 없다|그조차도 없다]]. 즉위 초기에는 일을 좀 잘했다는 정도가 있으나, 그 뒤에 저지른 행동들이 너무나도 잔혹하다. 다만 연산군이 본격 막장 놀자판으로 막 나가기 시작한 건 재위 10년째의 [[갑자사화]] 이후로, 그 이전까지는 [[무오사화]]의 피바람이 있긴 했지만 행정적으로 국가는 그럭저럭 운영해 나아갔다. 재위 후반의 이미지가 너무 강렬해서 그렇지, 전체 재위기간 중에는 오히려 평타 이상으로 집무했던 시기가 더 길었다는 것. 자세히 들여다 보면 반정세력이 편찬한 《연산군일기》에는 약간 의심되는 내용도 있는데, 가령 연산군에게 엿 먹은 대비가 다음날 태연히 연화대에 구경을 한다는 내용이 있다. 방구석에 처박혀 떨어야 할 사람이 저러는 둥 정상적 심리상태의 정황과 어긋나는 이상한 점이란 것인데, 전문이 이러한지라 반대로 연산군이 둘러댔다고 보기도 한다. > "대비께서 연화대를 구경하려 하시니, 놀이하는 사람을 급히 대궐로 들여보내라. 옛 사람이 온실의 나무조차 말하지 않은 것[* [[한무제]] 때의 고사. 당시의 명신(名臣) 공광(孔光)은 조정의 일을 누설하지 않아서 휴가 중에 형제나 처자와 한담할 때에도 끝내 조정의 정사(政事)를 말하지 않았는데, 어떤 사람이 공광에게 “온실성 (궁전) 중(溫室省中)의 나무는 다 무슨 나무인가?” 물었으나, 공광이 답하지 않고 다른 말로 돌렸다는 고사.]이 정말 이유가 있는 것이니, '''이런 일들은 외간 사람들로 하여금 알게 하지 말라."''' 게다가 설령 왜곡된 부분이 있다 해도, '''"알고 보니 연산군도 착했다"고 봐서도 안 된다'''는 것에 주의하자. 연산군이 시도한 무리한 왕권의 강화는 신하들이 후대 왕에게 압력을 가하는 빌미[* 쉽게 말해서 '''"헐, 전하, 하시고 싶은 대로 다 하다 보면 연산군이 되옵니다."''']가 되었고, 무엇보다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조선)|중종]]은 이러한 신권(臣權)의 압박에 제대로 시달려야 했다.[* 왕이 되자마자 [[단경왕후|왕비]]는 강제로 폐비당했고, 연산군의 아들들을 죽이는 것도 반대했으나 신하들에게 거의 묵살당하는 등 중종은 즉위 초반에는 정말로 힘을 못썼다. 그런데 몇년 지나지 않아 반정의 주요 핵심인물들이 주르르 자연사해버리고 중종의 치세가 길어지면서 중종의 왕권은 차츰 강해진다. 문제는 그런 상황에서도 중종 자신이 신하들의 눈치를 너무 보았고, [[조광조|특정]] [[김안로|인물]]에게 힘을 몰아주었다가 제거해버리기를 반복하면서 정치가 엉망이 되어버렸다. 자세한 사항은 [[중종(조선)|중종]] 항목 참고.] 중종의 경우, 형처럼 [[처용무]]라는 춤을 좋아해서 즐겨 추었는데, 신하들이 처용무(處容舞)가 연산군이 즐겨 추던 춤이라고 간언해 중종이 춤도 못 추게 만들었다. == 행적 == === 초기 생애부터 즉위 초반까지 === '''적어도, 적어도 아주아주 극초반에는 나름 괜찮은 왕이였다.''' [[맹꽁이 서당]] 같은 학습만화에서는 연산군이 세자 시절 때 성종이 아껴 기르던 [[사슴]]이 자신의 손을 핥은 데에 화가 나 사슴을 폭행하자 이를 안 성종의 꾸지람을 받아 앙심을 품고 있다가 왕위에 오르자마자 즉시 그 사슴을 활로 쏘아 죽였다는 각종 [[사이코]] 짓을 했다는 등의 야사가 있다. 그런데 이는 근거가 불확실한 이야기이며, 세자 시절의 연산군은 [[양녕대군]] 같은 불량아도 아니었지만, 아버지 성종처럼 대단한 모범생도 아닌 그저 평범한 세자였다.[* 세자 시절 대간을 싫어하는 모습을 보였다지만, 성종 대 대간의 행태를 보면 솔직히 그럴 만 했다. ] 즉위 초에는 빈민을 구제하였다. 《속국조보감(續國朝寶鑑)》을 완성시켰으며, 국방도 튼튼히 했다. [[왜구]]를 격퇴했으며 건주야인(建州野人)을 회유, 토벌하기도 했다. 신하들이 헌천홍도경문위무대왕(憲天弘道經文緯武大王)이라고 하는 특이한 존호를 올렸지만, 연산군은 자신에게 과분하다고 물리친 적이 있었다. 성종 말기의 느슨함을 휘어잡을 만큼 정치에 의욕도 있었고, 3명의 대비[* 할머니이자 성종의 모후인 [[인수대비|인수대왕대비]], 작은할머니이자 예종의 계비 [[안순왕후]], 계모인 성종의 계비 [[정현왕후]].]들을 극진히 모셨으며,[* 심지어 [[불교]]식 의례도 인수대왕대비를 위해서 시행한 적도 있었다.] 자기 자신이 나태해지는 걸 경계하려는 듯한 모습을 보여서, 왕으로서 충분히 인정을 받고 있었다. 몇몇 주장에 의하면, '''이 시절부터 이미 [[연산군]]에겐 [[폭군]]의 자질이 싹트고 있었다'''고 한다. 조선조 내내 군왕의 공식 업무들 중 굉장히 중요한 업무에 속했던 '경연(經筵)'을 점차 제대로 실시하지 않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는 것이 주요 근거이다. 당시 '경연'은 사전적 의미대로면 능력/덕망 있는 관리나 선비를 모시고 스승으로 삼아, 왕과 신료들이 경전을 공부하는 일종의 과외수업이었는데, 실제로는 일종의 '국무회의'의 기능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것을 이미 즉위 초부터 이것저것 핑계를 대면서 나가지 않기 시작했으니, 이미 연산군이 폭군이라는 주장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주장만으로 연산군이 폭군의 기미를 보였다는 것은 좀 무리가 있다. 왜냐하면 조선 초기부터 시작해서 조선 후반기까지의 왕들이 모두 경연을 선호했던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실 [[세종대왕]] 같은 몇몇을 제외하면 대부분 싫어했다. --물론 세종대왕은 경연에서 자기가 신하들을 과외시켜 준 희대의 먼치킨이니 제외한다 쳐도-- 대표적으로 [[태종(조선)|태종]]과 [[세조(조선)|세조]]가 있다. 태종은 여러 가지 핑계(?)를 대며 빠지는 경우가 많았고, 세조는 아예 폐지시켜 버린 전적이 있다. 광해군은 정말로 경연을 싫어했다. 정말로 열 손가락에 꼽을 수준이다. 한편 [[정조(조선)|정조]]는 경연장을 자신이 배우는 자리가 아닌 신하들을 가르치는 자리로 변화시켜버렸고, 그 외에도 상당히 많은 군주들이 권력이 안정되면 꺼려하는 경우가 많았다. 즉 연산군이 경연을 자주 하지 않은 게 결코 잘한 일은 아니긴 해도, 그렇게까지 유난하게 여길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 애초에 태조 [[이성계]]부터가 경연을 싫어했다. 즉위 1년차부터 '''"내가 나이도 많으니 경연을 들을 필요는 없겠구나!!"''' 하다가 신하들에게 까이고 경연에 나갔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다. 세금과 노역을 피해 도첩도 없이 무단으로 [[승려]]가 되려 하는 자들을 공역에 배치해 정리하면서 "백성들이 중이 되는게 어찌 그들이 거친 밥과 나물국을 즐기기 때문이겠는가? 나라에서 한 명도 빠짐없이 노역을 시켜 농사를 지을 수 없어서 출가하는 것이니, 농사에 전력하게 하여 생계를 넉넉하게 만들 방법을 찾으라"라고 명하기도 했다. 이 때만 해도 백성들의 삶에 아주 무관심하지는 않았다는 것. [[일본]]에서 [[원숭이]]를 선물로 보낸 일에 대해서도 '선왕(성종) 때 [[앵무새]]를 보낸 적이 있는데, 비용만 많이 들고 아무런 쓸모도 없었다. 구리나 철과 같이 꼭 필요한 물건도 값을 대기 힘들어서 무역을 금지했는데 하물며 이런 동물은 오죽하겠는가? 도로 돌려보내고 잘 타이르도록 하라.'라는 개념 있는 발언을 남긴 적도 있다.(연산군일기 47권, 연산 8년 11월 14일 계미 1번째기사) 단순히 개념 있고 정상적인 것을 넘어 비범해보이는 모습을 보여주는 대목도 있다. 연산군 2년, 초계군수 유인홍의 첩이 남자 종과 간통을 하다가 전처 소생의 딸에게 발각되고 그래서 딸을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에 연산군은 직접 딸의 죽음을 자살이라 주장하는 유인홍에 대한 취조를 지시하고 심문내용을 하달하는 등 조사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며 심문 내용을 전해듣고선 단박에 헛점을 찾아내는 등의 예리함을 보이며[[http://sillok.history.go.kr/id/kja_10203108_001|#]] 딸의 죽음이 자살이 아닌 명백한 타살이라는 점과 유인홍이 첩을 보호하기 위해 관련자들과 입을 맞추고 위증을 하려했다는 사실[[http://sillok.history.go.kr/id/kja_10203029_002|#]]을 밝혀내는 탁월한 면모를 보여주었다. 참고로 여기서 유인홍과 그 첩이 입을 맞추기 위해 언문편지로 소통을 하기도 했는데, 이는 연산군이 능상, 즉 위를 능멸하는 행위다 라는 구실을 붙여서 언문사용을 금지하는 명을 내리는 구실 중 하나로 작용한다. 그 횟수로만 따지면, 연산군은 조선 왕의 필수 덕목(?)이라 할 만한 경연을 [[갑자사화]] 바로 전 해인 연산 9년에 자그마치 122회나 열기도 했다. '''물론 [[갑자사화]] 후로는 폐지해 버렸지만.''' [[http://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11/0525/pimg_787603133667632.jpg|#]] 다만 칭병(稱病)으로 경연을 안 했던 적이 많았다는 것일 뿐, 일단 나오면 열심이었다. 실제 연산군이 그다지 건강하지 못했다는 것을 감안하면, 진짜 아파서 경연을 못한 경우도 많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세자 시절부터 잔병치레를 자주 앓았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병으로 인해 경연을 나가지 못했다는 것이 100% 거짓은 아니라는 증거가 된다. '''물론 꾀병을 부리고 놀자판을 벌인 경우'''도 있었던 것 같다. 예를 들어, 연산 3년에는 [[사간원]]에서 "아니, 눈병이 나셨다며 경연 빼먹으신 분이 왜 연회에는 나가서 즐기십니까?" 라고 아뢰자, '''"연회에 나가서 눈으로 먹냐?"''' 라고 받아쳤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 [[http://sillok.history.go.kr/id/kja_10303009_003|《연산군일기》 22권, 연산 3년 3월 9일 신해 3번째 기사]] , [[http://sillok.history.go.kr/id/kja_10303011_002|《연산군일기》 권22 3년 3월 11일 계축 2번째 기사]] 그러니 대체적으로 '''여기까지는 좋았다'''. 연산군은 즉위 후 4년까지는 정말 큰 문제는 없었다. 사가독서(賜暇讀書)[* [[세종대왕]] 때 유명해졌는데, 장래가 유망하지만 나이가 어리거나 젊은 관리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당 등에서 학문을 닦게 해주는 것.]를 실시하여 학문을 장려하고, [[왜구]]와 야인의 침략에 대비해 병기를 증축하며, 악한 관리들을 색출해 벌주는 등 초기엔 그래도 좋았다. 다만, 어전회의에서 '''"위를 능멸하는 풍습은 고쳐야 한다"'''라고 말한 적이 있어, 이때부터 슬슬 싹수가 보이긴 했지만…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도 연산군의 이 발언이 언급되는데, 훗날 피바람의 복선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http://sillok.history.go.kr/id/kja_10101030_001|《연산군일기》 권2 1년 1월 30일 갑인 1번째 기사]], [[http://sillok.history.go.kr/id/kja_10101030_003| 《연산군일기》 권2 1년 1월 30일 갑인 3번째 기사]] 대부분의 사극에서는 이때를 생략하나, 《왕과 나》에서 나온 연산군은 이 시기를 조명해 주긴 한다. 