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변경문서 보기수정 내역 태조(고려) (버전 비교) [include(틀:다른 뜻1, from=왕건, other1=동음이의어, rd1=왕건(동음이의어))] [include(틀:역대 고려 국왕)]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e6bd0e, #f9d537 20%, #f9d537 80%, #e6bd0e)" {{{#670000 '''태조 관련 틀'''}}}}}}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include(틀:고려의 왕자/국조 ~ 문종)] ---- [include(틀:후삼국시대 군주)] ---- [include(틀:후삼국시대 호족들)] ---- [include(틀:역대 태봉 시중)] ---- [include(틀:고려 건국설화 등장인물)] ---- [include(틀:권지고려국사)] ---- [include(틀:고구려부흥운동)] ---- }}}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e6bd0e, #f9d537 20%, #f9d537 80%, #e6bd0e); color: #670000" '''고려 초대 국왕[br]{{{+1 태조 | 太祖}}}'''}}} || ||<-2>{{{#!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external/pds.joins.com/htm_2012032304247a010a011.jpg|width=100%]]}}} || ||<-2> {{{#670000 {{{-2 현릉 봉분 외곽에서 출토된 왕건 청동상}}} }}} || ||<|2> '''출생''' ||[[877년]] [[1월 31일]] || ||[[신라]] [[패강진]] [[개성시|송악군]] 사찬 [[만월대|용건의 사저]][br](現 [[경기도]] [[개성시]] 수창동) || ||<|2> '''즉위''' ||[[918년]] [[7월 25일]] || ||[[태봉]] [[태봉국 철원성|철원성]] 포정전[br](現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홍원리) || ||<|2> '''사망''' ||[[943년]] [[7월 4일]] (향년 66세) || ||[[고려]] [[개성시|개경 개주]] [[만월대|정궁]] 신덕전[br](現 [[경기도]] [[개성시]] 수챵동) || || '''능묘''' ||[[현릉(고려 태조)|현릉]](顯陵) || ||<|2> '''재위기간''' ||'''{{{#670000 고려 초대 국왕}}}''' || ||[[918년]] [[7월 25일]] ~ [[943년]] [[7월 4일]] {{{-2 (24년 350일)}}} || ||<-2>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본관''' ||[[개성 왕씨]] || || '''휘''' ||건(建) || || '''부모''' ||부왕 [[세조(고려)|세조]][br]모후 [[위숙왕후]] || || '''형제자매''' ||[[외아들]] || || '''왕후''' ||[[신혜왕후]], [[장화왕후]], [[신명순성왕후|신명왕후]][br][[신정왕후 황보씨|신정왕후]], [[신성왕후]], [[정덕왕후]] || || '''자녀''' ||'''[[고려/왕실|25남 10녀]]'''[* 현재까지 확인된 한국사의 군주 중 2번째로 많은 자녀를 둔 군주다. 1위는 [[백제]]의 [[의자왕]].] || || '''종교''' ||[[불교]] || || '''신체''' ||84.7cm(앉은 키)[* [[https://www.donga.com/news/Culture/article/all/20060713/8328893/1|출처]] 왕건 상의 앉은 키가 진짜 고려 태조의 앉은 키로 제작한 경우를 가정하면 고려 태조의 앉은 키는 84.7cm가 된다.선키에 경우 이성계나 이순신 장군처럼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알수 없지만 왕건에 키가 당시 평균보다 좀더 컸다는 이야기가 있는것으로 보아 160중반에서 후반으로 추정된다. ] || || '''자''' ||약천(若天) || || '''묘호''' ||[[태조]](太祖) || || '''별호''' ||[[성조(묘호)|성조]](聖祖) / [[열조]](烈祖) / [[용조]](龍祖) / [[황조]](皇祖)[br]태왕(太王) / 조왕(祖王)[* 둘 다 [[원 간섭기]]에 태조를 일컬은 용어로 당시엔 [[묘호]]의 사용이 제한되어 선왕들을 O종(宗)대신 O왕(王)으로 일컬었다. 예) [[혜종(고려)|혜종]] → 혜왕, [[원종(고려)|원종]]→원왕 ] || ||<|2> '''시호''' ||응운원명광렬대정예덕장효위목'''신성대왕'''[br](應運元明光烈大定睿德章孝威穆'''神聖大王''') || ||용열인용장효대정광열원명'''신성대왕'''[br](勇烈仁勇章孝大定光烈元明'''神聖大王''')[* 《고려사》 <태조 세가> 마지막 조 기준.] || || '''연호''' ||[[천수]](天授, [[918년]] ~ [[933년]]) ||}}}}}}}}}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고려 태조 친필.jpg|width=100%]]}}} || || {{{#670000 '''태조의 추정 친필 글씨[* 2013년 학계에 보고된 백원첩에 수록되어 있다. 물론 [[https://www.youtube.com/watch?v=gSc62hcCzwA|영상]]에서도 나오지만 학계에서도 진위 논란이 있다.]'''}}} || [목차] [clearfix] == 개요 == >'''"태조 신성대왕(太祖神聖大王)께서... 요하(遼河)와 패수(浿水)의 놀란 파도를 진정시키고, 진한(秦韓)의 옛 땅을 얻어 열아홉 해만에 천하[寰瀛:환영]를 통일하셨으니, 공적은 더없이 높고 덕망은 한없이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 >《[[고려사]] 열전, 최승로》 > '''짐도 역시 단지 평범한 데서 시작하여 착오가 있었는 지 추대를 받아, 여름에는 더위를 두려워하지 않고 겨울에는 추위를 피하지 않으면서 근심으로 몸을 애태운 지 19년[* 이건 햇수이고 918년 7월-936년 9월이므로 18년이 맞다. 아래의 25년은 918년 7월-943년 7월 초이므로 거의 일치.] 만에 삼한을 통일했다. 외람되게도 큰 보물을 차지한 지 25년이 되니 몸은 이미 늙었도다. 다만 후손들이 마음내키는 대로 욕심을 부려 기강을 어지럽히고 무너뜨릴까 두렵구나. 이에 「훈요」를 지어 후대에 전하노니 아침에 펼쳐서 저녁까지 두루 보아 길이 귀감으로 삼기를 바라노라.''' > ---- > <[[훈요 10조]]> 머리말 [[고려]]를 건국한 [[고려왕조]]의 [[창업군주]]이며 수많은 [[호족]]들이 난립하던 신라 말의 난세를 평정하고 후삼국의 [[통일]]을 이룩한 고려의 초대 [[대왕]]이자 [[천자|해동천자]]이다. [[고구려|고구려 유민]] 출신[* 과거 [[낙랑군]]과 [[대방군]] 일대를 아우렀던 [[고구려]] 말기의 핵심 배후지이자 수도권이었던 [[패서]] 출신의 고구려 유민이다. 고구려의 삼경(三京) 가운데 하나였던 한성(漢城, 현 [[황해도]] [[재령군]])이 있었으며, 멸망 직후에는 이곳을 중심으로 [[검모잠]]과 [[안승]]을 필두로 한 [[고구려부흥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고구려의 유력한 귀족 성씨였던 왕씨는 [[고구려]]가 [[미천왕]] 대에 이르러 통치하게 된 [[낙랑군]]과 [[대방군]]을 비롯해 [[평안도|관서]] 및 [[황해도|해서]] 일대를 기반으로 두었던 가문이다. [[북송]]의 사신이었던 서긍이 저술한 [[고려도경]]에 따르면 [[개성 왕씨|왕건의 선대]]는 [[고구려]]의 [[귀족|대족(大族)]]이었다고 전해진다. 김관의가 저술한 편년통록보다 더 정확하고 합리적이라 추측되는 왕대종족기를 인용한 [[이제현]]에 따르면 왕건의 선대는 이전부터 왕씨 성을 사용하였다고 전해진다.]으로, 준수한 용병술[* 해상 [[호족]] 출신으로서 [[수군]]을 운용함이 능숙하였다. 이는 [[나주 공방전]]에서도 빛을 발한다.]과 뛰어난 용인술을 바탕으로 좌우 신하들과 사방의 세력가들을 노련하게 휘어잡은 [[성군]]이며 숙명의 [[라이벌]]이자 당대의 [[명장]]으로 이름났던 [[견훤]][* [[고대 그리스]]의 [[피로스 1세]], [[카르타고]]의 [[한니발]]과 행적이 비슷한 명장이자 국왕이었다. [[대야성 전투]]를 기점으로 [[후백제]]가 [[서라벌]]로 진격함으로써 신라에 사형선고를 내리고 [[공산 전투]]에서 [[고려]]의 수뇌부 일동을 다수 전사시킴으로써 상당의 호족들을 회유시킬 수 있었던 것은 온전히 견훤 본인의 역량 덕분이었다.]을 제압하고 삼한일통을 이룩한 [[최후의 승자]]다. 한국사 군주들 중 손에 꼽을만한 너그러운 임금이었다.[* [[후백제]] 멸망 이후 백제인들에게 일절 해가 없도록 명했을 뿐만 아니라 쿠데타로써 [[견훤]]을 몰아냈던 [[신검]]도 용서했다. 더 나아가 세자 [[대광현]]을 비롯한 많은 [[발해유민]]들을 수용하고 나라를 들고 항복한 [[경순왕]]과 신라 지배층을 수용하였다. 이렇게 나라의 건국 이후 사후 처리에 있어서 피비린내가 뒤따르던 고대와 중세의 왕조들과는 상반되는 행보를 보여준 덕분에 고려는 발해, 후백제, 신라의 지배층을 온전히 흡수할 수 있었다. 이렇게 많은 집단을 수용했으면서도 그들의 지지를 고루 받아 재위기간을 무탈히 보낸 것을 보면 정치력 역시 뛰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9번 혼인한 왕으로도 유명하지만, 즉위 당시의 나이가 41세... 그러나 그것은 전부 혼인정책으로 인한 정략혼이며 어쩔 수 없는 결혼이였다. 조선의 태조와 비교하면 전술은 아래지만 정치는 위라고 볼 수 있다. 재미있는 게 일종의 동아시아 트렌드인지, 왕건 사후 얼마 안가 중화권을 통일했던 [[태조(송)|송태조]] 역시 이런 쪽으로는 대인배로 유명했다. 반대로 고려왕씨들을 탄압한 조선의 경우 당시 옆나라 명나라도 [[주원장]]이 미쳐날뛰며 숙청의 바람이 불던 시절이였다.] 신라 제30대 [[문무왕]]에 이어 두 번째로 한국사의 [[통일|통일국가]]를 이룩한 지도자이다.[* 다만 신라는 직후에 [[발해]]가 다시 생겨서 남북국시대가 되긴 한다.] 일각에서는 신라 통일의 불완전성을 문제 삼아 고려가 한반도의 첫 통일 왕조라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고려 역시 신라가 놓쳤던 당시 [[발해]]의 전 영역을 완전하게 통합하지는 못하였다. 기본적으로 고려의 후삼국 통일은 신라가 통일한 영역 안에서 나뉘었던 땅을 재통일한 후 북방의 영역을 확장한 것으로, '삼국'의 통일에 대해서는 논의의 여지가 있지만 만약 통일의 개념을 '한반도'의 통일로 상정한다면 신라의 통일론을 부정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관련하여서는 신라와 고려 양국의 통일 의식이 그 통합의 대상을 두고 뚜렷한 차이가 있었다는 것부터 확실히 유념할 필요가 있다.[* "국가 단위에 가장 근접한 집단의식인 삼한일통의식은 13세기 초까지 삼국유민의식의 분립성과 공존하였다. 또한 [[발해유민]]이나 탐라의 포함 여부를 놓고, 고려 건국을 주도한 고구려 유민 계열과 신라 유민 계열의 두 갈래 삼한일통의식이 경쟁했다··· 고려의 국가 단위 집단의식에 해당하는 삼한일통(三韓一統) 의식이 적어도 크게 두 가지 계열이 병존하며, 경쟁하고 있었던 것 역시 종래에 알려지지 않은 한국 민족 형성사의 이해에 중요한 역사상이다. 고구려 유민 계열과 신라 유민 계열의 삼한일통 의식은 그 안에 만주의 발해 유민과 남쪽의 탐라국(제주도)을 포함하거나 배제하는 큰 차이를 가졌다는 사실이 자료들을 통해 검토되고 있다." 〈고려국가와 집단의식·자위공동체·삼국유민·삼한일통·해동천자의 천하>-노명호, 출판사 서평] >'''"고려의 왕건(王建)이 신라와 백제를 격파하니, 왜(倭)ㆍ탐부(耽浮)ㆍ환어라(驩於羅)ㆍ철륵(鐵勒) 등 동이(東夷)의 여러 나라(諸國)가 모두 두려워하여 고려의 속국이 되었다."''' >---- >《남당서 권18, 고려》 고구려 유민 계열(패서 호족)이 주축이 되어 삼한은 물론 발해 및 여진과 탐라까지 적극적으로 포용했던 고려와 달리,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의 국가 정체성조차 완전히 녹여내지는 못했으므로 지리적 통일은 성공했을지라도 민족적 융화에 실패했다. 따라서 고려 태조의 후삼국 통일은 [[발해유민|발해 지배 계층과 유민]]들을 대거 받아들임으로써 한민족 정체성을 확립하고, 나아가 여진·탐라 등 다양한 종족을 흡수하여 개방적인 세계관을 지향했다는 사실에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고구려인의 후손이란 집단 정체성을 공유하고 있던 초기 고려인들은 북진 정책을 활발히 추진하는 과정에서 당대의 대제국 [[요나라|거란]]과의 26년에 걸친 치열한 [[여요전쟁|전쟁]]까지 감수하는가 하면, 대규모의 원정군을 일으켜 [[여진족|여진]]이 부분적으로 점유하던 [[고려의 여진 정벌|고구려의 옛 고토를 회복하려는 실질적 노력]]을 상당히 기울였다. 말기에 이르기까지도 고려의 [[요동 정벌|고토 회복 시도]]는 이어졌다. 따라서 고구려 시대와 달리 중세시대에 들어 유례없이 강대해진 북방 민족들을 상대로 군사적 우위를 밀어붙일 수 없었던 당시의 상황을 고려한다면[* 거란의 경우 발해를 힘으로 만주에서 축출해버릴 정도였다.] 고려가 신라와 같이 한반도 남부에 국한된 삼한통일을 꾀했다는 식의 해석은 오류이다. 고려의 삼한통일은 신라의 삼한통일과 달리 고구려 시절의 판도를 회복하려는 의지가 확고했음에도 여건 상 한계에 봉착한 것에 가깝다.[* 고려 후기에도 [[요동 정벌]]을 꾀한 바 있으나 항목에도 있듯 보급 문제나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 전쟁에 지친 백성들의 불만 등 여러 이유로 좌절된다.] 즉 한반도 남부의 해양무역 루트 지배에 주력하던 신라 왕조의 성향과 달리 만주와 요동을 고토로 여기는 성향은 고려의 차별점이라고 할 수 있다. 왕건과 고려 건국세력의 직계 조상이었던 고구려가, 최초로 삼한을 통일했던 신라와 대등한 수준의 메인 스트림으로 한국사에 자리잡는데 있어 고려 왕조는 가교 역할을 담당했다고도 할 수 있다. --백제 지못미-- == [[태조(고려)/생애|생애]]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태조(고려)/생애)] 877년 송악군[* 오늘날 [[개성]]]에서 고구려 계통의 [[패서]] [[호족]] 가운데 하나로서 예성강 유역의 해상 무역 활동으로 성장했던 [[왕륭]]의 아들로 태어났다.