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변경문서 보기수정 내역 헌종(조선) (버전 비교) [include(틀:역대 조선 국왕)]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972000, #bf1400 20%, #bf1400 80%, #972000)" {{{#ffd400 '''헌종 관련 틀'''}}}}}}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include(틀:조선의 왕자/중종 ~ 고종)] ---- [include(틀:대한제국의 황자/태조 ~ 고종)] ---- [include(틀:역대 조선 왕세자)] ---- [include(틀:대한제국 추존 황제)]}}}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972000, #bf1400 20%, #bf1400 80%, #972000)" '''조선 제24대 국왕[br]{{{+1 헌종 | 憲宗}}}'''}}}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c19c22, #e3ba62 20%, #e3ba62 80%, #c19c22)" '''대한제국 추존 황제[br]{{{+1 헌종 성황제 | 憲宗 成皇帝}}}'''}}}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헌종경릉1.jpg|width=100%]]}}} || ||<-2> {{{-2 경릉 능침}}}[* 맨 왼쪽이 헌종의 능침이다.] || ||<|2> '''출생''' ||[[1827년]] [[9월 8일]][br](음력 [[순조]] 27년 7월 18일)|| ||[[한성부]] [[창경궁 경춘전]][br](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경궁로]] 185)|| ||<|2> '''즉위''' ||[[1834년]] [[12월 18일]] (7세)[br](음력 [[순조]] 34년 11월 18일)|| ||[[한성부]] [[경희궁 숭정문]][br](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새문안로]] 45)|| ||<|2> '''사망''' ||[[1849년]] [[7월 25일]] (향년 21세)[* [[단종(조선)|단종]], [[예종(조선)|예종]] 다음으로 [[요절]]한 왕이다.][br](음력 헌종 15년 6월 6일)|| ||[[한성부]] [[창덕궁 중희당]][br](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서울)|율곡로]] 99)|| || '''능묘''' ||[[경릉]](景陵)|| ||<|4> '''재위기간''' ||'''{{{#ffd400 조선 왕세손}}}'''|| ||[[1830년]] [[10월 31일]] ~ [[1834년]] [[12월 18일]][br]{{{-2 (음력 [[순조]] 30년 9월 15일 ~ 순조 34년 11월 18일)}}}|| ||'''{{{#ffd400 조선 제24대 국왕}}}'''|| ||[[1834년]] [[12월 18일]] ~ [[1849년]] [[7월 25일]][br]{{{-2 (음력 헌종 즉위년 11월 18일 ~ 헌종 15년 6월 6일)}}}|| ||<-2>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ㆍ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본관''' ||[[전주 이씨]] || || '''휘''' ||'''환(烉)''' || || '''부모''' ||부왕 [[효명세자|문조 익황제]][br]모후 [[신정왕후 조씨|신정익황후]] || || '''형제자매''' ||외아들[* 사후 모후 신정왕후가 [[고종(조선)|고종]]을 양자로 들여 장자가 된다.] || || '''왕비''' ||정비 [[효현왕후|효현성황후]][br]계비 [[효정왕후|효정성황후]] || || '''후궁''' ||[[경빈 김씨]], 정빈 윤씨, [[숙의 김씨(헌종)|숙의 김씨]] || || '''자녀''' ||{{{#gray 1녀 - 옹주({{{-3 1848, 조졸}}})}}} || || '''종교''' ||[[유교]] {{{-2 ([[성리학]])}}} || || '''자''' ||문응(文應) || || '''호''' ||원헌(元軒) || || '''전호''' ||[[창덕궁 중희당|효정전]](孝定殿) || || '''묘호''' ||'''[[헌종]](憲宗)''' || || '''존호''' ||체건계극중정광대지성광덕홍운장화[br](體健繼極中正光大至聖廣德弘運章化) || || '''시호''' ||'''[[조선]]''': 경문위무명인철효대왕[br](經文緯武明仁哲孝大王) ---- '''[[대한제국]]''': 경문위무명인철효'''성황제'''[br](經文緯武明仁哲孝'''成皇帝''') ---- '''[[청나라|청]]''': --장숙(莊肅)--[* [[1908년]](융희 2년), [[황제]] [[추존]]과 동시에 폐지.] ||}}}}}}}}} || [목차] [clearfix] == 개요 == [[조선]] 제24대 임금이자 [[대한제국]]의 [[추존]] [[황제]]. [[묘호]]는 '헌종(憲宗)', [[시호]]는 '경문위무명인철효성황제(經文緯武明仁哲孝成皇帝)', [[휘]]는 '환(烉)',[* [[명종(조선)|명종]]도 휘가 ''''환''''이지만, 명종은 '큰 산 환([[峘]])'이고 헌종은 '불꽃 환([[烉]])'이다. [[사도세자|장조]]의 현손 항렬 대에서는 이름에 '어진사람 인(儿)'이 들어간 글자를 공유한다. [[정조(조선)|정조]]의 증손인 [[헌종(조선)|헌종]]은 '환('''烉''')'으로 안에 포함되어있다. 그리고 [[고종(대한제국)|고종]]은 '형('''㷗''')'으로 좌우로 밖에 나뉘어 있으며, 초명 '재황(載'''晃''')'에는 '황(晃)'의 밑에 발의 형태로 들어가있다. [[은언군]]의 증손인 [[덕안군]]은 '재덕(載'''悳''')', [[청안군]]은 '재순(載'''純''')'으로 파자하지 않으면 잘 알아보기 어려운 형태이다. [[은신군]]과 [[은전군]]의 증손으로 [[완림군]]은 '재원(載'''元''')', [[완순군]]은 '재완(載'''完''')', [[완영군]]은 '재긍(載'''兢''')', [[흥친왕]]은 '재면(載'''冕''')', [[완은군]]은 '재선(載'''先''')', [[인양군]]은 '재근(載'''覲''')', [[의양군]]은 '재각(載'''覺''')', [[예양정]]은 '재규(載'''規''')'로, 고종의 초명과 마찬가지로 발의 형태로 온전히 들어가있다. [[완평군]]의 둘째 아들 '재현(載'''現''')'은 본가의 양자로 들어가 황실 종친 자격을 잃었지만 이름자에 '儿'은 그대로 있다. 유일하게 [[경은군]] '재성(載星)'이 규칙을 적용받지 않았는데, [[서자]]인데다 작호를 받은 게 굉장히 늦은 시기다. 저 중 헌종을 제외하고 장조의 실제 혈통을 물려받은 사람은 유일하게 저 규칙을 사용하지 않은 이재성 뿐이라는 것이다.(나머지는 전부 입양을 통해 족보상 후손이 된 경우이다.)] [[자(이름)|자]]는 '문응(文應)'. [[순조]]의 유일한 친손자이자 [[효명세자]]의 하나뿐인 외아들[* [[효명세자]]도 사실상 [[순조]]의 외아들이었고(둘째 아들은 봉군되기도 전에 [[요절]]), 순조도 [[문효세자]]가 어려서 죽은 후 [[정조(조선)|정조]]의 유일한 아들이었기 때문에 헌종은 드물게도 왕인데 3대 독자 포지션.]로 아버지인 효명세자가 22살의 나이로 갑작스럽게 [[요절]]하고, 할아버지 순조마저 건강 악화로 일찍 세상을 떠나자 [[황태손|왕세손]](王世孫)의 신분으로 8살 어린 나이에 국왕이 되었는데 조선 왕으로서는 최연소로 [[단종(조선)|단종]]보다도 어린 나이에 즉위했다.[* 이와 대조되게 가장 최고령으로 즉위한 군주는 [[태조(조선)|태조 이성계]]로 즉위 당시 나이가 58세였다.] 같은 경우로는 [[고려시대]]의 [[충목왕]]이 있으며, 충목왕 역시 즉위 당시 8살(만 7살)이자 최연소였다. [[영조]]-[[정조(조선)|정조]]에 이어서 2번째로 조부에서 손자로 권좌가 이어지는 조손(할아버지 → 손자) 계승의 절차를 밟았다. 기존 학계의 견해에 따르면 헌종조 전반은 [[풍양 조씨]]와 [[신 안동 김씨|안동 김씨]] 간의 알력다툼이 치열했던 시기로 정의되며 그에 따른 [[야사(역사)|야사]]도 존재했으나, 이는 실제 역사와 차이가 있다.[* 실제로 헌종은 세도정치가 만연한 조선 말기 때 유일하게 이를 혁파하고자 노력했던 마지막 개혁 군주였다.] == 생애 == === [[효명세자]]의 [[아들]] === [[1827년]](순조 27년) [[7월 18일]] [[창경궁 경춘전]]에서 [[효명세자]]와 [[신정왕후 조씨|세자빈 조씨]]의 사이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세자빈이 원손을 낳았다 대신들이 하례 하다 >---- >세자빈이 원손(元孫)을 낳았다. 하교하기를, >>"오늘 신시(申時)[* 오후 3시~5시.]에 세자빈이 원손을 낳았으니, 모든 행사는 관례대로 거행하라." >하고, 시임 대신과 원임 대신, 대각의 신하, 약원의 세 제조를 '''__함인정(涵仁亭)__'''에서 불러 보았다. >영중추부사 '''한용귀(韓用龜)''' 등이 아뢰기를, >>"하늘과 조종들께서 묵묵히 도우시어 빈궁께서 원손을 순산하셨으니, 이는 실로 억만 년 종묘 사직의 무궁한 기쁨입니다. >>처음으로 손자를 보시는 경사를 맞았으니, 전하의 마음이 더욱 기쁘시겠습니다만 신들도 즐거운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 >- '''《[[순조실록]]》 29권, 순조 27년([[1827년]], 청 도광(道光) 7년) 7월 18일 (신유) 2번째기사.'''