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그리고리 레치칼로프 (문서 편집) [[분류:소련의 군인]][[분류:에이스 파일럿]][[분류:제2차 세계 대전/군인]][[분류:1920년 출생]][[분류:1990년 사망]][[분류:소비에트연방영웅]][[분류:스베르들롭스크주 출신 인물]] '''그리고리 안드레예비치 레치칼로프(Григорий Андреевич Речкалов: 1920년 2월 9일~1990년 12월 20일)''' [목차] == 소개 == [[독소전쟁]]에서 56대의 적기를 단독으로 격추하고, 6대를 공동 격추한 [[소련 공군]]의 에이스 '''그리고리 레치칼로프'''는 [[소비에트연방영웅|소련연방영웅]] 칭호를 2회나 받은 전쟁 영웅이었다. 그는 소련 공군 역사를 통틀어 격추수 2위에 해당하는 엄청난 무공을 세웠다. == 출생과 성장 == [[1920년]] 2월 9일에 [[소비에트 러시아]] 중부의 작은 마을 쿠디야코보에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난 그리고리 레치칼로프는 문화 생활을 즐기기에는 너무나 도시와 떨어진 곳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아들이 학교에 갈 나이가 되자 그의 부모는 [[스베르들롭스크]] 근처의 보포브쿠(Бобровку)란 마을로 이사했고, 그곳에서 그리고리 소년은 학교를 다녔다. 소년 그리샤는 14살이 되고 중학교에 해당되는 교과 과정을 마치자 곧바로 직업 전선에 뛰어들었다. 마을의 공장에 전기공으로 들어간 그는 얼마 후 기술공이 되기 위하여 스베르들롭스크에 있는 공장 견습학교에 들어갔다. 당시 [[소련]] 정부는 조직 단위로 조종 교육을 장려하고 있었는데, 그리샤 소년도 지방 비행클럽에 가입했고 [[글라이더]]로 기초 비행과정을 이수할 수 있었다. 징병 연령인 18세가 되던 [[1938년]]에 육군에 입대한 그는 조종 특기를 살리기 위해 [[페름]]에 있는 군사비행학교로 옮겨가 정식으로 조종사 교육을 받게 된다. 레치칼로프는 정밀 [[신체검사]] 결과 다른 곳에는 이상이 전혀 없는 건강한 신체였으나 자신의 눈이 비행기를 몰기에는 치명적일 수도 있는 [[색맹]]이라는 것을 처음 알게 된다. 원래 기준이라면 당연히 탈락될 터였으나, 기초 비행 교육을 좋은 성적으로 이수한 그를 아깝게 여긴 당국은 마침 유럽 대륙에 전운이 닥쳐오고 있어서 그대로 비행학교에 남을 수 있었다.[* 일설에는 연대장이 그에게 연락 임무를 준 사이에 전달된 의료기록을 미처 검토하지 못해서 생긴 행정 착오라는 주장도 있다. ] 그리고리 생도는 이에 보답하듯 실기와 필기에서 두각을 보이며 [[1941년]]에 상사 계급으로 조종사가 될 수 있었다. 소련 공군은 [[독일]]과 [[일본]]과는 달리 비행병 제도가 없이 조종사에게는 미국이나 영국처럼 부사관 이상의 계급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신참 조종사가 된 그가 처음으로 부임한 임지는 [[오데사]] 군관구에 주둔하고 있던 제55전투기연대(55-й ИАП)였다. == 개전과 함께 참전 == 따라서 그는 [[소련군]]이 [[핀란드]]를 [[겨울전쟁|침공했을 때]]나 [[폴란드 제2공화국|폴란드]]를 [[폴란드 침공|쳐들어가]] [[나치 독일]]과 [[독소 폴란드 점령|나눠먹을 무렵]]만 해도 한창 비행 교육을 받고 있었던 탓에 참전하지 못했고, 첫 실전 기회는 [[독소전]]이 터지고 난 후였다. 1941년 6월 22일, [[I-153]] 복엽 전투기로 메서슈밋 전투기를 맞아 싸운 그는 추풍낙엽처럼 격추되던 다른 소련 조종사들과는 달랐다. 날카로운 급기동을 펼쳐 덮쳐온 적기의 기습을 피한 그는 날개 밑에 장착된 로켓탄을 전탄 발사하며 역습을 펼쳤다. 러시아측 자료에는 레치칼로프의 첫 격추는 로켓으로 이뤄졌다는 기록을 종종 볼 수 있는데, 실제로 그랬다면 대대적으로 선전되었을 것이 분명하므로 아마도 로켓과 기총을 함께 써서 격추시킨 것으로 추정된다. 