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법흥왕 (문서 편집) [include(틀:역대 신라 국왕)]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3A2646, #4a2d5b 20%, #4a2d5b 80%, #3A2646)" {{{#FBE673 '''법흥왕 관련 틀'''}}}}}}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include(틀:신라의 왕자/혁거세 거서간 ~ 문흥왕)] ---- [include(틀:성골)] ---- }}}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3A2646 0%, #4A2D5B 20%, #4A2D5B 80%, #3A2646); color: #fbe673" '''신라 제23대 국왕[br]{{{+1 법흥왕 | 法興王}}}'''}}} || ||<-2>{{{#!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tong.visitkorea.or.kr/1616831_image2_1.jpg|width=100%]]}}} || ||<-2> {{{#fbe673 {{{-2 법흥왕릉 전경.}}} }}} || ||<|2> '''출생[br]{{{-3 (음력)}}}''' ||[[480년대]] 후반 ~ [[500년대]] 추정[* [[지증왕]]이 왕후 [[연제부인]]과 혼인한 해가 [[500년]]이고, 동생인 [[입종 갈문왕]]이 존재한다는 것을 감안하면 500년대 초반쯤에 출생했을 가능성이 있다. 다만 이렇게 된다면 법흥왕의 나이가 즉위시 지나치게 어리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그래서 어머니 연제부인과 아버지 지증왕의 혼인 시기는 실제보다는 더 앞당겨져 있었을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대체로 추정해본다면 박씨 가문과 연계되어 있는 신궁이 지어진 487년 즈음으로 추정해볼 수 있다. 그렇다면 법흥왕의 출생도 그 즈음으로 볼 수 있으며 무엇보다도 즉위 이후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며 각종 왕권 강화에 나서기에는 나이상 적당하다.] || ||[[사로국]] [[서라벌]] 탁부[* [[울진 봉평리 신라비]]에서 “탁부 모즉지 매금왕”으로 등장하는데 여기서 법흥왕이 탁부에서 태어난 것으로 확인되었다.[[https://db.history.go.kr/item/level.do?sort=levelId&dir=ASC&start=1&limit=50&page=1&pre_page=1&setId=-1&totalCount=0&prevPage=0&prevLimit=&itemId=gskh&types=&synonym=off&chinessChar=on&brokerPagingInfo=&levelId=gskh_003_0010_0110_0010&position=-1|#]]] || ||<|2> '''사망[br]{{{-3 (음력)}}}''' ||[[540년]] [[7월]] (향년 30-50대 추정)|| ||[[신라]] [[서라벌|금성]] || || '''능묘''' ||애공사 북봉(哀公寺 北峯) [[법흥왕릉]] || ||<|2> '''재위기간[br]{{{-3 (음력)}}}''' ||'''{{{#fbe673 제23대 국왕}}}'''|| ||[[514년]] ~ [[540년]] [[7월]] {{{-2 (26년)}}} || ||<-2>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본관''' ||[[경주 김씨]][br]~~모(牟), 무(另), 모(募)~~[* 《양서》 〈신라전〉에는 '모진(募秦)'으로(이후 《책부원귀》를 거쳐 《[[삼국사기]]》에 인용됨), 봉평신라비와 천전리에는 '모/무즉지'로 등장한다. [[흉노족 신라왕족설]]을 주장하는 사람들 중 일부는 이를 두고 경주 김씨 왕실과 [[모용선비]]와의 연관성을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현재 학계의 통설은 '''이때는 신라에 중국식의 성씨가 없었으며, 모진과 모즉지 모두 이름'''이라는 것이다. 