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변경문서 보기수정 내역 충혜왕 (버전 비교) [[분류:1315년 출생]][[분류:1344년 사망]][[분류:개성시 출신 인물]][[분류:고려 국왕]][[분류:원나라의 부마]][[분류:몽골계 한국인]][[분류:폐위된 군주]][[분류:대한민국의 객사한 인물]][[분류:의문사한 인물]] [include(틀:역대 고려 국왕)]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e6bd0e, #f9d537 20%, #f9d537 80%, #e6bd0e)" {{{#670000 '''충혜왕 관련 틀'''}}}}}}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include(틀:역대 고려 왕태자)] ---- [include(틀:고려의 왕자/선종 ~ 공양왕)] ---- [include(틀:고려사)]}}}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e6bd0e, #f9d537 20%, #f9d537 80%, #e6bd0e); color: #670000" '''고려 제28대 국왕[br]{{{+1 충혜왕 | 忠惠王}}}'''}}} || ||<-3>{{{#!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pan004710.jpg|width=100%]]}}} || ||<-3> {{{#670000 {{{-2 영릉 전경}}}}}} || || '''출생''' ||[[1315년]](충숙왕 2년) [[2월 22일]] || || '''즉위''' ||[[1330년]] [[2월 18일]] || ||<|2> '''사망''' ||[[1344년]] [[1월 30일]] (향년 28세) || ||[[원나라|원]] [[웨양시|악양현]][br](現 [[중국]] [[후난성]] [[웨양시]])|| || '''능묘''' ||[[영릉]](永陵)|| ||<|6> '''재위기간''' ||'''{{{#f9d537 고려 왕세자}}}''' || ||[[1328년]] [[2월]] 이전 ~ [[1330년]] [[2월 18일]] || ||'''{{{#670000 제28대 국왕}}}''' || ||[[1330년]] [[2월 18일]] ~ [[1332년]] [[3월 21일]] {{{-2 (2년)}}} || ||'''{{{#670000 제28대 국왕 (복위)}}}''' || ||[[1339년]] [[5월 3일]] ~ [[1344년]] [[1월 7일]][* 《[[고려사]]》에서는 충혜왕이 사망한 날까지 재위한 것으로 분류한 뒤 '유년칭원법'을 적용하여 충혜왕 후5년 기록까지 있지만 충혜왕 후5년에는 충혜왕이 2월에 죽었다는 기록과 사관의 평이 기록되어 있다. 1343년 음력 11월에 재판을 받기 위해 [[원나라]]로 끌려갔으며, 1343년 12월 계축일에 중국 남쪽 변방 게양현으로의 유배 판결을 받고 이듬해 초 사망했다. 여기서는 죄를 지어서 유배가 확정된 시점까지를 재위 기간으로 분류한다.] {{{-2 (3년)}}} || ||<-2>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본관''' ||[[개성 왕씨]] || || '''휘''' ||정(禎) || || '''부모''' ||부왕 [[충숙왕]][br]모후 [[공원왕후 홍씨|공원왕후]] || || '''형제자매''' ||3남 중 장남 || || '''배우자''' ||[[덕녕공주]], [[희비]] || || '''자녀''' ||3남 1녀 || || '''종교''' ||[[불교]] || || '''몽골식 이름''' ||부다시리(寶塔失里) || || '''시호''' ||'''[[고려]]:''' 헌효대왕(獻孝大王) ---- '''[[원나라|원]]:''' '''충혜왕(忠惠王)''' ||}}}}}}}}} || [목차] [clearfix] == 개요 == [[고려]] 제28대 군주. 묘호는 없고, 시호는 '충혜헌효대왕'(忠惠獻孝大王). 휘는 '정'(禎). [[몽골]]식 휘는 '부다시리'(寶塔失里). 제27대 [[충숙왕]]과 [[공원왕후 홍씨]]의 장남으로 제31대 [[공민왕]]의 형이다. == 시호 == '''충혜왕(忠惠王)'''이라는 [[시호]]는 [[원나라]]에서 내려준 시호다. '''충(忠)'''은 [[원 간섭기]]에 재위했던 고려 왕들한테 ''''너희는 신하니까 우리한테 [[충성]]해라' '''라는 의도로 원나라에서 준 글자이며, 뒤의 '''혜(惠)'''는 왕의 행실상 좋은 시호를 줄 수는 없으니 마지 못해 '''은혜 혜(惠)''' 자를 썼다고 한다. 굳이 충혜왕뿐만 아니라 [[한국]]이든 [[중국]]이든 시호에 '은혜 혜(惠)' 자가 들어간 군주는 인품만 좋을 뿐 심각하게 무능했거나 [[사이코패스]]였거나 적어도 둘 중 하나라고 봐도 무방하다.[* 의외로 원래 시법상 '은혜 혜(惠)'는 좋은 시호에 속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전국시대 진나라의 명군인 [[혜문왕]]과 조나라의 혜문왕.] 사실 충혜왕이 저지른 [[막장]] 짓을 보면 금나라의 [[해릉양왕]]이나 수나라의 [[수양제]]를 연상시키는데 대체 왜 시호에 '''양(煬)'''이 안 들어갔나 싶을 지경이다. 고려에서 독자적으로 올린 시호는 '''헌효대왕(獻孝大王)'''인데 뒤의 '''효(孝)''' 자는 효성스러웠다고 형식상 올리는 시호이며, 앞의 '''헌(獻)''' 자는 후한의 마지막 황제인 헌제나 고려 제14대 헌종과 같이 연약한 군주들에게 올린 시호였다. 자주적인 시호를 올린 고려 국왕은 [[공민왕]]인데 비록 자신의 형이지만 그의 악행이 커버가 안 돼서 이런 시호를 올린 것으로 보인다. 물론 충혜왕 따위와 고려 [[헌종(고려)|헌종]], 후한 [[헌제]]를 비교하는 것은 후자에 대한 크나큰 모욕이지만. == 생애 == [[세자]] 시절, 절 지붕 위의 새를 잡기 위해 [[절(불교)|불교 사찰]]에 [[방화]]를 한 뒤 도망가거나[* 당시 [[불교]]는 고려의 [[국교]]였다. 국가에서 잘못한 절이나 [[승려]]를 처벌하는 일은 있었지만 이런 거랑은 얘기가 다르니 논외. [[숭유억불]]을 행하던 조선에서조차도 절의 기물을 파손하거나 스님들에게 막말한 정도였지 절 자체를 방화를 한 [[선비]]들은 막장행동으로 취급받고 손가락질 받았다. 게다가 왕실 사람들도 사람인지라 불가에 귀의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개중에는 왕릉을 관리하거나 명복을 빌어준다는 명목으로 왕실과 직접적으로 비호받는 절들도 있어 이런 절들은 유생들이 얼씬을 못했다.] 불량배들과 어울려 걸핏하면 여자를 [[겁탈]]하고, [[술]]을 즐기는 만행을 저지르다가 결국 아들의 만행을 듣게 된 부왕인 [[충숙왕]]으로부터 >"예끼 이놈! 너는 왜 망나니 같은 행실만 하느냐!" 라고 욕을 들을 정도였으나 아버지 앞에서조차 매우 삐딱하게 굴며, 말로만 고친다 거짓말하고 실제로 고치지 않았다. 이후 즉위식을 치르러 고려로 오다가 마침 [[원나라]]로 가던 부왕과 [[황주군|황주]]에서 마주쳤는데, 화려한 옷차림으로 길 위에서 [[몽골인]]들의 [[유목민]]식 인사인 '호례'(胡禮)[* 선 채로 두 손을 모으고, 인사말을 한 다음 모은 손을 유지한 채 오른쪽 무릎을 땅에 꿇어앉고, 팔꿈치를 들어올리며 허리를 낮춰 절하는 유목민식 인사법이다. 부족에 따라서는 이때 들어올린 양쪽 팔로 상대방의 무릎을 감싸안아 윗사람에 대한 존경을 표하기도 했다. [[조선]] 건국 이후 《[[국조오례의]]》에서는 법적으로 금지되었다.]를 행하는 아들에게 >"네 아비[* 충숙왕 본인을 가리킨다. 충숙왕은 '''역대 고려 국왕들 중 고려인의 피가 가장 적은 왕'''이었는데도 이런 말을 한 것을 보면 나름 본인이 고려인이라는 자각이 뚜렷했던 것 같다.]와 [[공원왕후 홍씨|어미]]가 모두 고려 사람인데 어째서 내게 호례를 행하느냐? 그리고 옷은 또 뭐가 그렇게 사치스러우냐?" 라고 꾸짖는 충숙왕의 서슬퍼런 호통에 놀라서 울며 물러났다고 한다. 1330년 7월 무자일, 낭장 김천우가 원나라에서 돌아와 >"원 조정에서 전 정동행성 좌우사 낭중 장백상의 건의에 근거해 고려에 장차 행성을 설치할 것이라고 한다." 고 보고했다. 이에 충혜왕은 즉각 원나라 태사 우승상 킵차크 [[엘테무르]](연첩목아)에게 서한을 보내 >"장백상의 간교한 말을 믿지 말고, 황제의 의사를 잘 인도하여 고려가 스스로 풍속을 지키고, 조상 대대로 물려온 유업을 편안히 계승하게 해달라" 고 청원했다. 이에 엘테무르가 원 [[문종(원)|문종]](제8대) 투그테무르 칸에게 상주해 고려에 행(중서)성을 설치하려던 계획을 중지했다고 하는데 이는 충혜왕이 즉위한 이후, 최초로 이룬 업적이라 할 수 있다. ||<|13><:> 재위 원년(1331) || 정월 || 임진일 ||왕이 강음(江陰)에서 사냥판을 벌였다. || ||<|3><:> 2월 || 갑인일 ||왕이 서쪽 교외에서 사냥판을 벌였다. || || 무오일 ||공주의 생일을 맞아 연경궁(延慶宮)에서 잔치를 열었다. || || 을숙일 ||왕이 해주(海州)에서 사냥판을 벌였다. || || 3월 || 임인일 ||왕이 강음(江陰)에서 사냥판을 벌였다. || ||<|3><:> 4월 || 신유일 ||왕이 교외에서 사냥판을 벌였다. || || 계미일 ||왕이 폐행(嬖幸)들을 거느리고 연복정(延福亭)에 행차해 [br]물놀이와 격구(擊毬)를 구경했다. || || 신축일 ||왕이 폐행들을 거느리고 연복정(延福亭)에 행차하여 물놀이를 구경했다. || || 6월 || 기미일 ||왕이 광덕사(廣德寺)에 행차해 물놀이를 구경했다. || || 7월 || 병자일 ||왕이 수강궁(壽康宮)에 행차했다. || || 8월 || 병인일 ||왕이 마제산(馬堤山)에서 사냥판을 벌였다. || ||<|2><:> 10월 || 계해일 ||왕이 도성 서쪽 교외에서 사냥판을 벌였다. || || 병인일 ||왕이 수강궁(壽康宮)에 행차했다. || ||<|2><:> 재위 2년(1332) || 정월 || 병술일 ||밤에 왕이 폐인(嬖人) 양선(梁宣), 송명리(宋明理)[br] 등을 데리고 평복 차림으로 몰래 거리를 쏘다녔다.