덕분에, 연산군을 즉위 12년 내내 막장 짓을 한 왕으로 알고 있다가, 초반의 4년, 길게는 10년 동안 제법 정상적이었다는 것을 알고는 꽤나 놀란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몇몇 역덕후들과 전공자들이 그의 이러한 행적 때문에 연산군을 많이 아쉬워하는 편. 초기 치세만 괜찮게 유지했으면, 탕아적 기질이 있긴 했지만 정국을 균형 있게 잘 운영한 유능한 군주로 사서에 남았을 것이고, 이후의 조선이 가는 방향 역시 크게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오히려 성종과 비교했을 때, 성종이 너무 대간에 잡혀서 왕 스스로의 결정을 하지 못한 것에 비하면, 이 때의 연산군은 젊어서 거칠기는 했으나, 앞에서 설명한 대로 나름의 자질도 있었고, 왕 스스로의 결정을 밀고가는 뚝심도 있었기에 성종과 차별화된 또 다른 임금이 되었을 수도 있다는 말. === 사화의 연속 === 연산군의 아버지인 성종의 치세 동안 조선의 국정운영은 [[왕]]과 대신, 대간(臺諫)[* 각각 훈구와 사림이라 하나, 훈구공신 가문 내에서도 대간인 이들이 같은 대신에 있는 훈구세력을 탄핵한 걸 보면, 훈구와 사림보단 대간과 대신의 싸움이 사화라고 보는 게 옳다. 물론 양쪽 세력의 주축에 특정 파벌이 있긴 했다.]의 견제와 균형 속에서 이뤄졌다. 이런 상태에서 연산군은 대신들인[* 이극돈은 훈구파가 아니고, 유자광은 훈구파에 끼워넣을 수는 있는데 훈구파 하면 생각할 '기존 정치권력'이라는 이미지와는 안드로메다 차이였다.] [[이극돈]], [[유자광]] 등의 말을 듣고 사초(史草)를 보고 문제 삼아 김종직의 제자 등의 대간들을 죽이는 '''[[무오사화]]'''(戊午士禍)를 일으켰다. 이것이 조선 최초의 사화이다. 무오사화는 선비 士자 대신 역사 史자를 쓰기도 하는데, 실록의 기초가 되는 사초 때문에 벌어졌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는 사초 중에 [[김종직]]이 지은 《[[조의제문]]》이 문제가 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무오사화는 연산군이 전제적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성종이 균형을 애써 유교적인 방식으로 맞추려했다면, 연산군은 그냥 칼로 해결하려 한 것이다. 이는 성공을 거둬, 성종 말기 사적인 주관을 개입시켜 대신들을 탄핵하는 폐단이 드러나며 왕의 인사권마저 간섭하기에 이른 대간들을 찍어 누른다. 그 덕에 대신과 왕의 권세는 강해졌으나 성종 시대의 유교적 유산은 안드로메다로 날아갔다. 얼마 후엔 사림에게도 온건하게 대하고, 대신들의 의견도 크게 수용하는 등 예전의 모습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공작새]] 깃털, [[산호]]나 [[후추]]와 같은 진귀한 물품을 들일 것을 명하는 등 이때부터 낭비벽이 슬슬 보이기 시작한다. 이에 대해 연산 9년, [[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ection.jsp?mState=2&mTree=0&clsName=&searchType=a&keyword=%EC%9B%90%EC%88%AD%EC%9D%B4|대신들이 씀씀이를 줄일 것을 권고]]했고, 이에 대해 연산군은 대응하지 않고 넘어갔다. 드디어 '''사건'''이 터진다. [[폐비 윤씨]] 사건을 빌미로 훈구파, 사림파를 막론하고 모두 억누르고, 수많은 대신들을 [[숙청]]한 [[갑자사화]]가 벌어진 것이다. 자세한 것은 항목 참조. 어쨌거나, 연산군은 [[폐비 윤씨]]의 아들이므로 왕으로서 어머니를 신원(伸冤)시킬 권리가 없다고 할 수는 없다. 다만, 처벌이 유례가 없을 만큼 잔인하고 과도했던 것이 문제였다. 그래도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와서 초기처럼 선정을 베풀었다면, [[주원장|홍무제]]처럼 강한 왕권으로 신하들을 조져버리기는 했을지언정, 백성들에게는 [[성군]]이었다는 소리는 들었을지도 모른다. 훈구권신들과 간관(諫官)들이 왕권을 제약했던 성종 대의 단점을 보완한 왕이라는 긍정적인 평가를 들었을 가능성도 있다. 허나 여기서 연산군의 성격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연산군은 죽어도 권력을 추구한 왕이었는데, [[무오사화]]로 대간들을 엿 먹인 후 견제세력이 사라진 대신들이 권세가 강해지니, 이제는 이들도 [[토사구팽]]하면서 밟아놓을 필요가 생긴 것이다. 이 때문에 불가항력적으로 일어난 게 갑자사화다. 하지만 [[갑자사화]] 이후, 연산군의 문제있는 행동은 더 심각해졌다.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방탕한 기질이 더욱 심해졌다. 원래 [[처용무]](處容舞)도 잘 추고, 연기도 잘해서 사람들을 울릴 정도였으며, 시 쓰기에도 능했다고 한다. 예술인의 기질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우연인지는 몰라도, 유명한 [[로마 제국]]의 황제, [[네로]] 역시 스스로를 예술가로 생각했다고 전해진다. 스스로 작사, 작곡하여 노래까지 한 예술인이기도 했다.] 그런데 《[[조의제문]]》으로 [[무오사화|사림 대간들을 모두 날려버리고]], [[폐비 윤씨]] 사건으로 [[갑자사화|훈구 대신들을 모두 날려버린 이후]] 절대권력을 손아귀에 쥔 연산군. '''그는 더욱 막강해진 절대권력으로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하라는 나랏일은 할 생각도 안 하고]]… 그냥 놀아제끼기 시작했다. 그리고 조선의 정치와 경제는 그 후 2년간 막장일로를 겪는다.''' === [[폐비 윤씨]]와 갑자사화 === > 어제 사묘에 나아가 어머니를 뵙고(昨趨思廟拜慈親 작추사묘배자친) > 술잔 올리며 눈물로 흠뻑 적셨네(奠爵難收淚滿茵 전작난수루만인) > 간절한 정회는 그 끝이 없으니(懇迫情懷難紀極 간박정회난기극) > 영령도 응당 이 정성을 돌보시리라(英靈應有顧誠眞 영령응유고성진). >ㅡ 연산군이 쓴 "所懷(소회)"라는 시 [[http://www.sisapress.com/news/quickViewArticleView.html?idxno=59902|#연산군의 다른 시]] 연산군에 대한 가장 큰 논란은 바로 [[폐비 윤씨]]와 관련된 부분이다. [[갑자사화]]의 원인이 되기도 했고, 뒤에 나오는 피 묻은 적삼 이야기도 얽혀 아주 요지경이다. 연산군은 윤씨의 폐위에 찬성했다는 이유로 [[윤필상]], [[김굉필]] 등 수십 명을 살해하고, 이미 세상을 떠난 [[한명회]] 등은 부관참시했다. 갑자사화는 여기에서 비롯되었다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그러나, 실록에 따르면, 연산군은 미복을 입고 [[임사홍]]의 집에 들려 폐비 윤씨에 대한 말을 듣게 된다. 이 부분의 기록은 없으나, 임사홍은 성종 대에 윤씨의 폐비 조치에 열렬히 반대했던 인물인 만큼, 임사홍의 설명은 주로 자신과 윤씨의 변호로 이루어졌을 것이다. 연산군은 이를 알게 된 날, 바로 자기 손으로 성종의 후궁인 귀인 정씨와 귀인 엄씨를 살해하여 산야에 버렸다. 또한 [[폐비 윤씨]]가 폐비되는 데에 일조한 조모 [[인수대비]]의 궁에 칼을 들고 뛰어 들어가 결국 쇼크사 하도록 한다. 박치기로 들이받았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는 [[야사]]이다. [[처용]]탈을 쓰고 칼을 휘둘렀다는 설도 있지만, 실록의 기록에는 그런 것 없이 칼을 들고 와서 [[인수대비]]더러, "왜 제 어머니를 죽이셨습니까?"라고 물어, 인수대비가 큰 충격을 받았던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사실 따지고 보면 이쪽이 박치기보다 더 공포스럽다. 왜? 박치기는 그냥 신체만 아프게 하지만, 이쪽은 정신적으로 매장해 버리는 짓이다. 생각해보시라. 손자가 할머니에게, 그것도 칼을 가지고 들어가 이런 짓을 했다는 것은 '''제대로 패륜 짓을 한 것이다''', 더구나 조선시대는 유교사회였다는 점을 기억하라.] 사실 이 사건이 있기 직전에 [[계모]]인 [[정현왕후]] 윤씨에게 뛰어 들어가려고 했으나, 이때는 [[폐비 신씨|중전 신씨]]의 만류로 그만두었다고 한다. ==== 어머니의 죽음을 안 시점 ==== 사실, 연산군은 즉위하기 전에 친어머니가 사망했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성종이 아무리 "백 년 동안 이 일을 입에도 꺼내지 말라!"고 신하들에게 신신당부했지만, 연산군이 세자로서 국사를 논의하는 장소에 참여할 때, 간간히 폐비의 이야기가 낮게나마 거론된 적이 있었으며, 윤씨가 사사당했을 시 만 7세였으니, 어쩌면 어렸을 때도 어렴풋하게나마 알고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실록에 의하면, 즉위 후 성종의 《행장록(行狀錄)》 때문에 알게 되었다고 한다. 조선은 왕이 승하하면, 왕의 삶과 가족관계에 대해 상세하게 기록한 행장을 [[명나라]]로 보내야 했다. 당연 [[명나라]]로 보내는 외교문서이자, 개인적으로는 아버지의 일생을 기록한 것이므로 연산군은 이를 보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왕의 장인 중 한명으로 윤기견이란 사람의 이름이 있는 것을 보고 "윤호를 잘못 적은 것이 아닌가" 하고 물었다. 신하 중 한 명이 "윤기견은 폐비 윤씨의 아버지"라 답하자 폐비 윤씨에 대해 어찌되었냐 되물었다. 이때 사사되었다는 대답을 들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친어머니가 따로 있다는 걸 전부터 알고 있었으나, 더 자세한 걸 들으려고 질문했거나, 혹은 사사당했다는 것까지 알면서도 모르는 척 했던 것일 수도 있다. 어쨌든, 설령 [[폐비 윤씨]]와의 추억이 없다고 해도,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인지라, 아버지와 신하에게서 어머니가 사사당했단 말을 들은 연산군의 기분이 좋았을 리는 없다. 기록에 보면 '''왕이 그 날 밥을 먹지 않았다'''고 한다. 말이 굶은 것이지, 왕이 굶은 것은 대단한 일이다(…). 실제로 많은 왕들이 굶는 것을 내세워 시위하곤 했는데, 이는 조정을 크게 뒤흔드는 무기였다.[* 중대 단위의 인력이 이들의 식사를 준비했다는 걸 생각해보자. 게다가 왕이 굶어서 건강이라도 나빠지면... [[유교]]적으로 보면 왕의 심신의 건강을 걱정하는 것이 신하들로서는 당연한 도리이자 충성의 척도였고, 현실적으로 접근해도 최고권력자가 앓아 누으면 국정이 마비되거나 혼란이 올 수 있으므로 대략 좋지 않았다. 더군다나 시위 형식의 단식투쟁(?)을 할 경우 신하들에게 '늬들이 이러이러하니까 내가 나라 앞날이 걱정돼서 밥이 안 넘어가서 굶는 거임'하는 식의 명분을 직,간접적으로 알리므로, 원인제공자로 지목당한 신하(들)는 역적으로 몰리기 싫다면 데꿀멍하며 제발 식사 좀 하시라고 빌 수 밖에 없었다..] 며칠 뒤 연산군은 [[폐비 윤씨]]의 초라한 무덤을 손질하고 비석이나 세워주라 말한다. 이것이 회묘(懷墓)다. 그리고 외할머니와 외삼촌 윤구를 유배지에서 풀어준다. 