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변경문서 보기수정 내역 영류왕 (버전 비교) [include(틀:역대 고구려 국왕)] ||<#000000>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image: {{{#fbe673 '''영류왕 관련 틀'''}}}}}}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include(틀:고구려의 왕자)] ---- [include(틀:고구려-수 전쟁)] ---- }}}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000000, #000000 20%, #000000 80%, #000000); color: #fbe673" '''고구려 제27대 태왕[br]{{{+1 영류왕 | 榮留王}}}'''}}}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강서삼묘.jpg|width=100%]]}}} || ||<-2><#000000> {{{#fbe673 {{{-2 영류왕릉으로 추정되는 강서삼묘 전경.}}} }}} || ||<|2> '''출생[br]{{{-3 (음력)}}}''' ||[[580년]]경[* [[네이버 지식백과|지식백과]]에서 형인 [[영양왕]]의 출생연도가 [[559년]] 무렵이라는 것을 감안하고, 아버지 [[평원왕]]이 뒤늦게 얻은 아들임을 고려하며, 동생인 [[대양왕]]의 존재를 감안해서 영류왕의 출생연도를 [[580년대]] 초반으로 추정했다.[[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3576890&cid=59015&categoryId=59015|#]]] || ||[[고구려]] [[평양성]] || ||<|2> '''사망[br]{{{-3 (음력)}}}''' ||[[642년]] [[10월]] (향년 62세 추정) || ||[[고구려]] [[평양성|장안성]] || || '''능묘''' ||[[고구려 왕릉#s-4|강서소묘]] (추정) || ||<|2> '''재위기간[br]{{{-3 (음력)}}}''' ||'''{{{#fbe673 제27대 태왕}}}''' || ||[[618년]] [[9월]] ~ [[642년]] [[10월]] {{{-2 (24년 1개월)}}} || ||<-2>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본관''' ||[[횡성 고씨]] || || '''휘''' ||건무(建武) / 성(成) || || '''부태왕''' ||[[평원왕]] || || '''형제자매''' ||형제 [[영양왕|고대원]], [[대양왕|고대양]][br]자매 [[평강공주]] || || '''자녀''' ||태자 [[고환권]][br]왕자 [[고복덕]]?[* 《신찬성씨록》 기록.] || || '''후손''' ||[[고연복]][* 묘지명에 따르면 태자 고환권의 증손으로 영류왕의 고손에 해당한다. 경위는 알 수 없으나 당나라에서 환관이 되어 활동했으며, 유명한 환관인 [[고역사]]를 양자로 들이기도 했다.] || || '''종교''' ||[[불교]] || ||<|3> '''시호''' ||'''영류왕(榮留王)'''[* 《삼국사기》.] || ||'''건무왕(建武王)'''[* 《삼국사기》.] || ||'''무양왕(武陽王)'''[* 《[[삼국유사]]》. ] || || '''별호''' ||건무태왕(建武太王)[* 당나라로 건너간 고구려 유민 고을덕의 묘지명 기록.] ||}}}}}}}}} || [목차] [clearfix] == 개요 == [[고구려]]의 제27대 태왕. 즉위 이전에도 [[고구려-수 전쟁]] 당시 [[수나라]]의 수군 장수 [[내호아]]의 침략을 평양성에서 이겨낸 [[전쟁 영웅]]이었다.[* 수나라 육군은 을지문덕이 살수대첩으로 패퇴시켰다. 참고로 고건무와 을지문덕의 외교 노선은 달랐다고 한다.] 그러나 재위 중 [[당나라]]와 친교 노선을 걸었으며 아마 이에 반대했다고 추정되는 [[연개소문]]이 일으킨 [[쿠데타]]로 인해 시해당하는 비운을 맞았다.[* 다만 이에 대해서는 연개소문이 정변을 일으킨 이유 중 하나로 들어지는 것이며 여러 설이 난립하고 있다. 자세한 것은 [[연개소문/생애]] 항목 참조.] == 생애 == === 제2차 [[고구려-수 전쟁]]에서의 맹활약 === [[평원왕]]의 아들이자 [[영양왕]]의 이복동생으로 걸출한 명장이었다. [[양제(수)|수양제]]가 대대적으로 일으킨 2차 대침공에서는 직접 일선에서 군사들을 지휘하고 적에 맞서 싸웠다. [[중국]]의 사서인 《[[수서]]》(隋書)에 [[을지문덕]]과 함께 고구려 장수로는 그 이름을 올린 단 둘뿐인 장수일 정도로 맹활약했다. '''[[평양성]] 전투에서 결사대 500명을 이끌고 선봉에서 돌격해 [[내호아]]가 이끄는 별동대인 수나라 [[수군]][* [[바다]]를 통해 [[산동반도]]에서 [[황해]]를 건너 평양성을 직접 공격한 10만 명 중에서도 가려뽑은 '''정예군'''이었다.] 40,000명을 패퇴시키는데 결정적인 공을 세웠다.''' 평양성으로 쳐들어온 수나라의 수군 중 살아돌아간 이들은 겨우 수천 명에 불과했으며, 이마저도 부관이었던 [[주법상]]이 대오를 갖춘 뒤 처절히 막아낸 결과였다. 총 [[해군]] 10만 명 중에서 정예로 훈련받았던 4만 명 거의 전부가 한꺼번에 몰살을 당했으니 단단히 혼쭐이 난 셈이다. 기록에 따르면 영양왕과 함께 평양성 외곽에서 패배를 가장해 내호아를 평양 부근으로 끌어들였다. 그리고 군사를 [[매복]]시킨 후 패배하는 척하며 수나라 군대를 안으로 맞아들였다고 한다. 내호아의 군사들은 평양성 내에서 [[약탈]]에 몰두하다가 대열이 흐트러졌고, 고건무가 지휘하는 500명은 이때를 기다렸다가 [[모랄빵|일거에 치고 나가, 당황하는]] 수나라 군대를 섬멸시켰다고 전한다. 당시 수나라의 대전략은 내호아의 수군이 실어온 물자로 평양성으로 전진하고 있는 별동대 30만명을 먹이고, 그 병력들로 평양성을 공격해서 항복을 받아내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 수군을 괴멸시킨 것은 수나라의 전략을 뿌리부터 박살낸 엄청난 업적이었다. 당시 행적을 정리해보면 을지문덕과 함께 '''[[고구려-수 전쟁]]이 낳은 최고의 전쟁 [[영웅]]이자 [[명장]]''' 중 한 명이라 봐도 손색이 없는 인물이다. [[살수대첩]]에 묻혀서 잘 알려지지 않은 탓이지 '''[[한국사]] 대첩 중에서 그 전공이 충분히 손에 꼽는다고 볼 수 있는 셈이다'''.[* 당시 수나라 수군을 격파하지 못했다면 살수대첩은 일어나지도 않았을 것이고 고구려는 수도에 틀어박혀 수십만 대군의 공격을 힘겹게 막아내거나 평양성이 함락 되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때 [[통일]]된 중원 왕조의 엄청난 파워를 상대하면서 영류왕은 전쟁에 대한 [[염증]]을 느낀 것으로 추측된다. 통일 국가인 수나라를 상대로 대승한 고구려의 업적은 [[역사]]에 길이 남을 승리였지만 문제는 전쟁이 고구려 영토 한복판에서 벌어졌다는 것이다. 고구려 영토 깊숙한 곳에서 전쟁을 벌인 만큼 고구려 입장에서는 이기더라도 피해를 회복할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 대당 정책 === 결국 고건무는 태왕이 되자 태도를 바꿔 수나라를 멸망시킨 당나라와의 화친 정책을 폈다. [[고조(당)|당고조]] 때까지만해도 어느 정도 양측이 실리적이고 합리적인 외교가 진행되었으나 [[태종(당)|당태종]]이 즉위하면서 당나라가 무리한 요구를 강압하기 시작했다. 