[* 夜 王率嬖人梁宣宋明理等 微行。쏘다녔다는 건 민심을 알아보기 위해서 [[잠행]]하러 간 게 아니라 그냥 놀러 나간 거다.] || || 2월 || 정미일 ||왕이 서해도(西海道)에서 사냥판을 벌였다. || 재위 원년 당시 사냥 기록이다. 놀랍게도 이것이 《[[고려사]]》 충혜왕 원년 기록과 2년째 기록의 전부이다.[* 2년째 기록에는 왕이 끌려가서 잡혀간 후의 이야기도 포함되어 있지만 왕으로써 한 역할은 저게 전부이다.] 참고로 사냥이라고 해서 그냥 [[활]] 하나 쥐어잡고 아무 산이나 가서 짐승 쏴잡는 수준을 생각하며, 그 정도 취미 생활이 뭐가 문제냐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평민이나 지배 계층이라도 어지간한 집안의 사람이라면 그렇겠지만, 국왕이 사냥을 나가면 경호를 담당할 많은 호위병, 국왕과 [[신하]]들 및 병사들에게 식사를 제공할 여러 [[요리사]], 식재료와 사냥 도구 및 기타 비품을 운반할 짐꾼, 사냥터에 허가받지 않은 사람들이 출입하지 못하게 경계를 설 경비병, 국왕의 사냥을 성공적으로 도와줄 전문 사냥꾼, 사냥감을 찾거나 몰아야 하는 몰이꾼 등 최소 수백 명의 수행원이 필요하다. 그 많은 인원이 움직이고 숙식하려면 당연히 급료, 물품 등의 경비가 장난아니게 든다. [[조선시대]]에 그려진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965750&cid=58106&categoryId=58111|사냥 풍속도]]를 보면 알겠지만 '''사냥이란 건 사실상 당시의 [[워크샵]]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즉, 왕이 사냥을 자주 갔다는 것은 그만큼 낭비가 심했고, 나가 놀기만 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나마 이 중간에 왕 노릇한 것이라곤 1331년 4월 경인일에 쌍성, 여진, 요양, 심양 등으로 흘러 들어간 경인 5도의 고려 백성들을 돌려달라는 글을 써서 원나라에 보낸 것이었다. 충혜왕은 왕이 되자마자 정사에는 관심도 없고, 여색을 지나치게 즐겼으며 [[내시]]들과 [[씨름]]이나 즐겼다. 심지어 그가 [[궁궐]]을 신축하는 과정에서 >"주춧돌 밑에 아이를 묻는다." 는 소문이 돌아 민심이 크게 흉흉해졌다. >5월 병인일(1339. 5. 8), 왕이 그 장인인 삼사좌사 홍융의 계실 황씨(黃氏)를 간음했다. >5월 경오일(1339. 5. 12), 왕이 서모인 수비 권씨(權氏)와 [[강간|정을 통했다]]. >5월(1339. 5. 13) 환관 유성의 처 인씨가 미인이라는 소문을 들은 왕이 구천우, 강윤충을 거느리고 그 집에 가서 유성더러 술을 올리라고 했다. 그 자리에서 유성이 왕에게 "전하께오서는 곧 복위하실 것이니 백성들을 잘 다독거리고 아낌없이 상을 내리소서."라고 진언했다. 왕의 속내가 그 처를 꾀어내는데 있는 것도 모르고, 유성은 왕이 자신을 진심으로 아껴준다고 착각하여 행동거지를 매우 조심스럽게 하니, 주위 사람들이 몰래 비웃었다. >8월 갑오일(1339. 8. 8), [[경화공주]]가 왕을 초대해 잔치를 열었는데 술자리가 파했으나 왕이 취한 체하며 궁궐로 돌아가지 않고 있다가 날이 저물자 공주의 침실에 들어가 [[강간|정을 통했다]]. >복위 2년 3월 초하루(1341. 3. 1), 예천군 권한공의 둘째 처 강씨가 아름답다는 소문을 듣고 호군 박이라적을 보내 궁중으로 데려오게 하였는데, 이라적이 먼저 간통한 사실을 알고 노하여 두 사람을 모두 때려 죽였다. >복위 2년 11월(1341. 11. 16)에는 날마다 사냥을 다니다 겨울이 되어 여의치 않자 내시 전자유의 집에 가서 그의 처 이씨를 강간했다. >복위 2년 11월(1341. 11. 25) 전에 때려죽인 바 있는 박이라적의 첩과 상간했다. >복위 4년 3월(1343. 3. 13) 재상 배전의 집에서 그의 처와 그 처의 아우 김오의 처를 번갈아 간음하기도 했다[* 그런데 한가지 웃기는 사실은 제멋대로 무수한 여자들을 강간, 간음했으면서도 본인 귀에 강간 사건이 보고되면 당사자를 무참히 죽여버리거나 귀양보냈다는 것이다. 만호 전찬이 이포공의 처를 강간하자 형장을 쳐서 귀양을 보냈으며, 불량배 봉골 등 3명이 임금이라고 거짓말을 하며 주부 공보의 집에 들어가서 그의 처를 간음하자 행성에서 잡아 죽였다. 또한 복위 4년 10월, 강간범 3명을 잡아 돌로 눌러 죽였다. 하지만 뭐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란다고 백성들은 그리 동조하지 않았는지, 오죽하면 현도효라는 자가 독약으로 충혜왕을 시해하려다 발각되어 처형당하는 사건도 일어난 적이 있었다(1341. 윤5. 18). 또 한 번은 신하 최원이 "진사 우물골이란 곳에 예쁜 처녀가 있습니다"라고 보고하여 충혜왕이 최원과 함께 그 집에 가서 처녀를 찾았더니, 주인집 노파가 "저의 집에는 본래부터 처녀가 없습니다"라고 하자 왕은 노파가 숨기는 줄 의심하였고, 동시에 최원이 자신을 속였는가도 의심하여 둘 다 죽였다.] 특히 충혜왕은 "여자는 신하의 아내든 뭐든 이쁘면 전부"라는 식으로 마구 겁탈을 했는데, 막장 행각이 절정에 달할 때는 장인의 후처와 부왕의 후처들을 겁탈했다. 충혜왕이 겁탈한 충숙왕의 아내는 2명으로 수비 권씨(壽妃權氏)와 당시 충숙왕의 정비(正妃)격인 위치에 있었던 [[경화공주]][* 충숙왕은 [[복국장공주]] 사후 [[조국장공주]]와 혼인했는데 조국장공주도 요절했고, 이후 혼인한 사람이 경화공주다. 조국장공주, 경화공주와는 정비의 자리를 채우기 위해 혼인한 것이기 때문에 [[조선시대]]식으로 표현하자면 경화공주는 두 번째 계비에 해당한다.]였는데 경화공주를 범할 때 모양이 진짜 막장이다. 《[[고려사절요]]》를 보면 왕위에 오른지 얼마 되지 않아 1339년 8월 8일, 경화공주를 위해 향연을 베풀었고 경화공주도 그 답례로 연회를 베풀었는데, 연회가 끝나자 충혜왕은 경화공주의 침실에 들어가 저항하는 경화공주를 송명리[* [[간신]]이었지만 나중에 임시로 고려의 국정을 맡은 원나라의 환관 고용보와의 친분으로 무사했다.] 등의 아랫사람들을 시켜 사지를 묶고 [[강간|범했다]]. 이후 경화공주가 원통하여 참지 못하고 원나라로 돌아가려고 말을 사려 했는데, 이때 충혜왕이 연안군 이엄(李儼)과 윤계종(尹繼宗) 등에게 명하여 마시(馬市)를 금하여 경화공주가 말을 구하지 못하게 했다. 이어 사신을 보내 원나라에 [[뇌물]]을 바치고, [[국새]]의 반환을 요청했는데 그때 충혜왕에게 겁탈당한 경화공주의 밀고로 1339년 8월 24일 조적 등 심왕 [[왕고(고려)|왕고]]의 일파가 국새를 영안궁에 감춘 뒤 군사 1,000명으로 반란을 일으켰지만, 충혜왕은 직접 기병대를 이끌고 이를 진압했다.('''조적의 난''') 그 뒤 경화공주를 부패로 악명이 높았던 만호 임숙의 집에 유폐시켰다. 개막장짓이 발각된 것은 얼마 후의 일로, [[원나라]]에서 국새를 가지고 온 사신 두린이 [[경화공주]]를 알현할 때였다. 두린은 [[황제]]가 하사한 술을 경화공주에게 바쳤는데, 경화공주는 술을 마시지도 못하고 수치심에 울기만 했다. 이에 다른 수하들을 모두 물리고 난 후에야 경화공주는 자신이 당한 수치를 두린에게 말하게 되었고, 1339년 11월 12일, 두린 일행은 충혜왕을 원나라로 압송했다. 충혜왕은 자신의 책봉을 허락한다는 희소식을 알리기 위해 찾아온 원나라 사신들에게 붙잡혀 원나라로 압송당하는 꼴을 당한 것이다. 끌려간 충혜왕은 투옥되었지만 자신을 고발한 [[환관]]이 실각한 후 1340년 3월, 대부(大夫) 메르키트 [[토크토아]](脫脫, 탈탈)가 원 혜종에게 상주한 덕분에 석방되었다. 충혜왕의 입지가 원나라에서 어느 정도였는지 보여주는 기록이다. 이것 외의 기록들은 링크를 참고하자.[[http://cafe.naver.com/booheong/64308|#]] 이처럼 흉악무도한 충혜왕에게도 [[담당 일진|무서운 사람]]이 한 사람 있기는 했는데, 원나라 사신 실덕이라는 자였다. 충혜왕이 한창 새 궁궐 건축에 열을 올리고 있는 시기에 몸소 담장에 올라가서 공사를 감독했고, 궁궐이 준공되자 각 도에서 칠을 거두어 들였는데 단청의 안료를 수송하는 기한을 늦추는 자가 있으면 몇 곱의 베를 벌로 받았다. 이로 인해 백성들은 근심과 원한에 시달렸고, [[소인배]]들이 이 때를 틈타 치부에 열을 올렸으며, 충직한 인사들은 배척당해 한 번만 바른 말을 하면 살육을 당하기에 두려워하여 감히 간언하는 자가 없었다. 이런 판국에 1343년 7월 원나라에서 오던 사신 실덕은 길거리에 나부끼던 방문에 >"[[나무]]와 [[돌]]을 기한 전에 바치지 않는 자는 [[베]]를 징수하거나 [[섬]]으로 [[귀양]]을 보낸다." 고 씌어진 것을 보고 대노하였다. 충혜왕이 [[농사]]가 한창인 시절에 백성들을 동원해 부역을 시키고자 혈안이 되어 있는 꼴을 보고, 실덕은 곧 귀국해 원 혜종에게 보고하려 했다. 이에 충혜왕은 채하중을 친히 보내 혜종에게 보고하지 말 것을 간청했는데, 일국의 왕이 타국의 일개 사신에게 비굴하게 간청해 선처를 구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를 보다 못한 환관 [[고용보]]와 [[기황후]]의 오빠이자 부원배 중 최고를 달리던 [[기철]]이 원 혜종에게 청을 넣어 원나라가 사신을 파견해 충혜왕을 호출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후 고용보는 [[조일신]]의 난 때 도망친 후 숨어 살다가 [[공민왕]]이 보낸 어사중승 [[정지상]]에 의해 처형당했다. 