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박영효 (문서 편집) [include(틀:조선귀족)] || '''{{{#191919,#ddd 박영효 관련 틀}}}'''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include(틀:김홍집 내각)] ---- [include(틀:갑신정변)] ---- [include(틀:역대 대한제국 궁내부대신)] ---- [include(틀:역대 대한제국 내부대신)] ---- [include(틀:조선총독부 중추원)] ---- [include(틀:동아일보 사장)] ---- [include(틀:급진개화파)] ---- }}} || ||<-2> '''{{{-2 조선 철종의 부마 }}}[br]{{{-2 대한제국 내부대신}}}[br]{{{+1 박영효}}}[br]朴泳孝 | Park Yeong-hyo'''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박영효 초상.jpg|width=100%]]}}} || ||<|2> '''이름''' ||<(> 박영효 (朴泳孝) || ||<(> 야마자키 에이하루 (山崎永春) || ||<|2> '''출생''' ||<(> [[1861년]] [[6월 12일]] || ||<(> [[경기도]] [[수원시/역사|수원]][br](현 경기도 수원시) || ||<|3> '''사망''' ||<(> [[1939년]] [[9월 21일]] (향년 78세) || ||<(> [[경성부]][br](현 서울특별시) || ||<(> [[노환]]으로 인한 사망 / [[병사]] || || '''직업''' ||<(> 정치가, 언론가, 관료 || || '''묘소''' ||<(> 경기도 남양주시 모란공원 || || '''주요 경력''' ||<(> 궁내부 대신[br][[동아일보]] 초대 사장[br]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br]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br][[일본제국]] 제국의회 [[귀족원(일본)|귀족원]] 의원 || ||<-2>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부마|위호]]''' ||<(> 금릉위(錦陵尉)[* 위호는 본관인 반남이 속한 고을인 [[나주시|나주]]의 별칭인 '금성'에서 따왔다.] || || '''호''' ||<(> 춘고(春皐)[br]현현거사(玄玄居士) || || '''본관''' ||<(> [[반남 박씨]] || || '''자''' ||<(> 자순 (子純) || || '''종교''' ||<(> [[유교]] {{{-2 ([[성리학]])}}} → [[개신교]] {{{-2 ([[감리회]])}}} || || '''가족 관계''' ||<(> [[아버지]] : 박원양^^(1804 ~ 1884)^^[br][[어머니]] : 전의 이씨[br]배우자 : [[영혜옹주]]^^(1858 ~ 1872)^^[br]슬하 2남 1녀 || || '''작위''' ||<(> [[조선귀족]] 후작 || || '''비고''' ||<(> [[친일인명사전]] 등재 ||}}}}}}}}} || [목차] [clearfix] == 개요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박영효.jpg|width=100%]]}}} || || {{{#fff '''박영효 초상'''}}}[*출처 [[https://books.google.co.kr/books/about/朝鮮貴族列傳.html?id=FDujnQEACAAJ&redir_esc=y|《조선귀족열전》]](朝鮮貴族列傳) ] || [[조선]]의 [[정치가]], [[갑신정변]]의 주역, [[개화파]] 인물, 조선의 마지막 [[부마]].