[* 실제로 [[개성]]이나 [[평양]] 등 과거 낙랑군에 속했던 이 지역은 고구려 때도 왕씨가 유력 가문으로 세거하던 곳으로, [[왕모중]]▪︎[[왕산악]]▪︎[[왕사례]]▪︎[[왕고덕]] 등 확인되는 왕씨 성의 유력한 고구려인들이 많다. 이외에도 왕건은 (같은 고구려 유민으로서의) 혈연적 친연성을 근거로 발해를 친척 국가로 인식했으며 실제로 외교적 수사에도 이를 활용하였다. 무엇보다 발해에서 확인되는 귀족 성씨 가운데 대(大), 고(高), 양(楊), 장(張), 이(李) 말고도 왕(王)씨 또한 포함되어 있다.] 896년에 왕륭이 궁예에게 귀부했을 때 함께 들어오고 [[후고구려]] 즉 [[태봉]]을 세운 궁예의 장수로서 [[후백제]]의 해상 요충지였던 [[나주]]를 점령하고 나주 호족들을 모두 복속시켰다. 후백제는 이후 전략적으로 상당한 제약을 받게 되었고, 태봉의 영토는 대폭 넓어졌으며, 왕건은 수많은 전장에서 눈부신 공로를 세웠다. [[궁예]]와 호형호제를 허락받았으며 913년, 37세의 나이에 2인자로서 [[시중]] 자리까지 오르는 등 궁예의 총애를 받았으나 918년 궁예가 폭정으로 인심을 잃자, 여러 장수들과 대신들이 왕건을 임금으로 추대한다. [[역성혁명]]으로 궁예를 축출하여 [[태봉]]을 멸망시키고 제위에 올라 새로운 나라 [[고려]](高麗)를 건국하게 되며, [[연호]]를 천수(天授)로 정한다. 이듬해 철원에서 가문의 텃밭이었던 송악(개경)으로 천도했다. 조세율을 감면하고 흑창을 설치하거나 신라에 우호적 제스처를 취하는 등 취민유도(取民有度), 중폐비사(重幣卑辭)라는 키워드로 일컬어지는 유화 정책으로 민심을 얻으려 했으며 후백제를 세운 [[견훤]]과 자웅을 계속 겨뤘고 견훤이 [[서라벌]]을 함락시키자 직접 신라를 지원하려 하다 [[공산 전투]]에서 대패, [[신숭겸]]의 희생으로 구사일생하기도 했으나, 고창 전투에서 승기를 잡은 뒤 장남 [[견신검]]의 반란으로 쫓겨난 견훤이 고려로 귀순하고 신라에서는 [[경순왕]]이 고려에 투항하자 통일 대업은 막바지에 이르렀다. 936년 [[견훤]]과 함께 후삼국 마지막 전투인 [[일리천 전투]]에서 승리해 후백제를 병탄함으로써 후삼국을 통일한다. 같은 해 예절에 대해 저술한 <정계> 1권과 백관을 대상으로 한 교훈서 <계백료서> 8편을 반포했다고 하나 현존하지 않는다. 신라는 경주 중심의 [[골품제]]를 유지하며 [[고구려]]와 [[백제]]의 지배층을 동화하는 데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왕건은 신라의 골품제를 혁파하고 이들을 결속했다. 고구려 계승을 천명했기에 [[발해]] 멸망 후 내려온 [[발해유민]]들도 받아준다. 재위기간 [[불교]]와 [[유교]], [[풍수지리]] 등을 국시로 고루 숭상했고 지방 [[호족]]을 포섭하거나 견제하기 위한 정책을 폈으며 수도는 [[개경]]이었으나 고구려 수도였던 [[서경]](평양)을 중시하고 서쪽으로 안주에서 동쪽으로 영흥까지 약간의 북진을 성사시키기도 했다. 통일을 이룩한 지 7년 만인 943년 재위 25년 만에 [[훈요 10조]]를 남기고 신덕전에서 66세로 붕어했다. == 묘호 및 시호 == 공식 [[묘호]]는 '''태조(太祖)'''[* 넷째인 [[광종(고려)|광종]]이 올림.]이며 존경의 의미로 '[[성조]]'(聖祖), '[[열조]]'(烈祖)라는 별칭으로도 불렸다.[* 조선에서도 건국 군주인 [[이성계]]를 '성조'라고 칭한 바 있다.] 이외에도 고종 재위 42년에 몽골을 막아달라고 신령들에게 제사를 지내면서 태조 왕건을 '용조'(龍祖)라 칭했으며 공민왕 재위 20년에 성균관의 학도들이 송가를 바쳤는데 여기선 태조를 '황조'(皇祖)라 했다. [[시호]]는: * '''《고려사》 <태조 세가> -총서-''': * 응운원명광렬대정예덕장효위목신성대왕(應運元明光烈大定睿德章孝威穆神聖大王) : <태조 세가> -총서-는 시호를 추가로 올린 것이 누구인지는 안 나와 있다. * '''《고려사》 <태조 세가> 마지막 조''': * 용열인용장효대정광열원명신성대왕(勇烈仁勇章孝大定光烈元明神聖大王) : 《고려사》 <태조 세가> 마지막 조엔 [[태자]](정윤) [[혜종(고려)|혜종]]이 '신성'(神聖)을, 증손자 [[목종(고려)|목종]]이 '원명'(元明)을, 손자 [[현종(고려)|현종]]이 '광렬'(光烈), '대정'(大定)을, 증손자 [[문종(고려)|문종]]이 '장효'(章孝)를, 6대손 [[인종(고려)|인종]]이 '인용'(仁勇)을, 8대손 [[고종(고려)|고종]]이 '용렬'(勇烈)을 올렸다고 한다. 보다시피 《고려사》 <태조 세가> -총서-와 마지막 조에 차이가 있다. 고려 역대 군주들은 시호의 기록이 <세가> -총서-와 <세가> 마지막 조가 조금씩 다르다. 단 시호에서 가장 중요한 건 후계자가 처음 올릴 때 쓴 두 글자라서 나중에 추가된 뒤 글자들이 조금씩 달라도 큰 영향은 없다. 그래서 묘호와 시호를 같이 부를 땐 '''태조 신성대왕'''(太祖 神聖大王), 줄여서 '''태조 신성왕'''(太祖 神聖王)이라 부른다. 《고려사》가 인용한 《편년통록》은 승려 도선이 태어나기 전 태조를 '성자'(聖子)라고 부르고 '미래통합삼한지주 대원군자(未來統合三韓之主 大原君子) [[족하]](足下)'라 칭했다. 태조는 [[천자]]를 자처하여 연호를 '천수'(天授: '하늘에게서 천명을 받다'란 뜻.)라 했으며 고려시대 저서인 《보한집》 <권상>에는 경순왕이 태조 왕건을 '천자'(天子)로 표현하고 있다. 태조의 자는 '약천'(若天)으로 '하늘과 같다.'란 뜻이며 그가 [[태자]](정윤) [[왕무]]에게 지어준 자도 '승건'(承乾), 즉 '하늘을 잇다.'란 뜻이다. 태조가 지은 [[만월대]]의 정전 이름도 '하늘의 덕'이란 뜻의 '천덕전'(天德殿)이다. 발굴된 태조의 청동상도 천자가 쓰는 금색 통천관(通天冠)을 쓰고 있다.[* 도금된 흔적이 있다.] 태조가 [[일리천 전투]]에서 조직한 부대 이름 또한 지천군(支天軍), 천무군(天武軍), 우천군(佑天軍), 간천군(杆天軍), 보천군(補天軍)이다. == 어진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e6bd0e, #f9d537 20%, #f9d537 80%, #e6bd0e)" {{{#670000 태조의 어진}}}}}}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www.minjog21.com/3341_9670_418.jpg|width=100%]]}}} ||[[개성시|개성]]의 왕건 능인 현릉에 있는 [[어진]]. 현대의 '''[[상상]]도'''이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왕건 어진.png|width=100%]]}}} ||[[연천군|연천]] 숭의전지(사적 제233호)에 봉안된 어진. [[조선 시대]]에 그려진 것을 20세기에 [[모사]]한 것으로, 태조의 모습을 그린 근대 이전의 어진 중에는 유일하다. 그래서인지 대한제국 시대 교과서인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75687|초등대한역사]]》에 제시된 [[http://contents.history.go.kr/front/ta/view.do?levelId=ta_p91r_0050_0010_0020|고려 태조의 상]]과도 흡사한 면이 있다. 다만 원본이 소실되었고 당시 복식과도 좀 안 맞는 부분이 있어 학계에서도 실제 모습인지는 긴가민가한 모양.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thimg.todayhumor.co.kr/1435395292eHp8cW6wnz5KLp32R6nQthDlD.jpg|width=100%]]}}} ||《왕씨 족보》에 그려진 왕건. 숭의전지의 영정 및 대한제국 시대 《초등대한역사》 교과서의 모습과 많이 닮아 실제 모습일 가능성도 있으나, 문제는 이 족보 자체가 북한 주민이 개인적으로 보관하고 있다가 조선로동당 위원회에 "우리 (왕씨) 가문의 하늘이신 김일성 주석께 바친다" 운운하며 제출하여, 북한 측에서 대대적으로 선전할 목적으로 공개한 유물이라 실제로 검증하기 전까지는 진위 여부가 확실하지 않다. 혹은 상술한 숭의전지 또는 교과서의 어진을 그대로 [[모사]]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thimg.todayhumor.co.kr/1435394936Fk52pNzzGdsCU5Ig2eVV81m4N3KXiR.jpg|width=100%]]}}} ||왕건 청동상. 북한 평양 조선중앙역사박물관 소재. 951년(광종 2)경에 제작되어 봉은사(奉恩寺) 진전(眞殿)의 어좌(御座)에 안치되어 있었다고 한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조). 왕건을 상징하는 것으로는 가장 오래되었으며 유일한 유물이다.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www.daejonilbo.com/20140409010004922000000102.jpg|width=100%]]}}} ||[[개태사]]가 별도로 그려 봉안한 어진.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sunday.joins.com/20225216.jpg|width=100%]]}}}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고려 태조 어진. [[표준영정]] 66호로 지정되었다. 이길범 화백의 작품이다. 다만 어진의 복식이 신하가 쓰던 복두건이며 같은 작가의 작품인 조선 정조 표준영정의 외모와 너무 닮았다는 비판이 있다.|| == 업적 == === 능력 === 송악 호족 [[왕륭]]의 아들로서 당시 대당무역의 거점이었던 예성강 주변([[패서]])이 가문의 근거지였다. 따라서 [[장보고]]가 죽고 청해진이 폐쇄된 지 40여 년이 지나 농업 위주의 영지가 되어버린 백제 지역[* 장보고의 난 진압 후 851년 신라 조정은 [[청해진]]의 인력들을 김제에 강제로 이주시켰다. 그 후로 [[능창|수달]], [[현춘]], [[순천 김씨]], [[순천 박씨]], [[낭주 최씨]], [[나주 오씨]], [[진도 김씨]], [[압해 정씨]] 가문 등 백제 지역에 기반한 해상세력은 많이 난립했으나 [[신라구]]였던 [[현춘]]을 제외하면 대외적으로 영향력을 발휘했던 대세력이 전무하다. 대체로 지역 수운, 사략질, 국내 사무역에나 종사하는 수준. 게다가 892년 전에 이미 [[견훤]]이 속했던 신라 방수군의 지속적인 해적 토벌과 894년 [[현춘]]의 규슈 침공 실패로 수달을 제외한 백제 지역 대규모 해상세력은 932년 [[상귀]], [[상애]]의 함대가 나오기까진 사서에서 자취를 감추게 된다]이나 지정학적으로 외국과 직접 교역이 불가능한 영동/영남 지역의 호족들에 비해 상업적인 능력과 국제 정세 이해, 중국 문물 수용 및 정보력에 있어 우위에 있었다. 군사적으로는 특히 패서 호족이었던 만큼 [[수군]]을 잘 다루었던 것으로 보이며 이는 궁예가 직접 한찬 해군대장군으로 임명하여 [[후백제]]의 후방인 [[나주시|나주]] 지방을 상륙전으로 빼앗게 한 것에서 잘 드러난다. 나주를 빼앗긴 견훤은 그야말로 언제 뒤쪽을 가격 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수십 년 동안 시달렸는데 궁예 휘하에서 젊은 나이에 [[시중]] 자리에까지 오를 수 있었던 것은 그러한 전공들 덕이었다. 반면 육전 지휘력은 다소 애매한데 초반에는 궁예 휘하의 무장으로서 한주, 충청, 패서 일대의 [[도적]]들을 토벌하고 사화진에서 후백제 군대를 격파하고, 호족 세력을 포섭하는 다수의 전공들을 세웠다. 그러나 대규모 [[육군]]을 지휘할 때는 가끔씩 약한 모습을 보인다. 쿠데타 직후 반기를 든 세력들이 많았다고는 하나 [[태봉]] 시절 확보했던 운주, 청주의 호족들을 쉽게 제압하지 못하고 일진일퇴의 공방 끝에 결국 해당 지역에 대한 영향력이 줄어들었다.[* 태봉 시절 궁예는 [[비뇌성 전투]] 이후 [[양길]]의 잔당으로 추정되는 [[신훤]], 청길을 흡수하며 충주, 청주를 확보했다. 또한 904년 공주장군 홍기가 투항했고, 906년 사화진 전투 기록으로 보아 충주 이남의 상주 일부에도 영향력을 행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고려군 [[병력]]이 우세했던 925년 상주 [[조물성 전투]]에서는 두 왕들이 맞붙었다가 견훤이 친히 지휘하던 후백제군에 3부대 중 2부대가 털렸는데, 그 사이 청주 전선의 [[유금필]]이 연산진과 임존성에서 승리한 틈을 타 [[인질]]을 교환하며 화친하는데 그쳤다. 왕건이 친정에 나섰던 928년 삼년산성 전투에서도 패배하여 결국 통일 전까지 [[삼년산성]]을 점령하지 못했다. [[공산 전투]]에서는 신속한 기동으로 서라벌을 함락해버린 견훤을 무리하게 추격하다 매복에 걸리는 바람에 [[신숭겸]], [[김락]] 등의 희생이 아니었다면 죽을뻔했다. 다만, '고창 전투'와 그 이후의 결정적인 육전들에서는 확실히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왕건의 진정한 장점은 명철한 결단력과 빠른 행동력, [[상인]] 가문 특유의 [[외교]]력과 궁극의 화친 능력을 들 수 있다. 그의 결단력과 행동력을 보여주는 사례로 [[관심법]]을 썼다며 역모를 자백하라 억지 부리는 궁예 앞에서 쿨하게 꾸미지도 않았던 반란을 모의했노라고 인정하는 모습, 말년의 궁예가 폭정을 휘두르자 부하들에 의해 [[역성혁명]]의 주역으로 추대되어 실행에 옮기는 모습, [[태봉]]을 멸하고 고려를 세운 후 항거하던 궁예의 봉신들을 화전양면책으로 재빨리 수습한 데서 그 능력을 엿볼 수 있다.[* [[김순식]], [[이흔암]], [[환선길]], [[임춘길]], [[공직(고려)|공직]] 등 왕건의 쿠데타 직후 이에 저항한 호족 세력들은 적지 않았다. 왕건 가문의 영지인 패서와 자신이 제압한 경기 일대를 제외한 동남쪽 다수의 호족들이 왕건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에 왕건은 환선길, 이흔암 등의 반란은 무력으로 신속히 제압하고, 김순식의 아버지 [[허월]]을 포섭하는 유화적 외교 전략으로 명주를 복속시키는데 성공한다. 또한 청주에서 반란의 기미를 포착하고 [[홍유]]와 [[유금필]]을 진천에 주둔시켜 청주 호족들을 견제한다. 반면 매곡성([[충청북도]] [[보은군]])을 통째로 [[후백제]]에 갖다 바치며 귀순한 매곡성주 공직은 후백제가 고창전투의 대패로 국력이 크게 위축되자, 932년 다시금 왕건에게 귀순하는데, 왕건은 자신을 배신한 호족에게 얹잖은 티를 내기는커녕 명마, 비단과 함께 백성군([[경기도]] [[안성시]])을 영지로 하사한다.] 후삼국 내의 호족들 외에 [[발해]]의 [[대광현]]과 [[발해유민]]들, 그리고 일생일대의 라이벌이었던 [[후백제]]의 [[견훤]]까지 포용하는 포용력을 보여주기도 했다. 협상가로서 호족들을 포섭하는 외교력과 친화력도 탁월하다. 