이유는 충혜왕 폐위에 일조했기 때문이었다. 기철 역시 공민왕 입장에서 가장 커다란 눈엣가시같은 존재였기 때문에 1356년에 일어난 [[병신정변]]때 피살당했으며, 자기 측근들과 [[행주 기씨]] 일가까지도 한꺼번에 거의 전부 죽임을 당했다.] 이 둘이 [[한국사]]에서 1, 2위를 달리는 유명한 [[간신배]]들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행동을 취했다는 것은 충혜왕의 막장성이 얼마나 대단한 것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사실 간신배라고 해도 국가 통치의 임무를 맡은 만큼 권력을 유지하려면 왕이 그냥 무능하기만 해야지 사람이기를 완전히 포기해서는 곤란했다. 사람이기를 포기한 막장 인성을 가진 폭군은 간신이 아무리 아부한다해도 그가 조금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가차없이 숙청하려고 들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충혜왕은 의외로 [[눈치]]는 빨랐는지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계속 출두를 거부했다. 그러자 화가 난 원나라 사신단의 도치(타적), 베시게(별실가), 나이주(내주) 등이 고용보로 하여금 충혜왕을 속여 그를 [[정동행성]] 내로 유인하는데 성공했다. 물론 처음부터 폐위시킬 생각으로 유인한 것이라 보자마자 사신들은 충혜왕에게 발길질을 했고, 환관 고용보는 이를 본체만체했으며, 사신단의 [[호위]]병들은 압송이라는 이유로 주위에 칼부림까지 해 사상자가 속출했다.[* 국왕을 호위하는 근위병들이 압송을 저지할 것이 뻔하기 때문에 칼부림이 일어나고, 사상자가 속출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이 날이 1343년 11월 22일([[음력]]) 갑신(甲申)일, 1343년 12월 9일([[태양력|양력]])이었다('''정동행성 사변'''). [[http://db.history.go.kr/KOREA/document.do?recordId=kr_036_0090_0100_0030|이에 따라 직무 수행이 불가능하게 되어 왕권이 정지되었다.]] 시종을 드는 사람이 없고, 그를 증오한 원나라 사신들이 시종을 드는 사람을 줄 생각이 없었기에 충혜왕은 직접 짐을 들고 압송되었다. 결국 원나라로 압송되는 도중에도 지방 [[관리]]에게[* 기록에는 지금의 [[평안남도]] 숙주(肅州)의 지방관을 맡고 있었던 [[안균]](安鈞)으로 되어 있다.] 추워서 [[이불]]을 달라고 했는데 그 관리는 >"네가 잘못해서 못 주겠다!!" 라는 식으로 거절당하는 등 굴욕을 겪는다. 물론 뒤에 관리는 처벌을 받게 되지만 재미있는 것은 관리를 처벌한 사람이 원나라에서 충혜왕을 잡아오라는 명을 받고 고려에 와서 충혜왕을 직접 구타하기까지 했던 도치(朶赤)라는 [[몽골인]]이었다.[* 원 간섭기 시절 고려 국왕들은 태조 [[칭기즈 칸]]의 방계 [[혈족]]으로서 원나라의 황족에도 해당했다. 몽골인들에게 '''알탄 우룩''', 즉 [[황금씨족]]이 가지는 권위와 의미를 생각하면 도치의 행동은 당연한 것이었다.] 관리가 그에게 와서 >"왕이 폐위된 주제에 자기 잘못도 모르고 뻔뻔스럽게 내 이불을 빼앗으려 한다." 고 일러바치자 도치는 >"너한테 여기를 다스리게 해준 사람이 누구더냐? 네가 모시는 왕이 추위를 못 견뎌서 이불을 찾는데 네가 주지 않는게 신하의 도리냐?" 라며 쇠자로 초주검이 되도록 때렸다. 충혜왕 입장에서는 물론 '병 주고 약 주고'다. 원나라 [[혜종(원)|혜종(순제)]]은 압송된 충혜왕에게 >"그대의 죄는 너무나 커서 '''그대의 피를 천하의 모든 개들에게 먹여도 오히려 부족하지만'''(雖以爾血,啖天下之狗,猶爲不足), 짐은 살생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니 귀양을 보낸다." 는 식으로 말해서 주눅들게 만들었다고 한다. '''[[시체]]를 갈갈이 찢어서 온 사방에 흩뿌려도 모자랄 정도로 엄청난 죄인이라는 뜻이다'''. 보통 이런 류의 발언은 [[역성혁명]]을 하려다 실패한 인물에게나 하는 것인데다 당시 몽골인들이 땅에 피를 흘리는 처형 방식을 극도로 금기시한 것을 감안한다면 충혜왕의 행동들에 대해 원나라 황제와 조정이 얼마나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웃긴 사실은 당시 원나라의 황제였던 혜종도 사치와 향락에 빠져 원나라을 멸망으로 이끌고 간 암군이었다는 것이다. 그나마 충혜왕과는 달리 감안할 부분이 있다면 어렸을 적부터 온갖 고생을 했다는 것이 있지만 실권을 잡은 이후에도 주색 잡기에만 열중했으니 실드 여지는 적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도 인간성은 혜종이 충혜왕보다는 나은데 둘다 암군이었어도 폭군인 충혜왕보다는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선은 지켰다.] 결국 충혜왕은 [[티베트]]로 귀양간 할아버지 [[충선왕]](제26대)처럼 '''원나라에 의해 귀양을 간 두 번째 고려 왕이 되었다'''. 그러나 충선왕은 원나라 내의 정치적 문제 때문에 유배된 것이었고, 나중에라도 이용 가치가 있어서 [[유배]]에서 풀려났지만 충혜왕은 막장이라서 유배된 것이었기 때문에 빨리 죽어 줄수록 고려와 원나라에게 도움이 되는 상황이었다. 그 때문인지 게양현(揭陽縣)[* 현 [[중국]] [[광둥성]] 지에양시, 원나라 황족의 유배지로 쓰였던 곳이었다.]으로 귀양가는 도중 악양현(岳陽縣)[* 현 중국 [[후난성]] 웨양시]에서 30세의 젊은 나이로 급사했다. 항간에는 [[귤]]을 잘못 먹고 체해 급사했다는 설도 있고, 독을 탄 술로 [[독살]]당했다는 설도 있다. 갑자기 사망한 걸 보면 원나라에서 손을 쓴 게 확실해 보이는데 《[[고려사절요]]》에 따르면 그가 세상을 떠나자 모든 고려 백성들이 기쁨에 겨워 '''만세'''를 불렀다고 한다. >王傳車疾驅 艱楚萬狀 未至揭陽 薨于岳陽縣。或云遇鴆。或云食橘而殂。國人聞之 莫有悲之者 小民至有欣躍 以爲復見更生之日。初 宮中及道路 歌曰 阿也麻古之那 從今去何時來 至是 人解之曰 岳陽亡故之難 今日去 何時還。 >왕은 수레가 너무 빨리 달리는 통에 온갖 고초를 겪다가 게양에 못 이르러 악양현에서 훙서하였다(죽었다). 어떤 사람은 [[짐새|짐독(鴆毒)]]에 독살되었다고 말했고 어떤 사람은 귤을 먹고 죽었다고도 말했다. 그 소식을 들은 나라 사람들은 아무도 슬퍼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지체 낮은 백성들 가운데는 되살아나는 날을 다시 보게 되었다고 기뻐 날뛰는 자까지 있었다. 이전에 궁중과 거리에서 노래하기를 "아야마고지나 이제 가고 나면 언제 오나."라고 하였는데, 이 일이 있은 후 "악양망고지난(악양에서 죽는 신세) 오늘 가면 언제 돌아오나."로 뜻을 풀이했다. >---- >《[[고려사절요]]》 권25 충혜왕 갑신 5년(1344년) 그나마 유해는 고려로 송환되어 '영릉'(永陵)에 안장되었는데 공교롭게도 충혜왕의 시신이 고려에 돌아온 그 달에 충혜왕에게 겁탈당했던 [[경화공주]]가 한 많은 삶을 마쳤다. 충혜왕의 시신이 고려에 돌아온 날을 정확히 알기 어려워, 경화공주가 원수가 죽은 꼴은 보고서 [[저승]]으로 갔는지 알 수 없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 어린 두 아들이 각각 [[충목왕]](제29대)과 [[충정왕]](제30대)으로 즉위했는데 둘 다 어린 나이에 요절했으며, 고려 멸망의 단초를 제공하는 결과가 되었다. 여러모로 진정한 막장 [[군주]]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고려사]]》에 기록된 사관의 글을 보자. >王性游俠 好酒色 耽于遊畋 荒淫無度 聞人妻妾之美 無親貴賤 皆納之後宮 幾百餘。於財利 分析絲毫 常事經營 群小爭進計畫 奪人土田奴婢 盡屬寶興庫 良馬以充內廐。給布回回家 取其利 令椎牛進肉 日十五斤。新宮之役 張旗設鼓 親登墻督之。宮成 徵漆諸道 丹雘之輸 後期者 徵布倍蓰。吏緣爲姦 百姓愁怨。群小得志 忠直見斥 一有直言者 必加誅戮 人人畏罪 莫敢言者。 >왕은 성품이 호협하고 주색을 좋아했으며, 놀이와 사냥에 탐닉해 황음무도하게 행동했다. [[네토라레|남의 처나 첩이 아름답다는 소문을 들으면 친소와 귀천에 관계없이 모조리 후궁으로 들이는 바람]]에 그 수가 100명이 넘었다. 또한 재물에 관계되는 것이면 아무리 자잘한 것이라도 따져 항상 이익을 올리려 하니, 군소배들이 다투어 계략을 올려 남의 토지와 [[노비]]를 빼앗아 모두 보흥고(寶興庫)에 소속시켰으며 궁중의 마굿간을 준마로 채웠다. 또 [[위구르|회회(回回) 사람]]들에게 베를 주고 그에 대한 이자[* 참고로 [[이슬람교]]에서는 이자를 죄악으로 본다. [[수쿠크]] 참조. 다만, 실물자산의 이자니만큼 꼭 이슬람교에서 죄악시하는 이자라고 단정할 수는 없고 단지 수쿠크를 이자라고 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도 할 수 있다.]를 챙겼으며 [[소]]를 도축[* [[이슬람]]식 도축법은 [[할랄 푸드]]를 참고. 악행을 열거하는 내용 중에 왜 뜬금없이 소고기 얘기가 나오나 의아해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는데, 농경 사회에서 고기 먹자고 소를 도축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는 조선시대만 봐도 답이 나온다.]