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박이도 (문서 편집) [[분류:나무위키 독립운동가 프로젝트]][[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일제강점기의 개신교 신자]][[분류:서흥군 출신 인물]][[분류:1876년 출생]][[분류:몰년 미상]][[분류:대통령표창(독립유공자)]] || 성명 ||박이도(朴履道) || || 생몰 ||[[1876년]] ~ ? || || [[출생지]] ||[[황해도]] [[서흥군]] 도면 두의리 || || 사망지 ||미상 || || 추서 ||대통령표창 || [목차] == 개요 == 한국의 [[독립운동가]]. 200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다. == 생애 == 박이도는 1876년생이며 황해도 서흥군 도면 두의리 출신이다. 그는 개신교 신자로, 1919년 3월 초 개신교 전교사 김성항(金成恒)이 평양에서 독립선언서 10여 장을 받아서 가지고 오자, 동지들과 3월 10일 오전에 능리 장터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이 계획은 일제 헌병대에게 탄로났고, 3월 9일 저녁 주도자 2명이 체포되었고 일본 헌병대가 교회 앞에 배치되면서 시위를 벌이는 게 여의치 않아졌다. 그는 이런 상황에서도 교인들을 이끌고 교회 앞에서 능리로 진출하려다가 서흥헌병주재소의 헌병에게 체포되었다. 하지만 3월 10일 오후 4시 경에 능리 장터에서 200명의 군중이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할 수 있었다. 이후 그는 1919년 5월 16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았고, 1919년 6월 19일 고등법원에서 상고 기각되어 그 형이 확정되었다. 이후의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7년 박이도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