성씨의 기본적인 역할이 가족 혹은 씨족 집단의 지표인데도, 당대 금석문을 기준으로 살펴볼 경우, 부자 관계인 '[[지증왕|지도로 갈문왕]]'과 형제 관계인 [[입종갈문왕|사부지 갈문왕]] 및 그 자식인 [[진흥왕|삼맥종]](심맥부지)에게 '김', '모', '무', '삼' 등 법흥왕과 같은 성씨로 볼 수 있는 요소가 전혀 나타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재 신라에서 성씨를 사용한 최초의 인물은 왕위에 즉위한 이후의 [[진흥왕]]이라고 본다.] || || '''휘''' ||모태(募泰), 모진(募秦), 모즉(牟卽), 무즉(另卽)[br]좌리지(佐利遲)[* 《[[일본서기]]》에만 나오는 법흥왕의 다른 이름 또는 호칭으로, 근원 또는 근본을 뜻하는 ᄎᆞᆶ(중세형 cholh)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고대 일본어는 ㅊ 음가가 존재하지 않았기에 그와 비슷한 ㅅ으로 표기하였다. 맨 마지막에 있는 遲는 존칭어미 智와 같은 것이다. 현대 한국어로 치환하면 '찰지'쯤이 될 것이다.][br]원종(原宗) || || '''부모''' ||부왕 [[지증왕]][br]모후 [[연제부인]] 박씨 || || '''형제자매''' ||남동생 [[입종갈문왕|김입종]][br]여동생 어사추(?)[* 학자마다 해석이 다르다. [[울주 천전리 암각화]] 항목 참조.] || || '''왕후''' ||[[보도부인]] 박씨 || || '''왕녀''' ||[[지소태후|지소부인]] || || '''종교''' ||[[불교]] || || '''신장''' ||172cm[* 《[[해동고승전]]》과 《삼국사기》에 [[https://db.history.go.kr/item/level.do?sort=levelId&dir=ASC&start=1&limit=20&page=1&pre_page=1&setId=-1&totalCount=0&prevPage=0&prevLimit=&itemId=sg&types=&synonym=off&chinessChar=on&brokerPagingInfo=&levelId=sg_004r_0030_0010&position=-1|7척]]이라 나온다.[[https://db.history.go.kr/item/level.do?sort=levelId&dir=ASC&start=1&limit=20&page=1&pre_page=1&setId=10&totalCount=10&prevPage=0&prevLimit=&itemId=hg&types=r&synonym=off&chinessChar=on&brokerPagingInfo=&levelId=hg_001r_0100_0010&position=-1|#]] 다른 각주에도 서술하지만 현재의 척은 일본이 개항 이후 피트를 척으로 번역한 것이 넘어온 것이다. 통일신라 이전에 사용된 신라 척단위인 남조척의 [[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204641|24.5cm]]를 기준으로 한 것.] || || '''자''' ||법공(法空)[* 《[[https://db.history.go.kr/item/level.do?sort=levelId&dir=ASC&start=1&limit=20&page=1&pre_page=1&setId=10&totalCount=10&prevPage=0&prevLimit=&itemId=hg&types=r&synonym=off&chinessChar=on&brokerPagingInfo=&levelId=hg_001r_0100_0040&position=-1|해동고승전]]》 