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상대등 (문서 편집) [목차] == 개요 == {{{+1 [[上]][[大]][[等]]}}} [[신라]]시대 [[귀족]] 권력을 대표하는 최고 [[관직]]이다. 상대중등, 상신이라고도 불렸다. 오늘날로 치면 [[대한민국 국회의장|국회의장]]이나 [[상원]]의장과 비슷하다. [[화백회의]] 참석자 중 우두머리이다. 최고 관직이지만 [[이벌찬]]과는 다른데, 비유하자면 이벌찬은 1급 공무원 같은 관등명이고 상대등은 국회의장 같은 관직명이다. 물론 상대등 자체가 최고위 관직이므로 상대등을 역임하는 인물은 관등 역시 높은 사람들이 맡았다. [[귀족]]의 대표자로서 [[왕권]]을 [[견제]]하는 [[신권]]을 대표하는 위치에 있으며, [[국왕]]을 보좌하며 행정을 맡는 [[시중]]과 성격은 좀 다르지만 서로 겹치는 부분이 있었다. 따라서 왕권의 변화와 함께 상대등과 시중의 파워는 엎치락 뒤치락했다. 왕권이 가장 강했던 시기에는 거의 형식적인 정도까지 떨어지기도 했다. 신라에서 '대등'을 다른 말로 '신(臣)'이라 표기하기도 했는데 일본 측 기록인 [[속일본기]]에 따르면[* [[케이타이 덴노]] 23년] 상신(上臣)이라는 신라 관등을 소개하고 이를 [[훈독]]해 마카리타로(萬加利陁魯, 만가리타로)라고 써 놓았는데[* 중기 [[신라어]]-왜어 훈독. 중기 신라어는 [[백제어]]와 지금의 [[일본어]]처럼 [[음독]]과 [[훈독]]이 공존했다. 삼국을 통일한 이후인 [[경덕왕]] 시절에 훈독을 폐지하면서 점차 사라졌다.] , '등'의 당시 음이 '타로'에 대응하는 것을 보여주며, 이를 통해 발음이 비슷한 [[고구려]]의 관직명 대로(對盧)와 같은 어원으로 짐작하기도 한다. 신라의 '등'이 앞에 클 대([[大]]) 자가 붙어 '대등'으로 발전한 것처럼 고구려의 '대로' 역시 앞에 大를 붙여 '[[대대로]]'로 발전한 부분도 일맥상통한다. 일본 기록에 전하는 [[백제어]]로 '위'는 '무쿠', '크다'는 '코니'나 '코', '신하'는 '다로'라고 했는데, 이를 바탕으로 '마카리타로'의 뜻을 유추하는 의견도 있다. 참고로 위의 한자 '상', '등'도 향찰이나 이두로는 각각 '맏'[* [[박제상]]의 경우가 좋은 예시다.], '들'이라고 읽혔다. 이를 감안해 굳이 현대 [[한국어]]를 붙여서 읽어본다면 '맏-클-들'과 비슷한 어떤 [[고유어]]를 음차했을 가능성도 있다. 참고로 '마카리(萬加利)'가 붙는 관직은 주로 계승권이나 대표성이 강하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마카리요모(왕자), 마카리오리쿠쿠(정실 부인) 등.] 그러나 상신과 상대등이 음운상 일치하기는 해도, [[속일본기]]에 등장하는 상신은 상대등과는 '''다른 관직이다.''' [[일본서기]]에서 상신으로 나오는 [[이사부]]와 [[김춘추]], [[속일본기]]에서 상신으로 나오는 [[김순정]]와 김옹 중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상대등 임명자와 겹치는 사람은 하나도 없으며, [[성덕대왕신종]]에서 [[대각간]] 김옹이 상상(上相)으로 등장하는 것과 다르게 그 당시 상대등이었던 [[김양상]]은 김옹보다 낮은 [[각간]]의 지위에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기 때문이다. [[삼국사기]]에서도 [[선덕왕]] 말년 [[김경신]]이 상대등이라 하였으나 [[삼국유사]]에서는 [[김경신]]은 이재(二宰)이고 [[김주원(신라)|김주원]]이 상재(上宰)라고 기록되어 있다. == 역사 == 상대등 이전에 대등(大等)이란 관직이 존재했는데, 주와 군에 파견된 행사대등, [[소경]]의 장관인 사대등, 중앙정치기구의 차관인 전대등 등으로 분화되어 국정을 담당했다. '''[[법흥왕]] 때(531년) 처음으로 [[철부]]가 상대등으로 임명되어 시작'''되었는데, 그 이전까지 왕이 직접 주재했던 [[화백회의]]를 대신해 주재하는 역할을 맡았다. 