해 그 고기를 날마다 15근씩 바치게 했다. 새 궁궐을 지을 때에는 깃발을 벌여 놓고 북을 설치한 다음 친히 담에 올라 깃발을 흔들고 북을 치며 독려했다. 궁궐이 완성되자 각 도에서 옻칠을 거두어 들였으며, 단청을 올릴 물감을 기한보다 늦게 가져온 사람들에 대해서는 그보다 몇 배에 해당하는 베를 징수했다. 관리들은 이를 기회로 백성들을 가렴주구했으며 백성들은 근심과 원한에 싸였다. 군소배들은 출세하고 충직한 사람들은 쫓겨났으며 한 사람이라도 직언하면 반드시 사형해버리니, 사람들이 처형당할까 두려워 감히 말을 꺼내는 자가 없었다. >---- >《[[고려사]]》 <충혜왕 세가> -총서- == 평가 == 최근 정치 운영과 개혁 정책을 분석한 결과,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출간하는 53권짜리 《한국사》 중 제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에 역대 '충(忠)' 자 돌림 왕들의 항목을 보면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일반적으로 충혜왕에 대해서는 왕이 음행을 일삼았다는 사실 때문에 부정적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정치 운영과 정책 시행에는 긍정적인 면도 있었다. '''이 왕은 상업 활동의 진흥과 유통 구조의 개선을 통해 재정을 확충했고, 사급전의 혁파 등 토지 문제의 근본적 해결 방안을 제시하였다.'''[* 고려 후기에 친원파 [[권문세족]]이 전국의 땅을 집어먹은 상태에서 왕들은 토지개혁 부문에서 제대로 성과를 내지 못했다. 이걸 건드리는 건 기존 권력층한테 "한번 겨루어볼래?"라고 파이트 신청하는 거랑 다를 게 없다.] 더불어 '''각종 세목을 신설해 권력층을 견제하였다.'''[* 당시 권문세족 농장은 면세 면역이었다.] 원의 간섭으로 폐위당한 경험이 있어 악소배를 비롯한 '''측근 세력을 광범위하게 형성'''하여[* 이 부분이 진짜 독특한 건데, 우리 역사상 [[왕권]]을 강화할 때 [[협객|임협 집단]]을 이용하는 경우는 없다. 보통 기존 권력 집단과 타협, 흡수하거나, 시종 공신들을 낙하산으로 투하한 다음 권력을 밀어줘서 거물을 만들거나, 통혼을 통해 처가빽을 만들거나 친가빽을 만들어 동원하지, 천한 건달, 조직들을 끌어들여 왕권 강화한 건 충혜왕이 처음이다. 중국에서는 [[한고제|전한 고조 유방]]과 명 태조 [[주원장]]의 사례가 있긴 한데, 그 쪽은 아예 출신이 임협집단이니 같이 시작한 인재들도 그 쪽 출신인 것이었다.] 왕권 강화를 꾀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부원 세력인 [[기철]], 고용보와 대립하게 되었다. > >즉, '''충혜왕의 개혁 시도는 전방위적으로 친원파들을 압박하는 것'''[* 쉽게 말해 기존 친원파들이 장악하고 있던 상권과 유통 구조를 탈취하고, 토지를 집어먹는 수단을 없앴으며, 보란듯이 권문세족들에게만 적용되는 세금을 걷는 데다 자기들하고 통혼 같은 걸로 타협하려고 하지도 않았던 왕이었다. 때마침 친원파들의 음행이 심하다 하니 왕이 그들을 제거할 명분은 충분했다.]'''이었고 고려 정국은 충혜왕파 대 친원파로 대립 구도가 형성되었다.''' > >이 같은 정치 상황 속에서 충혜왕은 고용보 등에 의해 체포당하여 원에 압송되었고 곧 악양현에 유배되었다가 사망했다. 기철 등 부원 세력은 충혜왕의 왕권 강화로 위축당하자 왕을 체포하는 극단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위기 국면을 벗어나고자 한 것이었다. 원으로서도 충혜왕의 개혁 정치가 원나라의 고려 종속 정책에서 일정한 수준 벗어난 것으로 받아들인 결과였다. 즉 충혜왕의 폐위에는 원의 고려에 대한 종속 정책과 부원 세력의 정치적 이해 관계가 개입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원은 충목왕 즉위 후 충혜왕 대의 정치를 전면 부정할 수 밖에 없었으며, 왕의 폐위에 대한 고려 정치 세력들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서라도 개혁을 표방할 수 밖에 없었다. >---- >《한국사》 제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그가 이런 권력을 개인의 폭정을 위해 사용하지 않고, 좀 더 건설적인 방향으로 사용했으면 [[고려]]의 운명이 바뀌지 않았을까 생각하게 만드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저렇게 권문세족을 짓누르고 획득한 재정이나 권력을 백성을 위해서 썼다면 지지가 높았겠지만, [[연산군|왕과 신흥 세력인 악소배들이 깽판치는데 사용]]해 버렸으니 백성들 입장에선 왕이나 권문세족이나 똑같은 놈들이라고 생각할 여지가 있는 것이다.[* 물론 어느 정도 충혜왕에게 불리한 기록만 남았을 공산도 있지만, 저 재평가 역시 남은 기록을 통해 평가할 수 있는 것이다.] 그가 폐위된 것도 결국 [[인과응보|자신의 행실로 인한 빌미를 스스로 제공한 탓]]이라고 본다면 굉장히 아쉬운 부분이다. 충혜왕의 이런 성향은 어찌보면 증조할아버지인 [[충렬왕]](제25대)이나 아버지 [[충숙왕]](제27대) 같이 시대의 한계에서 비롯되는 문제일 수도 있을 것이다. 충렬왕이나 충숙왕의 경우에도 [[원나라]]의 압박이나 권문세족의 견제로 제대로 왕권을 휘두르지 못하는 상황에 있었고, 이 왕들의 경우에도 정사를 멀리하고 사냥이나 여색에 빠져드는 경향을 보였기 때문이다. 거기에 충혜왕은 어린 시절부터 원나라에 있으면서 그곳의 퇴폐한 풍속에 빠져 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한 마디로 제대로 된 [[제왕학]]이나 정치적 자제력을 그에게 교육시켜 줄 만한 여건도 아니었다는 것이다. 후대의 왕인 [[우왕]](제32대)도 어렸을 때부터 권신 [[이인임]] 등의 압박 때문에 이런 루트에 빠지는데 그때 큰아버지 충혜왕과 비교되는 건 의미심장한 대목이라고 하겠다. 그렇다고 해도 너무나 과한 행적이긴 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고려사]]》에 실린 충혜왕에 대한 사신의 논평도 이와 비슷한 논지다. >충혜왕은 영리한 재능을 나쁜 데에 썼으니, 악소배들을 가까이하고 황음무도하게 행동했다. >결국 안으로는 부왕으로부터 질책을 당하고 위로는 천자로부터 벌을 받아 죄수의 몸으로 유배가는 도중 객사한 것도 마땅한 일이었다. >오직 늙은 신하 이조년[* 유명한 시조인 <다정가>를 지은 그 인물. [[이인임]]의 할아버지.]만이 간곡히 충언을 올렸으나 그 말마저 듣지 않았으니 어찌 하겠는가? == 가계도 == * 제1비 [[덕녕공주]] * 1남 [[충목왕|충목왕 왕흔]](1337년 ~ 1348년) (재위 1344년 ~ 1348년) * 1녀 장녕공주(長寧公主, ? ~ ?): [[원나라]] 노왕에게 시집갔는데, [[덕녕공주]]에게 돈을 줬다는 기록이 나온다. 하지만 이 시기 장녕공주의 나이는 20대 초반이었고, 고려에서 절개를 잃었다는 비난을 받았다는 기록으로 보아 노왕과 결혼한 뒤 돈을 줬다는 노왕의 아버지에게 재가했을 수도 있다. 원나라의 수도인 대도가 명나라 북벌군에게 점령되는 혼란의 와중에 실종되었다. 그러자 숙부인 [[공민왕]]이 신하들을 시켜 장녕공주를 찾게 했다. 그 후 [[명나라]] 태조 [[홍무제]]([[주원장]])가 장녕공주를 찾아 [[고려]]로 돌려보냈고,[* 명 태조 주원장은 위협이 안 되는 적국 군주의 자제들에게는 관대했다. 심지어는 [[소종(원)|북원 소종]] 아유시리다라 칸의 장남이었던 마이딜리발라(매적리팔라)를 살려놓은 걸로도 모자라 숭례후에 봉해 집을 하사하는가 하면 끝내 소종에게 돌려보내는 처분을 내리기도 했다.] 공민왕은 장녕공주를 그 어머니인 덕녕공주와 함께 살게 했다. 그 후의 일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어서 덕녕공주와 살다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 제2비 [[희비]] 윤씨 * 2남 [[충정왕|충정왕 왕저]] (1337년 ~ 1352년) (재위 1349년 ~ 1352년) * 후궁 은천옹주 임씨(銀川翁主 林氏, ? ~ ?): 충혜왕과 비슷한 성품으로, 미녀에다 충혜왕의 비위를 잘 맞추어 총애를 받았다(마치 [[연산군]]과 [[장녹수]]의 관계처럼). 사치가 심했다고 한다. 본래 종실 [[단양부원대군|단양대군]]의 여종이었다. 상인의 딸로 충혜왕을 만나기 전에는 사기 그릇을 파는 일을 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사기옹주'(沙器翁主)라고 비꼬아 불렀다. 충혜왕은 정력제인 열약을 즐겨 먹어 여러 비빈들이 성생활을 못 견디거나 병에 걸리기도 했는데 임씨만이 능히 감당하여 그의 총애를 받았다. 충혜왕이 폐위되어 원나라로 끌려간 후 은천옹주도 궁에서 쫓겨났다. * 3남 왕석기(王釋器, ? ~ 1375년): 부모가 몰락하고 이복형 [[충정왕]](제30대)이 즉위한 후에 [[승려]]가 되라는 명을 받고 여러 [[절(불교)|절]]을 떠돌았다. 나중에 숙부인 [[공민왕]]이 즉위하자 역모에 연루되어 [[제주도]]로 유배되는 과정에서 공민왕의 명령으로 살해된 것으로 알려졌으나, 놀랍게도 살아남아 결혼까지 하여 아들을 하나 낳고 숨어 살았다. 하지만 다시 조카인 우왕이 즉위한 후에 왕석기와 그의 아들의 존재가 발각되어 모두 처형되었다. * 후궁 화비 홍씨(和妃 氏洪, 생물년도 미상): 경상도 진변사인 홍탁의 딸. 