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변경문서 보기수정 내역 철종(조선) (버전 비교) [include(틀:다른 뜻1, other1=드라마 《닥터 진》의 인물, rd1=철종(닥터 진), other2=드라마 《철인왕후》의 인물, rd2=이원범(철인왕후))] [include(틀:역대 조선 국왕)] [include(틀:대한제국 추존 황제)] ##나무위키:편집지침/특수 문서 문단 3.1.2. 둘러보기 틀에 따르면 한 문서 내에서 둘러보기 틀을 최상단에 최대 두 개까지 삽입할 수 있습니다.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972000, #bf1400 20%, #bf1400 80%, #972000)" '''조선 제25대 국왕[br]{{{+1 철종 | 哲宗}}}'''}}}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c19c22, #e3ba62 20%, #e3ba62 80%, #c19c22)" '''대한제국 추존 황제[br]{{{+1 철종 장황제 | 哲宗 章皇帝}}}'''}}}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철종 (복원).jpg|width=100%]]}}} || ||<|2> '''출생''' ||[[1831년]] [[7월 25일]][br](음력 [[순조]] 31년 6월 17일)|| ||[[한성부]] 경행방 향교동 사저[br](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1.2.3.4가동|경운동·낙원동]] 일대)|| ||<|2> '''즉위''' ||[[1849년]] [[7월 28일]] (18세)[br](음력 [[헌종(조선)|헌종]] 15년 6월 9일)|| ||[[한성부]] [[창덕궁 인정문]][br](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서울)|율곡로]] 99)|| ||<|2> '''사망''' ||[[1864년]] [[1월 16일]] (향년 32세)[br](음력 [[1863년]], 철종 14년 12월 8일)|| ||[[한성부]] [[창덕궁 대조전]] 별채[br](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서울)|율곡로]] 99)|| || '''능묘''' ||[[서삼릉#예릉(睿陵)|예릉]](睿陵)|| ||<|2> '''재위기간''' ||'''{{{#ffd400 제25대 국왕}}}'''|| ||[[1849년]] [[7월 28일]] ~ [[1864년]] [[1월 16일]][br]{{{-2 (음력 철종 즉위년 6월 9일 ~ [[1863년]], 철종 14년 12월 8일)}}}|| ||<-2>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본관''' ||[[전주 이씨]] || || '''휘''' ||원범(元範) → 변(昪)[* [[조선]]의 제25대 [[조선/왕사|임금]]으로 즉위하기 전에 대왕대비였던 [[순원왕후]]의 하교와 [[신 안동 김씨|안동 김씨]] 세력에 의해 [[순조]]의 [[양자(가족)|양자]]로 입적되면서 같은 항렬대에 있는 [[효명세자|익종]](翼宗)의 이름을 맞추기 위해 즉위 후 [[피휘]] 문제에 따라서 이름을 개명했다.] || ||<|2> '''부모''' ||친부 [[전계대원군]][br]친모 [[용성부대부인]] || ||양부 [[순조|순조 숙황제]][br]양모 [[순원왕후|순원숙황후]] || || '''형제자매''' ||3남 중 3남 || || '''왕비''' ||[[철인왕후|철인장황후]] || || '''후궁''' ||[[귀인 박씨(철종)|귀인 박씨]], [[귀인 조씨(철종)|귀인 조씨]], 귀인 이씨, [[숙의 방씨]], [[숙의 범씨]], [[숙의 김씨(철종)|숙의 김씨]], 궁인 이씨, 궁인 박씨 || || '''자녀''' ||'''[[이융준|1남]] [[영혜옹주|1녀]] {{{#gray (5남 6녀)}}}'''[* 이 중 [[영혜옹주]]만 작호를 받고 혼인할 정도로 성장했다.] || || '''종교''' ||[[유교]] {{{-2 ([[성리학]])}}} || || '''자''' ||도승(道升) || || '''호''' ||대용재(大勇齋) || || '''봉호''' ||덕완군(德完君) || || '''전호''' ||[[창덕궁 대조전|효문전]](孝文殿) || || '''묘호''' ||'''[[철종]](哲宗)''' || || '''존호''' ||희륜정극수덕순성'''흠명광도돈원창화'''[br](熙倫正極粹德純聖'''欽明光道敦元彰化''')[* 굵은 글씨은 황제 추존 시 추가한 존호이다.] || || '''시호''' ||'''[[조선]]''': 문현무성헌인영효대왕[br](文顯武成獻仁英孝大王) ---- '''[[대한제국]]''': 문현무성헌인영효'''장황제'''[br](文顯武成獻仁英孝'''章皇帝''') ---- '''[[청나라|청]]''': --충경(忠敬)--[* [[1908년]](융희 2년), [[대한제국]]의 [[황제]] [[추존]]과 동시에 폐지] ||}}}}}}}}} || [목차] [clearfix] == 개요 == [[조선]]의 제25대 [[조선/왕사|임금]]이자 [[대한제국]]의 추존 [[황제]]. [[묘호]]는 '''철종(哲宗)''', 추존된 [[시호]]는 '장황제(章皇帝)', 휘는 '''원범(元範)'''이었으나 왕이 된 후 항렬자를 맞추기 위해 '''변(昪)'''으로 개명했다. 자는 도승(道升). 국왕이 되기 전까지 어린 시절을 [[강화도]]에서 나무꾼으로 보낸 것으로 유명하기 때문에 그를 칭하는 별명은 '강화도령'이다. 왕조의 직계 혈통이 단절되어 즉위한 방계 출신 군주이며 당대 실권자인 [[안동 김씨]] 세도의 정치적 목적에 따라 차기 군주로 옹립되었다. 삼정이정청을 설치하는 등 민생을 돌보려는 시도도 했었으나 미약한 권력과 신하의 간섭으로 인해 제대로 된 정치를 하지 못했고 32세의 젊은 나이로 후사없이 [[요절]]했다. 조선 임금 중 '''마지막으로 재위 중에 종신(終身)'''하게 된 왕이자 왕좌를 이어받게 되는 자손 없이 종신한 마지막 임금이다. 또한, 실질적으로 [[조선왕조실록]]이 편찬된 마지막 국왕이기도 하다. == 생애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철종(조선)/생애)] == 평가 == 철종은 명암이 분명한 [[조선/왕사|군주]]이다. 철종은 역대 조선왕조의 왕들 중 피지배층 백성들의 삶과 그 고통을 가장 잘 알고 공감하고 있는 왕이었기에 백성들에게 동정적이었고 무너져가던 [[조선]]을 되살리기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했던 것은 사실이나 선대 왕인 [[헌종(조선)|헌종]]이 외가나 처가 등을 통해 정치적인 기반을 가지고 세도 가문을 견제해가며 나름 왕권을 구축했던 것에 비해 '''[[방계]] [[왕족]]''' 출신인 철종은 그런 정치적 기반이 없었기에 개혁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기본적으로 [[조선/왕사|정통성]]이 매우 약했기 때문에 정책을 추진하기 위해선 양모인 [[순원왕후]]와 [[신 안동 김씨|안동 김씨]]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엄청난 핸디캡을 안고 있었다. 오히려 이만한 핸디캡을 안고 삼정이정청 설치 등의 성과를 낸 것만도 역량이 없는 인물은 전혀 아니었다. 그럼에도 선대인 [[헌종(조선)|헌종]]에 비해 정치적인 역량은 많이 뒤쳐졌다고 볼 수 있다. [[세도 정치]]라고는 하지만 세도 가문들이 [[고려시대]] 무신정권도 아니고 국왕의 역량에 따라 충분히 통제할 수도 있었다는 게 중론이기 때문이다. [[헌종(조선)|헌종]] 때에는 국왕이 세도 가문끼리 경쟁 구도를 만들어 세도가들을 어느 정도 제어하는 모습이 있었으나 철종 때에는 이러한 모습 없이 사실상 [[신 안동 김씨|안동 김씨]]가 독주하는 모습이 만들어졌던 것도 그만큼 역량 면에서 철종이 선대보다 뒤떨어졌던 것을 방증한다고 볼 수 있다.[* 사실 철종은 [[방계]] [[왕족]]이기에 [[순조]]의 적장손인 [[헌종(조선)|헌종]]에 비해 [[조선/왕사|정통성]] 면에서 큰 핸디캡을 가졌던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헌종(조선)|헌종]] 때에 세도 가문 간에 균형이 맞추어졌던 것에 비해 철종 치세의 모습은 갭이 너무 심하기는 했다. 이는 [[조선/왕사|정통성]] 외에 국왕 스스로의 역량이 선대에 비해 낮아진 것도 한 몫할 수밖에 없다.][* 사실 [[조선]]에서 왕이 되기 위해선 엄청난 양의 공부를 해야 했다. 어렸을 때부터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맨투맨으로 붙어 공부와 시험을 계속 치러야했고, 일정 이상의 학문과 무예를 갖추지 않으면 안됐다. 실제로 철종 전까지 왕들은 대부분 짧게나마 [[왕세자|세자]] 기간을 거쳤고, 방계 왕들도 선대 왕의 조카거나 동생인 식이라 왕자로서 예법이나 교양은 갖췄다.[* [[정종(조선)|정종]]은 허수아비 왕이니 제외, [[태종(조선)|태종]]은 고려시절에 과거급제를 할만큼 똑똑했고 [[세종대왕]], 말할 것도 없다, [[세조(조선)|세조]]는 적어도 능력은 꽤 다재다능했다고 하며 [[성종(조선)|성종]]은 어린 나이로 즉위했다. [[중종(조선)|중종]]은 그나마 특출난 면은 없고 [[선조(조선)|선조]]는 그 17세의 나이에 [[명종(조선)|명종]]의 테스트를 조리있게 통과했고 [[광해군]]은 [[임진왜란|전란]]시기 [[분조]]를 이끈 경력이 있고 [[인조]]도 특출난게 없지만 [[인조반정]]을 직접 성공시킬만큼 능력이 아주 없지는 않았다. [[효종(조선)|효종]]은 특별히 세자 이전인 대군시절부터 유능했다는 기록은 안 보이지만 [[조선/왕사|왕]]으로서 행적은 그가 유능했다는걸 보여준다. [[영조]]도 말할 것 없이 유능했고. 헌데 이들 모두가 [[조선/왕사|왕]]이 되기 전에도 [[왕족]]으로서 대우를 똑바로 받으며 기본 예법이나 교양을 익힐 기회는 충분히 있었다. 철종만 여런저런 사유 등으로 이런 기회가 없었다.] 그러나 출생부터 즉위 가능성이 없다고 여겨지던 일반인에 가까운 [[방계]] [[왕족]]으로 19세까지 살던 철종에게 이런 복잡한 정치판을 개혁할 역량을 기대하긴 애초에 무리이다. 비유하자면 다른 사람들은 어렸을 때부터 개 빡세게 공부를 해서 들어가는 [[서울대 법대]]&[[서울대 의대]] 등에 중·고등학교 시절에 농사만 지은 19세 무학 청년을 억지로 넣어놓은 꼴이다. 철종과 마찬가지로 일반인 출신에 12살에 [[조선/왕사|왕위]]에 오른 [[고종(대한제국)|고종]]은 그래도 머리가 좋고 준비도 철저했던 막강한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존재가 있어서 괜찮은 편이었다. 거기다 12세라 아직 기회도 충분히 있었고. 준비도 전혀 안 하고 도와줄 가까운 사람도 전무한 사람이 [[조선/왕사|왕위]]에 올랐으니 역량이 부족할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치세 후반으로 갈수록 자포자기하듯 문란한 생활을 하며 정치에서 손을 땠던 것은 분명 [[명군]]이 아닌 [[암군]]의 모습이라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는데, 딱히 왕으로서 뭘 더 해볼 여지가 없는 상황에서 지나치게 가혹한 잣대를 들이미는 것이다. 