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변경문서 보기수정 내역 현종(고려) (버전 비교) [Include(틀:다른 뜻1, other1= KBS 대하드라마 <고려 거란 전쟁>의 등장인물, rd1=현종(고려 거란 전쟁))] [include(틀:역대 고려 국왕)]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e6bd0e, #f9d537 20%, #f9d537 80%, #e6bd0e)" {{{#670000 '''현종 관련 틀'''}}}}}}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include(틀:현종(고려))] ---- [include(틀:고려의 왕자/국조 ~ 문종)] ---- [include(틀:고려사)]}}}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e6bd0e, #f9d537 20%, #f9d537 80%, #e6bd0e); color: #670000" '''고려 제8대 국왕[br]{{{+1 현종 | 顯宗}}}'''}}} || ||<-2>{{{#!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강감찬 장군에게 금꽃을 꽃아주는 현종대제.jpg|width=100%]]}}} || ||<-2> {{{#670000 {{{-2 [[강감찬]]에게 금꽃을 꽂아주는 현종}}} }}} || ||<|2> '''출생''' ||[[992년]] [[8월 1일]] || ||[[고려]] [[개성시|개경 개성부]] 왕륜사 남쪽 [[헌정왕후]] 사저[* 현화사비에 따르면 [[만월대 내 별궁]]인 보화궁이다.][br](現 [[개성시]] 송악동) || ||<|2> '''즉위''' ||[[1009년]] [[3월 2일]] || ||[[고려]] [[개성시|황도 개주]] [[만월대|정궁]] 연총전[br](現 [[개성시]] 송악동) || ||<|2> '''사망''' ||[[1031년]] [[6월 16일]] (향년 38세) || ||[[고려]] [[개성시|개경]] [[만월대|정궁]] 중광전[br](現 [[개성시]] 송악동) || || '''능묘''' ||[[선릉]](宣陵) || ||<|4> '''재위기간''' ||'''{{{#f9d537 고려 대량원군}}}''' || ||[[1003년]] 이전 ~ [[1009년]] [[3월 2일]] || ||'''{{{#670000 고려 제8대 국왕}}}''' || ||[[1009년]] [[3월 2일]] ~ [[1031년]] [[6월 16일]] {{{-3 (22년 3개월 14일)}}} || ||<-2>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본관''' ||[[개성 왕씨]] || || '''휘''' ||순([[詢]]) || || '''부모''' ||부왕 [[안종(고려)|안종]][br]모후 [[헌정왕후]] || || '''형제자매''' ||1남 1녀 중 장남 || || '''왕후''' ||[[원정왕후]], [[원화왕후]], [[원성왕후]], [[원혜왕후]][br][[원용왕후]], [[원목왕후]], [[원평왕후]] || || '''후궁''' ||[[원순숙비]], [[원질귀비]], 귀비 유씨, 궁인 한훤영[br]궁인 이씨, 궁인 박씨 || || '''자녀''' ||6남 8녀 || || '''종교''' ||[[불교]] || || '''법명''' ||선재(禪齋) || || '''자''' ||안세(安世) || || '''봉호''' ||대량원군(大良院君) || || '''묘호''' ||'''[[현종]](顯宗)''' || || '''별호''' ||'''[[성조(동음이의어)|성조]](聖祖)''' / [[열조]](烈祖) / [[세종]](世宗) || || '''시호''' ||대효덕위달사'''원문대왕'''[br](大孝德威達思'''元文大王''')[* 《고려사》 <현종 세가> 마지막 조 기준.] || || '''별칭''' ||신혈소군(神穴小君) ||}}}}}}}}} || ||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경기 개성 현화사지비 비신 상부 탁본(탑본).png|width=100%]]}}} || || {{{#670000 '''현종 원문대왕 어필'''}}} || [목차] [clearfix] == 개요 == >夫子曰, ‘有始有卒, 其惟聖人乎!’ 則我后之功高德冠, 絶于古今矣.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시작과 마침이 한결 같은 것은 오직 성인뿐일 것!’이라고 하시었으니 우리 임금의 높은 공과 빼어난 덕은 고금에 다시 없을 것입니다.''' >---- >'''〈[[현화사비]]〉''' >修政公平, 寘民安輯, 內外底寧, 農桑屢稔. 比之周之成·康, 漢之文·景, 亦無愧矣. >'''공정하게 나라를 다스려 국민을 안정시키고 화합을 이루니 온 나라가 평안해지고 해마다 풍년이 들었다. 현종의 치세야말로 [[주나라]]의 [[성왕(주)|성왕(成王)]], [[주강왕|강왕(康王)]]과 [[한나라]]의 [[문제(전한)|문제]], [[경제(전한)|경제]]에 [[문경지치|견주어도 전혀 손색이 없을 것이다.]]''' >---- >'''《[[고려사]]》 - 최충의 논평''' [[고려]]의 제8대 대왕. [[묘호]]는 '''현종'''(顯宗), [[시호]]는 '''원문대왕'''(元文大王), 휘는 순(詢), 자는 안세(安世), [[승려]] 시절의 [[법명]]은 선재(禪齋), 즉위 전 봉호는 대량원군(大良院君)이었다. [[태조(고려)|태조]] 왕건의 손자이자 [[안종(고려)|안종]] 왕욱의 아들이다. [[한국사]]에서 유일한 [[사생아]] 출신 군주로, 죽음의 위기에까지 몰렸던 불우한 어린 시절로 유명하다. 태어나자마자 [[여요전쟁|암울한 전란]]의 시대를 살았고, 몇 년 뒤 [[고아]]가 되었으며, [[협박|생명의 위협]]을 받던 중 [[강조의 정변]]으로 즉위했다. 이후 [[요나라]]의 두 차례에 걸친 [[여요전쟁|대침공]]을 맞아 건국 이래 최대의 위기속에서 [[몽진|남쪽으로 피난을 떠나는 등]][* 제2차 여요전쟁 때 [[통주 전투]]의 참패 이후.] 큰 시련을 겪었으나, 결국 요나라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제3차 여요전쟁]]때의 금교역 전투, [[귀주 대첩]].]. 전쟁의 위기를 극복한 것 뿐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 걸쳐 여러 제도의 기틀을 확고히 다지는 탁월한 업적을 쌓았다. 이러한 치적에 힘입어 고려는 제8대 현종에서 제17대 인종 때까지 무려 130년이 넘게 지속되는 기나긴 황금기에 접어들었으며, 동아시아 3국(고려 - 거란 - 북송)간 (균형적) 국제관계의 한 축을 담당하는 나라로 거듭났다. 또한 이후 고려 왕실이 현종의 혈통으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고려 왕조의 [[중시조|중흥지주]]에 해당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 [[묘호]] 및 [[시호]], 존호 == * 묘호: '''[[현종]](顯宗)''' * 태묘 악장: [[성조(동음이의어)#聖祖|성조]](聖祖), [[열조]](烈祖) * 불천위: [[세종]](世宗) * 시호: 대효덕위달사'''원문대왕'''(大孝德威達思'''元文大王''') 공식 묘호는 '현종'(顯宗)이다. [[시법]]에서 '현(顯)'은 "업적이 나라 안팎으로 널리 알려졌다."는 의미다. 태조 왕건의 능호 [[현릉]]도 이 '현' 자다. [[최충헌]] 집권기인 제21대 희종 4년, 7묘 9실 종묘 제도를 정비할 때, 혜종과 현종은 어떻게 해야 할지 갑론을박이 펼쳐졌다. 