기록.] || || '''법명''' ||법운(法雲)[* 《[[https://db.history.go.kr/item/level.do?sort=levelId&dir=ASC&start=1&limit=20&page=1&pre_page=1&setId=10&totalCount=10&prevPage=0&prevLimit=&itemId=hg&types=r&synonym=off&chinessChar=on&brokerPagingInfo=&levelId=hg_001r_0100_0040&position=-1|해동고승전]]》 기록.] || || '''시호''' ||'''법흥대왕(法興大王)'''[* 《[[https://db.history.go.kr/item/level.do?sort=levelId&dir=ASC&start=1&limit=20&page=1&pre_page=1&setId=3&totalCount=3&prevPage=0&prevLimit=&itemId=sy&types=r&synonym=off&chinessChar=on&brokerPagingInfo=&levelId=sy_003r_0010_0040_0010&position=1|삼국유사]]》 기록.] || ||<|5> '''존호''' ||모즉지 매금왕(牟卽智 寐錦王)[* [[울진 봉평리 신라비]]에 등장. [[https://db.history.go.kr/item/level.do?sort=levelId&dir=ASC&start=1&limit=50&page=1&pre_page=1&setId=-1&totalCount=0&prevPage=0&prevLimit=&itemId=gskh&types=&synonym=off&chinessChar=on&brokerPagingInfo=&levelId=gskh_003_0010_0110_0030&position=-1|#]]] || ||무즉지태왕(另卽智太王)[* [[울주 천전리 각석]] 추명(追銘)에 등장. 另의 발음은 '영'이나, 진흥왕 순수비에서 '무력지'(武力智)로 나오는 인물이 다른 순수비에서는 另力智로 나온다는 사실로 볼 때 당시 신라에서 另이 '무'로도 읽혔으며, 另卽智는 '영즉지'보다는 '무즉지'일 가능성이 더 크다.] || ||성법흥대왕(聖法興大王)[* [[울주 천전리 서석]]에 등장.] || ||대성법왕(大聖法王)[* 《삼국유사》에서 인용한 향전(鄕傳, 중국 기록이 아닌 이 땅에서 전래되어 내려온 기록을 말한다.)에서 등장한 이름. [[이차돈]]이 처형을 당하기 전 한 말에서 법흥왕을 '대성법왕'이라 부르고 있다.] || ||모태왕(募泰王)[* 《양직공도》에 양 무제 보통(普通) 2년(521)에 신라 왕 모태(募泰)가 처음으로 백제 사신편에 붙어 사신을 보내 표(表)를 올리고 방물(方物. 특산품)을 바쳤음이 기록됨.] || || '''연호''' ||[[건원#s-2|건원]](建元, [[536년]] ~ [[540년]]) || || '''골품''' ||[[성골]](聖骨) ||}}}}}}}}}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울진 봉평 신라비 문화재청.jpg|width=100%]]}}} || || {{{#FBE673 '''[[울진 봉평리 신라비|{{{#fbe673 울진 봉평리 신라비}}}]]'''}}} || [목차] [clearfix] == 개요 == [[신라]]의 제23대 [[임금]]. [[연호]]는 건원(建元). == 호칭 == '''매금'''(寐錦)이라는 단어는 〈[[광개토대왕릉비]]〉, 〈[[충주 고구려비]]〉, 《[[일본서기]]》, 〈[[울진 봉평리 신라비]]〉에 등장하는 [[군주]]의 칭호다. 광개토대왕릉비에는 >"신라의 매금이 직접 와 [[조공]]을 바쳤다." 라는 기록이 등장하며, 중원 고구려비에는 매금이라는 단어가 무려 6번이나 나온다. 