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권준 (문서 편집) [[분류:1541년 출생]][[분류:1611년 사망]][[분류:안동 권씨 추밀공파]][[분류:임진왜란/군인]][[분류:조선 선무공신]][[분류:조선의 무관]] [include(틀:다른 뜻1, other1=동명이인, rd1=권준(동명이인))] [include(틀:조선 선무공신)] ---- [Include(틀:이순신)] ---- 權俊 [[1547년]]([[명종(조선)|명종]] 2년)[* [[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MU_6JOb_1579_150003|기묘문무과방목]](己卯文武科榜目). 1541년([[중종(조선)|중종]] 36년) 생이라는 기록도 있다.] ~ [[1611년]]([[광해군]] 3년) [목차] [clearfix] == 개요 == [[조선]] 중기의 인물. 자는 언경(彦卿), 호는 원당(元堂), 본관은 [[안동 권씨|안동]](安東)이다. [[이운룡]], [[어영담]], [[정운]], 무의공 [[이순신(무의공)|이순신]][* 우리가 알고 있는 충무공 [[이순신]]과는 [[동명이인]]이다.] 등 [[이순신]]이 가장 아꼈던 장수 중 한 명이다. == 생애 == [[조선]] [[개국공신]] [[권근]](權近)의 7대손이며 병조 참판을 지낸 권눌(權訥)의 아들이다. 첫 부인은 [[여산 송씨]](礪山 宋氏) 송달기의 딸이며, 두번째 부인은 [[창녕 조씨]](昌寧 曺氏) 조휘원의 딸로 도원수 [[권율]]의 첫번째 부인의 여동생이다. 권율과 권준은 계급상으로는 한참 거리가 있는 상하 관계에 있었지만,[* 임진왜란간 세운 공으로 인해 경상 우수사 → 충청 수사를 연달아 맡았으며 전란 후에는 경기도방어사로 승진한다. 임진왜란 전에도 전라 좌수영 관할 5관 중 가장 큰 순천도호부의 부사로 종3품의 꽤 높은 벼슬에 있었다.] 사적으로는 같은 [[안동 권씨]] 추밀공파 문중의 친척(13촌)이며 동서지간이 되기도 하는 셈이다. [[내금위]]에 소속되어 있다가 1579년([[선조(조선)|선조]] 12) 식년시 [[무과]]에 갑과 3위 (탐화랑)으로 급제하였다.[[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MU_6JOb_1579_150003|#]] [[임진왜란]] 당시에는 종3품 순천 도호 부사(현재의 순천시와 여수시를 모두 관할지로 함)로 재직하며 [[이순신]] 휘하에서 여러 해전에 참전, 큰 공을 세웠다. 당시 전라 좌수영의 5관 5포 중 가장 큰 고을인 순천 도호부의 부사였기 때문에 실질적인 좌수영 내 2인자의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이며, 이를 증명하듯 가장 최상급자인 전라 좌수사의 명을 직접 받아 전달하는 중위장의 역할을 권준이 맡았다.[* 단 1차 출동이 있던 옥포해전 때는 육군 조방장으로 차출되었기 때문에 해전에는 참가하지 않지만 2차 출동 때는 복귀했기 때문에 이후 벌어지는 모든 전투에서 중위장으로 참전, 공을 세운다. 이를 두고 당시 이순신은 [[난중일기]]에 수군의 중위장을 육군으로 데려갔다고 한탄하는 내용이 있다.] [[당포 해전]]에서는 적장 [[도쿠이 미치유키]]를 화살로 쏘아 맞추고, 연이은 출전에서도 계속 공을 세워 1595년 [[원균]]의 뒤를 이어 경상 우도 수군 절도사(정3품)에 임명되었으나[* 원균의 바로 뒤를 이은 것은 배설이고, 권준은 배설의 뒤를 이어 수사가 된다. 