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박규징 (문서 편집) || '''성명''' ||박규징(朴奎徵) || || '''호''' ||중명(重明) || || '''본관''' ||[[밀양 박씨]] || || '''생몰년월일''' ||[[1879년]] [[3월 13일]] ~ [[1947년]] [[12월 9일]] || || '''출신지''' ||[[평안북도]] [[정주시|정주군]] 마산면 옥야동[* [[밀양 박씨]]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박효근]]도 이 마을 출신이다.] || || '''사망지''' ||[[서울특별시]] || ||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 [목차] == 개요 ==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 생애 == 박규징은 [[1879년]] [[3월 13일]] [[평안북도]] [[정주군]] 마산면 옥야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5년 3월에 정주군에서 양조회사를 경영해 많은 돈을 벌면서 비밀리에 동지 수십명과 회합해 친우회(親友會)를 조직하고 부회장에 취임해 회원을 모집했다. 1919년 3월 1일 [[3.1 운동]]이 벌어지기 [[기미독립선언서]]가 친우회에 전달되자, 그는 동지들과 회동한 뒤 독립선언문을 복사하고 태극기를 제작했다. 이후 3월 31일 정주 시내 장날을 이용해 군중을 동원해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몇 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이후 1920년 5월에 상하이로 망명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국내의 실태를 파악하고 군자금을 모집하며 통신업무를 관장하는 연통제를 실시했을 때 정주군 경감에 임명되어 활동했다. 이후에는 임시정부를 따라가면서 독립운동에 가담했고, 해방 후에는 임정 요인들과 함께 서울로 귀환했다가 [[1947년]] [[12월 9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박규징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각주] [[분류:나무위키 독립운동가 프로젝트]][[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정주시 출신 인물]][[분류:1879년 출생]][[분류:1947년 사망]][[분류:건국훈장 애족장]][[분류:밀양 박씨]]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