쿠데타 직후 친 궁예 세력과의 싸움으로 인한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견훤의 아버지인 [[아자개]]를 회유하여 [[상주시|상주]] 지방을 획득했고, 궁예를 따르다가 왕건의 쿠데타 직후 독립을 선언했던 [[강릉시|명주]]의 신라 왕족 김순식도 4년 뒤 왕건에게 복속했다. 또한 견훤이 [[경주시|서라벌]] 정벌 후 직접 옹립한 [[경순왕]] 김부도 고려에 귀순시켜 영동/영남 지방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획득한다. [[공산 전투]] 패배 이후 후백제보다 군사적, 정치적 입지가 불리해졌던 상황에서도 '삼태사'라 불리운 토착 호족 세력(김선평, 권행, 장길)을 끌어들여 한창 수세에 몰려 있던 전세를 역전시켜 [[고창 전투]]에서 대승했다. 놀라운 수준의 포용력으로 호족 세력을 계속 끌어모으니 결국 견훤은 궁지에 몰렸고, 마침내는 최대의 적이었던 견훤마저 아군으로 삼아 외교적으로 후백제의 호족 세력들을 동요시켜 후삼국을 [[통일]]한다. 이런 결과는 생전에 호족들, 심지어는 가족들 간에도 화애롭지 못하여 몰락의 길을 걸었던 견훤과 비교하자면 서초패왕 [[항우]]와 [[고제(전한)|유방]]과 같은 모습이다. 물론 사료에서는 승리자를 예찬하고자 왕건의 이런 능력이 '천명', '인덕' 같은 단어로 포장되었으나 이러한 단어들만으로는 전란의 시대, 배반과 이합집산을 밥 먹듯이 하며 신라 [[왕실]]의 권위에도 반항하던 수많은 호족 세력들이 왜 왕건에게 포섭되었는가를 설명하기에는 충분치 않다. 때문에 상인 가문의 [[후계자]]로서 왕건은 서로 간의 이권이 첨예하게 얽혀있던 지역 호족들의 각기 다른 목적을 이해하고 있었고, 그에 걸맞는 현실적인 대안(부/명예/권력)을 제시할 수 있는 정보력과 외교력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강원도 일대에서 잘 나가기는 했지만 당시에는 고작 [[양길]] 휘하 일개 무장이던 궁예에게서 야심을 읽고 본거지인 송악을 통째로 바쳐 송악을 태봉의 첫 수도로 만들어 낸 왕륭이나 그렇게 얻어낸 궁예의 무력을 이용하여 이전에는 압도하지 못했던 패서 일대 호족을 단번에 태봉으로 복속시킨 왕건의 행동을 보면 당시 송악 왕씨 가문의 정보력과 교섭력은 상당한 수준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궁예 휘하에서 자기 세력을 확보해나가는 왕건의 행보와 쿠데타 이후, 전국구 [[네임드]] 호족에 대한 포섭 과정을 보면 왕건 스스로도 대세를 읽고 상대가 원하는 바를 제시할 수 있는 상인 가문의 기질을 상당 부분 섭렵했으리라고 추정할 수 있다. [[http://gonggam.korea.kr/newsView.do;JSESSIONID_WEEKLY=NdzTbKHLW1Q7GjqnJ7cJ2H0jjHQkJwyFvq9NnjyQWwnhJ82vMBQM!1086463106!214405626?newsId=01I2hlKb0DGJM000§Id=gg_sec_62|정훈이 만화: 《왕건, 통일의 기술》]] === 외교 정책 === [[거란]]과는 적대적인 관계를 표명했는데, 우선 태조 이전의 [[궁예]]는 거란과 친교 노선을 걸었던 것으로 보인다. 《[[요사]]》 <이외국기> -고려-편에 보면 915년 10월에 고려에서 사신을 보내 보검을 진상한 기록이 있으며, 918년에도 2차례나 사신을 보내는데 이 때는 궁예의 집권 시기였다. 후삼국 통일 7년 후인 942년 10월 거란의 [[태종(요)|태종]]이 [[송나라|북송]]을 공격하기에 앞서 후방을 안정시키고자 사신과 선물을 보내 통교할 뜻을 밝혔다. 그러나 왕건은 거란이 동맹국인 [[발해]]를 통수친 것도 모자라 멸망시키기까지 했으니 그들을 믿을 수 없다는 이유로 사신들을 모조리 섬으로 유배보내고, 선물로 왔던 [[낙타]] 56마리를 개성에 있는 만부교 다리 밑에 묶은 뒤 굶겨 죽였는데 이 사건이 '''[[만부교 사건]]'''이다. 태조가 이러한 반(反) 거란 정책을 철저히 펼친 이유는 발해의 멸망과도 관련이 깊은데 과거 거란이 발해와 친하게 지내다가 부족을 통합하고 결국 발해를 멸망시켰으며, 발해의 대씨 왕족과 지배층을 포함한 많은 유민들이 고려 내부로 들어왔기 때문에 정치적인 면에서라도 거란을 적대시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가 컸다. 당시 고려의 상황은 너무나도 불안했고, 이에 [[발해유민]]들은 태조와 고려에게 있어 중요한 존재로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발해 역시 고려와 같이 고구려를 이었다는 동류 의식 또한 태조의 거란 강경책에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발해유민]] 수십만 명보다는 후에 북송과 대결하는 거란을 적대시한 것이 정치적으로 훨씬 위험한 선택이라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는 일이다. 당시 고려는 후백제와의 전쟁 때문에 발해를 도와주러 갈 수도 없었으며, 막 삼한을 통일하고 분열을 수습한 시점에도 오랜 전쟁으로 피폐해진 민생과 국가를 되살리고 정치, 경제, 사회, 군사, 문화 등 여러 면에서 다양한 제도들을 확립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이런 시점에서 당대 동아시아의 최강으로 떠오른 거란과 적대하는 것은 당장의 이익만 따지면 그야말로 미친 정책이었다고 평할만한 것이다. 하지만 태조는 절대 당장의 이익만을 가장 우선시하는 속물적인 정치인이 절대 아니었다. 이것은 그가 왕위에 있는 동안 펼친 북방 관련 정책들을 통해 잘 알 수 있다. 태조는 [[고구려]]의 옛 수도였던 평양을 재건해 서경으로 승격시켰는데 이는 당연히 고구려 계승 의지를 전면에 드러내는 동시에 고구려의 옛 땅을 회복하려는 북진의 기상도 분명히 보여주는 행위였다. 그렇기에 훗날 [[조선 태조|이성계]]와 함께 고려 왕조의 문을 직접 닫은 [[정도전]]조차 태조 왕건의 북진 정책을 웅장하고 원대한 계략으로 칭송했을 정도였다. 고려가 결국 474년 사직 동안 [[한반도]] 바깥으로 영토를 확장하지는 못했지만[* 다만 공민왕 시기 몽골 제국의 혼란을 틈타 잠시나마 요동 진출에 성공하기도 했다.] 태조 시절에는 요동을 비롯한 고구려의의 고토 수복이라는 원대한 이상에 대해 진지하게 임했을 가능성이 높다. 전근대에 평양을 수도로 삼으려면 요동의 확보가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발해국 세자인 [[대광현]](大光顯)이 수만의 무리를 거느리고 투항해오자 '왕계'(王繼)라는 이름을 내려주고 종실의 족보에 올렸다. 또 특별히 원보(元甫) 벼슬을 주어 백주(白洲, 현 황해남도 배천군)를 지키면서 집안 제사를 지내게 했다. 따라온 막료들에게는 벼슬을 주고 군사들에게는 토지와 집을 차등있게 내려주었다. >---- >《고려사》 934년 7월 기사 中 발해 태자 [[대광현]]이 수만명의 발해 사람들을 데리고 태조에게 투항한 시점은 《[[고려사]]》, 《[[고려사절요]]》, 《[[동국통감]]》의 기록들이 서로 다른데 《고려사》는 934년 7월, 《고려사절요》는 925년 12월, 《동국통감》은 926년 1월의 일로 기록하고 있다. 공식적인 발해 멸망은 926년 1월로 이에 따라서 대다수의 [[한국]] 역사학자들은 대광현이 수만 명 혹은 수만 가구의 발해 사람들을 데리고 고려로 투항한 년도는 926년 1월 이후로 보고 있어 《동국통감》의 기록이 가장 사실에 근접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태조가 발해를 나의 나라로 친근하게 대하면서 발해를 침공해 멸망시킨 거란과의 외교를 단절하고 발해 유민을 적극적으로 포섭하기도 했다. 그는 [[후백제]]와의 수많은 전쟁 도중에도 늘 틈틈히 서경을 순행해 북진의 의지를 굳게 다졌고, [[신라]]가 황룡사 9층탑을 짓고 삼국을 통일한 것을 염두에 두고, 개성과 평양 두 곳에 탑을 쌓아 통일전쟁의 승리를 위해 고려 국민들의 사기 진작에도 힘썼는데 이때 개성에는 7층탑, 서경에는 9층탑을 지었다.[* 위치는 서경 장락궁 황성 근처에 있던 [[중흥사]].] 태조는 개경보다 서경을 더 중시했고 장래 수도로 삼을 계획을 내비쳤는데 932년 5월에는 공개적으로 장래에 서경으로 천도하겠다는 계획까지 발표하기도 했다. 하지만 서경 천도는 태조 본인 대에는 시행되지 않았고 제3대 [[정종(고려 3대)|정종]]이 다시 본격적으로 추진하나 이 역시 무산되어 없던 일이 되었고 끝내는 고려 사직 내내 서경 천도는 성공하지 못하는데 점차 개경 기득권이 된 [[문벌귀족]]들 및 왕씨 왕실의 보수화, 거란+여진+몽골로 이어지는 북방 민족들의 안보 위협이 있었을 것이다. 고려 말기 최고의 대유학자였던 익제 [[이제현]]은 고려 태조의 일생에 대한 논평에서 북진 정책 부분에 대해 결과적으로는 거란을 적대시함으로써 길고 긴 전쟁의 불씨가 되었다고 말했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익(실학자)|이익]]도 《성호사설》에서 태조의 선택을 비판하고, 이에 반해 [[금나라]]에 사대정책을 취한 [[인종(고려)|인종]]을 높이 평가하기도 했다. 단, 이는 [[성리학]]적 사관이 팽배한 [[조선]] 후기의 의견이라는 것은 감안할 필요가 있다. 거란을 적대한 것과는 달리 중원 왕조와는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려는 모습을 보였다. 특히 933년 [[후당]]으로부터 책봉받은 후 줄곧 사용하던 연호 '''천수'''를 폐지하고 그들의 [[연호]]를 썼을 정도였으며, 후당의 뒤를 이은 [[후진]]과도 사신을 주고 받는 등 후삼국 통일의 주도권을 잡은 이후부터 계속 중원 왕조와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다. 중국 기록에 따르면 태조는 [[오대십국시대]] 후진의 초대 황제 [[석경당]]에게 거란을 협공하자는 제안을 했다고 한다. 이를 보면 어떤 대척없이 무조건 주장한건 아니고 중국과의 협공 등을 활용해 거란 공격의 성공 가능성을 최대한 높여보려고 한 듯하다. 다만 태조가 삼국통일하고 강대해졌다는 중국의 기술을 보면 [[고구려]]의 영광을 되찾으려고 하는 태조의 야심을 보고 경계심을 가졌을 가능성도 어느 정도는 있다. 고구려와 중국의 [[역사]]적인 갈등을 생각한다면 고구려의 이름을 자칭하는 태조의 세력이 강해지는건 중국 입장에서 마냥 달갑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후 거란이 쳐들어오자 석경당은 [[태종(요)|요 태종]] 야율덕광에게 [[연운 16주]]를 넘겨준다. 딱히 거란에게 위협을 받거나 강요를 당한 것도 아니고 내란에서 거란 도움 받겠답시고 중원에서 가장 중요한 지역인 연운 16주를 요구받지도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자기가 나서서 넙죽 갖다 바쳤다. 심지어 신하의 극렬한 반대를 씹고 말이다. 석경당이 연운 16주를 거란에 넘겨줘서 수백 년 동안 중국을 고생시키는 근본적인 원인을 제공한걸 생각하면 진짜 별 생각없이 무시한 것일 수도 있다. 후에 중원 왕조를 두고두고 고생시키는 거란에게 중원의 입구를 거리낌없이 바친 사람이 고려가 요동을 합병해 성장하는 것을 견제할 안목이 있었을지는 의문이다. 일본에 대해서는 스자쿠 덴노 시기인 조헤이 7년(937)과 텐교 2년(939) 때 고려 측에서 사절을 보내 조공하겠다고 두 차례 요청했으나 일본이 거절했다. 태조에게 나라를 빼앗기거나 나라를 바친 군주로는 [[궁예]], [[견훤]], [[경순왕]] 김부, [[견신검]]이 있다. 이 중에서 생전에도 사후에도 제대로 왕 대접받은 자는 오로지 경순왕뿐인데 경순왕만이 사후에 [[왕릉]]이 만들어지고 [[시호]]를 받았으며 궁예, 견훤, 견신검은 그런 거 없다. 심지어 시신을 묻은 장소가 정확히 기록된 것도 경순왕뿐이고 나머지는 시신이 어디 묻혔는지도 모른다. 궁예야 애초에 왕건의 쿠데타 대상이었으니 그렇다쳐도 견훤은 생전에 '''상보'''라고 불릴 정도로 대접받았고 견신검은 투항 후 관직을 받았음에도 사후에 비참한 대우를 받은 것이다. == [[태조(고려)/가족관계|가족관계]]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태조(고려)/가족관계)] == [[태조(고려)/평가|평가]]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태조(고려)/평가)] == 기타 == ||<-3> {{{#670000 고려 태묘 백세불천위}}} || ||<-3> {{{#670000 성종 ~ 인종}}} || ||<-3> 태조 || ||<-3> {{{#670000 의종 ~ 공양왕}}} || || 태조 || [[혜종(고려)|혜종]] || [[현종(고려)|현종]] || ||<-3> {{{#670000 고려 경령전 백세불천위}}} || ||<-3> 태조 신성대왕 || * 왕건은 사후 [[종묘]][* '''유일한 불천지주였다'''. 이후 덕종이 태조, 혜종, 현종 세 명을 불천지주로 정한다.], 경령전(景靈殿)[* 태조의 영정과 상을 모신 진전. [[개경]]과 [[고려궁지]]에 있었다.], 성용전(聖容殿)[* [[서경(고려)|서경]] [[장락궁]]에 있던 태조 진전.], 효사관[* 개경 [[봉은사]]에 있던 태조 진전.]에서 1순위로 숭배 받는 대상이 되었고, [[환구단]], 초제[* 하늘에 지내는 [[도교]]식 제사.]에선 '''배제'''(配帝)[* 같이(배配) 제사되는 황제(제帝).]로써 하늘의 신들과 동급의 제사 대상이 되었다. 《고려사》 <예지> -[[원구단]]- 부분엔 임금이 하늘의 [[상제]]에게 제사 지낼 때 오방제와 [[태조]]를 같이 제사지내는데 이 때 매번 태조의 [[현릉]]에 사신을 보내 태조를 환구단에 모시겠다고 알려야 한다고 되어 있다. 그러고 나면 태조의 신위는 제단의 동쪽에 배치돼 청제와 같은 위치에 있게 둔다. * 《고려사》 <악지> 중 -속악- 부분이 있다. '속악'은 '향악'이라고도 하며 우리나라 가락과 우리 말로 만들어진 토착 노래를 말한다. 《고려사》는 유명한 고려의 <풍입송>이나 고대 삼국의 노래는 전부 속악으로 분류해놨다. 여하간 이 기록된 속악 중 <장단>(長湍)이란 노래가 있다. 이 노래는 성조(聖祖, 태조 왕건의 존칭)가 백성을 사랑했던 전례를 따라야 한다고 후대의 임금들을 훈계하는 내용이라고 한다. 정확한 가사는 알 수 없는데 《고려사》의 편찬자들이 우리말로 된 노래는 내용만 적고 실 가사는 빼버렸기 때문. 제목은 고려 장단현, 현 한국 경기도 장단군에서 따왔는데 후대의 군주 중 누군가가 장단현에 갔을 때 그 곳의 악사들이 이 노래를 지어 바쳤다고 제목이 <장단>이다. 또 속악 중 <송산>(松山)이란 노래도 있는데 이 노래의 내용은 태조가 송산에 자리잡아 개경을 도읍하니 국가가 세대를 거쳐 내려옴을 찬양하는 노래다. 