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소그드인 (문서 편집) [include(틀:인도이란인)] [include(틀:타지키스탄의 역사)] [include(틀:우즈베키스탄의 역사)] [include(틀:위구르의 역사)] [목차] == 개요 == [[파일:1098A4A2-E021-44BB-991C-23115748B231.jpg]] 소그드인(Sogd人, 속특 粟特)은 [[중앙아시아]] [[소그디아나]]에 사는 [[코카소이드]] [[인도유럽어족]] [[이란인]]계의 [[민족]]으로, [[마사게타이]]의 후손으로 추정된다. 서기 [[3세기]]부터 [[8세기]]까지 [[돌궐 제국]]의 비호 아래 동서무역을 장악한 것으로 유명하다. 언어로는 [[소그드어]]를 사용했다. 소그드인들은 자신들의 무역 [[네트워크]]를 지켜주고 도시의 성벽을 보호해주는 [[튀르크인]] 전사들과 대개 평화적으로 교류하며 서로간의 [[통혼]] [[혼혈]]도 잦았다. '''[[유목 제국]]은 전사 집단에게 사치품을 주어 위신을 세워주어야 전사들의 [[충성]]을 받을 수 있는데, [[돌궐]] [[제국]]은 소그드인들의 동서 무역을 통한 [[무역]] 수입만으로 이 문제를 큰 전쟁 없이도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었다.''' == 무역 == 주로 [[중앙아시아]] [[트란스옥시아나]] 일대에 기반을 두고 활동하였으며, 동서남북로 [[중국]]과 [[인도]], [[이란]] 그리고 북방 초원지대와 [[콘스탄티노플]]을 연결하는 [[실크로드]] 교역로를 주도하는 역할을 하였다. 소그드인들은 국제 [[경제]]와 [[문화]]의 교류에 큰 역할을 하였다. 이는 소그드인의 문화와 무역 시스템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소그드인 가정에서는 아이가 다섯살이 되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읽고 쓰는 법을 가르쳤는데, 이는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에 가서 장사를 하면서 고국에 있는 [[친척]]들과 [[편지]]로 [[정보]]를 교환하고 [[의사소통]]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이었다. 소그드인은 다른 지역에 가서 장사를 할 때도 상업 공동체를 구성하고 본국과의 연락 체계를 유지했으며, 심지어 [[중국]]에서도 소그드인의 우편망이 기능하고 있었다. [[둔황]] 근처 [[옥문관]] 근처에서 서기 [[313년]]경의 것으로 추정되는 [[소그드어]]의 [[소그드 문자]]로 쓰여진 편지들이 발견되었는데 이 편지들은 사업상의 내용 외에도 [[흉노]]에 의해 [[낙양]]이 [[약탈]]된 [[영가의 난]] 소식을 비롯하여 중국에서 발생하고 있는 혼란한 사건과 교역에 관한 이야기들이 쓰여있었다. 모든 편지들은 [[규격화]]된 형태로 [[주소]]가 적혀 있고 포장되어 있었는데, 이는 [[사마르칸트]], [[호탄]], [[누란]], [[둔황]] 및 다른 지역에 있는 소그드인들이 기존의 [[우편]] 체계를 통해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었다는 점을 나타낸다. 당시 편지들을 보면 소그드인들의 평균적인 [[산수]] 실력은 당시 기준으로 매우 뛰어났다는 점을 알 수 있는데, 서신에는 [[이자]]와 예치금을 비롯해서 [[소포]]의 [[무게]] 및 상품의 분할 관련한 내용이 많았다. 소그드인 무역 상인들은 단순히 물건만 들고 나른 것이 아니라 [[선하증권]]과 신용장을 읽고 썼으며 [[곱셈]]과 [[나눗셈]]에 능숙했던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도 [[계약]]을 성사시키고 집행하는 법, 투자자를 끌어들이는 법, [[환전]]하는 법, 수천 킬로미터에 걸쳐 이루어지는 복잡한 금융거래를 집행하는 방법을 이해해야만 했다. [[고대]] 소그드인들의 체계적인 무역과 [[금융]] 시스템은 [[중세]] [[이탈리아]] 북부 [[도시국가]]들의 금융업과 유사한 수준이었다. [[중앙아시아]]에서 이처럼 정교한 수준의 [[수학]]이 보편화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중앙아시아 [[대상]]들의 사회는 조그마한 강점이나 사소한 실수가 곧 손익을 결정하던 경쟁 세계였기 때문이다. 소그드인이 진출한 지역은 [[동아시아]] 외에도 [[동로마 제국]]을 포함한 [[유럽]]이 있었다. 