적당한 왕위계승권자가 없는 상황이 닥치면 상대등은 왕위를 계승할 후보 우선순위로 여겨지기도 했다. 화백회의는 [[만장일치]] 합의제로 신라 성립 초기부터 존재하였으며 왕권이 너무 강해지는 것을 견제, 심지어 특정 왕([[진지왕]])마저 [[폐위]]시킬 수 있었을 만큼 권한이 막강했다. 이런 화백회의의 장(長)이 상대등이다. [[진흥왕]]시기인 [[단양 신라 적성비]](赤城碑)에는 "대중등大衆等"이란 이름이 보이고 있으며, 그후에 만들어진 [[진흥왕 순수비]] 또는 [[삼국사기]]에는 비슷한 용어가 사용되고 있다. [[마운령비]]와 [[황초령비]]에는 7(또는 8)명의 대등이 보이고 있고, [[창녕비]]에는 20(또는 21)명의 대등이 나타나고 있다. [[선덕여왕]] 때 상대등이었던 [[비담]]이 [[반란]]을 일으켰다가([[비담의 난]]) 오히려 털리고 [[김춘추]]는 화백회의를 장악한다. [[성골]] 국왕세력과 상대등의 충돌, 그리고 김춘추 [[김유신]] 세력이 이를 봉합하는 과정에서 성골 국왕과 상대등의 [[권위]]는 동반 하락했고, 김춘추 세력이 사실상 [[실권]]을 잡는다. [[진덕여왕]]을 거쳐[* 진덕여왕 시대에 이미 최고 실권자는 김춘추였다.] 결국 김춘추가 [[진골]] 중 가장 우위임을 인정받아 왕에 오른다. 원래 [[진덕여왕]] 사후 [[알천]]을 왕으로 추대했으나 알천이 스스로 사양했는데 이는 상대등의 몰락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사건이다. 김춘추가 [[권력]]을 잡은 [[진덕여왕]]대부터 중국식 정치제도의 수용을 통해 국왕 중심의 [[관료제]]를 강화하면서 상대등으로 대표되는 귀족 권력이 약해졌고, 중대 왕권의 버팀목 역할을 하던 [[김유신]]을 상대등에 임명하면서 중대 왕권이 귀족회의까지 장악하게 되었다. 이 시기는 이전 시대와 달리 상대등이 국왕 견제가 아니라 역으로 왕권을 보좌하는 위치로 전락한 것이다. 물론 이에 대한 귀족세력의 반발이 전혀 없지는 않았을 것이므로 때로는 타협책으로 귀족세력을 실질적으로 대표할 수 있는 실세 귀족을 상대등에 임명하기도 했는데, 이미 김춘추-김유신계가 권력을 장악하였음에도 김춘추 즉위 후 김유신보다 먼저 상대등이 된 금강이나[* 김춘추 다음가는 2인자이자 정권 실세인 김유신도 무열왕 7년인 660년에야 상대등에 임명되었다.] 680년(문무왕 20년)에 상대등에 오른 [[김군관]]이 그러한 부류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상대등이 전제왕권에 방해물이 된다고 여겨지면 가차없이 숙청당하기도 했는데, [[신문왕]] 때 [[김흠돌의 난]]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반란에 직접 연루된 것도 아닌 전직 상대등 김군관을 비롯한 진골 귀족들을 대거 [[숙청]]한 사건이 그 예다. 이렇게 전제왕권이 강화되고 상대등의 권력도 한동안 물 밑으로 가라앉으면서 대신 왕을 보좌하며 실무를 담당하는 직책인 [[시중]]의 권한이 막강해지게 되었다. 그러나 전제왕권이 약화되는 중대 후기에는 상대등의 비판적 기능이 다시 작동하기 시작했는데, [[경덕왕]] 15년(751) 상대등 [[김사인]]이, [[혜공왕]] 13년(777) 상대등 [[김양상]]이 정치상황을 비판한 것이 그 예에 해당한다. 왕권이 약해진 하대에 들어서 상대등은 다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하대의 첫 왕인 [[선덕왕]]이 상대등이라는 지위를 바탕으로 해서 왕위에 올랐고, 이후로도 상대등 역임자가 왕위에 오르는 일이 많아졌다. 자연스레 상대등은 유력 왕위계승권자로 인식되었고, 실제로 상대등의 지위를 이용해 [[찬탈]]을 시도하는 경우도 생기고 왕권을 위협하는 존재로 급부상했다. 