송산은 [[송악산]]인데 고구려 이름인 부소산 등으로 불려왔다. 나름 건국군주 답게 태조에 관한 노래가 2개나 있다. * 경기도 [[철원]][[향교]]지는 후삼국 시대 궁예의 [[태봉]]국 시절 왕건의 집터로 유력하게 비정되고 있다. * '옥경대왕'(玉慶大王)이라는 별칭이 있다. 왕건의 아들 중 왕유(王裕)가 강릉 왕씨로 분적하였는데, 왕유의 손자인 [[왕총지]]의 《등과록》<전편>에 증조부의 이름이 옥경대왕으로 기록되어 있다. * 고려 왕조의 창업군주에 재위기간도 25년 가까이 되는데도 불구하고 은근히 존재감이 부족한 편이다. [[문명 시리즈]]에서도 두 차례 한국사를 대표하는 인물로 나왔지만, 왕건이 좀 격이 떨어진다고(?) 생각한 일부 네티즌들이 차라리 [[세종(조선)|세종대왕]]이나 [[광개토대왕]]을 등장시키라는 반응을 보였고 결국 잘렸다.(...) 사실 후삼국시대를 통일시켰다는 점에선 왕건 역시 명장인데 말이다. --[[지못미]]-- 그 외 고액권 지폐 인물 선정 등 일종의 인기 투표가 있을 때도 1위를 차지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나마 2000년 드라마 <태조 왕건>이 대히트해서 위상이 올라간 측면이 있지만[* 사실 이것조차 진짜 드라마의 재미 요소를 이끈건 [[궁예]]와 [[견훤]]이긴 했다.(...) --옴마니반메훔--], 이 드라마 외엔 왕건이 높은 비중으로 등장한 드라마가 거의 없다.[* 2010년대 드라마 중에선 조연급으로라도 비중있게 나온건 [[달의 연인 - 보보경심 려]] 정도 뿐이었다.] 이는 고려 자체가 비교적 조명을 덜 받고 있는 시대라 그런 점도 있고, 매체도 스토리로 쓰려면 뭔가 왁자지껄한게 있어야 좋을텐데 사실 진짜 군주로 재위하던 시절엔 후삼국시대가 끝나고 쿠데타도 딱히 없이 수십명 부인들과 자식들에 당시 기준으론 장수하며 재위도 잘 마치고 죽었기에 뭔가 --부러우면 지는거다--심심한 느낌이 있어서인지도 모르겠다. * [[파일:external/pds.joins.com/htm_2012032304247a010a011.jpg]] [[파일:external/thimg.todayhumor.co.kr/1435394936Fk52pNzzGdsCU5Ig2eVV81m4N3KXiR.jpg]] [[파일:external/pds.joins.com/htm_2012032304257a010a011.jpg]] [[파일:external/pds.joins.com/htm_2006060805255330003010-001.jpg]] 1993년 [[북한]] [[개성시|개성]] 태조 왕건의 능인 [[현릉]]의 봉분 외곽에서 출토된 왕건의 금동상. 일명 '왕건동상'이라고도 불린다. 태조의 동상은 고려 왕실 최고의 상징물로서 연등회의 첫 날이나 국가 중대사가 있을 때에 제사를 올리는 대상이었다. 당시 제작된 태조의 초상화도 여러 점 있었지만, 왕건동상이 가장 신성시되는 대표 상징물이었다. 머리엔 [[천자]]가 쓰는 통천관(通天冠)을 쓰고 있으며 몸은 [[나체]]다. 연구에 따르면 고려 시대의 인물상은 나체로 동상을 만든 뒤 그 위에 실제 옷을 입혔는데 현재 옷은 오랫동안 땅 속에 묻혀있던 탓에 사라졌다. 청동상 발굴시 발 쪽에서 [[비단]] 조각이 나왔고 허리띠의 일부로 보이는 유물이 나오기도 했다. 기록에도 왕건동상에 입힐 비단옷과 옥대(옥으로 만든 허리띠)를 봉헌했다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볼 때 유물과 사료가 교차 검증이 된다. 또한 [[성기]]가 매우 작게 표현된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런 방식을 '마음장상'(馬陰藏相)이라고 하며 성인으로서 성욕을 초탈한 모습을 표현한 불교적 양식이다. 의외로 이렇게 성기를 왜소하게 표현한 양식이 동서양을 불문하고 고대 / 중세 미술 곳곳에서 보인다. 고대 그리스 조각상의 남근이 모두 작게 표현된 것도 남성이 남근이 크면 지능이 떨어지고 욕망에 충실하다는 증거라고 생각했기 때문. 큰 남근을 가진 조각상은 죄다 생식을 관장하는 신, 반인반수 괴물, 늙고 추한 자, 혹은 야만적인 이민족을 나타낸 것이다. 지적이고 이상적인 그리스 남성을 묘사할 때는 절대 큰 성기를 표현하지 않았다. 이 성기 부분 때문에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북한]] 국보 전시회에서는 중요부분을 천으로 가려놓았다. 또한 이렇게 옷을 입힌 나체상을 모시는 형식은 [[고구려]] 때부터 내려온 유구한 제례양식으로 왕건동상 외에도 동신사에 모셔진 [[유화부인]]의 상이나 성모당(聖母堂)에 모셔진 송악산의 여섯 여신의 상에도 적용된 양식이었다. 고려 왕조가 망하자, 왕건동상은 고려의 태묘와 더불어 제거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워낙 신성시되던 동상이라 그런지 명분상 폐기가 어려워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1392년 7월 일단 지방으로 옮겨졌고, 1429년 8월 1일에 제례법 개정을 명분으로 나주에서 발견된 태조의 어진과 함께 태조의 능인 현릉 곁에 묻었다고 한다. * [[천안시]] 목천읍에서도, 왕건의 동상으로 추정되는 청동상의 일부(머리부분)가 발굴되었다. 그 모습이 개성의 왕건 상과 매우 유사하고, 고려 초기 양식이라는 점, 익선관에 임금 왕자가 쓰여있다는 점, 왕건과 연관성이 깊은 천안에서 발견되었다는 점 때문에, 지역 향토사학자들은 사실상 왕건의 동상이 분명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 통일 이후 왕건에게 있어서 가장 시급하게 다가온 현안은 [[호족(한국사)|호족]]들과 관련한 처우 문제였다. 호족들은 후삼국 통일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며 공신이 되었지만 그대로 놔둘 경우 왕씨의 [[왕권]]을 위협하는 세력이 되거나 반기를 들며 내란을 일으킬 가능성이 높았다. 왕건부터가 고려의 전신인 [[태봉]]의 건국 공신 중에서도 핵심 인물이자 호족 연맹체 국가에 가까웠던 태봉의 대호족 세력 중 1명이었다. 태봉의 신하에서 역성 혁명을 일으켜 [[궁예]]를 내쫓고 고려를 건국하여 임금 자리에 오른 선례가 자신인만큼 왕건 입장에서는 제2의 왕건이 나타나는 것을 경계해야만 했다. 따라서 왕건은 회유책과 강경책을 같이 써가며 호족들의 충성을 얻는 것과 동시에 조금씩 견제하는 모션을 취하게 된다. 회유책으로는 [[정략결혼]][* 정략결혼은 호족들이 많은지라 왕비 역시 수가 불어난 것이 문제였는데 왕후만 6명에 부인도 23명. 호족이 반란을 일으키면 딸은 폐서인 후 처형되기 때문에 호족들이 딴 생각을 품는 것을 막고자 하는 것이었으나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었고 이를 보완하고자 마련한 것이 사성정책이었다. 정략결혼은 그의 치세 중에는 지방 성주들과 화합을 도모하며 고려의 기반을 다지기에 필요불가결한 정책이었으나 왕건이 후계자로 지목한 왕무는 나주 오씨 소생으로서 패서 호족이 좌우하던 개경에서 한미한 가문 취급이었고 임종 직전 [[태자]]의 보필을 부탁하며 유훈을 맡긴 [[박술희]]는 궁예 휘하 일개 무관으로 시작해서 왕건의 최측근까지 올라선 입지전적인 인물이지만 가문의 기반은 미약했다. 통일 후 지방 성주와 호족들을 아우르는데 그쳐서 강력한 중앙 집권화를 이루지 못하고 [[왕위]] 쟁탈전의 불씨를 남기고 떠나게 된 건 결과론적으로 왕건 생전의 명철한 판단력과 기민한 행동력을 생각해 보면 분명 아쉬운 부분.], [[사성정책]][* '사성'(賜姓)이란 '성을 주다'라는 뜻으로 공을 세운 호족들에게 왕씨 성을 내려 그들의 충성을 얻어내는 것이다.], 역분전[* 지방 호족들에게 땅을 지급하는 것.] 정책을 들 수 있다. 강경책으로는 [[기인 제도]][* [[신라]]의 상수리 제도를 배경으로 만들어졌고 호족의 자제들을 [[개성시|개경]]에 머물게 하며 사실상 인질로 삼아 반란을 막는 정책이었다. 자식들의 목숨이 왕건 손바닥 안에 있었으니 호족들은 반기를 들 생각을 할 수 없었고 기인 제도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호족의 자녀들도 있었다고 한다.]와 사심관 제도[* 중앙 정부에서 지방마다 지방관을 보내지 않고 호족들의 자치권을 인정해주는 만큼 자신의 지방에서 반란이 일어나거나 지방민들에게 가혹한 정치를 펼처서 중앙 정부에까지 그 소식이 들리는 경우에 연대책임을 지도록 했다.]를 사용했으며 통일 이후에 공신들에게 녹읍을 최대한 주지 않아 [[경제]]적 기반이 커지는 것 또한 막으려 하였다. * 대내적으로 '''숭불정책'''을 실시했으며, 이러한 친불교 성향은 [[신라]] 하대 지방 호족이라는 출신 성분에서 기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새 왕조를 창업한 왕건으로서는 삼국시대부터 이미 삼국 모두의 국교가 [[불교]]였던지라, 이미 수백 년 동안 불교가 일상화된 국민들과 충돌하는 것도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훈요 10조>에서도 팔관회, 연등회를 거르지 말라고 할 정도의 엄청난 불교빠.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이 불교 행사가 지나치게 화려해진 탓에 불교 행사들이 민중고를 일으켜 [[성종(고려)|성종]]은 [[최승로]]의 <[[시무 28조]]>에 따라 일시적으로 몇 십년간 폐지시킨 적은 있다. 하지만 불교만 선호한 게 아니라 토속신앙 행사인 팔관회를 열고 산신령 소문으로 산의 이름을 바꾸는 등 [[도교]]와 여러 토속신앙에도 관심과 조예가 깊었다. * 고려 성종이 [[태묘]]를 만든 뒤, 태묘에 배향된 제왕들에게 바치는 악장, 즉 칭송의 노래가 만들어졌다. 예종 11년에 예종 기준 9묘(九廟)의 제왕에게 새로 바친 노래가 《고려사》 <악지>에 남아 있다. 이를 통틀어 <구실등가>(九室登歌)라고 한다. 또한 <예종 세가>엔 이 <구실등가>를 바치면서 각 방에 [[서경(고려)|서도(西都)]]에서 찾은 백옥으로 만든 도자기 그릇을 올렸다고 한다. 현 한국엔 성종 대 만든 태조의 방에 넣은 도자기 그릇이 실존하고 있다. >예종 대 태조의 찬가 제목은 <태정>(太定)으로 4글자 운구. >하늘의 영부(靈符)[* 영험한 부적. 천명(天命)의 다른 말이다.]를 받아, 많은 땅을 사랑하고 위로해주셨습니다. >그리하여 덕이 삼무(三無)에 맞으시고, 공이 백왕(百王)을 넘으셨습니다. >그 기쁨이 후손에게까지 이어지니, 오래 승계되고 누적되었습니다. >그러니 10,000년 동안 삼가, 사사(祀事)[* 제사에 관한 일. 제삿일.]를 받들겠습니다. > >하늘에 응해 기업(基)[* 회사 기업 말고 국가의 기틀을 이른다.]을 여시니, 넓은 계획이 극히 창성하였습니다. >성덕(聖德)과 신공(神功)이, 위대하며 당당합니다. >흐르는 빛을 이어받아 두텁게하니, 자손이 1,000억(千億)이 넘으셨습니다. >그리하여 제사를 치루는 것이, 영원히 끝이 없을 겁니다. >공민왕 12년 새로 악장을 만들었다. 제목은 없다. >우리 황태조(皇太祖)[* '태조황제'(太祖皇帝)란 뜻이다. 고려가 황제를 칭제하였다는 증거이다. 한데 후대 조선 때 기록에선 고려의 황제 칭호 기록에 대해 소극적으로 표현하였다.]께선 경명(景命)[* 커다란 사명. 천명(天命)의 다른 말이다.]을 가슴에 품으셨으니, >삼한(三韓)을 가져 인정(仁政)이 내려지고 얽혔습니다. > >허나 후사(後嗣)가 못나서 때때로 어려움을 만났습니다, >그러니 부디 음식을 드시고 좋은 일을 당겨오셔서 영원히 계승되게 해주십시오. >공민왕 20년 새로 악장을 만들었다. 제목은 없다. >오호라, 황왕(皇王)이시여! 천명을 받아 장수를 부리셨습니다. >그리하여 황량했던 [[고려|대동(大東)]]이, [[천하|사방(四方)]]을 다스리게 되었습니다. > >개국하시어 질서를 세우시니, 다음 [[황제|황(皇)]]들에게 이어졌습니다. >그러니 10,000년 동안 삼가, 복을 내리시고 끝없이 이어주소서. >고종 2년, 태조에게 시호 '용렬'(勇烈)을 추가로 올리면서 태묘에 <옥책>(玉冊)을 같이 올렸다고 한다. <옥책문>은: >[[전한|한(漢)]] [[고제(전한)|조(祖)]]의 삼척검을 들고, >우리 (태조의) 무예를 펼치셨습니다. > >[[은나라|은(殷)]] [[탕왕|탕(湯)]]의 아홉 제후를 끌고, >흥하시고 일어나셨습니다. > >제가 그 위대함을 논하지도 못하며, >어떤 이름도 그 위대함을 담지 못합니다. * [[파일:고려 태조 친필.jpg]] 2013년 '영남 유림의 절의와 사림정신'이라는 주제로 한 학술대회에서 왕건의 친필 추정 글씨가 공개되었다. 다만 학계에서는 '백원첩'에 담긴 이 글씨가 조선 중기에 유행한 광초체로 추정되고 다른 왕건의 친필체가 오늘날 남아있지 않아 비교가 어렵다는 점 등을 들어 진짜 친필인지는 확정할 수 없고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다는 입장을 보였다. == [[태조(고려)/대중매체|대중매체]]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태조(고려)/대중매체)] == 둘러보기 == [include(틀:태조(고려))] ---- [include(틀:한국사의 역대 연호)] ---- [include(틀:고려사)] [[분류:태조(고려)]] * 관련 문서: [[한국사 관련 정보]], [[만부교 사건]] [include(틀:다른 뜻1, other1=이 문서에서는 고려 초대 국왕 왕건에 대해 서술하고 있습니다. 왕건의 다른 의미, rd1=왕건(동음이의어))] ||<-5><:><#FFD700>[[고려청자|https://67.media.tumblr.com/d0ab98e78c55c6369f20b702ab560e77/tumblr_o9zoipyqmm1sqk8veo5_r2_400.png?width=50]][br] '''{{{+1 [[고려/왕사|{{{#800080 고려의 역대 국왕}}}]]}}}''' || ||<:> [[태봉]] 1대 [[궁예]] ||<:> {{{+1 ←}}} ||<:><#FBEC5D> '''{{{#black 초대 태조 왕건}}}''' ||<:> {{{+1 →}}} ||<:> 2대 [[혜종(고려)|혜종]] 왕무 || ||||||<:> http://sunday.joins.com/_data/photo/2013/04/20225216.jpg?width=400 [br] [[표준영정]]으로 지정된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고려 태조 어진. 이길범 화백의 작품이다.