주로 고구려, [[일본]] 등 [[외국]] 기록에서 매금이라는 단어가 나오기 때문에 매금의 의미에 대해 "신라의 왕명이다", "신라 밖에서 신라의 왕을 얕잡아 부르는 말이다" 등의 의견이 갈리었으나, 1988년 1월 발견된 울진 봉평리 신라비에 >"갑진년([[524년]]) 정월 15일, 탁부(啄部)의 모즉지 매금왕(牟卽智 寐錦王)" 이라는 비문이 등장함에 따라 법흥왕 때까지 신라 스스로 사용한 칭호임이 밝혀졌다. 매금이 [[마립간]]의 동일 명칭이라면 지증왕 대에 칭호를 [[중국]]식 명칭인 [[왕]]으로 이미 통일했음에도 불구하고 법흥왕 대까지는 '매금(마립간) + 왕'이라고 합쳐 쓴 것이라 볼 수도 있다. == 생애 == === 즉위 전 === 법흥왕은 이미 아버지 [[지증왕]] 시절부터 어느 정도 영향력을 행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소지 마립간]]이 40세 전후하여 승하한 것에 비해 그의 뒤를 잇는 지증왕의 즉위시 나이가 64세로 고령이었다는 점에다 인척 관계로 보면 그리 가깝지 않았다는 점을 본다면 지증왕에 있어서는 석연치 않은 [[왕위]] 계승이 있었음이 분명해 보인다.[* 특히 소지 마립간이 벽화를 경주로 불러들여 그녀가 아이를 임신하게 된 시점이 어림잡아도 500년 9월의 일인데, 두 달 뒤 곧바로 승하한다. 왕위 계승 과정이 석연치 않은 게 확실한 셈.] 그러나 지증왕과 연제부인의 혼인 시기가 [[500년]]이라는 것을 생각해본다면 법흥왕은 지증왕이 60세에 접어들 때에 낳은 아들이 되는데, 법흥왕은 즉위 시 16세를 넘을 수 없는 나이여야 한다. 지증왕이 그 이전에 혼인을 안 했을 리가 없고 그 전에 자식이 없을 리도 없다.[* 이 때문에 연제부인이 법흥왕의 친어머니가 아닐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http://contents.history.go.kr/mobile/kc/view.do?levelId=kc_n101720&code=kc_age_10|#]]] 그럼에도 법흥왕은 장남으로 기록되어 있고 이후 왕위에 올랐을 때 막강한 권한을 행사한다. 그래서 대체로 법흥왕의 위치는 자신의 어머니에게서 영향력을 볼 수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니면 [[지증왕]]과 [[연제부인]]의 실제 혼인 시기는 기록과 달리 500년 이전이었는데, 지증왕의 즉위 과정을 조금 더 자연스럽게 연출하기 위해 지증왕 즉위 이후의 일로 기록했을 가능성도 있다. 실제로 487년 박씨 가문과 연계되는 신궁을 설치했던 일에 지증왕이 어느 정도 관여했었다면, 이 즈음에 지증왕과 연제부인이 이어졌을 가능성이 엿보인다. 그렇다면 법흥왕의 즉위 시 나이도 10대 후반이 아닌 20대~30대 사이가 되기 때문에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기에는 충분한 나이가 된다. 법흥왕의 어머니 [[연제부인]]은 성씨가 박씨다. [[눌지 마립간]]의 자손들은 대체적으로 눌지 형제의 자손들을 [[왕비]]로 맞아들였는데, 역시 눌지 형제의 자손에 속하는 지증왕의 부인이 박씨라는 점은 당시 여러 체계에서 꽤나 벗어난 경우가 된다. 하지만 지증왕이 [[김미사흔]]계에 밀리고 있었던 [[김복호|복호]]계의 위치에서 생각해 볼 때, 다른 왕비족을 맞아들여서 영향력 강화에 나섰다고 한다면 어느 정도 생각해 볼 수 있는 가정이 된다. 실제로 연제부인은 신라 왕비로는 꽤나 특이하게 전설을 남기고 있다. 또한 법흥왕, [[진흥왕]], [[진지왕]]의 부인이 모두 박씨라는 점을 감안해본다면 복호계와 박씨의 [[연합]]은 충분히 유추해볼 수 있겠다. 