제2대 혜종은 태조의 장남으로서, 제8대 현종은 중흥군주로서 모두 지위가 높았기 때문에 결국 희종은 혜종, 현종 두 사람을 '[[문경지치]]'를 이룩한 [[문제(전한)|전한 태종 문황제 유항]], 한 왕조의 최전성기를 이룩한 [[무제(전한)|전한 세종 무황제 유철]]에 비유해 모두 [[불천위]]로 정했다. 제25대 [[충렬왕]]의 <시책>에 의하면 현종은 '''만사불천지종'''(萬祀不遷之宗)이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제23대 고종 41년 [[고려궁지|강도]]에서 태묘 제사를 지낼 때 올린 <책문>에서는 현종을 '''[[세종]]대왕'''(世宗大王)이라 칭했다. 공식 시호는 '''대효덕위달사원문대왕'''(大孝德威達思元文大王)이다. 장자 [[덕종(고려)|덕종]](제9대)이 첫번째 시호를 '원문'(元文)으로 올렸다. 이후 셋째 아들 [[문종(고려)|문종]](제11대)이 재위 10년([[1056년]])에 '대효'(大孝), 고손자 [[인종(고려)|인종]](제17대)이 재위 18년([[1140년]])에 '덕위'(德威), 7대손 [[고종(고려)|고종]]이 재위 40년([[1253년]])에 '달사'(達思)를 추증했다. 고려 군주들의 시호 중에는 처음 올려진 두 글자 시호가 가장 중요하다. 그래서 현종의 묘호와 시호를 같이 부를 때는 '현종 원문대왕'(顯宗 元文大王), 사서 중 《[[고려사]]》 <현종 [[세가]]> -총서-, 《[[동국통감]]》에서는 줄여서 '현종 원문왕'(顯宗 元文王)이라고 한다. 《[[동문선]]》에는 9대손인 충렬왕이 아버지 [[원종(고려)|원종]](제24대)을 태묘에 제사지낼 때 현종에게 시호를 추가로 올렸음이 기록되어 있다. 이때 쓰인 <죽책문>에는 '''현종 성렬대왕'''(顯宗 聖烈大王)이라는 [[존호]]가 나온다. 현종 재위 13년인 1022년에 세워진 '사자빈신사지석탑'엔 '성왕항거만세'(聖王恒居萬歲) 즉 >'성왕(聖王)께서 아주 오랜 세월(萬歲) 동안 (천하에) 문제없이 거주하길 바랍니다.' 라고 하며 그의 장수를 기원했다. 역시 현종 재위 중에 세워진 '거돈사원공국사승묘탑비'엔 현종을 [[천자|'만승'(萬乘)]]이라 하고, 그의 뜻을 '천심'(天心), 은혜를 '제택'(帝澤)이라고 표현했다. 현화사비에선 '만승'(萬乘), 독특하게 '제천(諸天)이 수호하는 인왕(人王)'으로 묘사되었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attachment/6000198576_20090309.jpg|width=100%]]}}} || || '''{{{#670000 선릉 전경}}}''' || == [[현종(고려)/생애 및 업적|생애 및 업적]]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현종(고려)/생애 및 업적)] == 가족 관계 == || 본인 || 부모 || 조부모 || 증조부모 || ||<|13> 현종[br] ||<|6> [[안종(고려)|안종]] ||<|3> '''[[태조(고려)|태조]]''' || || [[세조(고려)|세조]] || || [[위숙왕후]] || ||<|3> [[신성왕후]] || || [[김억렴]] || || || ||<|7> [[헌정왕후]][br] || ||<|3> [[대종(고려)|대종]] || || '''[[태조(고려)|태조]]''' || || [[신정왕후(고려)|신정왕후]] || ||<|3> [[선의왕후]] || || '''[[태조(고려)|태조]]''' || || [[정덕왕후]] || 출신이나 권력 기반이 매우 약해 자신의 [[할아버지]]인 [[태조(고려)|태조]]가 한 것처럼 정략 결혼을 통해 입지를 다졌다. 그래서 후비와 자식이 매우 많다. * 제1비: [[원정왕후]] 김씨 - [[성종(고려)|성종]]의 딸 * 공주(?): 적경궁주(積慶宮主) → 효혜궁주(孝惠宮主) 1030년 2월 고려사에 '적경궁주(積慶宮主)가 죽자 시호를 효혜(孝惠)라 하고 평릉(平陵)에 장사를 지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현종의 다른 공주들과 같이 시호에 효(孝)자가 들어가 있어 원정왕후의 기록되지 않은 자녀일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1030년 7월에 사망한 [[원화왕후]] 소생의 적경공주(積慶公主)일 가능성도 배제하지 못한다. 고려 왕실은 왕녀를 공주(公主)가 아닌 궁주(宮主), 원주(院主), 전주(殿主), 택주(宅主)로도 책봉했기 때문이다. * 제2비: [[원화왕후]] 최씨 - [[성종(고려)|성종]]의 딸 * 차남: 왕수(王秀) 고려사 종실 열전에는 누락되어 있으나 고려사 세가 '현종'편에 탄생이 기록되어 있다. * 장녀: [[효정공주]] * 차녀: 천수전주(天壽殿主) * 제3비: [[원성왕후]] 김씨 - [[김은부]]의 딸 * 장남: [[덕종(고려)|덕종]] * 3남: [[정종(고려 10대)|정종]] * 3녀: [[인평왕후]] 김씨[* 안산 김씨(安山 金氏)] - [[문종(고려)|문종]] 제1비 * 4녀: 경숙공주(景肅公主) * 제4비: [[원혜왕후]] 김씨 - [[김은부]]의 딸 * 4남: [[문종(고려)|문종]] * 5남: [[정간왕]] * 5녀: 효사공주(孝思公主) → [[효사왕후]] 김씨[* 안산 김씨(安山 金氏)] - [[덕종(고려)|덕종]] 제3비 덕종의 다른 부인들과는 같은 돌림의 시호를 공유하지 않고, 오히려 자매들과 같은 돌림의 시호를 공유한 것으로 보아 본래 효사공주(孝思公主)였다가 덕종이 즉위하며 추존된 것으로 보인다. * 제5비: [[원용왕후]] 류씨 - 경장태자(敬章太子)[* [[성종(고려)|성종]]의 친동생]의 딸 * 제6비: [[원목왕후]] 서씨 * 제7비: [[원평왕후]] 김씨 - [[김은부]]의 딸 * 6녀: 효경공주(孝敬公主) * 후궁: [[원순숙비]] 김씨 - [[김인위]]의 딸 * 7녀: [[경성왕후]] 김씨[* [[경주 김씨]]] - [[덕종(고려)|덕종]] 제1비 * 왕녀: 경성왕후를 “경흥원의 장녀”로 서술한 것과 관련되어, 최소 두 명의 딸을 두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 후궁: [[원질귀비]] 왕씨[* [[청주 이씨]]→[[사성정책|사성]] [[개성 왕씨]]] - [[왕가도]]의 딸 * 후궁: 귀비 유씨(貴妃 庾氏) 궁인 출신으로 1025년 귀비로 책봉된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알 수 없다. 한자만 놓고 보면 후삼국통일전쟁의 명장 [[유금필]]과 같은 평주 유씨이다. 현종 시기 활약하여 문하시중까지 오른 [[유금필]]의 손자 [[유방(고려)|유방]](庾方)의 딸일 가능성이 있다. * 후궁: 궁인 한훤영(宮人 韓萱英)[* 양주 한씨(楊州 韓氏)] - 한인경(韓藺卿)의 딸 * 6남: [[왕충(고려)|검교태사 왕충]] - [[덕종(고려)|덕종]]의 왕녀와 혼인 * 후궁: 궁인 이씨(宮人 李氏) - 이언술(李彦述)의 딸 * 후궁: 궁인 박씨(宮人 朴氏) - 박온기(朴溫其)의 딸 * 8녀: 아지(阿志) - 검교소감(檢校少監) 정민상(井民相)과 혼인 《고려사》 <후비전>에는 여기까지 나오지만 여기에 누락된 아내도 있었다. 현종 20년 2월 궁인 한씨의 부친 한빈경(韓彬卿)을 '겸 태자빈객 동지중추사 계국(同知中樞使 桂國)'으로 삼았다는 내용이 있는데, 한빈경은 한인경의 동생으로 여겨진다. 또 현종 22년 3월 상궁 한씨(尙宮 韓氏), 상침 김씨(尙寢 金氏), 상식 한씨(尙食 韓氏), 상침 서씨(尙針 徐氏)[* '상침(尙食)'은 [[당나라]]의 '상공(尙功)'과 같은 것으로 보인다. 정확히는 상공(尙功)은 의복에 관련된 일을 관장하는 것, 상침(尙針)은 바느질에 관련된 일(의복, 침구 등)을 관장하는 것이다.] 