[br] 이 외에 왕건과 인연 깊은 [[충남]] [[논산]] 개태사가 별도로 그려 봉안한 어진이 있다. || ||<:> '''[[묘호]]''' ||||<:> '''[[태조]](太祖)'''[* [[조선]]시대에는 [[이성계]]와 구분하기 위해서인지 왕태조(王太祖)라고도 많이 불렸다.] || ||<:> '''[[시호]]''' ||||<:> 응운원명광렬대정예덕장효위목인용신성대왕[br](應運元明光烈大定睿德章孝威穆仁勇神聖大王) || ||<:> '''[[연호]]''' ||||<:> 천수(天授) || ||<:> '''[[능묘]]''' ||||<:> 현릉(顯陵) || ||<:> '''[[성]]''' ||||<:> 왕(王) || ||<:> '''[[휘]]''' ||||<:> 건(建) || ||<:> '''[[자(이름)|자]]''' ||||<:> 약천(若天) || ||<:> '''[[왕후]]''' ||||<:> [[신혜왕후]](神惠王后), [[장화왕후 오씨|장화왕후]](莊和王后), 신명순성왕후(神明順成王后)[br][[신정왕후]](神靜王后), 신성왕후(神成王后), 정덕왕후(貞德王后) || ||<:> '''[[부왕]]''' ||||<:> [[세조(고려)|고려 세조]][* 휘 [[왕륭]](王隆)] || ||<:> '''모후''' ||||<:> 위숙왕후(威肅王后) || ||<:> '''종교''' ||||<:> [[불교]] || ||<|2><:> '''생몰년도''' ||<:> 음력 ||[[877년]] [[1월 4일]] ~ [[943년]] [[5월 29일]] || ||<:> 양력 ||[[877년]] [[1월 31일]] ~ [[943년]] [[7월 4일]](67세) || ||<|2><:> '''재위기간''' ||<:>음력 ||[[918년]] [[6월 15일]] ~ [[943년]] [[5월 29일]] || ||<:> 양력 ||[[918년]] [[7월 25일]] ~ [[943년]] [[7월 4일]](26년) || ||<:> '''출생지''' ||||<:> [[신라]] [[개성특급시|송악]]군 사저 || ||<:> '''사망지''' ||||<:> 고려 개경 [[만월대|정궁]] 신덕전 || [목차] == 개요 == '''[[후삼국시대]]의 명장이자, [[삼한]]을 통일한 통일왕조 [[고려]]의 건국자.''' 877년, 송악([[개성]])에서 [[호족]] [[왕륭]]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후 [[후고구려]]를 세운 [[궁예]]의 휘하에서 [[장수]]로 활약하였는데 [[후백제]]의 해상요충지였던 [[나주]]를 점령하는 등 매번 신출귀몰한 전략을 세워 후고구려의 영토를 대폭 넓히는 공로를 세웠다. 왕건은 그러한 공적으로 인하여 한창 젊은 나이에 후고구려의 [[시중]] 자리까지 오르는 등 궁예의 신임을 받았으나 그가 점차 포악해지고 학정을 하여 많은 사람들이 등을 돌리기 시작했고 이윽고 여러 장수들과 대신들이 그를 진정한 왕의 재목으로 보아 추대하기에 이른다. 그는 [[정변]]을 일으켜 궁예를 제거하고 제위에 올라 [[연호]]를 천수(天授), 국호를 고려(高麗)라 하였다. 이후 후삼국 세 나라 중에서도 [[신라]]는 우호적으로 포용하고 후백제를 세운 [[견훤]]과는 거듭 대전하였고 왕건도 자못 패전하여 특히 [[공산 전투]]에서는 애신인 [[신숭겸]]을 잃으며 죽을 고생을 하기도 하였으나 신라가 그의 친화적 자세에 스스로 항복해오고 이후 후백제 왕 견훤이 [[장남]] [[신검]]의 반란으로 쫓겨난 뒤 투항해오자 936년, 마침내 [[일리천 전투]]에서 후백제와 결전하고 승리를 거두어 후삼국을 통일하게 된다. 현대 한국이 분단되어 있기에 역사를 가르칠 때 유독 '통일'과 '단일민족'을 강조하는 터라, 왕건의 명성과 인지도는 실로 높다. 신라 [[문무왕]] 이후로 2번째로 통일 국가를 이룩한 지도자인데, 신라의 경우는 당나라의 힘을 빌려 백제, 고구려를 쳤고, 결과적으로도 고구려의 고토는 대부분 차지하지 못했기 때문에~~사실상 이국통일?~~ 평가절하의 목소리가 적지 않은 반면, 그에 비하면 왕건은 특별한 외세 개입 없이[* 이건 왕건이 문무왕보다 특별히 뭔가 잘 해서 그렇다기보단 당시 국제 정세의 차이 때문이다. 삼국시대 때는 중국([[당나라]])과 일본 조정이 한반도 상황에 개입할 의지와 국력이 충분히 있었던 반면, 후삼국시대 때는 [[오대십국시대]]와 [[헤이안 시대]] 말기로 중일 둘 다 혼란기/쇠퇴기였기 때문에 한반도의 난세에 개입을 하고 싶었어도 할 수 없었던 점도 있다. 가령 후백제는 살아남기 위해 [[거란]], [[일본]]과 화친을 끊임없이 시도했는데 일본과 중국의 나라꼴이 멀쩡했다면 당연히 중일, 즉 외세가 참전했을 것이다.] 자력으로 통일을 이룬 인물이라는 점에서 매우 의의가 크다.~~왕건도 발해의 고토를 대부분 차지하지 못한 건 신경쓰지 않는다~~ 그가 이끄는 고려 왕조가 분열의 시대를 종식한 이래 '단일국가'로서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발전시키게 되었다.[* 물론 현대적인 의미에서의 민족·국가에 대한 개념이 확립된 것은 한참 후의 일이다.] === 성장기 === ~~이름이 스포일러~~ [[개성 왕씨]]로, 왕건의 족보에 대해서는 [[의종(고려)|의종]]대에 김관의가 쓴 <편년통록>에 따르면, 그의 조상이 [[고구려]] 유민이라고 한다.[*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623772&categoryId=49629&cid=49629|고려사 서문]]에 인용된 바에 따르면, 외가 쪽 시조인 자칭 성골장군 호경(신천 강씨의 시조이기도 하다.)이 백두산으로부터 두루 유람하다 개경의 부소산(송악산) 왼쪽 골짜기에 정착해서 살다가 여산신과 결혼해 산신이 된 후 옛 부인을 찾아와 자식을 두었는데, 그 자식의 자손 중 거사 보육의 막내딸 진의가 고려로 온 당 숙종과 결혼해 작제건을 낳았고, 그 작제건이 서해 용왕의 딸과 결혼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들은 돈이 많았다. 6대조 강충은 집에 천만 금을 쌓아 놓았을 정도였다. 왕건의 할아버지인 작제건은 상선을 타고 [[서해]]를 항해했다는 사실로 미루어, 해상 무역을 통해 부를 쌓은 것으로 보인다. 즉 왕건의 선대는 고구려 유민으로서 중원과의 해상 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한 지방세력가였다. 왕건의 아버지는 송악 지방의 [[호족]]이었던 [[왕륭]]이며 후에 후고구려의 [[궁예]]왕이 세력을 키우며 명성을 떨칠 적에 아버지와 함께 그의 휘하로 들어가 젊은 나이일 때부터 공을 세우며 벼슬도 계속 올라갔다. 아버지인 왕륭이 송악의 큰 세력을 지닌 호족인 점도 작용했겠지만 왕건의 능력도 만만치 않았다. 무엇보다 왕륭의 송악 세력은 패서 일대의 다른 호족들을 압도할 정도는 아니었음에도 어느 틈엔가 왕건이 호족 세력의 수장격이 되었다는 것은 왕륭과 왕건의 능력과 지략을 보여주는 증거다. 특히, [[후백제]]와 싸울 때에 [[견훤]]이 방심한 틈을 타서 해군을 이끌고 후백제의 중요지역인 무진주의 바로 아래에 있는 해안가 나주 지역을 점령했던 일은 최고의 공적이었다. 훗날 오랜 세월인 지난 후에 견훤이 탈환하기는 하였지만 나주를 통하여 백제의 도읍을 바로 등 뒤에서 공격할 수 있었으므로 오랜 세월동안 후고구려와 고려가 백제를 압박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이는 왕건이 무역을 통해 세력을 기른 호족 집안 출신이기에 본래 해전에 능한 반면, 견훤은 제해권의 중요성을 별로 느끼지 못하고 대처를 소홀히 했던 데에 있었다. 이후에도 후백제와의 수 차례의 전투에서 승리하는 것은 물론이고 내정에도 상당한 능력을 발휘하여 마침내 왕에 다음가는 지위인 [[시중]] 벼슬을 받았다. 그야말로 [[엄친아]], [[먼치킨]]급... === 고려 건국 === 후에 [[궁예]]가 중앙집권화를 위해 세력있는 호족들을 숙청하면서 뜬금없이 '''[[관심법]]'''으로 왕건의 마음을 꿰뚫어 역적 모의를 하고 있음을 알아냈다며 왕건을 압박한 일이 있었는데 이때 궁예의 옆에 있던 [[최응]]이 붓이 바닥에 떨어져 줍는 척 하면서 왕건에게 복종할 것을 넌지시 일러주었다. 이에 왕건은 스스로 역적 모의를 인정하고 죄를 빌자 궁예는 "그대는 과연 정직한 사람이다"란 칭찬과 함께 처단한 역적들로부터 몰수한 금은보화의 일부를 하사하면서 용서하였다. 이러한 궁예의 행동에 대해서는 의견이 많다. 대체적으로 궁예가 호족들을 압박하기 위해 당시 잘 나가던 왕건을 일부러 걸고 넘어져 무언의 경고를 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실제로 궁예는 왕권 강화를 위해 심지어는 패서 호족들을 대변하는 위치에 있었던 자신의 부인인 [[강비]]와 그 소생 왕자들까지 죽이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강비의 죽음으로 동요하는 패서 호족들에게 보내는 메시지였다는 해석도 있긴 하다. 왕건도 (내 위세에 눌려서) 역심을 실토했으니 너희들이라고 무사할 것 같으냐?라는 것. 궁예가 정말 미치지 않고서야 갑자기 [[시중]] 벼슬에 있는 인물을 증거도 없이 역적으로 몰리도 없고, 게다가 역적 모의를 시인했음에도 정직하다는 칭찬과 함께 금은보화를 하사했다는 점에서 왕건의 마음을 떠보기 위한 궁예의 수작이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실제 저 다음의 궁예와 왕건의 대화는, 요약하자면 "그건 그렇고 지난번에 니가 주장한 해군 증강 계획 말인데, 니가 맡아서 해라" 쯤 된다. 사실상 새로이 증강된 해군은 왕건의 지휘 하에 들어가게 되므로 궁예는 그 전에 미리 왕건의 기를 꺾어놓으려고 했던 것. 그러나 이 일로 왕건은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 일단 그 자신이 시중 벼슬에 있으면서 호족들 가운데에서도 손가락에 꼽을 만큼의 세력가였으므로 자신도 궁예에게 숙청당할 수 있다는 두려움을 품게 된 것이다. 그러던 상황에 고려의 4대 개국공신인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이 찾아와 '''지금의 왕은 포악하여 나라를 다스릴 수 없으니 시중이 왕위에 올라야 합니다'''라고 간청하였으나 왕건은 주저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때 부인인 신혜왕후 유씨가 갑옷을 내와 직접 입혀주면서 무언의 설득을 시도하였고 마침내 왕건도 결단을 내려 충성을 맹세한 4명의 무장들과 함께 궐기하였으며 [[궁예]]를 몰아내고 918년 6월 15일 [[고려]]를 건국하고 [[연호]]를 '천수(天授)'라 했다. 이때 그의 나이 불혹을 약간 넘긴 42세였다. 이듬해 왕건은 도읍을 철원에서 자신의 근거지인 송악으로 옮겼다. === 견훤과의 대결 === || http://www.minjog21.com/news/photo/200811/3341_9670_418.jpg?width=350&height=450 || || [[개성특급시|개성]]의 왕건 능인 현릉에 있는 왕건의 초상화. [br] [[문명 4]]에서의 왕건 모습은 여기서 따온 듯하다. || 고려의 왕이 된 왕건은 초기에 큰 난관에 부딪혔다. 왕건이 궁예를 몰아낸 사실에 대해 반발하는 세력들이 적지 않았던 것이다. 일단 이들을 잘 구슬려 나라를 안정시키는 일이 급선무였던 왕건은 [[후백제]]왕 [[견훤]]과 화친을 맺고 충돌은 피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견훤이 신라의 요충지였던 대야성을 쳐서 함락시키자 위기감을 느낀 왕건은 후백제의 군대와 조물성에서 충돌한다. 그러나 양 측의 힘이 비등하여 승부를 내기가 힘들어지자 서로 간에 인질을 교환하여 다시 화친을 맺었다. 그러나 고려에 인질로 가 있던 견훤의 조카가 갑작스레 병사하자 견훤은 왕건을 의심하게 되었고, 결국 고려와 후백제는 다시 충돌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전황은 왕건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일단 궁예를 따르던 몇몇 성주들과 호족들이 고려에 귀순하기를 거부하고 오히려 후백제에 붙어버리는 일이 자주 일어났다. 특히 삼년산성에서 왕건이 패배한 결정적인 원인은 호족들이 후백제로 투항했기 때문이었다. 보통 온화했던 성품의 왕건도 이 때만은 법을 굉장히 엄격하게 시행했다. 태조 왕건에서는 후백제로 투항한 호족과 장수들의 가족을 모조리 철퇴로 때려죽이고 시신은 까마귀 밥이 되게 하였다. 칼 대신 철퇴로 죽인 이유는 시신이 온전하게 보존되지 않는 처형법이기 때문... 정사에서도 왕건이 이렇게 혹독하게 법을 시행한 적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적었다. 또 후백제왕 견훤 역시 수많은 전투를 통해 다져진 노련한 전술과 만만치 않은 실력으로 왕건을 몰아 붙였다. 이 때에 왕건은 견훤에게 수 차례 패하며 수세에 몰렸는데 특히 공산 전투에서는 1만 명, 연구에 따라 2만에 가까운 병력을 잃고 개국 공신이었던 [[신숭겸]]마저 전사하는 등 엄청난 피해를 입었고 왕건은 신숭겸의 도움으로 황급히 도망가면서 [[대구광역시/공산 전투 관련 지명|대구의 많은 지역의 이름을 붙여줬다.]] 이 도주 루트를 따라 대구시가 신숭겸 장군 유적지에서 [[안심역]]에 이르는 팔공산 왕건 길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본래 공산 전투 당시에 왕건은 견훤이 신라를 공격하여 [[서라벌]]을 점령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신라를 구원한다는 명목 하에 기병 부대를 이끌고 급히 [[서라벌]]로 향하였다. 이때 견훤은 왕건의 군대가 온다는 말을 듣고 즉시 군사를 물렸는데 왕건은 견훤의 군사가 수적으로 열세에 놓여 겁을 먹고 도주한 것으로 착각하고는 여세를 몰아 진격하였다. 그러나 이는 견훤의 계략으로 급히 추격해오던 왕건의 군대를 매복술로 공격하여 크게 무찔렀던 것이다. 게다가 견훤이 여세를 몰아 부하 장수 상귀로 하여금 개경 앞바다를 공격해 왔을 때에는 처음으로 '''해전에서 패배'''하는 수모를 겪었다. 왕건이 비록 바닷가에서 태어나 물에 익어 해전에 능했다고는 하나 견훤도 나주를 빼앗긴 후에 절치부심하여 열심히 해군력을 길러 왔던 것이었다. 연이은 패배로 인하여 왕건은 일생 일대의 위기에 부딪혔다. 이후에 왕건은 마음을 다잡고 다시 후백제와 국운을 건 싸움을 수 차례 벌였다. 사실 공산 전투에서 왕건은 엄청난 피해를 입고 후백제에게 패권을 내주다시피 했었지만 발해 유민의 합류로 그 전력을 다시 회복했다. 양측의 세력이 비슷하여 쉽사리 결판이 나지 않던 중, 고창 전투에서 후백제의 군대를 크게 격파하여 8천의 적군을 무찌르고 견훤의 여러 장수와 책사들을 사로잡는 등 대승을 거두었다. 이 전투의 무대가 되었던 안동 지역의 세 호족 가문이 왕건을 지원해 주었던 것이 승리의 요인이었는데, 왕건 특유의 넓은 포용력과 친신라 정책이 토착 세력들의 호감을 끌었던 듯하다. 