명군이고 암군이고간에 왕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 지극히 제한되어있는 마당에, 이분법적인 평가를 들이미는 것은 비합리적일뿐더러 학술적으로 큰 의미도 없다. 오히려 지극히 취약한 권력기반을 가지고도 개혁을 시도라도 해봤다는 것을 어느정도 감안해줄 필요가 있다.[* 이는 선대 왕인 [[헌종(조선)|헌종]]도 마찬가지였다. 두 왕 모두 집권 후반으로 갈수록 문란한 성생활을 하며 정치와 멀어지다가 요절했다는 것이 공통점이다. 허나 [[헌종(조선)|헌종]]의 경우 정말 [[성욕|여색]]에 빠졌다기보다는 [[신 안동 김씨|안동 김씨]]의 전횡에 질려서 다음 후대만큼은 [[신 안동 김씨|안동 김씨 출신]] [[조선/역대 왕비|왕비]]에게서 자식을 보지 않겠다는 의지를 무언으로 표명했다는 말도 있고 또 저러면서도 나랏일은 나랏일대로 성실히 보았다. [[헌종(조선)|헌종]]은 친정 이후 꾸준히 [[왕권]] 회복을 시도했으며 [[1849년]](헌종 15년), 본인이 죽기 직전에는 외척들에게 넘어가있던 병권의 상당수를 회수했을 정도. 병권은 어느시대나 권력에 직결되어 있는 만큼 그만큼 [[헌종(조선)|헌종]]이 왕권강화를 위히 힘썼음을 알 수 있다. 특히 [[1849년]](헌종 15년)에는 병조의 수장인 병조판서나 오군영의 수장들을 모두 외척이 아닌 사람들로 앉히기까지 했다.] 종합해보면 [[조선/왕사|왕]]으로써의 역량이 아주 없던 것은 아니나 [[정조(조선)|정조]] 말년부터 터져 나온 [[조선]] 사회의 모순이나 문제점들을 수습해나가기에는 한계가 있었던 인물. == 어진 == ||<-2> [[파일:정부상징.svg|width=28]] '''[[대한민국의 보물|{{{#f39100 대한민국 보물 제1492호}}}]]''' || ||<-2> {{{#fff {{{+1 '''철종어진'''}}}[br]{{{-1 哲宗御眞}}}}}} || ||<-2>{{{#!wiki style="margin: -10px"; margin-top: -5px; margin-bottom: 16px" [include(틀:지도, 장소=국립고궁박물관, 너비=100%, 높이=100%)]}}}|| || '''{{{#fff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효자로 12, [[국립고궁박물관]] (세종로, 국립고궁박물관) || || '''{{{#fff 분류}}}''' || 유물 / 일반회화 / 인물화 / 초상화 || || '''{{{#fff 수량/면적}}}''' || 1점 || || '''{{{#fff 지정연도}}}''' || [[2006년]] [[12월 29일]] || || '''{{{#fff 제작시기}}}''' || [[1861년]]([[조선시대]])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철종어진.jpg|width=100%]]}}}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철종어진2.png|width=100%]]}}}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철종어진1.png|width=100%]]}}} || ||<-3> {{{#gold '''부산 용두산 대화재의 영향으로 절반이 타버린 철종의 어진들. 왼쪽부터 구군복본, 면복본, 원유관본이다.'''}}} || 왼쪽 어진은 [[1861년]](철종 11년)에 [[구군복]] 차림을 한 31살의 철종을 그린 [[어진]]으로, 현재까지 남아있는 것 중에서도 유일한 왕의 구군복 어진이라 [[예술]]성이나 [[역사]]성에서 상당히 중요한 [[그림]]이다. 이 어진은 [[2006년]] [[대한민국의 보물|보물]] 제1492호로 지정됐으며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오른쪽의 [[어진]]은 구군복 어진과 동시에 도사한 것이어서 강사포를 제외한 나머지 부분에서는 구군복본과 거의 차이가 없다. 가운데 어진의 경우 [[1852년]](철종 2년) 당시 22세였던 철종의 모습을 그린 면복본 어진이다. 비록 표제 부분이 중간중간 타버렸지만 남아있는 부분을 통해 이 어진이 철종의 어진임을 확인하는데는 무리가 없었다. 철종의 나이 31세 때인 [[1861년]](철종 11년)에 어진화사가 시행되었는데 이후 [[20세기]]에 들어 발발한 [[6.25 전쟁]]으로 인해 [[서울특별시|서울]]에 있던 수많은 [[왕실]] 문화재들을 [[부산광역시|부산]]으로 옮기면서 어진들도 함께 옮겨졌다. [[1953년]] [[6.25 전쟁|전쟁]]이 끝났음에도 [[이승만 정부|정부]]에서는 [[문화재]]들을 [[서울특별시|서울]]로 옮기거나 하는 등의 별다른 조치없이 그냥 [[부산광역시|부산]]에 계속 방치해 놔두고 있었다. 하지만 [[1954년]] '''[[부산 용두산 대화재|큰 불]]이 나면서 [[어진]]의 절반 가량이 타 버렸고'''[* [[http://rigvedawiki.net/r1/pds/chuljongart02.jpg|#]].], 남은 부분을 기반으로 [[1987년]]에 복원한 것이다. 철종의 [[어진]]은 [[화재]]로 인해 반 이상이 타버렸으며 [[순조]], [[효명세자]] 등 [[얼굴]] 부분까지 타면서 아예 복원이 불가능하게 된 다른 왕들보다는 그나마 다행인 편이지만 입 부분이 타 버렸다. 구군복 어진의 경우 진작부터 공개되어 왔지만 나머지 두 어진의 경우 훼손 상태가 심각하다 보니 남아있는 부분이나마 보존 처리만 마치고 그동안 [[국립고궁박물관]]의 지하깊은 수장고에 계속 보관되어 왔다가 [[2019년]] 하반기에서야 뒤늦게 공개되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f4t8Ftg.jpg|width=100%]]}}}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KEpEoln.png|width=100%]]}}} || || {{{#gold '''《선원보감》에 실린 철종 초상화'''}}} || {{{#gold '''《열성어진》에 실린 철종 초상화'''}}} || 《선원보감》과 《열성어진》에 남아있는 간략한 철종의 [[초상화]]가 있는데 위의 어진과 비교해보자. 얼굴을 실제 [[어진]]과 자세하게 비교하자면 과도하게 치켜세운 [[눈썹]]과 눈을 빼면 전체적인 분위기는 비슷하다. [[태조(조선)|태조]], [[세조(조선)|세조]], [[정원군|원종]], [[영조]]와 함께 가장 뚜렷한 [[외모]]의 어진을 남긴 [[임금]]이다. 어진을 자세히 보면 [[경산일록]]에서 철종의 외모에 대한 기록에서 "이마가 각지고 콧마루가 우뚝하며 두 광대뼈에는 귀밑털이 덮여 있다. 귀의 가장자리는 넓고 둥글었으며 입술은 두꺼웠고 손은 컸다" 라는 기록과 거의 일치하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09&aid=0003731022|#]] === 외부 링크 === * [[https://ko.wikipedia.org/wiki/철종_어진|한국어 위키백과: 철종 어진]] *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820967&cid=46660&categoryId=46660|한국민족문화대백과: 철종어진]] *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976481&cid=46702&categoryId=46739|국립고궁박물관: 철종 어진]] *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2043604&cid=42840&categoryId=42842|답사여행의 길잡이 7 - 경기남부와 남한강: 방화수류정]] *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5806958&cid=42856&categoryId=42856|대한민국 구석구석: 방화수류정(동북각루)]] *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3350114&cid=58249&categoryId=58249|수원화성 테마관: 방화수류정]] *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346870&cid=40942&categoryId=33383|두산백과: 철종 어진]] === 대한민국 보물 제1492호 === *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VdkVgwKey=12,14920000,11&pageNo=1_1_1_0|문화재청 홈페이지: 철종어진 (哲宗御眞)]] >《철종어진》은 오른쪽 1/3이 소실되었지만 남아 있는 왼쪽 상단에 “予三十一歲 哲宗熙倫正極粹德純聖文顯武成獻仁英孝大王”이라고 적혀 있어 이 어진이 철종 12년([[1861년|1861]])에 도사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규장각에서 펴낸 『御眞圖寫事實』에 의하면, 李漢喆과 趙重黙이 주관화사를 맡았고, 金夏鍾, 朴基駿, 李亨祿, 白英培, 白殷培, 劉淑 등이 도왔다고 한다. 당시 1개월여에 걸쳐 絳紗袍本과 軍服本을 모사했으나 현재 구군복본만 현전한다. > >이 《철종어진》은 임금이 '''具軍服'''으로 입고 있는 초상화로는 유일한 자료이다. 그리고 군복의 화려한 채색, 세련된 선염, 무늬의 정세한 표현 등에서 이한철과 조중묵 등 어진 도사에 참여한 화원 화가들의 필력을 확인할 수 있는 점 등에서 중요성을 지닌다. > >ㅇ 규격(세로x가로) : 202×93㎝ == 가계 == 《선원보략》에서는 5남 6녀를 두었다고 나오지만 《전주이씨대종종약원》에서는 5남 7녀가 있다고 나온다. 반면, 《[[철종실록]]》과 《[[승정원일기]]》에서는 5남 4녀의 기록만 확인이 된다. 《선원보략》과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에서 [[영혜옹주]]는 철종의 넷째 딸로 적혀있다. === 친가([[조선/왕실|전주 이씨]]) === * 고조부 : [[영조]](英祖) 이금(李昑) * 고조모 : [[정성왕후]] [[달성 서씨|서씨]](貞聖王后 徐氏) * 증조부 : ^^([[추존]])^^[[효장세자|진종 소황제]](眞宗 昭皇帝) 이행(李緈) * 증조모 : ^^([[추존]])^^[[효순왕후|효순소황후]] [[풍양 조씨|조씨]](孝純昭皇后 趙氏) * 조부 : ^^([[추존]])^^[[정조(조선)|정조 선황제]](正祖 宣皇帝) 이산(李祘) * 조모 : ^^([[추존]])^^[[효의왕후|효의선황후]] [[청풍 김씨|김씨]](孝懿宣皇后 金氏) * '''부왕 : ^^([[추존]])^^[[순조|순조 숙황제]](純祖 肅皇帝) 이공(李玜)''' * '''모후 : ^^([[추존]])^^[[순원왕후|순원숙황후]] [[신 안동 김씨|김씨]](純元肅皇后 金氏)''' * '''형 : ^^([[추존]])^^[[효명세자|문조 익황제]](文祖 翼皇帝) 이영(李旲)''' * '''형수 : ^^([[추존]])^^[[신정왕후 조씨|신정익황후]] [[풍양 조씨|조씨]](神貞翼皇后 趙氏)''' * '''조카 : ^^([[추존]])^^[[헌종(조선)|헌종 성황제]](憲宗 成皇帝) 이환(李烉)''' * '''조카 : [[고종(대한제국)|고종 태황제]](高宗 太皇帝) 이명복/이재황/이형/이희(李命福/李載晃/李㷩/李熙)''' * '''첫째누나 : [[명온공주]](明溫公主)''' * '''첫째동서 : 동녕위(東寧尉) 김현근(金賢根)''' * 양외조카 : 김병찬(金炳瓚) * '''둘째누나 : [[복온공주]](福溫公主) * '''둘째동서 : 창녕위 (昌寧尉) 김병주(金炳疇)''' * '''셋째누나 : [[덕온공주]](德溫公主)''' * '''셋째동서 : 남녕위 (南寧尉) 윤의선(尹宜善)''' * 양외조카 : 윤용구(尹用求) * '''친증조부 : ^^([[추존]])^^[[사도세자|장조 의황제]](莊祖 懿皇帝) 이선(李愃)''' * '''친증조모 : ^^([[추존]])^^[[혜경궁 홍씨|헌경의황후]] [[풍산 홍씨|홍씨]](獻敬懿皇后 洪氏)''' * '''친조부 : [[은언군]](恩彦君) 이인(李䄄)''' * '''친조모 : [[전산군부인]] [[전주 이씨|이씨]](全山郡夫人 李氏)''' * '''친부 : [[전계군|전계대원군]](全溪大院君) 이광(李㼅)''' * '''친모 : [[용성부대부인]] [[염(성씨)|염씨]](龍城府大夫人 廉氏)''' === 외가([[염(성씨)|용담 염씨]]) === * '''외증조부 : 염덕석(廉德碩)''' * '''외증조모 : 부인 [[김해 김씨|김씨]](夫人 金氏)''' * '''외조부 : 증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贈 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領議政) 염성화(廉星華)''' * '''외조모 : 증 정경부인 [[지(성씨)|지씨]](贈 貞敬夫人 池氏)''' * '''외삼촌 : 염보길(廉鎬寬)''' * '''외숙모 : 부인 [[광산 김씨|김씨]](夫人 金氏)''' * '''이모 : 부인 [[염(성씨)|염씨]](夫人 廉氏)''' * '''이모부 : 김경영(金敬永)''' === 처가([[신 안동 김씨|안동 김씨]]) === * '''장인조부 : 목사(牧使) 김인순(金麟淳)''' * '''장인조모 : 정부인 [[평산 신씨|신씨]](貞夫人 申氏)''' * '''장인 : 영돈령부사 증 의정부 영의정 영은부원군(領敦寧府事 贈 議政府 領議政 永恩府院君) 김문근(金汶根)''' * '''장모 : 흥양부부인 [[여흥 민씨|민씨]](興陽府夫人 閔氏)''' * '''처남 : 예조판서 한성부판윤 효정공(禮曹判書 漢城府判尹 孝貞公) 김병필(金炳弼)''' === 배우자 / 자녀 === * '''정비 : [[철인왕후|철인장황후]] [[신 안동 김씨|김씨]](哲仁章皇后 金氏)''' * 아들 : [[원자(왕족)|원자]] [[이융준]][* 생몰기간 : [[1858년]] [[10월 17일]] ~ [[1859년]] [[4월 23일]].][* 신시(申時, 오후 3시~5시)에 [[원자(왕족)|원자]]가 [[창덕궁 대조전]]에서 탄생했다. - '''《[[철종실록]]》 10권, 철종 9년([[1858년]], 청 함풍(咸豊) 8년) 10월 17일 (기미) 1번째기사.''' [[https://sillok.history.go.kr/id/kya_10910017_001|#]].][* 진시(辰時, 오전 7시~9시)에 [[원자(왕족)|원자]]가 졸서했다. - '''《[[철종실록]]》 11권, 철종 10년([[1859년]], 청 함풍(咸豊) 9년) 4월 23일 (계해) 1번째기사.''' [[https://sillok.history.go.kr/id/kya_11004023_001|#]].] * '''후궁 : [[귀인 박씨(철종)|귀인]] [[밀양 박씨|박씨]](貴人 朴氏)''' * 아들 : 왕자(王子)[* 생몰기간 : [[1854년]] [[7월 10일]] ~ ? ][* 아들을 낳은 [[귀인 박씨(철종)|궁인 박씨]]를 귀인으로 봉작하게 하다. - '''《[[철종실록]]》 6권, 철종 5년([[1854년]], 청 함풍(咸豊) 4년) 7월 10일 (정미) 1번째기사.''' [[https://sillok.history.go.kr/id/kya_10507010_001|#]].] * 후궁 : [[귀인 조씨(철종)|귀인]] [[조(성씨)|조씨]](貴人 趙氏) * 아들 : 왕자(王子)[* 생몰기간 : [[1859년]] [[10월 13일]] ~ [[1859년]] [[10월 13일]].][* [[귀인 조씨(철종)|궁인 조씨]]가 아들을 낳았다. - '''《[[철종실록]]》 11권, 철종 10년([[1859년]], 청 함풍(咸豊) 9년) 10월 13일 (기유) 1번째기사.''' [[https://sillok.history.go.kr/id/kya_11010013_001|#]].][* 제2후궁인 [[귀인 조씨(철종)|귀인 조씨]]는 [[1859년]](철종 10년) [[10월 13일]]에 철종의 3남을 출산했으나 당일에 잃고, 다시 4남을 출산했으나 역시 일찍 죽었다. - 《전주이씨대동종약원》.] * 아들 : 왕자(王子)[* 1861년 1월 15일 ~ ? ][* 인시(寅時, 새벽 3시~5시)에 [[귀인 조씨(철종)|귀인 조씨]]가 아들을 낳았다. - '''《[[철종실록]]》 13권, 철종 12년([[1861년]], 청 함풍(咸豊) 11년) 1월 15일 (갑진) 1번째기사.''' [[https://sillok.history.go.kr/id/kya_11201015_001|#]].] * 후궁 : [[귀인 이씨]](貴人 李氏)[* 《전주이씨대동종약원》에서는 귀인 이씨로 적혀있지만 《선원보략》과 《[[조선왕조실록]]》에서는 궁인 이씨로 적혀있다. 철종의 6녀를 낳은 궁인 이씨와 동일인물인지는 불명이다.] * 아들 : 왕자(王子)[* 생몰기간 : [[1862년]] [[윤달|윤]][[8월 8일]] ~ [[1862년]] 11월.][* 미시(未時, 오후 1시~3시)에 궁인(宮人) 이씨(李氏)가 남아(男兒)를 낳았다. - '''《[[철종실록]]》 14권, 철종 13년([[1862년]], 청 동치(同治) 원년) 윤8월 8일 (무자) 1번째기사.''' [[https://sillok.history.go.kr/id/kya_11308108_001|#]].][* 제3후궁인 귀인 이씨는 [[1862년]](철종 13년) 윤8월 8일에 철종의 제5남을 출산했으나 4개월만에 잃었다. - 《전주이씨대동종약원》.] * '''후궁 : [[숙의 방씨|숙의]] [[온양 방씨|방씨]](淑儀 方氏)''' * 딸 : 왕녀(王女)[* 생몰기간 : [[1851년]] ~ [[1853년]] [[3월 20일]].][* 傳曰, '''宮人方氏生女, 今爲三歲([[숙의 방씨|궁인 방씨]]가 낳은 딸이 지금 3살인데)''', 昨日酉時, 又爲生女, 護産等節, 依例擧行 - '''《[[승정원일기]]》 2539책 (탈초본 123책), 철종 4년([[1853년]], 청 함풍(咸豊) 3년) 2월 22일 정유 5/24 기사.'''][* 계축년([[1853년]], 철종 4년) [[3월 20일]], [[숙의 방씨]]가 낳은 3살된 딸 아기씨가 오시(午時, 오전 11시~낮 1시)에 세상을 떠났으므로 (중략) - 《선전관청일기(宣傳官廳日記)》.] * 딸 : 왕녀(王女)[* 생몰기간 : [[1853년]] [[2월 21일]] ~ ? ][* 傳曰, 宮人方氏生女, 今爲三歲, '''昨日酉時, 又爲生女(어제 유시(오후 5시~7시)에 또 딸을 낳았으니)''', 護産等節, 依例擧行 - '''《[[승정원일기]]》 2539책 (탈초본 123책), 철종 4년([[1853년]], 청 함풍(咸豊) 3년) 2월 22일 (정유) 5/24 기사.'''] * '''후궁 : [[숙의 범씨]](淑儀 范氏)''' * '''딸 : [[영혜옹주]](永惠翁主)''' * '''사위 : 금릉위(錦陵尉) [[박영효]](朴泳孝)''' * '''후궁 : [[숙의 김씨(철종)|숙의]] [[김해 김씨|김씨]](淑儀 金氏)''' * 딸 : 왕녀[* 생몰기간 : [[1856년]] [[7월 5일]] ~ ? ][* 傳曰, '''宮人金氏生女''', 護産之節, 依例擧行 - '''《[[승정원일기]]》 2581책 (탈초본 124책), 철종 7년([[1856년]], 청 함풍(咸豊) 6년) 7월 5일 (경신) 5/28 기사.'''] * '''후궁 : 궁인 이씨(宮人 李氏)'''[* 《전주이씨대동종약원》에서는 6녀와 7녀를 낳았다고 적혀있지만《선원보략》에서는 철종의 6녀와 5남을 낳았다고 기록되어있다. 《전주이씨대동종약원》에는 5남을 낳은 이씨와 6녀를 낳은 이씨는 다른 인물이지만 《선원보략》에 5남과 6녀를 낳은 이씨는 동일인물인지 별개의 인물인지는 불명이다.] * 딸 : 왕녀(王女)[* [[1858년]] [[10월 13일]] ~ [[1858년]] [[10월 15일]].][*A 제8후궁인 궁인 이씨는 철종의 6녀 옹주를 [[1858년]](철종 9년) 10월 13일에 출산했으나, 3일만에 잃고 뒤에 7녀를 출산했으나 또한 기르지 못했다. - 《전주이씨대동종약원》.] * 딸 : 왕녀(王女, 생몰년도 미상)[*A] * '''후궁 : 궁인 박씨(宮人 朴氏)''' * 딸 : 왕녀(王女)[* 생몰기간 : [[1858년]] ~ ? ][* 제7후궁인 궁인 박씨는 직첩이 없었고 철종의 5녀 옹주를 낳았으나 기르지 못했다. - 《전주이씨대동종약원》.] * '''후궁 : 궁인 남씨(宮人 南氏)'''[* 《전주이씨대동종약원》에서만 기록되어있는 [[후궁]]이다.][* 제9후궁인 궁인 남씨는 출산한 바도 없다. - 《전주이씨대동종약원》.] 그나마 오래 살아 옹주작호를 받고 혼인까지 한 [[영혜옹주]]를 제외하면 다들 작호를 받기 전(7세~9세 이전)에 [[사망]]했다. == 여담 == * 강화도 시절에 대해 흥미로운 기록이 있다. [[가톨릭]] 신부 [[최양업]]의 편지에 따르면 민간에 알려진 바로는 철종이 친척 집에서 종 노릇도 해봤고 매양 주인에게 채찍으로 맞았다고 한다. >현재의 임금님은 사냥꾼으로 불렸고, 자기 친척 집의 종 노릇을 했습니다. 장날이 되면 가장 값싼 일꾼 노릇을 했고, 인정머리가 털끝만큼도 없는 주인의 채찍을 거의 매일 맞았습니다. > >[[헌종(조선)|전 임금님]]이 [[죽음|승하]]함에 따라 군인들 한 패거리가 [[강화도]]에 몰려가서 그를 [[철종(조선)|현재 임금님]]으로 모셔왔습니다. 그런즉 [[조선왕조]]의 창업 이래 500년 역사상 [[조선/왕실|왕가]]에 이와 비슷한 사례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왕족의 공개된 수치와 치욕을 정화할 필요가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청나라|중국]] [[황제]]의 권위로 그러한 불명예를 척결하고 [[조선]] [[조선/왕사|왕]]에게 영예(榮譽)를 회복시켜 주기를 청하는 사신을 중국 황제에게 보낸 것입니다. >---- >- '''[[최양업]] 토마스 신부가 프랑스인 르그레주아 신부에게 보낸 편지 中'''[* [[http://www.paxkorea.kr/bbs/zboard.php?id=3002&page=2&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49|#]].] 다만 최양업 신부가 조선 왕실과 긴밀한 관계를 맺은 것은 아니고 그렇기에 어디까지나 [[카더라]]를 인용한 것에 불과하므로 전적으로 신뢰하기는 곤란하다. 당시에 그런 소문이 돌았다는 것은 사실이더라도 그 소문의 신빙성은 의심스럽다는 것이다. 실제 [[귀양]] 제도에 대해 살펴보면 이는 말이 안 되는 이야기임을 알 수 있다. 지방 [[관청]]에서 관리하고 식량을 대주고 동향을 보고하는 사람이 항상 있었는데 이를 보수주인(保授主人)이라고 한다. '''유배'''의 형벌을 받은 이들을 감시 혹은 관리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철종은 친척이 극히 귀해 후에 외가 친척을 사칭한 인간도 생겼을 정도인데 무슨 친척 집에서 일한단 말인가. 다만, 식량을 대주는 대신 일을 시키거나 혹은 제대로 식량을 대주지 않아서 일을 해야 하는 경우는 많았다. 마치 [[고구려]]의 [[미천왕]]과 인생 역전이 비슷한데 어쩌면 미천왕의 얘기에서 차용했을 수도 있다. 