독일이 소련에 침공한 첫 일주일 동안 그는 무려 30회를 출격했는데, 그중에서 10회는 실전 임무였다. 6월 27일에 [[몰도바]]에서 스쿠레니 부근으로 초계 비행을 나간 레치칼로프 소위는 [[독일 국방군]]의 [[정찰기]] 헨셸 [[Hs 126]]를 포착해 팽팽한 선회전을 벌인 끝에 격추시킬 수 있었다. 7월 11일에는 코토브스크 상공에서 폭탄을 떨구고 있던 [[융커스]] [[Ju 88]] 폭격기를 잡아낼 수 있었지만, 그 [[폭격기]]는 폭탄창을 닫고 그리고리 소위가 탄 [[전투기]] 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도주해 엔진을 있는대로 오버부스트시키며 탄창이 빌 때까지 사격을 퍼부은 후에야 간신히 추락시킬 수 있었다. 레치칼로프는 첫 번째 힘들게 잡은 정찰기도 그렇고 독일 공군기는 폭격기 조차도 쉽게 잡을 수 없는 좁힐 수 없는 성능차를 절감했다. == 대공포에 피격 == 7월 26일에 [[두버사리]] 방면으로 지상군 지원을 위해 출격을 나갔던 그는 [[대공포]] 파편이 오른다리에 박히는 부상을 입었고, 그 상태로 지혈을 해가며 겨우 기지로 돌아와 기절했고, 곧바로 후송 조치되었다. 그가 치료를 마치고 연대로 다시 돌아온 것은 해가 바뀐 [[1942년]] 4월이였다. 그 해 여름에 55연대는 제16근위전투기연대(16 ГвИАП)와 통합되었다. 재편성을 거치며 정예 조종사 위주로 친위연대로 소속이 옮겨졌고, 이들은 낡아빠진 구식 전투기가 아니라 [[Yak-1]] 같은 신형 전투기들을 지급받게 된다. 당시의 소련 공군은 개전 초기에 강대한 [[루프트바페]]의 맹공에 무기력하게 으깨진 전력을 다시 긁어모으고 신형 항공기와 장비 보급에 박차를 가하며 대대적으로 부대 편제에도 메스가 가해졌는데, 제16친위전투기연대 또한 원래는 제216항공사단 예하로 있다가 제9친위항공사단 소속으로 지휘체계가 달라졌다. 1942년이 저물 때까지, 레치칼로프는 4대를 단독 격추시키고 2대를 공동 격추하는 전적을 보이고 있었다. 그 해 연말부터는 동맹국인 미국이 보내준 신형 전투기인 [[P-39 에어라코브라]]가 정예 조종사에게 우선적으로 할당되었는데, 그중에는 레치칼로프 소위도 끼어 있었음은 두말할 여지가 없다. [[1943년]] 봄부터 캅카스 북부 전선과 쿠반 강 전선에서 독일 공군의 정예들과 치열한 전투를 거듭하게 된다. 1943년 5월 24일까지 194회 출격에 12번의 승리를 거둔 그에게는 소비에트 연방영웅 칭호가 수여되었다. 당시 엄청난 실전 경험을 쌓아가고 있던 [[전투조종사]]들은 지금과는 조금 달라서, 전장에서 탁월한 공중전 실력과 사격 솜씨를 보이는 에이스는 계급의 고하와 관계없이 동료나 부하들이 자연스레 우러르며 따르게 마련이었다. 이런 풍조는 소련 공군 뿐만이 아니었고, 독일이나 미, 영 조종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아마도 무리중에 돋보이는 에이스가 싸우는 것처럼 자신도 싸울 수 있다면 공적은 물론이고, 살아남을 확률도 자연히 올라가게 마련이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현상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리 레치칼로프가 그랬다. 그는 1943년 10월에 비행중대장이 되었고 [[1944년]] 5월에는 겨우 24살의 나이에 자신이 근무하던 부대의 부연대장이 되었고, 10월 2일에는 소령으로 진급했다. == P-39 격추왕 == 18살에 입대하여 소련 2위의 수퍼 에이스로 성장한 그리고리 레치칼로프 소령은 전쟁이 끝날 무렵에는 [[라보츠킨]] [[La-7]]로 갈아타고 [[나치]]의 심장인 [[베를린]] 상공에서 마지막 전투를 치렀다. 4년 동안 450회의 출격을 하면서 122회의 교전을 경험했다. 