트란스옥시아나의 소그드인들은 [[에프탈]]과 [[서돌궐]] 제국에게 안정적인 수입만 제공해 준 것뿐만이 아니라 [[도시]]에서 생산되는 여러 공산품을 직접 공급하고 [[외교관]]으로 봉사하는 등 이들 유목민들이 단순한 전사집단에서 국가로 성장하는데 막대한 기여를 했다. 소그드인은 태어날 때부터 [[아교]]를 바른다는 중국 [[속담]]이 있었을 정도로 장사에 수완이 좋았다고 전해진다. 새로 태어난 [[아기]]의 [[손]]에 부모가 아교를 바르고 [[금화]]를 쥐어주었다. 손에 들어온 [[돈]]을 아교 바른 것처럼 절대로 놓치지 말라는 의미에서였다. 또 [[입]]에는 [[꿀]]을 발라 주었는데 이것은 장사할 때 꿀처럼 달콤한 화술로 거래 상대를 뼛 속까지 휘어잡으라는 기원의 의미가 담겨 있었다고 한다. [[서돌궐]]이 소그디아나를 정복한 뒤에도 [[이란]] [[사산 왕조]]나 [[동로마 제국]]으로 보내는 [[사신]]으로 소그드인을 보냈다. [[당나라]]가 현 신강 지역에 튀르크 유목민들을 막기 위해 설치한 [[안서도호부]]를 [[위구르]]가 점령할 때 지원하였다. [[중동]]의 소그드인들은 정치적으로도 [[우마이야 왕조]]에 맞서 [[호라산]]의 [[압바스]] 세력을 후원시켜 [[아바스 왕조]] 성립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고 추정되는데 이는 최근에 제기되고 연구되는 가설로 아직 정설은 아니다. [[당나라]]에 체류하던 소그드인들이 [[안록산의 난]]을 지원했다 실패한 것과 대조적이다. == 지리적 요건 == [[파일:Sogdiana-300BCE.png]] 소그드인들은 오늘날의 [[타지키스탄]]의 [[후잔트]]를 중심으로 거주했으며 트란스옥시아나의 [[사마르칸트]]와 [[부하라]]가 이들이 거주하는 주요 도시로 소그디아나(소그디스탄)로 불렸였다. 특히 사마르칸드와 [[부하라]]를 비롯한 트란스옥시아나 남부는 [[토지]]가 기름져서 [[쿠샨 왕조]]의 개간 사업 이후 [[농업]]이 발달했고 수공업 또한 발전했다고 알려져 있다. [[세계]] 4대 발명품이라 불리는 중국의 발명품들과 [[유리]], [[향료]], 약재 등 뿐만 아니라 [[코끼리]]나 [[기린]] 등의 동물들까지 소그드인들을 통해 동서로 전파되면서 둘을 연결하는 [[실크로드]]의 역할을 충분히 해냈다. 그 덕분에 사마르칸트와 부하라는 그 당시 교역이 활발한 [[국제도시]]가 되었다. 훗날 이 지역들은 투르크족들이 이주해오면서 투르크족의 땅이라는 뜻의 '[[투르키스탄]]'이라고 불리게 된다. 다만 소그디아나 지역 뿐 아니라 다른 트란속사니아 서부, 호라산과 [[호라즘]], [[일리 강]] 유역, [[페르가나]] 계곡, [[알티샤르]]까지 합쳐서 투르키스탄이라고 불리게 된다. == 종교 == 소그드인들은 개방적이고 실리를 추구하는 종교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동로마 제국과 여타 [[유럽]] 국가에서는 [[기독교인]]처럼 행동하고, [[인도]]와 중국에서는 불자처럼 행동했는데, 이는 이들이 [[페르시아]]에서 유래된 [[마니교]]를 믿고 공부하면서, 여러 [[종교]]와 [[문화]]에 대한 기초 교양을 쌓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박학다식하고 개방적인 소그드인들은 인도의 [[불교]] 관련 문헌들, [[마니교]] 경전, [[조로아스터교]] 등의 여러 종교들을 중국으로 전달하는 등 여러 종교가 세계 곳곳에 전파되는 데 기여했다. 중국 [[당나라]]의 [[수도(행정구역)|수도]]인 [[시안시|장안]]에서도 조로아스터교 사원들이 다수 들어서 있었는데, 이 사원을 드나들던 신자들은 주로 장사를 하러 중국 땅으로 건너온 소그드인들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페르시아]] 출신 조로아스터교도들은 육로 무역보다는 해상 무역을 선호한 것으로 여겨진다. 당시 중국에서는 조로아스터교를 [[명교]](明敎)라 칭했다. == 소멸 == 이렇듯 동서를 연결하며 실크로드 역할을 해왔던 소그드인들은 8세기 무렵 [[이슬람]] [[무슬림]]화된 이후 [[9세기]] 무렵 [[페르시아]]계 [[사만 왕조]]에 편입되었으나, [[13세기]] [[중세 흑사병]] 창궐로 몰락하기 시작한다. 실크로드 교역의 절정기였던 13~[[14세기]]에는 소그드인들 대신 [[토하라인]]과 [[위구르 제국]] 투르크인 간의 혼혈 [[위구르인]]들이 등장해 위세를 떨치게 된다. 소그드인들과 다르게 [[몽골 제국]]과 친하면서 소그드인 못지 않은 교양을 지녔던 이들 위구르인들은 몽골 제국의 행정 [[관료]]로 활약하면서 [[유라시아]] 경제 자체를 통째로 주무르기도 하였다. 