[* [[https://sillok.history.go.kr/id/kwa_12707018_002|#]].] 《헌종대왕 행장》에 이르면 [[태몽]]이 꽤나 비범했다고 하며 출생일에 [[학]]들이 떼거지로 날아서 [[왕비]]의 품 안으로 들어갔다는 것인데 이걸 [[궁궐]]에서는 기이하다고 했다. 《행장》에 의하면 준수한 외모에 큰 목소리가 금석같다고 하며 100일 전에도 벌떡 일어섰다고 한다.[* 물론 한 나라의 얼굴이자 지도자인 왕을 띄워주려는 의도가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왕세손]] 책봉을 불과 4개월 앞두고, 아버지 [[효명세자]]가 [[1830년]](순조 30년), [[세는나이]] 22세에 갑작스레 사망하면서 헌종은 고작 세는나이 4세의 매우 어린 나이에 [[동궁]](東宮)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할아버지 [[순조]] 역시 [[1834년]](순조 34년), 44세에 죽고[* 조선 왕의 평균 재위 기간은 19년, 평균 [[수명]]은 46세여서 [[순조]]가 빨리 죽었다고 할 수는 없다. 재위 기간이 30년이 넘은 것을 생각하면 더 그렇고. 그러나 상술했듯 4년 전 순조의 유일한 아들이자 헌종의 아버지인 [[효명세자]]가 젊은 나이에 [[요절]]한 탓에 결국 8살의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헌종이 왕위에 올라야만 했다.] 헌종이 세는나이 8세에 왕위를 이어받게 된다. 현재로 따지면 [[초등학교]] 1학년인 너무 어린 나이에 즉위했기 때문에 순조의 정비이자 할머니인 왕대비 [[순원왕후]] 김씨가 [[수렴청정]]을 실시했다. >임금이 숭정문에서 즉위하고 왕대비 수렴 청정의 예를 행하다 >---- >임금이 '''[[경희궁 숭정문|숭정문(崇政門)]]'''에서 즉위하였다. >왕대비(王大妃)를 받들어 수렴 청정(垂簾聽政)의 예(禮)를 '''[[경희궁 흥정당|흥정당(興政堂)]]'''에서 행하고, >조하(朝賀)를 받은 다음 교서(敎書)를 반포(頒布)하고 대사(大赦)[* 일반 죄에 대한 왕의 사면을 이름.]를 베풀었다. >---- >- '''《[[헌종실록]]》 1권, 헌종 즉위년([[1834년]], 청 도광(道光) 14년) 11월 18일 (기묘) 1번째기사.'''[* [[https://sillok.history.go.kr/id/kxa_10011018_001|#]].] 한편 어머니 [[신정왕후 조씨|신정왕후]]는 [[안동 김씨]] 세도가에 이어 [[힘]]은 세지만 [[발톱]]을 숨기고 [[권력]]을 움켜쥐려는 [[풍양 조씨]] 집안 출신이다. 첫 왕비는 [[신 안동 김씨|안동 김씨]]로 [[김좌근]]의 딸인 [[효현왕후|효현왕후 김씨]]였으나, [[결혼]] 2년만인 헌종 9년인 [[1843년]]에 16세의 나이로 일찍 [[사망]]했고 이후 [[효정왕후]] [[남양 홍씨|홍씨]]를 [[조선/역대 왕비|계비]]로 맞았다. 외가와 처가에서 알 수 있듯이 헌종의 치세는 실로 [[풍양 조씨]]와 [[신 안동 김씨|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로 [[조선]]이 파탄 직전까지 가고 있던 시절이었다. === 왕대비의 [[수렴청정]] 및 [[병오박해]] === [[순원왕후]]의 [[수렴청정]] 시기에는 '척사윤음'(斥私倫音)이 반포되었고 [[조선의 천주교 박해|천주교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가 발생했다. [[1839년]](헌종 5년), [[기해박해]] 때는 [[프랑스]]인 앵베르 범 라우렌시오[* [[천주교 서울대교구]] 제2대 교구장] 주교, [[피에르 모방|모방 나 베드로]] 신부, 샤스탕 정 야고보 신부, 조선인 평신도 [[정하상]] 바오로 등이 [[순교]]했다. [[1846년]](헌종 12년) [[병오박해]] 때는 [[한국]] 최초의 [[가톨릭|천주교]] 신부인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성직자)|신부]]가 [[순교]]했다. 더욱 극심해진 [[삼정의 문란]]으로 [[백성]]들의 민생은 파탄의 직전까지 내몰리고 있었지만 이에 대한 대책[* [[1834년]](헌종 즉위년) [[11월 20일]] 1번째 기사 '[[호남|기호]] 지방에 제수의 복정을 특별히 늦추게 하다'와 동년 [[11월 28일]] 1번째기사에는 '[[한성부]]의 하속들이 주구하고 징색하는 폐단을 범하지 않도록 신칙하다'라는 기사가 있기는 하나 실제로는 별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다.][* '''《[[헌종실록]]》 1권, 헌종 즉위년([[1834년]], 청 도광(道光) 14년) 11월 20일 (신사) 1번째기사.''' [[https://sillok.history.go.kr/id/kxa_10011020_001|#]].][* '''《[[헌종실록]]》 1권, 헌종 즉위년([[1834년]], 청 도광(道光) 14년) 11월 28일 (기축) 1번째기사.''' [[https://sillok.history.go.kr/id/kxa_10011028_001|#]].]은 딱히 세우지도 못했고 외부에서는 [[서양]] 선박들이 나타나 통상을 요구하는 이양선 출몰 사건이 잇달아 일어나 민심은 동요했다. [[왕권]]도 헌종 초기에는 매우 떨어지는 편이였는데 즉위 2년인 [[1836년]](헌종 2년) 남응중, [[1844년]](헌종 10년)에는 민진용[* 집안은 몰락한 [[노론]]이어서 신분은 [[중인]]이었다고 한다.]과 이원덕 등이 [[사도세자]]의 서출이자 [[정조(조선)|정조]]의 이복동생인 [[은언군]]의 손자 [[회평군]]을 [[조선/왕사|왕위]]에 올리려고 했으나 실패했다.[* 이 [[역모]]로 인해 [[회평군]]은 [[사약]]을 받아 처형당했고, 그의 이복동생들인 [[철종(조선)|철종]]과 [[영평군(1828)|영평군]]은 [[강화도]]로 유배된다.] 이 [[역모]]의 특징은 [[정치]]적 기반이 전무한 몰락한 [[양반]]들의 계획으로 이만큼 [[조선/왕사|왕]]의 위신이 떨어졌다. >남응중·남경중을 국문하여 사형에 처하다 >---- >남응중(南膺中)·남경중(南慶中)을 국문(鞫問)하여 사형(死刑)에 처하고, 고변인(告變人) 천기영(千璣英)은 상을 내려 오위 장(五衞將)으로 삼았다. 남응중의 족당은 모두 좋은 문벌(門閥)이었는데, 성품이 간교하여 남의 재물을 편취(騙取)하기 좋아하고 역모(逆謀)를 꾸며 경외(京外)에 출몰하면서 속임수만 써왔다. 일이 발각되자 면하지 못할 줄 알고, '''[[부산|동래(東萊)]]'''의 왜관(倭館)으로 도망해 들어가서 극도로 흉악하고도 부도(不道)한 말을 지어내어 투서(投書)하여 두 나라의 틈을 부추겼으나, 왜인들도 믿지 않고 그를 잡아서 우리 나라에 넘겨주었다. 이때에 이르러 국문하니, 남경중과 함께 승복하였다. 남공언은 그들의 도당이었는데 국정(鞫庭)에서의 난언(亂言)이 더욱 흉악하여 아울러 노륙(孥戮)하였다. 남응중의 수급(首級)은 왜관에 매달아 보이도록 명하고, 따로 __서계(書契)__[* 서계는 주로 [[일본]]과의 교린 관계(交隣關係)에 대한 문서를 말하는데, 일본 사행(使行)의 임무 내용, 사절(使節)과 상왜(商倭)의 구별, 왜구(倭寇) 여부의 식별 등 다양한 역할을 했다. 이의 발신인은 [[조선]]의 경우 [[조선/왕사|국왕]]을 비롯하여 예조 판서·참판·참의와 동래 부사 등이 막부장군(幕府將軍)·대마 도주·거추(巨酋) 등에게 보내는 것으로 대별되고, [[에도막부|일본]]의 경우는 막부장군 등 국가에서 보내 오는 공신(公信)으로의 서계와 거추 등이 보내 오는 사신(私信)으로서의 서계로 대별된다.]를 지어 관수왜(館守倭)에게 전하여 약조(約條)를 중히 여기고 교호(交好)를 돈독히 한 뜻을 보이었다. >--- >- '''《[[헌종실록]]》 3권, 헌종 2년([[1836년]], 청 도광(道光) 16년) 12월 23일 (임신) 1번째기사.'''[* [[https://sillok.history.go.kr/id/kxa_10212023_001|#]].] >결안에 민진용의 죄가 부대시 능지 처사에 해당한다고 하다 >---- >죄인 '''민진용(閔晋鏞)'''의 결안(結案)에 이르기를, >>"그는 미천한 무부(武夫)로서 감히 불궤(不軌)한 흉계를 품고 효경(梟獍)[* 악인(惡人)의 비유한다. 효(梟)는 어미새를 잡아먹는 올빼미, 경(獍)은 아비 짐승을 잡아먹는 짐승을 비유해 말한다.]의 마음으로 귀신처럼 물여우처럼 역당(逆黨)과 체결하고 흉언(凶言)을 난만(爛慢)[* 차서 넘치는 모양을 말함.]하게 하였습니다. 강사(江舍)에서 밤에 모여 세 사람이 주무(綢繆)한 것이 모두 지극히 흉악하고 지극히 참혹하였는데, ‘__이곽(伊霍)__’[* 은(殷)나라의 현상(賢相) 이윤(伊尹)과 전한(前漢)의 명신 곽광(霍光). 이윤은 처음에 농부(農夫)였는데, 탕왕(湯王)이 세 번이나 초빙(招聘)하여 마침내 출사(出仕)하였음. 탕왕을 도와 하(夏)의 걸왕(桀王)을 정복하고 천하를 통일하였다. 탕왕이 죽은 뒤에 그 손자 태갑(太甲)이 무도(無道)하게 행동하므로 이를 3년 동안 동궁(桐宮)에 추방하였다가, 태갑이 다시 회개하자 맞아들였다. 