물론 왕이 되고 나면 자기 자리를 뺏기면 안 되니까 가능하면 가까운 친인척을 상대등으로 임명하는 경향이 생겼다. 그러나 이런 조치는 [[왕족]] 사이에서도 작은 집안끼리 분파를 이루는 원인이 되었고 피튀기는 하대 왕위쟁탈전의 원인 중 하나가 된다. == 역대 상대등 역임자 == [include(틀:역대 신라 상대등)] [[법흥왕]] 때 최초의 상대등인 철부부터 [[경명왕]] 3년(919) 김성이 퇴위하기까지 400여년간 40여명의 임명 사례가 삼국사기에 전한다. || 시기 || 이름 || 재임년도 || 비고 || ||<|2> [[법흥왕]] || [[철부]] || 531년 4월 ~ 534년 || 초대 상대등[* 일본서기에 따르면 529년([[케이타이 덴노]] 23년)에 [[이사부]]가 상신(上臣)을 지녔던 것으로 나온다.] || || [[김구해]] || 532년 ~ ? || [[금관가야]] 말대 군주[* 앞서 [[철부]]가 534년 사망했다는 기록과 상충한다. 그러나 [[철부]]가 죽은 후에 따로 상대등을 임명한 기사가 없는 걸 보아서 그가 죽기 전에 이미 교체된 상태였던 것으로 보인다.] || || [[진흥왕]] || || || || || [[진지왕]] || [[거칠부]] || 576년 ~ ? || [[미사흔]]의 증손 || ||<|2> [[진평왕]] || [[노리부]] || 579년 8월 ~ 588년 12월 || [[김구해]] 장남 || || [[수을부]] || 588년 12월 ~ ? || || ||<|3> [[선덕여왕]] || [[을제]] || 632년 2월 ~ ? || [* 원문에는 그냥 대신(大臣)으로 나와있으나 "나라의 일을 총괄토록 했다."는 기록에 의거해 상대등으로 보는 시각이 있다.] || || [[수품]] || 636년 정월 ~ ? || || || [[비담]] || 645년 11월 ~ 647년 정월 22일 || || || [[진덕여왕]] || [[알천]] || 647년 2월 ~ 654년 || [* 일본서기에서는 647년에 상대등직을 역임하고 있던 사람이 [[김춘추]]라고 했다.] || || [[태종 무열왕]] || [[금강(동음이의어)#s-2.16|금강]] || 655년 정월 ~ 660년 정월 || || ||<|2> [[문무왕]] || [[김유신]] || 660년 정월 ~ 673년 || [[태종 무열왕]] 3녀 [[지소부인]] 남편 [br]흥무대왕(興武大王) 추존 || || [[김군관]] || 679년 2월 ~ 681년 8월 || || || [[신문왕]] || [[진복]] || 681년 8월 ~ ? || || ||<|2> [[효소왕]] || [[김문영]] || 694년 정월 ~ 695년 || || [[김개원]] || 695년 ~ ? || [[태종 무열왕]] 7남 || ||<|3> [[성덕왕]] || [[인품]] || 706년 정월 ~ 720년 정월 || || [[배부]] || 720년 정월 ~ 728년 7월 || [* 나이가 들어 물러나길 청했고(727년, 728년) 이를 성덕왕이 받아들여 물려주었다. ~~[[황희(조선)|황희]]?~~][* [[속일본기]]에서는 726년 당시 상대등이 [[김순정]]이라 하였다.] || || [[김사공]] || 728년 7월 ~ ? || || || [[효성왕]] || [[김정종]] || 737년 3월 ~ ? || [[혜명부인]] 부친 || ||<|3> [[경덕왕]] || [[김사인]] || 745년 정월 ~ 757년 정월 || || || [[신충]] || 757년 2월 ~ 763년 8월 || [* 시중 김옹과 함께 사직했다. [[향가]] 중 하나인 [[원가]]의 작사가이다.] || || [[만종]] || 763년 정월 ~ ? || ||<|3> [[혜공왕]] || [[신유]] || 768년 10월 ~ ? || || [[김옹]] || 771년 이전 ~ 774년 || || [[김양상]] || 774년 9월 ~ 780년 || [[성덕왕]]의 딸 [[사소부인]]의 아들[br][[선덕왕]] 즉위[* [[성덕대왕신종]]에서는 771년 당시 김옹이 상대등으로 나오고 [[김양상]]은 제2재상으로 기록되어 있다. [[속일본기]]에서는 774년 당시 상대등이 김옹이라고 하였다.] || || [[선덕왕]] || [[김경신]] || 780년 ~ 785년 || [[태종 무열왕]] 4녀 증손[br][[원성왕]] 즉위[* [[삼국유사]]에서는 [[김주원(신라)|김주원]]이 상대등으로 나오고 [[김경신]]은 제2재상으로 기록되어 있다.] || ||<|2> [[원성왕]] || [[충렴]] || 785년 2월 ~ 792년 8월 || || [[세강]] || 792년 8월 ~ ? || || [[소성왕]] || || || || || [[애장왕]] || [[김언승]] || 801년 2월 ~ 809년 || [[김인겸(신라)|혜충태자]] 2남[br][[헌덕왕]] 즉위 || ||<|3> [[헌덕왕]] || [[김숭빈]] || 809년 ~ 819년 2월 || || || [[흥덕왕|김수종]] || 819년 2월 ~ 822년 || 혜충태자 3남 || || [[김충공]] || 822년 정월 ~ 822년 4월 || 혜충태자 4남[* [[삼국사기]] 본기에는 안 나오고 [[녹진]] 열전에서만 나온다.] || || [[흥덕왕]] || [[김균정]] || 835년 2월 ~ 836년 || [[원성왕]] 3남 김예영 차남[br]성덕대왕(成德大王) 추존[* [[흥덕왕]]이 죽고 [[김제륭]]과 차기 왕위를 두고 싸우다 궁궐에서 벌어진 전투중 화살에 맞고 전사했다.] || || [[희강왕]] || [[김명]] || 837년 정월 ~ 838년 정월 || 혜충태자 4남 [[김충공]] 장남[br][[민애왕]] 즉위 || || [[민애왕]] || [[김귀]] || 838년 ~ ? || || || [[신무왕]] || [[장보고]] || 839년 ~ ? || [* [[삼국사기]]에는 안 나오고 [[삼국사절요]]에서만 나온다.] || ||<|2> [[문성왕]] || [[김예징]] || 840년 정월 ~ 849년 정월 || 김예영 차녀 남편 || || [[김의정]] || 849년 정월 ~ ? || [[김균정]] 차남[br][[헌안왕]] 즉위 || || [[헌안왕]] || [[김안]] || 857년 ~ ? || || ||<|2> [[경문왕]] || [[김정#s-1.2]] || 862년 정월 ~ 874년 정월 || || || [[위진]] || 874년 정월 ~ ? || || || [[헌강왕]] || [[김위홍]] || 875년 ~ ? || [[희강왕]]의 아들 김계명 차남[br]혜성대왕(惠成大王) 추존 || || [[정강왕]] || || || || || [[진성여왕]] || || || || ||<|2> [[효공왕]] || 준흥(俊興) || 898년 정월 ~ ? || || || 김성(金成) || 906년 정월 ~ ? || || || [[신덕왕]] || 계강(繼康) || 912년 5월 ~ ? || || ||<|2> [[경명왕]] || [[박위응]] || 917년 8월 ~ ? || [[신덕왕]] 차남[br][[경애왕]] 즉위 || || 김성(金成) || ? ~ 919년 || [* 《[[삼국사기]]》 신라본기 경명왕편에 919년에 '''상대등 김성'''을 각찬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나와 있다. 계강, 박위응과 공존한 것인지, 아니면 박위응이 퇴직하고 짧은 시간동안 다시 임명된 것인지는 불분명.] || == 같이보기 == * [[국상]] * [[대막리지]] * [[상좌평]] * [[대보]] * [[대내상]] * [[태대각간]] == 여담 == * 중학교때 삼국의 수상으로 대대로, 상좌평, 상대등을 외운 기억이 있을 것이다. [[분류:신라의 상대등]]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