다만 배설은 부임 후 6개월이 채 못되어 권준과 교대된다.] 이후 원균이 삼도수군통제사(종2품)에 임명되자 사직하였다. 그러나 칠천량에서 조선 수군이 궤멸되고, 이순신이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복직되자 같이 충청도 수군 절도사(정3품)로 임명되어 이순신의 막하에서 다시 재직하였으나, 경기도 지역 방어가 주 임무였던지라 해전에 나가는 일은 드물었다.[* 칠천량 해전으로 조선 수군 대다수가 사라지자 이에 놀란 선조는 충청 수군은 한강을 막아야 한다고 붙들어두고 있었다. 삼도수군통제사로 복직됐지만 휘하에 충청 수군 없이 경상과 전라 2도만으로 싸우고, [[명량해전]] 이후에는 [[명나라]] [[진린]]의 수군이 투입된 것.] 전란이 끝난 이후에는 경기도 방어사(종2품), 충청도 병마 절도사(종2품) 등을 지냈고 1604년 선무공신(宣武功臣) 3등으로 책록되었으며 안창군(安昌君)의 작호를 받았다.[* 이순신 휘하의 장수 중 선무공신에 책봉된 자는 권준과 동명이인의 [[이순신(무의공)]]이 있다.] 다만 임진왜란이 끝난 뒤 중국 해랑도라는 섬에서 활동한 해적 해랑적에게 병선과 물자를 약탈당해 큰 곤경을 겪었다. 임진왜란이 터지기 전부터 이순신과 함께 했던 사람으로, 사적으로도 매우 친밀했던 사이였다. [[난중일기]]엔 권준이 잠깐 한산도를 비우는 시기와, 이순신의 파직 이후를 제외하면 권준의 이름이 등장하지 않은 날을 찾기 힘들 정도.[* 이와 비슷한 사람은 무의공 이순신과 전라우수사 이억기가 있으며, 원균 역시 등장 빈도가 많은 편이긴 하나 이순신과 우호적인 관계는 아니었다.] 같이 식사를 하며 여러 일을 논의하는가 하면 술도 자주 마시고, 바둑을 두거나 활을 같이 쏘았다.[* 활솜씨가 뛰어나서, 일기엔 '순천부사가 가장 잘 맞혔다'는 대목이 종종 있다.] 항상 많은 사람들이 이순신을 찾아오지만 가끔 아무도 찾아오지 않으면 직접 권준을 초청해 같이 식사를 하기도 했다. 또 권준의 생일에는 여러 장수들이 모여 같이 술과 음식을 먹으며 즐겼다는 기록도 있다. 추가로 권숙(權俶)이라는 남동생이 한 명 있는데, 이순신의 [[난중일기]]를 읽어보면 권준과 함께 이순신은 그 남동생과도 자주 어울려 노는 모습이 보인다. 어떤 경우에는 둘이서 술 마시고 있는데, 동생이 사라져서 권준이 찾아오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동생의 경우에는 영상 매체에서 등장한 적이 없어 그 인지도가 매우 낮다.[* 그도 그럴 것이 권준의 동생이 등장하는 시기는 전란이 터지기 전이었고, 전란이 터진 후에는 등장이 없다.] == 대중매체 == * 1971년 영화 <[[성웅 이순신(1971)|성웅 이순신]]>에서는 배우 남방운이 연기했다. ||[[파일:불멸의_이순신.E063_KBS_2004年_(김명민,_최재성_주연).avi_000164012.jpg|width=300]]|| * 2004년 [[KBS]]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배우 [[박찬환]][* [[드라마]]를 시청하던 부녀자들에게는 [[이영남]]과 함께 선호했던 배역인데 배역을 맡은 배우 박찬환 씨가 상당한 [[미중년]]인데다 온화하면서도 강단있는 [[외유내강]]의 모습을 잘 연기하였다. 