곽광은 무제(武帝)의 유조(遺詔)를 받들어 대사마 대장군(大司馬大將軍)으로서 소제(昭帝)를 도왔으며, 다음 창읍왕(昌邑王)이 음란하므로 그를 폐위시키고 선제(宣帝)를 세웠다. 전후 20년 동안 나라의 정권을 잡았는데, 그의 딸은 선제의 황후가 되어 온 집안이 부귀를 누렸으나, 이로써 그의 사후(死後)에 선제는 곽씨(霍氏)의 병권(兵權)을 거두고, 모반(謀反)하려 하였다고 해서 친족(親族)을 멸하였음을 의미한다.] 두 글자가 어찌 신하로서 감히 들을 수 있는 것이고 감히 말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마는 방자하게 입에다 내었습니다. 모반(謀反)하고 대역(大逆)하여 부도(不道)한 것이 확실하다고 지만(遲晩)[* 죄인이 스스로 자백할 때 ‘너무 오래 속여서 미안하다’는 뜻으로 자기의 잘못을 고백하던 말을 의미한다.]하였으니, 죄가 '''부대시 능지 처사(不待時凌遲處死)'''[* [[사형]]을 할 때 가을철 추분(秋分)까지 기다리는 것이 원칙이나, 십악 대죄(十惡大罪) 등 중죄(重罪)를 범한 죄인은 이에 구애되지 않고 사형을 집행하는데, 이를 부대시라고 함. 능지 처사(凌遲處死)는 가장 참혹한 형벌(刑罰)의 하나로, 먼저 팔·다리의 사지(四肢)를 절단하고 그 다음에 머리를 베는 것. 수(隋)·당(唐) 이래로 없어졌으나 원(元)나라 때 다시 부활되었고, [[조선]]에서는 거열(車裂)로써 이를 대신하였다.]에 해당합니다." >하였다. >---- >- '''《[[헌종실록]]》 11권, 헌종 10년([[1844년]], 청 도광(道光) 24년) 8월 21일 (을묘) 1번째기사.'''[* [[https://sillok.history.go.kr/id/kxa_11008021_001|#]].] === 짧은 친정 === [[신 안동 김씨|안동 김씨]]의 세력이 큰 견제가 없이 무럭무럭 커가는 시기 헌종은 할머니 [[순원왕후]]로부터 [[수렴청정]]을 거둔 뒤로 친정이 시작된 이후에 20세가 될 무렵부터 척신들을 견제하기 시작했다. [[수렴청정]]이 15세 때에 끝나고, 첫 [[왕비]]인 [[효현왕후]]가 죽으면서 할머니 [[순원왕후]]의 의중에 따라 [[남양 홍씨]] 홍재룡(洪在龍)의 딸인 [[효정왕후|효정왕후 홍씨]]를 계비로 맞은 것. 이 때 주부(主簿) 김재청(金在淸)의 딸을 [[경빈 김씨|후궁]]으로 삼기도 했다. 그래서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세도]]는 [[풍양 조씨]]의 부상과 함께 다시 조금이나마 흔들리기 시작했다. 다만, [[야사(역사)|야사]]에서는 [[신 안동 김씨|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의 경쟁 시기 정도로 비추어진다. 일례로 한 [[야사(역사)|야사]]에서는 조병구가 권세를 휘두르자 "외삼촌의 목에는 칼이 안 들어가는가?"라고 말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이는 [[김좌근]]의 일화로도 알려져 있다. 이야기의 출처는 김택영의 《한사경》인데 헌종 앞에서 애체([[안경]])를 썼다고 한 소리 들은 것. 한 소리만 듣고 끝나서 다행인게 당대 예법에서 분명 어긋나는 것이었다. [[안경]]을 쓸 정도로 [[공부]]를 많이 했으니 웃어른 앞에서 자신의 학식을 뽐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훗날 [[서재필]]도 [[고종(대한제국)|고종]] 앞에서 안경을 썼다가 [[욕]]을 먹기도 했고, [[순종(대한제국)|순종]]도 지독한 [[근시]]였지만 아버지 [[고종(대한제국)|고종]] 앞에서는 예를 지키기 위해 안경을 안 썼다고 한다.] 헌종의 이 말에 조병구는 듣고 놀라서 황급히 물러나와 퇴궐하다가 [[가마(탈것)|가마]]가 뒤집혀서 [[머리]]가 깨져 죽었다고도 하고 이게 [[신정왕후 조씨]] 앞이었는데도 헌종의 책망을 듣자 음독 [[자살]]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죽기 전 해까지도 [[한성부|한성]] 판윤, [[예조판서]], [[이조판서]], [[공조판서]]를 한창 지내다가 대간들의 [[탄핵]]에 몰려 쫓겨나 [[1845년]](헌종 11년) [[사망]]했다. 이는 어디까지나 [[신 안동 김씨|안동 김씨]]의 편인 대간들의 견제에 따른 것으로 [[사망]] 시기 자체가 헌종이 친정을 시작한 시기보다 이르다. 무엇보다도 조병구가 헌종이 그렇게 말할 정도로 권세를 휘둘렀다면 졸기에 좋은 내용이 실릴리 없다.[* 조병구의 《졸기》에는 '숙성한 재주를 지녔다. 다만 각박한게 흠이었다'고 되어 있다.] [[대사간]] 서상교가 [[신 안동 김씨|안동 김씨]]의 [[실세]]인 김흥근이 탐오하고 [[순원왕후|왕대비]]의 비위를 맞추어(= 궁위를 엿보아) 정치하는 것을 보고하며 처벌을 주장해 헌종은 김흥근을 [[탄핵]]하고 [[귀양]]보내기도 했다. 또한 [[안동 김씨]]의 수장인 [[김좌근]] 등을 [[유배]]를 보내는 등 반(反) [[신 안동 김씨|안동 김씨]] 행보를 밟았다. [[대구 서씨]] 서희순을 이조판서 겸 총위대장으로 내세우기도 했고 안동 김씨에게 밉보인 [[김정희]], 조병헌은 헌종 14년([[1848년]])에 유배에서 풀렸으며 [[박규수]]를 조정으로 불러 중용할 뜻을 내비췄다. 반면 [[영의정]] 정원용은 [[안동 김씨]]에게 아부하다가 파직당하는데 [[오군영]]의 훈련대장을 [[외척]]이 아닌 사람들로 채워넣고 [[병조판서]]를 독자적으로 임명한건 대표적이었다. 이렇게 군권을 장악하고 [[정조(조선)|정조]]의 [[장용영]]처럼 친위대인 총위영([[총융청]])까지 구성하는 등 아주 활발한 왕권 강화 [[정책]]을 펼쳤다. [[아편전쟁]]의 전말을 보고 들으면서 [[국방]]력 강화와 척신 척결이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수령]]의 장죄([[뇌물]]) 문제를 전면으로 들고 나와서 [[법]] 개정을 주도한 적도 있었는데 수령의 뇌물이 어디로 가는가를 생각해보면 세도 가문들을 타깃으로 노린 것이 확실하지만 [[비변사]]의 비협조로 법 개정은 무산되었다. 그런가하면 [[암행어사]]도 활발하게 [[전국]]으로 파견했고, [[신 안동 김씨|안동 김씨]]의 조병헌 사사 요구를 매우 강력하게 거부하면서 역으로 [[신 안동 김씨|안동 김씨]]의 조종을 받던 [[삼사(조선)|삼사]]를 모조리 파직하기도 했다. 조병헌은 결국 귀양을 갔다가 헌종 말에 풀려나지만 [[철종(조선)|철종]] 초에 사사된다. 재위 말에는 《국조보감》의 증수를 위해 [[정조(조선)|정조]]·[[순조]]·[[효명세자|익종]]에 대한 《삼조보감》(三朝寶鑑)을 [[1848년]](헌종 14년)에 찬집됐고, 《열성지장》, 《[[동국사략]]》, 《문원보불》, 《[[동국문헌비고]]》 등이 편찬됐으며 각 도의 제방과 [[저수지]]를 정비하는 등 치적을 세우기도 했다. === 요절 === 세도가 [[신 안동 김씨|안동 김씨]]를 견제하며 [[왕권]]을 힘겹게 잡아가는 시도 중에 [[1849년]](헌종 15년) [[7월 25일]][* [[음력]] [[6월 6일]].], 향년 21세의 이른 나이로 [[창덕궁 중희당]]에서 [[사망|승하]]했다. 헌종은 어느 순간부터 [[각혈|피를 토하며]] 소화 불량 증세를 자주 보였고 [[설사]]가 심해지며 [[얼굴]]에 갈수록 심한 부종 증상이 나타나 의원을 통해 [[약]]을 조제하고 치료하면서 상태가 좋아졌다 나빠졌다를 매번 반복하다가 사망하였다고 전해진다. >오시에 창덕궁의 중희당에서 승하하다 >---- >오시(午時)[* 오전 11시~오후 1시.]에 임금이 >'''[[창덕궁|창덕궁(昌德宮)]]'''의 '''[[창덕궁 중희당|중희당(重熙堂)]]'''에서 승하하였다. >---- >- '''《[[헌종실록]]》 16권, 헌종 15년([[1849년]], 청 도광(道光) 29년) 6월 6일 (임신) 9번째기사.'''[* [[https://sillok.history.go.kr/id/kxa_11506006_009|#]].] 이는 현대 [[의학]]적 관점으로 보았을 때 평소 [[정력]]에 좋다는 [[음식]]을 많이 복용하였다는 일화로 미루어 급성 [[간염]]이나 [[간경변]]의 [[합병증]]으로 사망했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성기능 장애를 극복하려고 녹용과 인삼을 꾸준히 복용한 것을 보아 [[신부전증]]을 앓다가 심장 질환이 발생해 [[심장마비]]로 [[사망]]했을 가능성도 높다. 죽기 직전 다급히 의원을 불렀으나 결국 병을 다스리지 못하고 젊은 나이에 [[조선/왕사|후사]]를 보지 못하며 세상을 떠났는데, 생전에 후사를 보지 못하고 요절한 탓에 '''__[[정조(조선)|정조]]의 마지막 [[남자]] [[직계]] [[후손]]__'''이기도 하다. 아버지 [[효명세자]]도 헌종과 비슷한 나이에 [[각혈]]하며 쓰러졌고, 이후 [[요절]]한 것을 보면 [[효명세자|아버지]]와 비슷하게 체질적인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 능묘 === 헌종의 능은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 내의 '''[[경릉]](景陵)'''. [[조선/역대 왕비|왕비]]인 [[효현왕후|효현왕후 김씨]], [[효정왕후|효정왕후 홍씨]]와 나란히 묻힌 '''삼연릉(三連陵)'''으로 삼연릉 형식은 [[조선 왕릉]] 중 유일하다. '우왕좌비[* 오른쪽에 [[헌종(조선)|왕]]을 장사하고 왼쪽에 [[효현왕후|왕]][[효정왕후|비]]를 장사함.]'