나중에 추숭(追崇)을 하려 하자 대간들이 많이 반대했는데, 결국 성공했다. 하지만 관련자에 대한 처벌은 없었으며, [[사약]]을 들고 갔던 이세좌가 오히려 무덤 복원의 임무를 맡았다. 이때까진 폐비 윤씨가 성종에게 죄를 지어 사사당했다는 식으로만 이야기가 나왔으므로, 그 이상 더 어떻게 할 생각은 없었던 듯하다. 참고로 덧붙이자면, 연산군과는 약간 경우가 다르지만, 정비 소생이 아닌 왕자가 왕이 된 후에 자신의 생모를 추숭(追崇)하는 것은 흔한 일이다. 그러나 실록에 따르면, 어머니의 폐위가 부당하다는 걸 안 후 태도가 변했다고 한다. 사실 실록에서는 그 당시 윤씨의 폐위 정당화를 위한 여러 부정적인 기사들을 적고 있지만, 그것이 사실인지의 여부는 알 수 없다. 일단 상황을 보면, [[인수대비]]와 성종의 후궁들은 폐비 윤씨에게 적대적이었던 게 분명하므로…. ==== 패륜(悖倫) ==== 기일(忌日)에 검열삭제를 한다든가 말들이 검열삭제를 하는 걸 보고 즐겼다는 류의 이야기를 제외하고, 연산군을 [[천하의 개쌍놈]]으로 몬 것은 바로 적삼사건 이후에 벌인 행각이다. 사실 효자 연산이라는 이미지 때문에, 연산군이 벌인 패악질에 대해서는 그냥 복수 정도로 여기는 경향이 많은데, 조선시대의 윤리로는 아버지와 결혼한 서모(庶母), 즉 계모에 대해서도 친모와 동일한 기준으로 대한 것을 보면, 연산군의 경우는 존속살해에 해당하는 패륜을 벌였다. 물론 계모가 연산군을 사람 취급 안 했다거나 하는 식으로 정말 나쁜 인간이었다면 모르지만, 그랬으면 조선왕조실록에 그 기록이 남았을 텐데, 그렇지도 않다. 더군다나 조모인 [[인수대비]]에 대해서는… 일단 야밤에 윤씨를 모함했던 정 귀인과 엄 귀인을 잡아서 고문한 후, 그들의 소생, 즉 연산군 자신의 이복동생들인 안양군과 봉안군을 끌고 와서, 결박되어 있는 사람들이 각자의 어머니라는 것은 숨긴 채 '죄인을 매질하라'고 명했다[* 연산군일기 52권(10년 3월 20일)에 의하면, 안양군은 사방이 어두워서 상대가 누군지도 모르고 매질했고, 봉안군은 어떻게 했는지 눈치를 채고, 차마 매질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리고 다시 두 귀인을 매질로 살해하고 [[인수대비]]의 침전으로 가서 유명한 패륜의 구절을 했다 "이것은 대비의 사랑하는 손자가 드리는 술잔이니 한번 맛보시오." 대사만 보면 별반 정상적으로 보일 수 있으나, 문제는 연산군이 안양군과 봉안군의 머리채를 잡고 저런 말을 한 것이다. 이후 안양군에게 독촉을 해서 대비에게 권하니 대비가 부득이 허락을 해주었고, 이때 "사랑하는 손자에게 하사하는것은 없습니까?"라고 말하니 대비가 놀라서 베 2필을 주었다. 그리고 나서 참으로 불손한 말을 하게 되는데 "대비는 어찌하여 우리 어머니를 죽였습니까?" 그 뒤, 내수사(內需司)를 시켜 정 귀인과 엄 귀인의 시체를 갈가리 찢어서 산야(山野)에 버렸다고 한다.[* 원문 王捽㤚、㦀髮、至仁粹大妃寢殿、開戶辱之曰: “此大妃愛孫、所進觴可一嘗。” 督㤚進爵、大妃不得已許之。王又曰: “愛孫其無賜乎?” 大妃驚、遽取布二匹賜之。王曰: “大妃何殺我母?” 多有不遜之辭。 後令內需司取嚴、鄭屍、裂而醢之、散棄山野。] 어미를 친 왕자는 말을 선물로 주었고, 둘 다 귀양을 보내어 사사했다. 하나는 패륜아니까 사형당하는 게 당연하고, 하나는 왕의 명을 거역했으니 역시 입장이 같아야 한다는 것이다. [[개소리|참 그럴 듯한 사고방식이 아닐 수 없다.]] 보통 패륜의 극단이자 동생들에 대한 친모 폭행 강요라는 측면에서 아예 거짓말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고, 어린이용 역사책이나 고우영의 만화, 영화 《왕의 남자》나 이대근 주연작 《연산군》, 드라마 《임꺽정》에서는 분노한 연산군이 '''"손수 철퇴를 휘둘러 두 후궁을 박살내었다"'''고 처리하는데, 위의 이야기 자체가 '''실록에 나와 있는 이야기'''이다. 아무리 성인대상 극화라도, 수위가 너무 높아서 함부로 다루기 어려운 점이 있었을 것이다. 다만, 유인촌이 나온 《연산일기》에서는 [[곤장]] 강요로 대신하고 있고, 드라마 《장녹수》에서는 입을 틀어막고, 불을 끄고 마구 치게 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실제로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 나름대로 충실했지만, 그래도 장면이 장면인지라, 나중에 다른 군졸의 고문으로 사망한 걸로 그렸다. 신봉승의 《조선왕조 5백년》 원작에서는 두 아들들이 자신의 어머니를 마구 때리고, 그나마 한 아들은 직접 살해한다. 그리고 바로 연산이 손수 병사들에게 현장에서 두 후궁을 나체로 만들게 하고는, 시체를 갈기갈기 형체도 없게 찢어 발겨버린다. 드라마판에서는 차마 표현하기가 난감했는지, 그냥 잡혀가는 장면과 사망했다는 대사로만 처리한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강요로 한 대 때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인수대비]]를 머리로 받아서 죽였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이것은 명백한 야사이다. 인수대비는 실제 그 일이 있은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나긴 했으나, 지나친 충격으로 인해서 화병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 지배적이다. 보통 극화에서는, 머리로 받는 장면보다는, 두 후궁의 아들들에게 술을 따르게 한다든가, 윤씨의 죽음에 대해서 항의한다든가, 다들 보는 앞에서 후궁들을 손수 때려잡는다든가, 칼을 들고 대전에 난입한다든가 하는 장면 등으로 바꾸어서 나온다. 다만 2015년에 개봉한 영화 《간신》에서는, 정말로 [[인수대비]]에게 달려들어 머리로 받아서 뒤쪽 벽에 처박는 장면이 나온다. 다만, 현대의 일부 학자들은, 사실 연산군은 패륜짓을 한 적이 없었으며, 두 후궁은 자결했고 [[인수대비]]는 평안하게 생을 마감했다는 주장을 내놓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견강부회에 가깝다. 심지어 이런 논리를 주장하는 측에서는 연산군의 사치는 '''권력자로서는 당연히 해야 하는 것'''이라는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하는 경우도 많다. 애당초 조선의 왕들은 백성들이 굶주리면 식사도 자기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등, 나름대로의 견제장치가 많았다. 그렇기에 쓰레기가 왕이 될 가능성이 거의 없었고, 500년간이나 왕조가 유지되었던 것이다. [[중종반정]]의 계기 중 하나가 되었다는, 연산군이 [[월산대군]]의 부인 박씨(큰어머니)를 범했고, 아이를 잉태하게 하여 그녀가 자살했다는 사건은 진짜 일어난 사건일 가능성이 낮다고 한다. 일단 정사엔 저 기록이 없다. 연산의 온갖 [[패드립]]을 다 적어놓은 《연산군일기》에는 박씨가 그냥 죽었다고만 기록되어 있으며, 다만 사람들이 "사람들이 왕에게 총애를 받아 잉태하자 약을 먹고 죽었다고 말했다."고 덧붙여 놨다. 당시에도 일종의 [[카더라]] 취급을 받은 이야기인 듯. 아무튼 박씨가 연산군 사이에서 아이가 생기는 바람에 치욕스럽게 여겨 자살했다거나 하는 것들도 야사 관련 문헌들에서만 전해온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월산대군 부인 박씨는 박원종의 누나이며, 사망할 당시 51세였다. 그 나이에 [[임신]]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인데다가, 그녀는 평생 아이를 낳아본 적도 없었다. 지위뿐만 아니라, 나이로도 박씨가 연산군의 어머니뻘이라는 걸 생각해보자면, 아무리 연산군이 [[막장]]이었다고 해도, 왕실의 어른인 대비가 3명이나 있는 상황에서 큰어머니 박씨를 건드렸을 가능성은 낮다. 연산군이 박씨와 친하게 지냈을 뿐인데, 이것을 황색 선전한 것이 박씨 능욕으로 발전했다는 설이 설득력이 있다. 실제로 실록을 보면, 연산군이 박씨에게 곡식과 면포 등의 물품을 여러 번 하사하였으며, 이에 대해 신하들이 지나치게 후한 행위라고 지적한 적도 있다. 세자의 교육 또한 박씨에게 맡겼다는 기록들이 나온다. 그리고 [[박원종]]이 사실은 연산군과 친한 누이의 덕을 봐서 출세한 면도 없지 않은 것을 보면, 누나의 명예를 위해 반정까지 일으켰을 가능성은 그렇게까지 높다고 할 수는 없다. 연산군에 의해 출세하고, 연산군과 가까운 사이였던 박원종의 배신을 이해할 수 없었던 이들이 만들어낸 이야기일 가능성이 크다. 아마 실상은 연산군의 권력이 슬슬 무너져가는 조짐을 읽어내고, 미리 빠져나간 쪽에 가까울 것이다. 사실 위에서도 약간 언급했지만, 박원종뿐만 아니라, [[중종반정]]을 일으킨 주요 공신들 중에는 본래 연산군과 가까운 관계였던 사람들이 많았다.[* 이런 아이러니로 인한 정치적 공격을 피하기 위해, 박원종 등 공신들이 선택한 방법이 바로 반정공신의 명단을 크게 확대한 것이었다. 그 결과, 연산군 시절, 연산군과 짝짜꿍했던 관료들 중 상당수가 반정공신으로 오를 수 있었다. 하지만 이는 또 다른 논란을 가져오게 되었고, 이는 [[기묘사화]]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다만 애초에 연산군이 상대를 가리지 않고 [[성관계]]를 강요하는 정신 나간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면, 고작 '사이가 좋은 정도'로 저런 소문이 나돌 리가 없었을 것이다. 기록에 의하면, 연산군이 그냥 눈에 띄는 여자는 기분 내키는 대로 범하는 행태를 보이다보니, 이걸 제대로 묘사하면, 아주 [[사극]]이 아니라 완전히 [[AV]]가 될 지경인데, 이런 상황에서 가까이 지내는 여성이 있다면, 그것이 누가 되었건 연산군과 성추문이 나도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애초에 연산군이 행실이 바른 왕이라면 저런 말이 나올 가능성 자체가 극히 낮다. 신봉승 씨가 쓴 소설판 《[[조선왕조 500년]]》에선 이런 야사를 사실로 받아들여서, 박씨와 연산군 간의 [[검열삭제]] 묘사를 상세히 해놓았다. 원래 야사이기도 하고, 이 소설에서는 연산군 연간에 박씨의 나이가 30대 후반이라고 하는 오류[* 연산군 즉위 때 박씨는 이미 40대였다.]도 있는 등 그냥 소설적 각색으로 보는 게 좋다. ==== 효자 연산? ==== 애당초 연산군이 친어머니 [[폐비 윤씨]]와 헤어졌을 때는 3살이었다. 헤어진 어머니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이 남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다. 더군다나 왕실법도상 왕자는 왕비가 직접 안고 업고 기르지도 않고, 봉보부인(奉保夫人)이라고 하는 유모에 의해 길러진다. 그것도 모자라 잔병이 잦았던 연산군은 궁 밖 강희맹의 집에서 피접(避接) 생활을 했다. 이후 진실을 알게 된 후에 밥을 굶는다든가, 묘를 복원한다든가, 어머니의 지위를 다시 복권시키는것을 볼때 어느정도 어머니에 대한 효심은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야사에는 어머니를 항상 그리워하여, 즉위 후 어느 날 자신의 어머니의 얼굴이 [[공민왕]]의 왕비였던 [[노국대장공주]]와 흡사하다는 말을 듣고, 전국에 남아 있던 노국공주의 초상화를 수집했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실록에 따르면, 자기 어머니 기일에도 [[검열삭제]]를 하는 패륜행위를 저지르기도 했다.