복엽기인 [[I-153|차이카]]로 조종사 생활을 시작한 그는 곧 첫 단엽 전투기 [[I-16]]를 몰았고, 그나마 독일 전투기와 맞설 수 있게 된 Yak-1을 거친 후에는 P-39로 가장 많은 전과를 거두었다. 그는 P-39로 44대의 추축군 항공기를 떨구었는데, 항공 역사책에 에어라코브라로 가장 많은 적기를 격추시킨 사나이로 기록되어 있다. 그는 대부분의 격추 기록을 2대의 미국제 전투기, 즉 P-39N-0(42-8747)과 P-39Q-15(44-2547) 2대의 에어라코브라로 이룩한 것이다. 그의 전과를 기종별로 분류해보면 다음과 같다. Bf 109 전투기 30대 [[Fw 190]] 전투기 5대 [[Bf 110]] 구축전투기 2대 [[Ju 87]] 급강하 폭격기 11대 Ju 88 폭격기 5대 [[He 111]] 폭격기 2대 [[Ju 52]] 수송기 3대 [[Fi 156]] 관측기 2대 Hs 126 정찰기 1대 레치칼로프는 자신을 수퍼 에이스로 만들어준 미국제 전투기를 아주 애용했고, 심지어 공식 석상에서도 침이 마르게 칭찬을 했을 정도였다. 전쟁이 끝나고 몇 년 후, 레치칼로프는 당 기관지와 가진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증언했는데, 그때는 이미 미국과 경쟁 구도에 들어가고 있던 시기였기에 이와 같은 발언은 바람직한 상황이 아니었다. >'''"에어라코브라는 무장의 위력과 속도, 그리고 엔진의 신뢰성이 훌륭하게 조화를 이룬 전투기였지요. 물론 우리 전투기의 성능도 빠르게 독일 공군기를 따라잡았지만, P-39Q 같은 기종은 공중전에서 필요한 균형이 잘 잡힌 전투기였어요. 특히나 내가 보기에 가장 중요한 장점은 고감도 무전기를 꼽고 싶군요. 에어라코브라에 실린 무전기는 어떤 상황에서도 편대원들과 마치 옆에서 통화하는 것처럼 서로 교신할 수 있었습니다. 편대원들은 각자 자기가 본 상황과 현재 자신이 처한 상황 등에 관해 실시간으로 정보를 나눌 수 있었고, 이걸 몬 다음부터는 우리 편대가 기습을 받는 일이 없어졌습니다. 게다가 우리 공군연구소에서는 이 전투기에 우리 조종사들의 의견을 반영해 개조를 전담하는 연구진을 편성해 그 성능은 더욱 개선되었지요."''' == 장군이 되다 == 전쟁이 끝난 후 그리고리 레치칼로프 소령은 공군에서 근무를 계속했다. [[1951년]]에 참모 과정(Военно-воздушную академию)을 이수한 이 전쟁영웅에게는 제10전투기사단의 사령관 대리라는 보직이 기다리고 있었다. [[1952년]] 6월 7일에 대령이 된 그는 제10항공사단(10-й авиационной дивизии)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레치칼로프가 장군이 된 것은 [[1955년]] 10월 26일이었다. 이듬해인 [[1956년]] 1월에 제236전투기사단(236-й истребительной авиадивизии)에서 잠시 지휘봉을 잡던 그는 11월 19일에는 극동 지구의 제146전투기사단(146-й истребительной авиадивизии)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1957년]] 12월 17일에는 극동 방공군 사령관이라는 중책이 맡겨졌고, [[1958년]] 10월 3일에는 [[중장]] 계급장으로 달고 노보로시스크 방공군(ПВО)으로 가서 직접 전투조종사들을 지도하고 가르쳤는데, 당시 37세의 레치칼로프 장군 휘하에 있던 조종사들은 가끔 실시된 지휘비행에서 젊은 조종사들을 압도하는 비행 실력을 선보였다고 증언했다. 레치칼로프 중장은 [[1959년]]에 군복을 벗고 민간인으로 돌아갔다. 2년 후인 [[1961년]]에 모스크바 대학교에 저널리즘 학부에 들어갔고 그후로는 쭉 모스크바에서 살았다. [[1990년]] 12월 22일에 노환으로 사망한 그는 자신이 어렸을 때 살던 고장 보포브쿠의 마을 묘지에 위치한 어머니 무덤 옆에 묻혔다. [include(틀:2차 세계대전/전투기 에이스 229~304위)]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