[* [[덕혜옹주]]의 전 남편 [[소 다케유키|소 다케유키(宗武志)]]는 조선이 망한 뒤인 [[일제강점기]]에 [[결혼]]했던 관계로 부마에 봉해지지 않았다.][* 일설에 따르면 [[고종(대한제국)|고종]]이 박영효를 부마로 선택한 이유가 잘 생겨서라고 한다.] 1884년 [[김옥균]], [[홍영식]] 등과 함께 갑신정변을 일으켰다가 [[망명]]하였고 이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변절]]한다. 처음으로 [[태극기]]를 정식으로 사용한 사람이다.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할 때 [[김홍집]]의 명에 의해 역관 이응준이 사괘를 바탕으로 약식을 만들었고 1년 후 박영효가 3차 [[수신사]]로 파견되면서 정식 사용했다. == 생애 == 1861년 [[경기도]] [[수원시|수원]]에서 진사 출신 [[가문]]에서 [[박원양]](朴元陽)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초명은 '무량'이었다가 후에 '영효'로 [[개명]]하였다. 12세 때 조선 25대 왕 [[철종(조선)|철종]]과 [[후궁]] 숙의 범씨 사이에서 태어난 왕녀인 [[영혜옹주]]와 어린 나이에 [[결혼]]해 '금릉위'에 봉해졌으나[* 기록에 따르면 [[미소년]]이라서 왕녀와 결혼한 것이라고 한다. 나잇살이 붙기 전 찍은 [[사진]]을 보면 확실히 [[미남]]상이다.[[https://www.donga.com/news/Society/article/all/20150302/69898389/1|사진 링크]].] 3달 만에 영혜옹주가 [[사망]]하면서 홀몸이 되었다. 부마는 [[재혼]]을 못 하는 것이 법도였으므로 평생 홀아비 인생을 12살 나이에 [[예약]]한 셈.[* 조선의 실질적인 마지막 부마이기도 하다.] 이를 딱하게 여긴 [[고종(대한제국)|고종]]이 영혜옹주 하가 당시 영혜옹주를 모시러 따라온 [[궁녀]]들을 하사해 [[첩]]으로 삼도록 하였다고도 한다.[* 영혜옹주의 생모가 [[숙의 범씨]]인데 고종이 내린 궁녀도 범씨였다고 한다. 범씨가 흔한 [[성씨]]는 아니므로 기막힌 우연.] 그 뒤 여러 번 첩을 들였지만 [[불화]]설이 있다는 [[소문]]이 있으며 이 때문에 자식들을 여럿 두었고 박영효의 2남의 딸이 [[이우]]의 부인 [[박찬주(교육자)|박찬주]]다.[* 하지만 박영효의 아들은 전부 박영효보다 먼저 사망했기 때문에 박영효가 친일 부역을 해서 받은 [[후작]] 작위를 계승한 것도 박영효의 손자(차남의 아들)인 [[박찬범]]이다.] 1881년 [[의금부]] 판의금부사로 임명되었고 1882년 [[서울특별시|한성]]판윤에 임명되었는데 당시 개화 사상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처음으로 [[김옥균]]과 관계를 맺었고 [[일본]] 세력을 이용하여 [[청나라]]의 내정 간섭을 방지하는데 주력했다. [[임오군란]] 이후 1882년 8월 8일 제3차 [[수신사]] 자격으로 일본을 방문하여[* 이 때 [[태극기]]가 정식으로 사용되었다.] 선진 [[문명]]이 발달해 있는 일본의 모습을 보면서 급진 개화파에 참여했으나 온건 개화파와의 주도권 싸움에서 밀리고 1884년 [[갑신정변]]을 통해서 우정국 개국 축하연에 참석한 민씨 일가 사람인 [[민영익]]에게 중상을 입히는 [[정권]] 탈취를 시도하였다. 