[* 《연산군일기》 12년 8월 15일 기사 - 왕이 후원에서 나인들을 거느리고 종일 희롱하고 놀며 노래하고 춤추었는데, 이날은 바로 [[폐비 윤씨]]의 기일이었다. 왕은 또 발가벗고 교합하기를 즐겨, 비록 많은 사람이 있는 데서도 피하지 않았다.] 이런 점에서, 연산에게 효심이 진짜 있었는지 아닌지에 대해서 상당히 애매모호하게 되었다. 말년에 들어서는 일관성 없이 즉흥적으로 이랬다 저랬다 했던것을 보면, 진심으로 우러나온 효심이라기보다는 반대 신료들을 숙청하기 위한 정치적 계산과 어머니에 대한 일시적인 그리움이 시너지 효과를 이루어 나타났다는 해석이 있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은 이 가설을 택했다.] ==== 피 묻은 적삼 ==== 보통 연산군이 등장하는 사극을 보면, 연산군이 자신의 외할머니 신씨를 통해 받은 [[폐비 윤씨]]의 피 묻은 적삼을 보고 분노해 [[갑자사화]]를 일으킨 것으로 그려지나, [[야사|이는 사실이 아닐 확률이 높다.]] 무엇보다도 정사(실록)엔 연산군이 외할머니를 만난 기록이 없다. [[임사홍]]만 만났을 뿐이다. 그렇다면 피 묻은 적삼은? 실록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야사집인 《기묘록》에는, [[폐비 윤씨]]가 피 묻은 적삼을 자신의 어머니에게 맡기면서 자신의 원통함을 알려달라고 했다고 씌어 있다. 또 《파수편》에서는, 연산군이 피 묻은 적삼을 받고 제정신을 잃었다는 식으로 설명을 하고 있다. 하지만 금삼(錦衫)의 피는 야사일 뿐이다. 피 묻은 적삼은 이렇듯 신뢰할 수는 없는 이야기지만, 그 극적인 효과 때문에 조선시대에는 널리 퍼져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무엇보다도 이 설이 히트를 친 데에는, 박종화의 역사소설 《금삼의 피》에 등장한 것이 크게 작용했다고 한다. 이러한 묘사가 상당히 임팩트가 있는지, 드라마 《[[장녹수]]》, 《[[왕과 나]]》 등 현재까지 사극에서 써먹고 있다. 그 외에도 《[[왕의 남자]]》 등에서도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인물로 그려지는 경우가 많다. 영화 《[[간신(영화)|간신]]》의 첫 장면에서도, [[임사홍]], 임숭재 부자가 연산군에게 이 피 묻은 적삼을 건넨다. 하지만 여기에 비밀(반전)이 있었으니… 사실 [[폐비 윤씨]]는 자신이 세상을 떠난 후 아들이 자기 복수를 해주려고 폭군이 될 것을 걱정해, 자신의 어머니에게 모든 유품을 태워달라고 부탁했고, 실제 [[임사홍]] 부자가 폐비 윤씨의 어머니로부터 받은 것은 이 말과 함께 받은 빈 상자뿐이었다. 하지만 권세에 미친 [[임사홍]]은, 자신 때문에 독을 먹고 세상을 떠난 자신의 아내가 남긴 피 묻은 적삼을 [[폐비 윤씨]]의 것으로 속여 연산군에게 건넨 것. 또 다른 반전이 있었으니, 연산군은 이미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연산군은 왕권강화를 위해 임사홍의 거짓말을 눈감아 준 것. ==== 최근의 가설 ==== 최근에는 대간과 대신 모두를 숙청하여 절대권력을 이루기 위해서, 어머니의 죽음을 정치적으로 활용했다는 설이 있다. 아버지 성종이 왕임에도 불구하고 간혹 신하들의 말에 꼼짝도 못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고, 이를 후계자의 입장에서 지켜보면서 자신은 그러지 않으리라 다짐했으리라는 것. 정사에서 실제로 [[폐비 윤씨]]에 대해 거론한 적은 많지 않으므로, 어디까지나 숙청의 빌미나 구실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늘 자신과 성종을 쪼아댔던 삼사(三司)가 유독 그때만큼은 성종에게 반대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는 화가 났던 것일 수도 있다. 연산군은 즉위하기 전, 너무 세력이 커져 왕마저 괴롭히는 [[삼사]]를 탐탁지 않게 생각하여, 즉위 직후부터 삼사의 권한을 억누르려 했다. 실제 연산군은 미친 듯이 아무나 숙청한 게 아니라, 우선 [[사약]]을 직접 나른 이세좌를 숙청한 뒤, 그 후로 이세좌의 가문인 광주 이씨와 그와 연관 있는 대신 가문을 숙청하고, 그 다음에 대간들을 찍어 누르면서, 조정의 세력균형을 완전히 무너뜨리고 절대권력을 장악했다. 하지만 《연산군일기》에는 연산군에 대한 긍정적 기사도 제법 있기 때문에, 연산군이 벌인 온갖 패륜이 모조리 거짓이라고 하기엔 무리가 많다. 설령 연산군이 절대권력을 위해 저랬다고 하더라도, 위에서 보다시피 연산군이 벌인 수많은 행동을 마음대로 하기 위해 절대권력을 쥐려고 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정당화할 건덕지가 없는 셈이다. 고로 연산군의 최후까지를 "왕권과 신권의 대립"으로 해석하면서 '연산군은 신권세력에게 왜곡되었다'고 떠드는 것은 심히 곤란하다. 게다가 이러한 가설을 제시한 [[임용한]] 교수도, '''결과적으로 절대권력을 장악한 연산군이 이를 이용해 제멋대로 놀았다'''고 결론짓고 있다. ==== 연산군의 광증(狂症) ==== 연산군은 어머니의 사랑이 부족했던 나머지, 폭정을 휘둘렀다는 말이 여러 번 제기되고 있다. 소설이나 영화 등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설이기도 하다. 왕자 시절 [[계모]]인 [[정현왕후]] 윤씨가 신경을 쓰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자신의 아들 [[진성대군]](후일의 중종)이 태어난 후엔 친아들에게 마음이 더 기울어 상대적으로 홀대했으리라 추측할 수 있다. 성종의 첫아들이라고는 하나, 미워했던 며느리의 아들이니 [[인수대비]]의 홀대도 대단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모두 추측이다. 무엇보다도 성종은 연산군의 재능을 총애하고 신경을 많이 써서, 특별한 나쁜 기사는 딱히 없다. 실록에 나오는, 아버지의 [[사슴]]을 활로 쏘아 죽였다는 기사는 위작일 가능성이 높다. 아이가 없었기에, 조카인 연산군을 자기 아이처럼 돌봐줬을 가능성이 높은 [[월산대군]] 부인 박씨[* 백부의 부인이니 연산군에게는 어머니뻘이다.] 대한 야사 등을 비롯하여 유부녀들을 적지 않게 탐했다는 이야기에서, 그로 인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있지 않았나 하는 의심도 간다. 솔직히, [[갑자사화]] 이후로는 [[강박관념]] 등에 시달린 게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게 하는 기사도 많다. 여하간 연산군은 적어도 [[갑자사화]] 전까지는 이렇다 할 광증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정사도 나름대로 잘하고, 백성들도 성종 대와 다르지 않다고 느낄 정도였다. 연산군의 행동을 어릴 적의 울분의 분출로 설명하기에는 무리가 많다. 다만 갑자사화 이후에는 그것이 영향을 미쳤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연산군 자체가 상당히 감성적이고, 예술적 기질이 있는 인물이었던지라…. 그러나 이러한 광증은 앞서말한 소설이나 드라마, 영화때문에 일어난 산물로 보는 견해도 많다. 피묻은 적삼이 등장하는 <금삼의 피>나 <장녹수>에서 볼 수 있듯이 극적재미를 위한 요소 중 하나로 연산군의 광증을 짐짓 지어냈다는 것. 사실 관객들에게 흥미를 돋우는 것 중 하나가 스토리의 급작스러운 전환이니만큼 역사소설가나 대하드라마 작가같은 입장에서는 이를 부각시키는 것이 합당하다. 연출의 측면에 있어서도 엄한 아버지의 훈육 속에서 자라던 유년기에 대한 보상심리로 서서히 타락해가는 왕보다는 친모의 죽음으로 미쳐버리는 인물이 훨씬 매력 있어 보이는 것도 그 이유라고 할 수 있다. ==== 종합해서 ==== [[계획대로|철저한 계획이었다]]는 설이 유력한데, 폐비 윤씨의 일을 숙청을 단행하기 위한 하나의 빌미로 썼다는 것이다. 그 이전의 행동들은 모두 아직 권력이 약했던 시기의 행동이라는 것이다.[* 허나 연산군의 왕권이 크게 약했다기보단(후대의 왕보다 훨씬 강했다. 일단 정통성이 확실한데…) 성종이 밀어준 대간의 세력이 비정상적으로 큰 것이다.] 이렇게 보면 '''어머니의 죽음을 처음 알게 된 것처럼 행동함 → 어머니를 추숭 → 날뛰는 대간 잡기[* 실록을 보면, 대간 때문에 시달린 건 주로 대신들이었기에, 대신(재상들, 육조판서 등)들은 연산군의 숙청에 동참했다. 사실 성종 말-연산군 초 대간의 막나가는 행태는 정도를 한참 벗어났다고 말해도 좋을 정도여서, 연산군이 대간만 적당히 제압하고 즉위 초기의 모습을 견지했다면 현재의 평가도 상당히 달라졌을 것이다.] → [[무오사화]] → 수년간 눈치를 살핌 → [[갑자사화]]''' 이 단계 모두가 권력과 정통성을 강화하는 책략이었다는 것이다. 물론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기 때문에 연산군의 폭정이 실제보다 어느정도 과장 됐을 가능성이 없지는 않다. 하지만 연산군 일기에 즉위기간 내내 폭정이 적힌것도 아니며 즉위 초반 국정을 돌본 기록이 있는 것을 감안하면 재위 후반 폭정을 저지른 건 엄연히 사실로 봐야 한다. '''상식적으로 나라가 건국된 이후 최초로 신하들이 일으킨 쿠데타 였다는걸 생각해 보자(...)''' 광해군과 달리, 연산군이 오늘날까지도 폭군이라고 욕먹으면서 재평가를 받지 못하는 것도 다 이유가 있다.[* 광해군도 이런저런 과오(지나친 궁궐 증축, 옥사 남발, 패륜)가 있는 건 분명한 사실이지만, 적어도 연산군만큼의 막장 짓은 저지르지 않았다. [[광해군]]은 자신의 계모인 [[인목왕후]]를 폐하고, 이복동생인 [[영창대군]]을 유배 보낸 뒤 죽음에 이르게 한 폐모살제(廢母殺弟)를 저질렀지만, 연산군이 저지른 패륜과 비교하면, 적어도 최소한의 실드를 쳐줄 건덕지는 있는 편이다.] === 그가 벌인 패악질 === 연산군은 황제급 권력을 얻었으나, 자신이 가진 권력에 걸맞는 일을 할 수 있을 만큼 그릇이 크거나 책임감이 강한 인물이 아니었다. 사화를 연속해서 벌인 후 나사가 빠져버린 연산군의 폭정으로, 백성들은 1년 내내 농사지은 수확물을 모두 착취당하는 식으로 빼앗겨 산에 있는 나물과 풀로 간신히 먹고살게 되었다. 하지만 그렇게 생계를 꾸려나가는 것까지 위협당했다. 산나물이 몸에 좋다는 말을 들은 연산군은 전국에 있는 산나물까지 채취하도록 하였는데, '''백성들이 산나물이나 풀로 연명하는 것도 중지시키면서 많은 아사자가 발생하였다'''. 게다가 이 산나물을 다 먹은 것도 아니라서 궁으로 가는 산나물과 [[약초]] 수십 가마니가 사용되지도 못하고 썩는 동안, 많은 백성들은 그것을 바라보면서 굶어죽었다고 하니, 그 막장성은 하늘을 찔렀다. 이런 군주이다보니 연산군은 백성들에게조차 철저하게 증오받았다. 후에 [[중종반정]]으로 몰락하여 폐위되고 유배길에 오를 때 '''백성들이 앞다투어 손가락질하고 욕까지 했다고 할 정도니.''' ==== 흥청망청 ==== 전국에 채홍사(採紅使)·채청사(採靑使) 등을 파견하여 미녀와 좋은 말을 구해오게 해서 방탕한 향락에 빠졌다.[* 이때 미녀들 중에서 [[임신부]]도 섞여 들어왔는데, 그걸 보고 하는 짓이 정말 막장이라는 기록이 있다. 그녀들이 아기를 낳으면, 당장 아기를 빼앗아서 아기를 몰래 '''생매장'''시켰다고 전해진다.] 