를 임명하는데 두 한씨는 한인경의 딸과 한빈경의 딸이 확실해 보이고, 상침 김씨가 원순숙비 김씨, 상침 서씨가 [[원목왕후]] 서씨일 가능성도 있는데, 이미 궁인 신분을 벗어났음에도 《고려사》에 여전히 궁인으로 표기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덧붙여 원목왕후와 원순숙비 김씨는 사후 계실이 아닌 측실로 간주된 것으로 명확하게 서술되어 있다. [[원정왕후]], [[원화왕후]], [[원용왕후]]는 [[신정왕후]]의 직계 후손들이고, [[원성왕후]], [[원혜왕후]], [[원평왕후]] 자매는 3명의 아들이 국왕으로 즉위했으므로 정실로 간주된 것이 명확하다. 다만 원목왕후는 1022년 숙비에, 원순숙비는 1024년 덕비에 책봉되는데 1030년에 관등이 다시 내려가 시호도 못받은 상궁 한훤영보다도 낮은 상침과 상침이 되었다는 것은 쉽게 납득이 어려운 지점이기도 하다. 그리고 선종 3년(1086년) 기록에 따르면 [[이예(고려)|이예]]의 아내에게 왕태후의 상궁을 하사했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여관으로 궁관의 관직을 받았다고 해도 유부녀일 가능성은 충분히 높다. == [[현종(고려)/평가|평가]]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현종(고려)/평가)] == [[현종(고려)/여담|여담]]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현종(고려)/여담)] == [[태묘]] 악장, 글 == ||<-3> '''{{{#670000 고려 태묘 백세불천위}}}''' || ||<-3> '''{{{#670000 성종 ~ 인종}}}''' || ||<-3> [[태조(고려)|태조]] || ||<-3> '''{{{#670000 의종 ~ 공양왕}}}''' || || [[태조(고려)|태조]] || [[혜종(고려)|혜종]] || '''현종''' || 고려 성종이 태묘를 만든 뒤, 태묘에 배향된 왕들에게 바치는 악장, 즉 칭송의 노래가 만들어졌다. 제16대 예종 11년에 예종 기준 9묘(九廟)의 왕에게 새로 바친 노래가 《고려사》 <악지>에 남아 있다. 예종이 올린 현종 왕순의 찬가 제목은 '''<흥경>'''(興慶)이며, 네 글자 운구이다. >크고 위대하신 열조(烈祖)[* 현종의 묘호를 존경의 의미로 다르게 부른 것이다.]께선, >잠덕(潛德)[* 보이지 않는 덕을 쌓아]을 통해 하늘로 날아 오르셨습니다. >어려움과 위험을 날로 겪으셨으나, >성현을 모아 흥할 수 있었습니다. >용산(龍山)엔 옥작(玉爵)이 있었고, >사수(泗水)엔 부반(浮磬)이 있었습니다.[* 용산과 사수는 현종이 잠룡 시절에 있던 곳으로 제왕이 되기 전부터 이미 자질이 보였다는 뜻이다.] >증손(曾孫)[* 가계도가 현종 > 문종 > 숙종 > 예종 순이니 예종은 현종의 증손이다.]이 효도하고 존경하니, >복록(福祿)을 가져다 주시길 빕니다. > >우리 아름다운 '''성조'''(聖祖)께선, >잠저에 계시다가 으뜸으로 올라오셨습니다. >난을 뽑고 바름을 돌아오게 하니, >신령한 무예[* 전쟁에서의 지휘.]와 아름다운 문학[* 내치에서의 지혜.] 덕분이었습니다.[* 문무대신들의 절대적인 충성을 받아 나라를 안정시켰다는 표현으로 보인다. 청나라 성조 [[강희제]]도 평시에는 뛰어난 능력과 지칠 줄 모르는 열정으로 신하들을 부려먹었지만 쉴 때는 문신들과 문학, 역사 내용을 토론하고, 선교사들과 수학 문제를 주고 받으며 지식을 교류하거나, 무신들과 사냥을 나가며 같이 말을 타고 술을 마셨고, 신하들과 어울리며 노는 것을 즐겼다. 사회성도 군주의 중요한 덕목이기 때문이다.] >왕업(王業)을 중흥(中興)하시니, >후손이 계몽되고 보호를 받습니다. >음식을 드시게 하는 걸[* 제사 지내는 것.] 멈추지 않으니, >자자손손 이어질 것입니다. 제31대 [[공민왕]] 12년 새로 악장을 만들었다. 제목은 없다. >하늘이 경업(景業)을 도우시니, >부정한 것을 쓰셔도 창성하였습니다. >삼한이 재조(再造)[* 조선 왕조가 명나라 만력제에게 쓰던 재조지은과 같은 뜻이다.]되니, >백도(百度)[* 100가지 법도.]가 융성했습니다. > >당신의 큰 계획과 열정적인 기운은, >지금도 빛나고 있습니다. >부디 천만년(千萬年) 동안, >우리를 무한히 축복하소서. 제23대 고종 2년, 태묘에 제사를 지내며 글을 올렸다. >왕실(王室)이 어지러울 때, >다스리고 공을 세우셨습니다. > >방인(邦人)[* 국민, 백성의 다른 말.]을 깨우치고, >이치를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 >밖으론 구제(舊制)[* [[성종(고려)|성종]]이 만든 제도를 의미.]를 완성하셨고, >안으론 [[사직]](社稷)을 정하셨습니다. > >[[요나라|적국(敵國)]]의 백만 병(百萬兵)[* 100만명까진 아니지만 요 성종은 의군천병 400,000명, 소배압이 300,000만명의 대군을 이끌고 전쟁을 시작했으나 결국 대패했다.]을 없애시고, >변성(邊城) 18읍[* 현종이 북방에 세운 여러 성(城)과 진(鎭)을 의미.]을 건축하셨습니다. > >드디어 태평의 기틀에 다다르셨으며, >그렇기에 '중흥지주'(中興之主)라 불리우십니다. == 대중매체 == === 영화 === 1970년 한국영화 중 비전(秘殿)이라는 영화가 있기는 한데, 19세 영화이고 마지막에 현종이 등장하고 부모인 왕욱과 헌정왕후와 같이 살아가는 내용이여서 제대로 다룬 영화는 아니다. [[https://youtu.be/8nZ167B3Emo?si=rjNTgMnz2J5NKSAk|비전(秘殿)(1970)]] === 다큐멘터리 === * 2018년 [[EBS]] <[[다큐프라임]]>에서 현종에 대해 다룬 적이 있다.[[https://youtu.be/D1uyeQD1ozw|<'한국사 오천년, 생존의 길' 제2부- 거란전쟁, 동북아 균형자의 조건>]]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jtbc-현종.jpg|width=100%]]}}} || ||<:> '''다큐멘터리 <[[평화전쟁 1019|{{{#670000 평화전쟁 1019}}}]]>에서의 현종''' || * 2019년 [[JTBC]] 다큐멘터리 <[[평화전쟁 1019]]>에서는 배우 [[권영민]]이 연기했다. 용기와 리더십으로 전쟁의 승리와 고려의 발전에 많은 기여를 한 것으로 표현되었다. 여담으로 [[다큐멘터리]] 제작에 참여했던 길승수 작가는 본인의 네이버 블로그 댓글에서 한 네티즌과 담화를 나누다가 자신 역시 [[나무위키]] [[현종(고려)|현종]] 문서를 꽤 참조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https://blog.naver.com/suu1/221526038790|]] === 드라마 === 사생아로 태어난 출생의 비밀, 왕위에 오르기까지 험난한 과정, 전란으로 인한 고초 속에 성장한 명군 등 사극에 특화된 서사 구조를 가지고 있지만 사극의 단골소재인 조선시대 및 삼국시대에 비해 [[고려]]시대는 자료 부족 등으로 인해 사극 제작이 힘든 편인데다가 현종은 그 동안의 인지도 문제로 2023년에 나오는 대하사극 <[[고려 거란 전쟁]]> 이전까지는 사극의 주인공이 된 적이 없었다. 드라마 <[[천추태후(드라마)|천추태후]]>에 나온 현종은 막판 주역도 아니었고, 천추태후에 대한 무리한 미화 등으로 인해 드라마의 평가는 영 좋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천추태후> 방영 후반에는 '차라리 목종의 비중 대신 현종을 주인공으로 했었으면 좋았겠다.'는 의견도 많이 나왔었다. ==== 강감찬 ==== 1973년 KBS 일일 사극드라마 <강감찬>에서는 [[주현]]이 연기했다. 필름이 남아있지 않아[* 당시에는 필름을 아끼기 위해서 방영 후 다른 촬영에 재사용했다.]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지만, 왕으로 즉위하기 전에 사수현에서 가난하게 살았으며, 김치양이 자객을 보내자 강감찬의 집에 숨었다고 한다. 