전승기념비에 해당하는 [[경관]]을 허물게 하는가 하면 사신을 빙자하여 [[간첩]] 행위를 자행했다.[* 《봉역도》(封域圖), 고구려에서 제작한 지도. 현재 전하지는 않는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628년(고구려 영류왕 11, 당 정관 2) 가을 9월 고구려에서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당태종이 동돌궐(突厥)의 힐리 가한(?利可汗)을 사로잡은 것을 치하(致賀)하고, 고구려의 《봉역도》(封域圖)를 보냈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처럼 한쪽에게 불리한 [[외교]]를 강요하게 된다.] 이렇게 달라진 당나라의 태도에 천리장성의 수축을 진행하며 전쟁 준비를 하기까지에 이른다. 하지만 그 결과를 보기 전에 연개소문의 쿠데타로 시해되었다. ==== 비판 ==== 영류왕의 정책은 다음과 같은 결과를 불러 일으켰다. * 과하게 굴욕적인 의전과 내정 간섭[* 당태종 [[이세민]]의 치세 동안 고구려에 간 사신의 품계는 종5품하 이하에서 심지어 종6품하까지였다. 오늘날로 치면 [[행정고시]]에 갓 합격한 5급 공무원이나 연대 작전과장쯤 되는 인사가 와서 [[대한민국 대통령|대통령]]과 [[국무총리]]를 동원한 의전을 받고 내정 간섭을 한 격이었다.] * 승전기념물인 경관 철거. * 당나라 사신에게 군사기밀 유출. * 고구려에 소속된 거란과 말갈 부족의 이탈을 막지 못함.[* 어찌보면 이 점이 가장 큰 실책인데, 고수전쟁과 고당전쟁에서 고구려가 버틸 수 있었던 것은 거란, 말갈, 토번 등의 유목민족들이 당나라의 뒤통수를 계속 치고 있었기 때문에, 당이 고구려에 전력을 퍼부을 수 없었던 것이 컸다. 대운하가 완성되고 강남 개발이 본격화되면서 이미 본토 생산력은 당이 고구려를 압도하고 있는 상황에서 고구려의 생존법은 말갈과 같은 유목민족과의 연대를 통해 당을 다방면으로 압박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유대관계가 깨지면서, 당은 뒤통수 걱정 없이 마음껏 고구려를 공격할 수 있게 되었다.] * 인접국인 백제와 신라는 적대. * 당나라 측에서 고구려가 본래 한사군 땅이라고 도발. [[고구려-수 전쟁|고수전쟁]]에서 국력을 많이 소모했을 고구려로서는 무조건적인 강경책을 펼치는 것이 아니라 안정책을 통해 다시 국력을 추스를 필요가 있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하지만 영류왕은 굴욕은 있는대로 겪으면서 내치를 안정시키거나 후방을 안정시키고 대비를 하는 등의 실리는 챙기지 못하고, 급기야 반대파들의 불만만 축적시켜 영류왕 본인이 비참하게 시해되는 최악의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이는 고구려의 국가적 위상, 즉 주변 [[말갈]] - [[거란]] - [[실위]] 등 북방 이민족들에 대한 영향력 행사와 [[한반도]] 역시 언제든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고, 남진을 실행할 수 있다는 강대국으로서의 위상을 뿌리째 흔드는 일이었다. 강대국이라는 입장에서 다른 강대국인 당나라와의 외교 관계를 볼 때 지나친 소극주의로 일관했고, 결과적으로 주변 북방 이민족들의 이탈, 분열, 갈등이 이어진 끝에 고구려는 결국 668년에 멸망당하고 말았다. 한반도 남부의 [[백제]] - [[신라]] 등에 대해서는 강력한 당나라라는 적을 앞두고 사실상 무의미한 소모전 형태를 치르는 상황이었던 것을 백제와 [[왜]]를 끌어들이고 남방 전선에서 적극적인 정책을 펼쳐 그것을 되찾아나간 것은 연개소문이었다. 또한 영류왕의 친당 정책이 당나라의 침공 의지를 꺾거나 막은 것도 아니었다. 당시 [[태종(당)|당태종]]은 우호적으로 나온 [[고조(당)|아버지]]와는 달리 전쟁을 억제할 장애물들을 하나 둘씩 치워 나갔고, 주변 국가들도 정리하면서 고구려로 원정갈 준비를 꾸준하게 하고 있었다. 애초에 당태종은 고구려를 정복해서 수나라 때의 뼈아픈 상처를 씻으려고 한 것이 사실이다. 영류왕의 친당 정책은 결과적으로 안보 위협을 막은 것이 아니라 침공의 밑거름이 되었다는 것이다.[* 다만 당태종이 쳐들어올 때의 표면적인 명분은 연개소문의 쿠데타이긴 했다.] 외교의 급에 있어서도 [[631년]]에 있었던 [[경관#s-3]] 철거 사건 당시 사절로 온 장손사는 광주 도독부의 사마였다. 종5품하의 벼슬로 지방관 휘하의 보좌쯤 되는 인물로 오늘날로 치면 시•군•구청 국, 과장(국장은 일반직 4급 서기관, 과장은 일반직 5급 사무관) 쯤 된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더 문제는 이 경관 철거가 수나라와의 대전쟁이 끝난 지 채 20년도 안 된 시점이라 당시 참전용사들의 불만을 강하게 야기했다는 것이다. 영류왕 본인이야 나도 당시 활약한 참전용사인데 백성들 떼죽음 당하는 전쟁 안하는게 중요하지 이게 무슨 대수냐 싶었을지도 모르지만, 강경파 입장에선 그야말로 굴욕도 이런 굴욕이 없었을 것이다. [[640년]]에 있었던 태자 입조 사건 역시 반발을 불렀다.[* 다만 631년 경관 철거 이후 그해 [[천리장성]]을 쌓기 시작하고, 기록상 9년이나 별다른 교류가 없었다는 점에서, 이 시기 영류왕도 당고조와 달리 당태종에 대해선 상당히 경계했다는 것을 추론할 수 있다.] 한국사에서 태자가 입조하는 경우는 대개 상대국에 제압당한 상태거나 종속되는 경우에 해당한다.[* 연개소문 말년, 혹은 연남생 정권 초기에 태자를 봉선 행사에 참석시킨 경우도 있지만 이는 무력의 우위를 보여준 직후인지라 화친의 목적이 크지, 제압당해서 간다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심지어 답사로 온 당나라측 사절인 진대덕은 직방 낭중이었다. 고구려는 태자를 보냈는데 종5품, 군대로 치면 장군도 아니고 대대 작전과장 정도되는 말단 관리가 왔고, [[태왕]]이나 [[대대로]]가 와서 하루 3번씩 의전해준 것이다. 참고로 고구려 시절엔 다른 시대와 달리 중국이 보낸 사신이 임금과 대등한 의전을 받는다거나 국서에 절을 하는 등의 의전은 없던 시대였다. 여기에 더해 진대덕은 고구려 내부를 마음껏 정탐했고, 고구려는 이를 막지 못했다. 정리하자면 영류왕은 기나긴 전쟁 뒤에 국력 회복, 내치 안정, 적성국 제어 등의 시대적인 과제를 맡았으나 외교적 굴욕은 굴욕대로 당하고, 정작 당나라의 야욕을 무마하지는 못했으며 빈약한 정치력으로 무리수를 두다가 본인 목숨도 잃고 고당전쟁의 빌미만 제공해주는, 더 길게 보자면 고구려 멸망까지 가는 시발점이 된다고 볼 수도 있는 비운의 군주가 되고 말았다. ==== 옹호 ==== 영류왕의 초기 노선이 소극적인 입장을 취한 것은 [[고구려-수 전쟁|고수전쟁]]이 대규모로 4차에 걸쳐 무려 16년 동안 지속된 상황에서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더욱이 [[당나라]]는 내부적으로 [[반란]]의 연속과 북방의 강자인 [[돌궐]]의 침입 등으로 혼란한 상황이었다. 