물론 당시 조선에 이런 소문이 돌았다는 것은 당시 사람들에게 철종이 어떻게 인식되었는지를 보여주는 단서라 할 수 있으며 신빙성과는 별개로 나름 의미있는 [[사료(역사)|사료]]라고 할 수 있다. 강화도 시절은 당대 백성들 사이에서도 유명했는지 덕지덕지 살이 붙어서 과장된 루머가 돌아다니고 있었던 것. 잠저시절을 겪어본 [[조선/왕사|왕]]은 많아도 농민까지 겪어본 왕은 철종이 유일하다. * [[강화도]]에서 엉겁결에 [[조선/왕사|왕]]이 되었다는 사실과 빈농으로서 산 전력 때문인지 [[강화도]]에서 자란 [[까막눈]] 왕으로 기억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출생지는 수도 [[한성부|한양]]으로 기초교육은 받았기 때문에 [[문맹]]은 아니었다.《[[조선왕조실록]]》의 행장에 의하면 4세에 《[[천자문]]》을 이미 배웠으며 즉위 이후 학업을 계속하기 위해 이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근년에 통감 2권과 소학 1권, 2권을 읽었다"고 철종 본인이 직접 이야기한 바 있다. 천자문 이야기는 행장에 기록된 것이라 4살에 배웠다는 것은 띄워주기였다 해도 즉위 시점에서 이미 공부한 상태였던 것은 사실이었다. 또한 [[유배]]당한 것은 14세가 되었을 때의 일([[1844년]], 헌종 10년)이고 [[1849년]](헌종 15년)에 [[조선/왕사|왕]]으로 즉위했기 때문에 실제로 [[강화도]]에서 산 기간은 겨우 5년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다만 14세부터 청년기를 [[강화도]]에서 보냈기 때문에 아주 억지스러운 수식어까지는 아니라고 볼 수도 있다. 보통 기억이 희미한 7~8살까지를 빼면 왕이 되기 전의 사실상 반을 [[강화도]]에서 보냈다고 볼 수도 있으니 말이다. 사실 14살부터 19살까지면 중1부터 고3 나이까지인데 이 시기를 농사하면서 지냈다면 그냥 농사꾼이나 다름없다. 《[[천자문]]》, 《통감》, 《소학》은 모두 초급 교육에나 쓰이던 교재들이라 19살 기준으로는 부족한 면이 많고 아버지의 사망이나 강화도로 유배되는 등의 사정으로 그 이상 나가지 못한 것은 물론 그나마 어렸을 때 배웠던 것도 많이 잊어버려 처음부터 다시 공부했다고 한다.[* 게다가 철종은 자신이 즉위하던 해에는 읽은 게 없다고 했다. 공부를 아주 안 한 건 아니지만 열심히 한 것은 아니며 [[조선/왕사|왕위]]와 멀었던 만큼 그래야 할 이유도 없고 농사지으며 살아야 했던 사정상 그러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흔히 알려진 대로 일자무식은 아니었지만 요즘으로 치면 초등학교 졸업에서 중학교 중퇴 후 공부를 오래 쉬다가 고3 나이 정도에 다시 중학교 [[검정고시]] 공부를 시작한 수준이니 한 나라를 통치하는 [[조선/왕사|군주]]로서는 확실히 부족한 면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왕족]] [[종친]]을 교육하는 기관이 있었지만 [[성종(조선)|성종]] 때의 [[구성군]] 사건 이후로 직계 왕족의 5대손까지는 관직에 오를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왕족]] [[종친]]들은 학업을 열심히 하지는 않아, 《통감》, 《소학》은 커녕 천자문조차 제대로 떼지 못하는 이들도 있었다고 한다. [[왕족]]이기 때문에 관직에 나가지 않아도 먹고 살 걱정은 없었기 때문. 특히 [[조선/왕사|왕위]]에 가까운 [[왕족]]일수록 영특하다거나 공부를 열심히 한다거나 해서 쓸데없이 찍히는 일[* 당시 [[신 안동 김씨|안동 김씨]] 세도가에서 "[[왕족]]이 똑똑하면 명이 짧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 [[방계]] [[왕족]] 정도는 속속히 솎아 쳐낼 수 있던 [[신 안동 김씨|안동 김씨]]의 세력이 얼마나 강한지 알 수 있는 말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똑똑한 [[왕족]]은 견제를 많이 받았다는 말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이 말은 굳이 [[세도정치]] 시기가 아니라 어떤 시대라도 똑같았다. 왕 자신 역시도 자신의 [[조선/왕사|왕위]]를 넘볼 만한 쓸데없이 똑똑한 [[왕족]]은 기왕이면 없는게 낫다.]은 삼가야 했을 테니 더더욱 그런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 로맨티시스트라는 얘기가 있는데, [[강화도]] 시절 ‘양순’이라는 이름의 하층 계급 여인과 결혼을 생각할 만큼 가까운 사이였다고 한다. 그러나 철저한 신분제 사회인 조선에서 천한 [[신분]]의 양순이 궁에 들어간들 [[무수리]] 정도밖에 할 수 없는 처지라 바로 철종의 [[후궁]]이 되는 건 불가능했다. 심지어 이런 내용의 [[야사(역사)|야사]]까지도 있는데 양순에 대한 [[상사병]]으로 괴로워하는 철종을 보다 못한 [[조선/왕실|조선 왕실]]이 몰래 사람을 보내 양순을 [[독살]]했다는 것. 나중에 이를 안 철종은 비탄에 잠겨 국사도 멀리한 채 황음의 나날을 보냈다고 한다. 독살인지 어떤지는 얘기마다 다르지만 일찍 죽었다는건 공통적으로 전해진다. 다만, 적어도 [[독살]] 부분은 조선 왕실에 대해 무지한 이들이 만들어낸 이야기일 가능성이 높다. 왜냐면 [[조선]]에서 [[조선/왕사|국왕]]은 초월적인 존재라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이라면 신분을 무시하고 [[후궁]]으로 삼을 수 있었다. 너무 미천해 바로 [[후궁]]으로 삼을 수 없다면 [[궁녀]]로 삼은 뒤 [[성관계|승은]]을 내리면 되고, 이나마도 경우에 따라선 생략이 가능하다.[* [[태종(조선)|태종]]의 [[후궁]]이었던 [[가희아]]는 본디 천한 [[기생]] 신분이었지만 [[궁녀]]가 되는 과정조차 전혀 없이 갑자기 [[혜선옹주]]로 봉해지며 [[후궁]]이 되었다.] [[영조]]의 생모 [[숙빈 최씨]]가 [[무수리]] 또는 [[천민]] [[궁녀]] 출신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자. [[조선]] 초기의 일이기는 하나 [[태종(조선)|태종]]의 [[후궁]]인 [[효빈 김씨]]나 [[세종(조선)|세종]]의 [[후궁]]인 [[신빈 김씨]]는 [[노비]] 출신인데도 정1품 빈까지 되었다. [[경종(조선)|경종]]~[[영조]] 시대 이후로 법적으로는 [[궁녀]]는 [[노비]]만이 될 수 있었으므로 천한 신분은 이유가 되지 않는다.[* [[혜경궁 홍씨]]가 [[양인]]을 궁녀로 뽑았다가 [[사도세자]]가 [[영조]]에게 야단을 맞은 일도 있다. 물론 [[순조]] 대 공노비 혁파 등으로 [[노비]] 출신 수급은 차츰 어려워졌고 철종~[[고종(대한제국)|고종]] 시대에 특히 지밀, 침방, 수방의 궁녀들은 대부분 [[중인]] 출신이었으며 집안에서 대를 이어 [[궁녀]]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 위에서 인용한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편지에서 볼 수 있듯이 철종의 [[강화도]] 시절에 대한 과장된 소문은 이미 당대에도 돌아다녔다는 것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이 일화가 사실이라면 천한 신분이라서가 아니라, 철종이 [[조선/왕사|왕]]이 된 뒤 정신없어서 못 챙기고 있다가 부르려고 보니 병에 걸려 이미 죽었다거나 하는 등 그녀가 입궁하지 못했던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다. [[조선]] 후기는 [[헌종(조선)|선왕 헌종]]의 7촌(재종숙)이고, [[강화도]]에서 농사짓던 촌놈인 철종이 즉위할 정도로 [[왕족]]이 귀해진 상태라 더는 찬밥 더운밥 가릴 상황이 전혀 아니었다. [[조선/왕사|왕]]이 마음에 들어해 후사를 볼 가능성이 높은 여자가 있다면 [[노비]]고 뭐고 알 바 없고 [[역적]] 후손이라도 족보 세탁이건 뭐건 해서 어떻게든 데려오려고 날뛸 법한 시점이었다. 그런데도 못 데려왔다는 건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거나, 이야기 자체가 거짓말이라고 봐야 한다. * 특히 신분을 감안해보면 당시 실권을 쥐고 있던 [[신 안동 김씨|안동 김씨]] 입장에서도 전혀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천한 신분이기에 결국 [[신 안동 김씨|안동 김씨]]와 맞서기에는 불가능하고, [[후궁]]의 자식들은 모두 태어나는 즉시 [[조선/역대 왕비|왕비]]의 자식으로 양자 입적된다. 신분상 모든 [[후궁]]의 자식들은 [[조선/역대 왕비|왕비]]의 자식이 되는 셈. 그런 이유로 [[수렴청정]] 또한 [[후궁]]은 절대로 할 수 없으며, 더 중요한 사실은 [[적자]]가 없다거나 [[요절]]했다거나 하지 않는 이상 웬만한 경우에서는 [[적자]]가 [[조선/역대 왕세자|세자]]가 되어 [[조선/왕사|다음 왕]]이 된단 것이다. 그 관점에서 본다면 [[신 안동 김씨|안동 김씨]] 입장에서는 양순이 [[후궁]]이 되어 철종의 아들을 낳았다 한들 [[조선/역대 왕비|왕비]]가 아들 하나 낳기만 기다리면 된다. 양순이 낳은 자식이 왕이 되어도 [[수렴청정]]은 어디까지나 생모가 아니라 [[조선/역대 왕비|왕비]]가 하니까 그것도 상관없다. 더 중요한 점은 양순이 낳은 자식도 후사를 얻기 위해선 결혼을 해야 하는데 '''그 아내를 안동 김씨에서 배출한다면?''' 덤으로 양순이 중전이 될 가능성은 0%인데 신분도 신분이지만 이미 숙종 시절에 후궁이 된 여자는 절대로 중전이 될 수 없게끔 되었다. * 물론 [[조선/왕사|왕]]의 나이가 점점 많아지는데 [[적자]]가 없으면 어쩔 수 없이 [[서자]]가 [[조선/역대 왕세자|세자]]에 책봉될 테고, 1번 세자로 책봉되면 죽거나 정말 큰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이상은 [[조선/왕사|왕위를 계승]]할 수 있다. 하지만 [[조선/왕사|왕위]]를 계승해도 역시나 천한 여자의 자식이라는 이유 때문에 [[영조|정치력과 능력이 비범하지 않은 이상]][* [[영조]]는 [[조선/왕사|정통성 문제]]를 자기 자신의 정치력과 능력으로 어찌어찌 해결했다.] [[신 안동 김씨|안동 김씨]]에게 휘둘리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신 안동 김씨|안동 김씨]]의 권세를 몰아내겠다고 [[조선/왕사|왕]]이 작정한다면야 가능은 하겠지만 그럴려면 상당한 결단력, 의지, 정치력, 배짱, 노력이 필요할 텐데 그러기가 어디 쉽나? [[헌종(조선)|헌종]]의 전례가 있으니만큼 유난증을 떨었을 가능성도 없잖아 있지만 그렇다고 그런 극단적인 수를 쓸 정도까지는 아니다. 막말로 진짜 저런 스토리가 벌어졌다면 위험해지는건 [[신 안동 김씨|안동 김씨]]일 수도 있다. 명분이 궁색하기는 하겠지만 [[조선/왕사|왕]] 몰래 누굴 죽이는 것 자체가 일단 불법이고 [[인조]]와 [[민회빈 강씨|강빈(소현세자빈)]]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조선시대]] [[조선/왕사|왕]]은 정말 꼭지--야마--가 확 돌아버리면 없는 [[명분]]과 근거를 지어내서라도 누구 하나 죽여버리는건 일도 아니었다. 