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변경문서 보기수정 내역 의종(고려) (버전 비교) [include(틀:역대 고려 국왕)]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e6bd0e, #f9d537 20%, #f9d537 80%, #e6bd0e)" {{{#670000 '''의종 관련 틀'''}}}}}}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include(틀:의종(고려))] ---- [include(틀:고려의 왕자/선종 ~ 공양왕)] ---- [include(틀:역대 고려 왕태자)] ---- [include(틀:고려사)] ---- }}}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e6bd0e, #f9d537 20%, #f9d537 80%, #e6bd0e); color: #670000" '''고려 제18대 대왕[br]{{{+1 의종 | 毅宗}}}'''}}} || ||<-3>{{{#!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의종(고려).jpg|width=100%]]}}} || ||<-3> {{{#670000 {{{-2 의종 상상 어진}}} }}} || ||<|2> '''출생''' ||[[1127년]] [[5월 23일]] || ||[[고려]] [[개성시|개경 개성부]] [[연덕궁]][br](現 [[경기도]] [[개성시]]) || ||<|2> '''즉위''' ||[[1146년]] [[4월 10일]] || ||[[고려]] [[개성시|개경 개성부]] [[연덕궁]] 대관전[br](現 [[경기도]] [[개성시]]) || ||<|2> '''사망''' ||[[1173년]] [[11월 7일]] (향년 46세) || ||[[고려]] [[경주시|동경]] 곤원사 북쪽 연못[br](現 [[경상북도]] [[경주시]] [[탑동]] 일대) || || '''능묘''' ||[[희릉]](禧陵) || ||<|4> '''재위기간''' ||'''{{{#f9d537 고려 왕태자}}}''' || ||[[1143년]] [[4월 26일]] ~ [[1146년]] [[4월 10일]] {{{-2 (2년 6개월)}}} || ||'''{{{#670000 제18대 대왕}}}''' || ||[[1146년]] [[4월 10일]] ~ [[1170년]] [[10월 13일]] {{{-2 (24년)}}} || ||<-2>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본관''' ||[[개성 왕씨]] || || '''휘''' ||창(昌) → 철(徹) → 현(晛) || || '''부모''' ||부왕 [[인종(고려)|인종]][br]모후 [[공예태후|공예왕후]] || || '''형제자매''' ||5남 4녀 중 장남 || || '''배우자''' ||[[장경왕후(고려)|장경왕후]], [[장선왕후]] || || '''자녀''' ||(적)1남 3녀, (서)3남 9녀[* 서자와 서녀는 모두 애첩 무비 소생. 이들은《고려사》열전 종실전에는 오르지 못 하고 윤인첨 열전에서만 짧막하게 언급되는데, 무비의 딸과 결혼한 최광균이 무비 덕에 갑자기 출세하여 많은 사대부들이 이를 갈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 || '''종교''' ||[[불교]] || || '''자''' ||일승(日升) || || '''묘호''' ||'''[[의종]](毅宗)''' || || '''시호''' ||강과'''장효대왕'''(剛果'''莊孝大王''')[* 《고려사》 <의종 세가> 마지막 조 기준.] ||}}}}}}}}} || [목차] [clearfix] == 개요 == [[고려]]의 제18대 대왕. 묘호는 의종(毅宗), 시호는 장효대왕(莊孝大王). 제17대 [[인종(고려)|인종]]의 [[장남]]이자 공인된 후계자였다. 휘는 현(晛). 자는 일승(日升). 자는 대부분 부모가 지어주니 의종의 자도 아버지인 인종이 지어주었을 것이다. 인종의 지어준 자의 뜻은 '뜨는 해', '떠오르는 해'인데 비해 의종은 결국 '저문 해'가 되어버렸다. 제8대 [[현종(고려)|현종]] 이후 지속되어 온 '''고려 왕조의 황금기에 종말을 고한 암군'''이자 [[무신정변]]으로 인해 폐위되어 끔찍한 최후를 맞은 군주로도 잘 알려져 있다. == [[묘호]], [[시호]], [[존호]] == 공식 묘호는 '의종'(毅宗)이다. 