그런 입장에서 영류왕이 당나라와 화친 기조를 띤 건 결국 상대적으로 여수전쟁에 대한 상호 적대심이 강해진 상황에서 대등한 입장에서의 [[외교]]를 충분히 활용할 수 있는 기반이었다. 게다가 [[고조(당)|당고조]] 역시 국내 사정과[* 당나라의 건국 초기만 해도 사실 당은 수를 완전히 이어받은 통일제국이라기보단 여러 지방 군웅들을 제압해야 하는 [[패자]](覇者) 정도의 수준이었다.] 국외적 입장에서 새로운 적을 만들고 싶어하지 않았던 점이 결국 각자의 [[이익]]에 서로 부합하여 충분히 상호 온건 노선이 먹힐 수 있었던 것이다. 영류왕 초기의 온건 노선은 고구려 스스로가 자국의 생존과 국력 회복을 위해서 필요한 조치였다. 물론 당고조의 아들인 [[태종(당)|당태종]]이 [[현무문의 변]]으로 형제들을 살육하고 626년 집권하고 나서는 상황이 달라지기는 했다. 당태종 치세기의 당나라는 내부적으로 안정되었으며, 본격적으로 국력을 키우기 시작한 시점이었고, 고구려 역시 웬만한 전후 복구를 하고, 국력을 어느 정도 회복 중인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당나라에게 [[지도]]를 보낸 것은 당나라의 외교 노선이 변화한 것에 대해 [[평화]]를 존중한다는 입장을 취하면서 결국 [[영토]]를 분명히 하여 당나라로 하여금 '''특정선 이상은 쳐들어오지 말라'''는 입장을 당태종에게 알린 것이라 해석할 수도 있다.[* 비판론 일각에선 《봉역도》=지도=1급 군사기밀이란 논리로《봉역도》를 바친 것이 곧 군사기밀까지 들어다 바친 것이라는 주장을 하지만, 사료에는 《봉역도》를 바쳤다는 것만 나와있을 뿐이지 그것이 얼마나 자세하고 많은 정보를 담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휴전 상태란 이유로 갖가지 정보에 규제를 행하는 대한민국도 지도의 국외반출 불허는 1:50,000 이하의 대축척 지도에만 해당한다. 단순히 지도를 바쳤단 이유로 군사기밀 유출까지 운운하는 것은 확대해석이며, 당대의 불만은 어디까지나 국가적 자존심의 문제로 봐야할 것이다.] 실제 631년 당나라의 다소 무리한 요구로 인한 [[경관]] 철거 이후 영류왕 역시 당태종을 경계했기 때문에 그해 바로 상당한 비용을 들이면서까지 [[천리장성]]을 수축하는 형태로 전선 정비에 들어간 것이며, 당태종과 [[전쟁]]을 치르던 동돌궐의 [[힐리가한]]을 방치한 것 역시 고구려로서는 대전 전력이 있는 돌궐을 쉽게 신뢰하여 함께 [[연합]] 전선을 구축한다는 게 말처럼 쉽지 않았던 모양이다.[* 이미 그의 조부였던 [[양원왕]]의 재위기인 551년에 돌궐이 군대를 이끌고 신성과 백암성에 쳐들어온 사건이 있었다. 다행히 이 전쟁에서 [[고흘]]의 맹활약으로 적군 1,000여 명을 전사시키며 침입을 막아내는 데는 성공했지만, 후방에 전력이 텅 비어버린 탓에 그대로 밀고 올라온 나제연합군에게 한강 유역을 내주고 말았다. 당연히 고구려 입장에서는 돌궐을 쉽사리 믿기 힘들 수밖에 없다.] 내부적으로 고구려는 [[평원왕]]의 중흥 이후로 [[영양왕]]과 영류왕에 이르기까지 실추되었던 태왕의 [[왕권]]을 어느 정도 본 궤도에 올려놓았지만 왕권의 강화와 [[귀족]] 세력들의 균형을 맞추는 일도 중요한 과업이었다. 고구려는 후기에 들어서면서 귀족 연립 [[정권]]의 성격을 띠었는데, 중흥 군주 평원왕 시절과 영양왕 시절에는 그나마 귀족들의 지나친 힘이 어느 정도 균형을 맞추는 모습을 보였으나, 영류왕 시대에는 [[연개소문]]의 세력이 지나치게 확대되고 있었고[* 연개소문의 부친과 조부가 연이어 국정을 관장하는 최고 관직인 막리지를 역임했다고 한다.] 영류왕은 이를 제어하기 위해 외부적 위협 요인은 최대한 줄이려고 한 것으로 보이나 종국엔 연개소문을 치려다가 선수를 당해 그에게 시해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 그의 집권기 고구려는 전후 복구에 노력한 것으로 보이는데, [[천리장성]] 축조의 경우 당군의 발목을 묶어 지연전을 강요하면서 그틈에 아군에게 당군의 침공 소식과 위치를 알리는 "경보" 역할을 해줄 수 있다는 것이 장점으로[* 고구려의 방어선을 보면 수백 개의 성채와 파발, 봉화 등 각종 시설들을 연계한 거대한 기동 방어 시스템식으로 운영된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기동 방어 체제를 운용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것은 적군의 침공 경로와 같은 정보를 빠르게 알 수 있는 경보 통신망이었는데, 적군의 방향을 알아야 제대로 요격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중국]]은 물론 [[페르시아 제국]]이나 [[로마 제국]]도 건설했었다. [[만리장성]] 항목을 봐도 알겠지만 장성이 "경계"로서의 역할은 충실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몽골]]군 침입 당시 [[금나라]]는 만리장성의 경보 덕분에 몽골군의 침입 소식을 파악하고 대규모 [[군대]]를 모집할 시간을 얻었다. 만약 만리장성이 없었으면 [[화북]] 허허벌판 지대에 몽골군이 순식간에 휘몰아쳐 대비할 시간조차 못벌었다.] 그리고 고구려의 멸망 원인을 영류왕에게서 찾는 것은 너무나도 과한 평가이다. 영류왕은 그가 하려던 계획을 완수하지 못하고 쿠데타로 죽었으며 사후에 연개소문에 의해 국가의 방향이 결정되고 운영되었으므로 그 인과관계는 단절되었다고 볼 수 있다. 오히려 연개소문의 아들들에 의한 내분으로 멸망했으므로 영류왕이 생존해 있었다면 멸망을 피할 수도 있었다는 가정도 해볼 수 있을 것이며, 연개소문의 치명적인 후계 실책이 고구려 멸망의 스노우볼로 흘러간 만큼 고구려 멸망에는 연개소문이 가장 큰 원인을 제공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결과론적이지만 연개소문의 남방정책도 백제가 나당연합군에 멸망당하여 고구려의 고립을 초래해 이후 벌어진 내분과 겹쳐 고구려의 멸망에 직접적 원인이 되었던 만큼, 연개소문의 남방 정책은 무조건 옳고 영류왕의 정책은 다 틀렸다는 것은 과하다. 실제로 백제와 신라 중 어느 한쪽을 선택하고 다른 한쪽을 핍박한 결과 나당동맹 같은 극단적인 결과가 나와버렸고, 그렇게 손을 잡았던 백제가 멸망하면서 양면전쟁을 강요받게 된 만큼 성과도 별로 좋지 못했다. 그리고 당고조 때까지만해도 서로의 필요에 의해 원만했으며, 이로서 고구려도 전후 복구에 전념할 수 있었다. 문제는 당태종의 즉위 후 달라진 당의 무리한 요구들 때문이다. 국가정책이라는 것이 하루 아침에 싹 바뀔 수는 없고 서로 화해무드인 상황에서 은근히 그 분위기에 무리한 요구들을 끼워넣어 추태를 부린 당태종을 비판할 부분이지 영류왕에게 모든 책임을 돌릴 수는 없다. 각종 무리한 요구가 지속되자 영류왕도 서서히 달라진 변화에 맞춰 천리장성 축조를 하며 전쟁을 준비했으며, 달라진 변화의 결과를 보기 전에 연개소문의 쿠데타로 죽었던 것이다. 또한 비록 결과론적인 시각이기는 하지만 실제 역사에서도 고구려 멸망 직후인 669년 토번의 발호로 당나라가 동이 전선에 전력을 투사하기 쉽지 않은 상황이 발발했고, 이러한 이중전선 문제는 [[나당전쟁]]을 수행하던 신라에게 이득을 안겨다 주었다. 