충혜왕은 그녀의 미모가 뛰어나다는 소문을 듣고 정식으로 궁궐로 불러들이지도 않은 채 후궁으로 삼았다. 위의 은천옹주는 원래 일개 궁인의 신분으로 충혜왕의 총애를 받고 있었는데, 홍씨가 화비로 책봉된 것을 질투했다. 그래서 충혜왕이 은천옹주로 책봉해줬다. 그런데 충혜왕은 화비 홍씨에게 금세 흥미를 잃어서 궁 밖에 방치해 둔 채 자주 찾지 않았다고 한다. 사서에 딱 한 번 등장하는 충혜왕의 '경비'(慶妃)와 동일인으로 추정된다. == 대중매체 == * [[코에이]]의 게임 <[[푸른 늑대와 흰 사슴: 원조비사]]> 시나리오 3에서 충숙왕의 자식으로 등장하는데 정식발매판 자체가 시대가 뒤틀려서 크게 상관은 없다. 능력치는 방탕하고 무능한 군주였던 것을 반영한 것인지 정치력이 D이고 전반적으로 별로이지만 그래도 왕자라 나중에 충숙왕을 죽이고 동생인 공민왕을 군주로 하는 플레이를 할 때 정복지의 군주로 잘 써먹을 수 있다. * 2012년작 [[SBS]] 드라마 <[[신의(드라마)|신의]]>에서 배우 오현철[* <[[태조 왕건]]>에서 [[왕건(태조 왕건)|왕건]]의 아역 역, <[[무인시대]]>에서 [[고종(고려)|고종]] 역.]이 연기했다. 다만 퓨전 드라마이고 공민왕 시절이 배경인지라 비중있게 등장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행적이 짧고 굵게 표현된다. 대낮부터 기녀들을 끼고 술판과 춤판을 벌이던 충혜왕은 고려를 위해 목숨을 내놓고 최전방에서 싸워온 적월대 부대의 유일한 여인인 단백을 발견하고 “어명이니 옷을 남김없이 벗어보라”며 추태를 부린다. 이를 대장 문치우가 막아서자 충혜왕은 드디어 본심을 드러내는데 “너희들도 똑똑히 봤지? 저것들이 저렇게 방자하다. 백성들이 임금인 나보다 저것들을 더 믿는다 했어!”라고 외치며 마지막 속옷을 벗지 않는 단백을 향해 칼을 겨눴지만 문치우가 단백 대신 왕의 칼에 맞는다. 이 일로 문치우는 죽고, 단백은 충격으로 자살하며 문치우의 제자이자 단백의 연인이었던 최영은 삶의 의욕을 잃게 된다. [[파일:충혜왕(신의).png]] * 2013년작 [[MBC]] 드라마 <[[기황후(드라마)|기황후]]>에서는 방영 전 공개된 자료를 통해 배우 [[주진모(1974)|주진모]]가 연기하는 충혜왕이 세 명의 주연 중 한 명으로 비중있게 소개됐는데 설명상 실제 [[폭군]]의 모습에서 심각하게 미화되어 있어서 반발이 컸고, 결국 방영 중에는 가상의 고려 왕 '왕유'로 변경되었다. 그러나 드라마 전개 중 등장하는 복위 횟수나 사망 시기가 전부 충혜왕과 비슷하여 충혜왕을 기반으로 왕유를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파일:왕유.png]] * 만화가 [[박종관(만화가)|박종관]]이 그린 아동 역사 [[만화]]인 《태조 왕건과 고려왕조 500년》에서는 주인을 닮아서 인상이 상당히 불량한 말을 탄 채 "으하하, 내가 누구냐? 바로 돌아온 탕아야!"라는 [[중2병]] 가득한 대사로 첫 등장했다. 죽어서 퇴장하는 컷의 대사는 "탕아의 최후구나." * 웹툰 [[내일(웹툰)|내일]]에서는 [[최중길]]의 과거 편에서 등장하 며, 간신의 말에 넘어가 최중길의 모친 한여혜에게 흑심을 품는 다. 결국 이 흑심때문에 부모가 전부 자살했고 여동생인 최희정 도 그에게 바쳐지고 나서 자살한걸로 보인다. 사실상 최중길의 인 생을 나락으로 떨어뜨린 [[만악의 근원]]이자 [[철천지원수]]. == 기타 == * 아무래도 [[막장]] 이미지가 [[연산군]]하고 비슷했는지 가상 대담도 존재한다. 그리고 [[소드마스터]] [[척준경]]과 함께 온라인에서 화제거리가 되어 유명해진 고려인이다. * 대부분의 한국사 교재에서 충혜왕 부분은 거의 나오지 않는다. 그나마 한 두 교재에서 간단히 '폭정을 한 왕'이라고만 대충 나오는 정도. 앞의 증조할아버지 [[충렬왕]]과 할아버지 [[충선왕]]이나 더 이후의 왕인 동생 [[공민왕]]이 많이 나온다. 굳이 충혜왕의 업적을 찾는다면 '''편민조례추변도감'''을 설치해 개혁을 시도했다 딱 이 정도만 나온다. 그나마 이것도 상급자용. * 충혜왕 때와 관련된 《[[고려사]]》의 기록 중에 우리나라에 [[만두]]가 고려시대에 전래되었음을 알려주는 사료가 있는데, 문제는 이 기록이란 게 어떤 사람이 만두가 먹고 싶어 궁중 주방에 침투해 만두를 먹다 걸려 처벌받았다는 기록이다. 다만 이 때의 만두는 '상화'라는 것으로, 고기나 야채로 된 속이 들어가는 '쟈오쯔'(교자)가 아니라 '[[만터우]]'에 해당하는 것이다. * 제수인 [[노국대장공주]]와는 몽골식 이름이 같다. * 개막장 인생이었던 충혜왕과는 달리 충혜왕의 장남인 충목왕이나 동복동생인 공민왕은 충혜왕과 가족이 맞나 싶을 정도로 완전히 다른 인물들이었다. 아들 충목왕은 12세에 요절했지만 오래 살았다면 명군이 되었을 것이라는 평가를 받는 모습을 보였고, 동생인 공민왕은 반원정책을 펼쳤던 개혁군주였다. * 시호인 '충혜'는 [[관우]]가 북송으로부터 추증받은 시호이기도 하다. * 폭군 충혜왕이 좋아하던 [[고려가요]]로 <북전>(北殿)이라는 노래가 있다. 충혜왕 당시 같은 이름의 궁궐을 완공했을 무렵에 생겨난 노래라고 한다. 당시에는 <뒷전> 혹은 <후전진작>이라는 제목으로 불렸으며, 조선시대 초기까지 유행했던 노래다. [[고려|망국]]의 곡인 데다가 가사가 음란하다는 이유로 조선 제9대 [[성종(조선)|성종]] 시기에 노랫말이 한 번 《[[용비어천가]]》스럽게 개사된 이후, 18세기까지 활발히 연주되고 불렸다. 아무래도 가사가 문제인 데다가 원형에서 변화를 많이 겪어서인지 중고등학교 교육과정에서도 잘 소개되지 않는 노래이다. 바뀌기 전의 노랫말은 아래와 같으며, 여러 조각으로 쪼개져 전해 내려온다. 해당 노래가 [[시조]]의 초기 형태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는 학설도 존재한다. 멜로디를 들어보면 느긋하면서도 흥겨운 멋이 있는데, 이 때문에 노래가 오래 살아남았던 듯하다. [[태종(조선)|태종]] 이방원도 "<후전진작>은 노래는 좋지만 가사가 저속하다."라면서 불평하기도 했다. > 흐리누거 괴어시든 어누거 좃니져러 > 젼ᄎᆞ젼ᄎᆞ로 벋니믜 젼ᄎᆞ로 > 셜면ᄌᆞᆺ 가ᄉᆡ론 ᄃᆞᆺ 범그려셔 노니져 > > (정신이) 흐려지게 누그러져 사랑하신다면 얼었다가 누그러지듯이 쫓아다니세 > 까닭 까닭으로 벗님의 까닭으로서 > 풀솜의 [[가시]]인 듯 [[성관계|뒤섞여서]] 노세 > ---- > <[[금보|금합자보]]> - 평조북전 > 누은들 ᄌᆞᆷ이 오며 기ᄃᆞ린들 님이 오랴 > 이제 누워신들 어늬 ᄌᆞᆷ이 ᄒᆞ마 오랴 > ᄎᆞᆯ하로 안즌 곳에셔 긴밤이나 새오쟈 > > 누운들 잠이 오며 기다린들 님이 오랴 > 이제 누우신들 어느 잠이 금방 오랴 > 차라리 앉은 곳에서 긴 밤이나 새우자 >---- > <[[해동가요]] 박씨본> > 空房을 겻고릴동 聖德을 너표릴동 > 乃終始終을 모ᄅᆞᄋᆞᆸ건마ᄅᆞᄂᆞ > 當시론 괴실ᄉᆡ 좃ᄌᆞᆸ노이다 > > 빈방을 겨루려 하는 둥 성덕을 넓히려 하는 둥 > 나중과 첫과 끝을 모르옵건마는 > 당신은 사랑하시므로 쫓으옵나이다 > ---- > <[[금보|금합자보]]> - 우조북전 > ᄋᆞ자 내 黃毛試筆 墨을 뭇쳐 窓밧긔 디거고 > 이제 도라가면 어들 법 잇것마ᄂᆞᆫ > 아므나 어더 가뎌셔 그려보면 알리라 > > 아차, 내 [[딜도|족제비털 붓]]이 [[애액|먹]]을 묻히고 [[음문|창]] 밖에 떨어졌구나 > 이제 돌아가면 얻을 수 있겠지만 > 아무나 얻어 가져서 [[자위행위|그려보면]] 알리라 >---- > <[[청구영언]] 진본> > 아소 님하 遠代平生애 여힐ᄉᆞᆯ 모ᄅᆞᄋᆞᆸ새 > 아 임이여 평생토록 여읠 줄 모르옵사이다 >---- > <[[만전춘]]>[* 만전춘의 끝부분인데, <북전>이 원형이라는 설도 있어 싣는다.]||<-5><:><#FFD700>[[고려청자|https://67.media.tumblr.com/d0ab98e78c55c6369f20b702ab560e77/tumblr_o9zoipyqmm1sqk8veo5_r2_400.png?width=50]][br] '''{{{+1 [[고려/왕사|{{{#800080 고려의 역대 국왕}}}]]}}}''' || ||<:> 27대 [[충숙왕]] 왕만 ||<:> {{{+1 ←}}} ||<:><#FBEC5D> '''{{{#black 28대 충혜왕 왕정}}}''' ||<:> {{{+1 →}}} ||<:> 29대 [[충목왕]] 왕흔 || ||<:> '''[[묘호]]''' ||||<:> 없음 || ||<:> '''[[시호]]''' ||||<:> 충혜헌효대왕[br](忠惠獻孝大王) || ||<:> '''[[능묘]]''' ||||<:> 영릉(永陵) || ||<:> '''[[성]]''' ||||<:> 왕(王) || ||<:><|2> '''[[휘]]''' || 고려 ||<-4> 정(禎) || || 몽골식 ||<:><-4> 부다시리[br](寶塔失里) || ||<:> '''[[왕비]]''' ||||<:> 정순숙의공주(貞順淑儀公主) || ||<:> '''[[부왕]]''' ||||<:> [[충숙왕]] || ||<:> '''모후''' ||||<:> 공원왕후(恭元王后) || ||<:> '''종교''' ||||<:> [[불교]] || ||<|2><:> '''생몰년도''' ||<:> 음력 ||1315년 1월 18일~1344년 1월 15일 || ||<:> 양력 ||1315년 2월 22일 ~ 1344년 1월 30일 (30세) || ||<|2><:> '''재위기간''' ||<:> 음력 ||1330년 2월 초하루 임오일~1332 2월 갑자일(1년) || ||<:> 양력 || || ||<|2><:> '''재위기간'''[br](복위 후) ||<:> 음력 ||1339년 3월 계미일~1343년 12월 계축일[* 고려사에서 충혜왕 후5년 기록까지 있지만 충혜왕 후5년에는 왕이 2월에 죽었다는 기록과 사관의 평이 기록되어 있다. 1343년 12월에 이미 원나라로 끌려갔다.](4년) || ||<:> 양력 || || [목차] == 개요 == '''[[한국사]] 최악의 [[폭군]]'''. '''좆병신새끼.''' '''좆을 좆같이 놀리면 좆된다''' [[고려]]의 제28대 왕. [[충숙왕]]과 공원왕후의 장남으로, [[공민왕]]의 형이다. [[연산군]]의 위엄에 가려 빛을 보지 못한 면이 있지만 막장성으로는 그 유명한 연산군의 아성을 가볍게 뛰어넘었다. 