그 후 갑신정변 주동자로 지목되어 김옥균 등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하였으며 주동자 중 1명이었던 형 [[박영교]]는 청나라군에 의해 사살되었고 공조판서였던 아버지 박원양은 10살된 어린 손자를 죽이고 [[자살]]했다. [* 전제[[정치]]하에서 이들의 행위는 명백히 [[반역]]으로 인식되었고 집안에서 [[역적]]이 나올시 심한 경우에는 그런 사람의 이름을 아예 [[족보]]에서 빼버리거나 [[항렬]]자를 바꾸기도 했는데 갑신정변 주동자들도 예외가 아니어서 김옥균([[안동 김씨]])의 '균(均)'자 항렬은 '규(圭)', 홍영식([[남양 홍씨]])의 '식(植)'자 항렬은 '표(杓)', [[서광범]]([[대구 서씨]])의 '광(光)'자 항렬은 '병(丙)', [[서재필]](대구 서씨)의 '재(載)'자 항렬은 '정(廷)'으로 각각 바뀌게 된다. 그래서 한동안 박영효의 집안 [[반남 박씨]]에서도 '영(泳)'을 '승(勝)'으로 바꾸었다는 근거없는 [[풍문]]이 돌았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박영효는 반남 박씨 중 '오창공파'로 다른 반남 박씨 파와 다르게 '오창공파'는 원래 항렬자가 '승'이 아니라 '영'을 썼으며 갑신정변 이후에도 '영'자 항렬을 썼다. 무엇보다 갑신정변이 일어나기 59년 전에 [[출간]]된 반남 박씨 족보 <을유보(乙酉譜, 1825년 발행)>에 이미 '승(勝)'자 항렬이 정해져 적혀 있었다.] 일본에서 망명하면서 수 차례 [[자객]]에게 살해당할 위협에 시달린다. 그 와중에 같은 망명자 김옥균과는 사이가 나빠져서 "옥균이 쟤가 갑신정변에 뭐 한 거 있나? 나랑 [[홍영식]]이 다 했지..."라고 [[디스]]를 날리기도 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애초부터 일본에 자리를 잡아서 나름 [[인기]]를 누리며 잘 살던[* [[일본 정부]]로부터는 버림을 받았지만 김옥균을 높이 평가했던 [[후쿠자와 유키치]], [[도야마 미쓰루]], [[이타가키 다이스케]], [[고토 쇼지로]] 등이 지원을 해줬다.] 김옥균과는 달리 [[서재필]], [[서광범]]과 함께 [[미국]]으로 갔다가 김옥균처럼 그들보다 미국 환경에 적응을 못하였고 다시 일본으로 귀국하였다. 일본에서의 생활은 본인 주장에 따르면 [[금욕]]적이었던 것으로 보이고 초기 개화파에게 영향을 준 인물인 [[오쿠무라 엔신]]의 여동생 [[오쿠무라 이오코]]와 얽히는 관계로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6311524|어떤 소설에서는 옳다꾸나 하고 야설을 써놨지만]][* 저 책의 저자인 [[신봉승]]이 대본을 쓴 <[[찬란한 여명]]>에서도 그렇게 묘사된다. <찬란한 여명>에서 박영효 역은 [[이민우(배우)|이민우]], 오쿠무라 이오코 역은 [[송윤아]]였다.] 둘이 그렇고 그런 사이였다는 근거는 없다. 이 때 [[이름]]을 야마자키 에이하루(山崎永春)로 [[창씨개명]]을 했다고 알려져 있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사면되어 일본의 의도에 따라서 조선으로 귀국한다. 이후 대표적인 친일 인사로 분류되면서 제2차 [[김홍집]]-박영효 연립 [[내각]]을 구성하였으며 같은 급진 개화파 동지인 [[서광범]]과 협력해서 김홍집을 [[바지사장]] 수준으로 내려버리는 등 정국의 주도권을 잡았다. 하지만 [[삼국간섭]] 이후 정국 주도권을 상실하였고 당시 친러 [[정책]]으로 가던 내각의 흐름을 친일 내각으로 되돌리고자 [[왕비]] 암살을 모의하다가 걸린다. 당시에 모든 사람들이 이 사건이 [[유길준]]이 밀고했다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사실이 아니다. 이에 일본으로 2차 망명을 가는데 심지어 그런 후에 [[을미사변]]의 배후 조종 혐의까지 받았는데 일본 사람들에게 "[[우범선]]을 쓸만하다"고 추천했다거나 하는 정황이 포착되지만 정말 [[명성황후]]를 죽이자고 가담했는지는 알 수 없고 이 일로 [[고종(대한제국)|고종]]의 원한을 단단히 산다. 