그러니까 철종이 정말 꼭지가 돌아서 누구 하나 족쳐야 한다면 당시 [[신 안동 김씨|안동 김씨]]의 수장급 인사인 [[김좌근]] 같은 인물은 당연히 위험, 죽기라도 하면 나머지 [[신 안동 김씨|안동 김씨]]들은 같은 꼴 되기 싫으니 버로우를 타야 하고 그만큼 철종의 권력은 강화되고 다시 [[신 안동 김씨|안동 김씨]]들은 버로우행. 살더라도 일단 명목상 [[조선/왕사|왕]]을 정말 꼭지돌게 만들었기에 또 꼭지가 돌까봐[* [[경종(조선)|경종]]이 [[조선/역대 왕세자|세자]] 시절에 승지가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경종(조선)|경종]]을 꽤나 기다리게 만든 일이 있었다. 그런데 그 날은 무슨 일인지 조용하던 [[경종(조선)|경종]]이 꼭지가 돌아서 늦게 온 승지도 사관도 저멀리 꺼지고 여섯 승지들 모두 나문(심문)하라며 있는성질 없는성질 내며 화를 크게 버럭버럭 내었는데, 하도 조용한 사람이 갑자기 화를 내니 신하들이 깜짝 놀라서 엎드려 벌벌 떨기만 했다. 원래 조용히 지내던 사람이 화나면 더 무서운 법이라고 철종 역시도 마찬가지로 꼭지가 돌아버리면 갭 때문에 더욱 충격이었을 것이다. 그나마 [[경종(조선)|경종]]은 늦게 온 정도에서 화를 냈지 위의 [[야사(역사)|야사]]처럼 [[조선/왕사|왕]]이 [[짝사랑]]하던 사람이 다른 사람 손에 죽었다? 화 정도가 아니라 [[옥사]]로 이어질 수 있다. [[경종(조선)|경종]] 역시도 [[왕자]] 시절, [[조선/역대 왕세자|세자]] 시절, [[조선/왕사|왕]]이 되고도 초기에는 어벙한 모습을 보였고 [[노론]]으로부터 대놓고 무시당했으나 [[신임옥사]]를 일으켜 자기를 무시하던 [[노론]] 일파를 일격에 숙청한 바 있다.] 조심스러워질 수 밖에 없다.[* 애초에 이 시기의 안동 김씨들도 철종을 대놓고 무시하지는 않았고 자기네들 권력과 큰 관계가 없어보인다 싶으면 철종이 하고자 하는대로 존중해주는 면도 있었다. 예시로 조병현은 풍양 조씨의 일원으로써 헌종 재위기 말년에 안동 김씨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이 때에는 헌종의 비호로 넘어갔지만 헌종이 죽고 철종이 즉위하면서 결국 사사되었다. 그러나 조병현은 불과 몇년 뒤, 그것도 철종 재위기에 철종의 의사로 사면된다. 안동 김씨 입장에서는 나름대로 사면하기 껄끄러운 면이 있음에도 그래도 자기네들 권력에 직접적인 영향은 안 간다고 봤는지 왕이 행하고자 하는대로 해준 것.] 오히려 철종 입장에선 진짜 이런 일이 터진다면 "오냐 내가 늬들 하는거 가만히 보고 있었는데 이런 일까지 벌였겠다? 내가 만만히 보이는가 보지? '''안 그래도 늬들 하는 꼬라지가 맘에 안 들었는데''' 늬들 나한테 잘 걸렸다. 너네들 쫓아내고 '''나도 왕 다운 왕이 돼보자'''" 라고 나오면 골치아파진다. 이 사건을 빌미로 철종이 왕다운 왕이 돼보자고 안동 김씨와 전면전을 걸어버리면 안동 김씨 입장에서는 딱히 맞설만한 명분도 없고[* 사랑하는 상대가 대단한 사람도 아니고 일개 천출인데다 아무것도 안 했는데도 독살이든 뭐든 죽여버린다는 극단적인 수를 썼다면 철종이 이들보다 더 극단적이고 분별없는 짓을 저지르지 않은 이상 다른 이들 입장에선 "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게 신하로서 할 짓이냐?" 라는 반응이 돌아올 것이다. 이 시대 왕에게는 자식을 많이 낳아 후손을 번창시켜야 한다는 의무가 있는데다 안 그래도 철종이 왕이 된 것도 정조 계열이 독자로 근근이 대를 이어오다 단절되었다. 제3자 입장에서 본다면 명분은 철종에게 있다.] 게다가 철종이 타 가문들에게 "나와 함께 안동 김씨를 조져주면 너희들에게도 한 자리 주겠다."고 딜까지 걸어버리면 진짜 힘든 싸움이 된다. * [[농민]]으로 살았기 때문에 그 때 먹던 모주([[막걸리]])를 너무 그리워해 [[조선/역대 왕비|왕비]]인 [[철인왕후|철인왕후 김씨]]가 [[신 안동 김씨|친정]]에 부탁해 구해 올렸다는 [[야사(역사)|야사]]가 있다. 이 이야기는 웹툰 《[[조선왕조실톡]]》에도 나온다. * [[경기도]] [[파주시|파주]] 근방에 염종수라는 한 남자가 살고 있었는데 [[조선/왕사|새 임금]] 철종의 외가 집안이 [[염씨|용담 염씨]](龍潭 廉氏)라는 것을 알았다. 그걸 보고 '용담 염씨는 자신의 [[본관]]인 [[파주시|파주]](坡州) 염씨(廉氏)에서 갈라져 나온 것이기 때문에 엄격히 따지면 [[철종(조선)|상감마마]]와 자신은 한 뿌리가 된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그 다음에 철종의 외할아버지인 [[염성화]](廉成化)의 가계(家系)가 자신의 가계에서 갈라져 나간 것으로 [[족보]]를 위조하는 엄청난 짓을 꾸민 다음 본인이 철종의 외숙부가 된다고 거짓 [[상소]]를 올렸다. 친척 하나 없어 항상 외로움을 느끼던 철종은 염종수 부자를 대궐로 불러와 잘 대접해고 벼슬도 주었다. 그렇게 잘 살게 된 염종수는 [[완전범죄]]를 꾸미기 위해 철종의 외할아버지 묘 앞에 비석을 세운 다음 거기에다 원래의 용담(龍潭)이라는 글자 대신에 자신의 본관인 파주(坡州)라고 새겨 넣는 짓까지 벌였으며, 그 뒤 본인의 권세를 이용해서 부귀영화를 누리고 살았다. 하지만 꼬리가 길면 밟힌다고 했던가? 나중에 [[강화도]]의 파주 염씨 성을 가진 '''진짜 외숙부'''인 염보길(廉輔吉)이 그 사실을 밝혀내면서 결국 염종수는 기군망상죄로 목이 달아났고 그의 아들은 [[노비]]로 전락했으며 외할아버지의 묘도 다시 용담으로 복귀되었다. 철종의 진짜 외숙부인 염보길은 실제로 [[강화도]]에서 하인으로 살고 있었는데 염보길은 [[신 안동 김씨|안동 김씨]]의 세력이 무서워서 차라리 하인으로 사는 게 낫다고 생각해 이후 평생 벼슬길에 나서지 않은 채로 조용히 살았다고 한다.[* 사실 왕족도 그렇지만 왕의 외척도 왕족처럼 태어나면서 부귀가 주어지는 자리는 아니다만 그래도 조용히 살기만 해도 자리보전은 가능하다. 왕 입장에선 외척 또한 친위 세력인데다 어쨌든 친척은 친척이니 외면하진 않을 것이고 이 야사에 따르면 철종은 자기 친척은 잘 대해주는 만큼 먹고 살 걱정은 던다.] * [[조선]] 후기의 [[임술민란|농민 봉기]]가 철종의 재임기에 제일 심했는데, 저 멀리 [[미국]]도 비슷한 시기에 남북 갈등기를 겪는 큰 고통을 겪었다. 즉, [[조선]]과 [[미국]] 모두 비슷한 시기에 큰 어려움을 겪은 셈. 그래서 결국 이 왕 치세기의 말에 [[미국]]은 [[남북전쟁]]이 발발했다.[* 그래서인지 이 왕과 얼추 비슷한 시기에 [[재커리 테일러|임기를]] [[밀러드 필모어|보냈던]] [[프랭클린 피어스|미국]] [[제임스 뷰캐넌|대통령들은]] 평가에서 전부 하위권 라인에 속해있다. 다만 이 왕 재임기의 거의 말년에 [[에이브러햄 링컨|미국 대통령을 지냈던 분]]은 1위이긴 하지만.] 다만 두 국가의 차이점이라면 미국은 국력이 성장하던 시기였고 조선은 국력이 떨어지던 시기라는 차이가 있다. == 대중매체 == 출신 배경 때문에 여러 대중매체에서 철종은 '[[조선/왕사|왕]]이 된 어리버리한 [[듣보잡]] [[방계]] [[왕족]]' [[이미지]]로 자주 묘사된다. 그나마 긍정적으로 묘사할 경우 [[강화도]] 생활 등에서 [[백성]]들의 삶을 접하고 이를 통해 나름대로 국정을 어떻게 다스려야 한다는 생각은 있지만 본인의 능력과 제반 조건이 너무 부족해서 실의에 빠지고 [[정치]]에 뜻을 잃게 되는 모습으로 등장하기도 했다. === [[소설]] === * 소설가 [[김동인]]의 작품인 《운현궁의 봄》(1933)[* 현대 [[흥선대원군]]의 이미지를 구축한 것으로 알려진 작품.]에서는 다소 긍정적인 묘사로 나온다. [[강화도]] 생활을 통해 백성들에게 [[조선/왕사|어진 임금]]이 되어야 한다는 의식은 있고 실제로도 그렇게 행하려 노력하는데, 당시의 노대신인 [[정원용]]에게 민생의 어려움을 꾸짖는 장면에서 이 모습이 잘 나온다. 하지만 당시의 국정은 자신의 의지만으로는 해결이 안된다는 점 때문에 결국 정무에서 손을 놓게 된다. * 소설가 [[유오디아]]의 역사 [[로맨스 소설]]인 《[[임금님의 첫사랑]]》(2016)에서는 소설의 주인공인 철종으로 등장한다. === [[영화]] === * [[1963년]] 개봉한 영화 《강화도령》에서는 배우 [[신영균(배우)|신영균]]이 연기했다. 국내에서 철종에 대해 만들어진 첫 영상 창작물이다. [[야사(역사)|야사]]에 알려진 철종의 첫사랑을 처음으로 영상화했으며 작품은 한국영상자료원 [[유튜브]]에서 무료로 공개했다.[* [[https://youtu.be/2AqLtVks5Nc|링크]].] * [[1968년]] 개봉한 영화 《[[대원군(영화)|대원군]]》에서는 배우 김동훈이 연기했다. * [[2014년]] 개봉한 영화 《[[군도: 민란의 시대]]》의 [[나레이션]]으로 극 중 시대적 배경을 '철종 13년([[1862년]])'으로 설명하지만 시대적 배경으로 언급만 될 뿐 등장하지는 않는다. === [[드라마]] === * [[1975년]] [[동양방송|TBC]] 드라마 《이조여인 500년사 - 임금님의 첫사랑》[* 철종의 첫사랑을 소재로 한 드라마로 《[[조선왕조 오백년]]》의 [[신봉승]]이 집필하고 [[김재형(PD)|김재형]]이 연출.] 편에서는 배우 [[김세윤]]이 연기했다. * [[1982년]] [[KBS]] 드라마 《[[풍운(KBS)|풍운]]》에서는 배우 [[임혁]]이 연기했다. * [[1990년]] [[MBC]] 드라마 《[[조선왕조 오백년]]》 - [[대원군(MBC)|대원군]]에서는 배우 [[최수종]]이 연기했다. 극 중에서는 "양순이([[신윤정(배우)|신윤정]])가 보고 싶다"고 [[궁궐]]을 나가려고 하다가 병사들이 가로막자 담을 넘으려던 모습을 보였고 내관들은 [[지존]]인 왕의 몸을 함부로 건드릴 수 없어서 그저 말로만 "아니되옵니다"라고 안타까워 했다. 결국 양순이의 죽음으로 그야말로 삶을 놔버린 것처럼 방탕에 빠졌다. 병으로 쓰러질 무렵 [[안동 김씨]]에게 비웃듯이 "과인이 죽으면 참 당황하겠지?" 마치 자신의 죽음을 알고 있는듯이 묘사됐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철종(닥터 진)|[[파일:external/pds.joinsmsn.com/thumb_tgc2x201207171024181016.jpg|width=100%]]]]}}} || || {{{#gold '''《[[닥터 진]]》의 철종'''}}} || * [[2012년]] [[MBC]] 드라마 《[[닥터 진]]》에서는 배우 [[김병세]]가 연기했다. 과도한 [[스트레스]]로 [[대인기피증]]에 걸려서 약까지 거부할 정도로 매우 쇠약한 모습을 보인다. [[과호흡 증후군|과호흡증]]에서 자신을 구해준 진혁([[송승헌]])에게는 마음을 열지만 얼마 안 가서 맹장에 급성 [[충수염]]에 걸려서 몹시 괴로워한다. [[역사]]에 맞게 흘러가려면 여기서 죽어야 할 목숨이지만 진혁의 노력으로 [[조선/왕실|왕실]] [[종친]]들의 [[피]]를 수혈받아가며 [[수술]]에 성공한다. 이후 [[고종(대한제국)|명복]]([[이형석(동명이인)|이형석]])을 [[신정왕후 조씨|조 대비]]([[정혜선(배우)|정혜선]])의 [[양자(가족)|양자]]로 들이라고 직접 윤허하기까지 한다. 자세한 내용은 [[철종(닥터 진)|해당 문서]]로. * [[2017년]] [[채널A]] 드라마 《[[천일야사]]》 - '철종의 외삼촌을 사칭한 천하의 사기꾼 염종수' 편에서 등장. 배우는 [[재연배우]]인지라 미상이다. 여기서 철종은 외로운 [[조선/왕사|임금]]이라는 사실이 강조된다. [[술]]에 취한 철종과 염종수가 방에서 허물없이 누워있는데 염종수가 "만약에 자신이 가짜 외숙부면 어떻게 하겠냐"는 질문에 철종은 "자신도 어차피 가짜 왕이니 상관없다, 가짜 숙부더라도 곁에 있어달라"고 말한다. 