그리고 연산군은 세자 시절에는 그냥 평범했을 뿐더러 '''즉위 초에는 나름대로 괜찮은 왕'''이었던 편이라, [[폐비 윤씨|비극적인 죽음을 맞은 어머니]] 때문에 비뚤어졌거나 정신이상을 겪은 것일지도 모른다는 설이 있지만, 충혜왕은 꼬꼬마 세자 시절부터 막장. 정말이지 '''[[답이 없다]]'''. 그야말로 막장 오브 막장, '''반도의 [[귀축왕 란스|귀축왕]]'''. == 시호의 의미 == 일단 이 시호는 원에서 내려준 시호다. '충혜왕' 이란 [[시호]]가 어째서 붙었냐면, 우선 '충'은 원 간섭기에 재위했던 왕들한테 '니네는 부하니까 우리한테 충성해라'는 의도로 몽골이 내린 글자이고[* [[공민왕]]과 후대는 제외.], 뒤의 혜 자는 이 왕의 행실상 좋은 시호를 줄 수는 없으니 마지못한 기분으로 은혜 혜(惠) 자를 썼다고 한다. 굳이 충혜왕 뿐만 아니라, 한국이든 중국이든 시호에 '은혜 혜' 자가 들어간 군주는 심각하게 무능했거나 [[싸이코패스]]였거나 적어도 둘 중 하나라고 봐도 틀리지 않다.[* 단 고려의 [[혜종(고려)|혜종]]같이 예외도 있긴 하다.] --[[혜공왕]]이라든가...-- 사실 충혜왕이 저지른 막장 짓을 보면 [[해릉양왕]]을 연상시키는데 대체 왜 시호에 양(煬)이 안 들어갔나 싶을 지경이다. == 막장 행보 == '''고려의 충혜왕의 막장행각은 훗날 등장하는 조선의 유명한 [[폭군]]인 [[연산군]]의 뺨을 연속으로 후려치고도 남는다.''' [[품행장애|세자 시절부터 막장끼가 보여]] 절 지붕 위의 새를 잡는답시고 '''[[절]]을 불지르고''' 튀었다거나[* 당시 불교는 고려의 '''[[국교]]'''였다. --이해가 안 간다면 기독교를 국교로 삼은 중세 유럽에서 황제나 왕이 성당에 불을 질렀다고 생각해보자.-- 국가에서 잘못한 절이나 승려를 처벌하는 일은 있었지만 이런 거랑은 얘기가 다르니 논외. 애초에 저건 국교 개념이 없는 현대 기준으로도 막장이다.] 불량배들과 어울려 걸핏하면 [[여자]]를 [[겁탈]]하거나 [[술]]을 즐기는 만행을 저질렀다. 부왕인 충숙왕으로부터 "'''예끼 이놈! 너는 왜 망나니 같은 행실만 하느냐!'''"라고 욕까지 들은 경력이 있다. 이후 즉위식을 치르러 고려로 오다가 마침 원으로 가던 부왕과 황주에서 마주쳤는데, 화려한 옷차림으로 길 위에서 호례(胡禮), 즉 몽골에서 하던 대로 인사하는 아들에게 "네 아버지, 어머니가 모두 고려 사람인데 어디서 나한테 호례를 행하느냐? 그리고 옷은 또 뭐가 그렇게 사치스러우냐?"라고 꾸짖는 충숙왕의 서슬에 놀라서 울며 물러났다고. 아버지 [[충숙왕]]도 막장이라 신하의 아내를 뺏고 하는 등의 일로 폐위되었다가 복위된 것과는 달리[* [[충숙왕]]은 자신의 아내인 원나라 복국장공주(濮國長公主)를 [[부부싸움|칼로 물 베기]] 끝에 때려(?) 살해한 경력도 있다. 물론 와전되었지만... 충숙왕이 때리긴 때렸고, 복국장공주가 그거 맞고 난 뒤 사망하기는 했는데, 이미 복국장공주는 고려로 왔을 때 지병이 악화된 상태였다고. 폐위된 후 망나니 아들 덕택에(?) 다시 보위에 오른다.], 충혜왕은 진짜 정치를 못한다는 이유로 왕 자리에서 잠깐 쫓겨났다가 부왕이 세상을 떠나자 다시 왕위에 복위된 경우다. 충혜왕은 왕이 되자마자 여색을 지나치게 즐겼고 정사에는 관심없고 내시들과 씨름이나 즐겼으며, 심지어 그가 궁궐을 신축하는 과정에서 주춧돌 밑에 아이를 묻는다는 소문이 돌아 민심이 크게 흉흉해졌다.[* 하지만 이런 류의 소문은 [[최충헌]] 집권시에도 일어났다. 지도자의 폭정에 대한 백성들의 공포의식이라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연산군]]처럼 여자는 신하의 아내든 뭐든 이쁘면 다라는 식으로 마구 겁탈을 했으며 이 막장 행각이 절정에 달한 때는 '''장인의 후처와 부왕의 후처(즉, 장모와 새어머니)들을 [[강간]]'''했다. --미친 근친이라니-- >5월 병인일, 왕이 그 장인인 삼사좌사 홍융의 계실 황씨(黃氏)를 간음했다. >5월 경오일, 왕이 서모인 수비 권씨(權氏)와 정을 통했다. >5월 환관 유성의 처 인씨가 미인이라는 소문을 들은 왕이 구천우, 강윤충을 거느리고 그 집에 가서 유성더러 술을 올리라고 했다. 그 자리에서 유성이 왕에게 "전하께오서는 곧 복위하실 것이니 백성들을 잘 다독거리고 아낌없이 상을 내리소서." 라고 진언했다. 왕의 속내가 그 처를 꾀어내는데 있는 것도 모르고, 유성은 왕이 자신을 진심으로 아껴준다고 착각하여 행동거지를 매우 조심스럽게 하니 주위 사람들이 몰래 비웃었다. >8월 갑오일, 경화공주(慶華公主)가 왕을 초대해 잔치를 열었는데 술자리가 파했으나 왕이 취한 체하며 궁궐로 돌아가지 않고 있다가 날이 저물자 공주의 침실에 들어가 정을 통했다. --말이 좋아 정을 통한 거지 실제로는 [[그런 거 없다]]-- 이 인간이 겁탈한 충숙왕의 아내는 두 명으로 한 명은 수비 권씨, 다른 한 명은 경화공주였는데 경화공주를 범할 때 모양이 진짜 막장이다. [[고려사절요]]를 보면 왕위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아 공주를 위해 향연을 베풀었고 공주도 그 답례로 연회를 베풀었는데 연회가 끝나자 충혜왕은 경화공주의 침실에 들어가 저항하는 경화공주를 송명리[* 이 인간도 간신이었지만 나중에 임시로 고려의 국정을 맡은 원의 환관 고용보와의 친분으로 무사했다(...)] 등의 '''아랫사람들을 시켜 [[강간|사지를 묶고 범했다]][* 사실 편견에 의한 잘못된 링크인데 [[BDSM]]조차 상호간의 합의와 완벽한 신뢰관계 없이는 일절의 플을 행하지 않는다. 구속,겁박했다고 무조건 BDSM인게 아니고 엄연히 [[강간]]이다.]'''. --완전 [[귀축]]이 따로없다-- 또 경화공주가 원통하여 참지 못하고 원으로 돌아가려고 말을 사려 했는데 충혜왕이 말 시장을 못 열게 하여 말을 팔지 못하게 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이어 사신을 보내 원나라에 뇌물을 바치고 국새의 반환을 요청했는데 그때 그에게 욕을 본 경화공주의 밀고로 조적 등 [[심양왕]] 일파가 국새를 영안궁에 감춘 뒤 군사 1,000명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그런데 충혜왕은 이를 평정했다(!). 그 뒤 경화공주를 부패로 악명이 높았던 만호 임숙의 집에 유폐시킨다. 이 개막장짓이 발각된 것은 얼마 후의 일로 원에서 국새를 가지고 온 사신 두린이 경화공주를 알현할 때였다. 두린은 황제가 하사한 술을 경화공주에게 바쳤는데 경화공주는 술을 마시지도 못하고 수치심에 울기만 했다. 이에 다른 수하들을 모두 물리고 난 후에야 경화공주는 자신이 당한 수치를 두린에게 말하게 되고 두린 일행은 충혜왕을 원으로 압송한다. 충혜왕은 원으로 끌려가 투옥되었다가 자신을 고발한 환관이 실각하자 다시 복위했는데 그의 입지가 원나라에서 어느 정도였는지 보여주는 기록이다. 배짱이 대단하다고 해야 할까? 이것 외의 기록들은 링크를 참고하자.[[http://cafe.naver.com/booheong/64308|#]] == 폐위와 최후 == 결국 이를 보다 못한 [[환관]] 고용보와 기황후의 오빠이자 부원배 노릇을 하던 기철이 [[원나라]] 황제에 청을 넣어, [[원나라]]가 [[사신]]을 파견해 충혜왕을 호출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 둘이 '''한국사 탑클래스를 달리는 유명한 [[간신배]]들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행동을 취했다는 것은, 충혜왕의 [[막장]]성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를 알 수 있는 대목.~~천하의 간신배를 충신으로 만드는 충혜왕의 위엄~~ 사실 간신배라고 해도 어쨌든 국가 통치의 임무를 맡은 만큼, 그들이 권력을 유지하려면 왕이 그냥 무능하기만 해야지 사람이기를 완전히 포기해서는(...) 곤란했기 때문. 그러나 의외로 눈치는 빠른지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계속 출두를 거부, 결국 [[원나라]] 사신은 충혜왕을 속여 그를 [[정동행성]] 내로 유인하는 데 성공한다. 물론 처음부터 폐위시킬 생각으로 유인한 거니 보자마자 [[원나라]] 사신은 그를 무엄하게도(?) 발길질에 환관 고용보는 그를 본체만체, [[원나라]] 사신의 호위병들은 압송이란 이유로 주위에 칼부림까지 해 사상자가 속출했다.[* 호위하는 근위병들이 있고 압송을 저지하려는 것이 뻔하기 때문에 칼부림 일어나고 사상자가 속출하는거 당연했다.] 결국 [[원나라]]로 압송되는 도중에도, 지방 수령에게[* 기록에는 지금의 [[평안남도]] 숙주(肅州)의 지방관을 맡고 있던 안균(安鈞)으로 되어 있다.] 추워서 이불을 달라고 했는데 그 관리는 "네가 잘못해서 못 주겠다!!"라는 식으로 거절당하는 등 굴욕을 겪는다. 물론 뒤에 그 관리는 처벌을 받게 되지만.[* 재미있는 것은 그 관리를 처벌한 사람이, 원에서 충혜왕을 잡아오라는 명을 받고 고려에 와서 충혜왕을 직접 구타하기까지 했던 타치(朶赤)라는 [[몽골인]]이었다. 