본디 [[동경(고려)|동경]]으로 쫓겨나 참혹하게 시해당한 의종은 묘호도 시호도 없었으며 제사조차 모셔지지도 않았다. 그를 불쌍하게 여긴 백성 필인이 작은 [[무덤]]을 만들어 놓기는 했다. 이를 고려 내 [[중방]] 반대파가 문제삼자 부랴부랴 올린 묘호가 바로 '의종'이다. 뒤늦게야 천자의 대우를 받은 셈이다. 시호는 '강과장효대왕'(剛果莊孝大王). 원래 시호는 동생 명종(제19대)이 올린 '장효대왕'(莊孝大王)으로 꽤나 다급하게 올려진 시호다. 후손인 고종(제23대)이 '강과'를 추가했다. 제18대 의종 대부터 제24대 원종까지 고려 국왕들의 시호가 크게 줄어드는데 이는 무신정변이 터지고, 몽골과의 전쟁이 시작되어 국가가 혼란스러워진 것과 왕권 추락 등의 원인이 있다. 단 제22대 강종은 예외로 그의 아들인 고종과 손자인 원종이 계속 추가했다. 생전 의종은 자신에게 표문을 지어 스스로를 '만승'(萬乘), '천'(天)으로 표현했고, 일본이 자신을 '황제'라 부른다며 자찬했다. 신하들로부터 '대평호문지주'(大平好文之主)라는 존호를 받은 적이 있다. == [[의종(고려)/생애|생애]]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의종(고려)/생애)] == 가족관계 == * 제1비: [[장경왕후(고려)|장경왕후]] 김씨 - [[강릉공|강릉공 왕온]]의 장녀 * [[효령태자]](孝靈太子) * [[경덕궁주]](敬德宮主) * [[안정궁주]](安貞宮主) * [[화순궁주]](和順宮主) * 제2비: [[장선왕후]] 최씨 - 최단(崔端)의 딸 * 후궁: [[무비(고려 의종)|무비]] * 3남 9녀[* 서녀 중 하나는 [[최사위]]의 후손인 최함(崔諴)의 3남 충주목부사(忠州牧副使) 최광균(崔光鈞)과 혼인하였다.] == [[의종(고려)/평가|평가]]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의종(고려)/평가)] == 기타 == * 《[[고려사절요]]》엔 [[금나라]]에서 사신이 왔을 때 사신이 [[김돈중]]의 관상을 봐주었다는 말을 듣고, 의종이 자신의 관상도 봐 달라고 하면서 수명을 물었는데, 사신은 "왕께서는 수명이 셀 수 없을 만큼 길고 기셔서, [[무신정변|조정의 노•소 신료들이 다 죽고 난 뒤에야]] '''임천지환'''(任川之患, 물가에 다다라서 생기는 고민)이 생길 듯 합니다."라고 대답했는데, 결국 그 말이 제대로 실현되고야 말았다. * 언젠가 거북이 모양을 한 금덩이가 발견되어 의종에게 진상된 적이 있었다. 신하들은 의종의 성덕(聖德)에 감응해 하늘이 내려준 것이라며 만세를 외쳤다고 한다. * '대평호문지주'(大平好文之主)라는 거창한 [[존호]]가 있었다. 신하들이 의종이 쓴 시를 보고 바친 존호다. * 의외로 의종은 손자까지 보아 할아버지이기도 했다. 《[[고려사]]》 <[[정중부]] 열전>, 《[[고려사절요]]》엔 의종의 손자를 [[황태손|태손]](太孫)이라 부르고 있다. 《고려사》 <의종 세가>엔 단순히 왕손(王孫)으로만 등장한다. 의종의 태손은 고려 최초의 태손이다. 두 번째는 [[고종(고려)|고종]]의 태손인 제25대 [[충렬왕]]이다. * 의종은 기존의 5묘 9실제 [[태묘]]를 7묘 9실제 태묘로 바꾸어 완전한 천자식 태묘를 완성한 임금이다. 그동안 고려는 5묘제를 쓰면서 방을 9개로 맞추고, [[묘호]]를 올려, 불완전한 천자식 종묘를 사용해왔다. 이후 고려의 태묘는 [[원종(고려)|원종]] 대까지 7묘 9실제가 유지된다. 다만 불완전하다는 단정은 주나라 예법을 절대시한 현대인이 과거의 생활상을 멋대로 재단하여 생긴 선입견으로 중국 역시도 국초에는 7묘를 전부 채우지 못했다. 즉 예법이란 그 자체가 사회를 완전 구속하는 것이 아니라 시대를 막론하고 당시 편의와 목적에 따른 제도가 탄력적으로 운용되었을 뿐이다. * 의종은 종묘에 별묘(別廟)를 추가한 임금이기도 하다. 태묘엔 의종까지 이어지는 정통성을 가진 국왕을 모섰다. 바로 1대 태조(건국군주), 2대 혜종(태조 공인 후계자), 8대 현종(중흥군주 및 왕실의 중시조), 11대 문종(전성기 및 왕실의 중시조), 12대 순종(문종 공인 후계자), 13대 선종(숙종이 '양위' 받은 국왕, 14대 헌종은 무시됐다.), 15대 숙종(선종 '공인' 후계자, 의종의 3대조), 16대 예종(숙종 공인 후계자, 의종의 2대조), 17대 인종(예종 공인 후계자, 의종의 부왕). 