이에 염종수는 "가짜 왕의 가짜 외삼촌"이라며 웃는데 얼핏 보면 호탕한 웃음 같으면서도 결국은 [[철종(조선)|왕]]을 기만한 비웃음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역사대로 염종수가 [[사형]]되는 결말로 끝나[* 염종수가 기억하는 어린 시절 철종의 모습이 다른데다가 그 무엇보다도 기억 속 진짜 외숙부는 [[복숭아]] [[알레르기]]가 있었는데 염종수는 거리낌없이 [[복숭아]]를 먹었다.] 이 장면이 더 씁쓸하게 느껴진다. * [[2020년]] [[TV CHOSUN|TV조선]] 드라마 《[[바람과 구름과 비(TV조선)|바람과 구름과 비]]》에서는 배우 [[정욱(1973)|정욱]]이 연기했다. 여주인공인 이봉련([[고성희]])의 아버지로 나오는데 정치에 뜻을 잃은데다가 몸이 안 좋아 [[종친]]에게 [[양위]]하려 한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이원범(철인왕후)|[[파일:철인왕후 이원범 스틸컷 2.jpg|width=100%]]]]}}} || || {{{#gold '''《[[철인왕후(드라마)|철인왕후]]》의 철종'''}}} || * [[2020년]] [[tvN]] 드라마 《[[철인왕후(드라마)|철인왕후]]》에서는 배우 [[김정현(1990)|김정현]]이 연기했다. 지금까지 묘사되었던 철종의 [[암군]] 또는 나약한 이미지와 다르게 [[개혁]] [[조선/왕사|군주]]이며, [[조선/역대 왕비|중전]] [[철인왕후|김소용]]의 도움을 받아 결말에는 [[역사]]가 크게 바뀌어 [[성군]]으로 존경받는다. 이에 따라서 [[묘호]]도 '[[철종]](哲宗)'에서 '철조(哲祖)'로 바뀐다. 자세한 내용은 [[이원범(철인왕후)|해당 문서]]로. * [[2007년]] [[MBC]] 드라마 《[[궁S]]》에서는 가수 [[세븐]]이 연기한 "영성공 이후'로 등장하는데, 철종을 [[모티브]]로 하여 만든 가공의 현대 등장인물이다. 한편 여자 주인공의 배역명은 '양순의'인데 철종의 첫사랑 '양순'에서 따왔다. === [[만화]] === * [[2017년]] 《툰드라쇼: [[조선왕조실톡]]》 : [[http://comic.naver.com/webtoon/detail.nhn?titleId=642598&no=259|252. 경운기를 탄 임금님]]에서는 개그맨 [[유병재]]가 연기했다. 자신을 모시러 온 사람들이 자신을 죽이러 오는 줄 알고 도망가는 모습이 묘사된다. ~~죽일꺼잖아! 죽일꺼잖아!~~ ~~배역이 배역인지라 은근히 보면 웃기다.~~ 여기서도 철종의 [[운명]]은 불행하기 그지 없는데 첫사랑 양순([[허안나]] 분)을 잊지 못해 궁으로 데려오려 하지만 [[신정왕후 조씨|조 대비]]가 보낸 [[자객]]에 의해 양순이 [[살해]]당한 이후에는 모든 의욕을 잃고 주색에 빠져 살다 슬하에 자식없이 [[요절]]했다. 단, 양순이 일화는 [[야사(역사)|야사]]에서 채용했다. === [[게임]] === * 《[[악튜러스]]》에 나오는 [[텐지]]의 [[모티브]]라고 한다. * 《[[빅토리아 3]]》에서 [[헌종(조선)|헌종]]의 [[조선/왕사|후계자]]로 고증이 되어있는데[* [[헌종(조선)|헌종]]이 자식을 낳아서 철종이 [[조선/왕사|후계자]]에서 쫓겨나거나 하진 않는다. <빅토리아 시리즈>는 인물보다는 국가 중심의 게임이라 크루세이더 킹즈 시리즈처럼 인물 기믹에 그렇게 세세하게 신경을 쓰지는 않는다.], 게임 시작 기준 5살이고 [[조선/왕사|왕]]인 [[헌종(조선)|헌종]]도 9살이라 [[헌종(조선)|왕]]과 [[조선/왕사|후계자]]가 모두 꼬꼬마들이다. 개발 버전 기준으론 [[헌종(조선)|헌종]]의 [[요절|단명]]이 구현되지 않아서 [[헌종(조선)|헌종]]이 [[장수]]를 할 경우 [[헌종(조선)|헌종]]보다 먼저 죽을 수도 있다. == 관련 문서 == * [[간정일록]] * [[경산일록]] * [[고종(대한제국)|고종 황제]] * [[고종실록]] * [[규사]] * [[김정희]] * [[김좌근]] * [[김조순]] * [[무비요람]] * [[부산 용두산 대화재]] * [[상계군 이담|상계군]] * [[순원왕후]] * [[순조]] * [[순조실록]] * [[신도일록]] * [[신 안동 김씨|안동 김씨]] [[세도 정치|세도]] * [[신정왕후 조씨|신정왕후]] * [[영혜옹주]] * [[예릉]]([[서삼릉]]) * [[용성부대부인]] * [[용흥궁]] * [[은언군]] * [[임술농민봉기]](진주민란) * [[조선/왕사]] * [[조선/왕실]] * [[조선 왕릉]] * [[전계대원군]] * [[종계변무]] * [[지구전요]] * [[철인왕후]] * [[철종실록]] * [[추보속해]] * [[풍양 조씨]] * [[「함풍년제」가 쓰여진 백자 청화 용 무늬 접시]] * [[헌종(조선)|헌종]] * [[헌종실록]] * [[효명세자]](익종·문조) * [[효장세자]](진종) * [[흥선대원군]] == 둘러보기 == [include(틀:대한제국 황실)] [include(틀:조선 왕실)] [include(틀:역대 조선 국왕 관련 문서)] [각주][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철종, version=164)] [[분류:철종(조선) ]][[분류:조선의 왕]] ||||||||||||||<:><#94153E>http://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5/58/Coat_of_Arms_of_Joseon_Korea.png?width=40 [br] '''{{{+1 [[조선/왕사|{{{#red 조선의 역대 국왕}}}]]}}}''' || ||<:> 24대 [[헌종(조선)|헌종]] 이환 ||<:> {{{+1 ←}}} ||<:><#94153E> '''{{{#yellow 25대 철종 이변}}}''' ||<:> {{{+1 →}}} ||<:> 26대 [[고종(대한제국)|고종]] 이희 || [include(틀:대한제국의 추존 황제)] ||<-3><:> [[파일:attachment/chuljongart01.jpg]][br]|| ||<:> '''[[묘호]]''' ||||<:> '''[[철종]](哲宗)''' || ||<:><|3> '''[[시호]]''' ||<|2> 조[br]선 ||<:> 희륜정극수덕순성문현무성헌인영효대왕[br](熙倫正極粹德純聖文顯武成獻仁英孝大王)[* 사후 시호.] || ||||<:> 희륜정극수덕순성흠명광도돈원창화문현무성헌인영효장황제[br](熙倫正極粹德純聖欽明光道敦元彰化文顯武成獻仁英孝章皇帝)[* 1908년 [[순종(대한제국)|순종]]에 의해 황제로 추존되면서 받은 시호] || ||<:> 청 ||<:> ~~[[충경왕|충경]]~~(忠敬, [[대한제국]] 때 [[황제]] 추존과 동시에 폐지) || ||<:> '''[[본관]]''' ||||<:> [[전주시|전주]](全州) || ||<:> '''[[능묘]]''' ||||<:> [[예릉]](睿陵) || ||<:> '''휘''' ||||<:> 이원범(李元範) / 이변(李𣅹) || ||<:> '''[[자(이름)|자]]''' ||||<:> 도승(道升) || ||<:> '''[[아호|호]]''' ||||<:> 대용재(大勇齋) || ||<:> '''[[고향|출생지]]''' ||||<:> 한성부 경행방(慶幸坊) 향교동(鄕校洞) 사저(私第) || ||<:> '''사망장소''' ||||<:> 창덕궁(昌德宮) 대조전(大造殿) || ||<:> '''배우자''' ||||<:> [[철인왕후|철인장황후]](哲仁章皇后) || ||<:> '''양아버지''' ||||<:> [[순조|조선 순조]] || ||<:> '''양어머니''' ||||<:> [[순원왕후]] 김씨 || ||<:> '''아버지''' ||||<:> [[전계대원군]] 이광(李㼅) || ||<:> '''어머니''' ||||<:> 용성부대부인 염씨(龍城府大夫人 廉氏) || ||<:> '''종교''' ||||<:> [[유교]] ([[성리학]]) || ||<:><|2> '''생몰[br]기간''' ||<:>[[음력]]||[[1831년]] [[6월 17일]] ~ [[1863년]] [[12월 8일]] || ||<:>[[태양력|양력]]||[[1831년]] [[7월 25일]] ~ [[1864년]] [[1월 16일]]. (32년 5개월 22일, 1만 1863일.) || ||<:><|2> '''재위[br]기간''' ||<:>음력||[[1849년]] [[6월 9일]] ~ [[1863년]] [[12월 8일]] || ||<:>양력||[[1849년]] [[7월 28일]] ~ [[1864년]] [[1월 16일]]. (14년 5개월 19일, 5285일.)|| [목차] == 개요 == {{{+3 哲宗}}} 조선 25대 임금으로, 국왕이 되기 전까지 어린 시절을 [[강화도]]에서 빈농으로 보낸 것으로 유명하다. 때문에 [[별명]]은 '''강화도령.''' == 강화 도령의 [[안습]]한 가족사 == 철종 이원범은 [[전계대원군|이광]]의 3남으로, 본관은 전주 이씨, 1831년 한성부 경행방(慶幸坊) 향교동(鄕校洞)에서 태어났다. 이원범은 [[사도세자]]의 직계후손인데 사도세자는 정조 말고도 서자가 몇명 있었고 그 중 한명이 [[은언군]]으로 이원범의 할아버지가 된다. 은언군은 여러명의 자녀들이 있었는데 그중 5남이 이원범의 아버지 '이광'이다. [[정조(조선)|정조]] 10년(1786년), 은언군은 [[홍국영]]과 역모를 꾸몄다는 혐의를 받아 아버지 이광을 비롯한 은언군 일가는 [[교동도]]로 귀양(유배)을 가게 된다. 거기서 40년을 넘게 살다가 1830년에 귀양에서 풀려나 한성에서 지내는 중 1831년 셋째 아들 이원범이 태어난다. 결국 철종은 [[숙종(조선)|조선 숙종]]부터 시작해서 첩의 아들인 [[영조]], 역시 첩의 아들인 사도세자, 첩의 아들인 은언군, 그 서자인 전계대원군의 서출인 아들이 된다. [* 이전에는 정실인 아들이라고 적혀있었으나, 서출이 맞다. 이광의 본부인 최씨가 1840년 사망했는데, 철종은 염씨소생으로 1831년생이기 때문, 정실 사망전에 계실을 들이는 것이 말이 되지 않는데다가 사후 추증도 본부인 최씨 (민진용의 역모때 사사된 이원경의 모친)만 그 일가를 추증하려던 것을 철종의 생모 염씨일가도 추증했단 기록이 있는걸로 봐서 빼박 서출이다. 따라서 철종은 영조의 서자의 서자의 서자의 서자가 된다. ~~서자의 4승~~] [* 사도세자는 세자였으므로 다르지 않냐고 할수도 있겠지만 고종이 장조로 추증하기 전까지는 사도세자는 죄인의 신분이고, 법통은 어디까지나 그의 이복형 진종에게 있으므로 서자의 4승이란 말도 틀린말이 아니다. 덕종도 성종이 추숭했지만 어디까지나 성종은 숙부인 예종의 법통을 이은 것이지 덕종이 왕조의 법통에 예종을 밀어내고 끼어든 것이 아니다. 따라서 순종황제까지 왕가의 법통은 진종으로 이어지는 것이고 사도세자가 장조로 추숭되었다고 해서 법통이 바뀐것은 아니게 된다.] 그야말로 방계 중 방계의 혈통이다. '''자신은 물론 아버지와 형의 군호도 없었고.''' 자신의 군호인 덕완군(德完君)은 궁궐에 들어와서 즉위 전날에 얻었다. (아버지나 큰형의 군호는 자기가 왕이 된후 올렸다.) 그래도 이원범은 어린시절에는 그의 형들과 함께 조선 왕가의 몇 안되는 남자 왕족으로 그럭저럭 살았다. 두 형들과 달리(1830년 아버지 이광이 귀향에서 풀려났을때 두형 이원경 (4살) 이경응 (3살)이었으니 뭐...별차이는 없다) 아버지 이광이 귀양에서 풀린뒤 [[한성부]]에서 태어났다. 이후 아버지가 10살 때 돌아가신일 말고는 큰 어려움 없이 지냈지만, 14살때인 1844년에 민진용(閔晉鏞)이 큰 형 [[이명]](李明, 혹은 이원경(元慶), 후에 회평군으로 추숭)을 왕으로 추대하려는 역모를 계획하면서 다시 기구한 운명이 된다. 