이 중에서 가장 예쁘거나 노래를 잘 하는 자들을 뽑아 "흥청"이라고 이름 붙였으며, 이것이 '''"흥청망청"'''의 어원이 된다. 워낙 [[크고 아름다운]] 것을 좋아하던 왕인지라 흥청의 규모는 2천명이었다고 한다. 초창기에는 예쁘고 노래 잘하고 춤 잘 추는 여자를 뽑으려고 했지만, '''현실적으로 그건 도저히 무리'''였기 때문에, 얼굴이 예쁘장하면 무조건 뽑았다.[* 이 과정에서 자식이 있는 유부녀도 강제로 뽑았다는 말도 있다. 비록 드라마이긴 하지만, [[대장금]]에서 장금의 스승인 [[의녀]] 장덕의 어머니도 강제로 차출되어 끌려갔다고 하는 설정이 있다. 유부녀도 강제로 끌고 갔던 사실이 있었는지는 확인바람.] 이 많은 흥청들에게는 모두 집이 제공될 뿐더러, 가족의 납세와 노역도 면제되었다고 한다. 참고로 흥청으로 사용된 건물은 놀랍게도 '''[[집현전]]'''이었다. 게다가 [[고려]]시대부터 내려오다가 선왕인 세조가 중건한 절을 아예 기생방으로 만들어 버린다. 이 절이 바로 '''증조부 세조시절 증건되었고, 현 국보 2호[[원각사지 십층석탑]]이 있던 [[원각사]]'''였다. 현재의 [[탑골공원]]이 원각사가 있던 자리다.[* 3.1운동이 일어난 그곳이다.] [[유신헌법|지금으로 치면, 헌법을 뒤엎고 독재자가 된 다음,]] [[대전광역시|국립 연구소와]] [[조계사|서울시]] [[봉은사|내의]] [[서울성공회성당|유서깊은]] [[명동성당|종교시설]][[공산주의|을 점거하고,]] [[충혜왕|클럽이나 [[술집]]으로 만들어 버린 꼴이다.]] 그만큼 학자와 [[승려]]를 우습게 보았다는 증거이다. 또 궁궐 내관이었던 [[김처선]]이 자신의 죽음을 각오하고 선왕 중에서 연산군만큼 풍기문란을 일으키고 폭정을 일삼는 임금은 없었다는 간언을 올리자, [[능지처참|분노하여 김처선의 양 팔을 칼로 '''직접''' 배어 죽였다.]][* 야사에는, 연산의 분노에도 눈물로 간언을 계속하는 [[김처선]]에게, 연산은 활을 가져오게 하여, 손수 활로 쏘아 죽였다는 이야기가 꽤나 유명하다.]그 후 '처(處)'라는 글자의 사용까지 금지하는 명령을 내리게 되어 '처서(處暑)'를 '조서'로, [[처용무]]는 '풍두무(豊豆舞)'라고 고쳐 부르게 했다. ==== [[성균관]]의 자리에 사냥터를 만들다 ==== 게다가 [[세종대왕]]이 즐겨했던, 시국을 논하고 정쟁에 대한 토론도 하는 경연을 없애서 학문을 멀리 하고, [[성균관]]을 폐쇄하고 학생들을 모두 몰아낸 다음에, 그곳을 놀당, 즉 놀이터로 삼았다. 사간원도 폐지해서 언로를 막는 등, 연산군의 패악질은 극에 달했다. 백성들에게 끼친 피해도 만만치 않았는데, [[경기도]] 일대에 금산(禁山), 지금으로 치면 "[[그린벨트]]"와 비슷한 것을 정한 후, 그 안에 있는 민가를 쓸어버리고 사냥터를 만들게 하기도 했다. 이것 때문에 백성들은 연산군을 더욱 증오하였고 그가 왕위에서 쫓겨나자 통쾌하게 여겼다. 물론, 조선시대 초기부터 금산은 자주 있었다. 개국초기나 연산군 시절처럼, [[왜구]]가 출몰하는 시기에는 배를 만드는 데 쓰는 [[소나무]]를 조달하기 위해 금산을 시행하여 무분별한 벌목을 막았다. 연산군이 금산을 지정한 게 문제되는 건 이런 금산조치가 적어도 국방 등 국가경영을 목적으로 하는 정책을 위해서 시행한 것이 아니라, 그저 연산군 개인의 유흥을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게다가 단순히 산에 출입금지를 시키는 금산이 아닌 거주민을 전부 쫓아내고 그들의 땅을 빼앗는 짓을 한 것이다. 이쯤 되면 정말 막장스럽기 짝이 없다. '''그런데도 정작 사냥은 몇 번 나가지도 않았었다.''' 겁이 많아서 맹수들은 절대 사냥하지 않고, 잡아온 뒤에 우리 밖에서 쏘아 죽였다. 그가 사냥한 짐승은 노루나 [[토끼]], [[꿩]] 등 사람에게 위협이 되지 않는 짐승들이다. 하지만, 한 번 [[사냥]]을 나가기만 해도, 몰이꾼들의 식량부터 해서 어마어마한 돈이 들어가므로 재정은 충분히 거덜 났다. 사실 조선의 왕들이 사냥을 나가고 싶어도, 이런 재정적인 문제 때문에 제대로 사냥을 하지 못했다. 태종 [[이방원]]도 사냥을 좋아했지만, 신하들에게 잔소리를 많이 들어서 눈치를 항상 살펴야만 했다. 여담으로, 태종은 [[상왕]]이 되고 나서야 비로소 사냥을 마음껏 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이때의 태종은 죽을 날이 멀지 않았기에, 세종과 신하들이 눈감아준 것도 있었다. ==== 돈 낭비 ==== 여기에다 서총대(瑞葱臺)를 비롯한 토목공사를 벌였고, 생일에는 '혀 요리' 같은 진미를 동원했으며, 주변 관료들과 백성들의 옷도 화려하게 입을 것을 명했다. 심지어 궁궐에서 일하는 공노비들도 옷을 화려하게 입도록 했다. 하지만 문제는, '''이렇게 놀아 제끼려면 당연히 돈이 많이 드는데도 불구하고, 돈도 한 푼 안 주면서 뻔뻔하게 이런 무리한 명령을 했다는 것. 덕분에, 연산군 초기만 해도 살 만했던 백성들은 경제적으로나 뭐로나 [[헬게이트]]가 열리면서 완전히 죽을 맛이 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반론도 있는데, 서총대를 비롯한 연산의 토목공사는 사실 그리 큰 토목공사도 아니었고, 백성들에 대한 세수 증가는 이미 세조 이후 성종 치세부터 꾸준히 진행되어 왔으며, 재정악화 역시 딱히 연산군이 막장으로 놀지 않았더라도, 훈구파들의 세력 확대로 인해 성종 때부터 진행되어왔다는 견해다. 또한 연산군은 금표(禁標)를 지정해 농토를 마구 뺏었는데, 이는 대부분 훈구 대신들의 사유지를 연산군 자신의 사유지로 만든 것이라 백성들의 생활과는 큰 관련이 없었다는 주장이다. 즉 민생 자체에 딱히 심한 타격을 초래하지는 않았으리라는 것이다. 막장이 된 뒤 2년 동안 연산군이 마음대로 놀아 제끼면서 재정을 악화시킨 점은 있었으나, 성종이나 중종과 비교해볼 때 딱히 심각한 지출이나 징세는 없었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두고두고 문제가 되는 왕실의 방만한 재정운용은 무오사화 이후 심화되어, 연산군 10년 내수사(內需司) 직계제를 통해 이에 필요한 비용을 수탈하는 제도가 확립된다. 애초 재정의 남용에 따른 부족분을 다음해, 그 다음해에 필요로 하는 공물을 앞당겨 조달하는 인납(引納), 무납(貿納) 등 [[공납]]제도가 크게 어지러워진 것은 연산군 때부터의 일이며, 연산군 7년에 이를 현실화한다는 미명 하에 실시된 공안 상정(신유공안)으로 인해, 백성들에게 부담되는 공납의 부담은 크게 증가했다. 이미 [[16세기]] 들어 조세제도에서 공납의 비중이 커져만 가던 시대상황을 생각하면, 이러한 변화가 백성들에게 심각한 부담이 되었을 것이란 건 당연지사다. 예를 들어, 경기도에서 1년에 진상해야 할 물고기 7,518마리 중 4,800마리가 이러한 별진상으로 늘어난 품목들이었다. 선조시대의 [[이이(조선)|율곡 이이]]가 만언봉사에서 가장 큰 문제로 지적한 공물 추가분정은 바로 연산군의 이러한 깽판질에서 비롯된 것이다. ==== 직언을 차단 ==== 신하들 단속에 매우 난리를 쳤는데, '''"입은 몸을 베는 칼이다."'''라는 내용의 신언패(愼言牌)[* 중국 [[5대10국시대]]의 정치인 [[풍도]](馮道)의 설시(舌詩)가 적혀 있었다고 한다. 설시의 내용은 풍도 항목 참조.]를 차게 하고, 총애하는 흥청의 나들이나 연산군의 가마를 메는 데 신하들을 동원시켰다.[* 이것을 보면 연산군이 신하들을 얼마나 막 대했는지를 알 수 있다.] 폐위 몇 달 전부터는 아예 [[사모]] 앞뒤로 "충", "성"을 수놓게 하였다. 그렇게 많이 죽이고도 겁이 어마어마하게 많았던 모양이다. 자기 권위를 살리는 데에도 열심이어서, 자신이 사냥을 나갈 때에는 백성들을 멀리 쫓아내버렸으며, 북악산 마루에서 궁궐을 내려다본 아이들의 부모를 잡아 족쳤다는 말이 나돌 정도였으니, 이걸 보면 연산군은 '''백성을 사랑하는 왕이 절대로 아니다'''라는 것을 알 수 있다. ==== 언문사용 금지 ==== 연산군의 악행을 비방하는 투서가 나돌았는데, 그것이 [[한글|언문]]으로 써져 있었다는 이유로 [[훈민정음]] 교습을 중단시키고 언문 구결을 모조리 수거하여 불태웠다. 하지만 정작 뒤에 나오는 흥청들의 음악 교본은 모두 언문, 즉 한글로 되어 있었다. 아무래도 연산군이 일시적인 감정 때문에 명령을 내리기는 했지만, 이미 백성들에게도 한글 사용이 제대로 정착된 현실 때문에 흐지부지 되어버린 듯하다. 그러므로 "한글의 암흑기"까지는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언문이 지식인이 아니라 일반 백성들까지 상대로 한 글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연산군에 대한 반감이 백성들에게까지 퍼졌거나, 백성들까지 끌어들여서 반(反)연산군 활동을 하려는 세력이 나타났다는 것으로도 이해될 수도 있다. 어찌되었든 한 국가의 임금이라는 사람이, 개인의 감정으로 고조부의 업적을 제대로 능욕한 꼴이 되었으니 까여도 할 말 없다. ==== [[섹스 중독]]자 ==== >왕의 음탕이 날로 심하여, 매양 족친 및 [[성종(조선)|선왕]]의 [[후궁]]을 모아 왕이 친히 잔을 들어서 마시게 하며,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으면 [[장녹수]]가 아끼는 궁인에게 '''누구의 아내인지 비밀히 알아보게 하여 외워두었다가 이어 궁중에 묵게 하여 밤에 [[강간|강제로 간음]]하며 낮에도 그랬다.''' 혹 4,5일이 지나도록 나가지 못한 사람으로서, [[좌의정]] 박모의 아내, 남천군 이모의 아내, 봉사 변모의 아내 (중략) 같은 이들이 다 (왕과) 추문이 있었다. >ㅡ 《[[조선왕조실록]]》 연산군일기 11년(1505) 4월 12일. >왕이 박씨[* 연산군의 [[아버지]] 성종의 형이었던 [[월산대군]]의 부인. [[중종반정]]을 이끈 핵심인물인 [[박원종]]의 누나이기도 하다.]로 하여금 그 집에서 세자를 봉양하게 하다가 세자가 장성하여 [[경복궁]]에 들어와 거처하게 되면서는, 왕이 박씨에게 특별히 명하여 세자를 입시(入侍)하게 하고,[* 쉽게 말해 궁에 들이기 전에 세자를 보살피게하다가, 세자가 커서 [[경복궁]]에서 살게 되자 세자를 돌보라는 핑계로 궁에 들여왔다는 소리다.] 드디어 [[간통]]을 한 다음 은으로 승평부 대부인이란 도장을 만들어 주었다.[* 야사에서는 [[강간]]당하고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해 [[자살]]했다고 되어 있다. "[[월산대군]]은 성종의 형이다. 그 재취 부인 박씨를 세자를 보호한다고 핑계대고 궁중에 불러들여 강제로 더럽히고는 그 관복을 특별히 높이고, 은으로 도장을 만들어 비빈의 계급으로 대우하게 하고 또 사은하게 하니, 박씨가 부끄러워서 스스로 죽었다. ㅡ 《동각잡기》 본조선원보록 2"] 어느 날 밤 왕이 박씨와 함께 자다가 꿈에 월산대군을 보고는 밉게 여겨 내관으로 하여금 한 길이나 되는 쇠막대기를 만들어 [[월산대군]]의 묘 가운데 꽂게 하였는데 우레와 같은 소리가 들렸다. >ㅡ 《[[조선왕조실록]]》 연산군일기 12년(1506) 6월 6일. 게다가 "색(色)을 밝혀서, [[기생]]들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신하들의 아내까지 은밀히 불러다가 간음했다." 하며, 실록에는 연산군에게 아내를 바친 신하들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다.[* [[역사저널 그날]]에서는 이런 상황이 조용히 숨죽이던 신하들까지 등돌리게 만들었을 것이라고 했다. 