이러한 과정들을 거쳐 법흥왕은 아버지의 나이가 70세를 바라보는 시점에 접어들면서 외가인 박씨 집안의 도움을 받으며 본격적으로 본인의 입지를 다졌을 가능성이 높고 자신의 동생인 [[입종갈문왕|김입종]]과 함께 [[왕권]] 강화에 어느 정도 나섰을 가능성이 높다. 당장에 김입종은 법흥왕 대에 신라 6부 중 한 부의 수장으로 올라가게 된다. === 율령 반포와 관리의 공복 제정 === 520년 1월 [[율령]]을 반포하고[* 율령 반포 기록에 대해 [[일제강점기]] 일본 [[학자]]들부터 시작해 오랫동안 신빙성을 의심받기도 했었는데, 524년에 새겨지고 1988년 발견된 [[울진 봉평리 신라비]]의 내용을 통해 이 시기에 성문화된 [[법률]]을 통한 체계적인 지배가 이루어졌다는 것이 재확인되었다. 또한 [[지증왕]] 때인 503년에 세워진 [[포항 냉수리 신라비]]와 율령이 반포된 520년 이후인 524년에 세워진 [[울진 봉평리 신라비]]에서의 [[관등]] 기록 차이에서 520년 율령 반포를 통한 17관등의 완성 여부를 확인할 수 있다.] [[유리 이사금]] 때 6부에 17관등을 처음 둔 이래 율령으로써 17관등에 대한 정비를 완료하였고, 신라 [[역사]]상 처음으로 붉은색과 자주색으로 [[관리]]의 공복을 제정하여 [[골품제]]를 확립시켰다. 521년에는 [[나제동맹]] 동맹국인 [[백제]]와 함께 중국 [[양(남조)|양나라]]에 사신을 보냈는데, [[중국]]과의 [[외교]]는 [[내물 마립간]] 시절에 [[전진(오호십육국시대)|전진]]의 [[부견]]과 교류한 이후 약 140년 만이었다. === 불교 공인 === [[나라]]의 체제를 정비하며 527년 처음으로 불법(佛法)을 공인하였는데, 양나라의 승려 [[원표]](元表)가 [[불교]]를 신라 왕실에 전해준 것이 불교 수용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소지 마립간]]의 사금갑 설화에 등장하는 [[승려]]나 [[고구려]] 출신 승려 [[묵호자]] 혹은 [[아도]]의 사례를 통해 알 수 있듯, 법흥왕 이전에도 신라 일부, 특히 왕실에는 이미 불교가 어느 정도 받아들여져 있었으나, 귀족들의 반대로 공인되거나 널리 퍼지지는 못한 상태였다. 이러한 배경에서 법흥왕이 공식적으로 불교 수용을 선포한 것으로, 흰 [[피]]의 기적으로 유명한 [[이차돈]]이 이때의 사람이다. 이후 529년에는 살생을 금지시켰다. 신라는 귀족들이 고유 토착 [[종교]]의 제사장을 겸하고 있었던 까닭에 토속 종교의 영향력이 강했다. 중국과 가까워 비교적 일찍 불교를 받아들인 고구려나 백제와 달리 신라에 불교가 최초 전래된 시기도 아리송하고 공인 과정에서 강력한 반대로 피를 줄줄 흘렸던 것도 이러한 사연이 있다. 외래 종교를 들여와 토속 종교를 억누르는 것으로 제사장을 겸하고 있던 귀족 [[계층]]의 권위를 찍어 누를 수 있기 때문.[* 같은 과정을 거친 국가로 [[일본]]이 있는데, 모노노베씨와 소가씨의 항쟁으로 2탄을 찍는다.] 법흥왕은 신라의 토착 종교와 관련된 7개 성지를 과거불이 주재하던 장소라고 선전하며 밀어버리고 [[절(불교)|절]]을 짓는 국책 [[사업]]을 벌였는데, 이 중 유명한 것이 [[흥륜사]], [[분황사]], [[경주 사천왕사지|사천왕사]], [[불국사]]이다. 당연히 귀족들의 반대도 심했고 짓던 절을 때려부쉈다가 다시 짓는 등의 진통을 겪었으나, 법흥왕의 [[정책]]은 결과적으로 대성공이었다. [* 현재까지도 [[경상도]]가 전통적으로 불교세가 강한 이유이기도 하다.] 신라는 이후 100년도 안 되어 놀랄만한 불교 국가로 변신했으며, 이 시기에 활동한 고승만 해도 [[원효]], [[의상(신라)|의상]], [[대안]], [[명랑]] 등 수두룩 빽빽하다. 법흥왕 재위 당대인 535년에 남겨진 [[울주 천전리 서석]] 을묘명[* 을묘년에 새겨져서 을묘명이라 한다.]은 안급이(安及以)라는 이름의 승려와 그의 일행이 왔다갔다는 내용인데, 여기에서 법흥왕을 '성법흥대왕'(聖法興大王)이라 하여 불교를 중흥시킨 성스러운 [[대왕]]으로 높여주고 있다. 