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겐트 (문서 편집) [[분류:벨기에의 도시]][[분류:1933 BIE 의정서 이전 세계박람회 개최도시]] [include(틀:다른 뜻1, other1=던전 앤 파이터의 마을, rd1=신 황도 겐트)] [include(틀:벨기에의 행정 구역)] ||<#000000> {{{#FFFFFF {{{+3 벨기에 겐트}}}}}} || || [include(틀:지도, 장소=Gent)] || [목차] == 개요 == ||<-2> 겐트[br](Gent / Ghent) || || 국가 ||[[벨기에]]|| [[네덜란드어]]: Gent(헨트, 겐트)[* 국립국어원의 용례집을 적용하면 [[https://opendict.korean.go.kr/dictionary/view?sense_no=339916|겐트]](/ʝɛnt/, /ɣɛnt/).] [[프랑스어]]: Gand(강) [[독일어]]: Gent(겐트) [[영어]]: Ghent(겐트) [[벨기에]]의 [[도시]]로 [[오스트플란데런]] 주의 [[주도]]다. [[브뤼셀]]에서 서북쪽으로 50km 떨어졌다. [[인구]]는 약 30만명이고 주변 [[도시권]]을 포함한 인구는 약 60만명이다. 벨기에 플란데런 도시 지대(가장 많은 인구가 몰려있는 안트베르펜, 겐트, 브뤼셀, 브뤼헤와 그 안의 도시 지역)에 있다. 플람스어로 겐트는 합류점이라는 뜻이다. 브뤼헤와 함께 플란데런 지역을 대표하는 도시다. [[1180년]]까지 [[플란데런 백국]]의 수도가 브뤼헤였고 이후부터는 수도가 겐트였다. 스페인과 네덜란드의 전쟁이 잠시 끝난 [[1609년]]에는 인구가 30,000명이었고 스페인에서 계승 전쟁이 일어난 [[1700년]]에는 인구가 50,000명이었다. [[바다]]에서 20km 떨어진 내륙 도시지만 운하를 통해 [[네덜란드]] 국경을 지나 바다로 연결된 [[항구 도시]]기도 하다. 서북쪽의 브뤼헤와도 [[운하]]로 연결되어 있다. 현재는 대부분의 [[항구]] 업무가 대부분 제브뤼헤(Zeebrugge)로 옮겨진 상태다. == 역사 == [[9세기]] 후반에 [[바이킹]]의 침공을 받아 파괴되었다. 비슷한 시기에 생겨났던 플란데런 백국에 의해서 재건되었고 도시 인근의 양 목장의 양모를 바탕으로 직물 산업을 발전시켰다. [[14세기]]에 들어서는 직물 산업의 확장으로 양모가 부족해지자 잉글랜드에서 양모를 수입해야 해서, 친교를 맺었다. 겐트는 [[중세 영어]]로는 Gaunt(곤트)[* 그래서 [[잉글랜드 왕국]]의 국왕 [[헨리 4세]]의 아버지인 [[에드워드 3세]]의 4남 존을 곤트의 존이라고 부른다.]로 불렸다. [[백년전쟁]]을 겪으며 플란데런은 프랑스 왕실인 [[발루아 왕조]]의 방계가 다스리는 [[부르고뉴국]]에 편입되었다. [[프랑스인]]들은 플란데런에 높은 세금을 매겼고, 당시 플란데런의 대표 도시였던 겐트는 반란을 일으켰다. 하지만 우방인 잉글랜드는 [[카스티용 전투]]에서 결정적인 패배를 당하였고, 겐트도 가베르 전투에서 [[선량공 필리프]]에게 패배하였다. 이후 저지대의 상업 중심지는 [[플란데런 백국]](겐트, 브뤼헤)에서 [[브뤼셀 백국]]이 [[림뷔르흐 공국]]과 [[룩셈부르크 공국]]을 합쳤던 [[브라반트 공국]](안트베르펜, 브뤼셀)으로 옮겨가기 시작했다. [[오스트리아 대공국|오스트리아 대공]] [[막시밀리안 1세(신성 로마 제국)|막시밀리안 1세]]가 부르고뉴의 상속녀인 [[마리 드 부르고뉴]]와 결혼하면서, [[합스부르크 가문]]이 플란데런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마리가 사망하자 합스부르크의 혼인 관계가 사라졌고, 겐트와 브뤼헤는 2차례에 걸쳐 프랑스의 도움을 받아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진압되었다. 겐트에서 태어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가 [[이탈리아 전쟁]]을 치르며 도시에 과중한 세금을 요구하자 다시 반합스부르크 봉기가 일어났는데, 이번에도 가혹하게 진압되었다. 이후 겐트의 지역 유지들은 목에 올가미를 메고 카를 앞을 지나가야 했다. 겐트는 [[유럽]]의 규모가 큰 도시 중 하나였는데, [[네덜란드 독립전쟁]] 이후 바다로 가는 운하에 통행세가 부과되며 [[상업]]이 타격을 받았고 전장이 되어 힘든 시기를 보냈다. 