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북궁 (문서 편집)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L20150821.010010720070001i2.jpg|width=100%]]}}} || || {{{#fbe673 '''북궁 복원 상상도'''}}} || [[경주 월성]] 북쪽에 있는 큰 팔작지붕 정전을 중심으로 한 주변 건물 몇 채가 북궁이다.[* 다만 이 복원도는 잘못된게 월성의 북문 바로 북쪽에는 현무대로가 시작되는 곳이 있었지 저렇게 [[궁전]] 하나가 붙어있는 체로 존재했다는 고고학적 근거가 없다. 당장 하술할 북궁의 후보 전랑지와 용강동 원지 모두 월성과는 거리가 있다.] [목차] == [[신라]] 왕조의 궁궐 == [include(틀:한국의 정원)] [include(틀:신라의 궁궐)] [include(틀:진성여왕)] [[삼국사기]] 등 문헌기록에 등장하는 [[신라]]의 [[궁궐]]. === 상세 === 문헌기록은 없는데 유물로만 존재가 밝혀진 [[남궁#s-2]]과는 정반대로, 사서에는 북궁이라는 궁전이 있다는 게 몇 번 나오는데 실제로 어디에 있었는지, 언제 만들었는지, 관련 유물은 베일에 쌓여 있다. 당연히 이름을 봐선 [[서라벌]], 특히 정궁인 [[경주 월성]] 기준으로 북쪽 어딘가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정도. 삼국통일 이후에만 언급되므로 문무대왕이 삼국통일 이후 [[동궁과 월지|동궁]]을 만들었듯이 북궁도 삼국통일 이후에 만들었을 수도 있겠으나 정확한 증거가 없기 때문에 확정은 불가능하다. >7월에는 북궁(北宮)의 정원 가운데 먼저 두개의 별이 떨어지고 또 한 개의 별이 떨어져, 세 개의 별이 모두 땅 속으로 들어갔다. > >{{{#!wiki style="text-align:right" 《[[삼국유사]]》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633596&cid=62146&categoryId=62146|제2권 기이 제2]] [[혜공왕]]}}} ---- >겨울 12월 을사에, 임금이 북궁(北宮)에서 돌아가셨다. 시호를 진성(眞聖)이라 하고, 황산(黃山)에 장사 지냈다. > >{{{#!wiki style="text-align:right" 《[[삼국사기]]》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642723&cid=49615&categoryId=49798|제11권 신라본기 제11]] [[진성여왕]]}}} 조선 초기 인물 [[조위]]가 남긴 문집 매계집에서도 신라 북궁이 등장한다. 혜공왕이나 진성여왕이나 북궁 관련 기록이 [[경문왕]]계에만 나와서, 경문왕계의 거주지 혹은 경문왕가 자체를 북궁이라 한다고 추정하기도 한다. 즉, 궁(宮)이라고 거창하게 부르긴 해도 조선시대의 [[운현궁]]마냥 왕이 즉위하기 전에 살던 [[잠저]] 정도일 거라는 추측. 위의 진성여왕도 897년 6월에 왕위를 [[효공왕]]에게 물려주고 북궁으로 옮겨가 살다가 같은 해 12월에 북궁에서 죽었다는 기사다. 참고로 [[경주시]] 성동동 전랑지([[대한민국의 사적|사적]] 제88호)도 월성 정북쪽이고 [[축구장]] 4배 넓이의 부지에 건물이 정연하게 배치되었던 흔적이 있어 뭔가 크고 중요한 신라시대 건물이 있었다고 추정되고 있는데 별궁 터일 거라는 추측도 있다. 하지만 아직 전랑지 전체에 대한 발굴조사가 제대로 이뤄진 적이 없어서[* 경주에는 조사할 유적이 넘쳐나서 우선순위가 밀리는 중이다. 당장 2018년 현재도 전랑지보다 훨씬 주요한 유적인 정궁 [[경주 월성|월성]], 시가지 한복판의 쪽샘지구 조사 중.] 위의 북궁과 관련이 있을지는 알 수 없다. 전랑지는 개발만 막고 그냥 공터로 남겨두고 있다. 다만 전랑지의 건물지 형태가 가운데 있는 작은 정사각형 건물 양쪽으로 큰 건물들이 배치되고 정사각형 남쪽과 북쪽이 길처럼 뚫려 있으며 담장이 정사각형 건물의 남쪽과 북쪽을 제외한곳에 둘러져 있는 구조였는데 이는 통로같은 행각들이 커다란 정전을 빙 둘러싸고 적어도 남쪽엔 문이 있는 통상적인 동북아시아 궁궐 형태와는 다른 형태라서 북궁이 아니라는 반론도 있다.[[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isHttpsRedirect=true&blogId=jw1405&logNo=205588426|#]] 혹은 경주 시가지 북쪽 [[용강동(경주)]]에 있는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jsessionid=cn1YbK1mgkd8dVGP0DhSubvIAe29iAwDVGKUoNd4yoUrvVJpbK7VOjWJJlNEEByF.cpawas_servlet_engine1?pageNo=1_1_2_0&ccbaCpno=1333704190000|경주 용강동 원지 유적]]([[대한민국의 사적|사적]] 제419호)도 북궁의 후보 중 하나로 추정되기도 한다. 이 곳은 1998년~1999년까지 약 2,600여평을 조사한 결과 '제2 안압지'라고 불렸을 정도로 8~9세기에 조성된 규모가 큰 인공연못 정원 유적지이다. 비교대상이던 안압지([[동궁과 월지]]) 역시 궁궐건축이니만큼 유사한 이 곳도 진성여왕대의 북궁이거나 적어도 별궁 유적지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그러나 용강동 원지는 월성으로 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북궁이 아닐 수도 있다. 비록 [[신라]]와는 성향이 다른 [[조선]]의 경우이긴 하나 [[조선]]은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 [[경희궁]]이 서로 가까운 위치에 배치되었고 [[신라]]도 [[경주 월성]]에 동궁과 남궁이 딱 붙어있을 정도로 가까웠고 금성도 어느정도 서북쪽 가까운 곳에 위치했으리라 추정되는데 용강동 원지는 월성으로 부터 너무 멀다. 오히려 전랑지가 월성에 가깝다. == [[고려]] 왕조의 궁궐 == [include(틀:고려의 궁궐)] [[고려]] 시대 본궐 북쪽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궁궐]]. [[고려사]]에선 [[최충헌]] 열전, [[동국통감]]에선 [[충혜왕]] 때 등장한다. 최충헌 열전에선 최충헌, [[최충수]] [[형제]]가 당시 [[군주]] [[명종(고려)|명종]]을 폐위시키고 당시 [[태자]]였던 [[강종(고려)|강종]]을 [[협박]]할 때 등장하는데 내원(內園) 북궁(北宮)에 있던 태자와 태자비를 강제로 나오게 해 [[유배]]시켰다고 한다. [[동국통감]] 충혜왕 조엔 충혜왕이 북궁에서 술을 먹거나, 북궁에 나와 참새를 잡거나 등 탱자탱자 놀 때 조금씩 등장한다. 내원서(內園署)라는 기관이 궁 내 여러 동산과 정원을 담당하는 관청이었으므로 북궁은 궁 내 유원지였고, 이는 유랑을 좋아하던 [[의종 대 별궁|의종이 만든 궁궐]]로 추정된다. == 중국 [[후한]]의 궁궐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북궁(후한))] [[분류:신라의 궁전]][[분류:대한민국의 없어진 건축물]][[분류:고려]][[분류:진성여왕]]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