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리 당티에르 (문서 편집) [[분류:개신교 신학자]][[분류:종교 개혁가]][[분류:1495년 출생]][[분류:1561년 사망]][[분류:프랑스의 사회운동가]][[분류:여성운동가]][[분류:아우구스티노회 수도자]] [목차] == 개요 == Marie Dentière (1495 ~ 1561) [[프랑스]]의 [[투르네]][* 현재 [[벨기에]]의 도시.] 출신의 여성 종교개혁가. 관점에 따라서는 최초의 [[페미니스트]] 격에 해당하는 인물이다. == 생애 == [[투르네]]의 [[프랑스인]]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고, 성인이 되자 [[아우구스티노회]] 수녀원에서 수도생활을 하였다. 그러던 중에, [[마르틴 루터]]가 교회와 대적할 즈음에 [[개신교]]로 개종하고 [[수녀]]로서의 직위를 포기하여 [[수도원]]을 나왔다. 그녀는 [[스트라스부르|슈트라스부르크]]로 피신하고, 그 곳에서 시몽 로베르와 혼인하여 5명의 자녀를 두었다. 마리 당티에르는 [[장 칼뱅]]이 있는 [[제네바]]로 향하였는데, 5년 후인 1533년에 시몽 로베르가 사망하였다. 마리 당티에르는 제네바에서 활동하던 중에 [[기욤 파렐]]과 함께 일하던 앙투안 프로망과 재혼하였다. 당티에르는 여성의 몸으로 선술집이나 길거리에서 설교를 하는 파격적인 행보를 보였는데, 여성의 설교를 인정하던 장 칼뱅도 공개적인 자리에서 설교를 하는 당티에르와 갈등했다고 한다. 그 외에도 당티에르는 여성들에게 차별을 극복하여 목소리를 낼 것을 주장하기도 하는 등 여러모로 파격적인 행보를 보여줬다. 그녀가 남긴 소책자 <편지>에는 그녀의 사상과 주장이 담겨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