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예진 (문서 편집) ||<-2> [[파일:고예진.jpg|width=200px]] || || 성명 ||고예진(高禮鎭) || || 자 / 호 ||계문(季文) 또는 수문(秀文) / 송천(松川) || || [[본관]] ||[[고(성씨)|장흥 고씨]][* 19세 진(鎭) 항렬.] || || 생몰 ||[[1875년]] [[11월 24일]] ~ [[1952년]] [[10월 2일]] || || [[출생지]] ||[[전라도]] 흥덕현 일남면 송암리[br](현 [[전라북도]] [[고창군]] 흥덕면 송암리) || || 사망지 ||[[전라북도]] [[고창군]] 흥덕면 송암리 || || 추서 ||건국훈장 애국장 || [목차] == 개요 == 한국의 [[독립운동가]], 의병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독립유공자 [[고순진]]은 그의 형이다. == 생애 == 고예진은 1875년 11월 24일 전라도 흥덕현 일남면 송암리(현 전라남도 고창군 흥덕면 송암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임진왜란]] 때 의병장이었던 [[고경명]]의 후손이며, [[최익현]]의 문인이다. 1905년 11월 일제가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하고 외교권을 박탈하자, 최익현은 의병을 모집했다. 이에 고예진은 족형 [[고석진]], [[고용진(독립운동가)|고용진]]과 함께 이에 호응을 것을 모의하여 격문을 작성해 8도에 배포했고, 그해 12월 충청남도 노성(魯城)에서 의병 700명과 함께 봉기했다. 이후 최익현이 [[임병찬]]의 권유를 받아들여 1906년 4월 13일 태인 무성서원(武城書院)에서 강회(講會)를 열어 태일일대의 유림 인사들을 불러모을 때 가담했고, 최익현의 독립의군부에서 정훈(政訓)을 담당하여 전국 8도에 의병궐기의 격문을 배포했다. 고예진은 최익현 휘하에서 정읍, 순창, 곡성 등지에서 활약했으나 순창 귀암사에서 관군에 포위되자 싸우려 했으나 최익현이 감히 관군에 대항해 역적이 될 수는 없다며 항전을 금지하자 전의를 상실해 패배를 면치 못하고 일본군에게 체포되어 전주 감옥에 투옥되었다가 같은 해 12월 27일에 석방되었다. 1914년 임병찬이 고종의 밀명을 받들어 비밀결사인 대한독립의군부를 결성하고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자, 고예진은 이에 가담하여 서기관(書記官)을 맡았다. 전국 의병장과 유생들이 이 단체에 가담했고, 주로 호남 지방을 중심으로 경기도와 강원도 일대까지 활동 영역을 넓혔다. 이 단체는 오아정을 복고하는 걸 추구했으며, 전국적인 의병투쟁을 목표로 삼았다. 그러나 일제가 이 움직임을 사전에 간파하고 임병찬을 비롯한 지도부를 구속하면서 삽시간에 허물어졌고, 고예진은 체포는 면했지만 일제의 감시를 받으며 초야에 묻혀 지냈다. 1919년, 고예진은 [[김창숙]] 등이 파리 강화회의에 보내는 파리 장서에 137인 중 한 명으로서 서명했다. 파리 장서는 조선 독립을 호소하는 장문의 서한이었으나 일제의 방해와 서양 열강의 이해관계가 얽히는 바람에 무시되었다. 그 뒤 부모의 상으로 귀가하다가 일본군에게 체포되어 전주 감옥에서 몇년 간 옥고를 치른 후 귀향했다. 이후 세상과 연을 끊고 조용히 묻혀 지내다가 1952년 10월 2일에 사망했다. 저서로는 송천집 4권이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고예진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또한 그의 형 [[고순진]] 역시 독립운동에 가담한 공이 인정되어 1999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조선 의병장]][[분류:장흥 고씨]][[분류:고창군 출신 인물]][[분류:1875년 출생]][[분류:1952년 사망]][[분류:건국훈장 애국장]]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