드라마 말미인 62화에서 75화까지 현종의 치세가 묘사된다. ==== [[천추태후(드라마)|천추태후]]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현종(8대왕)_103.jpg|width=100%]]}}} || ||<:> '''드라마 <[[천추태후(드라마)|{{{#670000 천추태후}}}]]>에서의 현종''' || 2009년 [[KBS]] 드라마 <[[천추태후(드라마)|천추태후]]>에서는 배우 [[김지훈(배우)|김지훈]]이 연기했다. 특이하게도 현종 역으로 출연한 아역 배우는 모두 3명이었다. 현종의 아버지인 [[안종(고려)|안종]](경주원군)은 배우 [[김호진]]이었고, 어머니인 [[헌정왕후]]는 배우 [[신애]]가 출연했다. 불륜 출생이고 초반의 고난이 묘사되기는 했지만 극의 주역이 [[천추태후]]이다보니 비중이 크지는 않았다. 천추태후를 미화하는 경향이 짙은 드라마의 특성상 현종이 신혈사로 가게 된 것도 천추태후가 현종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였던 것으로 묘사되며, [[김치양]]의 살해 위협으로부터 주지 스님이나 [[강감찬]] 등의 보호를 받는 것으로 나왔다.[* 주지스님에게 보호받은 건 실제 역사에도 기록된 사실이지만 강감찬에게 보호받은 건 드라마 <천추태후>의 창작이다. 강감찬은 실제로 제2차 여요전쟁에서 항복을 반대한 것 외에는 딱히 기록 자체가 없다.] 결국 [[강조(고려)|강조]]의 정변으로 옹립되고, 즉위 직후 [[거란]]의 침공으로 피난을 가면서 고생하는 것도 나왔고, 돌아오면서 피해를 입은 백성들에게 무릎을 꿇기도 했었다. 그 후 강감찬 등의 활약으로 거란의 침입을 물리치고, 말년의 천추태후와 함께 농사짓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천추태후가 1029년에 사망하고 2년 뒤인 1031년 현종, [[성종(요)|요성종]], 강감찬이 차례로 세상을 떠난 뒤 고려는 약 130년간의 태평성대를 맞이했다는 [[나레이션]]이 드라마의 마지막을 장식한다. [[여요전쟁]] 2차, 3차 자체가 상당히 간략화되어 버린 탓에 현종의 전쟁 대비나 업적 등은 제대로 묘사되지 않았다. ==== [[고려 거란 전쟁]]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현종(고려 거란 전쟁))]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고려거란전쟁 현종역 배우 김동준.webp|width=100%]]}}} || ||<:> '''드라마 <[[고려 거란 전쟁|{{{#670000 고려 거란 전쟁}}}]]>에서의 현종''' || 2023년 11월 11일부터 KBS 2TV에서 방영 중인 [[KBS 대하드라마]] <[[고려 거란 전쟁]]>에서도 당연히 다뤄졌다. [[https://www.joynews24.com/view/1480282|관련 기사]]. 아마 역대 현종이 등장한 드라마 중 가장 비중이 클 것으로 예상되며, 현종의 스펙타클한 인생을 본다면 드라마의 주역이 될 확률이 매우 높다. 설령 단독 주인공이 아니더라도 고려와 [[거란]] 전쟁 당시 현종의 활약과 행적을 본다면 비중이 굉장히 높을 것으로 보인다. 그간 매체에서 공에 비해 제대로 된 묘사를 해주지 않은 편이라 많은 역사덕후들이 이 드라마에서 현종의 활약을 기대하고 있다. 마침내 [[김동준(제국의아이들)|김동준]]이 주인공 "현종" 역으로 캐스팅되었다는 기사가 나왔다. [[http://www.starnewsk.com/news/articleView.html?idxno=36603|관련 기사]] === 소설 === * 2018년에 연재된 대체역사소설 《[[더 퍼거토리]]》는 시대적 배경이 고려 말 14세기 중반으로 현종의 후손을 주인공으로 하는 환생빙의물이지만 현종과 굉장히 닮은 삶을 산 주인공의 행적으로 인해 현종이 모티브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독자들이 있다. == 관련 문서 == * [[강조의 정변]] * [[여요전쟁]] [[분류:현종(고려)]]||<-5><:><#FFD700>[[고려청자|https://67.media.tumblr.com/d0ab98e78c55c6369f20b702ab560e77/tumblr_o9zoipyqmm1sqk8veo5_r2_400.png?width=50]][br] '''{{{+1 [[고려/왕사|{{{#800080 고려의 역대 국왕}}}]]}}}''' || ||<:> 7대 [[목종(고려)|목종]] 왕송 ||<:> {{{+1 ←}}} ||<:><#FBEC5D> '''{{{#black 8대 현종 왕순}}}''' ||<:> {{{+1 →}}} ||<:> 9대 [[덕종(고려)|덕종]] 왕흠 || ||<:> '''[[묘호]]''' ||||<:> '''[[현종]](顯宗)''' || ||<:> '''[[시호]]''' ||||<:> 대효덕위달사원문대왕[br](大孝德威達思元文大王) || ||<:> '''[[군호]]''' ||||<:> 대량원군(大良院君)[* 오늘날 [[합천군]]을 가리킨다.][*별칭 신혈소군(神穴小君). 소군은 왕의 서자로써 출가한 자에게 주어졌던 호칭이다.] || ||<:> '''[[능묘]]''' ||||<:> 선릉(宣陵) || ||<:> '''[[성]]''' ||||<:> 왕(王) || ||<:> '''[[휘]]''' ||||<:> 순(詢) || ||<:> '''[[자(이름)|자]]''' ||||<:> 안세(安世) || ||<:> '''[[왕후]]''' ||||<:> 원정왕후(元貞王后), 원화왕후(元和王后), 원성왕후(元成王后), 원혜왕후(元惠王后)[br]원용왕후(元容王后), 원목왕후(元穆王后), 원평왕후(元平王后) || ||<:> '''[[부왕]]''' ||||<:> [[안종(고려)|고려 안종]][* [[시호]]는 사후 현종이 추존한 안종 헌경효의[[대왕]](安宗 憲景孝懿大王)이다.] || ||<:> '''모후''' ||||<:> 헌정왕후(獻貞王后) || ||<:> '''종교''' ||||<:> [[불교]] || ||<|2><:> '''생몰년도''' ||<:> 음력 ||992년 [[7월 1일]] ~ 1031년 [[5월 25일]] || ||<:> 양력 ||992년 [[8월 1일]] ~ 1031년 [[6월 16일]] (38세 10개월 15일) || ||<|2><:> '''재위기간''' ||<:> 음력 ||1009년 [[2월 3일]] ~ 1031년 5월 23일 || ||<:> 양력 ||1009년 [[3월 2일]] ~ 1031년 6월 16일 (22년 3개월 14일) || ||<:> '''출생지''' ||||<:> [[고려]] [[개경]] 헌정왕후 사저 || ||<:> '''사망지''' ||||<:> 고려 개경 [[만월대|정궁]] 중광전 || [목차] == 개요 == >문치가 이루어졌으며, 조세와 부역을 경감해주고 뛰어난 인재를 등용했다... 온 나라가 평안해지고 해마다 풍년이 들었다. 현종의 치세야말로 주나라의 [[주성왕|성왕(成王)]], 강왕(康王)과 한나라의 [[한문제|문제]], [[한경제|경제]]에 견주어도 전혀 손색이 없을 것이다. >---- >[[최충]] >자왈, 임금이 하늘의 뜻만 믿고 자신이 하고 싶은대로 하면서 법을 어기면 하늘의 뜻을 이어 받았다고 해도 곧 그것을 잃게 되는 법이다... '''현종과 같은 임금은 공자가 말한 것과 같이 더 이상의 말이 필요없는 군주라 할 것이다.''' >---- >[[이제현]] [[고려]]의 제8대 임금. '''고려의 [[전성기]]를 연 [[명군]]이자 고려 왕실의 중시조.''' 그리고 '''한반도 유일의 [[사생아]] 출신 군주이자 [[사생아|최]][[천추태후|악]][[강조의 정변|의]] [[#s-5|상]][[여요전쟁|황]]에서 [[귀주 대첩|최고의 성과]]를 이끌어낸 위대한 군주'''. [[서자]] 출신 군주는 자주 나왔으나 부모가 정식적인 혼례 절차 없이 사생아로 태어난 군주는 고려 현종이 유일하다. 