만약 영류왕의 외교정책대로 조금 숙이더라도 전쟁을 지연하며 국력을 회복하는 시간을 가지는 방책을 택했더라면 고구려로서는 당나라와의 전쟁을 회피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당 입장에서 아무리 고구려 원정이 중요하다 하더라도 장안과 가까운 토번 전선만큼 중요하진 않았기 때문이다. 추가적인 영류왕의 옹호론적인 재평가 문제는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77&contents_id=33272|이곳]]도 참고. [[https://www.mk.co.kr/premium/special-report/view/2019/09/26666/|영류왕은 사대주의자인가?]] === 비극적인 최후 === 왕위에 오른 지 24년이 흐른 [[642년]] [[10월]], 영류왕은 [[연개소문]]을 제거하려다가 오히려 이를 알게 된 [[연개소문]]이 일으킨 [[쿠데타]]로 인해 [[역관광|역으로 시해당하는 비운]]을 맞았다. 이때 연개소문이 영류왕의 시신을 다섯 갈래로 나눠 구덩이에 넣는 만행을 저질렀다고 한다. 하지만 연개소문의 정변 및 집권시의 행적은 중국 측 기록에 전적으로 의존하는데 특히 연개소문에 대한 기록은 대놓고 그를 까기 위해 부정적인 면모만 골라 쓴 만큼 걸러서 들을 필요가 있다. 다른 건 다 차치하고라도 당태종이 고당전쟁을 일으킬 때의 핑곗거리 중 하나가 "연개소문이 영류왕을 시해하고 보장왕을 옹립했기 때문"이다. == 여담 == 《[[속일본기]]》에서는 [[http://db.history.go.kr/id/jm_002r_0330_0070|지난날 고려 왕 고무(高武)가 일본과 형제 관계를 맺었다는 기록이 있다.]] 여기서 고무가 영류왕을 의미한다는 설이 있는데, 해당 기록에 의하면 '조정의 위엄을 빌리기 위해 형제 관계를 맺고 고구려가 일본에 조공을 바쳤다'라고 일본 측이 주장하고 있다. 물론 이는 일본 측의 일방적인 주장인데다가 [[일본서기|평범한 외교행위도 볼모라거나 조공이라고 왜곡하는 등]] 일본 역사서 특유의 과장이 더해졌을 가능성을 감안해야 하지만, 영류왕 때 일본에 사신을 보낸 기록도 따로 존재한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625년 승려 혜윤을, 630년 대사 연자발(宴子拔)과 소사 약덕(若德) 등을 파견한 기록이 있다. 이 사신들이 일본에 파견된 사실만 기록돼 있을 뿐 파견된 목적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속일본기》의 기록과 종합하면 영류왕이 당나라의 침략을 예상하고 대비하기 위해 외교를 다각화한 시도라고 보기도 한다. 다만 영류왕이 아니라 '고씨지세'(高氏之世) 부분에 주목해 보장왕 말년에 고구려가 멸망의 위기에 놓였던 제3차 고구려-당 전쟁 당시 일본에 저자세로 지원군을 요청한 기록이 남은 것이라는 설도 있다. 아들로 태자 [[고환권]](高桓權)이 있었는데, 영류왕 23년(640년) 2월의 기록 외에는 아무런 기록이 없어서 행적을 알 수가 없다. 그 외에 《신찬성씨록》에서 [[고복덕]]이 영류왕의 아들이라고 했는데 상반된 기록도 가지고 있어서 확실하지 않다. == 《[[삼국사기]]》 기록 == [include(틀:삼국사기)]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642764&categoryId=49615&cid=49615|《삼국사기》 <영류왕 본기]]>''' 一年秋九月 영류왕이 즉위하다 二年春二月 당에 조공하다 二年夏四月 시조 사당에 제사지내다 二年夏五月 졸본에서 돌아오다 四年秋七月 당에 조공하다 五年 고구려 내에 흩어져 있던 중국인들을 모아 돌려보내다 六年冬十二月 당에 조공하다 七年春二月 당에서 도교가 전래되다 七年冬十二月 당에 조공하다 八年 당에 가서 불교와 도교의 교법을 배우기 시작하다 九年 신라와 백제가 당에 가서 고구려의 침략 행위를 호소하다 十一年秋九月 당에 봉역도를 바치다 十二年秋八月 신라 김유신이 낭비성을 쳐부수다 十二年秋九月 당에 조공하다 十四年 당이 고구려가 세운 [[경관]]을 허물어버리다 十四年春二月 천리장성이 완성되다 二十一年冬十月 신라 칠중성 공격에 실패하다 二十三年春二月 세자 환권을 당에 보내 조공하다[* 신당서에는 태자 환권으로 되어 있다.] 二十三年春二月 당에 자제의 국학 입학을 청하다 二十三年秋九月 태양이 3일간 빛을 잃다 二十四年 당 사신 진대덕이 고구려의 허실을 탐지하고 돌아가다 二十五年春一月 당에 조공하다 二十五年春一月 연개소문에게 장성 축조를 감독하게 하다 二十五年冬十月 '''연개소문이 영류왕을 죽이다''' 二十五年冬十一月 당 태종이 사신을 보내 조문하다 == 대중매체에서 == === [[소설]] === * 유현종의 소설 《연개소문》[* 드라마의 원작이라고는 하지만 드라마는 원작의 내용과는 다르게 [[안드로메다]]로 가는 전개를 보인다.]에서는 [[당나라]]와의 평화 [[정책]]을 펼치는 것 외에도 가화[* 연개소문의 첫사랑이었으나 연개소문과 이뤄지지 못하고 고건무의 첩이 되고 이후 [[흑화]]하여 고구려판 [[달기]], [[장녹수]]가 되고 만다. 연개소문의 [[쿠데타]] 후 연개소문의 자비로 목숨을 부지하였으나 이후 [[김춘추]]의 첩이 되어 김춘추를 도피시킨다. [[나체 수면]]을 하는 버릇이 있다.]라는 첩에게 홀려 [[암군]]으로 전락하고 연개소문의 쿠데타로 [[끔살]]당한다. 연개소문이 고건무의 부하로 [[여수전쟁]]에 종군했었고 연개소문이 고건무를 굉장히 존경했었다는 설정.[* 쿠데타 후 고건무를 죽일 때 그가 살려달라고 빌자 "내가 존경했던 고건무 [[장군]]은 어디갔소?"라고 절규한다.] * 매한작 장편소설 《홍익대제 고건무》에서도 등장한다. 현대의 고건무가 죽어서 과거의 영류왕으로 환생하게 되는데 비록 비현실적인 요소도 있지만 나름 실존 인물들과 허구 인물들을 잘 섞은 [[대체역사소설]]로서 호평받고 있다. 고수대전, 고당대전, 삼국 통일, 왜국 정복 등 고구려를 [[강대국]]으로 탈바꿈시킨다. === [[드라마]] === * 1992년 [[KBS]] 드라마 <[[삼국기]]>에서는 배우 [[양영준]]이 연기했다. 영류왕은 노회한 [[군주]]로 등장하는데 위엄은 있으나 계진을 비롯한 친당파 대신들의 손을 들어주며 당나라에 끌려다니는 무기력한 모습을 보여줬다. 최후에는 연개소문의 [[의형제]]인 흑벌무[* 배우는 훗날 대조영에서 연개소문 역을 맡은 김진태.]에게 시해당하나 직접 시해당하는 장면은 등장하지 않는다. * 2006년 [[SBS]] 드라마 <[[연개소문(드라마)|연개소문]]>에서는 배우 [[최종환(배우)|최종환]]이 연기했다. 고수전쟁을 총지휘하고 [[수나라]] 수군을 모조리 섬멸하는 큰 공을 세운 명장 출신의 임금으로 당시 고구려의 국력에 한계를 느끼고 수나라에게 상대적으로 유화적인 제스처를 취했고 당나라와 화친 정책을 편다. 당나라와 싸워서 이기면 백제와 신라는 알아서 고개를 숙일 것이라는 연개소문과는 달리 당나라와는 화친하면서 남쪽으로 진출하려는 서수남진 정책을 펴는 것으로 나온다. 다만 본작에서 영류왕의 남진 정책은 너무도 애매해서 누군가와 동맹을 맺고 하나를 제거하거나 아예 둘 다 밀어버리는 맹공도 아닌 지리한 소모전만 펼치는 모습만 보인다. 당나라 초기 [[돌궐]]이 함께 당나라를 치자고 하지만 거절하였는데 그 후 연태수와 술을 마시면서 많은 유혹을 느꼈다는 진심을 털어놓는다. 하지만 최악의 결과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면서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하고 고구려가 완벽하게 세워지고 나서 돌궐도 서토도 그 다음이라고 말한다. 