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유렴 (문서 편집) [[분류:신라의 인물]][[분류:경주 김씨]][[분류:몰년 미상]] [include(틀:역대 신라 시중)] [include(틀:고려 삼한공신)] ||<-2><#006494> {{{#fbe673 '''신라 시중'''[br] '''고려 삼한공신''' }}}[br]{{{+3 {{{#fbe673 '''김유렴 | 金裕廉''' }}} }}} || ||<#006494> {{{#fbe673 '''본관''' }}} ||<(> [[경주 김씨]](慶州 金氏) || ||<#006494> {{{#fbe673 '''이름''' }}} ||<(> 유렴(裕廉) || ||<#006494> {{{#fbe673 '''생몰연도''' }}} ||<(> 연대 미상 || ||<#006494> {{{#fbe673 '''아버지''' }}} ||<(> [[김억렴]] || ||<#006494> {{{#fbe673 '''배우자''' }}} ||<(> 미상 || ||<#006494> {{{#fbe673 '''자녀''' }}} ||미상 || [목차] [clearfix] == 개요 == [[신라]]의 인물. [[김억렴]]의 아들이다. [[경순왕]]의 당제(사촌동생)이며, 김한충(金漢忠)의 고조부이기도 하다. == 생애 == 대아찬을 지내다가 917년 8월에 [[시중]]이 되어 919년까지 지냈다. 신라가 [[견훤]]의 공격으로 황폐화되고, 930년에 [[왕건]]이 고창군에서 견훤을 물리치자 그 사실을 경순왕에게 알리면서 경순왕이 왕건을 만나기를 요청했다. 931년 봄 2월에 왕건이 금성을 방문하자 경순왕의 명으로 성문 밖에서 왕건을 맞이했으며, 경순왕이 연회에서 견훤의 공격으로 나라가 쇠퇴한 것에 대해 한탄해 주위에서 눈물을 흘리자 왕건이 경순왕을 위로하면서 김유렴은 경순왕, 태후와 함께 차등을 두어 물품을 받았다. 왕건이 수 십 일 동안 머물다가 돌아가자 김유렴은 볼모가 되어 왕건을 따라갔으며, 경순왕을 따라 고려에 귀부하면서 고려의 공신이 되었다. == 대중매체 == * 2017년도에 출간된 이양훈 작가의 소설 《전화앵》에서 신라 [[경명왕]] 때 [[현승(신라)|현승]]이 평등 국가를 내걸고 반란을 일으키자 김유렴은 [[골품제]]를 폐지하면 현승의 무리가 무너질 것이라 주장한다. 하지만 자신의 특권을 놓지 않으려는 귀족들의 맹렬한 반대에 부딪쳐 묵살된다. 이후 왕건의 쿠데타 소식을 듣고 신라 조정에서 [[대신#大臣|대신]]들과 이야기할 때 왕건이 터전인 [[송악]]으로 나라를 옮길 것이라고 말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