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두혜도 (문서 편집) [include(틀:송서)] [include(틀:남사)] ||<-2> '''{{{+1 杜慧度 | 두혜도}}}''' || || '''작위''' ||용편현후(龍編縣侯) || || '''성''' ||두(杜) || || '''이름''' ||혜도(慧度) || || '''생몰''' ||374년 ~ 423년 || || '''출신''' ||교지군(交阯郡) 주원현(朱䳒縣) || || '''부친''' ||[[두원(동진)|두원]](杜瑗) || || '''국적''' ||진(晉) → 송(宋) || [목차] [clearfix] == 개요 == [[동진]] 말엽 [[송(남조)|유송]]의 관료. == 생애 == === 초기 생애 === 교지군(交阯郡) 주원현(朱䳒縣) 출신으로, [[두원(동진)|두원]]의 5남이다. 처음 교주(交州)의 주부(主簿)를 지냈고 유민독호(流民督護)를 역임했으며, 구진군(九眞郡) 태수로 옮겼다. 407년, 두원이 죽은 뒤 교주의 관리들은 두혜도에게 교주의 사무를 대행하게 했으나 두혜도는 이를 거절했다. === 노순의 난 === 411년, 사지절(使持節), 도독교주제군사(都督交州諸軍事), 광무장군(廣武將軍), 교주 자사로 제수되었다. 그런데 조서가 두혜도에게 미처 도착하기 전에 [[노순]]이 합포(合浦)를 습격하고 교주로 향하자, 두혜도는 문무관료 2천 명을 이끌고 석기(石碕)에서 노순과 교전하며 노순의 장사 손건지(孫建之)를 사로잡았다. 노순은 두혜도와의 교전에 패배했으나 아직 3천 명의 잔당이 있었고 모두 오랜 전투 경험이 있었다. 그리고 이손(李遜)의 아들들인 이혁(李弈), 이탈(李脫) 등이 이손이 두혜도의 아버지 두원에게 죽자 석기로 달아나 자신의 부하들을 거느렸다. 노순은 이혁과 이탈이 두원 부자에게 원한이 있다는 걸 알고 그들을 불러들였고, 이혁과 이탈은 노순의 휘하로 들어가 노순의 지휘를 받았다. 노순은 남진(南津)에 도착하고 성으로 입성한 뒤에 식사를 하도록 명했다. 두혜도는 집안의 사재를 부하들에게 포상하기 위한 물자로 내놓았으며, 아우인 교지군 태수 두혜기(杜慧期)와 구진군 태수 두장민(杜章民)이 수군과 보군을 통솔했고 자신은 높은 배에 올라 불화살을 쏘고 보군이 양안에서 협공하며 활을 쏘아 노순의 군선이 모두 불에 타며 군대가 무너졌고 노순은 자살했다. 두혜도는 노순의 시신, 노순의 아버지 노하(盧嘏), 노순의 두 아들, 노순의 친족인 녹사참군(錄事參軍) 완정(阮靜), 중병참군(中兵參軍) 나농부(羅農夫), 이탈 등을 참수하고 용편현후(龍編縣侯)로 책봉되어 식읍 1000호를 받았다. 노순의 반란이 평정된 뒤인 412년, 노순의 잔당이었던 유경도(劉敬道)가 항복을 청했다. 두혜도는 유경도의 항복을 받아들이고 이 사실을 광주(廣州) 자사 [[저유지]]에게 보고했으나, 저유지는 유경도가 궁벽해져서 항복했으니 유경도를 처형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두혜도는 저유지의 말을 듣고 유경도에 대해 방비하지 않았다. 유경도는 망명한 이들을 모아 구진군을 공격해 두장민을 죽였으나, 두혜도에 의해 평정되었다. 두혜도는 저유지를 분양장군(奮揚將軍)으로 강등시켜야 한다고 건의했지만 조정에서는 두혜도의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 참파와의 전쟁 === 두혜도는 이후 [[참파]]와의 전투를 벌였다. 《수경주(水經注)》에 인용된 기록인 《임읍기(林邑記)》에 의하면 두혜도는 구진에서 참파의 국왕인 범호달(范胡達)과 전투를 벌여 범호달의 두 아들을 참수하고 1백여 명을 사로잡았으며, 구진에서 여러 차례 전투를 벌이다가 물러났다고 기록되었다. 유유가 동진의 마지막 황제인 [[공제(동진)|공제]] 사마덕문으로부터 선양을 받아 제위에 오른 뒤, 두혜도는 보국장군(輔國將軍)이 되어 다시 참파 정벌을 시작했다. 두헤도는 임읍에 의해 빼앗겼던 것을을 탈환했고 임읍의 항복을 받아들인 뒤 장사 강유(江悠)를 조정으로 보내 승전보를 알렸다. === 죽음 === 두혜도는 청빈한 생활을 하고 검약을 실천했으며, 금(琴)을 잘 연주했고 노장사상을 즐겨 읽었다. 또한 음사(淫祀)를 금지하고 학교를 세웠으며, 기근이 들 때 자신의 녹봉을 나눠주어 빈민들을 구제했다. 두혜도는 집안을 다스리는 것처럼 교주를 통치했고 이로 말미암아 도적이 일어나지 않았으며, 밤에 성문을 닫을 필요가 없었고 사람들이 길에 떨어진 물건을 줍지 않을 정도였다. 두혜도는 423년에 사망하여 좌장군(左將軍)으로 추증되었다. [[분류:동진 및 오호십육국시대/인물]][[분류:송(남조)/인물]][[분류:374년 출생]][[분류:423년 사망]][[분류:경조 두씨]]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