패널인 [[신병주]] [[건국대]] 교수는 "연회에 참석하지 않으면 목숨이 위태롭고, 참석하면 아내가 왕에게 범해지는 불상사가 벌어지고, 결과적으로 숨죽이고 있던 신하들도 서서히 연산군에게 등을 돌리게 되었어요. 우리도 마찬가지잖아요. 자기가 당하는 건 어쩔수 없다 치더라도 내 아내가 모욕을 당하면 참을 수 없으니까."라고 말했다.] 거기다가 이복누이들과 [[근친상간]]까지 했다는 기록도 존재한다. 그런데 색욕에 비해 [[정력]]이 딸렸는지, 약을 엄청나게 복용했다고 전해진다. 사실 연산군의 건강은 그렇게 좋은 편이 아니었다. 항상 잔병을 달고 살아서 본인이 이것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살았다. 갑자사화 후 친모([[폐비 윤씨]])의 상중에도 [[성관계]], 심심하면 말의 등에서도 [[성관계]]를 하는 등, [[하드코어]]의 극치를 달린다. 이게 다 사실이라면, 연산군은 현대 정신의학적인 견지에서, 전형적인 [[섹스 중독]]증을 앓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육체적인 [[성욕]]의 해소가 아니라, 정신적인 공허를 성적인 자극으로 채우려고 성에 탐닉하는 것인데, 결국 밑 빠진 독에 물붓기다. 원인이 되는 정신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저 시점에선 정신의학이란 개념 자체가 지구상에 없던 시기인 관계로, 후대의 인물인 [[사도세자]]의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 이를 해결할 방법은 전혀 없었다고 봐야 한다. 더군다나 연산군은, [[궁녀]]들을 시도 때도 없이 너무 많이 뽑은 탓에, 연산군의 치세기간 동안이 조선왕조 전체를 통틀어서 궁녀들의 수가 가장 많았던 시기였다. 각 군주 당 평균 600~700명 가량 되던 궁녀의 수가, 이 시기에만 유일하게 1,000명을 돌파했다고 한다.[* 더 심각한 건, 원래 궁녀들은 왕의 승은을 입는 경우를 제외하면, 원칙적으로 처녀로 늙어 죽어야 했다. 그러나 희대의 폭군이신 연산군께서는, '''그냥 예쁘면 유부녀건 미망인이건 닥치는 대로 뽑아버렸다'''.] 물론, 궁녀들 대부분은 노비였으니[* 서민이나 양반의 딸들은 대부분 관리직이나 고위직을 맡았다. 대체로 부모들은 자신들의 딸을 [[궁녀]]로 보내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건 왕이라도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궁녀를 뽑는 것 자체는 큰 문제가 아니었지만, 궁녀 유지비는 그 자체로 백성들 [[등골 브레이커|등골을 빼먹는 행위였다는 것이 문제다.]] === [[중종반정]]. 폭군의 몰락 === 숙청할 대상이 전부 숙청되어 더 이상 숙청할 대상이 없어진 연산군은, 급기야 어느 정도는 자신의 향락을 말리던 박원종[* 연산군은 [[갑자사화]] 당시, [[무오사화]]와는 달리 무자비한 [[연좌제]]를 적용하여 많은 무고한 이들을 죽였다. 그 결과 박원종이 문제가 아니라, 박원종과 가까웠던 사람들이거나 박원종에게 명함이라도 전한 사람들에게는 앉아서 죽느냐, 서서 살 길을 찾느냐의 선택 외에는 없었다. 다만, 그럴 것을 염려했던 연산군은, 다른 일이 터졌을 때 단순 가담자는 매우 가벼운 처벌을 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결국 당시 대신들은 그때 이후로 일이 터졌을 때, '''전 단순 가담자일 뿐이고, 주동자는 (이미 사화로 인해 희생당한) 그 사람입니다'''라고 발뺌해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 있는 내용] 연산군도 한 번 지적은 했으나, 사실 자신이 의도한 바여서 그런지 언급만 하고 넘기는 분위기였다. 박원종에 대해서도 몇 차례 말로 꾸짖었을 뿐 별다른 처벌을 내리지 않았다.]과 서자 출신으로 연산군을 배신할 이유가 없었던 [[유자광]]에게까지 이유 없는 짜증과 협박을 가했고, [[토사구팽]]의 위험을 느낀 두 사람과 주위인물들이 반정을 모의하기에 이른다.[* [[여진족]] 토벌과 [[이시애의 난]] 진압 등 실전 경험이 풍부했던 유자광의 반정합류는 반정 성공의 큰 힘이 되었다.] [[유자광]]의 경우, [[무오사화]] 때 [[김종직]]과 가까운 사이였다는 이유로 [[임사홍]]의 아들이 옥사한 후, 임사홍이 의도적으로 유자광을 배척하는 움직임을 보인 것도 이유가 되었다. 이후, 성희안[* 연산군에게 간언을 했다가 파면당해서 깊은 원한을 가지고 있었다.], 박원종, 유순정, 신윤무, 유자광 등이 조선왕조 최초로 신하들이 왕을 몰아내는 [[중종반정]]을 일으켜, 연산군을 폐위하고 중종을 왕위로 올렸다. 일반적으로 조야(朝野)는 중종반정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분위기였으나, 그래도 반발이 없었다고는 할 수 없다. 당장 성종 대부터 조정의 고관을 역임하고 중종반정의 공신 중의 하나였고, 당시 '조선 제일의 학식을 갖춘 이'라 칭해지면서 사림/훈구 가리지 않고 존경받던 [[채수]]는 《설공찬전(薛公瓚傳)》을 저술했는데, 여기서는 중종반정을 가열차게 까고 있다. 때문에 채수는 탄핵당해 말년에 목이 날아갈 위기를 맞기도 했다. 이런 정황을 보면, 일반적인 생각과는 달리, 중종반정에 대해 반발하는 여론도 적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연산군을 옹호하는 여론이 적지 않았다는 의미는 아니다. 연산군은 이미 그 당시에도 조야를 막론하고 [[천하의 개쌍놈들|써글놈]]이라는 평이 대세였다. [[중종반정]]에 대해 반발하는 여론은, 연산군 본인에 대한 동정에서 나온 것이라기보다는, 힘으로 군왕을 폐하는 반정 자체에 대한 반발이었다. 《[[설공찬전]]》을 통해 조선사회에 핵폭탄을 날린 [[채수]]만 해도, 연산군을 동정했다기보다는 성종의 유신(遺臣)으로서 연산군이 폐위당하는 상황에 대한 불만이 강했다고 보고 있다. 왕(王)에서 군(君)으로 강등된 연산군은 [[강화도]] [[교동도|교동]]으로[* 상세한 위치는 기록에 없으며, 현재 신골, 연산골, 읍내리 3곳이 연산군의 유배지로 추정되고 있다. 연산군 뿐 아니라 [[희종(고려)|희종]], [[임해군]], [[영창대군]], [[광해군]] 등 많은 왕족들이 교동에서 유배생활을 하였다.] 유배를 가서 몇 달 만에 그곳에서 병사한다. 사망 당시 부자연스러운 부분이 있어 독살설[* 연산군 사망 원인이 [[말라리아]]라고 하는데, 연산군이 사망한 건 늦가을이다. 일반적으로 말라리아는 더울 때 걸리는 병이다. 다만 강화도는 기후가 온화하고 [[모기]]가 많기로 유명한 동네라 가을에 걸릴 수도 있는 것이고, 잠복 후 뒤늦게 발병하는 경우도 있다.]이 제기되기도 하지만, [[화병]]으로 죽었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그야말로 절대왕권으로 흥청망청 놀고먹으면서 제멋대로 즐기던 양반이, 한순간에 몰락하고 초라한 유배 생활을 해야 하는 [[뉴스데스크 게임 폭력성 실험 사건|본인의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마음의 병을 얻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한편 반정세력은 [[명나라]]에 보내는 조서에, 연산군이 병으로 동생 중종에게 왕위를 양보했다는 희대의 사기를 펼쳤다. 그 직후 연산군이 급사했기에 독살설이 나돈 것이다. 가끔씩 [[명나라]] 사신들이 연산군에게 문안을 드리고 싶다고 요청하여 조정이 발칵 뒤집히는 일도 있었는데, 이에 대해 "연산군이 사람 기척만 들려도 발작을 해서 도무지 뵐 수 없다"고 사기를 쳤다. 명을 끝까지 잘 속인 모양인지, 연산군이 세상을 떠난 지 30년이나 지난 중종 30년에도, '''"사신이 오면 '연산군이 지금은 [[창덕궁]]에 있다'고 말해야 하는가?"'''라는 기록이 나온다. 의심 한번 안한 명이나, 끝까지 속인 조정 모두 [[흠좀무]]. 어쩌면 그런 개막장 이미지의 왕이다 보니 명 입장에선 까딱 잘못 건드렸다간 피를 볼 가능성이 있어서 알고도 모르는 척을 했을지도 모르는데, 현대인들에게는 후자가 더 설득력이 있을지도 모른다. 일단 중국의 실록인 명사(明史)엔 이렇게 적혀 있다. ||[[정덕제|정덕(正德)]] 2년 [[연산군|융(㦕)]]이 세자 황(𩔇)이 어린 나이로 죽은 것을[* 세자를 반정 공신들이 죽였으니 참 구실을 대도 그런 구실을 댄 셈이다...] 몹시 슬퍼하다가 병을 얻었으므로 국사를 아우인 [[중종(조선)|이역(李懌)]]에게 넘겨주겠다고 주청해 왔고, 그 나라 사람들 역시 이역(懌, 중종의 휘)을 왕으로 봉하여 주기를 주청해 왔다. 예부에서 이를 의논하여 역에게 [[섭정|국사만을 맡게]] 하고, 융이 졸하기를 기다렸다가 국왕으로 봉해 주기로 하였다. 앞서 배알한 신하(陪臣, 가신) 노공필(盧公弼) 등이 조공하기 위해 수도(경사/京師)에 와서 역을 봉해 주기를 거듭 주청하였었는데 조정의 의논으로 윤허하지 않은 적이 있었다. 12월에 융의 대비(母妃)가 역은 나이도 들었고 현명하니 중임을 맡겨도 감당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상주하였다. 이에 예부에서, “융은 고질병(痼疾)으로 왕위를 사퇴하였고, 역은 친동생으로서 왕위를 물려받은 것이 이미 명백한 사실이니, 우애를 지키지 못한 것도 아닙니다. 그 나라의 모든 신민들도 한결같이 그렇게 말하고 있으니 그들의 청원대로 따르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상주하였다. 황제는 이에 융의 선위를 윤허하고, 내관을 파견하여 국왕 책봉의 칙명과 아울러 그 비 윤씨([[장경왕후]])의 고명을 내렸다.|| 연산군의 묘는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에 있다. 폐위된 군주라서, 능의 형식이 아니라 그냥 조촐한 묘로 되어있다. 살아서는 최강의 권력을 누렸지만, 죽어서는 가장 초라한 묘에 안장된 셈이다. 자세한 사항은 [[연산군묘]] 항목을 참조. 조선왕조 최초로 [[폭군]]으로 전락하여 폐위된 임금이었기 때문에, 재위를 했던 임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종묘]] 신위 명단에서도 제외되어 모셔지지 않았다. 결국 광해군과 함께, 종묘 신위 명단에서 제외되어 종묘에도 모셔지지 못한 2명 뿐인 임금으로 남았다. 폐위되면서 왕자 시절 군호로 격하된 광해군과 달리, 연산군은 원자–세자의 정통을 밟아 왕위에 오른 경우이므로, 폐위 이전까지는 연산이라는 호칭 자체가 없었고, 폐위된 이후에야 연산군으로 봉해진다. 간혹 사극에서 폐위되기도 전에 연산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은 명백한 고증 오류. === 가족사와 편력 === 아내 [[폐비 신씨]]는 신수근의 여동생으로 후덕하고 엄정하기로 유명하였고, 남편의 폭주를 막아보려고 여러 번 간언하지만 실패했다. 그래도 조강지처인지 연산군은 그녀를 내치지도 않고, 그녀의 후덕함을 황금에 새겨 치하하기도 했다. 연산군과 신씨는 유배될 때 각각 다른 곳에서 지내게 되었는데, 실록의 기록에 따르면, 연산군의 유언은 '''"중전이 보고 싶다"'''였다고 한다. 어떻게 보면 나름대로 인간적인 [[유언]]이다. 원래 연산군의 묘는 [[강화도]]에 있었지만, 부인 신씨가 간청하여 몇 년 뒤 오늘의 위치로 이장했고, 신씨 역시 사망한 후 연산군의 옆에 묻히게 되었으니, 결국 유언은 이루어진 셈이다. 장례는 왕의 지위가 취소된 점을 들어 왕자의 예로 치러졌다고 한다. 