의 원칙에 따라 맨 왼쪽에 헌종 능이 있고 가운데에 [[효현왕후|효현왕후 김씨]], 오른쪽에 [[효정왕후|효정왕후 홍씨]]가 묻혀 있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의 작가 [[박시백]]은 이 능에 대해 "[[신 안동 김씨|안동 김씨]]인 [[효현왕후]]를 헌종과 [[효정왕후]]가 모시는 듯한 인상을 준다"고 촌평하기도 했다.] == 가계 == === 친가([[조선/왕실|전주 이씨]]) === * '''양고조부 : ^^([[추존]])^^[[효장세자|진종 소황제]](眞宗 昭皇帝) 이행(李緈)''' * '''양고조모 : ^^([[추존]])^^[[효순왕후|효순소황후]] [[풍양 조씨|조씨]](孝純昭皇后 趙氏)''' * '''친고조부 : ^^([[추존]])^^[[사도세자|장조 의황제]](莊祖 懿皇帝) 이선(李愃)''' * '''친고조모 : ^^([[추존]])^^[[혜경궁 홍씨|헌경의황후]] [[풍산 홍씨|홍씨]](獻敬懿皇后 洪氏)''' * '''증조부 : ^^([[추존]])^^[[정조(조선)|정조 선황제]](正祖 宣皇帝) 이산(李祘)''' * '''증조모 : ^^([[추존]])^^[[효의왕후|효의선황후]] [[청풍 김씨|김씨]](孝懿宣皇后 金氏)'''[* 친증조모는 [[정조(조선)|정조]]의 간택후궁인 [[수빈 박씨|현목수비]] [[반남 박씨|박씨]]이다.] * '''조부 : ^^([[추존]])^^[[순조|순조 숙황제]](純祖 肅皇帝) 이공(李玜)''' * '''조모 : ^^([[추존]])^^[[순원왕후|순원숙황후]] [[신 안동 김씨|김씨]](純元肅皇后 金氏)''' * '''부황 : ^^([[추존]])^^[[효명세자|문조 익황제]](文祖 翼皇帝) 이영(李旲)''' * '''모후 : ^^([[추존]])^^[[신정왕후 조씨|신정익황후]] [[풍양 조씨|조씨]](神貞翼皇后 趙氏)''' * '''양동생 : [[고종(대한제국)|고종 태황제]](高宗 太皇帝) 이명복/이재황/이형/이희''' * '''양제수 : [[명성황후|명성태황후]] [[여흥 민씨|민씨]](明成太皇后 閔氏)''' * '''양조카 : [[순종(대한제국)|순종 효황제]](純宗 孝皇帝) 이척(李坧)''' * '''양제수 : [[순헌황귀비]] [[영월 엄씨|엄씨]](純獻皇貴妃 嚴氏)''' * '''양조카 : ^^(사시)^^[[영친왕|의민황태자 영왕]](懿愍皇太子 英王) 이은(李垠)''' * '''양제수 : [[귀인 이씨(영보당)|영보당 귀인 이씨]](永寶堂 貴人 李氏)''' * '''양조카 : ^^(추증)^^[[완친왕|완효헌친왕]](完孝憲親王) 이선(李墡)''' * '''양제수 : [[귀인 장씨(고종)|귀인]] [[장(성씨)|장씨]](貴人 張氏)''' * '''양조카 : [[의친왕]](義親王) 이평길/이강(李平吉/李堈)''' * '''양제수 : [[귀인 이씨(내안당)|내안당 귀인 이씨]](內安堂 貴人 李氏)''' * '''양제수 : 보현당 귀인 [[해주 정씨|정씨]](寶賢堂 貴人 鄭氏)''' * '''양조카 : [[이우(1915)|왕자]](王子) 이우(李堣)''' * '''양제수 : [[귀인 양씨|복녕당 귀인 양씨]](福寧堂 貴人 梁氏)''' * '''양조카 : [[덕혜옹주]](德惠翁主)''' * '''양제수 : 광화당 귀인 이씨(光華堂 貴人 李氏)''' * '''양조카 : [[이육|왕자]](王子) 이육(李堉)''' * '''양제수 : 삼축당 [[안동 김씨|김씨]](三祝堂 金氏)''' * '''양제수 : [[정화당 김씨|정화당]] [[광산 김씨|김씨]](貞和堂 金氏)''' === 외가([[풍양 조씨]]) === * '''외고조부 : 경상도관찰사 병조판서 문익공(慶尙道觀察使 兵曹判書 文益公) [[조엄(조선)|조엄]](趙曮)''' * '''외증조부 : 지중추부사 숭록대부 효문공(知中樞府事 崇祿大夫 孝文公) 조진관(趙鎭寬)''' * '''외조부 : 증 영의정 영돈녕부사 풍은부원군 충경공(贈 領議政 領敦寧府事 豊恩府院君 忠敬公) [[조만영]](趙萬永)''' * '''외조모 : 덕안부부인 [[은진 송씨|송씨]](德安府夫人 宋氏)''' * '''외삼촌 : 성균관대사성 서장관(成均館大司成 書狀官) 조병구(趙秉龜)''' * '''외삼촌 : 병조판서 이조참판 효헌공(兵曹判書 吏曹參判 孝獻公) 조병기(趙秉夔)''' * '''첫째이모 : 부인 [[풍양 조씨|조씨]](夫人 趙氏)''' * '''첫째이모부 : 의정부좌참찬 대사헌(議政府左參贊 大司憲) 이인설(李寅卨)''' * '''둘째이모 : 부인 [[풍양 조씨|조씨]](夫人 趙氏)''' * '''둘째이모부 : 경상감사 공조판서 효간공(慶尙監司 工曹判書 孝簡公) 유치선(兪致善)''' * '''막내이모 : 부인 [[풍양 조씨|조씨]](夫人 趙氏)''' * '''막내이모부 : 김석현(金奭鉉)''' === 처가([[신 안동 김씨|안동 김씨]], [[남양 홍씨]]) === ==== [[신 안동 김씨|안동 김씨]] ==== * '''장인증조부 : 좌의정 사헌부대사성 익헌공(左議政 司憲府大司成 翼憲公) 김이소(金履素)''' * '''장인조부 : 충주목사(忠州牧使) 김지순(金芝淳)''' * '''장인 : 의정부영의정 영흥부원군 효간공(議政府領議政 永興府院君 孝簡公) [[김조근]](金祖根)''' * '''장모 : 한성부부인 [[한산 이씨|이씨]](漢城府夫人 李氏)''' * '''처남 : 이조참의 성균관대사성(吏曹參議 成均館大司成) 김병집(金炳潗)''' * '''처남댁 : 이름 미상''' * '''양외조카 : 궁내부특진관 서사관(宮內府特進官 書寫官) 김갑규(金甲圭)''' * '''처형 : 부인 [[신 안동 김씨|김씨]](夫人 金氏)''' * '''동서 : 이조판서 대제학 문정공(吏曹判書 大提學 文貞公) 남병철(南秉哲)''' ==== [[남양 홍씨]] ==== * '''장인조부 : 판의금부사 공조판서 헌간공(判義禁府事 工曹判書 獻簡公) 홍기섭(洪耆燮)''' * '''장인 : 익풍부원군 증 영의정 돈령부영사 익헌공(益豊府院君 贈 領議政 敦寧府領事 翼獻公) 홍재룡(洪在龍)''' * '''장모 : 연창부부인 안씨(延昌府夫人 安氏)''' * '''첫째처남 : 예조판서 효정공(禮曹判書 孝貞公) 홍종석(洪鍾奭)''' * '''처제 : 이름 미상''' * '''둘째처남 : 홍종선(洪鍾善)''' === 배우자 / 자녀 === * '''정비 : ^^([[추존]])^^[[효현왕후|효현성황후]] [[신 안동 김씨|김씨]](孝顯成皇后 金氏)'''[* 생몰기간 : [[1828년]] [[4월 27일]] ~ [[1843년]] [[10월 18일]].] * '''계비 : ^^([[추존]])^^[[효정왕후|효정성황후]] [[남양 홍씨|홍씨]](孝定成皇后 洪氏)'''[* 생몰기간 : [[1831년]] [[3월 6일]] ~ [[1904년]] [[1월 2일]].] * '''후궁 : [[순화궁]] [[경빈 김씨|경빈]] [[광산 김씨|김씨]](順和宮 慶嬪 金氏)'''[* 생몰기간 : [[1832년]] [[9월 21일]] ~ [[1907년]] [[6월 1일]].] * '''후궁 : 정빈 [[해평 윤씨|윤씨]](貞嬪 尹氏)''' * '''승은후궁 : 화락당 [[숙의 김씨(헌종)|숙의 김씨]](和樂堂 淑儀 金氏)'''[* 생몰기간 : [[1814년]] ~ [[1895년]] [[11월 12일]].] * '''딸 : 옹주(翁主)'''[* 헌종의 유일한 혈육이자 자녀였다. [[1848년]](헌종 14년)에 태어났지만, 태어난 당일에 [[요절|사망]](조졸)했다.] 슬하에 [[아들]]은 없었으며, [[궁녀]] 출신 [[숙의 김씨(헌종)|숙의 김씨]]에게서 딸 하나를 두었는데 [[요절]]했다. 헌종이 후사 없이 23세란 젊은 나이에 [[사망]]함에 따라 결국 [[정조(조선)|정조]]로부터 이어진 '''정조계 왕통'''[* [[정조(조선)|정조]] - [[순조]] - [[효명세자|익종]] - 헌종 순.]은 단절되었다. 이는 결국 [[대왕대비]]인 [[순원왕후]]와 [[신 안동 김씨|안동 김씨]] [[세도 정치|세도]]가 그나마 제일 가까운 [[조선/왕실|왕실]] [[종친]] 중에 [[강화도]]를 뒤져 [[사도세자]]의 서자 [[은언군]]의 서손자인 강화도령 [[철종(조선)|이원범]]을 [[순조]]의 [[양자]]로 입적하여 옹립한 요인이 되었다. == 어진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헌종추정어진.jpg|width=100%]]}}}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R6NuURZ.jpg|width=100%]]}}} || || {{{#gold '''위키백과가 추정한 헌종 어진'''}}} || {{{#gold '''《선원보감》에 실린 헌종 초상화'''}}} || 헌종의 정식 [[어진]]은 [[1954년]] [[12월 26일]]에 [[부산광역시]] [[용두산]]에 발생한 [[부산 용두산 대화재|화재]]로 완전히 소실되었다. 다만, [[조선]] [[조선/왕사|국왕]]들의 간략화된 어진을 실어놓은 《선원보감》에서 헌종의 [[초상화]]를 찾을 수 있다.[* 신뢰하기 어려운 것이 23살에 [[요절]]한 헌종의 초상화라고 보기에는 참고만 하도록 하자. 비슷한 [[나이]]대인 [[영조|연잉군]]의 초상화와 비교해도 상당히 [[노안]]이다.] 