소그드인들은 14세기 이슬람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기도 하였으나 중앙 유라시아 전역이 이슬람화하고 이들도 마니교 대신 이슬람을 받아들임으로써 특색을 잃고 사실상 동화되면서 소그드인으로서의 [[정체성]]은 소멸되었다. == 후예 == || [youtube(fx5kEGbJ3FM)] || 오늘날 [[타지키스탄]]에 거주 중인 [[야그노비인]]이 소그드인의 직계후예로 여겨진다. 이들의 후손 중 하나인 [[타지크인]]들은 16~[[17세기]]에는 우즈베크인에게 말을 수입해서 [[파슈툰족]]에게 말을 되파는 제한적인 [[중개무역]]에 종사하게 되었으며, 이렇게 수출한 말들은 최종적으로 [[무굴 제국]]에서 아주 비싼 값에 거래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대항해 시대]]로 [[아시아]] [[대륙]] 내륙의 무역이 쇠퇴하고 [[18세기]] 중반부터 제국의 상태가 약해지면서 무굴 제국의 지주들의 재력이 감소하고 전략 물자로서의 말의 가치가 점점 감소하자, [[19세기]]에 실크로드 육로 무역은 붕괴되고 타지크인과 야그노비인들은 가난한 [[목동]]으로 전락해버렸다. [[러시아 제국]]에게 합병된 이후 [[타지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부하라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지배를 거쳐 오늘날에 이른다. [[파일:2DDEA4B1-DAAA-47DD-A97B-0BE1372B83EF.jpg|width=500]] 현대 [[타지키스탄]]의 [[수그드 주]] 야그노바 계곡 등에 거주하는 [[야그노비인]]의 [[야그노비어]]는 학계에서 종종 신 소그드어(Neo-Sogdian)라고 부르면서 관심을 표시하고 있다 한다. 야그노비인들은 구당서의 기록과 같이 지금도 아기가 태어나면 꿀을 먹이고 손에 동전을 쥐어주는 풍습을 유지하고 있다. == 여담 == * [[알렉산드로스 3세]]가 [[박트리아]]에서 부인으로 맞이한 [[록사나]]가 소그드인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 [[당현종]] 때에 [[안사의 난]]을 일으켰던 [[안록산]]의 아버지가 소그드인 출신으로 비정된다. * [[고구려]]의 [[온달]]과 [[온사문]], [[신라]]의 [[온군해]] 등의 성씨가 [[온(성씨)|온(溫)]]인 점을 들어서 소그드인 계통이 아니었나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 다만 이는 어디까지나 추정의 영역일 뿐이다. 적어도 신라의 온군해의 경우에는, [[김춘추]]가 당나라에서 귀국하던 중, 바다 위에서 고구려의 군사들을 만났을 당시 김춘추와 옷을 바꿔입고 대신 죽은 인물이다. 정말로 소그드인 계통이었다면 대대로 오랜 세월 혼혈되지 않은한 외모가 확 튀었을 텐데, 그랬다면 고구려인들이 속아넘어갈 리가 없다. * 위의 가설과 비슷하게 [[처용가]]에 등장하는 [[처용]] 또한 소그드인 혹은 [[서역]]인으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확실하지는 않다. * 8세기에 [[신라]]와도 교역을 하였는데 [[최치원]]의 [[속독]]([[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0395|束毒]])은 소그드인의 [[탈춤]]을 묘사한 것이다. * [[발해]] 유적지에서 소그드 주화가 발굴되고 있으며, 고고학적 연구 결과를 토대로 소그드인 공동체가 발해의 상공업에 있어서 중요한 일익을 담당하고 있었다는 가설이 힘을 얻고 있다. 발해에 머물던 소그드인들은 주로 발해의 특산품인 말과 [[모피]]를 당나라의 곡식이나 옷감과 교환하는 일을 맡아 보면서 발해 귀족들에게 여러 사치품을 공급하는 일을 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안록산이 [[절도사]]이던 시절 발해에서 수입한 말을 거래하는 일로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는 사서의 기록으로도 교차 검증 되는 내용이다. == 같이보기 == * [[마사게타이]] * [[소그드어]] * [[야그노비인]] * [[타지크인]] * [[토하라인]] [[분류:중앙아시아의 민족]][[분류:중국-타지키스탄 관계]]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