하지만 [[장녹수]] 쪽으로 가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검열삭제를 안하기로 유명한 [[예종(조선)|예종]]의 아들 [[제안대군]]의 종이었던 장녹수는 당시 30대였고 [[유부녀]]였으나, 엄청난 동안과 애교로 연산군을 녹여서 가지고 놀았다고 전해진다. 연산군의 후궁 노릇을 하면서 권세를 누리다가 [[중종반정]] 이후 처형당한다. [[폐세자 이황]]을 포함한 연산군의 아들 4명은 연산군이 폐위된 이후 반정공신들에게 부당한 죽임을 당했다. 반정당시 세자 이황은 10살이었는데, 야사에 따르면 외척 신수근[* 연산군의 측근이자 처남인 신수근 역시, 갈수록 막장이 되어가는 연산군에게 진절머리가 난 상태였다. 물론 야사지만, 측근이 이렇게 진절머리를 낼 정도라면, 쫓겨나기 전의 연산군이 얼마나 답이 없는 막장이었나를 짐작할 수 있다.]이 반정을 알고도, 임금이 포악하지만 세자가 총명하다며 반대를 하다가 역적으로 몰려서 죽음을 당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고작 10살짜리의 어린애가 어떻게 성장할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부분이고[* 연산군 또한 어릴 때는 나름 총명하다는 소리를 들었다.], 이황 본인 또한 어린애라서 그런지 개념이 없는 편이었는데, 중종반정 다음날 은둔지에서 먹는 식사에 평소 자신이 좋아하던 꿩고기가 빠져있자, 상궁에게 "꿩고기는 어딨느냐?"며 반찬투정을 하기도 했다. 덕분에 궁녀들이 "불쌍하신 분… 앞으론 피죽도 못 드실 텐데…"라고 말하다가 눈물바다가 되었다고 하는데…. 이황은 연산군의 아들 중 최연장자였고, 창녕대군의 경우, 겨우 5살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연산군 폐위 이후 몇 달 만에 사사되었다. 연산군의 막장 포스에 묻히는 감이 있지만, 반정공신들의 조치 역시 16세 미만의 경우는 사형을 금하고, 노비로 만드는 것이 최고형이던 조선의 법도상 엄연한 불법이다. 중종은 자신의 조카들을 죽이라는 반정공신들의 요구에, 처음에는 '''"어린 아이들이 뭔 죽일 죄가 있겠으며 장차 위협이 될 가능성도 낮고 인정상으로도 못할 짓이다"'''라는 이유로 거부했지만, 요구가 계속되자[* 삼정승을 비롯하여 반정공신이자 당시 조정의 1품 고관들이 모두 중종 앞으로 몰려가, 사실상 강제로 연산군 아들들을 죽이라는 전교를 받아내었다.] 결국 모두 사사시키고 말았다. 그나마 중종은 폐세자 이황의 장례나 제대로 치러주라고 명령했지만, '''이 또한 묵살 당했다'''.[* 중종이 "결국 니들 말대로 폐세자 이황이를 사사시켰는데, 장례나 제대로 치러주지?" 라고 하자, 신하들의 대답이 "서인(庶人)으로 죽은 죄인에게 장례는 무슨. 관곽이나 갖춰서 묻어 주는 것만으로도 후한 조치거든요?" 라는 식이었다. 신하들이 왕의 의견을 대놓고 쌩깐 셈이다.] 이때 실록 기록을 보면, 즉위 초기 중종이 얼마나 무력한 임금이었는지 제대로 체감할 수 있을 정도였다. 반정공신들이 반정명분을 더욱 굳건히 하기 위해, 연산군에 대한 이야기들 중 일부는 날조되었거나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더욱이 반정공신들 대부분은 연산군의 체제에서 이득을 누린 관료들이 대부분이다. 역사는 승자가 기록한다는 점을 보면 가능성이 없지는 않은 주장이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연산군이 막장테크를 탄 것은 사실이다. 비슷하게 정치적 다툼으로 아버지를 잃었지만 성군이 된 [[정조(조선)|정조]]와 비교하기도 하는데, 자세히 따지고 보면 둘의 상황은 상당히 다르다. 사도세자가 죽을 당시 정조는 연산군보다 나이가 많았고, [[영조]]는 [[사도세자]]를 죽인 것을 후회하는 것처럼 립서비스를 하며[* 영조는 사도세자를 살해한 것을 한 번도 후회하지 않았으며, 그 과정이 우발적인 것도 아니다. 안 그러고서야 7일이나 가둬놓고 사망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무섭게 시호를 내렸겠나?] 시호를 내리기도 했다. 그리고 정조에게 사도세자의 죽음의 정당성에 대해 여러 차례 훈계를 했다. 반면 연산군이 폐비 윤씨의 죽음과 관련해서 갑자사화를 일으킨 것도, 어디까지나 대신 세력을 숙청하기 위한 구실이었다는 설도 있다. 그리고 정조 역시 자신의 즉위에 반대하는 세력이나 아버지의 죽음에 관계가 있다고 생각한 인물들은 연산군 정도는 아니더래도 나름대로 숙청하기도 했다. == 이야깃거리 == * 외모가 어머니를 많이 닮아, 조선 왕실에서 처음으로 우람한 체형이 아닌 왕[* 이전의 조선왕들은 대체로 체구가 우람했다. 요절한 단종은 제외하고라도, 이성계나 이방원은 물론이고, 재위기간이 짧았기에 병약한 이미지로 생각되곤 하는 [[문종(조선)|문종]]도 실제로는 풍채가 당당하였다. 특히 이성계는 장군 출신인데다 체격이 큰 게 당연한 결과이다.]이 나왔다는 약간 요상한 기록을 가지고 있다. 다만, 키가 큰 건 성종을 닮은 것이었다.[* [[폐비 윤씨]]가 성종에게 "전하께서는 어찌 그리 키가 크십니까?"라고 묻자, 성종이 "나보다 더 큰 사람도 있소"라며, 당시 조정대신 중 장신 축에 들었던 허종이라는 신하를 불러 비교해보았다고 한다.] 신하들에게 왕의 풍채가 없고 여자 같다는 비판을 듣기도 했다고 한다. * 몇몇 책에서는 비운의 임금(...)이라고 언급하는 경우가 잇는데, '이는 '''엄연히 [[고증 오류]]나 다름없다.''' 아무릴 연산군이 그나마 한 업적이 몇몇 잇엇더라도 그가 한 패악질이 [[넘사벽]]으로 더 많기 때문에, 비운의 임금이라고 할 수 없다. * [[인조]] 때 이덕형[* '오성과 한음'의 이덕형과는 무관한 동명이인. 죽창 이덕형이 한음 이덕형보다 5살 어린 동시대 인물이긴 하다. 여담으로 인조반정 공신으로 80까지 사는 등 굉장히 장수했다.]의《죽창한화(竹窓閑話)》에 의하면 이덕형이 100살이 된 노인[* 정확히는 97세의 노인.《죽창한화》는 이덕형이 젊어서부터 1645년에 졸하기까지 짬짬이 쓴 글이다. 연산군 내용이 실린 부분은 이덕형이 임진왜란 다음 해인 계사년에 피난지에서 만난 노인의 증언을 수록한 것이다. 연산군을 본 노인은 13세의 어린 나이에 도성에서 연산군이 행차하는 것을 직접 보았다고 한다.]을 만난 이야기를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노인은 어린 시절 한양에 갔다가 연산군을 보았다고 한다. 그 노인의 회상에 의하면, 얼굴이 희고 마른 체형에 키가 컸으며, 눈에서는 붉은 빛이 돌았다고 한다. 키가 크고 깡마른 체형이었는지, 실록에는 전라도 부안의 한 백성이, '''"우리 왕은 허리가 가늘어서 저 모양 저 꼴이다"'''란 식의 말을 한 게 들통나 잡혀간 이야기도 있다. * 하지만 성격은 선조들을 닮아서 무인기질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몸이 허약한 편이라 눈병을 자주 앓았고, 얼굴에 종기가 있어 떨어지지 않았으며 잔병치레도 심했다고 한다. 다만 '''경연 빠지려고''' 일부러 아픈 척한 적도 많았다. 상술했듯, 연산군뿐만 아니라 조선의 왕들 대부분은 경연에 나가는 것을 무척 싫어해서, 갖은 핑계를 대서 안 나가려고 하긴 했다. * 한편 심각한 치통을 앓았다고 하는데, 일부에서는 이러한 치통이 그의 성격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고 있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32&aid=0002343110|#]] 이 이야기는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도 소개됐다. [[http://www.youtube.com/watch?v=9nAVeAaJxm4|보기]] * 위에서도 말했듯, 예술에 재능이 있었기에 직접 지은 시도 많이 남아 있으며[* 인생여초로 회합불다시(人生如草露 會合不多時) - 인생은 풀잎 위에 맺힌 이슬과도 같아 만날 때가 많지 않은 것. 연산군이 폐위 직전에 쓴 시라고 하는데 상당한 수준의 시조다.], 춤도 잘 췄는데 특히 처용무가 주특기였다. 궁중에서 처용의 분장까지 하고 춤을 추었을 정도였으며, '''말을 타고 마상에서 처용무를 추는''' 묘기를 부린 기록도 남아 있다. 또한 연기력도 뛰어나서 직접 죽은 사람이 통곡하는 모습을 연기하면, 주변의 흥청들이 모두 따라 울어 연회장이 순식간에 눈물바다가 될 정도였다고 실록에 기록되어있다. 문제는 '''[[네로|군주의 자리에 있는 사람은]] [[송휘종|취미활동을 잘하기 전에]] [[천계제|정치를 잘해야 했다는 것이다]]'''. * 연산군 대에 [[연은분리법]]이 개발되었다. 이는 훗날 동아시아 은 생산량 발달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치게 된다. * 상당한 미식가로, 심지어 중국에서까지 귀한 식재료를 수입하여 먹었다. 이 탓에 후대 왕들은 뭐 맛있는 것만 먹으려고 하면, 신하들에게 '연산이다! 연산이 했던 짓이다!' 하고 탄핵 받았다. * [[디시위키]]에서는 [[임해군]]이 왕이 되면 이런 왕이 되었을 것이라며 두 사람을 아예 동일한 인간으로 보고 있다. 임해군 성격 보면 이렇게 될 가능성이 충분하다. * 외모가 조선 왕들 중 가장 뛰어났다고 한다. 아버지를 닮아 키가 컸고 어머니를 닮아 여자처럼 아름다웠다니 미남에 위너였을 것이다. 예술적 감각도 뛰어났다고 하니 지금 시대에 태어났으면 연예인을 했을 듯.~~그리고 얼마안가 논란이 터져 퇴물행 열차 타겠지~~ * 여러매체에선 연산군이 희대의 싸이코 미치광이(...)로 그려내지만 ~~어느정도는 맞다.~~ 자세히 생각해보면 어떤 정신나간 신하들이 또라이같은 인간을 섬기겠는가? 연산군이 막장 짓거리를 하긴했지만 그 뒤에는 '''철저한 기다림과 엄청난 숙청이 있었다''' 즉 머리가 막가파는 아니었고 오히려 '''치밀했던셈'''. 오히려 [[스탈린|이분]]의 성격일듯. 그런데 영화 [[간신]]에서는 완전히 연산군을 무덤에서 유골까지 꺼내서 가지고노는 싸이코로 그려냈다.(...) 즉 고증오류. * 연산군 집권 초중반기는 실존 인물인 [[홍길동]]이 한창 활동하던 시기였다. 그래서 이후 [[홍길동전]] 등 홍길동이 '의적'이란 이미지를 얻게 된 것에는 연산군의 이러한 폭정에 대한 민중들의 반감도 작용했다는 추측이 있다. 다만, 홍길동이 활동하다가 잡혔을 때까지 연산군은 아직 그럭저럭 정치를 잘 하고 있을 시기였다. *~~[[수학]]을 잘했다고 한다~~ == 가족 관계 == 4남 2녀가 있었는데, 일단 큰아들 [[폐세자 이황|폐세자 황]][* 아버지와 달리 반듯하고 학구열이 높아서, 마치 할아버지 성종의 풍모를 가지고 있었으나, 막장 아버지 때문에 인생이 [[망했어요]]. 다만 연산군 폐위 시 나이가 10살이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과 둘째아들로 창녕대군으로 봉해졌다가 박탈된 인이 있다. 이들은 모두 페비 신씨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적자로, 둘 다 유배당시에 결혼을 하지 않았고 곧 사사되었다.[* 이들의 숙부인 중종은 죽이지는 않으려고 했으나, 정권을 잡은 반정파들의 강력한 반대로 결국 생을 마감해야 했다.] 알려지지 않은 첩에게서 아들 2명과 딸 2명을 보았다. 이들 중 아들로는, 양평군으로 봉해졌다가 박탈된 성과 돈수가 있는데, 이들도 마찬가지로 사사되었다. 다만 시집간 딸들은 출가외인으로 간주, 손대지 않았다. 