그나마 부계, 모계 모두 왕족 출신이라서 망정이지, 사생아는 서자보다 훨씬 더 정통성에 위협을 받기 쉬운 위치다. [[효공왕]]이나 [[우왕]]의 경우도 정황상 사생아에 가까운 위치였지만 이쪽은 각각 [[진성여왕]]과 [[공민왕]]이 직접 정통성을 인정해 주었고 현종처럼 빼도박도 못하는 사생아는 아니였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혈통상으로는 오히려 그만큼 강력하고 유리한 사람도 드물었는데, 황주를 기반으로 하여 개성 및 그 인근 호족들을 대표하는 헌정왕후의 혈통과 경주를 비롯한 그 인근 지방의 신흥 귀족 세력의 지지를 받기 쉬운 과거 신라 왕실의 피를 받은 왕욱의 혈통을 받았으니 양측의 지지를 받기도 그만큼 쉬운 사람이었던 것이다. 만약 헌정왕후가 왕욱과 제대로 재혼을 한 뒤에 현종을 출산했다면 그의 정통성은 역사상 최강이었을지도 모른다. 후에 안종으로 [[추존]]되는 왕건의 13번째 아들 왕욱과 [[천추태후]]의 동생이자 [[경종(고려)|경종]]의 [[미망인]]이었던 헌정왕후 사이에서 태어났다. 즉위 전 군호는 '대량원군(大良院君). 이 명칭이 오늘날 합천을 가리킨다고 한다. 당시 고려 왕자들의 군호가 외가의 지역을 중심으로 부여된 점으로 미루어 이례적인데 이 군호는 부친인 안종 왕욱의 외가쪽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생아]]로 태어난데다 어렸을 때 [[고아]]가 되었고, 목숨을 위협받았던 끝에 왕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국난을 극복하여 고려의 태평성대를 연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군주이다. 인생역전 테크를 탄 왕이라는 점에서 고구려의 [[미천왕]]과 이미지가 겹친다. 그리고 이 사람 이후의 고려 왕들은 마지막 왕인 [[공양왕]]까지 모두 그의 후손이다. 이런 의미에서는 '''고려 왕실의 중시조'''라 할 수 있는 임금. [[성종(고려)|성종]]의 딸이 현종의 부인인 원정왕후와 원화왕후지만 원정왕후 소생은 없고 원화왕후 소생으로 효정공주와 천수공주 밖에 없기 때문에 [[태조(고려)|태조]] 왕건의 아들들중 광종에서 시작된 직계 왕통은 사실 목종대에서 끊어진 셈이다. == [[출생의 비밀]] == 그의 아버지 [[왕욱#s-3|왕욱]]은 [[왕건]]의 13번째 아들이며 현종의 할머니이자 왕욱의 어머니는 [[신라]] [[경순왕]]의 큰아버지 김억렴의 딸인 신성왕후 김씨다. 그래서 혈통으로 보면 현종은 고려 왕실의 혈통과 신라 왕실의 혈통을 모두 가진 인물인 셈이다.[* 신성왕후에 대해서는 합주(지금의 [[합천]])의 군수를 지냈던 태위(太尉) 이정언(李正言)의 딸이고 성은 이씨라고 적은 김관의(金寬毅)의 <왕대종족기> 기록도 있다. 해당 책은 전하지 않고 [[삼국유사]]에 인용된 내용이다. 다만 삼국유사는 삼국사기에서 안종 왕욱을 신라의 외손이라고 한 사론이 맞고 신성왕후는 김씨라고 보았으며, 이제현도 "김관의ㆍ임경숙(任景肅)ㆍ민지(閔漬) 세 사람의 글에서는 모두 '대량원부인(大良院夫人) 이씨(李氏)는 태위 정언의 딸로서 안왕(安王, 안종)을 낳았다'고 하였는데 어디에 근거한 말인지 알 수 없다"고 하였다. 고려사에는 태조의 후비로 합주 사람 이원의 딸인 후대량원부인 이씨가 후비전에 기록되어 있기는 하지만 대량원부인에 대해서는 [[고려사절요]] 및 [[동국통감]]에 '''이름만 등장'''한다. 하여튼 이래저래 족보가 꼬인 현종이다(...).] 그런데 문제는 현종의 아버지 왕욱이 조카딸이 되는 헌정왕후와 정식혼인이 아니라 불륜을 통해 태어난 아이가 바로 대량원군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고려의 왕족들은 정권 초기에 근친간의 결혼을 정치적인 이유로 많이 했기 때문에 그 자체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문제가 된 것은 [[경종(고려)|선왕]]의 왕비이자 현 국왕의 여동생으로서 지체 높은 신분을 가진 여인이 정식적인 재혼도 하지 않은 채 외간남자와 사통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선왕의 왕비가 '''[[사생아]]'''를 낳은 게 문제였다. 덧붙여서 현종은 그 전까지 있었던 [[근친상간|근친혼]]에다 친부모의 관계 때문에 친척 관계가 꽤 꼬인다. 모계만 보면 목종의 사촌동생이지만, 부계만 보면 어머니와 같은 [[항렬]]이라서 목종의 [[당숙]]이 된다. 그러므로 사촌누나이자 이모 [[천추태후]]의 남편 경종은 현종에게 '''사촌형 겸 이모부'''이며, ~~의붓아버지는 생략하자.~~ 생모 헌정왕후는 '''어머니 겸 사촌누나'''가 된다. --[[막장 드라마]]-- 그리고 할아버지인 [[왕건]]의 경우 현종의 외증조부이자 외외증조부(외할머니의 아버지)가 되기도 한다. 현종은 출생 비화도 꽤 극적인데, 만삭의 헌정왕후가 안종 왕욱의 집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집안 사람들이 뜰에 섶을 쌓고 불을 질렀다. 불길이 한창 맹렬하자 성종이 빨리 가서 물어 보도록 하여 그 까닭을 알아 보니 왕욱이 윤리를 어지럽힌 죄를 범했다는 이야기가 나와서 왕욱을 멀리 사수현(지금의 경상남도 사천)으로 귀양보내 버렸다. 이 때 헌정왕후는 집으로 돌아왔는데 문에 이르자마자 진통이 와서 방에서 출산한 게 아니라 '''문 앞의 버드나무 가지를 휘어잡고''' 아이를 낳았고 결국 산욕으로 죽었다. 이 때문에 현종은 졸지에 고아 신세가 되었으나, 그래도 아기에게 죄를 묻기는 뭐했는지 [[성종(고려)|성종]]이 궁궐로 데려와 보모로 하여금 아기를 기르게 했다. 보모는 아기였던 대량원군에게 "아빠"라는 단어를 종종 가르쳤다. 그 때문인지 2년 후 성종이 대량원군을 불렀을 때 , 그가 성종을 보더니 "아빠"라고 불렀고, 또 성종의 무릎 위로 올라와 그의 옷을 붙잡고 한 번 더 "아빠"라 불렀다고 한다. 이에 성종은 아기의 처지가 너무 가엾어서 눈물을 흘렸고 아버지와 떨어진 아이의 처지를 불쌍히 여긴 성종은 후에 대량원군이라는 작위를 주고 귀양지에서 지내던 왕욱에게 보살피도록 배려해주었다. --[[출생의 비밀]] 돋네-- 이로 인하여 현종은 극적으로 부자상봉에 성공하였다. 그러나 부자상봉의 기쁨도 잠시였을 뿐, 왕욱도 얼마 지나지 않아 병사하고 만다. == 생명의 위협 속에서 == 이후에 늘 현종을 보살펴주던 성종도 병사하고 그 뒤를 이어 선왕의 아들인 개령군이 목종으로 즉위하자 곧 험난한 시련에 부딪히게 되었다. 비록 사생아 출신이라고는 하나 그 역시 엄연한 왕족이며, 태조 왕건의 직계 후손이라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었다. 왕건의 손자인데 혈통으로 따지면 50%가 왕건의 피를 이어받았다. ~~부모가 아닌데도~~ ~~개족보~~ 때문에 목종이 즉위한 후로 목종의 어머니이자 김치양과의 사이에서 난 아들을 후사로 삼으려 했던 [[천추태후]]의 경계를 받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에 외척인 김치양과 간통을 하며 성년이 된 목종을 억누르고 섭정하는 등 나라의 실세 행세를 하던 천추태후는 김치양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로 하여금 다음 왕위를 잇게 할 생각이었다. 그런 천추태후에게 현종의 존재는 후사를 위협하는, 굉장히 부담스러울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그가 영특하다는 소문이 돌자 천추태후는 위협감을 느꼈는지 결국 현종을 강제로 머리를 깎게한 뒤 [[북한산|삼각산]]에 있는 신혈사라는 절에 승려로 보내버렸으며 이후로도 수차례 살해 시도를 하였다. 이때에 현종은 천추태후와 김치양이 보낸 궁녀들에게 독이 든 음식을 먹을 것을 강요받거나 자객들에게 목숨을 위협받는 등 그야말로 비참하고도 처절하게 생명줄을 이어나갔다. 