작중 고건무의 진심을 알 수 있는 장면이다. >나라고 한없이 문약한 태왕이 되고 싶은 줄 아는가? 세상에 어느 태왕이 그 따위 소리를 듣고 싶어하겠는가. 어느 태왕이 나라의 사정을 소상히 적은 봉역도를 갖다 바치며, 또 어느 태왕이 굽실거리며 책봉을 받고 책력을 받는단 말인가! 그리고 어느 태왕이 피 흘려 싸운 대가로 얻은 승리를 되물리며 저 오랑캐들에게 허리를 굽힌단 말인가. > >...자넨 그게 쉬운 일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렇지 않아. 나는 백성을 먼저 생각하였네. 치자의 근본은 백성이야. 백성이 없이는 임금도 없고 나라도 없는 것일세. 수나라와의 전쟁에서 우린 나라 전체가 모조리 불모지가 되어버렸어. 집집마다 전사자가 있고 농사를 제대로 지을 만한 장졸들이 없어. 이제 간신히 비어있는 곳간에 곡식을 들여놓기 시작하였네. 10년이 훨씬 지난 이제서야 말이야. > >(중략) 자네의 뜻이 아무리 옳다 해도 이 태왕을 위해 숙여줄 수는 없는 것인가? 약속함세. 나라의 기반이 확실히 서면 그땐 내가 앞에 설 것일세. 그리고 서토로 갈 것이야. ...허나 분명히 말하건대, 지금은 아니야. >---- >67화에서 연개소문을 설득하려는 영류왕 허나 결국 당나라에게 굽실거린다고 태학박사 [[이문진]]과 장수들([[강이식]], [[온사문]])의 불만을 사게 되었고 최후에는 연개소문의 쿠데타 후 독주를 마시고 [[자결]]하는 비운을 맞는다.[* 고건무는 연개소문의 재능을 높이 사며 연개소문과 함께 가기 위해 끝까지 연개소문을 설득했다. 그러나 연개소문을 설득하는데 실패했고 결국 연개소문을 북쪽으로 내보냈으나 도리어 연개소문은 쿠데타를 일으키고 말았다.] 그래도 연개소문도 나름 영류왕을 인정했는지 영류왕이 날아가는 새들도 해가지면 저들의 자리로 돌아간다며 자신들도 둥지로 돌아가는 새처럼 돌아갈 준비가 되었다고 하자 연개소문은 그 새는 아침이 되면 다시 둥지를 떠나 천지를 비상한다며 지금이라도 현실을 직시하고 새로운 세상을 열라며 마지막까지 그를 설득하려 하지만 영류왕은 연개소문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며 최후를 맞이한다.죽으면서 한 마지막 말인 "우리는 가는 길은 달랐으나 똑같은 마음으로 고구려를 사랑했다"는 명대사라고 부를 만한데 작중 연개소문도 이 말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드라마에서도 사서의 기록을 그대로 인용하면서 '그러나 후대에 연개소문을 깎아내리기 위해 지어낸 이야기일 수 있으므로 살펴 보아야 할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드라마의 선택적인 사료 선택을 보여주는 부분으로, 정작 드라마는 수양제 양광의 (다소 작위적이거나 후대의 가필을 의심할 수 있는) 위선적인 면모(가령 독고황후 사후, 몰래 술고기를 즐기며 위선적으로 통곡을 하는 양광에 대한 묘사)는 사료 그대로 묘사하였다.][* 사실 <연개소문>의 극본을 담당한 이환경이 이 무렵에 완전히 환빠로 타락해버린지라 객관성은 점점 저 세상으로 갔다.] 작중 고건무는 뛰어난 명장으로, 강대하고 위대한 고구려를 꿈꾸고 원하며 서토 정복의 [[꿈]]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작중 연개소문, 을지문덕, 강이식은 [[전쟁]]을 통해 위대한 고구려를 만들려 하는, 그 표현이 지나친 끝에 오히려 전쟁광스런 면모를 보인다. 반대로 드라마에서 고건무를 [[외교]]를 통해 최대한 전쟁을 막고, 이를 통해 힘을 키워 강대한 고구려를 만들어 서토를 도모하겠다는, 좀 더 현실에 타협한 이상을 추구하는 인물로 묘사한다. 실제 영류왕 집권 뒤 백성들의 살림살이가 많이 좋아졌다는 묘사도 있고 당 태종 또한 온갖 굴욕을 참아가며 백성들을 전쟁으로부터 지켜내는 모습을 보며 백성에겐 그만한 군주가 없다는 칭찬을 하기도 한다. 어쨌든 이때의 내실 다지기는 아이러니하지만 연개소문이 당과 전쟁할 때 밑천이 된다. 극의 첫 시점인 수문제의 고구려 침공 시점부터 수염 기른 성인의 모습으로 등장함에도 이로부터 44년 뒤인 최후 시점까지 분장에 별 차이가 없는 모습으로 나와 전혀 세월을 타지 않은 모습을 보여준다. 때문에 시간의 흐름에 따라 3명의 배우가 번갈아 연기하며 막판에는 완전히 노인이 된 연출까지 나오는 연개소문과 차이가 극명하다. 연개소문이 출생연도 설에 따라서 40대 장년 정도의 나이에 사망했을 가능성이 있는 반면 영류왕은 부왕인 평원왕의 유복자라고 가정을 해도 수명이 최소 50은 넘기에 최후 시점에 환갑 넘은 노인이었을 가능성이 무척 높은데도 이 작품에서 표현된 모습은 정반대이다. * 2007년 KBS 드라마 <[[대조영(드라마)|대조영]]>에서는 언급만 되는데 [[연개소문(대조영)|연개소문]]이 가상 인물이자 매국노가 되는 [[부기원]]이 당나라와의 화친을 [[보장왕(대조영)|보장왕]]에게 몰래 부추겼다는걸 알자 직접 그를 불러낸 후 "당나라에게 굽신거리려 들다니 너도 영류왕 꼴 나고 싶냐?" 협박한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www.sisapress.com/64311_80292_5027.jpg|width=100%]] }}} || * 2013년 KBS 드라마 <[[칼과 꽃]]>에서는 배우 [[김영철(배우)|김영철]]이 연기했다. 당나라에 대해 화친 정책을 펼치는 것은 드라마 연개소문과 같지만 만만한 신라를 공격하는 드라마 연개소문의 영류왕과는 달리 고구려의 평화 그 자체가 본래의 목적인 모습으로 나온다. 중반부에 이르러 결국 친당 정책에 비판적이었던 연개소문의 칼에 시해당하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는다. 2010년대 나온 사극 중에 보기 드물게 연개소문을 [[악역]]으로 그리고 있는 만큼 그 대척점에 있는 영류왕을 선역으로 그리면서 생겨난 묘사인 듯. == 둘러보기 == [include(틀:평원왕)] ---- [include(틀:고구려 왕실)] [각주] [[분류:642년 사망]][[분류:중구역 출신 인물]][[분류:고구려 국왕]][[분류:폐위된 군주]]||<-5><:><#000000> [[삼족오|https://36.media.tumblr.com/287851d3aca9ff24d4cab14f58eb3575/tumblr_o3p4bv63LR1sqk8veo2_r1_400.jpg?width=50]] [br] '''{{{+1 [[고구려/왕사|{{{#ffffff 고구려의 역대 국왕}}}]]}}}''' || ||<:> 26대 [[영양왕]] 고대원 ||<:> {{{+1 ←}}} ||<:><#000000> '''{{{#white 27대 영류왕 고건무}}}''' ||<:> {{{+1 →}}} ||<:> 28대 [[보장왕]] 고보장 || ||<:> '''[[시호]]''' ||||<:> 영류왕(榮留王) || ||<:> '''[[성]]''' ||||<:> 고(高) || ||<:> '''[[휘]]''' ||||<:> 건무(建武) / 성(成) || ||<:> '''생몰년도''' ||<:> 음력 ||555? ~ 642년 10월 || ||<:> '''재위기간''' ||<:> 음력 ||618년 9월 ~ 642년 10월 (24년 1개월) || ||<:> '''종교''' ||||<:> [[불교]] || [목차] == 개요 == [[고구려]]의 제27대 [[왕]]. 