승리 후에 왕건은 안동의 호족들에게 벼슬을 내렸는데 이때 왕건에게 벼슬을 받았던 김선평, 권행, 장정필이 안동 김씨, 권씨, 장씨의 시조로 알려져 있다. 이들을 '안동 삼태사'라 부른다. 반면에 견훤은 서라벌을 공격하고 신라 왕을 자결케 한 사건 때문에 신라인들과 여러 호족들의 반감을 샀다. 견훤은 이 기점에서 크게 기가 꺾여 버렸는데 고창 전투로 입은 피해를 제대로 수습하기도 전에 후계자 분쟁이 일어나 나라가 분열되면서 후백제는 서서히 세력을 잃어갔다. 결국 후계자 문제에 휘말려 아들이었던 [[신검]]에게 왕위를 강탈당하고 유폐되었던 [[견훤]]이 [[고려]]에 귀순하였는데 왕건은 견훤을 받아들여 [[대인배]]의 면모를 드러내어 민심을 얻고 이를 후백제와의 결전에서도 잘 이용할 수 있음을 간파하여[* 실제로 이후 후백제를 칠 때 견훤도 동행했는데 견훤이 있는 것을 본 후백제 장수 중 일부가 "어? 저기 우리 대왕님이 계시네?" 하고는 그대로 항복했다. 이는 후백제 내에서 인망은 신검보다 견훤이 한 수 위라는 사실 ~~물론 어차피 질 거 미리 항복하자는 심보도 있을 수 있다.~~] 한때는 원수였던 견훤을 '''상보 어르신'''이라 부르며 극진히 대접하였다고 전해진다.[* 인질을 교환해 화친을 한 후 이렇게 불렀다고 한다.][* 말만 상보라 부른게 아니라 진짜 '''적국의 전왕+신라인에게는 천하의 개쌍놈+빈털터리에 아무 힘도 없는 거지노인'''인 견훤에게 집도 주고 재산도 넉넉하게 지급해 주었다.] 상보란 한자로 尙父로 쓰며, 이때는 아비'부'가 아닌 어르신'보'로 새겨읽으므로 상부가 아닌 상보가 정확하다. 왕이 손위의 권신에게 사여하는 존칭으로서, "그대는 우리 아버지(즉 선왕)보다 못하지 않음"정도의 뉘앙스. ~~그런데 왕건과 견훤은 10살 차이~~ 이렇게 견훤마저도 왕건에게 큰 대접을 받자 견훤은 감화되었다고 전해진다. 왕건이 견훤마저도 거두어들였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후에 신라도 고려에 투항해왔고, [[발해]]가 멸망한 후에 태자가 유민들을 이끌고 망명하자 이 또한 받아들이니, 이 시점에서 고려의 국력은 이미 후백제를 훨씬 압도하였다. === 후삼국 통일과 말년 === || http://www.minjog21.com/news/photo/200811/3341_9672_4422.jpg?width=550 || || 왕씨 족보에 그려진 왕건 || 이 때에 [[신검]]은 쿠데타를 일으킨 이후 몇 개월만에 간신히 내란을 평정하여 왕위에 올라 왕건의 공격에 대비하였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왕건이 발해계 잔당과 북방의 이민족, 그리고 견훤을 비롯한 한반도 남부 일대의 세력을 아우른 10만의 대군을 이끌고 내려오자 후백제는 [[망했어요]]... 마침내 [[후삼국시대]]를 50년만에 종결시켜 삼국통일을 이루는 대업을 이루었다. 후삼국의 통일 사업을 완수한 후에는 국가의 체계와 기틀을 잡는 한편 장남이었던 왕무를 후계자로 세우기 위해 정치적 공작을 벌이기도 하였다. 왕무는 왕건이 왕위에 오르기 전, 궁예 휘하에서 장수로 활약하던 시기에 얻은 아내로부터 얻은 아들이었으나 그 외가 쪽 가문의 세력이 무척 한미하였기 때문에 다른 쟁쟁한 호족들로 부터 얻은 아들들이 왕위를 탐낼까 염려하였기 때문이다. 왕건이 이렇게 장남을 후계자로 삼으려 노력한 것은 장남을 무시하였다가 결국 나라를 망국의 지경에 이르게 했던 일생의 라이벌 견훤의 선례를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보았기 때문이라는 말도 있다. 하여간, 이 덕분에 본래 왕위에 오를 가능성이 희박하였던 장남 왕무가 훗날에 왕건의 뒤를 이으니 그가 바로 [[혜종(고려)|혜종]]이다. 왕건은 최후에 자신이 무척 아꼈던 충복이었던 강직한 재상 [[박술희]]와 [[왕규]]를 불러들여 아들의 후견인 역할을 맡기고 그를 지켜줄 것을 부탁하였으며 마지막으로 고려의 왕이라면 국가를 다스리는데 참고해야 할 [[훈요 10조]]를 남기고 사망하였다.[* 그러나 이에 대해선 논란이 있다. 항목참조.] === 최후 ===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서는 왕건의 붕어를 매우 생생히 기록하고 있다. 재위 26년째인 서기 943년 5월 정유일, 재신(宰臣) 염상(廉相)과 왕규(王規), 박수문(朴守文) 등이 왕을 모시고 있었는데 왕이 이르기를, "한문제(漢文帝)의 유조(遺詔)에, '대개 생명이 있는 천하 만물은 죽지 않는 것이 없다. 죽음은 천지의 이치며 만물의 자연이니 어찌 심히 슬퍼할 것이 있으랴.' 하였으니, 전고(前古)의 명철한 군주는 마음가짐이 이와 같았다. '''내가 병에 걸린 지 이미 20일이 지나 죽음을 제집으로 돌아가듯이 여기고 있으니, 무슨 근심이 있으랴.''' 한문제의 말이 곧 나의 뜻이다. 오랫동안 처리하지 못한, 도성 안팎의 중요한 일은 경들이 태자 무(武)와 함께 재결한 후에 아뢰라." 하였다. 며칠 후인 병오일. 이 날 죽기 직전에 왕건은 신덕전에서 학사 김악에게 유조를 적게 했다. 유조에는 내외의 모든 관료들은 다 태자의 명령을 따르도록 할 것이며, 장례와 무덤의 제도는 [[한문제|한나라 문제]]와 [[조비|위나라 문제]]의 고사에 의거하여 검소하게 지내라고 지시했다. 이 유조를 다 불러 주고는 갑자기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러자 신하들은 왕건이 세상을 뜬 줄 알고 큰 소리로 통곡을 했는데 말이 없던 왕건이 갑자기 --[[훼이크]]-- 신하들에게 "이게 무슨 소리냐?"라고 물었다. 그래도 신하들은 오열을 멈추지 않고 "성상께서는 백성의 부모이신데 오늘 신하와 백성들을 버리려 하시니 신들이 슬픔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라고 말했는데, 혼란스런 한반도를 통일하고 오백년 고려의 왕업을 다진 이 영웅은 다음과 같이 의미 있는 말을 마지막으로 남기고 웃더니 잠시 후 정말로 세상을 떠났다. >'''"뜬구름처럼 덧없는 인생은 예로부터 그러한 것이니라."''' ~~완전 쿨함~~ 사실 관련 기록이 여기서 완전 끝나는 건 아니고, 500년 후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면서 [[왕씨 몰살]]을 했을때 왕건이 이성계 꿈에 나타나 화를 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죽은 뒤에는 [[현릉]]에 안장됐는데, 이후 고려가 [[여요전쟁]], [[여몽전쟁]]을 하면서 왕건의 유골도 적에게 능욕당함을 막기 위해 [[강화도]] 등지로 여기저기 이동해야 했다. == 능력 == http://www.daejonilbo.com/admin/news/news_photo/oImg/2014/04/09/20140409010004922000000102.jpg 개태사가 별도로 그려 봉안한 어진 --'''부인 29명'''-- 당대에 왕건 자신의 군사적 능력도 결코 뒤떨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특히 패서 호족이었던 만큼 [[수군]]을 잘 다루었던 것으로 보이며, 이는 [[후백제]]의 후방인 [[나주]] 지방을 상륙전으로 빼앗은 것에서 잘 드러난다. 나주를 빼앗긴 견훤은 그야말로 언제 뒤쪽을 가격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수십년 동안 시달렸다. 하지만 아무래도 [[견훤]]보다는 한 수 아래였던 듯. [[공산 전투]]에서는 견훤을 무리하게 추격하는 바람에 그야말로 탈탈 털려서 [[신숭겸]]의 희생이 아니었다면 죽을 뻔 했고, 장기인 해전에서도 비록 나중에 되찾았다고는 하나 나주를 빼앗기는 등, 나중에는 견훤이 압도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왕건의 진정한 장점은 '''궁극의 화친 능력과 유화력.''' '''견훤의 아버지'''인 [[아자개]]를 회유하여 상주 지방을 영향권에 들게 하고, 견훤이 세운 [[신라]]의 왕인 [[경순왕]]도 아군으로 끌어들여 신라를 자신의 편으로 붙게 했다. 또한 한창 수세에 몰려 있던 전세를 역전시킨 고창 전투에서의 승리도 토착 호족 세력의 마음을 빼앗은 덕분에 가능했었다. 놀라운 수준의 화친 능력으로 호족 세력을 계속 끌어모으니 결국 견훤은 궁지에 몰렸고, 마침내는 최대의 적이었던 '''견훤마저 아군으로 삼았다'''(...). ~~패왕색의 패기~~ --물량 앞에 장사 없지-- 이런 결과는 물론 정략이나 용인술로도 설명할 수 있지만, 아무래도 그 토대가 되는 왕건 자신의 인화력이 대단한 수준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호족들, 심지어는 가족들 간에도 화애롭지 못하여 몰락의 길을 걸었던 견훤과 비교하자면 그야말로 [[항우]]와 [[한고제|유방]]과 같은 모습이다. == 정치 스타일 == 고려의 통일 이후 왕건에게 가장 큰 문제는 [[호족]]들에 대한 처우 문제였다. 호족들은 후삼국 통일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지만, 그대로 방치할 경우 최소로는 왕권 위협, 최악으로는 독립해서 내란을 일으킬 가능성이 컸다.[* 더 나아 갈것도 없이 왕건부터가 고려의 전신인 태봉의 건국공신 세력이자 호족연맹체 국가에 가까웠던 태봉의 대표적인 호족 실세 중 한 명이었다. 태봉의 신하에서 역성혁명(관점에 따라선 군사 쿠데타)을 일으켜 궁예를 내쫓고 왕이 된 자신이라는 매우 휼륭한 선례가(...) 있는 만큼 왕건 입장에서는 제2, 제3의 자신이 나타나는 것을 경계해야만 했다.] 따라서 왕건은 회유책과 강경책을 병용해 호족들의 충성을 얻는 것과 동시에 조금씩 견제해 나갔다. 우선, 회유책으로는 [[정략결혼]], 사성 정책, [[역분전]] 정책이 있었다. 정략결혼은 이 항목에 들어올 위키러들이라면 누구나 알 만한 그 정략결혼이다. 그런데 호족들이 상당히 많은지라 왕비가 수십명이었다. 왕후가 6명에 부인이 23명. 당연히 정략 결혼에는 ~~신체적인~~ 한계가 있었고, 이를 보완하는 것이 [[사성정책]]이다. 사성(賜姓)이란 글자대로 '성을 주다'라는 뜻으로, 공이 있는 호족에게 왕씨 성을 내려 충성을 얻는 것이다. 또한 지방 호족들에게 땅을 지급하는 역분전 정책도 사용했다. 그리고 지방마다 일부러 지방관을 파견하지 않아 [[본관|호족들이 기존에 누리던 기득권을 인정]]해 주었다. 강경책으로는 [[기인 제도]], 사심관 제도를 썼다. 상수리 제도를 기초로 삼는 기인 제도는 호족의 자식들을 개경에 머물게 하며 사실상 인질로 삼는 것이다. 피같은 자식들의 목숨이 왕건 손에 있으니 호족들은 반기를 들 수 없었다. 기인 제도로 자살하는 호족의 자녀들도 있었다고..... 사심관 제도는 중앙정부에서 지방마다 지방관을 파견하지 않고 호족들의 자치권을 인정해주는 만큼, 자신의 지방에서 [[자치]](정확히는 지방에 준 행정, 치안상의 특권. 즉, 기득권)가 막장일 경우[* [[반란]]이나 [[봉기]]가 일어나게 한다던가 아니면 지방민들에게 너무 가혹한 정치를 펼처서 중앙정부의 귀에까지 그 소식이 들린다던가 하는 경우] [[연대책임]]을 물게 하는 제도였다. 또한 삼국통일 이후에 공신들에게 녹읍을 최대한 주지 않아 경제적 기반 확대를 막으려 했다. 숭불정책을 실시했으며, 이러한 친불교성향은 [[신라]] 하대 지방 호족이라는 출신 성분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 사실 [[조선]] 이전엔 유교보다 불교가 더 선호되었다. 유교를 믿기 위해서는 글을 읽을 줄 알아야 하는데 어려운 한자를 일반 백성들이 익히기는 거의 불가능했다. 이 때문에 국가차원에서 [[한글]]과 그림을 이용하여 인,의,예,지,신,충,효 와 같은 유교의 기본 덕목을 알리기 위해 애를 썼지만 살기도 팍팍한 민중들에게는 차라리 내세에 대한 믿음이나 현세를 구원한다는 [[미륵신앙]]이 더 잘 먹혔다. 때문에 조선시대에도 불교는 개인신앙으로써 큰 역할을 차지했다. [[팔관회]]나 [[연등회]]같이 온 나라가 들썩일 정도의 규모는 아니여도 흉년이 들거나 하면 민심을 달래기 위하여 국가차원에서 여는 불교행사도 있었고 국가차원에서 건립한 사찰도 어느정도 있었다.][* 또한 유교가 본격적으로 종교적 색채를 띄기 시작하는 성리학이 등장하기 이전이기 때문에 유교는 학문으로서 받아들여지던 시대이기도 하였다. 때문에 종교로선 불교가 선택되고, 실제 통치 이념은 유교에서 기반한 경우가 많았다. 실제로 성리학이 등장하기 전의 고려에선 유교와 불교가 공존하는 형태를 띄지만, 성리학 도입 이후인 공민왕대에 들어서면 유학자들이 가차없이 불교를 비판하여 공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며 이후 조선이 건국되어 성리학을 국교로 삼음으로서 불교는 한반도에서 완전히 몰락하게 된다.] 그리고 애초에 신라의 국교가 불교였던지라, 국민의 대다수인 불교신자와 충돌하는 것도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훈요 10조]]에서도 팔관회, 연등회를 거르지 말라고 할 정도의 엄청난 불교빠.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이 불교행사가 지나치게 화려해진 탓에 불교행사들이 민중고를 일으켜 [[성종(고려)|성종]]은 최승로의 시무 28조에 따라 일시적으로 몇십년간 폐지시킨 적은 있다. 덤으로 [[훈요 10조]]에 '차령산맥 이남 공주강(금강) 바깥은 배역의 땅이니 인재를 등용치 말라'는 말을 남겼는데 이건 지금의 [[전라도]]를 뜻한다며 지역드립을 유발시키는 곳에 자주 쓰이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2대 왕 [[혜종(고려)|혜종]]이 전남 나주 출신 호족의 외손자라는 것과 [[신숭겸]], [[최지몽]] 같은 측근들의 존재를 간과한 것이다. 태조 왕건에 대한 대중역사서를 썼던 김갑동 교수는 흔히 훈요십조의 이 내용이 전라도 지역을 가리키는 것을 해석 문제로 보고 친궁예 세력이 발호했던 청주지역이나 후백제 세력의 마지막 저항이 있던 충청도~전주 일부라고 보고 있다. 그리고 훈요 십조에 따르면 공주강 이남이라는 말은 영산강유역은 따로 분류될수 있기 때문에 노령산맥 이상 그러니까 지금 현재의 충남 일부와 전북지방에 해당될 수도 있다. 한마디로 공주강 지금 금강 이남전체를 뜻하는게 아니라 "상당히 큰 세력인 후백제(견훤)와 궁예 세력을 들여 분란을 일으키지 말라"정도로 해석하는 것이 맞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왕건의 [[예언]]이 맞게 되었다. 