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루돌프 딜즈 (문서 편집) [[분류:1900년 출생]][[분류:1957년 사망]][[분류:제1차 세계 대전/군인]][[분류:독일제국군/군인]][[분류:나치 독일/인물]][[분류:독일의 정치인]][[분류:나치당원]][[분류:슈츠슈타펠/인물]][[분류:바이에른 주 출신 인물]] [include(틀:역대 게슈타포 국장)] ||||<:><-3><#DD0000>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B70101 0%, #CC0000 20%, #CC0000 80%, #B70101)" '''{{{#white 게슈타포 1대 국장 겸 슈츠슈타펠 상급 지도자[br]{{{+2 루돌프 딜즈}}} [br]Rudolf Diels}}}'''}}}|| ||||<-3><#ffffff><:>{{{#!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루돌프 딜즈.jpg|width=100%]]}}} || ||||<:><#DD0000>'''{{{#white 본명}}}'''||<#ffffff>Rudolf Diels[br]루돌프 딜즈 || ||||<:><#DD0000>'''{{{#white 출생}}}'''||<#ffffff>[[1900년]] [[12월 16일]][br][[파일:독일 제국 국기.svg|width=28]] [[독일 제국]] 베르그하우젠 || ||||<:><#DD0000>'''{{{#white 사망}}}'''||<#ffffff>[[1957년]] [[11월 18일]] (56세) [br][[파일:독일 국기.svg|width=28]] [[서독]] 카체넬른보겐 || ||||<:><#DD0000>'''{{{#white 계급}}}'''||<#ffffff>[[슈츠슈타펠]] [[상급대령]] (상급지도자)|| ||||<:><#DD0000>'''{{{#white 정당}}}'''||<#ffffff>[include(틀: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DD0000>'''{{{#white 시민권}}}'''||<#ffffff>[[독일인]]|| [목차] [clearfix] == 개요 == '''루돌프 딜즈'''(Rudolf Diels) [[나치 독일]]의 정치인이자 [[게슈타포]]의 초대 국장. [[헤르만 괴링]]의 조카딸과 결혼하였고 신임을 받았다. == 초기 행적 == [[독일 제국]] 베르그하우젠에서 지주의 아들로 태어난 딜즈는 모친이 [[매춘부]]였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제국군에 종군했지만 종전 후인 [[1919년]]에 귀센 대학과 마르부르크 대학에서 법률과 의학을 공부했다. 그러나 대학 재학 중에 공부보다는 음주와 싸움, 유희에만 정신이 팔려 제대로 졸업을 하지 못해 늘 만년학생의 신분이었다. 그의 얼굴에 남겨진 상흔은 대학시절 결투에 의한 것이었다. == [[게슈타포]]의 국장 == [[1930년]]에 공산주의자 대책전문가로 프로이센 주의 내무성에 들어간 딜즈는 바로 [[프로이센]]의 고급경찰관료가 되어 공산주의자 및 나치스 등 정치적 급진활동가들을 다수 잡아들였다. [[1933년]] [[1월 30일]]에 [[나치당]] 당수이던 [[아돌프 히틀러|히틀러]]가 [[파울 폰 힌덴부르크]] [[대통령]]에 의해 수상으로 임명되자 [[헤르만 괴링]]이 프로이센 주의 내무장관으로 취임했다. 괴링은 [[1933년]] [[2월 6일]]에 딜즈의 능력을 알아보곤 그를 정치경찰부 1A과 과장으로 임명했다. [[1932년]] [[2월 27일]]에 독일국회의사당 방화사건이 일어나자 딜즈는 범인인 판데르 루베를 고문하고 28일에 4천명의 공산주의자를 잡아들였다. [[4월 26일]]에 괴링이 기초한 법률에 의해 프로이센 주의 모든 정치경찰은 프린츠 알브레히트가 8번지에 접수되었던 호텔로 이관하여 후에 [[게슈타포]]라고 약칭한 '''프로이센주 비밀경찰국(Preussisches Geheimes Staatspolizeiamt)'''이 만들어졌다. 딜즈는 이 [[게슈타포]]의 국장으로 임명되었다. [[나치당]]의 정권장악 후 바이에른 주의 경찰을 감독하던 친위대의 [[하인리히 힘러]]와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는 괴링과 딜즈가 감독하던 프로이센 주 및 베를린의 경찰도 장악하려했다. 힘러 일행은 힌덴부르크 대통령에게 딜즈 및 게슈타포에 관한 경고를 알려 대통령이 괴링에게 압력을 행사하게 했다. == 좌천과 숙청위기 == [[1933년]] [[9월]]말, 괴링은 딜즈를 게슈타포 국장에서 해임시켜 베를린 경찰의 부장관으로 좌천시켰다. 딜즈의 집이 가택수사에 들어가자 위기감을 느낀 딜즈는 잠깐 [[체코슬로바키아]]의 칼스버트로 달아났다. [[10월]]말에 다시 괴링의 부름을 받은 딜즈는 게슈타포 국장자리에 재임명되었다. 얼마 후 괴링은 돌격대에게 대항하기 위해 친위대와 화해하여 [[1934년]] [[4월 20일]]엔 [[하인리히 힘러]]를 게슈타포 국장보다 상위직인 게슈타포 감사관 및 장관의 자리를 주었다. 힘러는 취임 후 바로 딜즈를 게슈타포 국장 자리에서 해임하고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를 후임으로 앉혔다. 딜즈에겐 친위대 대령계급이 주어졌지만 그의 권한은 대폭 축소되었다. 하이드리히는 딜즈를 경계하여 [[장검의 밤]] 사건 당시 그가 작성한 숙청리스트에 딜즈의 이름을 적어놓았는데 이를 안 괴링은 명부에서 그 이름을 삭제했다. 딜즈는 괴링의 조카딸과 결혼했기 때문에 그 후에도 괴링의 후원을 받아 베를린 경찰서장 및 쾰른의 행정관 등 고관자리를 유지했다. == [[게슈타포]] 축출과 최후 == 한편 [[1940년]]대부터 딜즈는 유대인 박해와 관련된 명령은 거부했기에 게슈타포에서 축출당하고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당시 투옥되기도 했다. 그러나 괴링의 비호로 그는 곧 풀려났다. 전후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괴링의 변호측 증인으로 출석하기도 한 딜즈는 [[1950년]]부터 [[서독]]의 내무부에서 일하다가 [[1953년]]에 은퇴했다. 은퇴한 딜즈는 여가를 즐기던 도중 [[1957년]] [[11월 18일]]에 [[사냥]]을 나갔다가 사고를 당해 사망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