별개로 [[위키백과]]에서는 [[https://ko.wikipedia.org/wiki/%ED%8C%8C%EC%9D%BC:%ED%97%8C%EC%A2%85%EC%96%B4%EC%A7%84.jpg|신원 미상의 어진]]을 헌종의 어진으로 소개했는데, [[익선관]]이 조선 후기의 긴 모양인 것과 [[흥선대원군]]의 복식 간소화 이전의 복식, 어린 외모로 묘사한 것을 보면 꽤 그럴 듯 해보이지만 정확히 헌종의 어진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https://blog.naver.com/minsu977/222592775047|#]] 다만 추정 어진 속에 남은 귀 윗부분의 크기나 눈매가 선원보감과 비슷한 것을 보면 헌종의 초상화일 가능성이 유력하다. == 여담 == * [[야사(역사)|야사]]에 따르면 헌종은 [[조선/역대 왕비|계비]] [[간택|삼간택]] 때 김재청의 딸인 [[경빈 김씨]]를 무척 마음에 들어했다. 하지만 자신의 의사와 달리 할머니 [[순원왕후]]와 어머니 [[신정왕후 조씨|신정왕후]]가 홍재룡의 딸인 [[효정왕후|효정왕후 홍씨]]를 [[조선/역대 왕비|계비]]로 간택하자 3년 뒤에 [[경빈 김씨]]를 [[후궁]]으로 간택했다고 한다. 그러나 [[경빈 김씨]]는 [[조선/역대 왕비|계비]] [[간택|삼간택]]에 참여한 적이 없기 때문에 [[야사(역사)|야사]]라고 한다. 헌종은 [[경빈 김씨]]를 위해 친히 [[창덕궁 낙선재|낙선재]]를 지었을 정도라고 한다. * 17세에 천연두를 앓은 기록이 전해진다. * 《[[헌종실록]]》 1권에서 '[[외모]]가 준수하고 명랑하며 큰 [[목소리]]가 마치 금석(金石)에서 나오는 것 같다'고 기록되어 있다. >헌종 대왕 행장(行狀) >---- >왕은 용청(龍睛)에 서각(犀角)이고 __외모가 준수하고 명랑하며__, >__큰 목소리가 마치 금석(金石)에서 나오는 것 같으며__ 백일이 되기 전에 능히 일어서셨다. >---- >- '''《[[헌종실록]]》 1권, 헌종대왕 행장 中'''[* [[https://sillok.history.go.kr/id/kxa_200007|#]].] * 4세의 어린 나이에 아버지인 효명세자를 여의고 항상 효명세자를 그리워하였다. 효명세자의 외모를 기억하지 못하는 걸 안타깝게 여겨서 신하들에게 효명세자의 외모에 대해서 질문하니 "진전에 모신 수용이 오히려 매우 닮으신 전하의 용안에 미치지 못합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자신의 외모가 효명세자와 비슷하다는 대답을 들은 헌종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하염없이 슬퍼하였다. * 또한 아버지인 효명세자가 태어날 때 [[정조(조선)|정조]] 외모와 판박이었다고 전해지므로 헌종이 아버지인 효명세자 외모를 닮은 것을 보면 [[정조(조선)|정조]]와도 비슷한 용모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 조선왕조실록에 헌종이 즉위할 때 신하들이 절실하고 시급한 여섯 가지 일들을 아뢰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중 궁위를 엄하게 하라고 하는 내용이 나온다. '더욱이 어리신 나이라 보통 한가로이 계실 때쯤 무리들과 쉽게 친숙해지고 자질구레한 장난감으로 이러한 무리들은 쉽게 유혹하니 심지를 고혹시켜 성공에 누를 끼침은 모두 이에 말미암아 일어나는 것입니다. [[순조|선묘]](先廟, [[순조]])께서는 어린 나이에 즉위하셨으나 환시를 거느리심이 매우 엄해 항상 말을 붙이지 아니하시어 전하께서는 힘쓰소서.'라면서 언급된다.[* '''《[[헌종실록]]》 1권, 헌종 즉위년([[1834년]], 청 도광(道光) 14년) 12월 16일 (병오) 1번째기사.''' [[http://sillok.history.go.kr/id/kxa_10012016_001|#]].] 헌종이 [[미남]]이라 젊은 궁녀들이 승은을 입기 위해 유혹했다는 설이 있는데 이는 아마 앞서 말한 《[[헌종실록|실록]]》에 언급된 내용을 '미남이라 궁인들이 유혹하기에 안달났다' 이런 [[뉘앙스]]로 호사가들에 의해 널리 왜곡되어 알려진 것 같다. 헌종실록을 보면 알다시피 '헌종이 [[미남]]이라 [[궁녀|궁인]]들이 유혹했다'보다는 '젊은 나이에 즉위해 궁녀 환관 등 이들이 쉽게 유혹을 해서 누를 끼친다' 이런 식으로 실제로 얘기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린 왕은 외모와 무관하게 궁녀들의 관심사인데 승은을 입기가 수월한 이유가 크기 때문이다. 궁녀들과 지나치게 성관계를 가졌다는 설화가 있는데 헌종이 궁녀들을 가까이 한 건 안동 김씨의 후손을 낳지 않고 후궁으로 대를 잇겠다는 의지라고 보는 해석도 존재한다. * 좋은 외모에 영민한 편이었지만, 제대로 된 노력을 해보기도 전에 20대 초반에 [[요절]]하는 등 여러모로 아버지 [[효명세자]]를 닮은 [[조선/왕사|왕]]이다. 실제로 [[효명세자]]와 헌종 부자는 외모가 판박이였다고 하며 [[죽음|승하]] 당시 나이도 [[효명세자]]보다 불과 1살밖에 많지 않았기도 하다. 흥미롭게도 [[죽음|승하]] 당시 장소는 신분과 정반대인데, [[효명세자]]는 [[조선/역대 왕세자|세자]] 신분에 편전인 [[창덕궁 희정당|희정당]]에서 훙서하였고, 헌종은 [[조선/왕사|국왕]] 신분에 [[동궁]]인 [[창덕궁 중희당|중희당]]에서 승하하였다. * [[서예]]에 능했으며 특히 [[예서]]에 능했다고 한다. * 세간의 평가와 달리 [[왕권]] 강화를 위해 [[신 안동 김씨|안동 김씨]]로 대표되는 [[세도 정치|세도]] [[가문]]을 견제해 이들을 제어하는 노력을 하였고 각종 서책 간행을 하였다. 동시에 [[수령]]의 [[뇌물]] 문제를 건드려 민생을 바로 잡으려 하였다. 하지만 너무 이른 나이에 [[사망]]하여 제대로 된 시도조차 하지 못하였으며, 그 결과 기울어가는 [[조선]]을 끝내 바로잡을 수 없었다. * 실제로 [[신 안동 김씨|안동 김씨]]에서 헌종을 부정적으로 평가한 증거는 많은데, 할머니 [[순원왕후]]는 헌종을 "남의 말을 곧이 곧대로 믿지 않고 의심이 많으며 시기심이 강하다"라는 평을 내렸다. 특히 [[신 안동 김씨|안동 김씨]] 출신의 [[조선/역대 왕비|왕비]]이자 헌종의 친할머니였던 [[순원왕후]]의 어필 봉서[* (헌종이 죽기 며칠 전) '왕을 몰아내지 않으려고', '내 집의 패악한 자식', (헌종 사후) '나도 거리길 거시 업서 싀훤해' 등]을 보면 헌종과 김씨였던 [[순원왕후]]가 의외로 상당한 갈등을 벌였다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변원림의 해석(<순원왕후 독재와 19세기 한국 사회의 동요>, 2012년) 참조. 다만, <순원왕후의 [[한글]] 편지>를 편집한 [[이승희]] 교수는 이를 '안동 김씨 일가의 패악한 이'로 해석한다. 《대비, 왕 위의 여자》의 [[김수지]]의 종합에 따르면 [[순원왕후]]는 대체로 [[신 안동 김씨|친정 김씨]] 가문을 '우리 집'이라고 하고 [[조선/왕실|왕가]]를 '내 집'이라고 했는데, [[순원왕후]]는 '내 집'을 거론했으므로 '내 집의 [[패륜아|패악한 자식]]'이라고 언급할 만큼 손자 헌종을 못마땅하게 여겼다고 본다.][* [[신 안동 김씨|김씨 문중]]의 [[김흥근]]이 [[유배]]를 가게 되었을 때 그것을 막지 않은 [[순원왕후]]에게 질타가 쏟아지자 같은 [[편지]]에서 "[[김흥근]]이 떳떳하다면 (유배는) 금방 지나갈 액운이며, [[신 안동 김씨|우리 가문]]이 흥하는 것은 오히려 [[하늘]]의 경계이니라. 더욱 조심해야 할 것이다."라고 밝혔다. 또한, [[철종(조선)|철종]]의 [[조선/역대 왕비|왕비]]를 [[간택]]할 때 [[신 안동 김씨|안동 김씨 문중]]을 배제하도록 조언하거나 [[김흥근]]의 아들이 요직에 오르지 못하게 하는 등 [[신 안동 김씨|가문]]과 일정거리를 두었음을 알 수 있다.] * [[박시백]] 역시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자신의 만화]]에서 헌종의 [[사망|훙]](薨)에 대해 "[[신 안동 김씨|안동 김씨]] 일문에게 헌종의 때이른 [[죽음]]과 [[순원왕후]]의 2차 [[수렴청정]]은 행복한 사태 반전이었다."라고 언급했다. * 앞서 소개되었듯이 헌종은 [[조선/왕사|후사]]가 없어 [[정조(조선)|정조]]의 '''생물학적''' [[직계]] [[혈통]]은 완전히 단절되어 버렸다. 헌종이 [[사망|승하]]한 이후 [[조선]]의 [[조선/왕사|왕위 계승권]]은 정말 복잡해졌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정조(조선)|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는 [[임오화변]]으로 [[폐서인]]이 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사도세자]]의 유일한 생물학적 [[적자]]인 [[정조(조선)|정조]]는 [[폐서인]]이 된 아버지 [[사도세자]]의 [[아들]] 자격으로는 [[왕세손|세손]]의 신분을 유지할 수 없었다.[* '逆敵之子 不爲君王(역적지자 불위군왕). 역적의 아들은 왕이 될 수 없다.'는 기지로 [[정조(조선)|정조]]에게는 끊임없이 불안정한 [[조선/왕사|왕위 계승]]에 대한 의심과 눈초리로 내내 꼬리표를 달았고, 이 때문에 [[암살]] 위협도 수차례 받았었다.] 