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게오르크 페르디난트 두크비츠 (문서 편집) |||| '''{{{+1 게오르크 페르디난트 두크비츠}}}[br]Georg Ferdinand Duckwitz''' || ||||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duckwitz.jpg|width=100%]]}}} || ||<|2> '''출생''' ||1904년 9월 29일|| ||[[독일]] [[브레멘]]|| ||<|2> '''사망''' ||1973년 2월 16일 (향년 69세)|| ||[[독일]] [[브레멘]]|| || '''직업''' ||[[외교관]]|| [목차] [clearfix] == 개요 == Georg Ferdinand Duckwitz. [[나치 독일]], 그리고 [[서독]]의 [[외교관]]. 덴마크의 기적을 만든 장본인. == 시작 == 1904년 태어난 두크비츠는 브레멘의 유명한 상인집 아들로, [[프라이부르크 대학교]]을 졸업한 후 커피 회사(Café HAG)에 입사하게 되었다. 그리고 1928년 [[코펜하겐]]으로 가게 되었다. 1932년 [[그레고어 슈트라서]]를 만나게 되고 1933년 나치 독일에 입당한 후 외무부에 들어가게 되었다. 1935년부터 나치에 환멸을 느끼게 되었고, 반유대주의가 불던 때 자기 집 아파트에 유대인 3명을 숨겨주었다. 그리고 나치를 탈당했지만, 1941년 다시 외무부에 들어가게 되었다. == 덴마크의 기적 == 1943년 같이 근무하던 [[베르너 베스트]]에게서 10월 1일 유대인들을 넘길거린 소식을 듣고 스웨덴에 덴마크 유대인을 난민으로 처리할 것을 요청하고, 1943년 9월 28일 나치 정복 차림으로 노동당 앞에서 나치의 계획을 밝혔다. 덴마크 노동당은 이를 알렸고, 29일 이 소식이 덴마크 전체에 퍼지게 되었다. 그리고 10월 1일이 밝자, 나치 친위대들은 엄청난 저항을 받게 되었다. 덴마크 경찰은 이들을 방해하고, 거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미 다 스웨덴으로 도망간 상태였고, 건너갔던 당시 유명인사였던 [[닐스 보어]][* 어머니가 유태인이었다.]가 스웨덴을 설득해[* 스웨덴은 그를 미국으로 보낼려 했지만, 사람들 안 받아주면 [[맨해튼 프로젝트|미국]]으로 안간다고 뻐팅겼다. ] 난민으로 받아들인다고 공식 성명을 내게 만들었다. 그리고 오직 580명만 나치 돌격대에게 잡히게 된다. 물론 덴마크는 이 580명에 대해서도 계속 나치를 괴롭혀 '''한명도 [[치클론 B]]를 맡게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돌프 아이히만]]이 좌절~~ == 이후 == 종전 후 [[서독]]의 외교관으로 서독 덴마크 대사를 지내기도 하였으며, [[빌리 브란트]]가 수상이 되자 외무부 차관으로 폴란드 정부와 화해를 주선하라는 명령을 받아 폴란드 정부와 화해를 주선했다. 1970년 은퇴하였으며, 1971년 이스라엘로부터 세계의 은인 칭호를 받게 된다. [[분류:1904년 출생]][[분류:1973년 사망]][[분류:독일의 외교관]][[분류:나치 독일/인물]][[분류:나치당원]][[분류:홀로코스트/의인]][[분류:브레멘 출신 인물]]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