고려의 멸망을 이끈 이성계는 [[전주 이씨]]였으니. [[조선왕조실록]]에서도 이성계 때의 대신들이 '고려왕조가 훈요 10조를 계속 지켰다면 오늘날의 전하(이성계)는 없었을 것이다'라고 말하는 대목이 있다. >전조(前朝)의 태조(太祖)가 후손(後孫)에게 훈계를 전하면서 백제(百濟) 사람을 쓰지 말라고 했는데, 지난번에 후손들이 그 훈계를 준수했더라면 〈전주 사람인〉 전하께서 또한 어찌 오늘날이 있었겠습니까? - [[조선왕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aa_10302026_002|태조실록 5권, 태조 3년 2월 26일 병신 2번째기사]] 다만 이성계 자신은 실제로 태어난 곳은 함흥 출신이고 그 아버지, 할아버지도 북방 군벌이었으니 상당히 오래 전에 본관 전주를 떠난 것으로 보인다.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과는 적대적인 관계를 표명했다. 요나라가 화친을 위해 보낸 사신들을 귀양보내고 선물로 온 낙타 50마리는 개경 만부교에서 굶겨 죽였다.([[만부교 사건]]) 이러한 이유는 발해의 멸망과 관계가 있는데 발해가 과거 거란과 친하게 지내다가 거꾸로 멸망당한 사실이 있고, 발해 유민들이 고려로 많이 유입이 됐기 때문에 정치적인 이유에서라도 거란을 적대시 할 수 밖에 없었다. 당시 고려의 상황은 불안정한 상태였기 때문에 발해 유민들은 왕건에게는 상당히 중요한 존재였다. 멀리 보기 보단 가까이에 있는 이득을 취하는 왕건의 특성상 그에겐 최선의 선택이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거란를 적대시 함으로서 [[여요전쟁|길고 긴 전쟁]]의 불씨가 되었다. [[성호사설]]에서도 왕건의 선택을 비판하기도 했다. == 평가 == >'''"태조는 아랫사람에게 너그럽게 대하여 어질고 지혜 있는 사람이 힘을 다하였고, 사람들에게 성심으로 대접하여 멀든 가깝든 모두가 그를 따랐으니, 살리기를 좋아하는 인덕은 천성에서 나왔고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은 지극한 정성에서 나온 것이다. 견훤이 부자간에 서로 해치자 토벌하여 취하였고, 신라는 군신이 와서 의탁하자 예를 갖추어 그들을 대우하였다. 강한 거란이 동맹국을 침략해 멸망시키자 국교를 단절하였고, 약한 발해가 나라를 잃고 돌아갈 데가 없자 이를 위무하여 받아들였다. 자주 서경에 행차한 것은 근본이 되는 땅으로 만들려는 까닭이었으며, 친히 북방의 변경을 순수한 것은 사나운 풍속을 합쳐 교화하려 함이었다. 왕업을 처음 창건하여 모든 것을 고쳐 시작하였으니 비록 예악은 미처 제정하지 못했으나, 그 큰 규모와 원대한 계책이며 깊은 인덕과 후한 은택은 진실로 이미 5백 년의 국맥을 배양하였던 것이다."''' -[[고려사절요]] 1권 태조 신성대왕 편 중에서 >'''"어진 사람을 좋아하시고 착한 일 하기를 좋아하셨다. 자기 생각을 미루고 남의 생각을 존중하며, 공손하고 검소하며 예의를 지키셨다. 모두 천성에서 우러난 것이었다. 민간에서 자라 어렵고 험한 일을 두루 겪으셨기에 사람들의 참모습과 거짓 모습을 모두 알아보셨고, 일의 성패도 내다보셨다. …(중략)… 재주 있는 사람을 버리지 않으셨고, 아랫사람이 가진 힘을 모두 쏟을 수 있게 도우셨으며, 어진 사람을 취할 때와 간사한 사람을 쫓을 때에 주저함이 없으셨다."''' -[[최승로]]의 시무 28조 중에서 왕건은 이념과 시대에 관계없이 평가가 매우 후하다. 분열된 후삼국을 통일하고 발해유민을 포용하여 이후 남북한 분단까지 천 년간 이어지는 단일국가의 기틀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한국인의 역사의식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게다가 고려-조선 교체기처럼 외세의 영향을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고대를 청산하고 중세를 열었다는 점도 높이 평가받는다. 민족 포용책을 썼고, 적국에 대해 매우 관대한 면도 그렇고, [[무신정권]] 시절 이런 가치를 내세운 반란세력이 있긴 했지만 왕건 이후엔 지역에 기반을 둔 신라나 백제의 부흥운동 같은 게 대부분 사라졌다는 점에서 단일한 민족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다.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 발해가 건국되어 남북국시대가 열렸으며 나당 연합군에 의한 고구려와 백제의 멸망이라는 그 태생적 한계 때문에 수백 년 후 후고구려와 후백제가 다시 등장하였고, 이를 통일한 것이 고려이며, 국호부터 정책까지 고구려와 발해로 이어지는 영토에 대한 생각을 버리지 않았으며(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으로 좌절되었지만), 그렇기 때문에 고려 태조 왕건을 지금의 한국을 있게 한 통일의 시조로 본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예를 들면 위기에 처한 발해 및 [[발해부흥운동]]을 돕지 않아 한국사에서 만주가 떨어져나가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 있다. 926년 발해 본국의 붕괴는 아직 여유가 없었다지만, 후백제를 멸한 이후에도 [[정안국]]이나 [[흥료국]] 같은 발해 후속국들이 지원을 요청해오면 거리를 두는 정책을 펴고, 단지 귀순해오는 일부 유민만 받아들이기도 하였다.[* 사실 이는 외교에 관한 일로 볼 수 있는데, 발해 부흥국들은 대놓고 거란의 적대세력이었으므로 이들을 지원하게되면 당대 최강국 거란과의 전면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아무리 진취적인 건국초기라지만 거란 역시 전성기였던 터라 그 아무리 전쟁에서 잔뼈가 굳은 왕건이라도 함부로 결정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당장 거란이 고려에게 대놓고 시비걸며 서경이북을 내놓으라던 성종시기 고려의 조정은 서희가 나서기 전까지 바짝쫄아 서경이북을 할양하기로 마음먹었던것만 봐도..] 또한 적극적인 혼인 동맹으로 호족들을 안정시켰다고는 하지만 확인된 부인만 29명으로, 이쯤 되면 혼인 동맹의 의미가 없다. 더군다나 꼭 필요한 가문과 결혼한 것도 아니다. [[혜종(고려)|혜종]]의 어머니 장화왕후 오씨의 부친 오다련은 나주 호족이긴 했으되 당시 행정구역상으로만 나주인 목포에 있던 인물이었고 고려사에서는 대놓고 오씨를 원나잇 상대로 하려 했으나 오씨가 임신하려고 노력해 성공했다는 대목이 나온다. 결론은 정치적인 목적도 있었으나 그가 건드렸다가 덜컥 임신한 사람들을 많이 들였다는게 된다. 서전원부인의 경우 그나마도 가문도 전해지지 않을 뿐더러 부친이 관직을 가지지도 않았다. 결혼동맹이 이렇게 막장이 되자 그 가치의 인플레를 막기 위해서 왕가와 결혼할 수 있는 가문을 정하기도 했고 근친혼이 성행하게 된다. 더불어 왕족들의 성씨를 정하는 제도도 설정하게 되는데 이것도 걸작이다. 물론 안 좋은 쪽으로. 왕씨와 결혼한 여자가 아들을 낳으면 왕씨 성을 따르지만 딸을 낳으면 할머니의 성을 따른다.[* 가령 드라마화로 인지도가 있는 [[천추태후]]의 경우 왕건의 친손녀이지만 성씨는 할머니에서 따 온 황보씨였다. 그리고 가까운 친척인 [[경종(고려)|경종]]과 근친혼을 하게 된다.] 즉, 왕족이 딸을 낳아도 그 딸은 할머니의 성씨를 따르게 되며 이리되면 왕건 대부터 시작한 유력한 호족 가문과 지속적으로 혼인동맹을 맺을 수 있고 지위의 인플레도 막을 수 있긴 하다. 문제는 이게 당대 가치관으로 봐도 정상적이지 않다는 거다. 뿐만 아니라 후계 구도를 엉성하게 잡아서 아들 [[혜종(고려)|혜종]]의 위치를 위태롭게 했다. 후견인이라고 붙여준 것이 박술희인데 박술희는 왕건이 아끼던 인물이긴 했으되 힘이 없었고 그렇다고 모계쪽이 힘있는 호족도 아니었다. 상기했듯 오다련은 진짜 나주 호족도 아니고 세력을 가질만큼 강한 인물도 못됐다. 그렇다면 사돈가문을 힘있는 가문을 들였냐 하면 그도 아니었다. 이뭐병. 당시가 건국초이고 호족 세력이 강한만큼 황주 및 개경세력을 지지기반으로 해주거나 그도 아니라면 충주나 청주, 광주, 경주 같은 패서지방이 아닌 타지역에 기반을 둔 유력한 호족과 맺어주어 개경세력을 견제하도록 해줬어야 했다. 결국 고려 초기의 정치적 혼란을 초래했다는 비판을 피하기 힘들어졌다. 후삼국 통일을 이룬 왕건의 업적과 이후 한국사의 흐름에 미친 영향은 분명 굉장히 크다고 볼 수 있으나 현대 한국인들에게 왕건의 인기는 한국사에서 가장 인기있는 몇몇 위인들[* 광개토대왕, 세종대왕, 이순신 장군 등]보다는 한 수 아래로 여겨지는 듯 하다. 문명 시리즈에서도 여러 차례 한국사를 대표하는 인물로 나왔지만 한국 유저들은 왕건이 좀 격이 떨어진다고 생각했는지 차라리 세종대왕이나 광개토대왕을 등장시키라는 반응이 많았고 결국 짤렸다. 그 외에 고액권 지폐 인물선정 등 일종의 인기투표가 있을 때도 1위를 차지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비록 드라마 태조 왕건 하나가 대히트했었지만 그 외에 왕건이 높은 비중으로 등장한 드라마도 하나도 없었고, 은근히 존재감이 부족하다. == 왕건 상 == http://pds.joins.com/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1203/23/htm_2012032304247a010a011.jpg http://pds.joins.com/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1203/23/htm_2012032304251a010a011.jpg http://pds.joins.com/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1203/23/htm_2012032304257a010a011.jpg http://pds.joins.com/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0606/htm_2006060805255330003010-001.JPG 1993년 [[북한]] [[개성특급시|개성]] 태조왕건의 능인 [[현릉]]의 봉분 외곽에서 출토된 왕건의 금동상. [[조선왕조실록]]에서 세종 10년 8월 1일에 고려 태조의 어진과 동상을 능 곁에 묻었다고 하는데 그 동상으로 보인다. 머리엔 [[통천관]](通天冠)을 쓰고있으며 몸은 [[나체]]다. 연구에 따르면 고려시대의 인물상은 나체로 동상을 만든 뒤 그 위에 실제 옷을 입혔는데 현재 옷은 오랫동안 땅 속에 묻혀있던 탓에 사라졌다.[* 청동상 발굴시 발 쪽에서 [[비단]] 조각이 나왔고 허리띠의 일부로 보이는 유물이 나오기도 했다. 기록에도 왕건 청동상에 입힐 비단옷과 옥대(옥으로 만든 허리띠)를 봉헌했다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볼 때 유물과 사료가 교차검증이 된다.] 위의 상에는 [[성기]]가 매우 작게 표현된 부분을 볼 수 있는데, 이를 '마음장상'이라고 하며 성인으로서 성욕을 초탈. 모습을 표현한 불교적 표현이다. 이 때문에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북한]] 국보 전시회에서는 중요 부분을 천으로 가려놓았다. 나체 상에 옷을 입히는 형태의 상은 토속신앙의 조각상의 양식이라고 한다.[[http://blog.hankyung.com/raj99/338284|#]] == 아내와 자녀 == * 같이 보기 - [[고려시대의 호족들]] 부인이 많기로 유명하다. 역사를 잘 모르는 사람이라도 태조가 많은 부인을 가졌다는 사실 정도는 알 정도. 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즉위 초 불안한 왕권과 낮은 정통성을 보완하기 위해 유력귀족들과 혼인을 통해 혈맹을 맺는 혼인정책을 펼쳤다. 사서 등 알려진 바에 따르면 29명의 부인을 두고 있고 부인들 모두는 유력 지방 호족이거나 공신들의 딸이다. 이 혼인 정책은 태조가 살아있을 땐 그들의 딸을 인질로 삼아 반역을 억제하는 기능을 하였지만 사후에는 유력귀족을 외가를 둔 쟁쟁한 왕자들 덕분에 왕위쟁탈전의 빌미를 제공하였다.[* 사실 왕건이 무조건적으로 정책을 위해 부인들을 많이 둔 건 아니다. 예를 들면 장화황후 오씨의 경우도 정책 때문에 결혼한 사이가 아니었다. 왕건의 부인 숫자는 왕건의 여성편력을 볼 수 있는 부분이다.] === 왕후 === *제1왕후 : [[신혜왕후]] 류씨(정주[* 현재 [[개풍]]] [[호족]] 류천궁의 딸) *제2왕후 : [[장화왕후]] 오씨 (나주 호족 오다련의 딸) *아들 : 2대 국왕 [[혜종(고려)|혜종]] 무 *제3왕후 : [[신명순성왕후]] 유씨([[충주]] 호족 유긍달의 딸) *아들 : OO태자 태(홍복원부인 홍씨[* 홍주(현재 홍성) 호족 홍규의 딸]의 사위) *아들 : 3대 국왕 [[고려 정종(3대)|정종]] 요 *아들 : 4대 국왕 [[광종(고려)|광종]] 소 *아들 : 추존왕 문원대왕 정(추존왕비 문혜왕후의 남편) *아들 : 증통국사[* 승려이며 이름은 전해지지 않는다.] *딸 : 낙랑공주(신라 56대 국왕 [[경순왕]]의 아내) *딸 : 흥방궁주(원장태자의 아내) *제4왕후 : [[신정왕후]] 황보씨(황주 호족 황보제공의 딸) *아들 : 추존왕 [[대종]] 욱(선의왕후 류씨의 남편) *딸 : [[대목왕후]] 황보씨(광종의 왕비) *제5왕후 : [[신성왕후]] 김씨(신라 왕족 김억렴[* 경순왕의 큰아버지]의 딸) *아들 : 추존왕 [[안종]] 욱(헌정왕후 황보씨의 남편) *제6왕후 : [[정덕왕후]] 류씨(정주 호족 류덕영의 딸)[* 제1왕비 신혜왕후 류씨와 같은 가문으로 신혜왕후가 자식이 없이 세상을 뜨자 같은 가문에서 왕비를 들인걸로 추정된다.] *아들 : 왕위군 *아들 : 인애군 *아들 : 원장태자(흥방궁주의 남편) *아들 : 조이군 *딸 : 추존왕후 문혜왕후(추존왕 문원대왕의 아내) *딸 : 추존왕후 선의왕후 유씨(추존왕 대종의 아내) *딸 : OO공주(의성부원대군의 아내) === 후궁 === *후궁 : 헌목대부인 평씨(경주 호족 평준의 딸) *아들 : 수명태자 *후궁 : 정목부인 왕씨(명주 호족 왕경의 딸) *딸 : 순안왕대비[* 왜 시호가 왕대비인지는 전해지지 않는다.] *후궁 : 동양원부인 유씨(개국공신 [[유금필]]의 딸) *아들 : 효목태자 의 *아들 : 효은태자 원 *후궁 : 숙목부인 O씨(대광 명필[* 현재 경남 진주가 아닌 충북 진천이다. 명필의 성은 전해지지 않으며 임씨로 추정하고 있다.]의 딸) *아들 : 원녕태자 *후궁 : 천안부원부인 임씨(문신 임언의 딸)[* 시호에 천안이 들어가지만 천안출신이 아니며 경주출신이다.] *아들 : 효성태자(정종의 사위) *아들 : 효지태자 *후궁 : 흥복원부인 홍씨(홍규의 딸) *아들 : OO태자 직 *딸 : OO공주(태자 왕태의 아내) *후궁 : 대량원부인 이씨(협주 호족 이정언의 딸) *후궁 : 후대량원부인 이씨(협주 이원의 딸) *후궁 : 대명주원부인 왕씨(명주 호족 왕예의 딸) *후궁 : 광주원부인 왕씨(대광 [[왕규]]의 딸) *후궁 : 소광주원부인 왕씨 (왕규의 딸) *아들 : 광주원군 *후궁 : 동산원부인 박씨(순천 호족 [[박영규]]의 딸이자 후백제의 초대 왕 [[견훤]]의 외손녀. 