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루이스 잠페리니 (문서 편집) ||<-2> || || '''{{{#white 이름}}}''' || 루이스 실베 잠페리니[br]Louis Silvie Zamperini || || '''{{{#white 국적}}}''' || [include(틀:국기, 국명=미국)] || ||<|4> '''{{{#white 생몰년도}}}''' || [[1917년]] [[1월 26일]] || || [[뉴욕주]] 올리앤 || || [[2014년]] [[7월 2일]] (향년 97세) || || [[캘리포니아|캘리포니아 주]] [[로스앤젤레스]] || || '''{{{#white 신체}}}''' || 178cm, 57kg || || '''{{{#white 종목}}}''' || [[육상]] || || '''{{{#white 주종목}}}''' || 5000m || || '''{{{#white 공군 경력}}}''' || 4년([[1941년]]~[[1945년]]) || || '''{{{#white 군 복무}}}''' || [[미합중국 공군|미국 공군]] || || '''{{{#white 참여 전쟁}}}''' || [[태평양 전쟁]] || [목차] == 개요 == >나는 평생토록 항상 경주를 완주했기에 여기까지 왔고 포기하지 않았다.[* [[https://www.youtube.com/watch?v=7atDQreame4|원문]]: I'd made it this far and refused to give up because all my life I had always finished the race.] == 어린 시절 == 성씨에서 알 수 있듯 가난한 [[이탈리아계 미국인|이탈리아 이민자 집안]]의 [[차남]]으로 태어나 가난으로 어릴 적에 여러 학교를 전전하며 살았다. 영어 못하고, 체구도 작아서, 놀리는 상대 학생들을 때리고, 음주, 흡연...거칠게 살았던 중학생 잠페리니는 그를 갱생시키려던 형 피트 잠페리니(Pete Zamperini)[* 전쟁 중엔 [[미합중국 해군]]에 입대했으며 최종 계급은 [[갑판병|갑판]][[상사(계급)|상사]]([[CPO]])다.]의 노력으로 달리기 능력을 교사에게 인정받고, 15세 토렌스 고등학교 때부터 육상 선수로 본격적인 훈련을 받았다. == 육상선수 경력 == || [[파일:attachment/루이스 잠페리니/youngZamperini.jpg|width=100%]] || [[미국]]의 前 [[육상]] 선수로 [[1936 베를린 올림픽]]에 출전하여 5000m 8위를 기록했다. 육상선수로 USC에 진학을 한 그는 올림픽 선발전에서 미국 청소년 신기록으로 당당히 선발되어 [[1936 베를린 올림픽]]에 출전했다. 독일 가는 배에서 생전 처음 보는 음식(샌드위치...)이 무료라서 7일 동안 무제한으로 먹고, 살찐 탓에 메달은 못 땄지만, 만 19세 잠페리니는 훗날 세계적인 육상선수가 될 수도 있었다. == [[제2차 세계대전]] 참전 == || [[파일:attachment/루이스 잠페리니/soldierZamperini.jpg|width=100%]] || 올림픽이 끝난 후 발발한 2차대전에 [[미합중국 육군]] [[육군 항공대|항공대]]([[미합중국 공군]]의 전신)에 [[장교]]로 입대하여 [[B-24]] 폭격기 승무원(폭격수)으로 [[태평양]] 전선에서 활약했다. 그런데 실종된 아군 폭격기를 수색하던 도중, 타고 있던 폭격기가 고장나 잠페리니와 승무원들[* 잠페리니의 동료 조종사였던 중위 1명과 [[중사]] 1명.]은 [[태평양]] 한가운데에 표류하게 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중사가 사망하기도 했다. 그렇게 무려 47일간을 버티던 중 [[마셜 제도]] 부근에서 '''[[일본 해군]]에게 구조되어''' 해군 포로 수용소에 있다가 [[오오모리]]의 [[일본 육군]] 포로 수용소로 압송되었다. 인권 개념이 희박한 일제답게 잔혹한 고문과 배고픈 나날들이 이어졌고, 특히 악명 높았던 와타나베 무츠히로(渡辺 睦裕) 군조(육군 중사)의 학대까지 더해져 그 역시 앙상한 가죽만 남은 상태가 되었다. 게다가 설상가상으로 일본군의 옥쇄정책 때문에 [[도쿄]]로 또 압송돼 종전 때까지 계속 갇혀 지냈다. == 전쟁 이후 == || [[파일:attachment/루이스 잠페리니/oldZamperini.jpg|width=100%]] || 전후 고국으로 금의환향하여 많은 환대와 축복속에서 전역 후(최종 계급 [[대위]].) 수많은 강연회와 방송에 출연 하여 일약 유명인이 되었다. 한편 독실한 기독교인으로서 일본군에 대한 심한 트라우마가 있었음에도 [[1998 나가노 동계올림픽]]에 성화 봉송주자로 참가하면서 자신을 괴롭혔던 사람들을 용서하려고도 [[http://www.hankookilbo.com/v/ffe6d9d98f2647ebbea5802c8e115ba0|했었다.]] 하지만 막상 그 소식을 들은 일본군 잔당들은 끝까지 자신들의 악행을 부정하며 뻔뻔스러운 태도를 보였다고 한다. 특히 와타나베는 끝까지 그를 만나는 것을 거부했다. [[2014년]] [[7월 2일]] 운명할 때까지 나름 국가대표 육상선수 출신이었음을 증명이라도 하듯 97세라는 나이까지 장수했다. 추후 그의 일대기가 영화 [[언브로큰]]으로 제작되었으나 아쉽게도 영화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사망했다. == 참고문헌 == * [[http://en.wikipedia.org/wiki/Louis_Zamperini|영문 위키피디아]] [각주] [[분류:미국의 남자 육상 선수]][[분류:제2차 세계 대전/군인]][[분류:1917년 출생]][[분류:2014년 사망]][[분류:미국의 올림픽 육상 참가 선수]][[분류:1936 베를린 올림픽 육상 참가 선수]][[분류:올리앤 출신 인물]]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