그렇기 때문에 [[영조]]는 [[정조(조선)|손자]]를 오래전에 조졸한 자신의 [[효장세자|큰아들]]의 [[양자(가족)|양자]]로 보내 [[왕세손|세손]]의 신분을 유지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물론 [[조선/왕사|왕위 계승]]과 전혀 관계 없는 [[사도세자]]의 서자인 [[정조(조선)|정조]]의 이복동생들([[은언군]]·[[은신군]]·[[은전군]])은 그대로 [[사도세자]]의 가계에 남겼다. [[정조(조선)|정조]]의 바로 아래동생인 [[은언군]]은 자신의 아들인 [[상계군]]이 [[역적]]으로 몰리는 바람에 집안이 풍비박산 나버렸으며, 엎친데 덮친 격으로 막내아들인 [[전계대원군|전계군]]의 큰아들인 [[회평군]]마저도 [[역모]]에 휘말려 죽게 된다. 이러한 이유로 [[전계대원군|전계군]]의 남은 자식인 [[영평군(1828)|이경응]]과 [[철종(조선)|이원범]]은 [[강화도]]에서 [[평민]]으로 살고 있었다. 헌종의 할머니로서 당시 [[조선/왕실|왕실]]의 제일 큰 어른이었던 [[순원왕후]]는 이원범을 [[양자(가족)|양자]]로 들여 [[조선/왕사|차기 국왕]]으로 공식 지명하였으며, 이원범이 바로 [[조선]]의 제25대 임금 [[철종(조선)|철종]]이다. [[철종(조선)|철종]]은 생물학적으론[* [[정조(조선)|정조]]를 [[사도세자]](장조)의 아들로 볼 경우.] 제24대 임금인 헌종과 7촌(재종숙) 관계이고, 족보상으론[* [[정조(조선)|정조]]를 [[효장세자]](진종)의 [[양자(가족)|양자]]로 볼 경우.] 9촌 관계로 먼 친척이었다. [[철종(조선)|철종]] 사후 [[조선/왕사|왕위 계승]]은 이보다 더 복잡하다. [[철종(조선)|철종]] 또한 후사가 없이 오랜 병으로 30대 초반에 [[사망]]했다. 당시 [[조선/왕실|왕실]]의 제일 큰 어른은 [[순원왕후]]의 [[며느리]]이며, [[효명세자]]의 [[아내]]이자 헌종의 어머니인 [[신정왕후 조씨|신정왕후]]였고, 신정왕후는 [[흥선대원군|흥선군]]의 차남 이명복을 [[양자(가족)|양자]]로 들여 [[조선/왕사|차기 국왕]]으로 지명하게 된다. 그가 바로 [[조선]] 제26대 [[조선/왕사|임금]]이자, [[대한제국]]의 [[대한제국/황사|초대 황제]]인 [[고종(대한제국)|고종]]이었으며, [[고종(대한제국)|고종]]은 전임자인 [[철종(조선)|철종]]과 족보상으로[* [[철종(조선)|철종]]과 [[흥선대원군]]은 촌수는 멀지만 어쨋든 같은 항렬이며, [[철종(조선)|철종]]의 고조부(4대조)는 [[영조]]이고 [[흥선대원군]]의 고조부는 양자 제도를 여러 거쳐 [[연령군]]이다. 즉, 고조부끼리 형제이다.] 11촌 관계였다. 물론 족보상으로 볼 땐 먼 친척이지만, [[양자(가족)|양자]] 관계를 통해 비교적 가까운 친척으로 볼 수 있는데 [[흥선대원군|흥선군]]의 아버지 [[남연군]]은 [[은신군]]의 [[양자(가족)|양자]]이고, [[사도세자]]의 [[서자]]였던 [[은신군]]은 작은 할아버지 [[연령군]]의 봉사손이 되어 출계했기 때문이다. 이는 '''[[조선]] 후기로 갈수록 [[조선/왕실|왕실]]의 손이 귀해졌다는 것을 방증하는 사례'''이기도 하다. == 대중매체 == [[조선]] 역대 국왕들 중에서 [[사극]]과 가장 인연이 늦은 왕. 첫 등장이 [[2018년]]인데 그 전까지는 하다 못해 죽는 장면으로라도 나온 적이 없었다. 조선 왕들 중에서 [[인지도]]가 낮은 왕들은 여럿 있지만 [[예종(조선)|예종]]은 [[남이]]의 옥사, [[인종(조선)|인종]]은 [[문정왕후]]의 치세라는 극적 사건이 있어 [[사극]]에 여러 번 얼굴을 비추기라도 했고, 이렇다 할만한 화제성[* [[예송논쟁]]이 있기는 하나 사극으로 만들기에는 썩 좋은 소재가 아니다.]도 없는 [[현종(조선)|현종]]조차도 첫 사극 출연이 [[2002년]]으로 헌종보다 16년 더 빨랐다. 심지어 아내 [[효정왕후]]도 [[2001년]] [[KBS]] 드라마 《[[명성황후(드라마)|명성황후]]》에서 출연했으니 마누라보다도 더 등장이 늦은 경우이다. 이때 효정왕후를 연기한 사람은 배우 [[김정하]]이다. * 네이버 웹툰 《[[조선왕조실톡]]》에서는 아버지 [[효명세자]]를 그리워하는데 한 궁녀가 "전하(헌종)랑 똑 닮으셨다"고 하자 [[셀카]]를 자주 찍는다. * [[효명세자]]를 주인공으로 한 [[네이버]] 웹소설인 《[[구르미 그린 달빛]]》(작가 윤이수, 삽화 kk)이 [[2016년]] [[KBS]]에서 [[구르미 그린 달빛(드라마)|구르미 그린 달빛]]으로 드라마화되었는데 드라마에서는 가상의 세자로[* 이름은 [[효명세자]]와 같은 '이영' 그대로인데 [[한자]]를 바꾸어 음만 같은 [[동명이인]]이 되었다. 그렇지만 다들 효명세자로 잘못 알려져 [[동구릉]]을 찾는 이가 많아졌다고 한단다.] 설정이 바뀌어서 효명세자의 아들인 헌종 역시 등장하지 않게 되었다. * 《[[광해의 연인]]》을 쓴 [[유오디아]]의 네이버 웹소설인 《반월의 나라》의 메인 [[남주인공]]이 헌종이다. 연재 당시에는 [[휘]]가 '연'으로 쓰였지만 후에 종이책으로 발간되면서 본래 휘인 '환'으로 수정되었다. 전체적인 내용은 [[조선의 천주교 박해|천주교 박해]]로 인해 부모님을 잃고 [[청나라]]로 건너가 [[공주]]가 된 [[여주인공]]이 이런저런 사정으로 [[조선]]으로 건너가 남주인공을 만나게 되는 이야기다. * [[2018년]] 2월, 개봉한 영화 《[[흥부(영화)|흥부]]》에서는 배우 [[정해인]]이 연기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DVhe5r8UQAEYEmg.jpg|width=100%]]}}}|| || {{{#gold '''《[[흥부(영화)|흥부]]》의 헌종'''}}} || * [[2018년]] 9월, 개봉한 영화 《[[명당(영화)|명당]]》에서는 모델 출신 배우 [[이원근]]이 연기했다. 시사회와 제작보고회를 통해 "슬프고 유약한 왕," "울분에 찬 젊은 왕"이라고 소개되었고, 작중에서 [[흥선대원군|흥선군]]과 함께 [[신 안동 김씨|장동 김씨]]의 [[세도정치]]에 맞서 [[왕권]]을 회복하려고 그전에 있었던 아버지 [[효명세자]]의 무덤을 파헤치고 잘못된 터로 자리잡았다고 발악 아닌 발악(?)을 하지만 이미 [[군부]]까지 장악해 둔 [[김좌근]]에게 밀려서 [[반말]]로 까불면 [[조선/역대 왕세자|세자]]와 함께 죽이겠다는 협박을 듣고 [[김좌근]]에게 고개를 조아리고 목숨을 구걸하는 처지가 되어 사실상 퇴장한다. 영화 막바지에 [[신 안동 김씨|장동 김씨]]들의 음모로 아버지 [[효명세자]]처럼 [[독살]]당하는데 명백히 [[고증]] 오류다. 헌종에게는 [[아들]]이 없었고 오히려 이 때 신나게 장동 김씨인 [[신 안동 김씨|안동 김씨]] 세력들을 조지고 있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명당헌종.jpg|width=100%]]}}}|| || {{{#gold '''《[[명당(영화)|명당]]》의 헌종'''}}} || * [[2020년]], [[tvN]] [[드라마]] 《[[철인왕후(드라마)|철인왕후]]》에서는 배우 윤신이 연기했다. 극중에서는 친정을 시작한 후 [[세도 정치|세도]] [[신 안동 김씨|가문]]을 견제하여 [[왕권]] 강화를 이룩하기 위해 노력하였고, [[세도 정치|세도]] [[신 안동 김씨|가문]] 세력이 크게 약화되자 위기감을 느낀 [[세도 정치|세도]] [[신 안동 김씨|가문]] 세력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 《[[패러독스 인터랙티브]]》에서 개발한 <[[빅토리아 2]]>의 첫 번째 시나리오인 '위대한 출정(Grand Campaign)'의 배경이 [[빅토리아 여왕]]의 즉위 1년 전인 1836년인데 이 시기가 헌종이 즉위한 지 2년이 되는 해이다.[* 헌종의 즉위는 1834년으로 빅토리아 여왕보다 2년 앞섰다.] 즉 빅토리아 2 시나리오 1편에 등장하는 조선의 군주는 바로 헌종인 것이다.[* 물론 헌종은 6년 간 [[순원왕후|명경대왕대비]]의 수렴청정을 받았으니 서양인들의 시각에선 순원왕후를 실질적인 군주로 간주할 수도 있다.] * 《[[패러독스 인터랙티브]]》에서 개발한 <[[빅토리아 3]]>는 헌종이 즉위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부터 시작되기 때문에 [[조선]]의 [[조선/왕사|왕]]으로 등장한다. 유저가 정치 경제 사회 분야에 개입하기 때문에 유저의 플레이 방향성에 따라 어린 나이에 [[세도 정치|세도]]가를 박살내고 동아시아 주변 정세를 정리하여 [[조선]]을 강력한 근대 산업 국가로 성장시킨 터무니없는 희대의 성군 ~~[[루아녹스]]~~이 되거나 [[공화주의]]에 휩쓸려 쓸쓸히 [[퇴위]]할 수도 있다. 상투나 단명한 것이 고증되어 있지 않다. 내성적, 외교관의 특징을 가진 것으로 나타난다. 게임적 허용으로 인해 나이가 어려서 굉장히 오래 산다. 1936년 게임이 끝나기 직전까지 살아남는 경우도 있다. 보통 렉으로 인해 이까지 가는 경우는 드물기에 게임 끝날때까지 헌종이 국가 지도자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빅토3 헌종 1.2.4. 