그 외 의종의 정통성과는 큰 연관이 없는 국왕인 3대 정종, 4대 광종, 5대 경종, 6대 성종, 7대 목종, 9대 덕종, 10대 정종, 14대 헌종은 무시되어 신위를 없애는 대신 별묘로 옮겨 계속 제사를 지냈다. 원래는 재위 중인 국왕의 정통성이나 직계와 관련이 없는 임금은 신위를 꺼내 땅에 묻어야 하지만 따로 모아 제사지내는 방식을 정한 것이다. 나중에 이 방식은 조선왕조의 [[세종대왕]]이 사용한다. * 의종이 금나라에 사신을 보내 국서를 바친 적이 있었다. 당시 금은 고려의 상국이었으니 고려는 신하의 예로 국서 양식을 갖춰야 했다. 그러나 의종은 표문(신하가 천자에게 보내는 글)에 자신의 이름을 쓰지 않고 국서를 가져간 사신을 가리켜 '배신'(陪臣)이라고 하지도 않았다. 의종은 금 황제의 신하(제후)이니 의종의 신하는 신하의 신하, 즉 배신(陪臣)이다. 하지만 의종은 이름을 쓰기 거부하고 배신이라고도 안해 표문의 양식을 제대로 지키지 않았다. * 의종과 [[남송]]의 간신 [[진회]]는 이상한 인연이 있었다. 고려의 [[이심(고려)|이심]]이란 사람이 자신의 이름을 바꾸고 진회에게 편지를 보냈다. 편지엔 고려의 지도가 동봉되어 있었는데, 이심은 진회에게 '송은 금을 공격하겠단 핑계로 고려에게 길을 빌려달라 하고 우리가 안에서 도와주면 고려를 차지할 수 있다.'란 내용을 썼지만, 편지는 바다를 건너지도 못하고 중간에 뺏겨 의종에게 전달됐다. 이심은 당연히 죽고 가족은 섬에 유배당했다. 정말 어처구니 없는 계획인데 일단 남송이 바다를 건너 고려를 공격할만한 군사력이 있었는지 의문이다. 심지어 금나라가 호시탐탐 남송을 노려보고 있는 와중에 남송이 군대를 빼 고려로 보낸다는 모험을 했을지도 의문이다. 또한 고려가 아무리 약해졌어도 절대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닌데 왜 이런 바보같은 반란 도모를 시도했는지 알 수 없다. 이 일은 의종이 재위한 지 얼마 안된 2년 차에 일어나 고려는 아직 인종 대의 국력이 있었다. * 의종 대엔 수많은 신하들이 그의 환심을 사 지위를 올리고자 했다. 한번은 귀족 자제들과 학교 유생들간에 아부 배틀이 벌어진 적이 있다. 귀족 자제들은 막강한 재력으로 보석, 그림, 귀중품을 준비하고 서커스단을 데리고 와 왕이 남송, 여진, 탐라국, 일본 등에게서 조공을 받는 행사를 재현해 귀금속과 청색, 홍색 일산을 바치고 고급 말 2마리를 바쳤다. 반면 학교 유생들은 섭외 능력이 떨어지고 재력도 없으니 늘 진상품이 적었다. 《고려사》 <의종 세가>의 표현으론 100의 1도 안되는 양만 바쳤다고 한다. 결국 학교 유생들은 빚을 지고서 고급 말 6마리를 바쳤다. 하지만 이후 유생들은 계속 빚을 갚지 못해 늘 채무자들에게 욕을 먹어 백성들이 조롱했다고 한다. * 서경유수 [[조위총]]이 아니었으면 [[묘호]]나 [[시호]], [[능호]]는커녕 장례식조차 받지 못할 뻔했다. 《고려사》 <정중부 열전>, <조위총 열전>에 따르면 의종은 죽은 뒤 시체가 물 위에 둥둥 떠다니다가 누군가가 겨우 시냇가에 묻었다고 한다. 조위총이 의종을 핑곗거리로 내세우지 않았으면 정중부, 이의방, 이의민 등 중방의 무신들은 절대 그를 굳이 언급하려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경대승 같이 중방 소속이 아닌 자들이 대놓고 이의민을 왕을 죽인 역적이라 비난한 걸 보면 중방이 약해지고 묘호와 시호가 올려졌을 가능성도 높다. * 의종이 유배될 당시 동경([[경주시]])은 19년 동안 유배생활을 하던 <[[정과정]]>의 작가 [[정서(고려)|정서]]가 있던 곳이기도 했다. 정서는 [[정항]]과 강릉군부인의 4남으로 [[왕국모]]의 외손자였다. 심지어 의종이 거제에 온 뒤 한 달 뒤에 정서가 복권됐으니 같은 지역에서 같이 산 것이다. * [[고려]]시대의 문집인 《[[보한집]]》 <권중>엔 의종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의종이 [[경주시|남황(南荒)]]으로 옮겨졌을 때 이기(李琪)라는 화가가 의종의 [[어진]]을 그렸지만, 이름을 붙히는 등 마감을 하지 않고, 단지 동도초당(東都草堂)이란 곳에 걸어둔 채 아침•저녁으로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시를 보면 이기가 그린 의종 어진은 [[곤룡포]]를 입은 모습이 아니라 복두에 학의, 즉 평복을 입은 초라한 모습이었던 걸로 보인다. * 고려시대의 문집인 《[[파한집]]》 <권하>에도 의종의 이야기가 나온다. 