고구려판 [[광해군]], 혹은 고구려판 [[네빌 체임벌린]]이라고도 불린다. == [[여수전쟁]]에서의 맹활약 == [[영양왕]]의 이복동생. [[수양제]]의 대대적인 침공에서는 직접 전선에서 군사들을 지휘하고 싸워 활약을 보인 인물이다. 그것도 보통 활약을 한 게 아니라 수서에 [[을지문덕]]과 함께 고구려군 장수로는 유이하게 이름을 올린 사람이다. 평양성 전투에서 결사대 500명을 이끌고 선봉에서 돌격해 [[내호아]]가 이끄는 별동대인 수나라 수군[* 바다를 통해 산동반도에서 평양성을 직접 쳤다.] 4만 명을 격파했다. 기록에 의하면, 평양성 밖에서 싸워봤자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고 평양성 외성의 성문을 열고 외성을 무인지경으로 비워두어 그냥 수나라 군대를 맞아들였다고 한다. 내호아의 군사들은 아무도 자신들을 막지 않자 고구려인들이 모조리 도망갔다고 여기고 신나게 약탈에 몰두했고, 고건무가 지휘하는 500기는 이때를 기다렸다가 일거에 치고나가 당황하는 수나라 군대를 일거에 섬멸했다고 한다. 평양성 전투에서 수나라 수군이 격파되지 않았더라면 [[살수대첩]]도 없었을 것[* 함대가 싣고 온 양식이 있으면 우중문의 군사들도 당장 철수할 필요가 없다.]임을 감안하면 그야말로 '''고-수전쟁이 낳은 최고의 전쟁영웅이자 [[명장]] 중 하나다'''. 그러나 이때 당시의 [[수]]나라의 대군을 상대하면서 그가 느낀 것은 [[중국]]과 고구려간의 엄청난 국력차와 평화의 필요성이었던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통일제국 수나라를 상대로 대승한 고구려의 업적은 역사에 길이 남을 승리지만, 문제는 고구려 땅에서 벌어졌다는 것이다. 고구려 영토 깊숙한 곳에서 전쟁을 벌인 만큼 고구려 입장에서는 이기더라도 그 피해를 회복할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 친당정책에 대한 비판 == 결국 고건무는 즉위하고 난 다음 태도를 수를 멸망시킨 [[당]]과의 화친정책을 폈지만 당나라의 지나친 요구를 들어주면서 전승기념관에 해당하는 경관을 허무는가 하면 이전 시대에 비해 당나라 사신의 간첩 행위를 방조했으며 그럼에도 주변 세력 단속에는 무의지를 보여줌으로써 이전에 비해 주도권이 없는 외교를 하게 된다. 영류왕의 정책은 다음의 특징을 갖고 있다. * 직방낭중급에게 대대로가 쩔쩔맴, 임금에게 인사도 안 함 * 우리쪽 사절은 태자 * 승전기념물인 경관 철거 * 당나라 사신의 군사기밀 정탐을 방조 * 거란, 말갈 이탈시킴 * 백제 신라는 적대 * 당은 고구려는 본래 한사군 땅이라고 주장 결론적으로 영류왕의 대당정책은 결국 당나라에 필요 이상으로 지나치게 굽신대면서 결국 정권이 붕괴되고, 영류왕 본인은 비명횡사를 하고 말았다. [[여수전쟁]]에서 국력을 많이 소모했을 고구려로서는 무조건적인 강경책을 펼칠 필요는 없고 다시 국력을 추스를 필요가 있었다는 점은 분명하지만 문제는 그런 와중에서 내실을 다지거나, 나름의 대비를 하거나, 이외의 것들을 안정시키려는 노력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초기 당에 포로교환이나 포로반환은 성의표시이거나 어차피 쓸모없는 나이가 든 포로들과의 교환이었을 가능성과 책봉이나 봉역도 문제도 국제적 상호인정과 국경을 명확히하자는 입장이 담겨져 있다고 해석할수 있는 여지의 상호 교류와 평화목적의 전개로서 해석할수 있었다. 하지만 그러면서 내부체제를 어떻게 개혁하고 국력을 신장하고 주변을 안정시킬것인지는 전혀 방안이 없었다는 점이다.[* 다만 이는 기록이 부족해서일 가능성도 존재한다.] 이는 고구려의 국가적 위상 즉 주변 말갈-거란-실위의 이민족들의 영향력하게 두고 한반도 역시 언제든지 영향력 행사와 팽창을 할수 있는 입장의 강대국으로서의 위상을 뿌리째 흔드는 일이었다. 강대국이라는 입장에서 또 다른 강대국이라는 당과의 외교문제를 볼때 지나친 소극주의 결과적으로 주변 이민족들의 이탈과 분열 그리고 내부갈등은 고구려의 멸망을 부추기는 원동력이 되었다. 이민족 분열의 대표적 사례는 바로 1차 대당(對唐)전쟁때에는 퇴각하는 상황에서도 요서에서 거란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던 [[당태종]]의 사례나 2차 [[고당전쟁]]당시 완전한 거란의 이탈은 고구려로서 방어영역의 축소를 가져옴으로서 수세에 몰리는 원동력이 된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게다가 내부적으로도 결국 국가안보라는 측면과 자존감의 문제를 두고 갈등이 나옴으로서 결국 한쪽이 일방주의가 전개되었을때 감당할수 없는 내부이탈의 불씨까지 제공하게 된다. 이 불씨 터져서 가장 극대화된 시점이 바로 [[연개소문]] 사후의 고구려 모습이라 하겠다. 한반도 남부의 백제-신라 등에 대한 강경책은 강력한 당이라는 적을 앞두고 우선 후방을 안정시키겠다는 의도가 있었을지 모르나 여느 시대에 의례적으로 있는 교전을 제외하고는 딱히 적극적인 움직임이 보이지 않고 오히려 영양왕, 영류왕 시대까지 신라에게 야금야금 영토를 빼앗기거나 약간의 수복등으로 사실상 무의미한 소모전 형태를 치루는 상황이었던 것을 [[백제]]와 [[왜]]를 끌어들이고 남방 전선에서 적극적인 정책을 펼쳐 그것을 되찾아나간 것은 [[연개소문]]이었다. 영류왕 당시 칠중성 공격 정도가 남방 전선에서의 전투로 이것만으로 영류왕이 남방 정책에 적극적었다고 보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신라가 전쟁에서 중앙 인사를 내보내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 또한 고구려 역시 단순한 국지전으로 남방 정리가 안된다는 것은 이미 고구려 최전성기 이래 증명된 일이다. 연개소문처럼 백제, 왜, 말갈을 활용한 포위공격도 아니고 장수왕처럼 내정간섭을 통한 점진병합이나 전면전으로 나간 것도 아닌 오히려 국지적인 전쟁을 통한 현상유지에 가까운 정책. 게다가 이 소모전에 가까운 국지전은 엄밀하게 말해서 신라가 고구려를 적대하는 입장이 더 명확하게 하는 밑바탕까지 되었다. 단순 영류왕의 친당정책이 전쟁을 막은 것은 아니다. 당태종은 쿠데타로 왕이 되었고, 후계자로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특히 당태종의 최측근이자 재상인 [[위징]]이 전쟁의 반대하였고 수나라가 어떻게 망했는지에 대한 기억도 남아있는등 복합적인 요인이 섞여 있었을 것이다. 영류왕은 이런 분위기를 읽고 전쟁에 반대했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어찌되었든 고구려에 우호적으로 나온 당고조와는 달리 당태종은 전쟁을 억제할 장해물들을 하나둘씩 치워내갔고 주변국가들도 정리함으로서 고구려로 갈 준비를 꾸준하게 하고 있었다. 애초에 당태종은 고구려의 정복을 수나라때의 아픔상처를 씻으려고 한게 사실이다. 그런 상황에서 영류왕의 친당정책 그것도 당태종이 침공을 위한 명분쌓기용의 무리한 요구조건들을 수용해왔던 것은 결국 무의미했다. == 옹호론 == 영류왕이 초기 노선을 소극적 입장을 취한 것은 기본적으로 다 이유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우선 [[여수전쟁]]이 대규모로 4차에 걸쳐 무려 16년동안 지속되었다. 