불교를 밀어준 왕이다보니 불교계에서 그에 대한 칭송이 대단했음을 알 수 있다. === 병부와 상대등 설치 === 531년 4월에 [[이찬]] 철부(哲夫)를 [[상대등]](上大等)[* 신라 역사상 처음 등장하는 [[관직]]명이다. 이전 기록에서도 등장하는 [[이벌찬]], [[이찬]] 등의 명칭은 관직이 아닌 [[관등]]이다.]으로 임명했는데, [[귀족]]의 대표를 상대등에 임명한 것은 곧 귀족을 [[관료제]] 체계에 포함시켰다는 의미가 된다. 신라의 왕은 사실 법흥왕 이전까지 귀족과 공동 하교를 내릴 정도로 신라 6부 중 하나인 탁부(啄部)의 [[지도자]]에 불과했지만[* 사실 탁부 또는 훼부로 언급되는 금석문인 [[포항 중성리 신라비]], [[포항 냉수리 신라비]], [[울진 봉평리 신라비]]가 모두 지증왕에서 법흥왕 시기의 것이므로, 신라 왕 중 [[내물 마립간|내물왕]]계만 탁부 출신이었을 가능성도 존재한다. 신라의 시작부터가 [[서라벌]] 6개 마을의 지배자들이 [[연합]]하여 세운 나라였다. 이런 성격은 [[혁거세 거서간|박혁거세]] 설화에서도 잘 드러나 있다.], 이후 중앙 집권 체제를 공고히 하며 이후로는 모든 당대 기록에서 오로지 왕(王)으로 표현되게 된다. 또한 군사력을 담당하는 전문 부서인 [[병부]]를 설치하였는데, 이는 그 전까지는 [[왕실]]과 유력자들이 [[사병]] 비슷하게 사유하고 있던 병사를 이제는 [[국가]] 차원에서 소속시키고 다룬다는 의미가 있다. 신라라는 국가가 점차 조직적으로 변해가는 것. === 금관국(금관가야) 편입 === 한편 법흥왕이 신라를 다스리던 6세기 초반 당시의 [[금관국]][* [[금관가야]]를 뜻한다. xx가야라는 표현은 한참 후대인 [[고려]] [[태조(고려)|태조]] 때부터나 사용된 것이다.]은 100여 년 전의 [[신라-왜 전쟁]] 이후 [[전성기]]를 벗어나 [[가야]] 지역의 주도권도 잃은 채 약화된 상태였고, 한때 [[고구려]]의 속국 신세였던 신라와의 국력 차이는 이미 [[넘사벽]]으로 벌어져 있었다. 이러한 정세를 파악한 법흥왕은 장차 나라를 합병하기 위해 금관국에 군사적 압박을 가하기 시작했다. 529년에는[* 한국 사서에는 안 나오고 《[[일본서기]]》 〈[[케이타이 덴노]] 조〉에만 나오는 사건이다. 이하의 내용은 《[[일본서기]]》 특유의 과장과 윤색을 최대한 배제하고 핵심만 요약한 것이다.] [[구형왕]]이 신라로부터 위협을 느껴 [[왜국]]에 지원군을 요청했으며[* 왜국이 가야권과 유착되어 있었고 때때로 왜군이 남부 지방에 파견된 것은 [[광개토대왕릉비]]에도 나오는 이야기니 일본 측의 과장이라고만 할 수는 없다.], 신라는 상신(上臣) [[이사부]]에게 3,000명의 병력으로 [[토벌]]을 명한다. 왜국 측 [[오우미노케나|오미노 케누]](近江毛野)가 이사부의 군대를 보고 도망가자 이사부는 금관국을 포함한 4개 [[도시]]를 빼앗고 [[백성]]들을 포로로 데려갔다. 이로 인해 안 그래도 쇠퇴한 상태였던 금관국은 나라를 유지하기 힘들 정도의 피해를 입은 것으로 보인다. 결국 532년, 금관국의 [[구형왕]]이 [[왕비]]와 큰 아들 [[김세종]], 둘째 아들 [[김무덕]], 막내 아들 [[김무력]]을 데리고 나라 창고에 있던 [[보물]]을 가지고 와서 [[항복]]했다. 이때 금관국의 항복 과정에 대해서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에 차이가 있는데, 《삼국사기》에서는 특별한 군사적 충돌 없이 순순히 항복한 것처럼 나오는 데 반해 《삼국유사》에 인용된 《가락국기》에서는 신라가 쳐들어오자 군을 이끌고 맞섰음에도 병력 차이가 너무 커서 어쩔 수 없이 항복한 것으로 나오며, 《일본서기》 〈[[긴메이 덴노]] 조〉에서는 예상치 못한 습격에 당했다는 식으로 나온다. 