안균이 그에게 와서 '왕이 폐위된 주제에 자기 잘못도 모르고 뻔뻔스럽게 내 이불을 빼앗으려(...) 한다'고 일러바치자, 타치는 "너한테 여기를 다스리게 해준 사람이 누구더냐? 네가 모시는 왕이 추위를 못 견뎌서 이불을 찾는데 네가 주지 않는 게 신하의 도리냐?"라며 쇠자로 초죽음이 되도록 때렸다. 충혜왕 입장에서는 물론 병 주고 약 주고다.] 시종을 드는 사람이 없어 왕이 직접 짐을 들고 압송되었다. [[원순제]]는 충혜왕에게 요약하자면 '너의 죄는 너무나 커서 '''네놈의 피를 천하의 모든 개들에게 먹여도 오히려 부족하지만'''(雖以爾血,啖天下之狗,猶爲不足)[* '''즉 시체를 갈갈이 찢어서 온 사방에 흩뿌려도 모자라다는 뜻.'''이다. 보통 이런 류의 발언은 역성혁명을 하려다 실패한 인물에게나 하는 걸 생각하면, 충혜왕의 행동들에 대해 [[원나라]] 조정이 얼마나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짐은 ~~관대해서~~ 살인하는 걸 좋아하지 않으니까 귀양을 보낸다' 는 식으로 말해서 주눅들게 만들었다고 한다. 결국 충혜왕은 [[티베트]]로 [[귀양]]간 할아버지 [[충선왕]]처럼 [[원나라]]에 의해 귀양을 간 2번째 [[고려]] 왕이 되었다. 그러나 [[원나라]] 내의 정치적 문제 때문에 유배된 거였고 나중에라도 이용가치가 있었던 충선왕과 달리, 충혜왕은 [[막장]]이라서 유배된 거였기에 그는 빨리 죽어줄수록 [[고려]]와 [[원나라]] 모두에게 도움이 되는 인간이었다. 그 때문인지 게양현(揭陽縣)[* 현 [[중국]] 광둥성 지에양시, 원 황족의 유배지로 쓰였던 곳이었다.]으로 귀양가는 도중 악양현(岳陽縣)[* 현 중국 후난성 웨양시]에서 30세의 젊은 나이로 비명횡사하였다. 항간에는 [[귤]]을 잘못 먹고 체해 급사했다는 설이 있었으며 일설에는 원나라에 의해 독을 탄 술을 마시고 독살당했다는 설도 있었다. 갑자기 사망한 걸 보면 [[원나라]]에서 손을 쓴 게 확실해 보이는데, 그가 세상을 떠나자 모든 백성들이 기쁨에 겨워 만세를 불렀다고. >王傳車疾驅 艱楚萬狀 未至揭陽 薨于岳陽縣。或云遇鴆。或云食橘而殂。國人聞之 莫有悲之者 小民至有欣躍 以爲復見更生之日。初 宮中及道路 歌曰 阿也麻古之那 從今去何時來 至是 人解之曰 岳陽亡故之難 今日去 何時還。 >유배지로 데려가는 함거(檻車)가 너무 빨리 달리는 통에 왕은 온갖 고통을 겪어야 했으며 결국 게양까지 가지 못하고 병자일에 악양현에서 죽고 말았다. 어떤 사람은 그가 [[짐새|짐독(鴆毒)]]으로 독살되었다고 말했고 어떤 사람은 [[귤]]을 먹고 죽었다고도 말했다. 그 소식을 들은 나라 사람들은 아무도 슬퍼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지체 낮은 백성들 가운데는 "다시 살아나게 되었다!!"고 기뻐 날뛰는 자까지 있었다. 그에 앞서 민간에 "아야마고지나(阿也麻古之那) 이제 가면 언제 오냐?" 라는 참요가 유행했는데, 이 일이 있은 후 어떤 사람이 이 노래의 앞구절을 "악양망고지난(岳陽亡故之難)" 으로 풀이해 "악양에서 죽을 재난을 만났으니 오늘 가면 어느 때에 돌아오겠느냐?" 라는 뜻이라고 말했다. >---- >《[[고려사절요]]》 권25 충혜왕 갑신 5년(1344) 그의 유해는 먼 타국 땅이 아닌 [[고려]] 땅에 묻혔다. 공교롭게도 충혜왕의 시신이 고려에 돌아온 그 달에 경화공주가 한 많은 삶을 마쳤다. 충혜왕의 시신이 고려에 돌아온 날을 정확히 알기 어려워 경화공주가 원수가 죽은 꼴은 보고 저승으로 갔는지는 알 수 없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 그의 어린 두 아들이 각각 [[충목왕]]과 [[충정왕]]으로 즉위하는데, 둘 다 어린 나이에 요절했다. 그것이 고려 멸망의 단초를 제공하는 결과가 되었다. 여러모로 진정한 막장 군주. 마지막으로 《[[고려사]]》에 기록된 사관의 글을 보자. >王性游俠 好酒色 耽于遊畋 荒淫無度 聞人妻妾之美 無親貴賤 皆納之後宮 幾百餘。於財利 分析絲毫 常事經營 群小爭進計畫 奪人土田奴婢 盡屬寶興庫 良馬以充內廐。給布回回家 取其利 令椎牛進肉 日十五斤。新宮之役 張旗設鼓 親登墻督之。宮成 徵漆諸道 丹雘之輸 後期者 徵布倍蓰。吏緣爲姦 百姓愁怨。群小得志 忠直見斥 一有直言者 必加誅戮 人人畏罪 莫敢言者。 >왕은 성품이 호협하고 주색을 좋아했으며, 놀이와 사냥에 탐닉해 황음무도하게 행동했다. [[네토라레|남의 처나 첩이 아름답다는 소문을 들으면 친소와 귀천에 관계없이 모조리 후궁으로 들이는 바람]]에 그 수가 100명이 넘었다. 또한 재물에 관계되는 것이면 아무리 자잘한 것이라도 따져 항상 이익을 올리려 하니, 군소배들이 다투어 계략을 올려 남의 토지와 [[노비]]를 빼앗아 모두 보흥고(寶興庫)에 소속시켰으며 궁중의 마굿간을 준마로 채웠다. 또 회회(回回)사람[* [[무슬림]]을 뜻한다.]들에게 베를 주고 그에 대한 이자[* 참고로 [[이슬람교]]에서는 이자를 죄악으로 본다. [[수쿠크]] 참조. 다만, 실물자산의 이자니만큼 꼭 이슬람교에서 죄악시하는 이자라고 단정할 수는 없고 단지 수쿠크를 이자라고 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도 할 수 있다.]를 챙겼으며 [[소]]를 도축[* [[이슬람]]식 도축법은 [[할랄 푸드]]를 참고]해 그 고기를 날마다 15근씩 바치게 했다. 새 궁궐을 지을 때에는 깃발을 벌여 놓고 북을 설치한 다음 친히 담에 올라 깃발을 흔들고 북을 치며 독려했다. 궁궐이 완성되자 각 도에서 옻칠을 거두어 들였으며, 단청을 올릴 물감을 기한보다 늦게 가져온 사람들에 대해서는 그보다 몇 배에 해당하는 베를 징수했다. 관리들은 이를 기회로 백성들을 가렴주구했으며 백성들은 근심과 원한에 싸였다. 군소배들은 출세하고 충직한 사람들은 쫓겨났으며 한 사람이라도 직언하면 반드시 사형해버리니, 사람들이 처형당할까 두려워 감히 말을 꺼내는 자가 없었다. >---- >《[[고려사]]》충혜왕 세가 총서 == [[이장석|장사하자]]~ == 한국사 최고의 막장 군주지만 유일한 장점(?)이 있었는데 장사에 매우 밝아서 ~~돈이랑 여자만 밝힌다~~ 고려에서 난 물품의 유통망을 장악하고 실크로드를 통해 온갖 상인들과 거래해서 돈을 벌었다고 한다. '''물론 당연한 거(?)겠지만''' - 그 장사 밑천은 모두 백성들을 수탈해서 나온 물자들이고, 그렇게 번 돈은 원나라 권력층에 뇌물을 뿌려서 자신의 입지를 지탱하고 여자를 찾아다니는 데 썼으며, [[후궁]]도 무려 100명이 넘었다고 한다. ~~왕부터가 [[간신]]~~ ~~[[의자왕]]의 3천 궁녀가 뻥이라는 것이 여기서 나타난다~~[* 물론 여자를 밝혀도 그래도 최소한의 개념은 있었는지 뒷한 최영도 아무도 안보는데서 했다고 했다.] == 재평가? == 최근 정치운영과 개혁정책을 분석한 결과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출간하는 53권짜리 한국사 중 『제19권 고려후기 정치경제편』에 역대 충자 돌림 왕들의 개혁 정치 항목을 보면 충혜왕의 경우 정치운영과 개혁정책 내용에 대해서 상당히 긍정적으로 평하고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일반적으로 충혜왕에 대해서는 왕이 음행을 일삼았다는 사실 때문에 부정적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정치 운영과 정책 시행에는 긍정적인 면도 있었다. '''이 왕은 상업활동의 진흥과 유통구조의 개선을 통해 재정을 확충했고, 사급전의 혁파 등 토지문제의 근본적 해결 방안을 제시하였다.'''[* 고려 후기에 친원파 권문세족이 전국의 땅을 집어먹은 상태에서 왕들은 토지개혁부문에서 제대로 성과를 내지 못했다. 이걸 건드리는 건 기존 권력층한테 "한번 겨루어볼래?"라고 파이트신청하는 거랑 다를게 없다. ~~그리고 이걸 건드린 경우 대부분 왕이 졌다~~] 더불어 '''각종 세목을 신설해 권력층을 견제하였다.'''[* 당시 권문세족 농장은 면세면역이었다.] 원의 간섭으로 폐위당한 경험이 있어 악소배를 비롯한 '''측근 세력을 광범위하게 형성'''하여[* 이 부분이 진짜 독특한건데 우리 역사상 왕권 강화할 때 임협집단을 이용하는 경우는 없다. 보통 기존 권력집단과 타협흡수하거나, 시종공신들을 낙하산으로 투하한 다음 권력을 밀어줘서 거물을 만들거나, 통혼을 통해 처가빽을 만들거나 친가빽을 만들어 동원하지 천한 건달, 조직들을 끌어들여 왕권강화한 건 ~~정치계의 이단아~~ 충혜왕이 처음이다. 중국에서는 [[한고제]]와 명태조 [[주원장]]의 사례가 있긴 한데, 그 쪽은 아예 출신이 임협집단이니 같이 시작한 인재들도 그 쪽 출신인 것이었다. --그리고 620년 후 한반도 남쪽에서 [[정치깡패|사례가 생겼다]]--] 왕권강화를 꾀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부원세력인 기철, 고용보와 대립하게 되었다. > >즉 '''충혜왕의 개혁 시도는 전방위적으로 친원파들을 압박하는 것[* 쉽게 말해 기존 친원파들이 장악하고 있던 상권과 유통구조를 탈취하고, 토지를 집어먹는 수단을 없앴으며, 보란듯이 권문세족들에게만 적용되는 세금을 걷는 데다 자기들하고 통혼같은걸로 타협하려고 하지도 않았던 ~~노는거랑 하는짓은 개차반인데 정책만 보면 마치 권력집단과 싸우려고 왕이 된 사람같은 이상한~~ 왕이었다. ~~이런 왕은 보통 오래 못 살아~~ 때마침 친원파들의 음행이 심하다 하니 왕이 그들을 제거할 명분은 충분했다.]이었고 고려정국은 충혜왕파대 친원파로 대립구도가 형성되었다.''' > >이같은 정치상황 속에서 충혜왕은 고용보 등에 의해 체포당하여 원에 압송되었고 곧 악양현에 유배되었다가 사망했다. 기철 등 부원세력은 충혜왕의 왕권 강화로 위축당하자 왕을 체포하는 극단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위기국면을 벗어나고자 한 것이었다. 