특히 최대 격전이었던 2차 여수전쟁에서는 그야말로 고대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대규모 군대를 맞아 국운을 걸고 싸웠다. 비록 고구려가 승리했다고는 하나 고구려의 기본 전략인 청야전술의 가장 큰 치명적 단점이 바로 전후 기반을 닦는데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점이다. 침공군이 운영할수 있는 모든 걸 파괴하는 작전이기 때문에 고구려로서는 국력 손실이 클 수 밖에 없었던 게 사실이다. 특히 고구려의 주요 인구+생산의 중심지 역할을 하는 곳 중 하나인 요동과 평양 일대에서의 격전은 분명히 고구려의 경제에 타격을 줄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고구려로서도 국력차이가 5배 이상은 차이가 나는 중국의 통일 왕조를 상대로 힘든 전투를 치를 수 밖에 없었기에 국력적 한계 역시 충분히 절감하고 있었던 게 사실이다. 따라서 영류왕이 초기에 [[당(통일왕조)|당]]나라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취한 조치는 어찌보면 당연한 수순이자 동시에 꽤 현명한 판단이었다. 더욱이 [[당(통일왕조)|당]]은 내부적으로 반란의 연속과 돌궐의 침략으로 혼란한 상황이었다. 그런 입장에서 영류왕이 당나라와 화친 입장을 보인건 결국 상대적으로 [[여수전쟁]]에 대한 상호 적대심이 강한 상황에서 대등한 입장에서의 외교를 충분히 활용할수 있는 기반이었다. 더욱이 떨어진 국력에 대비하여 돌궐 세력의 성장은 위협으로 [[고구려]]에게도 비추어졌기 때문에 [[당(통일왕조)|당]]을 이용하여 돌궐을 견제하면서 고구려의 힘은 들이지 않는 전략도 취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당고조|당 고조]]역시 국내 사정과 국외적 입장에서 새로운 적을 만들고 싶어하지 않았던 점이 결국 각자의 이익에 서로 부합하여 충분히 상호 온건노선이 먹힐 수 있었던 것이다. 고구려로서는 당을 적대하여 다시 자국 영토와 간접 지배 지역을 포함한 영향력 지역에서 일전을 벌이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간혹 서토공격을 할수 있었던 시기 운운하지만 고구려에게 [[난하]] 서쪽은 그저 고구려의 천하관과는 무관한 다른 천하관과 문화가 존재하는 서쪽 땅 일뿐이었고 [[당(통일왕조)|당]]으로서도 [[고구려]]가 돌궐과 연합하여 서북~동북에 이르는 모든 전선에서 고립되고 내부적으로는 혼란의 연속에 따르는 국력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 그렇기 때문에 고구려에 대한 동양의 고대 국제 정치학적인 입장의 책봉과 조공 문제는 별 탈이 없었고 포로 교환이나 반환 역시 그렇게 무리될 것이 아니었다. 영류왕이 보낸 포로들만 하더라도 순차적으로 보냈다는 것은 고구려의 내부 복구에 그들을 투입하면서 [[노비]]로 활용할 것은 활용하고 쓸모없는 [[포로]]들 위주로 보냈을 확률이 높다. 즉 영류왕의 초기 온건 외교 노선은 고구려 스스로가 자국의 생존과 국력 회복을 위해서 필요한 조치였다. 물론 [[당고조|당 고조]]와 다르게 [[당태종|당 태종]]이 집권하고 나서는 상황이 달라지긴 했다. 당도 내부적으로 안정되고 국력을 신장할 때였고 고구려 역시 왠만한 전후 복구를 다하고 국력을 회복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당 태종의 봉역도 요구를 순순히 들어준 것은 당 태종의 집권이후 고구려에 대한 당의 외 교노선이 변화한 것에 대해 고구려 역시 대응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평화를 존중한다는 입장을 취하면서 결국 영토를 분명히 하여 당으로 하여금 특정선 이상은 쳐들어 오지 말 것의 입장이 고구려에게 강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명분상 고구려가 당에게 자국의 영토를 바치는 모양새일지는 모르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중화주의에 빠져있는 중국 왕조들의 전형적인 자기 변호에 지나지 않다. 더욱이 [[당태종|당 태종]]의 이러한 문제로 [[고구려]]에서도 [[천리장성#s-2|천리장성]]을 수축하는 형태를 작용하여 나름의 고구려로서는 서부전선인 당과의 전선을 정비하는 노력을 하였다. 이는 나중에 [[고구려]]가 멸망할때까지 고구려의 서부방벽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게 되는 기반으로 작용했다. [[천리장성#s-2|천리장성]]의 수축 형태로 여수전쟁 때와 다르게 당은 요동방어선에서 지상군이 번번히 돌파를 하지 못하고 묶여있었다는 점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결국 당이 선택한 전략은 요동방어선은 우회하는 선택을 하였고 그 전략이 통용된게 바로 3차 고당전쟁때 이다. 따라서 영류왕의 방어전선 구축은 당태종의 이러한 호전적 성격과 고구려 내부의 나름을 방어전략을 구축하는 일이 되었다고 볼수 있다. 게다가 당태종과의 전쟁을 치루던 동돌궐의 [[힐리가한]]의 요청을 거부한 것 역시 고구려로서는 돌궐 자체를 믿지 않았다. 고구려와 돌궐의 만남만 하더라도 전쟁으로 고구려가 돌궐을 격퇴하는 입장이었다. [[평원왕]] 시절은 555년 돌궐은 유연을 복속시키고 고구려로 쳐들어왔고 이에 장수 고흘(高紇)을 보내어 격퇴하고 일부세력을 복속시켰다.게다가 [[여수전쟁]]때에는 [[돌궐]]이 고구려의 집단 예민(集團隷民)에 있던 [[거란]]을 치며 [[수나라#s-4|수나라]]의 공격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이런 전례가 있는 돌궐을 과연 고구려가 쉽게 신뢰하여 함께 연합전선을 구축한다는건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게다가 세력이 고구려의 북방까지 넓히고 있는 돌궐을 당시 영류왕이 긍정적으로 보고 있을리도 없었다. 더욱이 고구려로서도 당시에는 [[천리장성#s-2|천리장성]]에 국력을 쏟아붓고 있었고 남방인 신라와의 전선에서의 국지전을 수행하고 있었다. 따라서 통일왕조인 [[당(통일왕조)|당]]의 전면전은 최대한 피하는 것이 이익이었다. 하지만 그와 별도로 북방이민족들과의 균형외교는 하지를 못했다. 이는 동돌궐이 멸망하는것을 무조건 방조한 결과에서 북방 이민족들의 친고구려 성향의 이탈이 그것이기 때문이다. 거기에 경관을 허문 것과 태자의 입조는 일단 당나라에게 꼬투리를 잡히지 않기 위해서 한 행동이었으며, 진대덕의 경우엔 [[삼국사기]] 영류왕 본기에 ''''대덕은 사신으로 온 기회에 우리나라의 국력을 살폈으나, 우리는 이를 알지 못하였다.''''라고 쓰여 있어서 묵인했다고 보기에는 힘들다. 또한 신라와의 국지전 소모에 대한 입장도 고구려로서는 신라에게 빼앗긴 옛땅의 수복도 중요하지만 어느정도 방어전선의 안정화를 할 필요가 있었다. 고구려는 기본적으로 중국왕조들이 있는 요동과 요서에 해당하는 고구려에게는 서부전선의 방어를 중시하는 편이었다. 