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발데마르 페겔라인 (문서 편집) [include(틀:회원수정2)] [[파일:발데마르 페겔라인.jpg]] '''발데마르 페겔라인''' (Waldemar Fegelein) ([[1912년]] [[1월 9일]] 출생 - [[2000년]] [[11월 20일]] 사망) [목차] == 개요 == [[나치 독일]]의 사병 조직인 [[무장친위대]]의 장교.(최종 계급은 [[대령]].) == 생애 == 독일 안스바흐에서 승마학교를 운영하던 아버지 한스 페겔라인의 차남으로 태어난 발데마르 페겔라인은 대학에서 수의학을 공부하다가 1933년 6월부터 1935년 8월까지 돌격대에 참가했다. 1935년 9월에 친위대에 입대한 그는 1936년 10월부터 형인 [[헤르만 페겔라인]]이 교장으로 일한 뮌헨의 친위대 승마학교에서 근무했다. 두 형제는 모두 승마로 명성이 높았기에 승마뱃지 금장을 타기도 했다. 1939년에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할 당시 친위대 대위였던 발데마르는 형인 헤르만이 지휘하던 제1 토텐코프 기병연대에서 종군했다. 1941년 6월부터 시작된 [[독소전쟁]]에도 종군하여 1941년 7월에 1급 철십자 훈장, 1941년 10월엔 일반 돌격훈장을 받았다. 1941년 12월에 친위대 작전본부로 이동한 발데마르는 1942년 4월에 6부(기마 및 수송차량) 부장으로 취임했다. 1942년 4월 20일에 예비역 친위대 소령으로 승진한 그는 1943년 6월 초에 전장으로 복귀하여 제8 SS기병사단 <플로리안 가이어>예하의 제2 SS기병사단의 대대장이 되었다. 1943년 12월에 기사 철십자 훈장을 수상한 발데마르는 1944년 1월 30일에 예비역 친위대 중령으로 승진했다. 1944년 4월에 친위대 작전본부 제6부로 돌아온 발데마르는 12월에 친위대 대령으로 진급한 후 1945년 2월 후반에 새로 편성된 제37 SS의용기병사단의 사단장이 되었지만 1945년 3월에 교체된 후 패전시 미군의 포로가 되었다. 별다른 전범 행위가 입증되지 않아 곧 석방된 후, 이름을 악셀 페겔라인으로 바꾸고 베를린에서 살다가 2000년에 사망했다. 1990년에 향년 66세로 먼저 죽은 아내 아넬리제와 합장되었다. 형 헤르만은 슬하에 딸만 한 명을 두었으나 남자친구가 교통사고로 사망하면서 실의에 빠져 향년 16세로 자살했으며, 발데마르도 자녀 없이 사망해서 페겔라인 가족의 가계는 완전히 단절되었다. == 기타 == [youtube(ydOSvRWrNuc)] [[가브리엘(인터넷 방송인)|가브리엘]]의 영상에 나온 그와 매우 닮은 2차대전 독일군이 이 작자가 아니었을까 하는 추측이 있었다. 하지만 사진이 찍힐 당시에 페겔라인은 무장친위대 장교였는데, 사진 속에 보이는 인물은 SS도 아니고 육군 그것도 병 피복을 입고 있으니 그냥 다른 사람으로 보인다. [[분류:1912년 출생]][[분류:2000년 사망]][[분류:나치당원]][[분류:슈투름압타일룽/인물]][[분류:친위대(나치 독일)/인물]][[분류:제2차 세계 대전/군인]][[분류:안스바흐 출신 인물]]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