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미법도 (문서 편집) [include(틀:세계의 섬들)] [include(틀:인천광역시의 섬)] ||<-2> '''미법도'''[br]'''彌法島'''[br] || ||<-2><:> [include(틀:지도, 장소=미법도)] || || 국가 || [[대한민국]] || || 위치 || [[인천광역시]] [[강화군]] 삼산면 미법도리 || || 면적 || 0.95km2 || [목차] == 개요 == [[인천광역시]] [[강화군]] [[석모도]]에 딸린 섬. 면적 0.95km2, 섬둘레 4.98km, 산높이는 52m이다. 섬이지만 전형적인 농어촌 마을이다. 대부분의 지역이 평지로 이루어져 논농사가 많다. 자연마을로는 미법마을이 있다. == 유래 == 옛날 서검도에서 [[한강]]하류를 통해 한양으로 가는 선박을 통제 검열하였는데 미법도부터는 검열하는 곳이 끝난다고 하여 그칠 미(彌) 자와 법 법(法) 자를 사용하여 미법리라 했다. 미법도는 "인연이 없으면 이곳에 오지 못한다"는 이야기와 "서검도를 지나면 더 이상 검열하는 곳이 없다"는 유래를 갖고 있다. == 사연이 많은 미법도 == 미법도는 섬은 작지만 위치때문에 갖가지 사연을 많이 가지고 있는 특별한 섬이다. [[조선왕조실록]] [[숙종실록]]에 미법도에 대한 기록이 하나 있다. >[[사간원]]에서 사복시(司僕寺) 서리(胥吏) 탁주한(卓柱漢)의 부정을 밝히며 처벌을 요구했다. 국가에서 필요한 말을 관리하는 관청인 사복시 관리 탁주한이 강화 미법도 둘레 8리의 목장을 폐현(廢縣)으로 문서에 올려놓고 [[세금]]을 모두 착복[* 남의 금품을 부당하게 자기 것으로 하다.]했다는 것이다. 탁주한은 [[석모도]] 목장의 세금도 착복했다. 하지만 탁주한은 처벌받지 않았는데 조정에 그를 비호하는 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강화군의 10개 섬 중 미법도는 분단의 아픔을 가장 많이 겪은 섬이 되었다. [[1953년]] [[정전 협정(6.25 전쟁)|휴전협정]]이 체결되면서 만들어진 바다의 군사분계선은 미법도가 겪어야 할 불행의 시작에 불과했다. >미법도는 [[1973년]]에 35가구 225명, 분교생 30명이 있었다. [[한국전쟁]]이 끝나면서 해상 [[군사분계선]]이 미법에 그어지게 되었다. 때문에 [[북한]]의 무장간첩이 드나들기에 용이하여 전략상 육지로 이사를 하게 했다. >[[1965년]] [[10월]] 일명 '함박도 사건'으로 주민들의 집단 납북 사건이 터졌다. >[[1976년]]부터 [[1983년]]까지 주민들이 총 다섯 차례나 간첩으로 몰렸었다. == 교통 == 강화군 본섬에서 직항하는 항로는 '''없다'''. 강화도에서 석모대교를 거쳐 석모도 하리포구까지 가야 한다. 하리포구에서 하루 세 번씩 정기여객선이 다닌다. 민통선 이북지역으로, 신분증 확인 후 입도가 가능하다. 미법도와 하리의 거리는 1.6km이며 하리 선착장에서 출항한 여객선은 10분만에 미법도에 도착한다. == 기타 == 미법도 주민들의 주업은 100% [[농업]]이다. 본래는 인근의 섬들처럼 배를 가지고 [[어업]]도 겸했지만 한국전쟁 이후 군사분계선이 생기면서 어업을 하는 데 한계와 제약이 많아서 농사를 많이 짓는다. [[고려시대]] 지어진 '미법사'라는 절이 있다.[* [[파일:미법사.png]]]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던 전적이 있다. 겨울에는 바위에서 [[굴(어패류)|굴]]을 많이 채취할 수 있고, [[5월]]이 되면 [[숭어]]와 [[새우]]가 많이 잡힌다. 미법도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과 9km 정도 떨어져 있기 때문에 [[서해 5도]]보다 북한에 더 가까운 섬이다. [[분류:인천광역시의 섬]][[분류:강화군]]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