의종이 조령을 내려 고려 각지에 있는 사원, 역참에 있는 시를 수집해오라고 했다. 그런데 당시 장관급 직위를 맡고 있던 신하가 썼던 시가 의종에게 보내졌다. 시의 내용은 대략 '밑을 쥐어짜 위에게 잘보이는 것이 풍속이 됐고, 온나라가 따르고 있다. 뭐가 부끄럽냐? 올바른 일을 하는게 맞지.'였는데 의종을 크게 비꼬고 있었다. 의종은 이 시를 읽고 한참 동안 말없이 서 있었고, 좌•우의 신하들은 무슨 일이 일어날지 무서워 겁을 먹었다고 한다. 글에 따르면 아무 일도 없었다. 다만 어떤 신하 한 명이 관례를 깨고 두 차례나 변방에 나가야 했을 뿐. * 의종의 왕릉인 [[희릉]]은 현재 유실 상태다. == 대중매체 == * 2003년 [[KBS]] 드라마 《[[무인시대]]》 - [[의종(무인시대)|의종]] {{{-1 ([[김규철(배우)|김규철]] 분)}}}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의종(무인시대))]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img.kbs.co.kr/b_0125.jpg|width=100%]]}}} || * 과학&역사 학습만화 《[[Why?]]》시리즈 <쫒겨난 임금> 편에서도 등장, 원 역사대로 가다가 [[무신정변]]이 터지자 겁을 먹고 [[정중부]]에게 왜 이러는 거냐고 묻자 정사는 안 돌보고 놀기만 하는 놈을 어떻게 섬기냐는 말을 듣는다. 이후 [[김보당의 난]]이 실패로 끝나자 무신들이 날 그대로 둘지 모르겠다며 불안해하다 자기를 찾아온 [[이의민]]에게 죽는다.[* 이때 죽어가며 독백으로 저승에 있는 선왕들을 무슨 낯으로 본단 말인가...라고 한다.] * 대체역사웹소설 차돌박E 작가의 2019년 《[[근육조선]]》과 2022년 《[[효명세자와 함께하는 조선 생활]]》, 그리고 2023년 신작 《[[고려황제! 추나요법을 피해라!]]》에선 주인공이 의종에 빙의한다. * 2020년 출시된 《[[한국사 RPG - 난세의 영웅]]》에선 무신에겐 대놓고 찬밥을 주고 문신은 우대해주는 무능한 임금으로 그려졌다는 반응이 나올 만큼 안좋게 묘사되었고,[* 해당 게시물을 올린 사람은 "<무신정변> 편을 플레이하면서 의종이 양아치처럼 대놓고 무신한테 찬밥주고 문신들한테는 우대해주는 그런 무능한 임금으로 그려졌지만 나는 대세의 따른 처세술이라 생각한다. 왜냐면 묘청의 난을 진압한 [[김부식]] 일족 내지는 [[문벌귀족]] 세력들이 주도권을 쥐고 있었으며, 의종은 그들을 자기의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 측근정치를 펼쳤다. 하지만 그들은 김부식이 아니라 [[김돈중]], [[한뢰]] 같은 무능한 인간들이였으며, 이사람들이 무신들을 괜히 자극시켜 결국 조정을 피바다로 물들이고 말았다. 의종은 그들의 비위에 맞춰줘야만 해서 겉으로는 무신들을 무시했어도 속으로는 무시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설령 있더라도 문벌귀족보다는 아니였을것이다. 김돈중이 정중부의 수염을 태운 다음 날 정중부를 바로 풀어준 일화가 대표적이다. 그는 살기 위해서 발악을 했고, 대세를 따르고 약자를 버리는 삶을 택했지만 결국 약자에게 베인 불우한 임금이라고 생각한다. 의종이 과연 무능했을까?"라고 표현했으나, 다른 이용자들은 의종에 대해 24년 동안 재위하면서 뭐 하나 업적을 제대로 남긴게 없고, 후대에 악영향을 준 암군이라는 의견과 그에 공감한다는 의견, [[이의민]]도 잘못했지만 [[무신정권]]의 원인이니까 의종도 사실 할말이 없다고 본다는 반응을 보였다.] 