여튼 [[구형왕]]이 항복해오자 법흥왕은 [[금관국]]을 정식으로 합병하여 금관군(金官郡)을 설치해 [[낙동강]] 유역을 확보하였다. 비교적 [[평화]]적으로 금관국을 흡수하면서 얻은 법흥왕의 또 다른 이득은 [[인재]]인데, 구형왕의 장남인 김세종과 막내 아들인 김무력은 진흥왕 시대에 신라에서 [[장군]]으로 활동하였으며 김무력의 첫째 손자는 그 유명한 [[김유신]]이고 둘째 손자인 [[김흠순]]도 뛰어난 장군으로 활약했다.《일본서기》에서는 금관국뿐만 아니라 [[탁순국]][* 오늘날의 [[창원시]]로 비정된다.]과 [[탁기탄]]의 항복까지 법흥왕 때 받아낸 것으로 나온다. 이렇게 신라와 인접한 가야권 동쪽 몇몇 나라가 신라에 흡수되면서 나머지 가야 소국들은 대체로 친(親) [[백제]] 성향으로 기울었고, 가야의 완전한 병합은 이후 554년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를 크게 꺾은 후인 [[진흥왕]] 시대에 완료된다. === 연호 제정 === 536년 [[연호]]를 '[[건원]]'(建元)이라 정했으며, 이는 신라에서 기록 상으로 전하는 최초의 연호다. 538년에는 지방관이 [[가족]]을 데리고 부임할 수 있도록 교서를 내렸는데, 이를 통해 신라의 지방 [[통치]] 제도가 조금씩 체제를 갖추어 갔음을 알 수 있다. === 기타 === 한국 기록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일본 기록에서는 [[이와이의 난]]을 527년 지원했다고 한다. 당시 일본([[야마토 정권]])은 백제, 가야 문제에 끼어들려 하거나 소지 마립간 시절까지 신라를 꾸준히 공격하던, 신라 입장에선 골칫거리였다. 이와이의 난을 통해 일본을 동서로 갈라버리려 했지만 이와이가 생각보다 빠르고 쉽게 무너져버려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국가 [[경제]]의 기초인 [[농업]]에도 관심을 기울였으며, 531년에는 제방을 수리하라는 명을 내리기도 했다. 실제로 [[경상북도]] [[영천시]] 금호읍 도남동에는 지금도 사용되는 신라 시대 [[저수지]]가 있는데[* 이름은 청제(菁堤)로, 현지인들은 청못이라고도 부른다.] 여기서 536년에 건립된 [[영천 청제비]]가 발견되기도 했다. 비석 앞면에는 저수지의 넓이와 높이, 만드는 데 동원된 사람 수, 담당자 이름 등이 기록되어 있으며 뒷면에는 나중에 이 저수지를 수리할 때 추가로 적어놓은 내용이 써 있다. 당대의 비석이 발견된 건 이곳 뿐이지만, 신라 각지에 이런 식으로 체계적으로 관리되는 저수지가 여럿 있었을 것이다. === 사망 === 말년에 사실상 [[출가]]해 승려가 되어 [[법명|법호]]를 법운(法雲), [[자(이름)|자]]는 법공(法空)이라 했고, 540년 7월 붕어하여 [[시호]]를 법흥이라 하였다. [[법흥왕릉]]은 법흥왕의 업적을 감안하면 일반적인 [[신라왕릉]]의 크고 아름다운 [[이미지]]와 대비되게 매우 작은 편인데 신라왕릉 형태의 초기형 → 후기형 변천사를 따져보면 작지 않은 의미가 있다. 법흥왕의 뒤를 이어 법흥왕의 본인의 조카이자 외손자인 삼맥종이 왕위에 올라 [[진흥왕]]이 되었다. [[파일:external/tong.visitkorea.or.kr/1616831_image2_1.jpg]] == 평가 == 고대 국가로서의 [[신라]]가 체계화되는 [[시발점]]을 만든 왕으로 신라 역사에서 손꼽히는 [[명군]] 및 [[성군]]이다. 부친 [[지증왕]]에 이어서 삼국간의 [[전쟁]]이 소강 상태에 들어섰던 [[6세기]] 초반의 짧은 [[평화]] 기간 동안 강도 높은 내정 개혁과 국력 증대, [[왕권]] 강화, [[탁기탄]]과 [[금관가야]] , [[탁순국]] 등 신라와 인접한 가야 국가들을 병탄하는 등 많은 [[업적]]을 쌓아 [[6세기]] 중후반 신라 [[전성기]]의 토대를 닦았다. 