버전.png]]}}}|| || {{{#gold '''〈빅토리아 3〉의 헌종'''}}} || * 패러독스 사의 [[Hearts of Iron IV]]의 대형 대체역사 모드 중 하나인 [[THE LAST EMPIRE|마지막 제국]]에서는 임자사화를 통해 세도가문을 축출하고 칭제건원을 통해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인 '''고조 태황제'''가 된다 연호는 영락 * [[2022년]] 11월, 개봉한 영화 《[[탄생(영화)|탄생]]》에서는 배우 [[남다름]]이 헌종 역을 맡아 연기했다. * [[효명세자와 함께하는 조선 생활]]에선 효명세자가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로 즉위하며 황태자가 되었고 외전 시점에서 효명세자가 태상황으로 물러나며 자리를 이어받았지만 이재황(원 역사의 고종)이 콩고주민을 학대하자 조일준의 간언을 받아들여 처벌하기로 하는데 이재황이 상어에게 잡아먹히자 그를 황실호적에서 파버린다. == 관련 문서 == * [[경빈 김씨]] * [[경희궁 숭정문]] * [[경희궁 흥정당]] * [[김조순]] * [[김좌근]] * [[동구릉]](경릉) * [[동국문헌비고]] * [[동국사략]] * [[보소당인존]] * [[세도 정치]] * [[신 안동 김씨|안동 김씨]] * [[숙의 김씨(헌종)|숙의 김씨]] * [[순원왕후]] * [[순조]] * [[순조실록]] * [[순화궁]] * [[승정원일기]] * [[신정왕후 조씨|신정왕후]] * [[조대비 사순칭경진하도 병풍]] * [[조선/왕사]] * [[조선의 천주교 박해]] * [[기해박해]] * [[병오박해]] * [[정화당 김씨]] * [[조만영]] * [[조선/왕사]] * [[조선/왕실]] * [[조선왕조실록]] * [[창경궁 경춘전]] * [[창덕궁 낙선재]] * [[창덕궁 중희당]](효정전) * [[철종(조선)|철종]] * [[철종실록]] * [[헌종가례진하도 병풍]] * [[헌종실록]] * [[효명세자]] * [[효정왕후]] * [[효현왕후]] * [[흥선대원군]] == 둘러보기 == [include(틀:조선 왕실)] ---- [include(틀:대한제국 황실)] [각주][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헌종, version=133)] [[분류:헌종(조선)]]||||||||||||||<:><#94153E>http://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5/58/Coat_of_Arms_of_Joseon_Korea.png?width=40 [br] '''{{{+1 [[조선/왕사|{{{#red 조선의 역대 국왕}}}]]}}}''' || ||<:> 23대 [[순조]] 이공 ||<:> {{{+1 ←}}} ||<:><#94153E> '''{{{#yellow 24대 헌종 이환}}}''' ||<:> {{{+1 →}}} ||<:> 25대 [[철종(조선)|철종]] 이변 || ||<:><-4> [[파일:atjcwJl.png|width=276&height=368]] || ||<:> '''[[묘호]]''' ||||<:> '''[[헌종]](憲宗)''' || ||<:><|3> '''[[시호]]''' ||<:><|2> 조[br]선 ||<:> 경문위무명인철효대왕[br](經文緯武明仁哲孝大王)[* 사후 조선 왕실에서 올린 시호.] || ||||<:> 체건계극중정광대지성광덕홍운 [br]장화경문위무명인철효성황제[br](體健繼極中正光大至聖廣德弘運 [br]章化經文緯武明仁哲孝成皇帝)[br][* 1908년 [[순종(대한제국)|순종 황제]]에 의해 황제로 추존되면서 받은 시호] || ||<:> 청 ||<:> ~~장숙~~(莊肅, 황제 추존과 동시에 폐지) || ||<:> '''[[본관]]''' ||||<:> 전주(全州) || ||<:> '''[[능묘]]''' ||||<:> [[경릉]](景陵) || ||<:> '''휘''' ||||<:> 이환(李烉) || || '''[[자(이름)|자]]''' ||||<:> 문응(文應) || ||<:> '''[[아호|호]]''' ||||<:> 원헌(元軒) || ||<:> '''[[고향|출생지]]''' ||||<:> 창경궁(昌慶宮) 경춘전(景春殿) || ||<:> '''사망장소''' ||||<:> 창덕궁(昌德宮) 중희당(重熙堂) || ||<:> '''배우자''' ||||<:> 효현성황후(孝顯成皇后), 효정성황후(孝定成皇后) || ||<:> '''아버지''' ||||<:> [[효명세자|조선 문조]](효명세자) || ||<:> '''어머니''' ||||<:> [[신정왕후#s-2|신정익황후]](神貞翼皇后) || ||<:> '''종교''' ||||<:> [[유교]] ([[성리학]]) || ||<:><|2> '''생몰'''[br]'''기간''' ||<:>[[음력]]||[[1827년]] [[7월 18일]] ~ [[1849년]] [[6월 6일]] || ||<:>[[태양력|양력]]||[[1827년]] [[9월 8일]] ~ [[1849년]] [[7월 25일]](21년 10개월 17일,7991일.)|| ||<:><|2> '''재위'''[br]'''기간''' ||<:>음력||[[1834년]] [[11월 18일]] ~ 1849년 6월 6일 || ||<:>양력||<:>[[1834년]] [[12월 18일]] ~ 1849년 7월 25일.(14년 7개월 7일, 5,333일.)|| [include(틀:대한제국의 추존 황제)] ||||||||||||||<:><#94153E> '''{{{+1 [[왕세자|{{{#red 조선의 역대 왕세손}}}]]}}}''' || ||<:> [[효명세자|문조]] 이영 (왕세자) ||<:> {{{+1 ←}}} ||<#94153E><:> '''{{{#yellow 헌종 이환}}}''' ||<:> {{{+1 →}}} ||<:> [[순종(대한제국)|순종]] 이척 (왕세자) || [목차] == 개요 == [[조선]] 제24대 왕. [[순조]]의 손자이자, [[효명세자]](익종)의 [[외아들]]이다. 효명세자가 요절하고 순조마저 건강 악화로 일찍 세상을 떠나자 [[황태손|왕세손]]의 신분으로 8살 나이에 왕이 되었다. 조선 왕으로서는 최연소로 [[단종(조선)|단종]]보다도 어린 나이에 즉위했다. 비슷한 경우로 [[충목왕]]이 있다. == 치세 == 어머니는 풍양 조씨다. 아내는 [[안동 김씨]]로 [[김조근]]의 딸인 효현왕후, 결혼 2년만에 16세의 나이로 일찍 사망했다. 어머니와 아내의 가문에서 보듯이 헌종의 치세는 실로 풍양 조씨와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로 조선이 파탄 직전까지 가고 있던 시절이었다. 어린 나이에 즉위했기 때문에 [[순조]]의 비인 [[순원왕후]] 김씨가 [[수렴청정]]을 실시했다. 순원왕후의 수렴청정기에는 '척사윤음'을 반포하며 [[천주교]] 신자들에 대한 대대적 체포령이 내려졌고(기유박해), [[천주교]] 신자들을 색출하기 위해서 다섯 집을 하나의 통으로 묶어 서로의 집안을 감시하도록 한 [[오가작통]]법을 활용하기도 했다. 이 시기에 한국 최초의 [[신부(종교)|신부]]인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순교]]'''하기도 했다.(병오박해) 더욱이 삼정의 문란으로 백성들의 민생은 파탄의 직전으로 내몰리고 있었지만 이에 대한 대책은 딱히 세우지도 못했고, 외부에선 서양선박들이 나타나 통상을 요구하는 이양선 출몰사건이 잇달아 일어나 민심은 동요했다. 실로 안습의 세월이라 할 만하다.(…) 기존의 견해로는 헌종조 전반을 풍양조씨와 안동김씨와의 세력 다툼이 치열한 시기로 알려졌고, 그래서 야사에서는 조병구가 권세를 휘두르자 "외삼촌의 목에는 칼이 안들어 가는가?"라고 말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어째 김좌근의 일화로도 알려져 있다. 이야기의 출처는 김택영의 <한사경>인데, 헌종 앞에서 애체([[안경]])을 썼다고 한소리 들은 것. 한소리만 듣고 끝난 게 다행인 게, 당대 예법에서 분명 어긋나는 것이었다! 안경을 쓸 정도로 공부를 많이 했으니 웃어른 앞에서 자신의 학식을 뽐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훗날 [[서재필]]도 [[고종(대한제국)|고종황제]] 앞에서 [[안경]]을 썼다가 욕을 먹기도 했고 순종도 지독한 근시였였지만 아버지 고종 앞에서는 예를 지키기 위해 안경을 안 썼다고 항다.] 헌종의 이 말에 조병구는 이 말을 듣고 놀라서 황급히 물러나와 퇴궐하다가 '''[[가마]]가 뒤집혀서 머리가 깨져 죽었다'''고(…)도 하고, 이게 [[신정왕후]] 앞이었는데도 헌종의 책망을 듣자 음독 자살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실제로는 죽기 전 해까지도 한성판윤, 예조, 이조, 공조판서를 한창 지내다가 대간들의 탄핵에 몰려 쫓겨나 그해 1845년 졸. 이는 어디까지나 안동 김씨의 편인 대간들의 견제에 따른 것으로, 사망 시기 자체가 헌종이 친정을 시작한 시기보다 이르다. 무엇보다도 조병구가 헌종이 그렇게 말할 정도로 권세를 휘둘렀다면 졸기에 좋은 내용이 실릴리 없다.[* 조병구의 졸기엔 '숙성한 재주를 지녔다. 다만 각박한 게 흠이었다'라고 되어 있다.] 실상은 [[안동 김씨]]의 세력이 큰 견제 없이 커가는 시기였고 헌종은 친정이 시작된 이후 20세가 될 무렵부터 척신들을 견제하기 시작했다. [[수렴청정]]이 15세 때 끝나고, 아내인 효현왕후가 죽으면서 순원왕후의 의중에 따라 홍재룡(洪在龍)의 딸인 [[효정성황후|효정왕후 홍씨]]([[1903년]] 졸)를 계비로 맞은 것. 이 때 주부(主簿) 김재청(金在淸)의 딸을 후궁 경빈(慶嬪) 김씨로 삼기도 했다. 그래서 안동 김씨의 세도는 다시 조금이나마 흔들리기 시작했다. 