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내제 (문서 편집) [include(틀:구당서)] [include(틀:신당서)] ||<-2> {{{#ece5b6 '''{{{+1 당나라의 대신[br]{{{+1 來濟 | 내제}}}}}}'''}}} || || '''{{{#fff 작호}}}''' ||<(> 남양현공(南陽縣侯) || || '''{{{#fff 성}}}''' ||<(> 내(來) || || '''{{{#fff 이름}}}''' ||<(> 제(濟) || || '''{{{#fff 부친}}}''' ||<(> [[내호아]](來護兒) || || '''{{{#fff 출생}}}''' ||<(> 610년 ~ 662년 || || '''{{{#fff 출신}}}''' ||<(> 양주(揚州) 강도현(江都縣) || || '''{{{#fff 국적}}}''' ||<(> 당(唐) || [목차] [clearfix] == 개요 == [[당나라]]의 인물. == 생애 == 610년에 [[내호아]]의 아들로 태어났다. 618년 [[우문화급]]이 반란을 일으킬 때 내호아가 살해당할 때 내호는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우문화급에게 살해당하지 않을 수 있었다. 643년 태자 [[이승건]]의 사건 이후로 [[태종(당)|태종]]은 이승건의 처우에 대해서 물었는데, 내제는 위로는 어버이가 되는 것을 놓치지 않았고 아래로는 천수를 누리는 것이 최선이라고 진언하였으며, 태자 이승건이 폐태자된 뒤에 내제는 고공원외랑(考功員外郎)으로 임명되었다. 644년 내제는 태종의 태자인 진왕 이치의 사의랑(司議郎)이 되었고 숭현관(崇賢館) 직학사(直學士)를 겸임하였다. 또한 중서사인(中書舍人)으로 전임되었고 [[영호덕분]] 등과 함께 [[진서]]를 편찬하였다. 649년에 태종이 승하하고 고종이 즉위한 이후 내제는 651년에 중서시랑(中書侍郎)으로 임명되었고, 홍문관(弘文館) 학사를 겸임하였으며, 감수국사(監修國史)를 맡았다. 653년에 동중서문하삼품(同中書門下三品)이 되었다. 654년에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가 더해졌고 국사를 편찬한 공으로 남양현남(南陽縣男)으로 책봉되었고, 655년에는 중서령(中書令), 검교이부상서(檢校吏部尚書)로 승진하였다. [[고종(당)|고종]]이 [[폐후 왕씨(당고종)|황후 왕씨]]를 폐하고 소의 무씨를 신비(宸妃)로 세우려고 하자, 내제는 비의 정원을 예시로 들면서 여기에 대해 간언을 올렸다. 고종이 소의 무씨를 황후로 세우려고 하자, 내제는 저수량, 한원, [[장손무기]] 등과 함께 여기에 반대하였다. 하지만 고종은 소의 무씨를 결국 황후로 책봉하였으니 이가 바로 [[측천무후]]였다. 측천무후는 겉으로는 내제의 충성심을 칭찬했지만 속으로는 자신의 책봉을 반대한 내제 등을 미워하였다. 656년에 태자빈객(太子賓客)을 겸임하고 작위가 후로 올라갔으며 예전과 같이 중서령이 되었다. 657년에 내제는 다시 태자첨사(太子詹事)를 겸임하였다. 하지만 [[허경종]] 등이 내제가 [[한원]], [[저수량]]과 함께 붕당을 결성하여 반란을 일으키려고 했다고 무고하면서 내제는 태주(台州) 자사로 좌천되었다. 660년에 정주(庭州) 자사로 옮겼는데 662년에 돌궐(突厥)이 침입해온다. 내제는 군대를 통솔하고 돌궐을 막았다가 전사하였으며, 사후 초주(楚州) 자사로 추증되었다. [[분류:수당시대/인물]][[분류:610년 출생]][[분류:662년 사망]]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