서부전선의 외교적으로나 군사적으로 안전하다 싶으면 그때서야 남부전선인 한반도 전선에 전력을 집중하여 성과를 냈었고 이는 [[장수왕]]-[[문자명왕]]때 극명하게 보여준다. 하지만 영류왕 시기의 서부전선은 천리장성 수축이 필요하고 동시에 외교로서 최대한 교란이나 균형을 유지할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중국은 사분오열된것이 아니라 통일왕조인 [[당(통일왕조)|당]]이 들어서면서 안정을 찾고 국력이 강화되는 상황에서 고구려가 쉽게 남부전선에 투자할수 있는 여건이 아니었다. 이는 [[천리장성#s-2|천리장성]]의 구축만 16년이라는 대규모 공사를 오랜시간 지속 했었던 점만 보더라도 알수 있는 일이다. 더욱이 한반도 전선의 신라의 방어선을 나름 구축하고 교두보 발판으로 칠죽성 공격과 같은 노력을 한건 결국 내려는 가겠지만 때를 기다린 것이라고 봐야한다. 이러한 외치문제를 제외하고도 내부적으로 [[고구려]]는 [[평원왕]]의 중흥이후로 [[영양왕]]과 영류왕에 이르기까지 나름의 강력한 왕권을 다시 세울수가 있었다. 하지만 그 왕권의 강화와 귀족세력들의 균형을 맞추는 일도 중요했다. 특히 장수왕의 천도이후 평양에서 부흥한 신진귀족세력과 국내성을 중심으로의 전통귀족세력이나 북방의 귀족세력등의 여러가지로 얽혀있는 귀족세력들의 권력균형을 맞추어야하는 일을 영류왕도 한 것이다. 그런 정치술에서 연개소문의 가문이 활용되는 과정이었다고 봐야한다. 흔히 온건파와 강경파로 나뉘어져있었다고 하지만 정치라는게 그렇게 쉽게 편가름을 하기 어려운 점과 상호이익에 움직이는 점을 본다면 왕이 균형을 맞추고자한 것이고 영류왕은 그것을 24년동안 집권하면서 나름 수행한 것이라 봐야한다. 물론 영류왕은 집권 중반 이후부터는 어느 왕도 마찬가지지만 한쪽으로 편승한 입장의 정치노선을 보이는 과정을 택하는 것으로 보이며 이것으로 인하여 친위쿠데타이든지 아니면 정변이든지 어떤 방식으로의 무장봉기와 충돌을 발생시킨 것임에는 틀림없다. 결국 그것은 영류왕의 균형정치가 실패한 것이자 다시 고구려의 정치체제가 왕권 중심이 아닌 귀족연합체 성격으로 다시 전환됨과 동시에 독재체제를 확립하게 한 것임에는 틀림은 없다. 추가적인 영류왕의 옹호론적인 재평가 문제는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77&contents_id=33272|이곳]]에서 확인해볼수 있다. == 비참한 최후를 맞다 == 왕위에 오른지 24년이 지난 642년 10월, 고구려 정계내 권력 균형 문제로 너무 과도하게 힘을 키운 연개소문을 제거하려다 [[연개소문]]의 [[쿠데타]]로 시해당했다. 연개소문이 영류왕의 시체를 다섯갈래로 나눠 구덩이에 넣었다고 한다.이것이 나중에 전쟁의 명분이 된다. 하지만 이는 헛소문일 가능성이 높다. 연개소문의 정변 및 집권시의 행적은 중국측 기록에 전적으로 의존하는데 당 태종이 직접 출전한 여당전쟁에 대한 기록은 몰라도 고구려 내부의 일에 대한 중국측의 기록은 정확성이 떨어질 수 밖에 없고 특히 연개소문에 대한 기록은 대놓고 비난하기 위해 부정적인 면모만 골라 서술한 만큼 걸러서 볼 필요가 있다. 영류산에 매장되었다고도 전해진다. 영류라는 시호가 영류산에서 나온 것이다. == 트리비아 == 아들로 태자 [[고환권]](高桓權)이 있었는데, 영류왕 23년(640년) 2월의 기록 외에는 아무 기록이 없어서 행적을 알 수가 없다. 그 외에 신찬성씨록에서 [[고복덕]]이 영류왕의 아들이라고 하는데 상반된 기록도 가지고 있어서 확실하지 않다. == [[삼국사기]] 기록 == 一年秋九月 영류왕이 즉위하다 二年春二月 당에 조공하다 二年夏四月 시조 사당에 제사지내다 二年夏五月 졸본에서 돌아오다 四年秋七月 당에 조공하다 五年 고구려 내에 흩어져 있던 중국인들을 모아 돌려보내다 六年冬十二月 당에 조공하다 七年春二月 당에서 도교가 전래되다 七年冬十二月 당에 조공하다 八年 당에 가서 불교와 도교의 교법을 배우기 시작하다 九年 신라와 백제가 당에 가서 고구려의 침략행위를 호소하다 十一年秋九月 당에 봉역도를 바치다 十二年秋八月 신라 김유신이 낭비성을 쳐부수다 十二年秋九月 당에 조공하다 十四年 당이 고구려가 세운 경관을 허물어버리다 十四年春二月 천리장성이 완성되다 二十一年冬十月 신라 칠중성 공격에 실패하다 二十三年春二月 세자 환권을 당에 보내 조공하다 二十三年春二月 당에 자제의 국학 입학을 청하다 二十三年秋九月 태양이 3일간 빛을 잃다 二十四年 당 사신 진대덕이 고구려의 허실을 탐지하고 돌아가다 二十五年春一月 당에 조공하다 二十五年春一月 연개소문에게 장성 축조를 감독하게하다 二十五年冬十月 '''연개소문이 영류왕을 죽이다''' 二十五年冬十一月 당 태종이 사신을 보내 조문하다 == 대중 매체에서의 모습 == [[연개소문(드라마)|연개소문]]에서의 연기자는 [[최종환(배우)|최종환]]. --[[여인천하|그입 다물라! 다물라! 다물라!]]-- 당과 화친정책을 펴는건 드라마에서도 나오지만 당과 맞서야 한다는 연개소문과는 달리 당과는 화친하면서 가장 큰 위험을 [[신라]]로 지목하고 신라를 멸망시키려는걸로 나온다. 결국 당에게 굽실거린다고 고구려의 장수들(강이식, 온사문)의 불만을 샀고, 연개소문의 쿠데타 후 독주를 마시고 자결한다.[* 고건무는 연개소문의 재능을 높이 사며 연개소문과 함께 가기 위해 끝까지 연개소문을 설득하였다. 그러나 연개소문을 설득하는데 실패하였고, 결국 연개소문을 북쪽으로 내보냈고, 연개소문은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래도 실제론 처참하게 살해당했던 것을 생각하면 나름 배려해 준 장면. 드라마에서도 사서의 기록을 그대로 인용하면서 '그러나 후대에 연개소문을 깎아내리기 위해 지어낸 이야기일 수 있으므로 살펴 보아야 할 것이다.'라고 말한다. 유현종의 소설 연개소문[* 드라마의 원작이라고는 하는데... 드라마는 원작의 내용과는 [[안드로메다]]로 가는 전개를 보여준다.]에서는 당과의 평화정책을 펼치는것 외에도 가화[* 연개소문의 첫사랑이었으나 연개소문과 이뤄지지 못하고 고건무의 첩이 되고 이후 흑화하여 고구려판 [[달기]], [[장녹수]]가 되고 만다. 연개소문의 쿠데타 후 연개소문의 자비로 목숨을 부지하였으나 이후 김춘추의 첩이 되어 김춘추를 도피 시킨다.]라는 첩에게 홀려 암군으로 전락하고 연개소문의 쿠데타로 [[끔살]] 당한다. 이 소설에서는 연개소문이 고건무의 부하로 [[여수전쟁]]에 종군 했었고, 연개소문이 고건무를 굉장히 존경했었다는 설정.[* 쿠데타 후 고건무를 죽일때 "내가 존경했던 고건무 장군은 어디갔소?" 라고 절규한다.] 2013년 KBS 사극 [[칼과 꽃]]에서는 [[김영철(배우)|김영철]]이 연기. ~~본격 가장 카리스마 넘치는 영류왕? 그런데 화천회 대장로가 관심법을 씹어먹어 역모를 막지 못할듯~~ 당에 대해서 화친정책을 취하는등 고구려의 평화를 지키기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으로 나왔다. 당에대해 화친정책을 펼치는건 같으나, 만만한 신라를 공격하는 드라마 연개소문의 영류왕과는 달리 고구려의 평화 그 자체가 목적인 모습으로 나온다. [[칼과 꽃]] 자체가 근래에 나온 사극중에 보기 드물게 연개소문을 악역으로 그리고 있는만큼 그 대척점에 서있는 영류왕을 선역으로 그리면서 생겨난 캐릭터인듯. [[분류:고구려의 왕]] Load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