헌종은 안동 김씨의 수장인 김좌근 등을 압박하여 유배를 보내는 등 반 안동 김씨 행보를 밟았고, 대구 서씨 서희순을 이조판서 겸 총위대장으로 내세우기도 했다. 5영의 훈련대장을 외척이 아닌 사람들로 채워넣고 병조판서를 독자적으로 임명한 건 대표적. 이렇게 군권을 장악하고 [[정조(조선)|정조]]의 장용영처럼 친위대인 총위영(총융청)까지 구성하는 등 아주 활발한 왕권 강화 정책을 펼쳤다. 수령의 장죄(뇌물) 문제를 전면으로 들고 나와서 법률 개정을 주도한 적도 있었는데, 수령의 뇌물이 어디로 가는가를 생각해보면 세도 가문들을 타깃으로 노린 것이 100%다. 하지만 비변사의 비협조로 법 개정은 무산되었다. 그런가하면 [[암행어사]]도 활발하게 전국으로 파견했고 안동 김씨의 [[조병헌]] 사사 요구를 매우 강력하게 거부하면서 삼사를 모조리 파직하기도 했다. 조병헌은 결국 귀양을 갔다가 헌종 말에 풀려나지만 [[철종(조선)|철종]] 초에 사사된다. 대사간 서상교를 통해 안동 김씨의 실세 중의 실세인 김흥근을 탐오하고 대왕대비의 비위를 맞추어('궁위를 엿보아') 정치를 했다고 탄핵하고 귀양 보내기도 했다. 안동 김씨에게 밉보인 [[김정희]], 조병헌도 헌종 14년에 유배에서 풀렸고 영상 정원용은 안동 김씨에게 아부하다가 파직 당한다. 그러나 그 직후 향년 23세로 사망(…) 증조할아버지 [[정조(조선)|정조]]처럼 헌종 역시 스스로 약을 조제하고 의원을 불렀으나 결국 병을 다스리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앓다가 갑자기 차도 없이 사망했다는 것과 안동 김씨의 세력을 한창 조지던 와중에 급사하는 바람에 미약하게나마 독살설이 나올 정도다. 특히 [[순원왕후]]의 어필 봉서[* (헌종 죽기 며칠 전) '왕을 몰아내지 않으려고', '내 집의 패악한 자식', (헌종 사후) '나도 거리길 거시 업서 싀훤해' 등]를 근거로 한 독살설은 증거는 없으나, 헌종과 순원왕후가 의외로 할아버지 정조와 고조할머니 [[정순왕후 김씨(조선)|정순왕후 김씨]] 급, 어쩌면 그 이상의 갈등을 벌였다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변원림의 해석(<순원왕후 독재와 19세기 한국사회의 동요>, 2012) 참조. 다만 <순원왕후의 한글편지>를 편집한 이승희 교수는 이를 '안동 김씨일가의 패악한 이'로 해석한다. <대비, 왕 위의 여자>의 김수지의 종합에 따르면, [[순원왕후]]는 대체로 안동 김씨가를 '우리 집'이라고 하고, 왕가를 '내 집'이라고 했는데, 순원왕후는 '내 집'을 거론했으므로, '내 집의 패악한 자식'이라고 언급할 만큼 손자 헌종을 못마땅하게 여겼다고 본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독살설에 대해서는 실록에 이렇다할 근거가 없는 만큼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왕성한 20대 초반의 나이, 호색과 죽음 사이에 그토록 밀접한 관련이 있는지 모르겠다" "안동 김씨 일문에게 헌종의 때 이른 죽음과 순헌왕후의 2차 수렴은 행복한 사태 반전이었다." 등을 언급하며 헌종의 이른 죽음에 뭔가 다른 게 있지 않을까 하는 늬앙스를 살짝 띄우고 있다. 나름대로 '[[국조보감]]'의 증수를 위해 정조·순조·익종에 대한 '삼조보감(三朝寶鑑)'을 찬집했고, '열성지장', '동국사략', '문원보불', '동국문헌비고' 등을 편찬하고, 각 도의 제방과 저수지를 정비하는 등의 치적을 세우기도 했지만 그런 정도의 치적으론 조선을 바로잡을 수가 없었다는게 문제. 안동김씨를 비롯한 척신을 척결하고자 하였지만 돌연 죽음으로 왕권을 바로 세우지 못했다. 아들은 없었으며 [[궁녀]] 출신 숙의 김씨와 효정왕후 홍씨 사이에서 각각 딸 하나 씩을 두었는데 모두 [[요절]]했다. 헌종이 후사 없이 23살이란 젊은 나이에 사망함에 따라 결국 [[효종(조선)|효종]] 때부터 이어진 직계 왕통은 단절되었다. 동시에 정조의 혈통도 끊겼으며 결국 안동 김씨가 [[강화도]]를 뒤져 [[사도세자]]의 서자 [[은언군]]의 손자인 [[철종(조선)|철종]]을 옹립하게 된 요인이 되었다. == 가계 == * 정비 : [[효현왕후]] 김씨 * 계비 : [[효정왕후]] 홍씨 * 공주 - 요절 * 후궁 : 순화궁 경빈 김씨 * 후궁 : 정빈 윤씨 * 후궁 : 숙의 김씨 * 옹주 - 요절 === 조선의 사랑꾼? === 야사에 따르면 계비 [[효정왕후]] 간택 때 참여한 경빈 김씨를 무척 마음에 들어했는데, 자신의 의사와 달리 할머니 [[순원왕후]]와 어머니 [[신정왕후]]가 효정왕후를 간택하자 몇 년 뒤에 기어이 경빈 김씨를 간택했다고 한다. 경빈 김씨를 위해 석복헌과 낙선재를 지었을 정도라고. 이는 왕비와 금슬이 좋았던 할아버지 [[순조]]나 아버지 [[효명세자]]보다는 증조부 [[정조]]와 유사한 면모. 정조도 [[의빈 성씨]]를 15년이나 기다렸을 정도로 사랑꾼이었기 때문이다. 애초 얼굴이 꽤나 잘 생겨 당대에 [[꽃미남]] 취급을 받았다고 하며, [[궁녀]]들과 지나치게 호색하다가 죽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다만 그가 궁녀들을 가까이 한 것은 욕구 이전에 '''안동 김씨 출신의 자손을 더는 낳지 않겠다. 어떻게든 [[후궁]]을 통해 대를 잇겠다'''라는 의지였다는 해석도 있다. 또한 헌종은 어린 나이에 아버지인 [[효명세자]]를 잃었으므로 늘 아버지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을 마음 아프게 여겨 한 신하에게 늘 물었는데, '진전에 모신 수용[* 초상화를 말하며 당시 효명세자는 왕으로 추존되었으므로 정확히는 효명세자의 [[어진]]을 말한다.]이 오히려 매우 닮으신 전하의 용안에 미치지 못합니다' 하니 헌종이 거울을 보고 눈물을 줄줄 흘렸다고 한다. == 기타 == 헌종의 능은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 내의 [[경릉]](景陵). 왕비인 효현왕후 김씨, 효정왕후 홍씨와 나란히 묻힌 삼연릉으로 삼연릉 형식은 조선 왕릉 중 유일하다. '우왕좌비[* 오른쪽에 왕을 장사하고 왼쪽에 왕비를 장사함]'의 원칙에 따라 맨 오른쪽에 헌종 능이 있고 가운데에 효현왕후 김씨, 오른쪽에 효정왕후 홍씨가 묻혀 있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의 작가 [[박시백]]은 이 능에 대해 안동 김씨인 효현왕후를 헌종과 효정왕후가 모시는 듯한 인상을 준다고 촌평하기도 했다. [[http://news.dongascience.com/PHP/NewsView.php?kisaid=20130227200002384549&classcode=01|#]] [[순원왕후]]는 "남의 말을 곧이 곧대로 믿지 않고 뭐든지 두번 생각하고 움직이며 눈치가 빠르다"는 평을 내렸다. 이를 [[안동 김씨]]가 장악한 조정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행보를 밟은 것이라 보는 해석도 있다. [[서예]]에 능했으며 특히 [[예서]]에 능했다고 한다. 덤으로 '''한국 사극에서 조선시대 왕 중 유일하게 한번도 등장하지 못한 왕이다'''. 하다 못해 '죽는 장면'으로라도 나온 적이 없다.[* 단 네이버 대하사극 카페에는 "조선왕조500년"에 이경현이라는 배우가 헌종으로 등장했다는 게시물이 있는데 확인 필요.] 물론 이는 아버지인 [[효명세자]]도 마찬가지였으나 마침내 2016년 하반기 KBS 드라마 "[[구르미 그린 달빛]]" 에서 등장한다. 배우는 [[박보검]]. 존재감 없는 임금 중 하나였던 [[현종(조선)|현종]]도 [[마의(드라마)|드라마에]] [[장옥정 사랑에 살다|출연하는 판]]인데 [[안습]]. --[[한국 사극/역대 왕역#s-2.8|조상님들이나 후임 왕들은 실컷 출연료 받아 먹고 있는데]] 난 이게 뭐야 징징-- 사실, 주목을 별로 받지 않는 것에 비해서 포장을 하자면 의외로 드라마로 만들 만한 소재가 될 법 하기는 한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은 젊은 왕"이라는 점도 그렇고, 세도 정치를 개혁하는 개혁 군주의 모습도 어느 정도 넣을 수 있기는 하고, 게다가 젊어서 죽었기 때문에 비교적 화수를 적게 잡아도 된다.(…) --막말로 대중매체에 유통되었던 정조와 정순왕후의 갈등을 다룬 작품들은 사실 헌종과 순원왕후의 대립으로 바꿔야 역사적으로 딱 맞아떨어진다-- 다만 사극에 등장할 가능성은 있'''었'''다. 효명세자를 주인공으로 한 웹소설 '[[구르미 그린 달빛]]'(작가 [[윤이수]], 삽화 [[kk]])이 드라마화 되었기 때문. 그러나 소설 원작과 드라마의 결말이 다르게 났기 때문에 결국 헌종은 등장하지 않았다... [[광해의 연인]]을 쓴 유오디아의 차기작인 (현재 시점으로는 완결된) <반월의 나라>의 메인남주가 바로 헌종이다! 연재 당시에는 휘가 연으로 쓰였지만 후에 종이책으로 발간되면 본래 휘인 환으로 수정된다는 듯. 전체적인 내용은 [[천주교]] 박해로 인해 부모님을 잃고 청으로 건너가 [[공주]]가 된 여주가 이런저런 사정으로 조선으로 건너가 남주를 만나게 되는 이야기다.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헌종, version=133)] [[분류:조선의 왕]] Load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