원으로서도 충혜왕의 개혁정치가 원나라의 고려 종속 정책에서 일정한 수준 벗어난 것으로 받아들인 결과였다. 즉 충혜왕의 폐위에는 원의 고려에 대한 종속 정책과 부원세력의 정치적 이해관계가 개입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원은 충목왕 즉위 후 충혜왕대의 정치를 전면 부정할 수 밖에 없었으며, 왕의 폐위에 대한 고려 정치세력들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서라도 개혁을 표방할 수 밖에 없었다. >---- >한국사 제19권 고려후기 정치경제편』 그가 이런 권력을 개인의 폭정을 위해 사용하지 않고 좀 더 건설적인 방향으로 사용했으면 고려의 운명이 바뀌지 않았을까 생각하게 만드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저렇게 권문세족을 짓누르고 획득한 재정이나 권력을 백성을 위해서 썼다면 지지가 높았겠지만, 왕과 신흥세력인 악소배들이 깽판치는데 사용해 버렸으니 백성들 입장에선 왕이나 권문세족이나 똑같은 놈들이라고 생각할 여지가 있는 것.[* 물론 어느 정도 그에게 불리한 기록만 남았을 공산도 있지만, 저 재평가 역시 남은 기록을 통해 평가할 수 있는 것이다.] 그가 폐위된 것도 결국 자신의 행실로 인한 빌미를 제공한 탓이라고 본다면 굉장히 아쉬운 부분이다. --역시 [[연산군]]의 선배인가-- 그의 이런 성향은 어찌보면 증조할아버지인 충렬왕이나 아버지 충숙왕 같이 시대의 한계에서 비롯되는 문제일 수도 있을 것이다. 충렬왕이나 충숙왕의 경우에도 원의 압박이나 권문세족의 견제로 제대로 왕권을 휘두르지 못하는 상황에 있었고 이 왕들의 경우에도 정사를 멀리하고 사냥이나 여색에 빠져드는 경향을 보였기 때문이다. 거기에 충혜왕은 어린 시절부터 원에 있으면서 그곳의 퇴폐한 풍속에 빠져 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한 마디로 제대로 된 [[제왕학]]이나 정치적 자제력을 그에게 교육시켜 줄 만한 여건도 아니었다는 것. 후대의 왕인 [[우왕]]도 어렸을 때부터 권신의 압박 때문에 이런 루트에 빠지는데 그때 큰아버지 충혜왕과 비교되는 건 의미심장한 대목이라고 하겠다. 그렇다고 해도 너무나 과한 행적이긴 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고려사에 실린 충혜왕에 대한 사신의 논평도 이와 비슷한 논지다. >충혜왕은 영리한 재능을 나쁜 데에 썼으니, 악소배들을 가까이하고 황음무도하게 행동했다. >결국 안으로는 부왕으로부터 질책을 당하고 위로는 천자로부터 벌을 받아 죄수의 몸으로 유배가는 도중 객사한 것도 마땅한 일이었다. >오직 늙은 신하 이조년[* 유명시조 다정가를 지은 그 인물. [[이인임]]의 할아버지.]만이 간곡히 충언을 올렸으나 그 말마저 듣지 않았으니 어찌 하겠는가? == 사냥왕 == ||<|13><:> 재위 원년 || 정월 || 임진일 ||왕이 강음(江陰)에서 사냥판을 벌였다. || ||<|3><:> 2월 || 갑인일 ||왕이 서쪽 교외에서 사냥판을 벌였다. || || 무오일 ||공주의 생일을 맞아 연경궁(延慶宮)에서 잔치를 열었다. || || 을숙일 ||왕이 해주(海州)에서 사냥판을 벌였다. || || 3월 || 임인일 ||왕이 강음(江陰)에서 사냥판을 벌였다. || ||<|3><:> 4월 || 신유일 ||왕이 교외에서 사냥판을 벌였다. || || 계미일 ||왕이 폐행(嬖幸)들을 거느리고 연복정(延福亭)에 행차해 [br]물놀이와 격구(擊毬)를 구경했다. || || 신축일 ||왕이 폐행들을 거느리고 연복정(延福亭)에 행차하여 물놀이를 구경했다. || || 6월 || 기미일 ||왕이 광덕사(廣德寺)에 행차해 물놀이를 구경했다. || || 7월 || 병자일 ||왕이 수강궁(壽康宮)에 행차했다. || || 8월 || 병인일 ||왕이 마제산(馬堤山)에서 사냥판을 벌였다. || ||<|2><:> 10월 || 계해일 ||왕이 도성 서쪽 교외에서 사냥판을 벌였다. || || 병인일 ||왕이 수강궁(壽康宮)에 행차했다. || ||<|2><:> 재위 2년 || 정월 || 병술일 ||밤에 왕이 폐인(嬖人) 양선(梁宣),송명리(宋明理)[br] 등을 데리고 평복차림으로 몰래 거리를 쏘다녔다.[* 夜 王率嬖人梁宣宋明理等 微行。쏘다녔다는 건 민심을 알아보기 위해서 돌아다녔다가 아니라 그냥 놀러나간 거다.] || || 2월 || 정미일 ||왕이 서해도(西海道)에서 사냥판을 벌였다. || 재위 원년 당시 사냥 기록이다. 이게 고려사 충혜왕 원년 기록과 2년째 기록의 전부.[* 2년째 기록에는 왕이 끌려가서 잡혀간 후의 이야기도 포함되어있지만 왕으로써 한 역할은 저게 다다.] 참고로 사냥이라고 해서 그냥 활 하나 쥐어잡고 아무 산이나 가서 짐승 쏴잡는 그런 거 생각하면 곤란하다. 일반 평민 사냥꾼은 그랬지만 왕족 정도만 되어도 호위를 담당할 호위병, 식사를 제공할 요리사, 식재료와 사냥도구 및 기타 비품을 운반할 짐꾼, 사냥터에 허가받지 않은 인간들이 출입하지 못하게 경계를 설 경비병, 사냥감을 찾거나 몰아야 하는 수색조 등등 많은 수의 수행원이 필요하고 그들에게 지급되어야 하는 급료와 물품, 비품구입비 등이 장난 아니다. 조선시대에 그려진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965750&cid=58106&categoryId=58111|사냥풍속도]]를 보면 알겠지만 사냥이란건 사실상 당시의 [[워크샵]]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말인즉 왕이 사냥을 자주 갔다는 것은 그만큼 낭비가 심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나마 이 중간에 왕 노릇 한 거라곤 4월 경인일에 끌려간 고려 국민들을 돌려달라는 글을 써서 보내기는 했다. 이마저도 돌아와서는 사냥 다닌 기록보다 궁 내에 강간, 살인 등의 기록이 늘어났다. 이건 뭐... == 기타 == * 아울러 [[고려]]는 이 왕을 시작으로 해서 마지막 왕까지 모두 제 명에 못 살았다. [[충목왕]]은 요절, [[충정왕]]과 [[공민왕]]은 살해당하고 [[우왕]], [[창왕]], [[공양왕]]은 모두 [[이성계]]에게 사사된다. * 아무래도 막장 이미지가 [[연산군]]하고 비슷했는지 이런저런 가상대담도 존재한다. 그리고 [[소드마스터]] [[척준경]]과 함께 온라인에서 화제거리가 되어 유명해진 고려인이다. * 대부분의 한국사 교재에서 충혜왕 부분은 거의 나오지 않으며 한두 교재에서 간단히 '폭정을 한 왕'이라고 나오는 정도. 앞의 [[충렬왕]]ᆞ[[충선왕]]이나 더 이후의 왕인 [[공민왕]]이 많이 나온다. 굳이 충혜왕의 업적을 찾는다면 편민조례추변도감을 설치해 개혁을 시도했다 딱 이 정도 나온다. 이것도 상급자용. * 충혜왕 때와 관련된 <고려사>의 기록 중에 우리나라에 [[만두]]가 고려시대에 전래되었음을 알려주는 사료가 있는데, 문제는 이 기록이란 게 어떤 사람이 만두가 먹고 싶어 궁중 주방에 침투해 만두를 먹다 걸려 처벌받았다는 기록(...)--아니 어떻게 들어온 거냐-- 다만 이 때의 만두는 상화라는 것으로, 고기나 야채로 된 속이 들어가는 쟈오쯔(교자)가 아니라 [[만터우]]에 해당하는 것이다. * 제수인 [[노국대장공주]]와는 몽골식 이름이 같다. == 가계도 == * 황후 정순숙의공주(덕녕공주)(?~1375) * 적장자 [[충목왕|충목왕 왕흔]](1337~1348)(재위 1344~1348) * 공주 장녕공주 * 후궁 희비 윤씨(?~?) * 서장자 [[충정왕|충정왕 왕저]](1337~1352)(재위 1349~1352) * 후궁 은천옹주 임씨 * 서차자 왕족 석기(?~1375) ==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 * 코에이의 [[원조비사]] 정발판 시나리오 3에서 충숙왕 자식으로 등장한다. 그런데 정발판 자체가 시대가 뒤틀려서 크게 상관은 없다.(...) 능력치는 방탕하고 무능한 군주였던 것을 반영한 것인지 정치력이 D이고 전반적으로 별로이지만 그래도 왕자라 나중에 충숙왕을 죽이고(...) 동생인 공민왕을 군주로 하는 플레이를 할 때 정복지의 군주로 잘 써먹을 수 있다. * SBS 드라마 [[신의(드라마)|신의]]에서 잠시 등장한다. 다만 이 드라마는 퓨전드라마이고 [[공민왕]] 시절이 배경인지라 크게 등장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행적이 짧고 굵게 표현된다. 대낮부터 기녀들을 끼고 술판과 춤판을 벌이던 충혜왕은 고려를 위해 목숨을 내놓고 최전방에서 싸워온 적월대 부대에서 유일한 여인 단백을 발견하고 “어명이니 옷을 남김없이 벗어보라”며 추태를 부렸다. 이를 대장 문치우가 막아서자 충혜왕은 드디어 본심을 드러낸다. “너희들도 똑똑히 봤지? 저것들이 저렇게 방자하다. 백성들이 임금인 나보다 저것들을 더 믿는다 했어!” 외치며 마지막 속옷을 벗지 않는 단백을 향해 칼을 겨눴지만 문치우가 단백 대신 왕의 칼을 맞았다. ||[[파일:attachment/충혜왕/취작주인공.png|width=300]]|| * 인터넷에 떠도는 것중 고려왕들의 어진를 상상해서 그린 작품들이 있다. 이중 누가 그린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충혜왕 영정이라고 그려진 그림이 있는데, 왠지 [[취작|모 야겜]]의 남자 주인공과 닮았다(...) 그런데 서른살에 죽었는데 심히 늙어보이는 얼굴이다. [[분류:고려의 왕]][[분류:암군]] Load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