조카인 [[진흥왕]]의 폭발적인 [[영토]] 확장도 이 때 쌓아둔 국력이 배경이 되었기에 가능했던 것으로, 어떤 의미에서는 [[지증왕]]과 함께 내정 개혁으로 신라의 향후 400년을 결정지은 신라 역사상 중요한 임금 중 한 명이기도 하다. 반면 [[숭유억불]]의 시대 [[조선]] 때는 [[고구려]]의 [[소수림왕]], [[백제]]의 [[침류왕]]과 함께 [[불교]]를 들여와 [[삼한]]을 어지럽힌 불교 삼총사라고 악평을 받았다.[* [[조선왕조실록]] 등에 기록된 [[조선]] 당대의 과거 역사인물 평가는 여러모로 현대와는 다른 점이 많다. 예를 들면 신라의 경우 중대보다 하대 왕들이 대체로 평가가 더 좋다.][* 물론 조선시대 사람들이 불교를 많이 탄압했던 시기라고 생각하고 걸러들을 필요가 있다. 삼국시대에 불교를 받아들인 것은 엄연히 왕권 강화가 목적이었고, 백성들의 민심을 진정시키기 위해서 받아들인 것인데다가 [[종교]]든 학문이든 [[국교]]로 지정한 이상 후대에 갈수록 타락하기 마련이다. 저렇게 불교를 비판한 [[유교]]도 정작 훗날에는 중이 유학자로, 절이 서원으로 바뀐 거나 다름없을 정도로 심하게 타락했다.] == 기타 == * 국력을 신장시키고 다음 왕대에 전성기를 누리게 한 점이 여러모로 [[고구려]]의 [[소수림왕]]과 비슷하다. * 업적도 많고 [[한국사(교과)|한국사]] 시험에는 단골로 나오지만 대중매체에서는 [[KBS1]] [[부처님오신날]] 특집드라마 [[https://youtu.be/Len6FErxcjg|〈이차돈〉]][* 극본 김운경, 연출 이종한 PD가 맡았다. 배우 [[박근형]]이 이 연기했다.]에 출연한 것 빼고는 [[신문왕]]과 함께 대중매체에서 거의 안 다뤄지는 왕이다. * [[왕비]]는 보도부인(保刀夫人).[* 사축부인(巳丑夫人), 파도부인(巴刀夫人)이라고도 한다. 보도(保道)라는 표기도 있다. 기록마다 김씨, 박씨 등으로 성이 엇갈리는데 한 건이라면 모르겠으나 왕비의 성은 이 기록 외에도 수없이 바뀐다. 그녀가 [[소지 마립간]]의 딸이라는 이야기가 유명한데 [[정사(역사)|정사]]에서는 아버지가 누군지 나오지 않는다.] 딸로 [[지소태후|지소부인]]을 뒀는데, 지소부인은 법흥왕의 동생인 [[입종 갈문왕]]과 결혼해 아들로 삼맥종([[진흥왕]])과 [[숙흘종]]을 뒀다. == 《[[삼국사기]]》 기록 == [include(틀:삼국사기)]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642687&cid=49615&categoryId=49798|《삼국사기》 〈법흥왕 본기〉]]''' 一年 법흥왕이 즉위하다 三年春一月 신궁에 제사지내다 三年 용이 양산의 우물 안에 나타나다 四年夏四月 처음으로 '''병부를 설치'''하다 五年春二月 주산성을 쌓다 七年春一月 '''율령을 반포하고, 공복과 위계'''를 정하다 八年 [[양(남조)|양]]에 사신을 보내서 토산물을 바치다 九年春三月 [[대가야|가야]]의 국왕이 혼인을 청하다 十一年秋九月 남쪽 변방 지역을 둘러보다 十二年春二月 대아찬 이등을 사벌주 군주로 삼다 十五年 '''불교를 처음으로 시행'''하다 十六年 살생을 금지하다 十八年春三月 제방을 수리하다 十八年夏四月 이찬 철부를 '''상대등'''으로 삼다 十九年 '''[[금관국]]이 항복'''하다 二十一年 상대등인 철부가 죽다 二十三年 처음으로 '''[[연호]]'''를 칭하다 二十五年春一月 지방관이 가족을 데리고 부임하는 것을 허락하다 二十七年秋七月 왕이 죽다 [[지증왕]]과 마찬가지로 기록은 소략한 편이나 율령 반포나 불교 공인과 같은 중요한 업적들이 다 적혀 있다. == 둘러보기 == [include(틀:지증왕)] ---- [include(틀:한국사의 역대 연호)] ---- [include(틀:신라 왕실)] [각주] [[분류:법흥왕]]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