이후 조직된 [[독립협회]]의 [[중추원(대한제국)|중추원]]에서 박영효를 의원[* [[대통령]] 추대설과는 달리 진짜로 독립협회는 박영효를 대신으로 추대했다.) 물론 이 때 박영효는 [[반역]]자로 단단히 [[낙인]]찍힌 상태였고 이는 독립협회의 몰락을 불러왔다.]이나 심지어 대통령으로 추대한다는 얘기까지 나왔을 정도. 1900년에는 [[윤치호]] 등과 연통해서 [[쿠데타]]를 일으켜서 고종을 몰아내고 [[의화군]]을 추대하려는 시도를 벌이기도 하였으나 밀정을 조선으로 보냈던 것이 들통나면서 궐석 [[재판(법률)|재판]]에서 [[교수형]]이 선고되는 등 [[황실]]과는 돌이킬 수 없는 사이가 되는 듯 했다. 이후 1907년 [[헤이그 특사]] 사건[* [[국제]] 사회에서 고종으로부터의 [[을사조약]] 무효 선언 거사] 때문에 [[일본 정부]]에게서 고종이 퇴위당한 뒤 [[순종(대한제국)|순종]]의 즉위 시기에 몰래 밀입국하였고 그 상황에서 먼 [[친척]] 뻘인 [[박제순]]이나 일본 고문 가토 등과 연통해서 자신에 대한 사면령을 받아내고는 정식으로 귀국한 것처럼 행세했다. 이후로 [[을사조약]]의 주범인 [[이완용]] 내각의 궁내부 대신으로 들어갔으나 고종의 [[양위]]에 개입한 대신들을 [[암살]] 미수한 혐의[* 사실 별로 근거는 없고 이완용과의 [[정권]] 다툼에서 밀린 것으로 추정된다. 이완용은 박영효가 고종의 양위를 기뻐하지 않았으니 역적이라고 불렀고 박영효는 이완용이 역적이라고 했을 뿐 죄가 없다고 맞섰다. 이 때 박영효가 [[구속]]되었을 때 [[배탈]]이 나서 고생한다는 소식을 들은 [[이토 히로부미]]가 [[약]]을 권했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딱히 이완용과 박영효 사이에 차별성은 찾기 어렵다.]로 [[제주도]]에 유배되었다. 이후 [[유배]]가 해제되었으나 상경은 금지되어 있었는데 이 때도 다시 자신의 특기를 살려서 몰래 상륙을 하려다가 실패하였고 결국 [[경술국치]]를 [[경상남도]] [[창원시|마산]]에서 맞이한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cab72e5e02a91e2e78c0dceb6706aab.jpg|width=100%]]}}} || || [[동아일보|{{{#fff '''동아일보 사장 시절 모습'''}}}]] ||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조선총독부]]로부터 후작 작위를 받았으며 1918년 [[조선식산은행]] 이사에 취임하였다. 1919년 인촌 [[김성수(1891)|김성수]] 등과 함께 [[경방|경성방직]] 창립에 기여해 1935년까지 초대 사장을 지냈다. 1920년 4월 <[[동아일보]]> 창간과 함께 초대 사장이 되었으나 1920년 [[평양시|평양]]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 소요 사건을 <동아일보>가 게재했다는 이유로 조선총독부로부터 정간 조치를 당하자 사임하였고 1922년 [[경희궁]] 내 전각인 [[황학정]]을 철거해 등과정 터로 옮기는데 앞장섰으며 1926년 조선총독부의 자문격인 중추원 의장이 되었다. 1932년 일본 [[귀족원(일본)|귀족원]]으로부터 의원직을 맡아 귀족원 의원이 되었고 1932년 [[조선방송협회]] 초대 부총재도 맡았다.(총재는 없었다.) 1939년 중추원 부의장이 되었다가 임기 중이던 1939년 9월 21일 향년 78세에 [[노환]]으로 죽었으며 작위는 손자 박찬범이 계승했다. 죽은 뒤 고작 3개월 동안 [[부부]]였으나 평생 정실 부인이었던 영혜옹주의 곁에 묻혔는데 후에 [[후손]]들이 화장하였다고 한다. 