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손병선 (문서 편집) || 성명 ||손병선(孫秉善) || || 이명 ||이상헌(李相憲) || || 호 ||청계(淸溪) || || [[본관]] ||[[밀양 손씨]] || || 생몰 ||[[1895년]] [[1월 12일]] ~ [[1942년]] [[12월 11일]] || || [[출생지]] ||[[경상북도]] [[칠곡군]] 약목면 덕산리 || || 사망지 ||[[경상북도]] [[칠곡군]] || || 매장지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 || 추서 ||건국훈장 애국장 || [목차] == 개요 ==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 생애 == 손병선은 1895년 1월 12일 경상북도 칠곡군 약목면 덕산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렸을 때 성격이 곧고 영리했으며 한학에도 조예가 깊었다고 한다. 1919년 [[3.1 운동]] 때 칠곡군 일대에서 독립만세시위에 참가했고, 1920년에 독립운동을 목적으로 북만주로 망명한 뒤 독립운동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귀국하여 대구에서 [[서병철]]과 만나 이 문제를 논의한 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특파원 허영원(許永元)과 함께 경상북도 일대에서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했다. 이들은 영남지방의 부호인 박소용(朴韶鏞)에게 군자금 6천원의 헌납을 요구하는 등 4차례에 걸쳐 부호들에게서 군자금 모금 활동을 벌였다. 이렇게 2천원을 모은 뒤 상하이로 탈출하려 했지만 일제 경찰의 추적을 끝내 뿌리치지 못하고 체포되었고, 1921년 5월 24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공갈 혐의로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독립운동을 지속하기로 마음먹은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 [[이동녕]] 등과 여러차례 연락하면서 국내외를 연결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또한 1925년에는 임시정부 군무총장 [[노백린]]의 자금협조를 요청하는 지령서를 전달받고, 이를 김찬규(金燦奎), [[도병철]], 신태식(申泰植), [[신석원]] 등과 함께 인쇄하여 경상도 내의 부호들에게 배포하고 김찬규를 임시정부에 파견하여 독립운동의 방안을 협의할 것을 계획했다. 그러나 밀양에서 또다시 경찰에 체포되고 말았고, 이후 1년 6개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른 뒤 칠곡군에서 은거하다가 1942년 12월 11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손병선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그의 유해는 2008년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었다. 칠곡군청은 왜관읍 석전리 애국동산에 그를 기리는 기념비를 세웠다. [[분류:나무위키 독립운동가 프로젝트]][[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밀양 손씨]][[분류:칠곡군 출신 인물]][[분류:1895년 출생]][[분류:1942년 사망]][[분류:건국훈장 애국장]][[분류:국립대전현충원 안장자]]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