1999년 [[MBC]] 드라마 <[[허준(드라마)|허준]]>에서는 [[선조(조선)|선조]] 역. 단, 박찬환 씨의 부드러운 [[이미지]] 덕에 보통 [[사극]]에서 묘사되는 음흉하고 찌질한 이미지가 아니라 온화한 이미지였다. 2006년 [[MBC]] 드라마 <[[궁(드라마)|궁]]>에서는 가상의 [[대한민국]] 황제(이현) 역.]이 연기했다. [[이순신]]이 가장 신임하는 장수이자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에서 전략, 지략, 계책을 논의하는 군사 [[참모]]급의 인물로 나온다. 이순신이 [[전라좌수영]]에 처음 부임하여 관할 구역들을 점검할 때 책을 잡히지 않은 2명의 장수 중 1명.[* 다른 장수들은 비축해야 할 군량미가 부족하거나 무기들의 상태가 형편없거나 상비 병력이 부족하는 등의 잘못이 있었다. 심지어 [[김완]]은 이순신의 환심을 산답시고 기생들을 불러다 놓고 있었는데 이순신이 [[정운]]의 진영에 들렀다가 무기나 함선 점검 등은 일체 하지 않고 병사와 장기를 두고 "자네가 알아서 잘 했겠지"라며 그냥 갔다는 소식을 미리 접했던 것. 물론, 기생은 거들떠도 안 보고 무기고로 직행한 이순신에 의해 무기 관리 태만이라는 잘못이 바로 드러나 곤장을 맞았다. 녹도 만호인 정운 또한 권준과 마찬가지로 책잡히지 않기는 했는데 문제는 전라좌수영 군사들을 창과 칼 등 근접전 위주로만 훈련시킨 것에 대해서 이순신이 불편한 기색을 보인다. 나중에는 대놓고 문제를 제기하며 후에 첩자로 붙잡힌 일본인 포로들과 녹도군과 싸우게 하여 정운의 육전 고집을 단념케 했다.] 장수들 사이에서는 전라좌수영에서 가장 큰 고을이었던 순천 도호부[* [[조선시대]]의 순천은 현대의 [[순천시]]와 행정 구역이 조금 차이가 있다. [[낙안읍성]]과 [[꼬막]]으로 유명한 [[보성군]] 벌교읍을 아울렀던 옛 [[낙안군]](樂安郡) 지역이 별개로 있는 대신에 조선시대의 순천은 도호부로서 그 지휘관인 부사는 종3품이었으며 범위는 현재의 순천시에서 옛 낙안군 지역이었던 낙안면과 외서면 및 별량면 일부 지역을 제외한 현재의 순천시 전 지역은 물론 전라좌수영이 있었던 [[여수시]]까지 포함하던 큰 고을이었다. 어찌되었든 순천 도호부와 낙안군 모두 [[임진왜란]] 당시에는 전라좌수영 휘하 고을로 당시 종4품이던 낙안군의 군수는 [[신호(조선)|신호]]였다.]의 영향력 때문에 전라좌수영의 [[2인자]]로 꼽히지만 전라좌수영 내 장수들 중에서 유일하게 [[문관]] 출신이라서 은근히 따돌림을 받았었다. 하지만 [[전쟁]] 준비를 수행하고 장수들 간의 신뢰가 깊어지면서 자연히 따돌림 또한 사라졌다. [[정유재란]] 이전 이순신이 파직되고 [[원균]]이 새로 통제사에 오르자 사직했다가 [[칠천량 해전]] 이후 이순신이 복직되고 나서 충청 수사로 복귀해 끝까지 참여를 한다. ||[[파일:1599451944965.jpg|width=300]]|| * 2015년 [[KBS]] 드라마 <[[징비록(드라마)|징비록]]>에서는 뮤지컬 배우 [[김법래]]가 연기했다. * 2016년 [[KBS]] 드라마 <[[임진왜란 1592]]>에서는 실제 권준의 활약이 제대로 연출됐는데 [[당포 해전]]에서 왜장을 편전으로 쏘아 맞추는 장면이 그것이다. * [[한산: 용의 출현]] 배우 [[안성봉]]이 연기했다. [[파일:한산 권준.png]]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