부산 다대포 (현재 지하철1호선 다대포항역 옆 라파요양병원자리)에 명당이 있다고 추천받아 그곳에 처음 운구하여 매장하였으나 이후 자손이 사업실패로 묘소를 팔고 경기도로 이장함.[[http://www.yangsanilbo.com/news/articleView.html?idxno=51607 |#]] == 여담 == * 1919년 3월 [[대한국민의회]]의 [[부통령]]으로 거론되었다는 풍문이 있었으나 사실이 아니다. 1980년대부터 대통령제 임시정부가 조직된 적이 없다는 연구가 축적되어 학계에서도 공인됐지만 인터넷에는 잘못된 정보가 떠돌아다니는 형편이다. * 1962년 [[대한민국 정부]]에서 독립 유공자 서훈 및 훈장 포상자 대상으로 지정되기도 하였으나 애국 단체 등에서 후반에 친일 행적 등을 문제삼았고 역사 [[고증]]에서도 친일 행위가 드러나면서 서훈 및 훈장 포상자 대상에서 제외되었으며 [[친일인명사전]]에도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 중 이름이 올려지기도 하였고 친일 반민족 행위자 704인 명단에도 당연히 포함되었다. * 서울 [[남산골한옥마을]]에 박영효의 가옥이 있는데[* 남산한옥마을 최중심부에 자리하고 있으며, 대청이 널찍한데다 표지판도 있으므로 찾기는 쉽다. 원래부터 이곳에 있던 집이 아니라 해방 후 옮겨온 것으로, 목재 구조인 한옥은 현대식 콘크리트 구조물에 비하면, 집 전체를 뜯어다 새로 조립하기 수월하기에 가능했다.] 일각에서는 박영효의 친일 행각 등을 거론하며 [[친일파]] 가옥 철거를 요구하기도 하였다. * 갑신정변 직전에 박영효가 선발한 일본 유학 장학생들 중에 [[안중근]] 의사의 부친인 안태훈 진사가 있었다. 갑신정변 실패로 그 일본 유학 프로그램도 무산되었다. == 대중매체에서 == === [[영화]] === * 1932년 개봉한 영화 <개화당이문>에서는 [[나운규]] 감독이 직접 연기했다. * 1973년 개봉한 영화 <[[삼일천하(영화)|삼일천하]]>에서는 배우 [[남궁원]]이 연기했다. === [[드라마]] === * 1981년 KBS2 [[TV문학관]] <횃불>에서는 배우 백준기가 연기했다. * 1982년 [[KBS 대하드라마]] <[[풍운(KBS)|풍운]]>에서는 배우 [[정동환]]이 연기했으나 10월 말부터 임성원으로 교체됐다. * 1982년 [[MBC]] 한미수교 100주년 특집드라마 <한미백년>에서는 배우 [[김동현(1950)|김동현]]이 연기했다. * 1984년 [[KBS]] 대하드라마 <[[독립문(드라마)|독립문]]>에서는 배우 [[민지환]]이 연기했다. * 1990년 [[MBC]] 드라마 <[[조선왕조 오백년]]> 대원군 편에서는 배우 [[임영규]]가 연기했다. * 1994년 11월 26일자 KBS1 <역사의 라이벌>에서는 배우 [[김성찬(배우)|김성찬]]이 연기했다. * 1995년 [[KBS]] 대하드라마 <[[찬란한 여명]]>에서는 배우 [[이민우(배우)|이민우]]가 연기했다. * 2001년 [[KBS]] 특별기획 드라마 <[[명성황후(드라마)|명성황후]]>에서는 배우 차철순이 연기했다. * 2014년 [[KBS]] 특별기획 드라마 <[[조선 총잡이]]>에서는 배우 [[지승현]]이 연기했다. [각주] [[분류:급진개화파]][[분류:조선의 부마]][[분류:조선의 관리]][[분류:조선귀족 후작]][[분류:수원시 출신 인물]][[분류:반남 박씨]][[분류:김홍집 내각]][[분류:1861년 출생]][[분류:1939년 사망]][[분류:동아일보 관련 인물]][[분류:모란공원 안장자]][[분류:일본 제국의 귀족원 의원]][[분류:정2위]]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