무신정변 때 폐위당했다는 언급으로 등장이 종료되었다. [각주]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의종, version=50)] [[분류:의종(고려)]]||<-5><:><#FFD700>[[고려청자|https://67.media.tumblr.com/d0ab98e78c55c6369f20b702ab560e77/tumblr_o9zoipyqmm1sqk8veo5_r2_400.png?width=50]][br] '''{{{+1 [[고려/왕사|{{{#800080 고려의 역대 국왕}}}]]}}}''' || ||<:> 17대 [[인종(고려)|인종]] 왕해 ||<:> {{{+1 ←}}} ||<:><#FBEC5D> '''{{{#black 18대 의종 왕현}}}''' ||<:> {{{+1 →}}} ||<:> 19대 [[명종(고려)|명종]] 왕호 || ||<:> '''[[묘호]]''' ||||<:> '''[[의종]](毅宗)''' || ||<:> '''[[시호]]''' ||||<:> 강과장효대왕[BR](剛果莊孝大王) || ||<:> '''[[능묘]]''' ||||<:> 희릉(禧陵) || ||<:> '''[[성]]''' ||||<:> 왕(王) || ||<:> '''[[휘]]''' ||||<:> 철(徹)(어릴 적 이름)/현(晛) || ||<:> '''[[자(이름)|자]]''' ||||<:> 일승(日升) || ||<:> '''절일''' ||||<:> 하청절(河淸節) || ||<:> '''[[왕후]]''' ||||<:> 장경왕후(莊敬王后), 장선왕후(莊宣王后) || ||<:> '''[[부왕]]''' ||||<:> [[인종(고려)|고려 인종]] || ||<:> '''모후''' ||||<:> 공예왕후(恭睿王后) || ||<:> '''종교''' ||||<:> [[불교]] || ||<|2><:> '''생몰년도''' ||<:> [[음력]] ||[[1127년]] [[4월 11일]] ~ [[1173년]] [[10월 1일]] || ||<:> [[태양력|양력]] ||1127년 [[5월 23일]] ~ 1173년 [[11월 7일]] (만 46세 5개월) || ||<|2><:> '''재위기간''' ||<:> 음력 ||[[1146년]] [[2월 28일]] ~ [[1170년]] [[9월]] 기묘일 || ||<:> 양력 ||1146년 [[4월 10일]] ~ 1170년 [[10월 13일]](만 24년 6개월) || [목차] == 소개 == '''고려가 본격적으로 막장화된 계기를 만든 암군 중의 암군.'''[* 물론 고려 역사에서 의종 말고도 암군들이 있긴 하지만, 무신정권의 발단을 제공하여 고려를 막장국가로 전락시킨 건 의종이다.] [[고려]]의 제18대 왕. [[인종(고려)|인종]]의 장남이다. 의종의 의는 사나울 의. == 생애 == === 태자 시절 === 어릴 때부터 놀기를 좋아하여 부모가 걱정했다. 의종의 모후 공예왕후 임씨는 둘째 아들 대령후 [[왕경]]을 총애하여 인종에게 태자로 삼을 것을 제안했다. 인종은 반대했으나, 태자를 바꾸려고 생각을 하기는 했다. 그러나 당대에 강직한 신하로 이름이 높았던 정습명(후손이 [[정몽주]])의 만류로 그대로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그러나 왕위에 오르고도 정습명은 의종이 풍류를 즐기는 것을 간언하다가 의종의 미움을 사고 결국 1151년, 향년 57세로 독약을 먹고 자결했다. 혹은 홧병으로 죽고 말았다고도 한다. 어느 쪽이든 의종의 미움을 사 버림을 받고 죽었다는 것은 다르지 않다(...) 젊은 시절부터 놀자판의 기질이 있다고 [[고려사]]에 기록은 되어 있다. 그러나 사실 사람 자체만 보면 대단한 [[엄친아]]로 [[암군]]이라고 하지만 그렇다고 [[백하팔인]]급의 인물은 아니다. 의종은 힘이 세서 [[각궁|강궁]]을 잘 다루었고 방 안에 [[촛불]]을 켜 놓고 '''활시위를 당겨 촛불을 꺼버리는''' 묘기를 선보인 기록도 남아있다. 또한 [[기마]]술과 [[격구]]에도 두루 능했던 무인형 군주였으며 [[수박]]희라는 일종의 격투기를 좋아하여 무인들의 수박희 경기를 자주 즐겨 감상했다. 그리고 풍류를 즐긴 군주답게 음악과 시문 등 예술적 감각도 뛰어났다. 비슷한 예술가 타입 군주였던 [[공민왕]]이 무예에는 그다지 소질을 보이지 못했고 오히려 공민왕은 [[노국공주]](!)에게 [[승마|말타는 법]]을 배우기 이전에는 말을 탈 줄 몰랐다고 할 정도였다. 이렇듯 의종은 [[무예]]에도 뛰어났다. ~~[[연산군]] 순한 맛~~ === 실패한 개혁가? === 즉위 초 의종은 인종 시대의 잦은 내란으로 인해 실추된 왕권 회복을 위해 노력했는데 권력을 휘두르는 문벌 귀족들의 견제를 위해 환관과 측근 세력을 양성했으며 특히 무신들을 중용하여 이 때 [[무신정변]]의 주역들로 유명한 [[이의방]], [[정중부]], [[이의민]] 같은 이들이 발탁되었다. 재위 직후 [[불교]]·[[음양설]]·[[선풍]](仙風)을 중요시하고 [[유교]]에 대해 거론하지 않는, 전형적인 중국형(?) 