서인으로 전락하긴 했지만, 어차피 [[공주]]는 출가외인인지라 신분에 큰 변화는 없었고, 게다가 삼불거(三不去)라 하여 내치는 것은 법으로 금지되어 있었다.[* 사실 조선 시대 아내가 실질적으로 쫓겨날 수 있는 사유는 직접적인 간통, 시부모에 대한 악질적인 불효, 치료 불가능한 전염병 등으로 극히 한정되어 있었다. 다만 여성 인권이 조선 후기 시궁창으로 변하면서, 적당한 돈만 쥐어 주고 합의(라고 쓰고 강제라고 읽는)이혼당하는 일이 급증하게 된다.] 큰딸 휘신공주는 구문경에게 시집가서 아들 구엄을 낳았는데, 구엄이 연산군을 시봉(侍奉)했고, 지금도 구엄의 후손들이 연산군의 묘를 돌보고 있다.[* 구엄은 연산군의 외손봉사를 하면서 왕실로부터 많은 특혜를 받았다. 오래도록 왕실의 외척으로 예우를 받았고, 범죄를 저질러도 연산군의 제사를 끊어지게 할 수 없다는 이유로 감형의 혜택을 받았다. 그러나 구엄에게도 아들이 없었고, 구엄이 사망한 후 외손인 이안눌이 연산군의 제사를 계승했다. 이안눌은 구엄의 친외손자는 아니었는데, 이동의 아들로 태어나 아저씨뻘 되는 이필의 양자로 입양되었고, 이필의 부인이 바로 구엄의 딸이었다. 연산군의 제사는 부인 신씨가 시작하여 외손자인 구엄에게 이어졌고, 다시 구엄의 외손자인 이안눌과 그의 후예들에게로 이어졌다.] 둘째 딸은 신거흥에게 시집가서 4남 4녀를 낳았다. == 《연산군일기》 == 조선왕조 건국 이래 최초로 반정으로 축출되어 왕권을 상실했던 임금이었기 때문에, [[광해군]]과 함께 역대 임금들과는 달리 행적기록을 담은 실록호칭도 실록이 아닌 '''일기'''로 격하되었다. 그래서 연산군과 [[광해군]]의 행적기록은 역대 임금들과는 달리 '''실록'''이 아닌 '''일기'''로 부른다.[* 폭군은 아니지만, [[계유정난]]으로 축출된 [[단종(조선)|단종]] 역시 이전에는 실록이 아닌 《'''노산군일기'''》로 격하되어 불렸다가, [[숙종(조선)|숙종]]이 추존(追尊)을 승인하게 되면서 《노산군일기》에서 《'''단종실록'''》으로 승격되었다. 사실상 실록이 아닌 일기라는 호칭을 가진 임금은 연산군과 광해군뿐이다.] == 사극 및 출판물 == '''연산군은 주로 20대에 활동했고, 서른 나이에 죽었지만 사극 및 출판물에서 묘사되는 연산군은 30대 중후반이나 40대로 묘사된다.''' 《연산군을 위한 변명》(신동준 著, 지식산업사)에서 그에 대한 재조명을 추구했다지만, 실은 극단적은 옹호로 일관하고 역사학계의 연구는 거의 무시했다.(그래서 [[불쏘시개]] 목록에도 올랐다.) 《연산군-그 인간과 시대의 내면-》(김범 著, 글항아리)이 연산군의 면모를 아는 데에는 훨씬 낫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얼굴에 거의 항상 [[반창고]]를 붙이고 다닌다. 위에도 언급한바 있지만, 연산군은 얼굴에 자주 [[종기]]가 나는 등 잔병치례가 많은 편이었는데, 이걸 표현한 것이다. 나중에 8권(중종), 15권(경종, 영조), 18권(헌종, 철종), 20권(망국)에서 엑스트라로 나왔을 때도 빼먹지 않고 붙이고 나왔다. 이 책에서는 이 항목에 적혀있는 평가와 크게 다르지 않는데, 즉위 4년까지 군주로서 견실하게 나라 일을 한 모습을 재조명했지만, 후에 왕권 강화 한답시고 연이은 사화를 일으켜 엄청나게 비대해진 대간과 훈구 대신들을 찍어 누르고, 그 강해진 왕권으로 국가 업무에 대한 비전 없이, 그저 자기 맘대로 흥청망청 놀고먹고 백성들까지 괴롭힌 것을 비판하면서, 그저 폭군에 지나지 않았음을 피력하며, '''그 후 조선에서 연산 같은 왕은 더 이상 나오지도, 나올 수도 없었다'''는 총평을 내리고 있다. 그야말로 '''[[반면교사]]'''가 어떤 것인지 몸소 보여준 인물. [[선조]], [[인조]], [[고종(조선)|고종]] 등과 함께 가장 통렬한 [[비판]]을 받은 군주들 중 한 명이다. http://photo-media.daum-img.net/200803/27/starnews/20080327123202.897.0.jpg (위는 《[[왕과 나]]》의 정태우, 아랫줄 왼쪽은 《[[왕의 남자]]》의 정진영, 오른쪽은 《[[왕과 비]]》의 안재모) [[희빈 장씨]], [[이순신]], [[사도세자]] 등과 더불어 '''잊을만하면 재탕, 삼탕해주는''' [[사극]]의 [[주인공]]. 진짜 주인공이 아니더라도 비중이 높은 경우도 많다. 1980년대 이전에도 미디어 믹스가 자주 이루어진 인물이었는데, 연산군의 유난한 [[막장]] 행보가 군사독재정권의 잔혹한 행위를 좀 더 나아보이게 한다는 이유 때문이었다는 다소 견강부회적인 분석도 존재한다. [[신상옥]] 감독은 스스로 [[흑역사]]로 간주해서, [[북한]]에 있을 때 인편을 통해서 [[남한]]의 필름을 파기해달라고 했다고 하는데… 신상옥이 감독한 《연산군》은 당대에 보기 힘든 해석으로 유명하다. 포인트는 연산군이 모든 잘못을 깨닫고 정치를 원상태로 돌리려고 하는데… '''다음 날 [[중종반정]]이 일어난다'''. [[한국 영화]]로서는 정말 이례적으로 상영시간이 3시간을 넘긴다. 《[[조선왕조 오백년]]》의 [[신봉승]]이 자주 다루는 시대가 세조~연산군까지이다. 즉 [[인수대비]]의 일생의 마침표를 찍는 비극으로 그리고 있는데, 실제로 《조선왕조 5백년》 최고의 인기작인 《[[설중매]]》의 후반부가 바로 이 사건을 다루고 있다. [[임영규]]–연산군, [[이미숙]]–장녹수, [[고두심]]–인수대비인데, 원작소설은 '''대단히 잔인하고''' [[검열삭제]]가 난무하는 작품이지만[* 이를테면 검열삭제 묘사가 제대로 나오고, 두 후궁을 처단하고 시체를 훼손하는 이야기 역시, 아들들에게 직접 때려죽이게 하고, '''완전히 나체로 만들어''' 현장에서 찢어버리게 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드라마]]판은 가급적 수위를 낮추었다. 드라마적으로 해석하면, [[출생의 비밀]]과 성격적 결함, 예술가적 기질과 동정을 불러일으키는 과거사, 그리고 최후의 파멸 등을 겸비한 그리스 고전 [[비극]]의 주인공 같은 인물이다. 많은 사극에서 당대 유명 남자배우들이 연산군을 연기했는데, 그 중 [[유인촌]], [[유동근]], [[이민우(배우)|이민우]]의 포스가 절륜하다. 특히 유인촌은 연극인 《문제적 인간 연산》에서 햄릿 연기[* 연극에서 연산군이 폐비 윤씨의 비밀을 안 이후에, [[햄릿]]의 아버지 유령과 같은 폐비의 유령 때문에 고뇌한다. 완전히 햄릿 짝퉁 연산군...]와 [[칼리굴라]]의 연기를 그대로 보여준다.[* 이 작품을 그대로 영화화한 것이 김진아와 공연한 임권택 감독의 영화 《연산일기》다. 유인촌 최고의 걸작이다.] 그 외에 대부분 연기력이 뛰어난 배우들이 연기했는데, 현재까지 대중적인 연산군 연기의 최고봉은 《[[왕의 남자]]》의 정진영으로, 광기와 애정갈구가 혼재된 연산군의 심리를 가장 잘 묘사해 냈다. 임영규의 경우에는 현실에서도 약간 그런 성격이란 말이 있다. 아래는 정진영의 씨네21 인터뷰 내용 중 일부다. > "나는 이성이 발달한 사람이라 영화를 찍으면서 눈치를 본다. > [[달마야 놀자]]를 찍을 때는 [[스님]]들 눈치를 봤고 > [[와일드카드(영화)|와일드 카드]]를 찍을 때는 [[형사]]들 눈치를 봤다. > [[황산벌]]은 [[김해 김씨]] 문중 [[김유신|눈치를 봤다]]. > '''그런데 연산군은 눈치를 볼 필요가 없더라. 그렇게 외로운 사람이었던 거다."''' >ㅡ 《[[왕의 남자]]》에서 연산군으로 열연한 배우 [[정진영(배우)|정진영]], 《씨네21》 인터뷰 중에서 《왕의 남자》의 원작인 연극 [[이#s-11|《이》]]에서는 [[공길]]에 의해 [[비역|남색]]과 [[사디즘]]에 눈을 뜨는 것으로 그려진다. 폭정보다는 [[장녹수]]와 공길 사이에서의 삼각관계가 부각되는 게 특징. 한편 《왕과 비》에서 연산군을 맡았던 [[안재모]]의 연기도 이들에 못지않게 뛰어났다. 당시 연산군에 캐스팅 될 때만 하더라도, 전작 《[[용의 눈물]]》의 반듯하고 어진 [[세종대왕]](충녕) 이미지가 남아있던 터라, 미스캐스팅이 되지 않을까 싶었는데, 오히려 폭군 역을 절륜하게 소화하여 큰 호평을 얻었다. '''한국 역사상 최고의 [[성군]]과 [[폭군]]'''을, 그것도 20대 초반의 나이에 모두 연기한 셈. 덕분에 중반까지 부진하던 《왕과 비》가 연산군의 등장으로 시청률이 크게 상승하는 뒷심을 발휘하여 유종의 미를 거뒀다. 참고로 대하드라마 《[[용의 눈물]]》에서 출연했던 4명이 연산군 출신이다. 태종(유동근분) = 《장녹수》의 연산군 역 양녕대군(이민우분) = 《한명회》의 연산군 역 충녕대군(세종, 안재모분) = 《왕과 비》의 연산군 역 방번(무안대군, 정태우분) = 《왕과 나》의 연산군 역 과거에 [[단종(조선)|단종]]을 3번이나 맡았던 [[정태우]]는 처음으로 연산군 역에 도전하여, 당시 막장가도를 달리던 《[[왕과 나]]》를 연기력으로 살려냈다는 평가도 받고 있다, 《왕과 나》 후반부는 '왕과 나'가 아니고 '연산군' 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덧붙여 신상옥판 《연산군》과 같은 결말을 맞는다. 김처선이 죽은 후 드디어 정신을 차리고 다음날부터 바른 정치를 하겠다고 다짐하는데, 그날 밤 중종반정이 일어난다. 처음에는 분노하였으나, 물려받을 사람이 진성대군이란 걸 알고는 그러면 양위 받을 자격이 있다며, 순순히 왕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된다. 이민우는 《[[한명회(드라마)|한명회]]》 끝부분에 잠깐 나와 비중은 적었지만, [[한명회]]가 죽은 후 갑자사화를 벌여 [[부관참시]]를 하는 장면이 아주 강렬했다. 특히 [[북(악기)|북]]을 두들기며 ‘닥치시오!’ 하고 외치는 장면은 인터넷이 발달한 현재라면 플짤감이다. 참고로 링크된 영상에서 [[노사신]]이 앉아 있는 건 노사신이 갑자사화 이전에 이미 죽었기 때문에 고증오류다. 또한 극중에서 홍귀달이 [[폐비 윤씨]]의 신원에 반대하다 유배간 걸로 묘사되었지만, 홍귀달은 갑자사화 당시 경기도 관찰사 자리에 있었으며, 손녀를 입궐 시키라는 명을 거역한 죄로 장형을 받고, 유배되던 도중 교살 되었기 때문에, 이 역시 고증오류다. 역대 연산군 배우들 * [[신영균(배우)|신영균]] : 영화 《금삼의 피》 (정확히는 2부작 영화) * [[임영규]] : [[문화방송|MBC]] 《조선왕조 500년 - 설중매》(1985) * 이대근 : 영화 《연산군》 * [[이민우(배우)|이민우]] : [[한국방송공사|KBS]] 《한명회》(1994) * [[유동근]] : KBS 《장녹수》(1995) * [[유인촌]] : 영화 《연산일기》(1988년), 연극 《문제적 인간 연산》[* [[SBS]]의 《[[임꺽정(드라마)|임꺽정]]》에도 나오는데, 《임꺽정》에서는 3화까지만 나오는 조연이다.] * [[안재모]] : KBS 《왕과 비》(1998~2000) * [[정진영(배우)|정진영]] : 영화 《왕의 남자》(2006) * [[정태우]] : [[SBS]] 《[[왕과 나(2007)|왕과 나]]》(2008) * [[진태현]] : [[JTBC]] 《[[인수대비(드라마)|인수대비]]》(2012) * [[김강우]] : 영화 《[[간신(영화)|간신]]》(2015) * [[김지석]] : [[MBC]] 《[[역적 - 백성을 훔친 도적]]》(2017) 변강쇠로 유명한 [[배우]] [[이대근]]도 연산군을 연기한 경력이 있다. 한국 사극의 연산군하면, 드라마 작가 정하연을 빼놓을 수 없다. 정하연 작가는 《[[장녹수]]》, 《[[왕과 비]]》, 《인수대비》의 집필을 맡아서, 연산군 시대를 다룬 드라마만 3개를 집필하는 진기록을 세웠다. [각주] [[분류:조선의 왕]] Load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