그러나 다행히도 현종을 후계자로 삼을 뜻을 품고 있었던 목종이 번번히 천추태후의 음모를 눈치채고 훼방을 놓았으며, 신혈사의 승려 '진관(津寬)'도 위험을 무릅쓰고 현종을 보호하였던 덕분에 간신히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다. 천추태후가 어찌나 집요하게 현종을 암살하려 했는지 진관이 현종이 머물던 방 아래에 굴을 파서 현종을 숨겨놓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 후 [[강조의 정변]]으로 목종이 시해당하고 천추태후가 실각하는 사태가 일어나자 강조에 의해 왕위에 오르게 된다. 참고로 고려사 세가의 현종 총서를 보면, 현종 역시 왕위에 야심이 있었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고려사의 현종 총서에는 현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 지었다는 두 수의 시가 기록되어 있는데, 이 시를 읽어보면 꽤 의미심장하다. >한 가닥 물줄기 백운봉(白雲峰)서 솟아나와 一條流出白雲峯 >머나먼 큰 바다로 거침없이 흘러가네. 萬里蒼溟去路通 >'''바위 아래 샘물이라 업신여기지 말아라''' 莫道潺湲巖下在 >'''머지 잖아 용궁에 다다를 물이니까.''' 不多時日到龍宮 > > 뜰 난간에 또아리 튼 작은 뱀 한 마리 小小蛇兒遶藥欄 > 붉은 비단같은 무늬 온 몸에 아롱지네. 滿身紅錦自班斕 >'''꽃덤불 아래서만 노닌다고 말하지 말라''' 莫言長在花林下 >'''하루 아침에 용 되기 어렵지 않을 테니.''' 一旦成龍也不難 >---- >《고려사》 세가, 현종 총서[* [[신증동국여지승람]] 사천현조에 따르면 두 번째 시를 지은 곳은 현종이 어린 시절을 보냈던 곳이자 현종의 아버지 왕욱이 유배되어 있던 사천시 배방사라고 하며, 절은 현재는 터만 남아 있다. ] ||http://img.ezmember.co.kr/cache/travel/2011/05/24/2_1306210103.jpg|| ||진관사. 현재는 대부분 근대에 재건축된 건물들이라서 고려 시절의 모습은 찾을 수가 없다.|| 여담으로 왕위에 오르기 전 현종이 있었던 '신혈사'는 바로 오늘날의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동]]에 위치한 [[북한산]] 진관사다. 진관은 위에 언급된 현종을 보호해 준 승려의 이름을 딴 것이다. 본래 신혈사는 큰 절이 아니라 진관이 혼자 수행하던 작은 암자였는데, 왕위에 오른 현종이 진관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로 신혈사를 큰 절로 증축해 주었고 진관의 이름을 따서 절 이름도 진관사라고 붙인 것이다. 그리고 이 일대의 지명도 이 이름을 딴 [[진관동]]이다. [* [[은평뉴타운]]이 바로 이곳이다.] 이리하여, 서기 1009년, 우여곡절 끝에 왕위에 오른다. 왕위에 오르자마자 내린 조치가 인상깊은데, 교방(敎坊)을 없애고 궁녀 백여 명을 돌려보냈으며, 낭원정(閬苑亭)을 헐어 진기한 날짐승과 길짐승 및 물고기들을 산과 못에 풀어주었다. 이때 현종이 비록 강조가 정변으로 옹립시킨 왕이지만 자신이 내세운 왕의 권위와 예우가 실추되기를 원하는 권신은 없을테니, 현종 스스로의 결정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사실 강조 입장에서는 목종의 명을 받고 왔다가 카더라에 낚여 일을 저질렀으니 억울할 만도 한데다, [[안정복]]은 아예 현종이 정변의 주체라고 지목하기도 했다. 그 후 문무관료를 재편하고 세금과 요역을 경감해 주었다. 또 거란에 사신을 보내고 군량을 비축하고, 현종 개인으로서도 [[성종(고려)|성종]]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이는 등 무난하게 정치를 해나가면서 즉위년 12월에 하교를 내리는데 즉위 이전까지 겪었던 고난과 이후 현종의 치세를 생각하면 마음에 와 닿는 바가 있다. >“이제 짐이 외람되게 왕업을 이어받아 삼가 큰 사업을 계승하면서, 현도(玄菟)의 봉토를 통치하고 하늘이 돌보아 내린 명령을 받들게 되었다. 그동안 백성들을 자애롭게 기르느라 쉴 틈이 없으면서도 하나의 덕(德)이라도 미덥지 못할까, 혹은 올바른 윤리가 무너질까 늘 염려했다. 그리하여 부지런히 여론을 듣고 단안을 내렸으니 이는 태평성대가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그런데 얼마 전 가을철이 되었는데도 이상하게 안개가 걷히지 않았으며 음양(陰陽)이 뒤죽박죽되어 기후가 불순했다. 이에 더욱 성의껏 정무를 돌보면서 스스로를 통절히 자책하느라, 정전(正殿)에 들지 않고 반찬의 가짓수를 줄이며 부지런히 일하면서 마음과 입으로 빌었더니, 과연 하늘의 감응을 받아 날씨가 맑고 화창해졌다. 이로 보건대 성심을 다하기만 하면 재앙을 물리칠 수 있으며 재난을 복으로 바꿀 수 있음을 알겠다. 이제부터 가일층 성심을 다하고 두려워함으로써 위로 하늘의 뜻에 부응할 것이며, 더욱 나라를 열심히 돌보고 정사에 정력을 다 바칠 것이다. 그러나 나라의 온갖 일들을 혼자서 처리하기는 어려운 법이니 마땅히 신하의 도움을 받아 함께 성현께서 제시하신 도리를 이루어야 할 것이다. 이제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깊이 아로새겨야 할 바를 몇 가지 제시하노라. >재상의 직위는 실로 백성들이 우러러보는 자리이니 정치에 있어 임금이 빠뜨리는 것을 보완[彌綸]하고 적절한 정책[謨明]을 건의할 것이며 치국의 근본이 어디에 있는가를 헤아려 왕업을 도우라. 인재를 가려내고 관리를 선발하는 직무를 맡은 사람들은 초야에 묻힌 현인을 잘 찾아내어 그가 버림받는 일이 없도록 할 것이며 인사에 공정을 기함으로써 아부하는 무리들의 말을 배격하라. >법령과 규율을 집행하는 사람들은 죄상을 심리하고 판결을 내림에 있어 죄인을 불쌍히 생각해 가혹한 행위나 형벌을 내리지 말 것이며, 정상을 잘 참작함으로써 억울함이 없도록 하라. 국가 행정의 각 분야를 맡은 사람들은 각별히 서로 협조해 직무를 집행[官聯]하도록 할 것이며 자신이 맡은 업무에 성실히 임하라. 또한 청렴을 장려하고 혼탁한 행동을 방지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을 것이며, 멸사봉공의 자세에 어긋나지나 않는지 늘 반성하라. >지방의 목민관들은 각자 애민 정신을 간직하고 만물을 아끼는 마음을 잊지 말라. 변방을 지키는 지휘관들은 부대를 잘 조련하여 용맹한 군사를 길러냄으로써 불의의 사태에 힘써 대비하고 군율의 해이를 경계하라. 아아, 너희들 중앙과 지방의 관료들은 밤낮으로 게으르지 말고 시종일관 충성을 변치 말지어다. 아아! 하늘이 가까이 감시하면서 이미 훈계를 내리셨으니 내 마음이 게으르지 않아 이미 하늘에 감응한 바 있도다. '''이제 더욱 정성스럽게 나의 행동을 반성함으로써 나날이 새롭게 경사를 더해가기를 기대하노니 그대들과 함께 나라를 다스려 미래를 보장받기를 원하노라.”''' >---- >고려사 세가, 현종 원년(1010) 경술년 == 여요전쟁과 내정 정비 == 그러나 왕이 된지 그리 오래지 않아 또다시 시련이 닥쳐왔다. 현종 2년, [[요성종]]이 강조의 정변을 구실로 침략을 감행해 온것이다. 결국 현종은 그의 치세에 자신의 목숨과 나라의 존망을 걸고 두 차례에 걸쳐 거란의 침입을 받아야만 했다. 자세한 것은 [[여요전쟁]] 항목 참조. 2차 때는 요 성종이 40만 대군을 이끌고 침략해오자 실권자 [[강조]]가 30만 대군을 몰고 나가 이를 막으려 하였다. 초반엔 우세를 점했으나 한순간의 방심으로 인해 요 성종의 군대에 패배한 강조는 거란군에 붙잡혀 처형당하고, 현종은 호남지방인 [[나주]]까지 피난을 가는 등 온갖 고초를 겪었다. 