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상징주의 (문서 편집) {{{+1 象徵主義 / Symbolism}}} [목차] == 문예 사조 == [include(틀:한국의 현대문학)] 19세기 후반 프랑스에서 [[사실주의]], [[자연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탄생한 문예사조. [[낭만주의]]와 같이 현실을 넘어선 무언가를 드러내려는 경향으로, 상징주의는 이와 달리 직접적이지 않고 상징적인 표현을 주로 사용했다. 대표적인 작품은 [[허먼 멜빌]]의 [[모비 딕(소설)|모비 딕]]이다. 시 운동을 중심으로 전개되었으며, 그중 [[샤를 보들레르]]를 대표적 인물로 본다. 한국에서는 1918년에 [[김억]]이 최초의 문예 주간지인 [[태서문예신보]]에 프랑스의 상징주의 시와 시론을 번역하여 소개했고, 1919년에 [[주요한]]이 문예지 [[창조]]에 정형률을 탈피한 시 '불놀이'를 발표한 것을 시작으로 본다. == 미술 사조 == [include(틀:미술사/모더니즘)] [include(틀:미술사/서양)] 1880 ~ 1910 [[라파엘 전파]]나 [[아르누보]]와는 큰 연관은 없지만, [[상징주의]]도 현실 생활의 표현을 강조한 [[인상주의]]와는 다른 길을 걸었다. 상징주의자들은 과거의 신화나 이국적, 신비적 요소에 영향을 받아 작품을 제작했다. 대표 작가로 귀스타브 모로(Gustave Moreau), 미카로유스 콘스탄티나스 츄루료니스(Mikalojus Konstantinas Čiurlionis), 오딜롱 르동(Odilon Redon), 피에르 퓌뷔 드 샤반느(Pierre Puvis de Chavannes), 앙리 팡탱라투르(Henri Fantin-Latour), 가스통 뷔시에르(Gaston Bussière), 펠리시앙 롭(Félicien Rops) 등이 있었다. [[절규]]로 유명한 [[에드바르트 뭉크]](Edvard Munch), 이후 빈 분리파의 대표 예술가가 된 [[구스타프 클림트]]도 넓게 보면 상징주의자였다.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07px-Oedipus_und_die_Sphinx_%28Gustave_Moreau%29.jpg|width=50%]] || 귀스타브 모로, <오이디푸스와 스핑크스>, 1864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615px-1914_Redon_Zyklop_anagoria.jpg|width=50%]] || 오딜롱 르동, <키클롭스의 눈>, 1898 이들은 당대 상징주의 문학가들과 영향을 주고받으며 예술을 제작했다. 때문에 이들의 작품은 신화 이야기 등에서 많은 영감을 얻었다. 이들의 작품이 뛰어나지 않은 것은 결코 아니었다. 하지만 동시대 인상주의자들이나, 이후 등장할 여타 모더니즘 작품에 비하면 인상깊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오딜롱 르동 같은 경우처럼 현대적인 표현과 상징주의를 결합하려는 시도를 한 사람도 있었다. [[분류:문예]] [[분류:미술사]]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