겐트 평화 조약으로 [[펠리페 2세]]에게 충성하는 대가로 [[종교의 자유]]가 주어졌는데 [[스페인]]의 변심으로 전쟁이 재개되었다. 대공세를 펼친 오렌지 공 빌럼의 군대는 겐트에 입성하였지만 스페인도 반격에 나섰고 [[파르마]] 공이 이끄는 플란데런 민병대는 이프르, 겐트를 점령하였다.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네덜란드 공화국|네덜란드 북부는 독립]]하였으나 남부는 [[스페인령 네덜란드|스페인과]]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제국의 지배]]를 받으면서 가톨릭 지역으로 남게 되었다.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으로 스페인 왕실이 합스부르크 가문에서 [[부르봉 왕조]]로 교체되자, 플란데런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제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이후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중에는 [[프랑스군]]에 점령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1756년]]에 [[동맹의 역전]]이 이루어지며 프랑스의 [[위협]]은 없어졌다. 북부에서 물길이 막혀 있던 겐트를 위해, [[신성 로마 제국]]의 [[요제프 2세]]는 [[네덜란드 공화국]]을 협박해서, 물길을 열게 하였다. 그래도 플란데런인들의 오스트리아에 대한 인식은 좋지 않았고 결국 플란데런은 프랑스 혁명의 영향을 받은 브라반트 혁명으로 독자적인 국가를 선포하기도 한다. 반란은 진압되었으나 곧 혁명 전쟁이 일어났고, 프랑스 혁명군이 저지대를 점령하며 오스트리아의 지배는 끝이 났다. 벨기에 일대는 프랑스 공화국에 편입되었다. [[라이프치히 전투]] 이후 프랑스 군은 물러났다. 미국과 영국의 [[영미 전쟁]]을 종결시킨 겐트 조약이 겐트에서 체결되기도 했다. [[빈 회의]]를 거쳐 벨기에 지역은 [[네덜란드 왕국]]에 통합되었다. 종교 차이 등으로 인해 프랑스의 [[7월 혁명]]과 함께 [[벨기에 혁명]]이 일어나 벨기에 왕국의 일부가 되었다. 2020년 7월 1일에 겐트 시에서 [[레오폴드 2세]]의 동상이 철거됐다.[[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2D&mid=shm&sid1=104&sid2=233&oid=001&aid=0011717390|#]] == [[겐트/인구|인구]]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겐트/인구)] == 사회 == 12~14세기에 세워진 상 바본 대학교와 1817년에 세워진 [[겐트 대학교]](Universiteit Gent)가 유명하다. 겐트 대학교는 주 내의 유일한 국립 대학이며 플란데런 내의 두 개의 공립 대학 중 하나다. Hogeschool Gent는 벨기에 안에서 디자인, 패션, 예술 교육으로 유명한 실용 대학이다. [[겐트 대학교]]는 벨기에의 대학 중에서 처음으로 [[네덜란드어]]로 강의를 시작하기도 했다. 당시 벨기에는 네덜란드어로 교육을 하는게 금지되어 있었는데 오스트플란데런 사람들이 중앙 정부에 항의하면서 네덜란드어 교육을 진행한 것이다. 그래서 겐트는 플란데런에서 민족, 문화의 수도라고 불린다. == 정치 == 플란데런의 다른 지역들 중에서 노동계가 많은 사회주의 정당의 영향이 큰 편이다. 그러나 민족주의 정당의 영향력도 조금씩 커지고 있다. 녹색 정당도 많이 지지하며, 주민과 주 정부가 자연 환경 개선에 같이 협조하고 정책을 개발해 나간다. == 문화 == === 스포츠 === 벨기에 축구 리그인 [[KAA 헨트]]의 연고지다. == 기타 == 플란데런의 자본으로 이루어진 대기업들과 보험사들의 본사가 겐트에 많이 위치해 있다. [[넷로그]]를 운영하던 기업인 [[매시브 미디어]]의 본사가 여기에 위치해있다. [각주][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오스트플란데런, version=20)]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