큰 형 이명은 처형되고 이원범은 [[연좌제]]로 작은 형 이경응과 같이 교동도로 유배 되었으며, 얼마 못가 [[강화도]]에 다시 유배되었다. 이후 형과 함께 19살때까지 5년간 농사를 짓고 나무나 베던 원범은 강화도에서 왕족이 아닌 평범한 백성으로 생을 마칠 '''뻔'''했다. 하지만 일약 인생역전이 기다리고 있었다. == 일자무식의 왕? == 강화도에서 엉겁결에 왕이 되었다는 사실과 빈농으로서 산 전력 때문인지, 강화도에서 자란 [[까막눈]] 왕으로 기억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엄연히 출생지는 수도 한성이며, 유배당한 것은 14세가 되었을 때의 일(1844년). 1849년에 왕으로 즉위했기 때문에 '''실제로 강화도에서 산 기간은 5년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또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4세에 천자문을 이미 배웠으며(다만 행장에 기록된 말이라 과장일 가능성이 있다. 그럼에도 천자문을 다 깨친 것 자체는 사실이다.), 즉위 이후 학업을 계속하기 위해 이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근년에 통감 두권과 소학1,2권을 읽었다고 철종 본인이 직접 이야기한 바 있다. 세간에 알려진 대로 아예 일자무식은 아니었고 일반 사대부 자녀들의 초급교육 정도는 받았다. 다만, 소학이나 통감 모두 어렸을 때 읽었다가 관둬서인지 내용이 잘 기억나지 않아 처음부터 다시 뗐다고 한다. * 실제로 조선시대 왕족 종친의 경우 왕족 종친을 교육하는 기관이 있었지만, 관직에 오를 수 없었기 때문에[* [[성종(조선)|성종]] 때 '[[구성군]] 사건'으로 직계 왕족의 5대손까지는 관직에 오를 수 없게 되었다.] 학업에 열심히 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심한 경우, 자기 이름자도 제대로 못 쓰는 경우도 있었다고... 특히 왕위에 가까운 왕족일수록 영특하다거나 공부를 열심히 한다거나 해서 쓸데없이 찍히는 일은 삼가야 했을 테니 더욱 그러했으리라 생각된다. >현재의 임금님은 사냥꾼으로 불렸고 자기 친척 집의 종노릇을 하였습니다. 장날이 되면 가장 값싼 일꾼 노릇을 하였고 인정머리가 털끝만큼도 없는 주인의 채찍을 거의 매일 맞았습니다. >전 임금님이 승하함에 따라 군인들 한 패거리가 강화도에 몰려가서 그를 현재 임금님으로 모셔왔습니다. 그런즉 조선 왕조의 창업 이래 5백 년 역사상 왕가에 이와 비슷한 사례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왕족의 공개된 수치와 치욕을 정화할 필요가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중국 황제의 권위로 그러한 불명예를 척결하고 조선 왕에게 영예를 회복시켜 주기를 청하는 사신을 중국 황제에게 보낸 것입니다. > >- [[최양업|최양업 토마스 신부]]가 프랑스인 르그레주아 신부에게 보낸 편지 中 [[http://www.paxkorea.kr/bbs/zboard.php?id=3002&page=2&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49|#]] 다만 교양 수준과는 별개로, 귀양 시기 인생막장을 맛본 것은 사실로 보인다. 위에서 인용된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편지에 의하면, 민간에 알려진 바로는 친척 집에서 종 노릇도 해봤고 주인에게 채찍으로 맞았다고 한다. 다만 최양업 신부가 조선 왕실과 긴밀한 관계를 맺은 것은 아니고, 그렇기에 어디까지나 [[카더라]]를 인용한 것에 불과하므로 전적으로 신뢰하긴 곤란하다.[* 명목상 왕족인데 종노릇을 했다는것 자체가 이해되기 힘든데 왕족의 경우 역모에 연루되어도 그냥 이름이 거론된 경우에는 웬만하면 당사자만 죽는 정도지 형제가 피해를 봐도 철종처럼 귀양 정도인데다가 현실적으로도 친척 집에서 종을 했다가 사면되면(조선시대에서는 사면이 종종 일어났는데 사면은 왕이 시키고 왕의 입장에서는 왕족은 자기 식구들인 만큼 슬쩍 편들어줄 확률이 높다.) 자기를 종으로 부린 사람을 그냥 놔뒀을까? 게다가 당시 왕(헌종)은 아들도 없어 어차피 찾아봐야 제일 가까운 건 철종 아니면 경응 둘 중 하나였다. 제정신 나가지 않고서야 이 당시에 왕족을 종부리고 채찍질하는건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그 왕족이 사면되면 미운털 박히고 [[헌종(조선)|왕]]의 대가 끊겨서 왕이 되면 사약을 먹어야 하니까.] 물론 당시 조선에 이런 [[카더라]]가 돌았다는 것은, 당시 사람들에게 철종이 어떻게 인식되었는지를 보여주는 단서라 할 수 있다. 실제로 귀양제도에 대해서 알면 말이 안 되는 것으로, 지방관청에서 관리하고 식량을 대주고 동향을 보고하는 사람이 항상 있었다. 게다가 철종은 친척이 극히 귀해 후에 외가친척을 사칭한 일도 생겼을 정도인데 무슨 친척 집에서 일한단 말인가. 다만, 식량을 대주는 대신 일을 시키거나 혹은 제대로 식량을 대주지 않아서 일을 해야 하는 경우는 많았다. 마치 [[고구려]]의 [[미천왕]]과 인생역정이 비슷한데 어쩌면 미천왕의 얘기에서 차용했을 수도 있다. == 지존이 된 시골 청년 == [[순조|조선 순조]]의 손자이자 24대 왕인 [[헌종(조선)|조선 헌종]]이 23살이라는 젊은 나이로 급사했을 때, [[영조]]의 후손으로서 정통성을 가진 왕족은 이광의 아들들밖에 없었다. 당시 왕실의 최고 어른이었던 [[순원왕후]] 김씨는 이광의 아들인 이원범을 차기 국왕으로 지명했다.[* 이원범 위로는 작은형 이경응이 있었지만, 대체로 양자로 입적해 '나가는 집안'의 '남은 장자'는 그 집안의 대를 이어야 하므로 둘째가 양자로 들어가는 것이 관례였기 때문에 이원범으로 결정된 것으로 보인다. 비슷한 예로 역시 장남이 아니었던 [[선조]]와 [[고종]]이 있다.] * 이 시기에 직계왕통(혈통)이 자주 단절된 이유는 [[효종(조선)|효종]]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현종(조선)|현종]]은 효종의 [[외아들]]이였고, [[숙종(조선)|숙종]]은 현종의 외아들이었다. 숙종은 아들이 몇 명 있었지만 [[영조]] 빼고는 대가 끊기고, 영조에게 그나마 오래 살아남은 아들은 [[사도세자]]뿐이었다. 이렇게 효종 이후로 아들 들이 귀해지면서 결국 효종에서부터 내려온 직계 왕통은 철종을 끝으로 효종계가 단절된다. 철종이 즉위할 때 이미 직계 왕통에 가까운 왕족이 적었는데 철종이 후사 없이 사망했고, [[전계대원군]] 이광의 서자이자 철종의 이복형인 영평군에게도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신정왕후]] 조씨는 어쩔 수 없이 먼 방계 왕족 중에서 차기 국왕이 될 사람을 찾아야 했다. [* 여담으로, 영평군(이경응)은 1828년에 태어나 1901년에 죽어서 꽤 장수했지만, 자식 복은 없어서 생전에 양자, 양손자, 양증손자(!!!)까지 들여야했다. 양증손자로 들어온 사람은 이해승(1890~?)으로 [[조선귀족]] 작위를 받은 친일파이다. 이해승은 [[6.25 전쟁]]시 납북되었는데, 장남이 그 보다 먼저 죽었기 때문에 손자인 이우영(현 그랜드서울 호텔 사장)에게로 재산이 상속되었다. [[제1공화국]]은 6.25 이후 구황실 재산을 국유화했지만, 직계 황족이 아니었던 철종계의 재산은 유지될 수 있었고(물론 반민특위 해체도 한몫) 지금까지 나름대로 잘 사는 편이다. 친일파 재산 환수 특별법 제정 이후에는 치열하게 법정 다툼 중.] ||https://blog.knsu.ac.kr/_upload/blog/0000000023/201309222209110.jpg|| ||그림 - 강화도행렬도(江華島行列圖). 북한의 평양에 있는 조선미술박물관 소장.|| 자신을 왕으로 옹립하기 위한 행렬이 왔을 때, 철종은 자신의 할아버지나 큰형(이원경)이 역모에 몰려 죽은 전례가 있어서 이번엔 자신을 잡으러 온 줄 알고 산 속으로 도망쳐버렸다. 철종의 형(이경응, 서자라서 왕위 계승 후보에서 밀렸다.)은 도망가다가 다리가 부러지기도 했다. 이후 영의정 정원용의 설득과 주민들의 협조(?)로 결국 가마에 오른다. 그리고 철종이 왕이 된 후 강화도에 있던 그의 집은 왕의 잠저로서 '용흥궁(龍興宮)'이라는 이름으로 격상되었다. 본래는 초가집이었으나 철종이 즉위한 후 강화 유수가 오늘날의 형태와 같은 집을 지어 확장했다고 한다. 이 궁은 지금도 강화도에 남아 있는데 용흥궁 현판은 흥선대원군의 친필이라고 한다. 이원범이 즉위할 때 문제가 하나 있었는데 원범이 헌종의 항렬상 아버지, 즉 삼촌뻘이라는 거였다. 당시 원범이 즉위할 경우 종묘 제례 때 자신보다 [[항렬]]이 하나 낮은 헌종에게 절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했고 그것은 장유유서의 원칙에 어긋난다. 그러나 헌종과 같은 항렬의 왕손이 없는 상황이고 항렬 문제는 정통성에 비하면 솔직히 문제도 아니기 때문에 순원왕후는 원범에게 우선 덕완군이라는 군호를 내리고 바로 자신의 양자로 삼아서 덕완군 이원범을 법적으로는 효명세자(=익종)의 형제이자 헌종의 숙부로 만들었으며, 헌종의 가장 가까운 혈통인 원범이 차기 국왕이 되는 게 확실해졌으므로 더 이상 이 문제는 논의되지 않았다. 당장 철종의 승계에 항렬 어긋난다고 트집 잡는 사람은 없고 종사의 무궁한 복이라는 언급들만 있다. 대비의 분부에 어찌 태클을 걸겠느냐마는... 순조 이후 세도정치가 굳건해졌으니 똑부러지기보단 어리바리해서 구워삶기 좋은 왕이 대신들에겐 홍복이었을 것. == 임금 철종 == 자신이 [[안동 김씨]]인 순원왕후 김씨조차도 또 다시 안동 김씨를 왕비로 들이는 일을 반대했지만, 다른 안동 김씨의 압력에 유야무야되었고, 결국 순조, 헌종과 마찬가지로 안동 김씨의 일문인 김문근의 딸을 왕비로 삼고 김문근은 국구가 되어 권력을 휘두른다. 즉위 시점에 이미 19세의 청년이었던 데다가 여러모로 공부한 바도 있었고, 즉위 후 제법 군왕다운 위엄을 보였기에 수렴첨정 3년차인 1852년부터 왕의 친정(親政)이 시작되었다. 어릴 적부터 서민들의 민생고를 직접 눈으로 본 철종은, 초기에는 여러 개혁정책들을 능동적으로 추진하려고 했으나 세도 가문들의 비협조 속에서 대부분 불발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이미 순조 대에 일어난 일이지만, 딱히 제왕학을 교육받지 않아 현실 정치에 어둡고 정통성 면에서도 좀 꿀렸던 철종의 국정 장악은 쉽지 않아 안동 김씨 일파의 전횡(專橫)을 막지 못했다. 따라서 삼정(三政)의 문란이 극도에 달하여 극심한 민생고를 유발, [[경상도]] [[진주시|진주]](晉州), 함경도 함흥(咸興), 전라도 [[전주시|전주]](全州) 등지에서 조선 역사상 최대 규모의 민란이 일어났다. 이를 '임술농민봉기(임술민란)'라 한다. 조정에서는 속출하는 민란을 근본적으로 수습하려는 의욕조차 보이지 못하고 있었다. [[임술농민봉기]]가 터졌을 때는 "우리 백성들 [[다 죽게 생겼다]] 이놈들아!"를 외치면서 [[삼정의 문란]]을 해결하기 위해 <삼정이정청>을 설치하고 제법 의욕적으로 일을 추진했으나, 안동 김씨와 그들의 나팔수 정원용 등이 "환곡 제도가 수백 년을 이어 내려왔는데 이제 와서 없애자니 애석한뎁쇼? 급하게 없앴다가 부작용이 나면 어쩔까요?"라고 슬슬 딴죽을 걸었고, 그 사이에 농민봉기가 대부분 정리되자 "어떻게든 되겠지" 식으로 흐지부지 되었다. 