반관료 [[암군]]의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1154년 창건한 중흥사, 1158년 [[연백]]주(백주)에 창건한 중흥궁은 고려 왕실을 [[중흥]](重興)하겠다는 의종의 의지가 드러난다는 평가도 있으나 이 역시 왕실의 재력을 바탕으로 추진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 그러나 이러한 의종의 시도는 실세 권력을 잡고 있던 [[김부식]] 일파를 중심으로 한 당대의 세력가였던 문벌 귀족들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히게 되었고 결국 종전대로 문신 우대하는 정책을 펼치면서 무신들의 불만을 사게 되었다. 또한 이들과 문신들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인종 시대에 잔치 중 [[용춤]]을 추던 정중부의 수염을 김부식의 아들인 김돈중이 태워먹었다는 일화가 유명한데, 이 장면도 이러한 당시 정치 상황을 보여주는 한 단면이다. 또한 무신 정변 당일에는 '''종5품의 젊은 문신이었던 기거주 한뢰가 종3품이 되는 대장군 이소응의 뺨을 때리는''' 일이 있었을 정도. 종3품이면 고려시대 무관이 오를 수 있는 최고위직이니, 현대로 치자면 대략 중앙부서 과장 정도가 육군 중장의 싸대기를 날렸다고 생각하면 비슷한 분위기가 된다. 이는 그당시 무인들이 문인에 비해 얼마나 홀대받고 있었는지를 나타낸다. 흔히 이 사건이 무신정변의 원인이라고들 하는데, 이 사건과 정변은 같은 날에 일어났으므로 원인이 될 수 없다. 정변 자체는 이 일과 상관없이 사전에 왕이 보현원에 가면 결행하기로 모의된 것으로 이 일이 없었어도 일어났을 일이다. 다만 정변 후 굳이 죽일 필요가 없었던 한뢰가 처참하게 살해당한 것은 이 일이 원인으로 보인다. 결국 말년에는 문신과 [[환관]]들과 어울려 항락과 사치를 즐겨 백성들이 왕을 원망하기도 했다. [[머리카락]] 잘라 팔아서 공사판에서 일하는 남편과 동료들의 점심을 마련한 여인 이야기의 배경이 바로 의종 시대다. 이 이야기 또한 당시 백성들의 삶을 보여주는 단면이다. 이건 정사인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다. 의종 21년 3월조에 나와 있는 이야기로 중미정이라는 정자를 지을 때 실린 이야기다. 잦은 연회로 국고가 탕진되어 인종 때까지 그럭저럭 유지되던 고려의 태평성대가 무너지게 되었다. === 비참한 최후 === 결국 이러던 중 마침내 1170년 음력 8월, 의종은 보현원에 행차했는데, 이때 그 동안 문신 우대 정책에 불만을 품은 무인 이고, 이의방, 정중부 등은 문신들을 싸그리 몰살시켰다. 이 때 제거된 문신의 수는 대략 50여명이었다고 한다. 한편 무신들이 문신들을 무차별 학살하고 있는 동안 우리의 왕 의종은 뭘 하고 있었느냐면, 그 살육의 현장에서 정작 의종 본인은 태연하게 평소처럼 '''술에 취해서 악사들의 음악 소리를 들으며 잠을 잤다고''' 한다. 그리고 무신들은 개경에 입성한다. 무신들은 입성 후 바로 의종을 폐위시키진 않는다. 그러나 의종이 총애하던 환관[* 조선시대엔 환관과 내시가 똑같은 의미로 거세한 자들을 가리키나, 고려시대엔 환관은 거세한 자, 내시는 신하 중 왕의 총애를 받는 몇몇 자들을 의미한다.] 정변 시작 3일 후 왕광취를 비롯한 환관세력들이 반 무신정변 쿠데타를 일으키자 이를 제압하고, 이 배후에 의종이 있다 생각해 의종을 폐위시키고 동생 [[명종(고려)|명종]]을 옹립하여 고려의 정국을 장악했다. 이것이 바로 [[무신정권]]의 시작으로 무신 집권기는 1270년 마지막 실권자 임유무가 살해되기까지 정확히 100년간 지속되었다. 쫓겨난 의종은 거제도에 유폐되었다. 1173년 무인 정권에 반발하며 의종의 복위를 꾀한 김보당의 난이 일어났으나 [[이의민]]에게 진압되고 이 때문에 계림([[경주시|경주]])에 옮겨져 유폐되었다. 원래 의종은 거제에 유폐되어 있었는데 경주 지역을 거점으로 벌어져서 동경의 난이라고 불린 김보당의 난 동안 경주로 옮겨왔다. 즉 직접 가담. 결국 김보당의 난이 실패하자 동경은 경주로 격하되었고, 의종은 그대로 유폐되었다. 곧 찾아온 이의민에게 '''글자 그대로 [[끔살]]'''~~[[페이탈리티]]~~당했다. 향년 47세. 