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민치도 (문서 편집) ||<-2> [[파일:민치도.jpg|width=300px]] || || 성명 ||민치도(閔致道) || || [[본관]] ||[[여흥 민씨]] || || 생몰 ||[[1868년]] [[6월 3일]] ~ [[1921년]] [[8월 10일]] || || [[출생지]] ||[[전라남도]] [[광주광역시|광주군]] 임곡면 두동리[br](현재 [[전라남도]] [[광주광역시]] [[광산구]] 임곡면 두동리) || || 사망지 ||[[전라남도]] [[화순군]] 이양면 품명리 || || 추서 ||건국훈장 애국장 || [목차] == 개요 ==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 생애 == 민치도는 1868년 6월 3일 전라남도 광주군 임곡면 두동리에서 태어났고, 어렸을 때 화순군 이양면 품명리로 이사갔다. 그는 1907년 고종이 퇴위하고 [[정미7조약]]이 체결되면서 대한제국군이 강제 해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자제와 친척들에게 군자금 백냥을 줘서 심남일(沈南一) 의병장의 부대로 보냈다. 이후 1919년 [[3.1 운동]]이 발발한 직후 정재면(鄭載冕)[* [[독립유공자]]로 지정된 [[정재면]]과 동명이인이다.]·주창업(朱昌業) 등과 함께 국민당 및 결사대를 조직했고 [[신덕영]], [[최양옥]], 김정련(金正連) 등 대동단(大同團)단원들과 연락하여 활동했다. 그는 전라남도 화순군수와 능주, 영광 등 각 면장에게 다음과 같은 글을 보냈다. >“천만의 천군(天軍)이 습래하면 왜노(倭奴)의 충신은 왜노와 함께 학살할 터이니, 생명을 보전하려거든 속히 사직하라” 또한 정인채(鄭麟采)·양사형(梁士亨)·양회진(梁會津)·윤자삼(尹滋三)·민영동(閔泳東) 등 각 부호들에게는 다음의 글을 보내 군자금을 바칠 것을 요구했다. >“지금 광주에서 조선 독립운동을 위하여 국민당을 조직하고 수십 명의 결사대를 각 지방에 파송하였으니 군자금을 제공하여 사형을 면하라.” 또한 그는 숭일학교 선생인 김정련과 함께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군자금을 보낼 방안을 의논했다. 그러나 이 일이 경찰에 발각되면서 체포되었고, 1921년 5월 12일 징역 5년을 언도받았지만 신병으로 보석 석방되었다. 그러나 이튿날 그는 "내가 죽은 후 대한자손들아 국권을 회복하라!"라는 내용의 유서를 남기고 자결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민치도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분류:나무위키 독립운동가 프로젝트]][[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여흥 민씨]][[분류:광산구 출신 인물]][[분류:1868년 출생]][[분류:1921년 사망]][[분류:대한민국의 자살한 인물]][[분류:건국훈장 애국장]]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