정종의 정비 문공왕후, 문성왕후와는 자매지간) *후궁 : 예화부인 왕씨 ([[왕유#s-2|왕유]]의 딸) *후궁 : 대서원부인 김씨(서경 호족 김행파의 딸) *후궁 : 소서원부인 김씨 (김행파의 딸) *후궁 : 서전원부인[* 왕건의 29명 부인 중 유일하게 성씨와 가계, 출신, 후손등이 알려지지 않은 인물.] *후궁 : 신주원부인 강씨[* 아들이 있었으나 요절하였고 신명순서왕후의 아들을 양아들 삼아 길렀는데 그 아이가 훗날 [[광종(고려)|광종]]이다.](아찬 강기주의 딸) *후궁 : 월화원부인(대광 O영장의 딸) *후궁 : 소황주원부인[* 성씨는 전해지지 않으나 시호로 보아 황보씨로 추정하고 있다.] *후궁 : 성무부인 박씨(평주 호족 [[박지윤]]의 딸) *아들 : 효제태자 *아들 : 효명태자 *아들 : 법등군 *아들 : 자리군 *딸 : OO공주([[경순왕]]의 아내) *후궁 : 의성부원부인 홍씨(개국 공신 [[홍유]]의 딸) *아들 : 의성부원대군(정덕왕후 류씨의 사위) *후궁 : 월경원부인 박씨(박수문[* 박지윤의 아들이며 박수경의 형] 의 딸) *후궁 : 몽량원부인 박씨(박수경[* 박지윤의 아들이며 박수문의 동생]의 딸) *후궁 : 해량원부인(海良院夫人)(대광 O선필의 딸) == 오늘날의 왕건 == === 드라마 [[태조 왕건]] === [[왕건(태조 왕건)]] 참조. === 그 외 한국의 사극들 === 재밌는 점은 이 드라마가 왕건을 주인공으로 다룬 최초의 작품이긴 하지만 왕건이 '''최초로 등장'''한 사극은 아니라는 것이다. {{{#!html }}} 최초로 등장한 사극은 다름 아닌 '''[[용의 눈물]]'''. [[이성계]]의 꿈에 나타나 산발하고 길게 수염을 늘어트린 모습으로 "네가 내 후손들을 죽였으니 [[1차 왕자의 난|너 역시 벌을 받으리라]]!"라며 칼을 들고 위협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 역전의 용사이자 왕인 이성계가 비굴하고 겁에 질린 모습으로 왕건 앞에 무릎을 꿇고 어쩔 줄 몰라한다. 일회성 등장이지만 어쨌든 등장은 등장이니. 이성계의 꿈에 나타나 그를 위협한 이야기는 [[야사]]에 전하는 이야기다. 이 때문에 이성계가 한양으로 천도할 결심을 세웠다고 한다. 사실 작중 이성계가 꿈에서 왕건을 만나게 된 계기는 나이와 몸을 생각하지 않고 천도를 서두르며 강행군을 한 여파 때문이다. 이 당시 배우는 [[성우]] 출신 탤런트인 [[김경응]] 씨. 김경응씨는 또 회안대군 [[방간]]의 아들인 이맹종 역할로 출현하였다. 즉 1인 2역. 그리고 훗날 [[정도전(드라마)]]에서는 최영의 조카이자 이성계 암살사건을 주도한 김저 역할로 출연해서 역시 조선 건국세력과는 대척점에 서는 역할을 맡았다. 그런데 제일 백미는 [[태조 왕건]]에서는 --자기 자신의 부하 장수인-- 박수문 역할로 나왔다. 이 야사는 [[용의 눈물]]과 비슷한 시대를 다룬 [[정도전(드라마)]]에서도 약간 반영이 되어 나온다. 다만 왕건이 직접 등장한 것은 아니고, 조선을 건국한 직후 [[이성계]]가 옥좌에 앉아 있다가 '네 이놈!!'하고 꾸짖는 환청을 듣는 것으로 표현되었다. 이 장면이 나오기 직전에 "목소리만이라도 최수종을 까메오 출연하는게 어떨까?"라는 농담성 제안이 넷 상에서 나돈 적이 있었다. 실제로는 최수종이 아니라 당시 음향 제작진 중 한 명이 목소리 연기를 했다고. 대신 직접적으로 왕건이 묘사된게 아니라서 이 야사를 잘 모르는 사람은 왕건의 목소리인지 잘 모를 듯하다. 용의 눈물 때와는 달리 여기서의 이성계는 호통소리를 듣고도 "뭐? 뭐?"라며 태연하게 대꾸하는, 좀 더 역전의 용사다운 모습으로 나왔다. ~~보면 뭐? 보다는 머?에 가깝게 발음해서인지 은근히 개그스럽다.~~[* 다만 그래도 무섭긴 무서웠는지 얼마동안 용상에 앉는걸 꺼려했다.] 사실 왕건 입장에서는 이성계에게 극도로 빡칠 만한 게, 왕건 역시 쿠테타로 나라를 뒤엎고 자기가 왕이 된 뒤 두 나라를 항복시켜 통일을 이루기는 했지만 최소한 이성계처럼 자기가 무너뜨린 나라의 왕족들을 대대적으로 학살하지는 않았다. 왕건이 직접 죽였다고 확실히 기록된 전 왕족은 후백제의 양검, 용검 정도인데 양검과 용검은 '''불효자+역적'''이라 사실 죽어 마땅한 짓을 한 인간들인데다, 이들의 아버지인 [[견훤]]부터가 이들을 죽이라고 왕건에게 종용했다. [[신검]] 또한 결국 왕건에게 죽었다는 설이 있으나 이 인간도 '''불효자+역적 괴수''' 입장이라는 걸 감안하면 역시나 죽는 게 당연하고,[* 재미있게도 태조 왕건에서 견훤을 연기한 배우 서인석은 정도전에서는 최영, 신검을 연기한 이광기는 이방원의 책사격인 하륜을 연기했다.] 이후 후백제의 견씨나 신라의 김씨, 박씨, 석씨 등을 대량으로 학살했다는 기록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으니(...)[* 여담으로 왕건과 이성계는 왕위에 오르는 과정이 비슷한데 둘 다 지방 세력가에서 출발해서 아버지와 함께 자기가 뒤엎은 나라에 투항했고 거기서 무공을 세워 세력을 쌓은 뒤 왕위에 올랐다. 단 끝은 왕건이 더 좋았다는 차이점이 있을 뿐.] 그런데 고려라는 왕조 자체가 호족 세력들의 연합 정권으로 시작했기 때문에 왕건이 왕좌에 앉아 있다 해도 어느 가문을 찝어서 모조리 죽여버리거나 압박할 상황이 아니긴 했다.[* 대신 그의 아들이자 4대 임금 광종이 이 일을 맡게 된다.] 왕씨 학살은 이후 태종 이방원이 이건 "그거 아버지 뜻 아님ㅇㅇ" 발언을 시작으로 차츰 완화하기 시작하였고 문종때 가면서 왕씨에 대한 탄압 정책이 완전히 폐지되었다... [[왕씨 몰살]]의 근본적인 원인은 사실 태조 이성계 본인에게 있었기에 언제 왕씨가 들고 일어날지 모른다는 공포가 작용했다는 이야기가 존재. 태조 왕건 이후 시간대인 [[제국의 아침]]에서는 말년 임종 직전 모습으로 나온다. 배우는 바뀌었으며, 작품 자체가 전형적인 정치드라마였기에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고 종영. 제국의 아침 이후 시간대를 다룬 [[천추태후]]에도 왕건이 등장한다. 천추태후가 어릴때 혼령으로 나타나는 장면이 있고, 태조 시절의 노신 최지몽이 나타나 회상하는 장면에서도 등장했다. 방영될 당시에 일부 시청자들이 최수종을 까메오로 쓸 것이지...하는 아쉬움을 보였다. ~~[[대조영]]이라고 오해를 받을까봐 안 나왔다 카드라~~ 사실 최수종이 까메오로 나오더라도 몸값이 워낙 적지 않은 거물이기는 하여 섭외하기 어려운 어른의 사정도 있겠지만. 이렇듯 사극에서 높은 빈도로 등장하고, 또 등장하는 극의 비중도 높은 역할로 등장하는 조선 태조 이성계에 비하면 한국사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고려왕조의 창업군주 치고는 태조 왕건 때를 빼면 사극에서 주역으로 나온 적이 없다. 역사적 비중에 비하면 사극에서의 대접이 매우 박한 편. 제국의 아침, 천추태후나 [[빛나거나 미치거나]]에서 등장한 것처럼 '과거의 영웅'이라는 이미지나 극 주인공에게 영향을 주는 인물로 등장하는 경향이 있다. 2016년에 [[SBS]]에서 방송하는 드라마 [[달의 연인 - 보보경심 려]]에서는 조민기가 이 인물을 맡았다. 또한 [[1970년]]에도 왕건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 <태조왕건>이 제작되기도 하였다. 왕건이 궁예의 폭정으로부터 백성들을 구하기 위해 궐기하여 고려를 세우는 과정을 영화화한 듯. === [[시드 마이어의 문명]] === http://www.civfanatics.com/images/civ3/ptw_leaders/x_Wang_Kon_happy.jpg ([[문명 3]]에서의 왕건) http://upload.inven.co.kr/upload/2011/08/17/bbs/i0468692320.jpg?width=250 -- 위의 어진과 뭐가 닮았다는거지?-- ([[문명 4]]에 등장하는 왕건) --[[이게 뭐야 몰라 무서워]]-- 화내면 더 무섭다.[[http://cfile213.uf.daum.net/image/130B941D4C5C7BEE26C149|#]] 이상하게 시드 마이어의 [[문명]] 시리즈에서 계속 [[한국]]의 지도자로 등장한다. 한국 팬들은 [[광개토대왕]]이나 [[세종대왕]]을 지도자로 하게 해달라고 여러번 건의했으나... 3이나 4 모두 왕건이 한국의 지도자. --하지만 5에서는 세종대왕이 나왔지-- 게다가 3에서는 '''[[대머리]]'''로 등장한다. [[http://upload.inven.co.kr/upload/2011/08/17/bbs/i2401432972.jpg|베타버전이 더 무섭]] [[http://www.inven.co.kr/board/powerbbs.php?come_idx=2097&iskin=it&l=31461|시대가 변하면서 더 안습해진다.]] --[[친일파]] 스타일-- 그 이유에 대해서는 [[고려청자]]와 고려 [[인삼]]만이 알려진 탓이 아니냐는 분석과 시드 마이어가 유일하게 본 드라마가 [[태조 왕건]]이라서가 아니냐는 설이 있지만 확실치는 않다. --태조왕건을 봤으면 최수종이 나와야지 이런 양반이 나오겠냐-- 사실 Korea라는 단어의 어원이 되는 고려왕조의 창시자이기도 하고, 조선왕조까지 이어지는 한반도 통일국가의 역사를 잡은 인물이라는 점에서는 왕건이 지도자가 되어도 이상할 것은 없긴 하지만. 대신 [[문명 5]]에서는 [[세종대왕]]이 한국의 지도자로 등장한다. 문명 4에서의 지도자 특성은 재정적, 방어적. 어정쩡한 특성이라고 하는 유저도 있는 듯한데 아무래도 '방어적' 특성 때문에 그런 듯하다. 하지만 재정적 특성이 꽤 괜찮은 특성이고 특성 잘 이용해서 굴리면 꽤 할만하다. 자세한 건 [[문명 4 워로드]] 항목의 첫 카테고리 참조. 물론 후속작의 세종--패--대왕의 포스에 비하면 후달리지만 절대로 '구린' 지도자는 아니다. 애당초 문명 4에서는 '구린' 지도자는 없다. 해당 항목에도 나온 얘기지만 확장팩에서 '공격적, 방어적'이라는 괴이한 조합으로 변경된 일본을 제외하고는. 그리고 저 왕건의 모습을 보고 '''아무리 봐도 중국인같이 생긴''' 왕건의 얼굴을 보자 "이게 뭐야! [[나의 아스카는 그러지 않아|나의 왕건은 이렇지 않아!]]", "[[다시는 한국을 무시하지 마라|아놔 지금 한국인 무시하나요?]]" 등의 반응을 보이는 네티즌들이 대부분인데, 사실 저 얼굴이 어떤 의미에서는 고증이 잘 된 얼굴이다. 왕건의 얼굴에 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용모는 용안(龍顔)과 일각(日角)이며 턱이 풍만하고 이마가 넓었다.''' 기우(氣宇)와 도량이 크고 깊었으며, 목소리가 우렁차고 컸으며, 너그럽고 후하여 세상을 구제할 도량이 있었다. > - [[고려사절요]] >'''용안(龍顔) 일각(日角)에 턱은 모나고 이마는 넓으며,''' 기우(器宇)가 크고 깊으며, 말소리가 크며, 성품이 관후(寬厚)하여 세상을 구제할 도량이 있었다. > - 동사강목 >'''얼굴은 일각(日角)의 상에 턱이 모나고 이마가 넓었으며''' 간국(幹局)이 크고 깊었다. 음성이 우렁차고 성품이 관후(寬厚)하여 제세(濟世)의 도량(度量)이 있었다. > - 삼국사절요 턱이 풍만하고 이마가 넓었다는 기록을 보면 상당히 후덕한 풍채의 인물이었던 듯. 아무래도 [[최수종|태조 왕건으로만 왕건을 접해서]] 저런 모습(...)에 충격을 받은 것 같다. === [[천년의 신화]] === 2000년에 출시된 전략 시물레이션 게임인 [[천년의 신화]]에서는 고려측의 영웅으로 등장한다. 기마 영웅으로 칼을 휘둘러 공격하는데 공속이 느린 편이지만 [[임진록2]]의 [[곽재우]] 분신술과 비슷한 보호신장 기술을 가지고 있다. 게임 속 얼굴과 캐릭터 조형은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 묘사된 왕건의 모습을 따 왔다. === [[김성한(작가)|김성한]] 작가의 소설 고려태조 왕건 === ||||||||||<:> [[김성한(작가)|김성한]] 작가 한국사 역사소설 || ||<:> [[요하#s-2]] || '''왕건''' || [[이성계#s-13.3.1]] || [[7년전쟁(김성한)|7년전쟁]] || http://image.aladin.co.kr/product/7738/73/cover/8990496853_1.jpg 7년 전쟁으로 유명한 김성한 작가 소설. 이성계와 요하의 뒤를 이어 나온 3번째 역사소설이다. 흔히 왕건 하면 떠오르는 전통적인 왕건의 이미지인 德을 강조한 소설. 1980년대에 나온 소설이지만 [[궁예]]를 재평가하는 시대를 앞서간 모습을 보여줬고 훗날 드라마 [[태조 왕건]]에 영향을 줬다. 김성한 작가는 세달사의 위치를 강원도 영월이 아닌 개성부근으로 가정했고, 여기서 어린 [[궁예|선종]]과 왕건이 조우한다. 사실상 궁예와 견훤까지 조명한 후삼국시대 소설이라고 보면 된다. 소설은 절판되었다가 최근 2016년 2월에 재출간되었다. 총 5권. === KBS의 인형극 쌍룡검 === 1978년 [[KBS]]에서 방영한 인형극 쌍룡검의 주인공이 왕건이다. 여기서는 왕건의 할아버지인 [[작제건]]의 설화부터 시작해서 신라 왕자 궁예가 애꾸가 되는 에피소드, 견훤의 아버지가 지렁이라는 설화 등도 다 나오는지라 정작 주인공 왕건의 등장 장면은 상당히 늦은 편이다. 어린이용 인형극이었지만 관련 설화들도 상세히 설명되고 내용도 드라마틱하고 캐릭터들의 개성도 뚜렸한 상당한 수작이었다. 이 인형극을 기억하는 세대는 드라마 왕건보다 오히려 더 나았다고 평하는 사람도 있다. === [[영걸전 시리즈]] === [[삼국지 조조전 온라인]]에서 [[http://gall.dcinside.com/board/view/?id=zohong&no=96030&page=1&exception_mode=recommend|신성대왕의 패]]에 속하는 주요 무장에 속하는 고대 무장이다. 병종은 군주계. 참고로 50특성이 '''상태 이상 반사'''에 모자라 80특성이 [[등애]], [[학소]]의 특성으로 나온 무려 '''특수 공격 면역'''이라서 등장시 채용 가치가 있을 전망. --물론 무력에서는 삼한 군주들 중 제일 낮다는 게 함정-- === 그 외 === KDX-2 [[충무공 이순신급]]의 4번함인 DDH 978은 왕건의 이름을 따서 왕건함으로 명명되었다. ~~정작 함에서 구르는 수병들은 왕견함으로 부른다~~ 왕건이 장수로서 보여준 먼치킨급 활약과 혼란스러운 후삼국 시기를 평정한 제왕으로서의 면모를 높이 평가받아 이렇게 명명된 것으로 보인다.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2 : 더 포가튼]]에서 개성 미션에서 등장한다. [[분류:고려의 왕]] Load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