얼마나 끔찍하게 죽었는지 고려사의 기록을 그대로 옮기면.. >"전왕을 끌어내서 곤원사의 북쪽 못가에 이르러 술 두어 잔을 드리고, 의민이 '''등뼈를 부러뜨리니 손대는 대로 부러지는 소리가 나자 의민이 큰 소리로 웃었다.''' 박존위[* 이사람은 훗날 조위총의난때 반란군 세력권인 운중도에서 자기가 왕 죽였다고 자랑질하다가 지역주민들에게 살해당한다...]가 '''담요로 싸고 2개의 가마솥을 마주 합하여 그 속에 넣어 못 속에 던졌다.''' 갑자기 회오리바람이 일어나 티끌과 모래가 날아 오르니, 사람들이 모두 부르짖고 떠들며 흩어졌다. 절의 중 가운데 헤엄 잘 치는 자가 있어서 가마솥은 가져가고 시체는 버렸다." 아마 기록으로만 미뤄 보면 고려사 아니 한국사의 역대 임금들 중에서도 [[공민왕]]과 더불어 가장 참혹하게 살해당한 임금 중 한 명일듯 싶다. 줄여 말하면 이의민의 필살 [[등뼈]]꺾기에 온몸의 [[뼈]]가 부러져 죽었고~~[[페이탈리티]]~~ 그 시체를 담요로 감싸고 가마솥 2개를 합쳐서 [[연못]] 속으로 시체를 버렸다는 소리. 후덜덜. 중국에서도 뼈가 꺾여 끔살당한 군주가 있었는데 [[춘추시대]] 때의 [[노나라]] [[환공]]으로 [[제나라]] [[양공]]의 지시로 팽생에 의해 뼈가 꺾여 끔살당했다. 그나마 전 부호장(副戶長) 필인(弼仁)이라는 사람이 시신을 수습해 관을 짜서 물가에 묻어 주었고, 동생인 [[명종(고려)|명종]]이 왕위에 오른후 그를 희릉(禧陵)에 안장하였다. 의종에게는 1남 3녀가 있었다. 외아들이자 태자였던 효령태자 왕홍(왕기라고도 함)은 유배되었는데 의종 시해 후에 어떻게 됐는지 기록이 없다. 정황상 피살된 듯하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천민]] 출신인 이의민을 무관으로 발탁하여 출세시킨 것은 바로 의종 자신이었다.[* 고려사절요에는 [[금나라]]에서 사신이 왔을 때 사신이 김돈중의 관상을 봐 주었다는 말을 듣고 의종이 자신의 관상도 봐 달라고 하면서 수명을 물었는데, 사신은 "왕께서는 수명이 셀 수 없을만큼 길고 기셔서, 조정의 노소 신료들 다 죽고 난 뒤에야 임천지환(任川之患, 물가에 다다라서 생기는 고민)이 생길 듯 합니다."라고 대답했는데, 결국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가 되어버렸다.] == 평가 == 흔히 이렇듯 항락에만 몰두하다가 자신도 비참한 운명을 맞았고 무신 정변으로 고려의 혼란을 초래한 [[암군]]으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실추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하다가 험한 난관에 부딪혀 좌절하고 만 비운의 군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사실 [[문종(고려)|문종]] 이후의 왕들이 괜찮은 주변 여건에다 내부적으로 안정기라서 대체로 [[명군]] 소리까지 듣는 것에 비해서, 의종은 무신 정권의 시작이라는 것만으로도 역사와 당시 상황을 기록하는 문신들에게 최악의 평가를 받은 측면도 있다. 사실 비운의 군주 소리를 듣기엔 25년이란 재위 기간은 결코 짧은 것도 아니다. 고려 왕조의 평균 재위기간이 유독 짧다는 것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의종은 자신의 [[인종(고려)|아버지]], [[예종(고려)|할아버지]]보다 훨씬 오래 살았고 또 오래 재위했다. --되려 이런 자기 정치 길게 한 임금이 정변에 그렇게 무방비 했다니-- 그렇기에 그 긴 재위 기간은 분명히 재평가받을 여지는 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무신 집권과 고려의 국정 혼란을 초래한 책임은 피할 수 없는 인물로, 특히 무신 집권기 이후 몽골의 침입 때까지 고려가 개판으로 돌아가는데 근본적인 원인을 제공해 버렸다는 점에서 좋은 평가를 받기는 어렵다. ==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 * [[KBS 대하드라마]] [[무인시대]]에서는 [[김규철]] 씨가 배역을 맡아, 똘기어리면서도 한편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버림받아 정신이 붕괴하는 의종의 모습을 잘 표현하였다. 무신정변이 발생하는 첫 화에선 그저 흥청망청 놀기만 하는 것만 좋아하는 암군으로 등장한다. 