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사트라프 (문서 편집) [include(틀:아케메네스 왕조)] [include(틀:사산 왕조)] [[파일:터키 페르시아.jpg]] 기원전 490년경 사트라피 행정 구역 지도 [[파일:페르시아 터키.png]] 기원전 330년경 [[알렉산드로스 3세]]가 봉한 사트라프들의 통치 구역 고대 [[페르시아어]] 𐎧𐏁𐏂𐎱𐎠𐎺𐎠 (흐샤트라파반) [[그리스어]] Σατράπης (사트라페스) [목차] == 개요 == [[고대]]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의 [[속주]]를 다스리는 일종의 [[총독]].[* 한국어 번역은 통일되어 있지 않다. 학자나 번역자들에 따라 태수(太守), 총독(總督), 지사(知事) 등으로 번역되곤 한다.] 고대 [[페르시아어]]로 "속주의 보호자"라는 뜻의 "흐샤트라파반(xšaθrapāvan)"을 그리스인들이 "사트라페스"(σατράπης)라고 썼는데 이것이 [[라틴어]]로 "사트라페스"(satrapes)로 옮겨졌고, 이를 다시 [[영어]] 또는 [[프랑스어]]로 "사트라프"(영어: satrap, 프랑스어: satrape)로 옮기게 된 것이다. 사트라프가 다스리는 영역은 "사트라피"라고 한다. == 상세 == [[키루스 2세]]가 [[메디아]], [[바빌론|바빌로니아]], [[리디아]] 등 쟁쟁한 강국들을 제압하고 대제국을 건설한 뒤, 지방 통치를 위해 제국을 20개의 속주로 분할한 뒤 총독들을 파견한 것이 그 시초다. 사트라프들의 주 업무는 [[왕중왕]]에게 세금을 안정적으로 바치는 것으로, 이를 위해 내정, 사법, 군사, 외교(!) 등 폭넓은 권한을 가져서 해당 지역 안에서는 왕이나 다름없이 통치할 수 있었다.[* 그리스와 인접한 소아시아 지역의 사트라프들은 [[펠로폰네소스 전쟁]] 당시에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아테네 혹은 스파르타에 자금을 지원하기도 했다. 스파르타의 명장인 [[리산드로스]]는 소아시아 지역의 사트라프들로부터 지원받은 자금으로 함대를 조직하여 아테네 해군을 무찌르고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때로는 한 사람이 두세 곳의 사트라프 자리를 겸직하기도 했다. 하지만 사트라프들도 다른 신하들과 마찬가지로 [[샤한샤]](왕중왕)의 노예(bandaka)에 불과했으며, 이들을 통제하기 위한 여러 견제 장치가 마련돼 있었다. 사트라프 주변에는 항상 중앙 정부 직속의 페르시아인 자문관들이 있었으며, "왕의 눈", "왕의 귀"라 불리는 특사나 밀정들이 수시로 드나들며 사트라프들을 감시하고 견제했다. 또한 사트라프가 거느리는 속주 군대 이외에도 주요 요충지나 요새에는 페르시아에서 직접 파견된 정규군이 주둔했다. 그래서 어떤 사트라프는 왕의 칙사가 오자 바닥에 엎드려 칙령을 받았다는 일화도 있다. 또한 아케메네스 왕조는 키루스 2세와 [[다리우스 1세]] 이래로 피정복민의 문화나 습속, 구 지배계급의 지배 질서 등을 깨뜨리지 않고 관용적으로 대하도록 하는 방침을 견지했으므로 사트라프들도 이에 따라야 했다. 이론적으로는 이렇지만, 페르시아 역시 사람 사는 사회인데 당연히 [[FM]]대로만 굴러갈 리가 없다. 중앙 정부의 통제력이 약해지거나 하면 사트라프가 멋대로 노는 경우도 많았고, 사트라프끼리 세력 다툼을 하거나 아예 전면적인 반란을 일으키는 경우도 있었다. 예컨데 소아시아 할리카르나소스를 통치했던 사트라프 [[마우솔로스]]의 경우에는 그 지역에서 왕에 버금가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렸다. 그의 사후에 그를 기리기 위한 거대한 영묘인 [[마우솔레움]]이 건설되기도 하였는데, 그 웅장함과 화려함 덕분에 [[안티파트로스]]는 이를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꼽기도 했다. 또한 [[이집트]]와 [[바빌론]]처럼 유서깊은 지역들은 페르시아의 지배에 불만을 품고 틈만 나면 반란을 일으켜 독립을 시도하기도 했다. 또한 [[다리우스 2세]]의 아들이자 [[아나톨리아]]의 사트라프였던 젊은 키루스[* [[키루스 대왕]]과 구분하기 위해 흔히 "젊은 키루스(𐎤𐎢𐎽𐎢𐏁)"라 불린다.]는 형인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를 상대로 그리스인 용병대까지 동원하며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당하기도 하였다.[* 당시 그리스 용병이었던 [[크세노폰]]이 젊은 키루스의 편에 서서 싸우다가 키루스가 패망한 후 부하들과 함께 온갖 고난 끝에 그리스로 생환한 후 회고록인 [[아나바시스]]를 저술한 일화가 특히 유명하다.] 아카메네스 왕조의 마지막 제왕이었던 [[다리우스 3세]] 또한 [[박트리아]]의 사트라프였던 베수스의 배신으로 인하여 살해되었다. [[마케도니아 왕국]]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에 의해 아케메네스 왕조가 무너진 뒤에도 사트라프 제도는 사라지지 않고 존속되었고, 마케도니아인들이 각지의 사트라프로 임명되었다. 이런 마케도니아인 사트라프들은 [[디아도코이]] 전쟁 이후 [[셀레우코스 왕조]] 시대까지 존속하였다. 셀레우코스 왕조 이후 페르시아를 차지한 [[파르티아]] 시대에도 사트라프는 행정 직책으로 남아 있었으나, 파르티아가 아케메네스 왕조만큼 중앙집권화되지 않았던 데다 각지에서 부왕들과 대귀족들이 자치를 했으므로 통치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지는 못했다. 반면 상당한 중앙집권화를 이룬 [[사산 왕조]] 시대에는 왕령지와 도시의 책임자로써 다시금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사산 왕조 시대에는 "도시의 보호자"라는 뜻의 샤흐르반(شهربان )이라고 했다. == 대중 매체에서 == [[문명 시리즈]]에서 페르시아 문명의 요소로 등장한다. [[문명 5]]에서는 사트라프 관청(Satrap's Court)이라는 이름의 고유 건물로 은행을 대체하는데, 기원전에 있었던 개념이 르네상스 시대의 건물로 나오는 건 고증 오류긴 하지만 밸런스를 위한 조치라고 봐야 한다. 은행보다 더 많은 금을 제공하는 것은 물론 행복도 뱉어내는데, 페르시아는 정복에 초점이 맞추어진 문명이고 정복 문명이 항상 고민하는 부분이 행복이라는 점에서 굉장히 우수한 건물이다. [[문명 6]]에서는 관할구(Satrapies)라는 이름으로 나오는데, Satrapies는 사트라프가 통치하는 영역인 Satraphy의 복수형이다. 게임 내의 성능은 더 많은 교역로를 제공하고 국내 교역로에서 금과 문화를 제공하며 도로의 성능을 강화하는 것. [[분류:총독]] [[분류:아케메네스 왕조]] [[분류:사산 왕조]]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