그것도 피난 도중 지방 호족들의 갖은 행패를 당했다. 호종했던 지채문의 활약으로 딱히 피해는 입지 않았지만 다음 왕조인 조선과 비교해볼만한 대목. ~~되려 깽판을 쳤으면 쳤지 당하진 않았다~~ 이 와중 끝까지 현종을 호종한 지채문과 채충순은 공신이 되었다. 다른 관료들은 다 도망쳤다고 한다. 그러나 거란의 병사들 역시 몇차례에 걸친 전면전으로 인하여 대단히 피로가 쌓인 상태였고, 양규와 김숙홍 등의 게릴라 전법에 말려들어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더 난장판을 만들지 못하고 물러났다. 3차 때는 본격적으로 왕권을 잡고 왕재로서의 재능이 개화, 앞서의 치욕을 잊지 않고 방비를 튼튼히 해서 잘 막아냈다. 거란군 주력이 개경 100여리 밖까지 ~~어택땅~~접근해온 상황이라 위기를 맞았다. 당시 거란 장수 [[소배압]]이 이런 작전을 펼친 이유는 고려군 주력이 전부 북방에 있었기 때문이다. 유목기병 특유의 기동력을 이용해 북방에 배치된 고려군 주력을 따돌리고 개경을 공격해서 현종의 항복을 받아내는 것이 소배압의 의도였던 것. 그러나 [[강감찬]]이 동북면의 방어를 수행중이던 기동대 3천3백을 개경으로 급히 이동시켜 방비를 강화하고 김종현에게 1만의 군사를 주어 소배압의 후방을 추격하게 하였다. 이때 고려는 극단적인 [[청야전술]]을 사용하여 민가 하나, 개 한 마리까지 소개시킨 상황이었고 현종 역시 개경의 성문을 굳게 잠그고 지켰던 데다가 소배압이 탐색전 삼아 3백의 기병을 개경 주변 금교역으로 파견하자 현종은 1백 기를 보내 야간 기습으로 거란군 정찰대를 전멸시킨다. 이게 별거 아닌 것 같지만 좀 섬뜩한 기록이다. 상식적으로 적을 상대하기 위해 더 많은 병력을 보내는 것이 최선이며, 개경의 병력이 충분하다는 것도 거란군에게 보여주기 위해서는 더욱 그럴 필요가 있었다. 굳이 적보다 적은 병력을 내보낼 이유가 없었던 것을 생각하면 그만큼 당시 개경의 수비병력이 부족했다는 의미다. 이 1백 기가 오히려 거란군에게 당했다면 소배압도 결전을 택할 수도 있었다. 현종으로서도 엄청난 도박을 했던 셈이다. 따라서 저 1백 기도 일반 병사들이 아니라 현종의 근위대에서 차출한 병력으로 보기도 한다. 이러면 진짜 섬뜩해진다. 어쨌든 북방에서 입은 타격도 컸던 데다가 개경의 방비도 만만치 않았고, 보급선이 단절되어 방위군과 추격군사이에서 포위될 위험을 감지한 소배압은 퇴각을 결정한다. 당시 거란군이 퇴각하자 개경의 백성들이 크게 환호하면서 개경의 수호신에게 감사를 드렸다고 한다. 그래서 개경에는 송악산의 산신이 밤에 수만 그루의 소나무로 변해 사람 소리를 내자 거란군이 개경의 병력이 많은 줄 알고 퇴각해 버렸다는 전설이 생겼다고 한다. 소배압으로서도 전멸을 피하기 위해 나름 필사적인 선택이었으나 마침내 귀주에서 고려군 주력을 만나게 되었고, 그 결과는 다름 아닌 [[귀주 대첩]]이었다(...). 이렇게 거란의 침입 와중에도 내치적으로도 많은 일을 하였는데, 우선 '''이 무렵까지도''' 제대로 정비되지 않았던 고려의 행정망을 제대로 정비하고 호족세력을 억눌러 안정화 시킨 다음[* 호족세력을 안정화 시키고 군현제를 설립한 것이다. 1018년(현종 9) 5도양계체제(五道兩界體制), 즉 경(京)-목(牧)-도호(都護)-군(郡)-현(縣)=진(鎭)이라는 군현제의 기본골격이 완성되었다. 이러한 군현제를 유지하기 위해 같은 해 각 군현의 호장(戶長) 등 향리의 정원규정, 향리의 공복(公服)을 제정하였다. 1022년에는 향리들에 대한 호칭을 개정, 왕권을 바탕으로 한 중앙집권적인 정치체제를 확립하게 된다.] 방비를 튼튼히 하였으며 동북쪽에서 소란을 피우던 여진족도 격퇴해가며 회유해 나갔다. 이런 조치가 효과가 있어 현종 말년에는 고려에 귀순하거나 우호 관계를 맺는 여진 부족이 늘어갔다. 또한 거란의 침입을 부처의 법력으로 이겨내려고 만든 것이 <대장경>이다. 당시 송에는 억불정책이 지나쳐서 많은 불교경전을 불태워버렸는데 나중에 송은 이를 만회하고자 고려에 불경을 얻으러 올 정도가 되었다. 이런 사정에는 대장경을 바탕으로 한 고려의 높은 문화수준이 있었던 것이다. 현종은 이렇게 고난 끝에 왕이 되어 거란의 침략을 물리치고 지방행정체제를 재정비 하는 등 여러 업적을 남겼으나 오랜 고생으로 인하여 심신이 지나치게 지쳐있던 탓인지 안타깝게도 40세의 나이로 일찍 승하했다. == 원조 무신의 난 - 김훈 최질의 난 == 특히 현종 대의 최질과 김훈의 난은 정말 상식 밖의 상황에서 일어났다. 2차 거란의 침입 이후 국토가 황폐해지고 거란 침입에 대응하기 위해서 군대를 증강시키는 과정에서 국가에서 지급할 전시과에도 문제가 생겼다. 이걸 어떻게 해결했느냐면 '''중앙군대인 경군의 영업전을 황보유의를 비롯한 문신들이 자기들 전시과(농봉)로 돌려버렸다'''. 때문에 2차 거란 침입을 맞섰던 무신들을 엿먹여버렸다. 주요 인물인 최질과 김훈이 2차 거란 침입에서 공을 세워서 최고 관직인 상장군 까지 올라간 최상급 무신들이었다. 게다가 중앙군대의 구성원들까지 손가락 빨게 만들어버렸다. 더구나 1012년 그러니까 반란 2년전에 요성종은 강동6주를 무력으로 탈환하겠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한 뒤였으며 이 해는 이미 '''거란과 산발적인 전쟁 중'''이었다. 흔히 여요전쟁에 대해서 1차는 993년, 2차는 1010~1011년, 3차는 1018~1019년으로 묘사되지만 실상을 보면 1011년에서 1017년까지도 거란은 지속적으로 고려의 강동 6주를 공격하고 있었다. 고려도 피해를 많이 입기는 했지만 강동 6주의 방어선에 가로막혀 거란 또한 고려의 땅을 하나도 빼앗지 못했다. 그러니 변명의 여지가 없는 치졸한 병크가 따로 없다. 결국 '''월급이 안나와서''' 최질과 김훈이 반란을 일으켰고, 결국 이들은 현종에게 위협이 담긴 호소로 월급 뺏아간 문신들을 귀양보내고 무신정권을 세웠다. 또한 무신들은 영업전의 반환은 물론 6품 이상의 모든 무관들에게 문관직을 겸하도록 요구했으며 현종은 이를 들어 주었다. 그러나 한 달 만에 현종이 이자림(이때 계책을 세운 공으로 왕씨를 사성받아 왕가도로 개명)의 계책으로 무신들을 왕궁에 초청해서 연회를 베푼 다음에 술에 취한 장군들 19명을 모조리 잡아 죽이면서 싱겁게 끝이 났다. 실질적으로 최초의 [[무신정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만, 이상하게 비중이 작은 사건이다. ~~애초에 원인이 그 따위라서 언급하기도 뭐한 사건이지만.~~ 또한 이런 실책을 저지르긴 했지만 현종은 뒷수습을 잘 했다. 19명 이외에 가족은 하나도 처형하지 않았고 아들과 동복형제들은 고향으로 돌려보내 영원히 등용하지 않는 선에서 마무리했다. 그러므로 이 사건 때문에 나라에 무신이 없어서 문신인 강감찬이 활약해야만 했다는 식의 해석은 옳지 않다. 애당초 고려나 조선이나 전쟁의 총사령관이나 주요 지휘관은 문관이었다.[* 임진왜란 당시 도원수였던 [[김명원]]과 [[권율]]도 문관이었다. [[수군]]을 총지휘했던 [[이순신]]이 다소 특이 케이스였던 셈. 이순신이 역임했던 [[삼도수군통제사]]는 이 때만해도 정3품 수군절도사와 동급의 별정직이었으나, 임란 이후 종2품 관찰사 및 병마절도사와 동급의 상설직으로 격상되었다. 다만 삼도수군통제사 역임 당시 이순신은 이미 정2품 정헌대부 문반품계를 가지고 있었기에 지휘권을 행사하는 데 아무 문제가 없었다.] 또한 이 일 이후 무관에 대한 예우도 격상시켜서 전몰자에 대한 예우를 높여주고 거란전쟁 중 전사자에 대한 보상도 늘렸으며 군공자는 병사들까지 1만여명 씩 포상을 줬다. 이게 별거 아닌 조치 혹은 당연한 조치 같지만 재정 문제나 관등의 인플레 등 여러 상황을 감안해야 하고 리스크도 꽤 큰 대대적 조치이다. 더군다나 전란 중이라 재정 상태도 그렇고 세금도 제대로 걷히지 않는 상황에서 이런 조치를 했다는 것은 높이 평가해 줄만한 대목이다. 