무비의 언급에 의하면 처음의 의종은 성군이 되고자 했으나, 그가 등용한 문신들이 의종의 시야를 흐리게만들면서 결국 의종이 타락해버렸다고 한다. 차별 등으로 인해 분노가 극에 달해있던 무인들은 미리 정변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정중부는 소장파 무신들에게 만약 의종이 황궁으로 돌아간다면 정변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조건을 내세웠고, 수상함을 느낀 김돈중이 황궁으로 돌아갈 것을 건의하나 의종은 이를 무시하고 보현원에 놀러가버린다. 이후 역사대로 무신정변이 벌어졌고, 그 와중에 의종이 총애하던 한뢰는 의종앞에서 이의방의 철퇴에 참교육을 당하고 만다. 무신정변이 발생한 직후, 의종은 환관들에게 무신들을 척결하라는 혈서를 내리는데, 무신들은 밀고자 덕분에 이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는데다 애당초 이의방 일파는 희대의 무력굇수들인지라 환관들은 일방적으로 박살나버리고, 주동자인 왕광취는 이의방의 철퇴에 참교육을 당하고 만다. 왕광취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절명한 직후, 이의방은 의종앞에 대놓고 왕광취의 머리통을 내던지고 "황제는 폐위되셨소이다!"를 외친다. 폐위된 후 무비와 함께 거제현으로 유배를 떠나는데, 백성들 사이에서도 별로 평판이 좋지 않아서 그런지 유배 도중 백성들에게 돌을 맞기까지 한다. 이때 [[두경승]]이 찾아와 의종에게 절을 올렸고, 당시 의종을 호송하던 [[이의민]]은 두경승의 인물됨을 눈여겨본다. 거제현에선 와신상담을 하듯이 생선 내장을 생으로 씹어먹는 충공깽스런 모습도 보이며, 황궁으로 돌아갈 날만을 기다린다. 그 와중에 김보당 일파가 찾아와 의종을 보위에 올릴 것을 약속한다. 얼마 후, 의종 폐위와 관련하여 금나라와 외교분쟁이 벌어지자, 혼란을 이용해 왕조를 갈아치우고자 했던 [[이고]] 일파는 의종을 살해하고자 결사대를 파견했고, 때마침 무비를 걱정하던 이의방도 이의민을 몰래 거제현으로 보낸다. 이고의 부하들이 거제현에 도착할때 쯤 악몽을 꾼 무비는 그 날 밤 의종을 데리고 산속으로 도주하였고, 덕분에 이고의 부하들은 의종을 찾지 못하고 때마침 도착한 이의민에게 끔살당하고 만다. 김보당의 난 때 경주 호족들과 야합하여 김보당과 개경을 협공하고자 하였으나 김보당은 붙잡혀 참수되고 이의민에게 경주를 장악당하며, 이의민이 거제현으로 다시 데려가겠다고 하자 한때 자신의 은덕으로 천민에서 벗어난 그에게 이별주를 청하며 부월무를 보여달라고 한다. 이 때 이의민이 추는 부월무가 압권. 그 후에 계곡을 바라보며 "떠날 때가 됐구나"[* 어쩌면 죽음을 예견한 것일수도 있다.]라고 말하며, 그 직후 역사대로 이의방의 밀명을 받은 이의민에게 등뼈가 으스러져 죽는다. ~~그리고 의종은 [[메이퀸|훗날 환생하여]] 자신을 죽인 [[장도현|이의민]]의 [[박기출(메이퀸)|개]]가 된다 [[카더라]].~~ 금강야차로 악명 높은 이의민에게도 의종 시해는 엄청난 일이어서 그런지, 이의민은 한동안 악몽을 꾼다. 책사인 두두을 말로는 의종의 원혼이 성불하지 못하고 구천을 떠돌아서 그런거라고. 한편 김보당의 난 당시에는 어떻게 형님을 죽일 수 있겠느냐고 울먹이던 명종은, 먼 훗날 이의민 정권때는 이르러서는 의종시해를 '어쨌든 국가과 황실을 위해서 할 수 밖에 없었던 필요악'으로 인정한다. 의종이 시해당하면서 황실이 안정 되고, 명종의 정통성이 확립 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 [[KBS 1TV]] <[[역사저널 그날]]> 2015년 3월 29일 67회에 <드라마 속 역사인물 시리즈 제 4탄 천민 이의민 왕을 꿈꾸다>라는 제목으로 이의민을 다뤘다. 정중부에게 오늘 일을 잊으라며 술을 따라준 장면이 나왔는데, 정중부는 의종이 자리를 비웠을 때 그 술을 쏟아버렸다. * [[tvN]] 드라마 [[도깨비(드라마)]]에서 고려의 [[황제]]로 등장하는 [[왕여]]가 작중에 집권했던 시기가 의종의 집권기와 겹친다.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의종, version=50)] [[분류:고려의 왕]][[분류:암군]] Load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