이러한 혼란 와중에 '말세론'이 면면히 퍼졌고, 교주 [[최제우]]가 창시하고 만민평등을 제창한 '[[동학]](東學)'의 등장한다. 그 외에 철종 때 일어난 사건 중 하나로 [[종계변무]] 사건이 있다. 종계변무란 명나라 사서에서 태조 이성계를 고려 말의 권신 [[이인임]]의 후손으로 써놓자 조선에서 이를 고치려 노력한다. 이후 큰 줄기의 일은 [[선조]] 때 해결되었으나 뒷일이 철종 대에 다시 불거진 것이다. 즉, 청나라의 어느 이름 없는 학자가 쓴 듣보잡 서적[* 정원경(鄭元慶)이 저술한 《이십일사약편(二十一史約編)》이다.]에 이런 잘못된 내용이 나온다는 것. 때문에 당시 사행사로 중국에 가있던 윤치수가 청나라 관리에게 고쳐달라고 한다. 하지만 청나라의 반응은 "그런 미미한 서적에 대해선 우리도 몰라요." 그런데 윤치수는 청나라 관리들도 모르는 이 책을 30권이나 찾아내 기어이 고치게 만든다. 이 사건으로 철종은 위에서 보듯 길고도 아름다운 시호를 획득하게 된다. 그런데 하지만 "[[주작#s-3|청나라 관리들도 모르는 책을 윤치수는 어떻게 구했을까?]]" 하는 부분에서 또 다른 의문을 사기도 한다. 여담으로 중국에 보내는 사행사에 왕족인 '경평군 이호'를 임명하였다. 이에 대해 숭실대 하정식 교수는 세도정치가들에 의해 사행 정보가 통제되고 왜곡되자 왕족을 직접 보내 정보를 얻어 보려고 노력한 것이라고 평가하였다. 물론 현실은 20대 애송이 왕족 하나 바보 만드는 건 세도 정치가들에게 쉬운 일이었다. 오히려 경평군을 통해 중국에 별다른 문제가 없다는 잘못된 인식만 가지게 되었다. 이후 경평군은 세도 정치가들에 의해 유배된다. == 임금님의 [[첫사랑]][* 1975년에 방영된 [[TBC]] 드라마 제목으로 실제로 철종의 사랑 이야기를 소재로 한 드라마다. 동명의 영화가 1960년대에 있었는데 이 영화는 철종과 관련이 없는 영화다.] == 로맨티스트라는 얘기가 있는데, 강화도 시절 ‘양순’이란 이름의 하층계급 여인과 결혼을 생각할 만큼 가까운 사이였다고 한다. 천한 신분의 양순은 궁에 들어간들 무수리 정도 밖에 할 수 없는 처지라 바로 철종의 후궁이 되는 건 불가능했다. 심지어 이런 내용의 야사까지도 있다. 양순에 대한 [[상사병]]으로 괴로워하는 철종을 보다 못한 조선 왕실은 몰래 사람을 보내 양순을 독살했다(!)는 것. 나중에 이를 안 철종은 비탄에 잠겨 국사도 멀리한 채 황음의 나날을 보냈다고 한다. 이 야사 일화는 조선 왕실의 시스템에 대해 무지한 이들이 만들어낸 이야기일 가능성이 높다. '''왕은 초월적인 존재라 신분에 관계없이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을 정식으로 후궁으로 삼을 권한이 분명히 있었다.''' 설령 신분이 미천해 바로 [[후궁]]으로 삼을 수 없다 치더라도, 궁녀로 삼은 뒤 승은을 내리면 된다. 당장 [[영조]]의 [[숙빈 최씨|어머니]]가 무수리 출신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자. 실제로 조선 초기의 일이기는 하나 태종의 후궁인 효빈 김씨나 세종의 후궁인 신빈 김씨는 노비 출신으로 정1품 빈까지 되었다. [[경종(조선)|경종]]-[[영조]] 시대 이후로 법적으로는 궁녀는 노비만이 될 수 있었으므로 천한 신분은 이유가 되지 않는다.[* [[혜경궁 홍씨]]가 궁녀를 양인으로 뽑았다가 [[사도세자]]가 영조에게 야단을 맞은 일도 있다. 물론 순조 대 관노비 혁파 등으로 노비 출신 수급은 차츰 어려워졌고, 철종~고종 시대, 특히 지밀, 침방, 수방의 궁녀들은 대부분 중인 출신이었으며 집안에서 대를 이어 궁녀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 일화가 사실이라면 천한 신분이라서가 아니라 병마에 걸렸다던가, 역적의 후손 등 그녀가 입궁하지 못했던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다. 게다가 왕의 후계자가 귀해지던 조선 후기는 찬물 더운물 가릴 시점이 아니었다.[* 당장에 선대 왕인 헌종의 7촌이라는 어마어마하게 먼 촌수인 철종이 왕이 된 걸 상기하자.] 또한 농민으로 살았기 때문에 그때 먹던 모주([[막걸리]])를 너무 그리워해 중전이 친정에 부탁해 구해 올렸다는 야사가 있다. == 이른 죽음과 그 뒷이야기 == 철종은 어디까지나 안동김씨 세력들의 꼭두각시 허수아비 왕으로, 실권이 없어 왕이라도 왕 같지 않다는 자조감과 복잡한 궁중 예법에 질려버렸고,[* 그럼에도 그는 사면 문제에 한해서는 자기만의 권한 수준으로 했는지 김노경의 경우 대간+대신이 반대했음에도 사면시켰고 홍인한(대리청정 반대했다가 정조가 죽여버렸다.)을 사면시키려다가 신하들이 반대하자 물러났다가 철종 9년 원자가 탄생하자 이 분위기에 편승해 사면시켰는데 때가 때인지라 아무도 반대하지 않았고 심지어는 철종 초반기에 안동 김씨의 압력으로 죽인 조병현을 철종 4년에 사면시켰는데 안동 김씨는 반대하지 않았다. 이를 두고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왕도 무언가는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고 추측했다.] 여색과 술로 시간을 때운다. 그러다 보니 농사로 인해 튼튼해진 체력이 급속히 무너져버렸고 철종은 재위 말기에 잔병치레로 골골하다가 결국 1863년 33세라는 한창 젊은 나이에 병으로 사망하고 만다. 그의 죽음에 [[안동 김씨]]는 혼란에 빠졌으며, '''모두 후계 문제에 정신이 팔려 왕의 죽음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5남 6녀를 두었으나 어릴 적에 모두 죽고 영혜옹주만이 살아남아 개화파의 거두이자 나중에 '''[[친일파]]'''가 되는 [[박영효]]와 혼인했다. 하지만 영혜옹주 역시 박영효와 결혼하고 3개월 만에 14살의 어린 나이로 요절했다. 결국 철종도 요절하면서 왕통은 다시 단절되었다. 당시 왕실의 최고 어른이었던 [[신정왕후]] 조씨는 [[흥선대원군|흥선군]]의 차남 명복을 차기 국왕으로 지명했고, 이 왕족이 [[고종(조선)|고종]]이다. 철종의 뒤를 이은 고종은 철종과 핏줄상 남과 다를 바 없다. 이 둘은 인조에서 갈라져 나오는데 촌수로 18촌이다. 최초로 방계 승통한 선조가 정통성 컴플렉스 때문에 그렇게 히스테릭 했었지만 그도 선왕이었던 명종과 3촌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하지만 그 때는 이미 조선이 망하기 2보 직전이었던 때라 그런 것쯤은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았던 듯.[* 실제로 흥인군,흥선군계가 싫다고 해도 어차피 인조의 아들들의 후손으로 해야 하거나 원범의 서형인 경응의 아들로 해야 했는데 문제는 경응의 아들들은 서자인데 그럼 서자의 서자로 하는건데 이 경우는 정통성이 달리고 인조의 아들들의 후손들은 너무 멀다. 그나마 인조의 아들들의 후손이면서 그래도 양자로 은신군의 아들로 들어온 남연군의 아들들이 제일 나았다.] 그리고 전통적 방식으로 편찬된 조선왕조실록은 이 왕의 실록이 마지막이다. 이후의 고종 실록, 순종 실록은 [[경술국치]]이후 일제가 부정적으로 편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철종실록 역시 상당히 문제가 많다. 안동 김씨를 비롯한 세도 정치가들이 자신들에게 불리한 내용을 죄다 빼버렸고 유리한 건 부풀렸기 때문. 실례로 철종 12년 3월 27일 ~ 4월 23일의 기사는 2쪽 분량이다. 이어지는 5월 한달치 기사는 1쪽도 안 된다. 사실 철종실록 뿐만 아니라 세도정치기의 실록인 순조실록, 헌종실록도 이전까지(태조~정조)의 실록에 비해 기록이 상당히 부실하기는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그 시절을 정확히 알기 위해서는 [[승정원일기]]가 완역될 필요가 있다. 능은 [[경기도]] [[고양시]] [[서삼릉]] 경내의 예릉(睿陵)으로 [[철인왕후]] 김씨와 나란히 묻힌 쌍릉이다. 실록과 마찬가지로 철종의 예릉 역시 전통적인 조선왕릉 형태로 조성된 마지막 왕릉. == 어진 == ||<-2><:> [[파일:attachment/chuljong123.jpg|width=300]]||<-2><:> [[파일:attachment/cjfwhd2.jpg]]|| ||<-2><:> 반소된 어진 ||<-2><:> 선원보략 철종 초상화 || 철종 [[어진]]은 [[구군복]] 차림으로 그려진 유일한 [[어진]]이라 예술성이나 역사성에서 상당히 중요한 그림이다. 철종의 나이 31세 때인 1861년에 어진화사가 시행되었는데, [[한국전쟁]] 중 부산으로 [[어진]]들을 옮겨 놓았다가 불이 나면서 반이 타 버렸고[[http://rigvedawiki.net/r1/pds/chuljongart02.jpg|#]], 남은 부분을 기반으로 1987년에 복원한 것이다. 얼굴 부분까지 타면서 복원이 불가능하게 된 다른 왕들보다는 그나마 다행인 편. ~~[[유희관|모닥불러]]와 매우 닮았다.~~ 반대로 [[효명세자]]와 [[순조]]의 초상은 '''얼굴을 포함한 채 타버려서''' 복구가 불가능했다. 선원보감에 남아있는 간략한 초상화. 위의 어진과 비교해 보자. 코와 입, 턱수염은 어진을 보고 그린 듯 하여 비교적 비슷하나, 얼굴 주름살이랑 어진에 비해 과도하게 치켜 올라간 눈썹과 눈 때문인지 분위기가 영 달라보인다. == 창작물에서 == [[MBC]] [[드라마]] [[조선왕조 오백년]]에선 [[최수종]]이 연기했다. 이 드라마에서도 양순이 보고 싶다고 궁궐을 나가려고 하다가 병사들이 가로막자 담을 막으려던 모습을 보였고 결국 양순이의 죽음으로 그야말로 알게뭐냐 내 인생~ 방탕에 빠졌던 모습으로 나왔다가 병으로 쓰러질 무렵 안동 김씨에게 비웃듯이 "과인이 죽으면 참 당황하겠지?" 마치 자신의 죽음을 알고 있는듯이 묘사됐다. 그리고 그 이전인 1975년에서 1976년 사이에 철종의 첫사랑을 소재로 한 <임금님의 첫사랑>이라는 [[TBC]] 드라마에서도 주인공으로 등장했었는데 조선왕조 5백년의 신봉승 작가와 [[김재형]] PD가 연출했던 작품이다. 같은 [[MBC]] 드라마인 [[닥터 진]]에서는 [[김병세]]가 연기를 하는데, 과도한 스트레스로 대인기피증에 걸려서 약까지 거부할 정도로 쇠약한 모습을 보인다. [[과호흡증]]에서 자신을 구해준 [[진혁]]에게는 마음을 열지만 얼마 안 가서 급성[[충수염]]에 걸려서 몹시 괴로워한다. 역사에 맞게 흘러가려면 여기서 죽어야 할 목숨이지만, 진혁의 노력으로 종친들의 피를 수혈 받아가며 수술에 성공한다. 이후 명복이를 조대비의 양자로 들이라고 직접 윤허하기까지 한다. 주인공인 진혁과 우호적인 관계로 자세한 것은 [[철종(닥터 진)]] 참고. [[MBC]] [[드라마]] [[세븐]]이 주연을 맡은 [[궁S]]가 이 사람의 스토리를 모티브로 만든 드라마이다. 주연을 맡은 허이재의 이름이 양순. [[게임]] [[악튜러스]]의 주연 캐릭터 [[텐지]]의 모티브라고 한다. [[툰드라쇼]] 조선왕조실톡 유병재가 철종 역을 맡았다 출신 배경 때문에 창작물을 포함한 여러 매체에서 철종은 '''왕이 된 어리버리한 듣보잡 방계 왕족''' 이미지로 자주 묘사된다. == 관련 항목 == * [[간정일록]] * [[경산일록]] * [[규사]] * [[신도일록]] * [[임술농민봉기]] [각주] [include(틀:문서 가져옴,title=철종,version=164)] Load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