덧붙여 오늘날의 국가 기념일인 [[현충일]]은 거란전쟁 전몰자에 대해 [[24절기]]중 하나인 [[망종]]에 제사를 지내던 전통을 감안한 것이다. 달력을 보면 현충일과 망종이 같이 써 있는 이유도 이런 이유에서인 것. == 평가 == '''일생 동안 온갖 고난과 역경을 겪었으나 이것을 모두 극복하고 고려왕조의 전성기를 연 중흥의 군주로, 고려 역사상 최고의 명군'''으로 평가받을 자격이 충분한 인물이다. 당대인물이었던 [[최충]]은 [[주]]나라의 성강지치와 [[한]]나라의 문경지치와 비교해도 꿀릴 게 없다고 평가했고, 고려 말 이제현은 '''나는 현종에게서 아무런 흠도 찾아볼 수 없다'''고까지 했다. 무엇보다 현종이 3차 여요전쟁에서 적의 침공이 있음에도 꿋꿋하게 도성에 남아 수비에 임전했던 점은 한국 역사상 드문 일이다. 하지만 비판하는 쪽에서는 (결과적으로) 외교 실패로 인해 하지 않아도 되는 전쟁을 하게 만든 왕이라는 평가도 있고, 2차 침입에서의 몽진이나 할 때의 안습한 모습이라든지 전후에 무장들을 죽인 일도 있어서 흠잡을 수 없는 왕 정도는 아니라는 평가도 있다.[* 박종기, "11세기 고려의 대외관계와 정국운영론의 추이", "고구려연구재단2차국내학술회의", "고려국왕책봉연구" 2002] 다만 2차 침입은 어쩔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현종이 즉위한지 얼마 되지 않았고, 이 당시 실권은 [[강조]]에게 있었는데 강조가 고려군 주력부대를 데리고 나가 싸우다가 박살이 난 상태라 현종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화려해보이는 전쟁보다는 겉멋은 떨어질지라도 전쟁을 딛고 국가를 발전시킨 공이 크다. 정치, 외교 면에서는 사실상 전왕인 목종과 천추태후의 실책을 떠맡았다는 점과 갑자기 왕위에 올라 정권 기반이 취약한 편이었다는 점에서 위에 대한 비판에 대해 충분히 옹호가 가능하다. 특히 2차 침입 때 몽진을 가지고 현종을 비판하는 사람도 있는데, 이 때 몽진을 주장한 사람은 다름 아닌 '''강감찬'''이다. 다른 신하들은 항복을 주장했는데 강감찬만 홀로 몽진을 주장했고 현종도 이를 따른 것이다. 별개로 강감찬은 이때 몽진을 수행한 흔적이 보이지 않는데, 정황상 혼자 다른 곳으로 도망친 것으로 보인다. 후일 현종은 이런 식의 결례를 문제삼지 않고, 강감찬을 크게 중용한다.[[http://blog.naver.com/ksyi9070/220927655796]] 어쨌든 고려의 국력 신장을 이끌어 태평성대의 기반을 닦은 명군이며 그의 아들 세 명이 왕이 되는 기염을 토하는데([[덕종(고려)|덕종]], [[고려 정종(10대)|정종]], [[문종(고려)|문종]]) 아들들도 명군이 되어 모두 나라를 잘 이끌어 나갔다. 세 아들 간에는 [[형제상속]]으로 이어졌고 넷째인 [[평양공]] 기는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죽었다. 고려는 [[예종(고려)|예종]], 정치적인 면을 제외하면 [[인종(고려)|인종]]시대까지 태평성대를 누렸다. 문종의 세 아들([[순종(고려)|순종]], [[선종(고려)|선종]], [[숙종(고려)|숙종]])과 [[인종(고려)|인종]]의 세 아들 ([[의종(고려)|의종]], [[명종(고려)|명종]], [[신종(고려)|신종]])도 줄줄이 왕이 되었으나 [[헌종(고려)|그다지]] [[무신정변|좋지]] [[최충헌|못한]] 경우이다. 앞서 [[태조(고려)|태조 왕건]]의 세 아들인 [[혜종(고려)|혜종]]-[[고려 정종(3대)|정종]]-[[광종(고려)|광종]]도 그리 모범이 될 만한 사례가 아니다. 비록 요절이 원인이었지만 고려에서는 현종의 세 아들들이 줄지어 형제 상속을 통해 왕위를 받아 [[성군]]이 된 유일한 사례라 할 수 있다. 말하자면 '''고려의 전성기를 연 임금.''' 또한 목종 대에서 사실상 끊길 뻔한 직계 왕통을 이어받고 후대 왕들의 맥을 이어줬다는 점에서 여러 의미로 '''고려 왕조에서 가장 중요한 군주 중 한 명'''임은 틀림없다. 말 그대로 [[만화]] 내지 [[판타지 소설]]속에서나 등장할 만한 파란만장하고도 성공적인 생애를 살다 간 인물. [[삼국지]] 최후의 승자인 [[사마염]]과 자(字)가 같다. 둘 다 자가 안세(安世). 그러나 군주로서 현종 쪽이 비교가 미안해질 수준으로 [[넘사벽]]이다. || [[파일:attachment/6000198576_20090309.jpg|width=500]] || [[북한]] [[개풍]]군 중서면에 있는 현종의 선릉(宣陵). 능역 앞은 [[옥수수]]밭이다. 그래도 현종의 선릉은 고려 왕릉 중 그나마 보존이 잘 되어 있는 편에 속한다. == 사극 == [[미천왕]]과 마찬가지로 별로 각색을 안 해도 [[사극]]화하기 안성맞춤인 서사구조를 가진 임금인데도 사극의 주인공이 된 적은 없는 임금. 출연한 드라마는 [[천추태후(드라마)|하나 있긴 했지만]] 주역도 아니었었고 드라마도 안습이었고. 그래서인지 천추태후 방영 후반에는 '차라리 현종을 주인공으로 했었으면 좋았겠다'는 소리도 많이 나왔다. 그도 그럴 것이 현종의 일대기를 되짚어 보면 그의 인생은 --RPG형 사극--'성장형 주인공'을 중심으로 한 사극에 딱 맞다. 게다가 사극에서 흔히 등장하는 클리셰들을 고증에 맞춰서 넣는게 가능하다. * 1) '''불륜관계로 출생''' * 허구헌날 [[막장 드라마]]에서 불륜 떡밥을 써서 비판을 받는데 현종은 진짜 불륜 관계에서 태어난 [[사생아]]다. * 2) '''권력 다툼으로 궁에서도 쫒겨나고, 죽을 위기를 수차례 넘기며 고생함.''' * [[선덕여왕(드라마)|선덕여왕]]이나 [[근초고왕(드라마)|근초고왕]]과 같이 실제로 있지도 않은 주인공의 고생담과 암살 떡밥을 넣는데 현종은 진짜로 궁에서 쫒겨나 개고생하고 죽을 위기를 실제로 수차례나 넘겼다. * 3) '''복귀하여 고려 국왕으로 즉위''' * 4) '''내우외환으로 인한 고난을 겪음. 그리고 모두 극복''' * [[강조의 정변]]으로 인해 국가 내부가 대단히 어지러운 상황에서 [[여요전쟁]]으로 인해 수도 개경을 포기하고 나주까지 험난한 피난을 해야 했고, 도중에 거란군과 수십리 밖에 떨어지지 않은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3차 침입때는 떳떳하게 개경을 지키며 강감찬의 귀주 대첩으로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 5) '''왕조의 태평성대를 연 명군으로 기록됨''' 어쨌든 천추태후에서의 현종 역을 맡은 배우는 성인 배역 [[김지훈(배우)|김지훈]]. 특이하게도 현종 역으로 출연한 아역 배우는 3명이었다. 현종의 아버지 [[안종]](경주원군)은 [[김호진]]이었고 어머니인 헌정왕후는 '''[[신애]]'''가 출연했었다. 불륜 출생이나 초반의 고난은 묘사되긴 했었지만 아무래도 극의 주역이 천추태후다 보니 그리 비중이 크지는 않았다. 신혈사로 가게 된 것도 천추태후가 현종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였던 것으로 묘사되며 김치양의 살해 위협으로부터 주지 스님이나 강감찬 등의 보호를 받는 것으로 나왔다. 그러다가 결국 강조의 정변으로 즉위한다. 즉위 직후에도 거란의 침공으로 피난을 가면서 고생하는 것도 나왔고 돌아오면서 피해를 입은 백성들에게 무릎을 꿇기도 했었다. 그 후 강감찬 등의 활약으로 거란의 침입을 물리치고 천추태후와 함께 농사 짓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극의 마지막을 장식. 하지만 여요전쟁 자체가 상당히 간략화 되어버린 탓에 현종의 전쟁 대비나 업적 등은 제대로 묘사되지 않았다. == 같이 보기 == * [[강조의 정변]] * [[여요전쟁]] [[분류:고려의 왕]] [[분류:명군]]Load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